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신도 사도직에 관한 묵상
(“The Layperson As Disciple: A Meditation On Simple Words”)
Source: “Spiritual Life, Summer 2002”
By: James Keating, Ph.D.
“가톨릭 노동자 운동”의 창시자인 도로시 데이는 그녀의 종교적인 영성을 사회개혁운동과 결합시킨 평신도 여성으로 존경을 받고 있는데, 그녀의 사회개혁 방법은 서구 문화에서는 보기 힘든 것이다. 가난한 사람의 고통에 대한 그녀의 우려의 목소리는 천주교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 자신의 소명이라는 강한 직감에서 연유된 것이다. 그녀에게 교회는 단지 영적인 공동 관심사를 가진 친구들의 선택적인 모임이 아니라, 우리 영의 생명을 끌어내는 그리스도의 몸이었다. 이 영의 생명은 성사와 (그녀는 매일 미사를 보았다) 우리안에 사는 그리스도에게 기도를 봉헌함으로써 주어지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리스도에게서 눈을 떼지 않음으로써,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봉사라는 열매를 맺었으며, 또한 그들의 필요에 따라 그들과 함께 지속적으로 있을 수 있는 버팀목이 되었다.
도로시 데이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평신도 여성이었다. 그리스도는 그녀 삶의 정 핵심에 머물어 있었으며, 그 핵심에서 그녀의 행동이 펴져 나와 문화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평신도는,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하느님의 구원을 암시적으로 확증하고 동시에 복음을 전파하는 행위을 통하여, 이 구원의 원천을 세상에 들어내 보이고 강력하게 만듬으로써 신앙의 증인이 되는 것이다. 평신도들의 삶의 다양성 때문에, 모두다 도로시 데이같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급진적인 운동을 하도록 불림을 받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사도직을 수행함에 있어서, 평신도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삶의 중심에 있어야 한다. 이 관계가 평신도가 성화되는 유일한 장소인 세속에서, 보다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활동에 둘도 없는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도로시 데이는 급진적인 거리의 행동주의자의 삶을 뒤로 하고 천주교의 믿음을 받아들이면서,이념을 행동화 하는데 있어서 전략과 신념만에만 중심을 두었던 삶을 포기하고 관상적인 사도의 삶을 받아 들였다.
그녀는 자신의 전향을 이렇게 이야기 한다.
“나는 그들과 일했던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그 사람들은 좋은 사람들이었으며, 그들은 옳은 생각을 하고 있었으며, 그들의마음은 항상 깨어 있었다. 내가 후회하는 것은 우리가 했었던 것, 우리가 믿었던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거의 그런 운동을 함데 있어서, 기술과 전략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 나는 내가 왜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지,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다른 관점을 갖게 되었으며, 왜 나는하느님을 우리가 하는 모든 것에 함께 하시도록 하야야 하며, 우리의 결정 과정에 하느님을 참여시켜야 한다고 주지시키는 이유이다. 또한 내가 왜 우리가 이야기 할 때나, 희망을 가질 때나, 계획을 세울 때나, 걱정근심에 있을 때도, 나는 항상 기도하는 마음으로 있는 이유이다. 그래서 나는 하느님을 말씀을 들으며, 교회에 가서 내가 들었던 것을 상기 한며, 또한 예수님이 어떻게 세상을 살았으면, 그가 만나 사람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를 생각한다.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나야 하는지가 나의 마음속에 솟아난다.”
이 도로시 데이의 말이 사도직을 함축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평신도의 삶은 그리스도가 선택된 사람들을 부르시는 일반 성소를 포함한다. 이 성소내에서 각자는 특별한 부름심을 받으며, 그리스도내에서의 자신의 삶의 형태를 발견한게 된다. 그 삶의 형태는 결혼을 하거나, 혼자 살거나 또는 종교적인 선서의 삶일 수도 있다. 이런 다른 삶의 형태를 마음에 두고, 나는 도로시 데이가 위에서 요약한 관상적인 사도의 삶에 관한 시각에 힘입어 평신도의 삶에 접근하려고 한다. 이것은 일반적인 이야기가 될 것이며, 이떤 특수한 부르심에 관한 묵상은 다른 글을 필요로 할 것이다.
*** 사도직의 체험
평신도는 그리스도의 세가지 역할 – 사제, 예언자 그리고 왕 – 중에서 왕의 역할을 담당한다. 이 왕의 역할은 이 세상의 모든 일들에서 죄의 권세를 박멸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평신도는 은총속에서 우리 사회의 문화적 그리고 도덕적인 변화를 촉진하도록 불려진 것이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에 바탕을 둔 이 왕직을 살면서, 믿는 사람들은 함께 하느님게 경배를드리고, 봉사를 하며, 증거를 하면서 사회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긴다.. 도로시 데이는 자신이 전에는 어떤 것을 중심을 두고 살았는지 그리고 천주교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한 후에는 무엇에 초점을 맞추었는지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녀는 “기술과 전략”에만 집중하던 삶에서 삶에서 우리가 하는 모든 것 그리고 모든 결정 과정에 하느님을 참여 시키는 삶으로 옮겨갔던 것이다. 이것은 단지 한 사람의 행동이 아닌 성격자체도 변한 근본적인 변환인 것이다. 이 결과로 산발적인 아이디어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하느님의 현존에 의지하는 새로운 중심이 탄생하게 된다. 동일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도리시 데이에게는, 사도직은 정치적인 이념과 행동하에서 생각하고 살던 삶에서, 생각과 행동을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느님의 사랑에 바탕을 두는 삶으로의 변화부터 시작한다.
사도직은 근본적으로 개인적인 것이지만, 어떤 초월적인 것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사도직이 물론 많은 의문과 이념을 발생하게 하지만, 단지 어떤 철학적인 이념을 소지 하는 것만으로 축소되어서는 않된다. 또한 사도직은,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대중앞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단지 어떤 사회 운동만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도로시 데이는, 그녀와 사회운동을 같이 하던 사람들이 좋은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은 아직 그리스도를 볼 수 없었다고 강조한다. 하느님이 우리 삶의 중심이고 우리가 하느님의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 다고 해서 , 그 놀라움에 우리가 마비가 되어서 대중앞에서 하느님의 증거자가 되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 이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생기는 놀라움은 우리를 마비시키지 않으며 오히려 우리를 활동하게 한다. 교회를 통한 하느님과의 깊은 만남을 통해서 평신도는 세상에 파견되는 것이다.
