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최시영신부 (현:예수회 수련장 신부 로마 그레고리안대학에서 영성과 심리관련 수학) 견진성사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하느님의 군사가 되기를 결심하고 그 은총을 입는 성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모이신 여러분들 중 많은 분은 오늘 이 자리에 예수님의 말씀의 풍성한 은혜를 입고 풍성한 삶을 살아가기로 결심하는 자리에 들어서신 것입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영세와 견진성사가 분리되지 않았으나 그 후, (어느 시점엔가?) 분리되었으며 이는 그리스도인이 성숙된 신앙생활을 하도록 하는데 있어 교회의 특별한 배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으로서나 신앙인으로서 견진성사를 받는 것은 하느님의 큰 선물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군사가 되는 즉, 하느님을 믿는 크리스찬이란 무엇인지, 그 정체성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크리스찬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다양한 각도에서 다양한 언급이 가능할 것입니다. 오늘 저는 제가 생각하는 한가지 정의에 대해 말씀드릴까 합니다. 그러기 전에, 우리 한번 현재,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한 사건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 봅시다. 바로, 요 며칠 사이, 모스크바 시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입니다. 모스크바 문화궁전에 체첸인 30여명이 침투했었고 그 곳에 관람객으로 700여명이 있었다고 보도되고 있습니다. 체첸인들은 그들이 무엇 때문에 그곳에 침투했는지에 대해 성명을 발표하였습니다. 바로 체첸공화국에 소련군의 주둔철폐를 요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문화궁전에 소련 특수부대의 투입으로 무력으로 진압이 완료되었고 현재 체첸인 30여명 이상 그리고 인질 60여명 이상, 총 100 여명이 이미 사망한 것으로 보도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무력진압의 보도를 접하면서, 우리는 누가 설명하지 않아도 공통적으로 무언가 느껴지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한국민들이 일제에 강점되어 나라의 독립을 잃고 살았던 일제 36년에 대한 것...그리고 결국 힘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억압하고 착취하고 폭력을 휘두르는 것에 대한 분노인 것입니다. 이러한 강자의 논리에 의한 행동은 절대로 인간적인 행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는 동물의 왕국에서나 있을 법한 약육강식의 방식인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러한 일이 일어났는가? 생각을 해보십시다. 모스크바에서 일어난 이 사건은...우리가 아는 한, 이는 사랑이 있다면 일어나지 않을 일인 것입니다. 이웃 섬김의 정신이 있다면 일어나지 않을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러한 사건의 발생 이유는 어떠한 형태로든지 이권에 관련되어 있는 것입니다. 경제적이거나 정치적 아니면 군사적인...이해 관계로부터 출발한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여러분들은 다양한 동기, 이유로 이 자리에 참석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바로 시대의 징표를 읽으라는...말씀을...즉 우리가 만나게 되는 다양한 사건을 통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듣고 배우고 있는 것입니까? 저희는 모든 상황에서, 시대의 징표를 통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배우지 못하면 결국 이런 고통이 되풀이 됩니다 표현양식의 차이는 있더라도, 이웃을 섬기고 봉사하지 아니하고 나의 필요에 의한, 도구로 사용하는 한 우리는 이러한 고통을 또 다시 맞이하게 됩니다. 우리는 배워야합니다. 우리들 마음 속에서 도덕적, 영적인 가치가 사라질 때 일어나는 것은...나와 가정, 그리고 나아가서 사회의 불신, 분열 그리고 증오와 폭력을 낳게 된다는 것을. 고통의 현장에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모스크바의 그 현장에서 고통받는 사람들, 그 가족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그들의 고통에서 무언가를 배우고 행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고통이 무가치하게 되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경기도 화성시의 씨랜드에서 일어났던 유치원 화재 사건을 기억하시고 계십니까? 그 후로도 우리는 너무나 많은 사건들, 다리가 무너져 내리고 백화점이 무너져 내리고...도시가스관이 터져서 도로가 붕괴되는 등...다양한 사고를 경험해 왔습니다. 만일 우리가 또 이러한 사건들에서, 고통들에서 무언가를 배우고 행동하지 못한다면....우리는...정녕...바른 신앙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제 신앙인으로서 견진성사를 받는 것은 바로 크리스찬이 이런 어려운 현실 한 가운데에서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줄 알도록 하게 하는 [초대]라고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다시 주제로 돌아가서 크리스찬이란 무엇하는 사람인가?