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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해 대림 제 2 주간 금요일. 2006. 12. 15. 토평동.
이사 48, 17-19. 마태 11, 16-19.
어제 TV를 보는데, MBC에서 ‘에너지’란 프로그램을 방영하고 있었습니다. 테마를 주고 출연자들이 각자 어느 한 견해 쪽에 서서 토론을 벌이는 토크 버라이어티 쇼입니다. 자신의 의견을 낼 뿐만 아니라 반대쪽에 있는 이들을 설득해서 자기 쪽으로 끌어들이죠(잠시 보아서 확실하지 않지만). 그런데 상대방을 설득할 때 ‘설득의 의자’에 앉히고 가까이에서 그럴싸한 말로 상대를 설득하는데, 출연자의 의견에 의하면, 멀리 떨어져 설득할 때보다 가까이에서 설득하는 것이 훨씬 더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가까이 있으면 말에 좀더 마음을 담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좀더 가까이 가면 상대의 마음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멀리서 추측하고, 단정지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열고 가까이 다가가 상대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면, 나는 상대를 좀더 순수하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마태 11, 16)
랍비들은 이런 표현을 자주 썼습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세대, 이 세대는 과연 무엇과 같은가? 세대를 통찰해보려는 랍비들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물음인데, 저는 예수님의 이 물음을 통해서 당신이 오신 이 세대에 좀더 가까이 다가가려는 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과는 달리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마음으로 함께 하지 않았고, 그 행동이나 가르침의 뜻이 무엇인지 알려 하지 않으면서 멀리서 자신의 것만을 고집하고 있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살던 그 세대가 좀더 관심 있는 마음으로, 자신을 열고 세례자 요한에게 다가갔다면 그를 맹목적인 금욕주의자로 몰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이 마음을 열고 예수님께 다가갔다면, 예수님이 마냥 놀고먹는 한량은 아니라는 것을, 종교의 질서를 파괴하는 급진적 자유주의자가 아니었음을 알았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벽은 결국 자신에게 순수하지 않은 채, 다른 이들에 대해서도 가까이 다가가지 않는 자기 고집에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예를 드시죠. 잔치놀이를 할 때 피리를 불고 춤도 추지 않으면서 훼방을 놓는 심술쟁이 아이들처럼, 장례놀이를 할 때 곡을 해도 가슴을 치지 않는 고집쟁이 아이들처럼,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그랬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도무지 신이라도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당신이 아무리 가까이 다가오셔도 자신의 마음을 열지 않고, 단단히 벽을 쌓는 이들에게는 기적도 소용이 없는 것이죠. 그래서 예수께서는 오늘 말씀 이후에 당신이 그토록 많은 애정을 가지고 기적을 베풀었던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에 분노를 표출하시는 것입니다.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그리고 좀더 가까이 다가가야 합니다. 주님께 가까이 다가가 그분께서 무엇을 가르치시는지, 어떤 마음인지를 느껴야 합니다. 그분은 우리를 보시면서 당신의 내장이 즉 전 존재가 하나되는 사랑을 보이셨는데, 우리는 멀찌감치 떨어져 있다면 그분의 마음을 알 수 없지 않겠습니까? 이유 없이 반항하거나 벽을 쌓지 말고 주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 머무르며 배워야 합니다. 느껴야 합니다.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마태 11, 16)
과연 이 세대, 이 공동체, 나는 무엇에 비길 수 있을까요? 예수께서 나를 바라보실 때 나는 어떤 모습이어서 무엇에 비길 수 있다고 말할까요? |
다해 대림 제 2 주간 금요일./“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 조성호 신부님
2006. 12. 15. 오전 9:2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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