*** 사도직은 교회내에서 탄생되며 유지된다.
사도직은 어떤 행동을 마음에 두고 있지만, 그 행동은 정치철학이나, 이념이나, 기술과 전략에 그 그본을 두고 있지 않으며, 교회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을 향한 사랑에 그 근본을 두고 있다. 하느님의 체험이 그 후에 따르는 활동이나, 연구 또는 교리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중심이 된다. 이 체험은 혼자만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어떠한 고립으로 이끌지도 않는다. 오히려, 이 체험은 우리의 하느님과이 관계에서 생겨나서, 어떤 사람을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도록 이끌어 준다. 이 모든 체험은하느님에 대한 경배와 교리를 통하여, 이미 존재하고 있는 교회내에 자리하게 되고 묵상되어진다. 하지만, 또한 이러한 묵상적이고 우리의 생각을 자극하는 체험들이, 교회자체가 자신과 자신의 교리를 모다 깊고 넓게 이해할 수 있는 씨앗이 되고, 더 나아가서 교회가 교리를 개발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는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체험은 생명을 공급하기도 한다. 그것은 그 체험이 나의 것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고, 살아있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내에서 살아 숨쉬고 있는 진리의 반영이기 때문이다. 도로시 데이는 매일 교회에 참여 하는 것이 절실하게 필요함을 깨달았다. 그녀는 매일 교회에 가서 기도를 하고, 매일 미사에 참여 하였으며, 다른 사람을 위한 봉사를 했다. 그녀는 그녀 자신의 마음에서 발생한 하느님을 찾고 타인을 위한 봉사에 관한 욕구가 이미 존재하고 있는 교회내의 생활에서 충족됨을 발견했다. 천주교로 전향한 후에, 그녀는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에 자신의 자리를 하나 차지 하였다. 그 자리는 우리 모두의 자리이면서, 또한 그녀 자신의 고유한 자리인 것이다.
*** 부르심
그리스도의 사도로 불림을 받았다는 것은 단지 보다 나는 사람이 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물론 그런 부르심을 포함하지만, 오히려 그리스도안에서, 그리스도를 바탕을 두고 그리스도와 함께 이루는 하나의 공동체에 입적됨을 의미 한다.
이 부르심의 종착역 또는 목적은 어둠속에서 들은 것을 밝은 내낮에 선포해야 하는, 대중앞에서 주님을 증거하는 몸체를 형성하는 것이다. 구원은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공동체를 이룬 개개인에게 주어지는 것이며, 이 공동체를 통하여 세상에 주어지는 것이다. 윌리암 스폰은 부르심의 공동체적 성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열두사도의 선택은 예수님이 수세기 동안 무너져 있었던 원래의 이스라엘을 자신의 주위에 재건설하고 있었다는 확실한 신호였다. 이 부르심을 개인신앙을 강조하는 면에서 본다면, 예수님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는다는 면만 볼 수 있겠으나, 좀 더 역사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이 부르심은 고유한 새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것이라고 하겠다. 이 역사적인 의미는 정치적으로 볼때 그 당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에게서도 외면되지 않았었다.”
사도들은 단지 자신의 성화만이 아니고 세상에 생명의 열매를 맺도록 불리워 진 것이다. 사실상, 평신도는 그들의 마음이 다름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기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바친 그리스도의 순종의 마음에 맞추어 지지 않는다면, 자신의 성화를 이룰 수 가 없다. 평신도는 미덕의 삶을 살면서, 도덕적이고 영적인 증거자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평신도는 그들이 같이 일하고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삶에 침투할 수 있는 것이다.
*** 선교
자신과 세속적인 세상의 변화는, 은총이 충만한 평신도가 세상에 존재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도로시 데이가 위에서 언급했듯이, 그리스도에 삶에 맞추어 살면 무슨일이 일어날 것이지데 대해 평신도는 식견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로 세상의 문화를 바꾸는 것은 평신도라고 명시 되어 왔다. 평신도의 활동은 예술, 연예 또는 스포츠뿐만이 아니고 정치, 의료 그리고 경제의 활동에서 공정하고 올바른 행동양식을 정립하는 데에 방향을 맞추어 가야 한다. 또한 오락, 학문이나 가족생활은 평신도 고유의 활동영역이 된다. 사도로서 평신도는 글자그대로 동료시민들 사이에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도록 파견되어진 것이다. 이런 평신도의 선교 활동은 성직자가 없는 곳에서 이루어 진다. 성직자가 없다는 것은 성직자가 할 일을 못해서 실패하거나, 절대 적인 수의 부족에서 생기는 현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성직자가 보통있지않는 곳 말하자면, 기업이나, 의료계나, 노동자의 현장을 이야기 한다. 이런 곳이 바로 평신도가 있는 곳이며 그렇게 말하는 것이 옳다. 이러 곳들이, 몇몇 예외적이니 경우를 제외하고는, 평신도 만이 하느님의 왕국을 건설하려고 노력할 수 있는 곳이다.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 있다. 만일 은총을 가득히 받은 평신도가 하느님 사랑을 대중앞에서 증거하지 못한다면, 사람이 어떻게 하느님의 복음을 들을 수가 있으며 그 복음대로 사는 것을 볼수있겠는가? 수동적인 평신도가 있다는 것은 그가 활동하는 모든 대중 공간에서 성화된 증거자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사회적 조건을 묵과하는 것은 하느님의 은총이 문화권내에서 들어 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는 것이다.