를 생각해 봅시다 저는 이를 두 가지 요소로서 설명하고자 합니다. 첫째는 희망을 찾는 사람 둘째는 희망의 원천으로 거듭 거듭 되돌아가는 사람 그럼, 첫째, 희망을 찾는 사람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어떤 상황에서, 즉 비인간적인 상황에서, 하느님이 없는 것처럼 보여지는 그러한 불신이 만연하고 분열되어 있는 상황에서, 하느님이 부재하는 것으로 보여지는 그런 상황에서 그 첫 번째 덕목으로서 희망을 잃지 않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겠습니다. 우리 자신의 주변을 보면 모스크바의 경우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정치권, 경제권 등에 끊임없는 부패의 소용돌이가 돌고있고 그에 따른 끊임없는 사고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희망이 없어보이는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느님 메시지를 듣고 희망을 잃지 않고 다시 서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이스라엘 왕조는 기원 전...에 북과 남으로 분열되었고 북왕조가 먼저..? 그리고 기원전 580여년?에 남쪽 유다왕조가 바빌론제국 왕조에 의해 멸망되었습니다. 유다왕조가 멸망되기 전에 국제정세가 정말 복잡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많은 예언자들이 에집트에 기대지 말라고 정치권에 전달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치권에서는 에집트에 원군을 청했었고 바빌론 군대가 유다왕조를 침공하러 오는 길에 에집트군과 접전케 되었고 전멸을 시킨 후 에집트를 침공하였고 그 후에 유다왕조를 침공하여 멸망시켰다 합니다. 느긋하게 대처했던 유다왕조는 혼비백산하여 왕실의 사람들은 여리고로 도망을 했습니다만 붙잡혔습니다. 결국 왕이 보는 앞에서 왕자들은 사살되었고 왕은 눈을 도려내는 고통을 겪어야 했으며 유다왕국은 중산층 이상의 지배계층의 사람들은 모두 바빌론으로 잡혀가게 되었고 유다왕국에는 타민족을 이식하였습니다. 그래서 유다왕국에는 거의 하층계급만이 남아있었다 합니다. 이렇게 절망적인 상황에서 바로 유배지인 바빌론제국에서 많은 선지자들이 나왔습니다. 예레미야나 이사야 등이 그런 분들입니다. 이들은 바로 아무런 희망이 없는 상황에서 실의에 잠긴 유다인들에게 <야훼 하느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이렇게 버려두시지 않는다>는 희망의 말을 전하였던 것입니다. 어떻게 이러한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이는 바로 뿌리 깊은 [문화]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출애급기의 <빠스카 체험>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에집트에서의 귀양살이 그리고 불뱀이 많고 물도 없는 광야에서의 40년 간의 생활을 지나서 끝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신 것을 다시 깨닫게하는 그 희망을 다시금 일깨우는 깊은 문화의 출발점을 다시 돌아보게 한 것입니다. 당시 예레미아는 상당히 구체적인 예언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70 여년이 지나면 바빌론제국이 멸망하고 페르시아인에 의해 지배되리라고 하는 것 등 이었습니다. 사실 페르시아의 코레스? 왕조? 왕은 칙령을 내려 유다인들에게 잘 대해 주도록 하였을 뿐만 아니라 유다왕국의 땅으로 잘 인도해 줄 것까지 명했습니다. 그런데 유다인들 중 일부만 유대지역으로 돌아갔다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들이 돌아갔을까요? 바로 기다리던 사람들, 희망을 잃지 않고, 설레이던 가슴을 붙안고 살아왔던 사람들, 고향은 초토화 되어 있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아 있는 것 없음을 앎에도 불구하고 돌아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고통을 받기로, 그 대가를 지불할 각오를 하고 돌아간 사람들입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우리 크리스찬은 이렇게 희망을 간직하고 어려움을 겪더라도 돌아갈 곳으로 돌아가려고 그 대가를 치루려고 하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 그럼 두 번째로 크리스찬은 희망을 찾아내면서 다시 그 원천으로 되돌아가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럼, 그 희망의 원천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삶에는 많은 종류의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절대로 우리 자신이 희망의 원천이 아니라는 것을...참희망, 참의미, 참자유, 참기쁨, 참행복의 원천은 바로 하느님,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크리스찬에게 있어서 참희망의 원천은 바로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추구하는 모든 것은 다 <잠시>지나가는 것입니다. 명예, 부귀, 지위 등등...