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과. 보이는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
예수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분을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합니다. 예수그리스도로 받아들여 은총의 생활을 하고 있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그 이름에 흠집을 내려고 온갖 비방을 일삼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는 아기 예수를 성전에서 봉헌할 때 시므온이 예언한 그대로입니다. "이 아기는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넘어뜨리기도 하고 일으키기도 할 분이십니다."(루가2,35)
어쩌면 당신 역시 아직도 예수님에 대해 의심하거나 확신이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런 당신에게 예수님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고독한 생애를 살았던 풍운아 예수
로마 제국의 식민지 이스라엘의 조그마한 마을에서 태어난 사나이, 목수의 아들로 평범하게 지내다 서른 살이 되었을 때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집도 절도 없이 지방을 떠돌며 3년을 보낸 설교자, 남들이 천대하는 죄인, 세리, 창녀, 어부들과 어울려 다니며 그들에게 행복을 설파했던 예수.
그러나 그는 단 한 권의 책도 남기자 않았고, 가정을 이룬 적도 없었으며, 사회적 지위나 명예도 없었고, 이력서에 적어 넣을 만한 경력도 없었습니다. 그가 내어 놓을 수 있는 것은 단지 알몸뚱이 하나였습니다.
얼마 가지 않아, 세상은 그를 적대시하기 시작했고, 제자 한 명이 그를 배반하였으며, 친구들은 다 도망쳐 버렸습니다. 적의 손에 넘겨져 형식적인 재판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혀 두 명의 강도 사이에 세워졌습니다. 유일한 재산이었던 몸에 두른 통옷마저 제비뽑기로 빼앗기고 죽었으며, 시체는 내려져 빌린 무덤에 눕혀졌습니다.
2천년이 지나고 오늘날 그는 인류의 중심입니다.
일찍이 세상을 지배했던 왕들과 불세출의 영웅들, 사람들의 생각을 지배한 학자들과 천재들을 통틀어 한데 모은다 하더라도 인류의 생활에 끼친 영향력에 있어서는 그 고독한 생애(生涯)에 도저히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구상(1919-2004)시인은 다음의 시에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일생을 사실대로 압축하여 다음과 같이 그려 줍니다.
나자렛 예수
나자렛 예수! / 당신은 과연 어떤 분인가?
마굿간 구유에서 태어나 / 강도들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 기구망측한 운명의 소유자
집도 절도 없이 떠돌아다니며 / 상놈들과 창녀들과 부역자들과 / 원수로 여기는 딴 고장치들과 / 어울리며 먹고 마시기를 즐긴 당신,
가난한 사람들에게 / 굶주린 사람들에게 / 우는 사람들에게 / 의로운 일을 하다 미움을 사고 / 욕을 먹고, 쫓기고 / 누명을 쓰는 사람들에게 / '행복한 사람은 바로 당신들'이라고 / '하느님 나라는 바로 당신들 차지' 라고 / 엄청난 소리를 한 당신.
소경을 보게 하고 / 귀머거리를 듣게 하고 / 앉은 뱅이를 걷게 하고 / 문둥이를 말짱히 낫게 하고 / 죽은 사람을 살려내고도
스스로의 말대로 / 온 세상의 미움을 사고 / 욕을 먹고, 쫓기다가 / 마침내 반역자란 누명을 쓰고 / 볼 꼴 없이 죽어 간 철저한 실패자,
내가 탯줄에서 떨어지자 맺어져 / 나의 삶의 바탕이 되고, 길이 되고, / 때로는 멀리하고 싶고 귀찮게 여겨지고, / 때로는 좌절과 절망까지를 안겨주고, / 때로는 너무나 익숙하면서도 / 생판 낯설어 보이는 당신, / 당신의 참모습은 과연 어떤 것인가?
당신은 사상가가 아니었다. / 당신은 도덕가가 아니었다. / 당신은 현세의 경륜가가 아니었다. / 아니, 당신은 종교의 창시자도 아니었다.
그래서 당신은 어떤 지식을 가르치지 않았다. / 당신은 어떤 규범을 가르치지 않았다. / 당신은 어떤 사회혁신 운동을 일으키지 않았다. / 또한 당신은 어떤 해탈을 가르치지도 않았다.