*** 순명
사도가 된다는것은 예수님의 행적을 서투르게 흉내내는 것이 아니며, 성령이 우리의 마음을 주관하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도로시 데이가 한 말들 – “하느님을 우리가 하는 모든 것에 함께 하시도록 하야야 한다.” 또는 “하느님을 우리의 결정과정에 참여 시킨다” – 은 매우 중요하다. 사도는 자신의 능력한도 내에서 사회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지니기를 갈망한다. 사도의 영혼은 성령의 움직임에 반응하도록 만들어 지며, 또한 취약하기 때문에, 도덕적이고 신학적인 미덕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서 부르심에 합당한 모습의 되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하느님의 현존은 하느님의 말씀을 영적으로 경청함으로써 또는 그 말씀에 순명함으로써 강화된다. 사도는 인간의 마음에 그리고 교회의 핵심에 내재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성령의 감화를 받기를 원하다. 순명은 모든 사도가 다시 찾아야 하는 미덕이다. 순명은 부르심의 원천에 있는 것이며, 사도가 성화의 과정에서 길을 잃었을 때 다시 원천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도로시 데이는 평신도의 삶에 필수 불가결한 미덕인 순명을 네 가지 성격으로 나누어 놓았다. 그것은 바로 – ‘나는 듣는다, 나는 간다, 나는 기억한다, 나는 생각한다.’ 도로시 데이는 이렇게 이야기 한다- ‘나는 하느님을 말씀을 듣는다. 나는 교회를 간다. 나는 내가 들은 것을 기억한다. 그리고 예수님이 어떻게 세상을 살았는지 생각한다.” 그녀의 듣는것과 생각하는 것 그리고 기억하는 것이 다 행동으로 이끈다. 순명은 “와서 따르라”하는듣고 부르심을 듣고, 자신의 신앙과 상황에 따라행동으로 옮기는 것이다. 이 목소리는 사도들 자신의 내적의 모든 목소리에 우선한다. 사도들은 하느님이 말씀을 들으려고 수날을 보내곤 한다. 이런 순명은 자신의 의지를 하느님이 뜻같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참 진리를 참을 성있께 기다려 받는 것이다. 진리를 듣는 것은 진리를 따르는 것으로 이끌어 지는 데, 이것은 진리가 바로 그리스도의 인성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사도들의 열망하는 것은 우리를 하느님과 하나게 되는 하는 말씀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듣고 순명함으로써, 교회의 구성원은 세속에서 그리스도의 임무를 계속해 가는 것이다.
*** 기도
이 들음과, 교회에 가는 것, 기억하는것과 생각하는 것은 사도의 핵심적인 요소인 “기도”와 조화를 이루는 요소들이다. 내재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개인적인으로 필요불가결한 것이지만, 공동체의 하느님에 대한 경배와 조화를 이루어야 되며, 공동체의 경배는 또한 동시에 개인적인 헌신을 강화시킨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특정한 실리적이 목적을위해 하는 것에 대해 경고를 하지만, 여심할 여지가 없이, 기도가 사람들의 삶에 열매를 맺어 준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 기도에 항상 응답이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신학적으로 불완전할 것이다. 하지만, 경험에 의하면,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노력하는 사도는 종종 응답을 받으며, 자신의 미덕이 보다 강화되었음을 알게되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기도를 자신만을 위한 것으로 축소하는 것은 맞지 않은일이지만, 기도가 기도하는 사람에게 긍정적인 효과를 준다는 것은 옳은 말일 것이다. 이것은 기도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힘의 영향을 받고 싶이하기 때문에 사실이다. 이것이 바로 기도의 목적이다, 즉, 공동체와 그 구성원을 하느님과 하나게 되게 하는 것이다.
*** 공동 의식
기도가 하느님과의 일치가 목적이기 때문에, 하느님이 한 사람에게 영향을 주게되면, 그 사람은 세상에서 그런 영향을 드러내는 위치에 놓여지게 된다고 기대할 수 있다. 기도의 목적은 기도하는 사람에게 활력을 주어 행동을 위한 준비를 시켜준다고도 이야기 한다. 기도의 열매인 행동은 예수님이 하느님에게 십자가를 거두어 달라고 기도한 게세마니 동산의 고뇌를 우리의 마음에 가져다 준다. 그리스도는 또한 자신이 원하는 것이 들어 지지 않으면, 아버지의 뜻을 굳은 믿음으로 성취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한다. 기도는 하느님의 자녀라는 우리의 가장 그본적인 정체성을항하여 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리고 그것을 잠시 바라보는 것이다. 이 바라보는 상태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보다 확실히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과의 일치를 통해서 자기자신을 보다 안전하게 소유할 수 있게 된다.
사도는 하느님과 자신사에 버나드 로노그렌이 “공동의식”이라고 부른 것을 놓으려고 노력한다. 공동의식 이란 부부간이 일생동안의 사랑안에서 가치관과 미덕을 공유함을 의미한다. 이렇게 다를 사람과 하나가 되면서도, 확실한 자신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도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결혼한 부부가 상대방의 마음을 소유하면서도 자신 개인의 의식과 고유한 모습을 유지하듯이, 그리스도의 마음을 소유해야 한다. 결혼한 부부는 그들의 마음과 영과 삶이 하나가 되어야만, 진정한 “결혼”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결혼한 부부의 공동의식의 의미를 되새기면, 우리는 우리의 영혼은 신부이고 그리스도를 신랑이라고 부르는 신비스럽고 예로부터 내려오는 표현을 대면하게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의 참 정체성과 영혼의 깊이 정도에 따라, 하느님과 하나됨을 찾는다. 이 하느님과의 결합으로 부터 사도직의 삶과 세상에 대한 임무가 흘러 나오게 된다. 사도는 단지 그리스도와 사도간의 사랑을 반영하는 행동을 무분별하게 흉내내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고같이 생각하고 그리스도같이 되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 사랑은 우리 마음 깊숙히 있으며, 교회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며, 사도의 의식과 마음이 현세대의 시끄러운 목소리 중에서 오로지 그리스도만을 들으려고 하면 할 수록 더욱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것이다.
도로시 데이는 그녀는 예수님과 예수님이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았나를 항상 생각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관상에 의한 기도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교회와의 공동의식을 한층 더 심화시킨다. 하지만, 사도와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관계는 아주 특정한 것이며, 단지 세속의 현실을 거부한다고 해서 어떤 사회적인 방법으로 복제되어 지는 것이 아니다. 사실상, 성교회가 세속의 세상과 공존할 수 있는 것은 단지 교회가 아닌 세계가 있기 때문이다. 이 지구상의 세속의 사도는, 하느님과의 통교속를 통하여 완성되고 임무를 성취하지만, 이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다.