참희망의 원천은 오직,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 한분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예수회를 창립하신 이냐시오성인께서 영신수련에의 초대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도록 지향을 갖자, 창조주이신 분이 우리를 위해서 인간이 되셨고 생명을 주관하시고 생명의 원천이신 분이 바로 우리를 위해서 죽음을 택하셨다는 것을 생각하자. 우리는 착한 구석도 있으나 악한 구석도 가진 존재이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인간을 위해서 그 악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내 놓으셨다. 바로 이러한 사실을 바라보게 하자. 둘째, 우리 자신을 바라보게 하자. 창조주께서 나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셨는데, 나는 이분을 위해서 무엇을 해왔고 무엇을 하고 있고 무엇을 할 것인가? 바로 우리 자신들에게 시선을 모아봅시다. 바로 이 자리에 있는 나 그리고 여러분은 수 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배려로 여기에 와 있음을 바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나의 삶, 여러분들의 삶에서 제일 고맙게 여겨지는 분이 누구인가...를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우리는 그 분을 위해 과거에는 무엇을 했으며 현재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미래에는 무엇을 할 것인지...생각해 봅시다. 첫째.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발견되는 진리가 있습니다 즉, 우리는 무조건적으로 사랑받는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어떠한 것인가를 루가복음 15장?의 아버지와 두 형제에 대한 말씀을 통해서 생각해 봅시다. 형은 늘 불평이 많던 아우가 못마땅하고 차라리 없어져 버렸으면 하고 바랐을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동생은 자신의 존재자체가 거부당하기에 이에 대해 맞서 싸우거나 아니면 도망갈 수 밖에 없었고 아우는 도망가는 길을 택했었지요. 그 작은 아들이 돌아올 때 아버지가 맞이하는 것은 바로 있는 그대로의 작은 아들이었습니다. 형을 보십시오. 들에서 돌아오다 잔치 소문을 듣고 얼마나 더 마음이 불편해졌습니까? 이러한 소견이 좁은 큰 아들도 바로 있는 그대로 아버지는 받아들였습니다. 하느님은 나 자신을, 여러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십니다. 나와 타인과의 <갈등>이 있는 그대로 말입니다. 이러한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짐의 체험이 없다면 나는, 우리는 이웃을 사랑하기 어렵습니다. 바로 이러한 사랑입음을 받은 체험으로부터 우리의 영적 여정의 첫발자욱을 떼어 놓을 수 있게되는 것입니다. 잠시 우리 인간이 아이로부터 성장해가는 과정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태어나서 아주 어릴 때는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사랑을 받는지 모르면서 얼마간 살아갑니다. 그러다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사랑받는 체험을 하게 되고 바로 내 자신이 얼마나 사랑받는 사람인가 하는 체험을 하게 됨으로써 그리고 나아가서는 분별있는 사랑을 얼마나 받았는지에 따라서 인간의 성숙에 중요한 영향이 미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성생활의 건물 또한 든든한 기초가 쌓이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랑받는 체험의 깊이에 의해서입니다. 루가복음 19장의 자케오에 대한 말씀을 보십시오. 바로 하느님으로부터 있는 그대로를 사랑받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자케오가 모든 사람들에게 배척받을 때에는 분명히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케오는 바로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 사랑받는 체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두가 다 나를 배척하는데 바로 이 예수님은 나를 이해하고 존중해 주시고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시는구나...바로 이러한 체험이 그의 삶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습니다. 전 재산의 반을 내어 놓는 등의 변화를 가져오게 합니다. 그동안 이웃과의 관계에서 이웃이란 세금을 징수하기 위한 대상일 뿐이였고 돈은 축척의 대상이였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말씀을 듣고 변화된 자케오에게는 이웃은 함께 사랑을 나누어야 할 대상이고 돈도 이웃과 함께 나누어야 하는 대상이 된 것입니다. 둘째...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이 생기게 됩니다- 무엇을 할 것인가? 오늘 복음에서는 바리새이파에 대한 율법학자들의 태도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 무엇이 제일 큰 계명인가...무엇이 가장 중요한 지켜야할 계명인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바로 사랑이라고 하십니다. 마음과 몸을 다하여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또한 신명기 6장 5절 말씀에 <들어가 있으라>....