한편 당신은 어느 누구의 / 과거 공적이 있고 없고를 따지지 않았고 / 당신은 어느 누구의 / 과거 죄악의 많고 적음을 따지지 않았고 / 당신은 실로 이 세상 모든 사람의 / 생각이나 말을 뒤엎고 / '고생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 허덕이는 사람은 / 다 내게로 오라. /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고 / 고통받는 인류의 해방을 선포하고
다만, 하느님이 우리의 아버지시요, / 그지없는 사랑 그 자체이시니 / 우리는 어린애처럼 그 품에 들어서 / 우리도 아버지가 하시듯 서로를 용서하며 / 우리도 아버지가 하시듯 다함없이 사랑할 때
우리의 삶에 영원한 행복이 깃들이고 / 그것이 곧 '하느님의 나라'라고 가르치고 / 그 사랑의 진실을 목숨 바쳐 실천하고 / 그 사랑의 불멸을 부활로써 증거 하였다.
(구상, <두 이레 강아지만큼이라도 마음의 눈을 뜨게 하소서>중에서)
이렇듯이 예수님께서는 2000여 년 전, 인간의 역사 안에 실제로 사셨습니다. 또한 모든 인류를 구원 하시고, 우리들을 죄와 죽음에서 건져내시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 당신 자신을 바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시고 하느님께 올라간 이후 당신을 찾는 이들과 항상 함께하여 주십니다.
그리스도와 메시아
세상 사람들은 흔히 예수 그리스도를 그냥 한 이름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만 이름이고 그리스도는 '직함'입니다. 이를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것이 다음의 성서 구절입니다.
"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이 예수를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주님이 되게 하셨고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습니다"(사도2,36)
여기서 '예수'와 '그리스도'가 독립된 별개의 두단어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예수'는 단순히 사람의 이름인 반면에 '그리스도'(메시아)는 직분을 가리키는 호칭이라는 것이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예수'는 역사상 실존했던 한 인물의 이름에 지나지 않으나, '그리스도'는 그 인물의 삶을 통해서 드러난 역할에 대한 평가를 반영하여 그 인물에게 붙여 준 직명(職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 그리스도'라는 두 단어로 된 칭호는 "예수님이 구세주이시다"라는 신앙고백인셈입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는 복음과 신약성서의 압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메시아'를 그리스도로 번역한 것이 그리스도(Chrictos)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가 바로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를 메시아로 불렀고 그 밖의 이방인들은 그리스어로 '그리스도'라 부르게 된 것입니다.
패션(Passion)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의 표적이 되어 수많은 고통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고통을 당하셨는지는 2004년도 봄에 개봉했던 '그리스도의 수난'(The passion of the Christ)이라는 영화를 보면 어느 정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지만 우리 인간들의 죄를 사해 주시기 위하여 스스로 속죄물이 되셨던 것입니다. 이를 이사야 예언자는 다음과 같이 풀어 말해줍니다.
"그는 고통을 겪고 병고를 아는 사람, 사람들이 얼굴을 가리우고 피해 갈 만큼 멸시만 당하였으므로 우리도 덩달아 그를 업신여겼다. 그런데 실 상 그는 우리가 앓을 병을 앓아 주었으며, 우리가 받을 고통을 겪어 주었구나,.... 그 몸에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를 성하게 해 주었고 그 몸에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의 병을 고쳐 주었구나"(이사53,3-5).
이렇듯이 예수님의 죽음은 단순히 어느 한 사람의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은 결코 끝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흘 후 부활하심으로써 그분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과 같이 죽음을 이겨 낼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부활, 그것은 바로 예수님 사랑의 결정체이면서 우리에게는 새로운 희망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죽었다가 부활한 첫 사람이 되셨습니다. 죽음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온 것처럼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왔습니다. 아담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살게 될 것입니다."(1고린 15,20-22)
예수만이 그리스도일까
예수가 그리스도라면 부처는 무엇이며 누구일까요? 부처는 그리스도가 될 수 없을까요? 예수만이 그리스도일까요?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 부처(곧 붓다 고타마)와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비교할 필요가 있습니다(한스 큉,<믿나이다>참조).
우선 부처는 깨달음을 통해(이미 현세의 삶에서도 가능한) 열반에 이르렀고, 그 후에도 죽음을 거쳐 궁극적인 열반(parinirvana)에 들 때까지 수십 년을 더 살았습니다. 깨달은 자 부처는 슬픔과 괴로움에서 온전히 자유롭지는 못했지만, 맑은 의식을 지니고 조화롭고 성공적인 삶을 살아서 마침내 권력자들의 존경까지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의 가르침은 빠르게 퍼져 나갔고, 제자들의 숫자는 셀 수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는 80세라는 고령에 제자들에게 둘러싸여 평화롭게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오늘날에도 불상(佛像)은 그의 평정, 명철(明哲), 평화, 깊은 조화, 나아가 그의 밝음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비교하건대, 나자렛 예수는 전혀 다른 면모를 보여 줍니다. 그의 공생애는 수십 년은 커녕 기껏해야 3년, 그것도 시종일관 종교 기득권자들 및 정치적 세력과 목숨을 건 갈등으로 점철된 팽팽한 긴장의 생애였습니다. 그의 일생은 결국 체포와 채찍질, 그리고 마침내 잔혹하고 수치스러운 십자가형으로 끝나는 고통의 역사입니다. 실패? 어쨌든 그의 삶에서 성공의 흔적은 찾을 길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전해진 이야기에 의하면, 그는 '경멸 받은 자', '법적인 보호를 박탈당한 자', 그리고 '저주 받은 자'로서 십자가형에 처해져 죽었습니다. 극심한 고통과 고독속에서의 최후, 어머니와 친척들로부터 고립되고, 제사와 추종자들에게 배반당하고, 그의 하느님께도 공공연히 잊혀진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예수가 마지막 남긴 모습은 그저 철저하게 고통당하는 자의 모습이었습니다.