사도는 그들은 성화로 초대하는 성령의 감화를 받아 하느님의 현존을 세속에 가져오지만, 이것은 어다까지나 대가없은 제공되는 것이다. 어떤 사회적인 변환은 강요된 사회변화로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며, 자유와 지식으로 성취되는 것이다. 세속적이 것과 신성한 것의 차이는 그대로 있다. 그것은 서로가 반대 되는 것이기 때문이 아니고, 우리의 자유의지로, 예수님의 육화속에서 형성된 대로 하느님과의 긍극적인 결합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앎으로써, 두 세계는 같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임즈 형제는 이렇게 경고하였다.
“어떤 정치정인 행위나 정책을 하느님의 뜻이라고 명확하게 성화시키는 것은 신성한 정책을 만들 위험을 안고 있으며, 이런 경향이 이십세기에 엄청난 불행을 가져다 주었다. 신성함과 세속적인 것을 교차시키지 않고 그 차이를 유지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두 세계가 서로 교차하는 것이 아니며, 신성함은 세속적인 것의 성사적인 형태이다. 다시 말하면, 신성함은 세속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 선교적인 행위
도로시 데이는 깊은 생각에 잠기며 말한다 – “나는 예수님과 예수님이 어떻게 삶은 살았나”를 생각한다.” 내적이 삶은 행동으로 이끌어 진다. 이 행동은 바로 “예수님이 어떻게 삶을 살았나”를 반영한다. 위에서 말한 바같이, 이 행동은 선교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마크 맥킨타쉬는 하느님을 선교사이며 이디론가 떠나는 존재로 본다. 성령은 사도들을 하나의 단위로 모아서 하느니에게서 주어진 선교사엄을 위해 그들을 파견하다. 영적이고 지적이며 봉사에 바탕을 둔 교회 공동체내에서, 사도는 훈련을 받고 하느님의 말씀을 받을 준비가 되면, 나가서 행하게 된다. 성서에서 우리는 가서 그대로 행하라(루가 10:37), 가서 더 이상 죄짓지 말라, 그리고 세례를주어라 라고 불림을 받았으며, 미사를 마칠때마다, 평화롭게 가서 사랑하고 주님을 섬겨라라고 파견이 된다. 또한 사도는 스스로 자각하에 나가서 도덕적이고 옳바른 일을 하도록 파견이 된다.
이 자각의식은 고립되 “나”가 아니며, 교회와 자신과의 관계에서 얻어지는 열매의 목소리이다. 이 자각의식은 교회의 신도들과 교리에 도덕적이 선을 구현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먼저 양심의 소리를 듣고, 진리를 듣게 되면, 이 하느님과의 개인적인 대화를 진리를 수행함으로써 일반에 공개하는 것이다. 사도에게는, 생각과 행동 그리고 기도를 통한 하느님과의 개인적인 통교가 세속에서 증거자가 되는 발판이 되며, 이러나 이유로 평신도가 살아있는 영성을 개발하도록 도움을 주어야 되는 이유의 하나가 된다.
*** 결론
오느날 무엇이 도덕적으로 옳다고 여겨지는 지 이해하는 것은, 지난 50여년간 엄청나게 일어난, 사회적, 정치적, 과학 및 철학의 변화때문에 많은 노력을 요한다. 지금 실행되고 있는 평신도에 대한 신학 교육의 필요성은 이 엄청난 변화에 대한 성교회의 반응이었다. 무엇이 진리인가을 아는 것이 진리를 행하는 것에 선행이 되어야 하며, 진리를 획득하는 것은 언제나 다른 것들과의 관계안에서 일어난다. 무엇이 진리인가데 대한 지식의 습득은 사회적이 경험에서 온다. 다시 말하면, 진리는 알게 되는 것은 공동체내의 대화에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프레드 크로우는 이 것에 대해서 이렇게 쓴다.
“진리는, 어떤 기본적인 개념을 제외하고는, 수 많을 상반된 견해를 접하지 않고는 얻어 질 수 없다. 그리고 상반된 견해는 많은 많을 사람들에의해서 주어지는 것이다. 나는 예언자의 역할을 무시하지 않지만, 그들도 수 많은 사람들의 생각에 바탕을 두고 지혜의 말을 하는 것이다.”
도덕적인 판단을 하는 과정에서, 진리의 사도는 교회공동체와 그 공동체내에서 대화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결국, 세속에서 기업이나, 의료 또는 법에 종사하는 신앙인들은, 단지 같은 직종의 동료들에게서 뿐만 아니라,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에 자문을 구하는 것이 또한 필요할 것이다. 이것은 세속의 동료들이 무능해서가 아니라, 세속세상에서는 신앙적인 면을 고려하기 않고는 어떤 자문도 완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불완전성은 또한 성교회내에서도 자명하다. 예를 들면, 의사의 윤리에 관한 본당신부의 판단은 그 신부가 의료계 종사자의 자문을 구하지 않거나, 그 진상을 모르고 있다면, 불완전 할 것이다.
도로시 데이의 말은 평신도사도로써 헌신한 사람들의 방향을 잡아주는 나침반의 역할을 한다. 평신도로써 헌신한다는 것은 세속세상을 믿음안에서 하나로 만들어주는 복잡한 일을 구체화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평신도의 역동적인 도전이며,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들이 느끼는 긴장이다. 아무도 도리시 데이를 단지 사회 운동가로 잘못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 가난한 사람들애 대한 그녀의 봉사는 단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 대한 윤리적인 행동보다 더 깊은 샘물에서 솟아나온 것이다. 그녀의 행동은 교회의 신비와 성사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 바로 그 샘물이 하느님의 은총과 우리사이에 현존하는 하느님의 숨결로 문화에 물을 주는, 각자의 고유한 부르심속에서, 평신도를 지탱해 주는 것이다.
기도, 선교, 순종 그리고 의식을 통하여, 평신도는 교회와의 관계속에서, 세상에 대한 봉사속에서, 교회내에서 그리스도의 사도로 형성되는 것이다. 도로시 데이의 말들은 이 네가지 본성을 평신도의 영적 성장과 정체성의 핵심임을 증언하며, 사도들에게 함축적으로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다.