야훼, 우리 하느님, 한분이신 분을 마음과 힘과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라고 하는 초대의 말씀이 있습니다. 유다인들은 바로 이 성경귀절을 옷소매자락이나 모자챙 안에 적어 넣거나 방문, 대문, 문설주, 성문 등에 새겨 놓곤 합니다. 바로 이 <야훼, 우리 하느님, 한분이신 분을 마음과 힘과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라>고 하는 초대의 말씀을 늘 가까이 두고 잊지 않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구약에서도 이렇게 <목숨을 다하여>라는 말씀으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바오로사도가 고린도인에게 보낸 사랑의 송가를 잘 아시지요. <내가 여러분들에게 가장 좋은 길을 보여드리겠습니다......내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어도...지식을 전할 수 있어도... 신비한 말씀을 전할 수 있어도...산을 옮길만한 믿음을 가지고 있어도...재산을 다 내어 놓아도...불속에 뛰어 들지라도...사랑이 없다면...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라고 말씀합니다. 크리스찬을 가장 크리스찬답게 하는 요소는 바로 <사랑>입니다. 이는 느낌이 아니라 자신을 포기하면서까지도 결단하는 덕목인 것입니다. 어디 사랑하는 것이 쉽겠습니까? 사랑의 노래를 들어봅시다. 참 사랑은...시기하지 아니하고...교만하지 아니하고...무례하지 아니하고...사욕을 지니지 아니하고...성을 내지 아니하고...앙심을 품지 아니하고...불의를 참지 아니하고...진리에 응하며...모든 것을 덮어 주고...견디어 내는 것입니다... 이 세상 것, 모든 것이 다 완전한 것이 없습니다, 지식도...명예도... 다 살아집니다.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으로부터 우리가 있는 그대로 사랑받고 있다는 그것을 발견하면, 체험하면, 바로 이러한 사실을 안다면 우리를 충분히 변화시키는 사랑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사랑은 절대로 우리 힘으로 할 수 없습니다. 끊임없이 그 분에게로 돌아가서 바오로사도가 변한 것처럼 바로 예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이 우리를 감동시키고 우리가 감사하게 하고 우리를 변화시키게 하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살아가셨던 그 길을 우리도 그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그 분의 사랑이 늘 내 안에서 살게되고 내 자신을 통해서 세상적인 것이 아닌 희망의 원천이신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이 나를 변화시킬 수 있도록 나를 내어 놓아야 합니다. 내 안에서 활동하실 수 있도록 그 분의 생기가 내 안에서 자리하여 이웃들에게 나뉘어질 수 있도록 나를 내 놓아야 합니다. 바로 이런 체험을 <파스카 게임>이라고 부른 분이 계십니다 이것은 스페인의 성심회 수녀님의 글에서 본 것으로 이 분의 article title이 파스카 신비의 기억?...이었습니다. 이분은 우리가 신앙생활 속에서 늘 이런 게임을 한다고 보았습니다. 즉 <신앙생활도 게임>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이 게임은 두 가지 요소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첫째- 잃어버리기 둘째- 얻기(다른 어떤 것) 그런데 단, 조건이 있답니다. 바로 "원하면"이라는 것입니다. 즉, If anyone who wants to follow me...즉 누구라도 예수님을 따르기로 하는 자는...이라는 조건이라는 것입니다. 한편, 잃어버리기는 내가 주도적으로 수행하는 것입니다. 물론 어느 정도의 은총이 필요하긴 하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일단 잃어버리기의 phase를 지나면 그 다음은 자연스럽게 2부로 넘어가게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2부에서는 완전히 하느님이 주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언제, 어떻게, 어디서...오는 지는 모르나..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잃어버리는 것은 세상적인 것이나 얻게 되는 것은 세상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복음 말씀을 따라 살아가기에 잃게 되는 것들은 세상적인 경제법이나 신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부익부 빈익빈의 원리에 따라 잃은 만큼 비세상적인 것이 더 크게 얻어진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오늘 견진교리 첫 강의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가 꼭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먼저, 십자가 앞에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앞에서 여러분이 <사랑>을 느끼던 느끼지 아니하던...일단 그 분에게 시간을 내어 드리기 바랍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여러분의 신앙생활에 큰 성장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최시영신부님
2008. 7. 28. 오전 1:3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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