동정을 베푸는 게 아니라 오히려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는 사람, 한없는 헌신과 사랑 안에서 고통 받는 자 예수는 넉넉한 평정 가운데 자비와 호의를 베푸는 부처와는 젼혀 다른 면모를 보여 줍니다. 소위 신성(神性)이 만발하여 신적인 경지에 이르렀다는 종교 창시자들, 모든 종교적 천재와 스승들 그리고 세계 역사의 영웅과 황제들과, '나자렛 예수'는 확실히 같은 반열(班列)이라 볼 수 없습니다. 고통당하는 자, 처형된 자, 십자가에 달린 자로서 예수는 뚜렷이 독특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이 독자성을 보다 넓은 안목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무모한 듯하지만 세 가지 큰 고등 종교체계와 비교해 보겠습니다.
-셈족 계열에서 유대교를 창도한 모세와 이슬람교를 창도한 무하마드는 공히 예언자적(豫言者的)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예언자적'이라는 말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계시(啓示)에 의존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율법의 카리스마적 선포자요 출애굽의 지도자였던 모세와 다르며, 아라비아의 백전백승의 유일신 신앙 정신을 지닌 예언자요 군사령관인 무하마드와도 판이합니다. 예수에게 '예언자'적인 모습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예수에게는 이를 넘어서는 다른 것이 있었습니다. 곧 예수는 계시 받는 것을 전한 자가 아니라 당신 자신이 하느님의 '계시'였습니다. 예수의 삶 속에 하느님이 드러났습니다.
- 인도 계열에서 불교를 창도한 부처(붓다 고타마)는 신비가적(神秘家的)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신비가적'이라는 말뜻은 명상을 통한 내면의 깨달음을 지향한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내면성과 전일성(全一性)의 정신 안에서 눈과 귀를 닫고 있는 신비가(神秘家) 부처와 예수는 다릅니다. 부처에 비교할 때 예수는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 것이 아니고 '하늘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극동 계열에서 유교를 창도한 공자와 도교를 창도한 노자는 현자적(賢者的)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조화와 인도주의 정신을 지닌 원숙한 현인(賢人) 공자 및 노자와도 예수는 다릅니다. 이들이 자연과 인간의 본성에서 지혜를 터득하였다고 한다면 예수는 하늘에서 내려온 로고스(그 ; logos), 곧 말씀 자체(= 지혜)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그 다름을 우리는 '예언자적', '신비적', '현자적', 이라는 표현과 대조하여 '자기 비허적'(自己 脾虛的, 그 ; kenosis)이라고 조심스럽게 언표해 볼 수 있겠습니다. 예수의 강생(降生)과 십자가를 동시에 함축하는 말이 이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비허'는 이미 '하느님'이 아니었다면 전혀 의미를 지니지도 못하고 또 가능하지도 않았다는 심오한 의미를 지니지도 못하고 또 가능하지도 않았다는 심오한 의미를 지닙니다. 즉, 끊임없이 내려오고 쉬지 않고 비워도 여전히 높으신 분이며 충만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른 점입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 지도자들은 더 높은 경지에 오르려고 위를 쳐다보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더 낮은 사람들을 품으려고 아래를 내려다봤다는 점이 다른 것입니다.
실천하기
교회는 신앙의 내용을 압축하여 사도신경(使徒信經)을 고백합니다. 12사도의 신앙고백에서 기원한다 하여 '사도 신경'이라 불렀습니다. 오늘까지 배운 내용은 사도 신경에 다음과 같이 요약되어 있습니다.
"전능하신 천주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저는 믿나이다.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님,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시고 본시오 빌라도 통치 아래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저승에 가시어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하늘에 올라 전능하신 천주 성부 오른편에 앉으시며 그리로부터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믿나이다."
이를 당신이 할 수 있을 만큼 외워 보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