(“The Layperson As Disciple: A Meditation On Simple Words”)
Source: “Spiritual Life, Summer 2002”
By: James Keating, Ph.D.
“가톨릭 노동자 운동”의 창시자인 도로시 데이는 그녀의 종교적인 영성을 사회개혁운동과 결합시킨 평신도 여성으로 존경을 받고 있는데, 그녀의 사회개혁 방법은 서구 문화에서는 보기 힘든 것이다. 가난한 사람의 고통에 대한 그녀의 우려의 목소리는 천주교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 자신의 소명이라는 강한 직감에서 연유된 것이다. 그녀에게 교회는 단지 영적인 공동 관심사를 가진 친구들의 선택적인 모임이 아니라, 우리 영의 생명을 끌어내는 그리스도의 몸이었다. 이 영의 생명은 성사와 (그녀는 매일 미사를 보았다) 우리안에 사는 그리스도에게 기도를 봉헌함으로써 주어지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리스도에게서 눈을 떼지 않음으로써,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봉사라는 열매를 맺었으며, 또한 그들의 필요에 따라 그들과 함께 지속적으로 있을 수 있는 버팀목이 되었다.
도로시 데이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평신도 여성이었다. 그리스도는 그녀 삶의 정 핵심에 머물어 있었으며, 그 핵심에서 그녀의 행동이 펴져 나와 문화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평신도는,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하느님의 구원을 암시적으로 확증하고 동시에 복음을 전파하는 행위을 통하여, 이 구원의 원천을 세상에 들어내 보이고 강력하게 만듬으로써 신앙의 증인이 되는 것이다. 평신도들의 삶의 다양성 때문에, 모두다 도로시 데이같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급진적인 운동을 하도록 불림을 받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사도직을 수행함에 있어서, 평신도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삶의 중심에 있어야 한다. 이 관계가 평신도가 성화되는 유일한 장소인 세속에서, 보다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활동에 둘도 없는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도로시 데이는 급진적인 거리의 행동주의자의 삶을 뒤로 하고 천주교의 믿음을 받아들이면서,이념을 행동화 하는데 있어서 전략과 신념만에만 중심을 두었던 삶을 포기하고 관상적인 사도의 삶을 받아 들였다.
그녀는 자신의 전향을 이렇게 이야기 한다.
“나는 그들과 일했던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그 사람들은 좋은 사람들이었으며, 그들은 옳은 생각을 하고 있었으며, 그들의마음은 항상 깨어 있었다. 내가 후회하는 것은 우리가 했었던 것, 우리가 믿었던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거의 그런 운동을 함데 있어서, 기술과 전략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 나는 내가 왜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지,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다른 관점을 갖게 되었으며, 왜 나는하느님을 우리가 하는 모든 것에 함께 하시도록 하야야 하며, 우리의 결정 과정에 하느님을 참여시켜야 한다고 주지시키는 이유이다. 또한 내가 왜 우리가 이야기 할 때나, 희망을 가질 때나, 계획을 세울 때나, 걱정근심에 있을 때도, 나는 항상 기도하는 마음으로 있는 이유이다. 그래서 나는 하느님을 말씀을 들으며, 교회에 가서 내가 들었던 것을 상기 한며, 또한 예수님이 어떻게 세상을 살았으면, 그가 만나 사람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를 생각한다.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나야 하는지가 나의 마음속에 솟아난다.”
이 도로시 데이의 말이 사도직을 함축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평신도의 삶은 그리스도가 선택된 사람들을 부르시는 일반 성소를 포함한다. 이 성소내에서 각자는 특별한 부름심을 받으며, 그리스도내에서의 자신의 삶의 형태를 발견한게 된다. 그 삶의 형태는 결혼을 하거나, 혼자 살거나 또는 종교적인 선서의 삶일 수도 있다. 이런 다른 삶의 형태를 마음에 두고, 나는 도로시 데이가 위에서 요약한 관상적인 사도의 삶에 관한 시각에 힘입어 평신도의 삶에 접근하려고 한다. 이것은 일반적인 이야기가 될 것이며, 이떤 특수한 부르심에 관한 묵상은 다른 글을 필요로 할 것이다.
*** 사도직의 체험
평신도는 그리스도의 세가지 역할 – 사제, 예언자 그리고 왕 – 중에서 왕의 역할을 담당한다. 이 왕의 역할은 이 세상의 모든 일들에서 죄의 권세를 박멸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평신도는 은총속에서 우리 사회의 문화적 그리고 도덕적인 변화를 촉진하도록 불려진 것이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에 바탕을 둔 이 왕직을 살면서, 믿는 사람들은 함께 하느님게 경배를드리고, 봉사를 하며, 증거를 하면서 사회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긴다.. 도로시 데이는 자신이 전에는 어떤 것을 중심을 두고 살았는지 그리고 천주교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한 후에는 무엇에 초점을 맞추었는지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녀는 “기술과 전략”에만 집중하던 삶에서 삶에서 우리가 하는 모든 것 그리고 모든 결정 과정에 하느님을 참여 시키는 삶으로 옮겨갔던 것이다. 이것은 단지 한 사람의 행동이 아닌 성격자체도 변한 근본적인 변환인 것이다. 이 결과로 산발적인 아이디어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하느님의 현존에 의지하는 새로운 중심이 탄생하게 된다. 동일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도리시 데이에게는, 사도직은 정치적인 이념과 행동하에서 생각하고 살던 삶에서, 생각과 행동을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느님의 사랑에 바탕을 두는 삶으로의 변화부터 시작한다.
사도직은 근본적으로 개인적인 것이지만, 어떤 초월적인 것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사도직이 물론 많은 의문과 이념을 발생하게 하지만, 단지 어떤 철학적인 이념을 소지 하는 것만으로 축소되어서는 않된다. 또한 사도직은,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대중앞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단지 어떤 사회 운동만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도로시 데이는, 그녀와 사회운동을 같이 하던 사람들이 좋은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은 아직 그리스도를 볼 수 없었다고 강조한다. 하느님이 우리 삶의 중심이고 우리가 하느님의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 다고 해서 , 그 놀라움에 우리가 마비가 되어서 대중앞에서 하느님의 증거자가 되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 이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생기는 놀라움은 우리를 마비시키지 않으며 오히려 우리를 활동하게 한다. 교회를 통한 하느님과의 깊은 만남을 통해서 평신도는 세상에 파견되는 것이다.
*** 사도직은 교회내에서 탄생되며 유지된다.
사도직은 어떤 행동을 마음에 두고 있지만, 그 행동은 정치철학이나, 이념이나, 기술과 전략에 그 그본을 두고 있지 않으며, 교회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을 향한 사랑에 그 근본을 두고 있다. 하느님의 체험이 그 후에 따르는 활동이나, 연구 또는 교리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중심이 된다. 이 체험은 혼자만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어떠한 고립으로 이끌지도 않는다. 오히려, 이 체험은 우리의 하느님과이 관계에서 생겨나서, 어떤 사람을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도록 이끌어 준다. 이 모든 체험은하느님에 대한 경배와 교리를 통하여, 이미 존재하고 있는 교회내에 자리하게 되고 묵상되어진다. 하지만, 또한 이러한 묵상적이고 우리의 생각을 자극하는 체험들이, 교회자체가 자신과 자신의 교리를 모다 깊고 넓게 이해할 수 있는 씨앗이 되고, 더 나아가서 교회가 교리를 개발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는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체험은 생명을 공급하기도 한다. 그것은 그 체험이 나의 것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고, 살아있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내에서 살아 숨쉬고 있는 진리의 반영이기 때문이다. 도로시 데이는 매일 교회에 참여 하는 것이 절실하게 필요함을 깨달았다. 그녀는 매일 교회에 가서 기도를 하고, 매일 미사에 참여 하였으며, 다른 사람을 위한 봉사를 했다. 그녀는 그녀 자신의 마음에서 발생한 하느님을 찾고 타인을 위한 봉사에 관한 욕구가 이미 존재하고 있는 교회내의 생활에서 충족됨을 발견했다. 천주교로 전향한 후에, 그녀는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에 자신의 자리를 하나 차지 하였다. 그 자리는 우리 모두의 자리이면서, 또한 그녀 자신의 고유한 자리인 것이다.
*** 부르심
그리스도의 사도로 불림을 받았다는 것은 단지 보다 나는 사람이 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물론 그런 부르심을 포함하지만, 오히려 그리스도안에서, 그리스도를 바탕을 두고 그리스도와 함께 이루는 하나의 공동체에 입적됨을 의미 한다.
이 부르심의 종착역 또는 목적은 어둠속에서 들은 것을 밝은 내낮에 선포해야 하는, 대중앞에서 주님을 증거하는 몸체를 형성하는 것이다. 구원은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공동체를 이룬 개개인에게 주어지는 것이며, 이 공동체를 통하여 세상에 주어지는 것이다. 윌리암 스폰은 부르심의 공동체적 성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열두사도의 선택은 예수님이 수세기 동안 무너져 있었던 원래의 이스라엘을 자신의 주위에 재건설하고 있었다는 확실한 신호였다. 이 부르심을 개인신앙을 강조하는 면에서 본다면, 예수님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는다는 면만 볼 수 있겠으나, 좀 더 역사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이 부르심은 고유한 새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것이라고 하겠다. 이 역사적인 의미는 정치적으로 볼때 그 당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에게서도 외면되지 않았었다.”
사도들은 단지 자신의 성화만이 아니고 세상에 생명의 열매를 맺도록 불리워 진 것이다. 사실상, 평신도는 그들의 마음이 다름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기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바친 그리스도의 순종의 마음에 맞추어 지지 않는다면, 자신의 성화를 이룰 수 가 없다. 평신도는 미덕의 삶을 살면서, 도덕적이고 영적인 증거자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평신도는 그들이 같이 일하고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삶에 침투할 수 있는 것이다.
*** 선교
자신과 세속적인 세상의 변화는, 은총이 충만한 평신도가 세상에 존재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도로시 데이가 위에서 언급했듯이, 그리스도에 삶에 맞추어 살면 무슨일이 일어날 것이지데 대해 평신도는 식견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로 세상의 문화를 바꾸는 것은 평신도라고 명시 되어 왔다. 평신도의 활동은 예술, 연예 또는 스포츠뿐만이 아니고 정치, 의료 그리고 경제의 활동에서 공정하고 올바른 행동양식을 정립하는 데에 방향을 맞추어 가야 한다. 또한 오락, 학문이나 가족생활은 평신도 고유의 활동영역이 된다. 사도로서 평신도는 글자그대로 동료시민들 사이에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도록 파견되어진 것이다. 이런 평신도의 선교 활동은 성직자가 없는 곳에서 이루어 진다. 성직자가 없다는 것은 성직자가 할 일을 못해서 실패하거나, 절대 적인 수의 부족에서 생기는 현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성직자가 보통있지않는 곳 말하자면, 기업이나, 의료계나, 노동자의 현장을 이야기 한다. 이런 곳이 바로 평신도가 있는 곳이며 그렇게 말하는 것이 옳다. 이러 곳들이, 몇몇 예외적이니 경우를 제외하고는, 평신도 만이 하느님의 왕국을 건설하려고 노력할 수 있는 곳이다.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 있다. 만일 은총을 가득히 받은 평신도가 하느님 사랑을 대중앞에서 증거하지 못한다면, 사람이 어떻게 하느님의 복음을 들을 수가 있으며 그 복음대로 사는 것을 볼수있겠는가? 수동적인 평신도가 있다는 것은 그가 활동하는 모든 대중 공간에서 성화된 증거자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사회적 조건을 묵과하는 것은 하느님의 은총이 문화권내에서 들어 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는 것이다.
*** 순명
사도가 된다는것은 예수님의 행적을 서투르게 흉내내는 것이 아니며, 성령이 우리의 마음을 주관하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도로시 데이가 한 말들 – “하느님을 우리가 하는 모든 것에 함께 하시도록 하야야 한다.” 또는 “하느님을 우리의 결정과정에 참여 시킨다” – 은 매우 중요하다. 사도는 자신의 능력한도 내에서 사회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지니기를 갈망한다. 사도의 영혼은 성령의 움직임에 반응하도록 만들어 지며, 또한 취약하기 때문에, 도덕적이고 신학적인 미덕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서 부르심에 합당한 모습의 되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하느님의 현존은 하느님의 말씀을 영적으로 경청함으로써 또는 그 말씀에 순명함으로써 강화된다. 사도는 인간의 마음에 그리고 교회의 핵심에 내재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성령의 감화를 받기를 원하다. 순명은 모든 사도가 다시 찾아야 하는 미덕이다. 순명은 부르심의 원천에 있는 것이며, 사도가 성화의 과정에서 길을 잃었을 때 다시 원천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도로시 데이는 평신도의 삶에 필수 불가결한 미덕인 순명을 네 가지 성격으로 나누어 놓았다. 그것은 바로 – ‘나는 듣는다, 나는 간다, 나는 기억한다, 나는 생각한다.’ 도로시 데이는 이렇게 이야기 한다- ‘나는 하느님을 말씀을 듣는다. 나는 교회를 간다. 나는 내가 들은 것을 기억한다. 그리고 예수님이 어떻게 세상을 살았는지 생각한다.” 그녀의 듣는것과 생각하는 것 그리고 기억하는 것이 다 행동으로 이끈다. 순명은 “와서 따르라”하는듣고 부르심을 듣고, 자신의 신앙과 상황에 따라행동으로 옮기는 것이다. 이 목소리는 사도들 자신의 내적의 모든 목소리에 우선한다. 사도들은 하느님이 말씀을 들으려고 수날을 보내곤 한다. 이런 순명은 자신의 의지를 하느님이 뜻같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참 진리를 참을 성있께 기다려 받는 것이다. 진리를 듣는 것은 진리를 따르는 것으로 이끌어 지는 데, 이것은 진리가 바로 그리스도의 인성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사도들의 열망하는 것은 우리를 하느님과 하나게 되는 하는 말씀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듣고 순명함으로써, 교회의 구성원은 세속에서 그리스도의 임무를 계속해 가는 것이다.
*** 기도
이 들음과, 교회에 가는 것, 기억하는것과 생각하는 것은 사도의 핵심적인 요소인 “기도”와 조화를 이루는 요소들이다. 내재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개인적인으로 필요불가결한 것이지만, 공동체의 하느님에 대한 경배와 조화를 이루어야 되며, 공동체의 경배는 또한 동시에 개인적인 헌신을 강화시킨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특정한 실리적이 목적을위해 하는 것에 대해 경고를 하지만, 여심할 여지가 없이, 기도가 사람들의 삶에 열매를 맺어 준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 기도에 항상 응답이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신학적으로 불완전할 것이다. 하지만, 경험에 의하면,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노력하는 사도는 종종 응답을 받으며, 자신의 미덕이 보다 강화되었음을 알게되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기도를 자신만을 위한 것으로 축소하는 것은 맞지 않은일이지만, 기도가 기도하는 사람에게 긍정적인 효과를 준다는 것은 옳은 말일 것이다. 이것은 기도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힘의 영향을 받고 싶이하기 때문에 사실이다. 이것이 바로 기도의 목적이다, 즉, 공동체와 그 구성원을 하느님과 하나게 되게 하는 것이다.
*** 공동 의식
기도가 하느님과의 일치가 목적이기 때문에, 하느님이 한 사람에게 영향을 주게되면, 그 사람은 세상에서 그런 영향을 드러내는 위치에 놓여지게 된다고 기대할 수 있다. 기도의 목적은 기도하는 사람에게 활력을 주어 행동을 위한 준비를 시켜준다고도 이야기 한다. 기도의 열매인 행동은 예수님이 하느님에게 십자가를 거두어 달라고 기도한 게세마니 동산의 고뇌를 우리의 마음에 가져다 준다. 그리스도는 또한 자신이 원하는 것이 들어 지지 않으면, 아버지의 뜻을 굳은 믿음으로 성취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한다. 기도는 하느님의 자녀라는 우리의 가장 그본적인 정체성을항하여 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리고 그것을 잠시 바라보는 것이다. 이 바라보는 상태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보다 확실히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과의 일치를 통해서 자기자신을 보다 안전하게 소유할 수 있게 된다.
사도는 하느님과 자신사에 버나드 로노그렌이 “공동의식”이라고 부른 것을 놓으려고 노력한다. 공동의식 이란 부부간이 일생동안의 사랑안에서 가치관과 미덕을 공유함을 의미한다. 이렇게 다를 사람과 하나가 되면서도, 확실한 자신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도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결혼한 부부가 상대방의 마음을 소유하면서도 자신 개인의 의식과 고유한 모습을 유지하듯이, 그리스도의 마음을 소유해야 한다. 결혼한 부부는 그들의 마음과 영과 삶이 하나가 되어야만, 진정한 “결혼”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결혼한 부부의 공동의식의 의미를 되새기면, 우리는 우리의 영혼은 신부이고 그리스도를 신랑이라고 부르는 신비스럽고 예로부터 내려오는 표현을 대면하게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의 참 정체성과 영혼의 깊이 정도에 따라, 하느님과 하나됨을 찾는다. 이 하느님과의 결합으로 부터 사도직의 삶과 세상에 대한 임무가 흘러 나오게 된다. 사도는 단지 그리스도와 사도간의 사랑을 반영하는 행동을 무분별하게 흉내내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고같이 생각하고 그리스도같이 되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 사랑은 우리 마음 깊숙히 있으며, 교회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며, 사도의 의식과 마음이 현세대의 시끄러운 목소리 중에서 오로지 그리스도만을 들으려고 하면 할 수록 더욱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것이다.
도로시 데이는 그녀는 예수님과 예수님이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았나를 항상 생각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관상에 의한 기도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교회와의 공동의식을 한층 더 심화시킨다. 하지만, 사도와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관계는 아주 특정한 것이며, 단지 세속의 현실을 거부한다고 해서 어떤 사회적인 방법으로 복제되어 지는 것이 아니다. 사실상, 성교회가 세속의 세상과 공존할 수 있는 것은 단지 교회가 아닌 세계가 있기 때문이다. 이 지구상의 세속의 사도는, 하느님과의 통교속를 통하여 완성되고 임무를 성취하지만, 이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다.
사도는 그들은 성화로 초대하는 성령의 감화를 받아 하느님의 현존을 세속에 가져오지만, 이것은 어다까지나 대가없은 제공되는 것이다. 어떤 사회적인 변환은 강요된 사회변화로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며, 자유와 지식으로 성취되는 것이다. 세속적이 것과 신성한 것의 차이는 그대로 있다. 그것은 서로가 반대 되는 것이기 때문이 아니고, 우리의 자유의지로, 예수님의 육화속에서 형성된 대로 하느님과의 긍극적인 결합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앎으로써, 두 세계는 같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임즈 형제는 이렇게 경고하였다.
“어떤 정치정인 행위나 정책을 하느님의 뜻이라고 명확하게 성화시키는 것은 신성한 정책을 만들 위험을 안고 있으며, 이런 경향이 이십세기에 엄청난 불행을 가져다 주었다. 신성함과 세속적인 것을 교차시키지 않고 그 차이를 유지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두 세계가 서로 교차하는 것이 아니며, 신성함은 세속적인 것의 성사적인 형태이다. 다시 말하면, 신성함은 세속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 선교적인 행위
도로시 데이는 깊은 생각에 잠기며 말한다 – “나는 예수님과 예수님이 어떻게 삶은 살았나”를 생각한다.” 내적이 삶은 행동으로 이끌어 진다. 이 행동은 바로 “예수님이 어떻게 삶을 살았나”를 반영한다. 위에서 말한 바같이, 이 행동은 선교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마크 맥킨타쉬는 하느님을 선교사이며 이디론가 떠나는 존재로 본다. 성령은 사도들을 하나의 단위로 모아서 하느니에게서 주어진 선교사엄을 위해 그들을 파견하다. 영적이고 지적이며 봉사에 바탕을 둔 교회 공동체내에서, 사도는 훈련을 받고 하느님의 말씀을 받을 준비가 되면, 나가서 행하게 된다. 성서에서 우리는 가서 그대로 행하라(루가 10:37), 가서 더 이상 죄짓지 말라, 그리고 세례를주어라 라고 불림을 받았으며, 미사를 마칠때마다, 평화롭게 가서 사랑하고 주님을 섬겨라라고 파견이 된다. 또한 사도는 스스로 자각하에 나가서 도덕적이고 옳바른 일을 하도록 파견이 된다.
이 자각의식은 고립되 “나”가 아니며, 교회와 자신과의 관계에서 얻어지는 열매의 목소리이다. 이 자각의식은 교회의 신도들과 교리에 도덕적이 선을 구현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먼저 양심의 소리를 듣고, 진리를 듣게 되면, 이 하느님과의 개인적인 대화를 진리를 수행함으로써 일반에 공개하는 것이다. 사도에게는, 생각과 행동 그리고 기도를 통한 하느님과의 개인적인 통교가 세속에서 증거자가 되는 발판이 되며, 이러나 이유로 평신도가 살아있는 영성을 개발하도록 도움을 주어야 되는 이유의 하나가 된다.
*** 결론
오느날 무엇이 도덕적으로 옳다고 여겨지는 지 이해하는 것은, 지난 50여년간 엄청나게 일어난, 사회적, 정치적, 과학 및 철학의 변화때문에 많은 노력을 요한다. 지금 실행되고 있는 평신도에 대한 신학 교육의 필요성은 이 엄청난 변화에 대한 성교회의 반응이었다. 무엇이 진리인가을 아는 것이 진리를 행하는 것에 선행이 되어야 하며, 진리를 획득하는 것은 언제나 다른 것들과의 관계안에서 일어난다. 무엇이 진리인가데 대한 지식의 습득은 사회적이 경험에서 온다. 다시 말하면, 진리는 알게 되는 것은 공동체내의 대화에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프레드 크로우는 이 것에 대해서 이렇게 쓴다.
“진리는, 어떤 기본적인 개념을 제외하고는, 수 많을 상반된 견해를 접하지 않고는 얻어 질 수 없다. 그리고 상반된 견해는 많은 많을 사람들에의해서 주어지는 것이다. 나는 예언자의 역할을 무시하지 않지만, 그들도 수 많은 사람들의 생각에 바탕을 두고 지혜의 말을 하는 것이다.”
도덕적인 판단을 하는 과정에서, 진리의 사도는 교회공동체와 그 공동체내에서 대화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결국, 세속에서 기업이나, 의료 또는 법에 종사하는 신앙인들은, 단지 같은 직종의 동료들에게서 뿐만 아니라,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에 자문을 구하는 것이 또한 필요할 것이다. 이것은 세속의 동료들이 무능해서가 아니라, 세속세상에서는 신앙적인 면을 고려하기 않고는 어떤 자문도 완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불완전성은 또한 성교회내에서도 자명하다. 예를 들면, 의사의 윤리에 관한 본당신부의 판단은 그 신부가 의료계 종사자의 자문을 구하지 않거나, 그 진상을 모르고 있다면, 불완전 할 것이다.
도로시 데이의 말은 평신도사도로써 헌신한 사람들의 방향을 잡아주는 나침반의 역할을 한다. 평신도로써 헌신한다는 것은 세속세상을 믿음안에서 하나로 만들어주는 복잡한 일을 구체화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평신도의 역동적인 도전이며,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들이 느끼는 긴장이다. 아무도 도리시 데이를 단지 사회 운동가로 잘못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 가난한 사람들애 대한 그녀의 봉사는 단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 대한 윤리적인 행동보다 더 깊은 샘물에서 솟아나온 것이다. 그녀의 행동은 교회의 신비와 성사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 바로 그 샘물이 하느님의 은총과 우리사이에 현존하는 하느님의 숨결로 문화에 물을 주는, 각자의 고유한 부르심속에서, 평신도를 지탱해 주는 것이다.
기도, 선교, 순종 그리고 의식을 통하여, 평신도는 교회와의 관계속에서, 세상에 대한 봉사속에서, 교회내에서 그리스도의 사도로 형성되는 것이다. 도로시 데이의 말들은 이 네가지 본성을 평신도의 영적 성장과 정체성의 핵심임을 증언하며, 사도들에게 함축적으로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