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눅19:8-10에서 삭게오의 반음과 예수님이 하심 사역을 생각해 봅시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요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 - 삭개오는 누구냐? 1. 세리장이다. 2. 키 작다. 3. 예수 만나 변화된 사람이다. 4. 부자이다. 5. 은혜 - 변화의 증거 분명(구체적 구제로 표현) 6. 예수님 사모 열렬히(뽕나무에 올라감, 기꺼이 집안으로 영접) 7. 아브라함의 자손(잃어버린 자) 8. 토색 했던 사람 9. 죄인 10. 구원받은 자 마음이 외로운 자, 중압감으로 괴로운 자, 잃어버린 자이다. 유대인 로마인 죄인이었다가 아브라함의 자손(구원받은 자)으로 회복되었다. 돈에 포로 된 자였다. 삭개오는 전에는 물질에 포로 된 자였는데 예수님 만나니까 소유욕에서 자유로워졌다. 전엔 맘몬의 자손, 지금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하나님의 자녀 된 결정적인 증거는 삭개오처럼 소유욕에서 자유로와지는 것이다. 신앙의 전환점 - 물질에서 자유로와 질 때이다. (우리의 삶의 목표는 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니므로) 물질에 온전한 사람, 말에 온전한 사람 - 신앙에 온전하다. 아무리 천사처럼 행동해도 물질관을 보면 어느 정도 가늠된다. 땅에서 자유롭다고 볼 수 있는 자, 물질에서 자유로운 자이다. 물질에서 자유하면 그의 신앙도 자유롭다. 돈, 건강보다, 영혼 잃으면 모든 것 잃는다. 물질, 별것 아니다. 탐욕이 문제이다. 조금 잃는 것에 모든 것을 걸고 있다. 요즘 세대는 물질에 모든 것을 걸고 있다. <큐티> 내가 포로 되어 있는 것은 없습니까? 3. 눅 18:35-43에서 볼 수 있는 가난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누가 진정한 소경이라 할 수 있습니까? "여리고에 가까이 오실 때에 한 소경이 길가에 앉아 구걸하다가 우리의 지남을 듣고 이 무슨 일이냐고 물은대 저희가 나사렛 예수 지나신다 하니 소경이 외쳐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앞서 가는 자들이 저를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저가 더욱 심히 소리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예수께서 머물러서서 명하여 데려오라 하셨더니 저가 가까이 오매 물어 가로되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매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좇으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 -소경 : 볼 수 있는 가난한 사람 "다윗의 자손 예수여" 라고 불렀다. 메시야, 구세주, 하나님의 아들 영원한 세계에서 눈뜬 자 믿음으로 눈뜬 자이다. -군중 : 진짜 소경 "나사렛 예수" 선지자인 예수 천국에서 눈먼 자, 열심히 좇아 다녔지만 현상적으로만 보았을 뿐. 세속적으로 겉으로 보이는 것만 보았다. (마 21:9-11과 비교하라) 무리가 진정한 소경이다. 성경을 열심히 보지만 하나님의 뜻을 보지 못하는 것. 성경을 잃기 위해서 읽은, 성경 읽고도 하나님 뜻 모르면 소경이다. 군중과 같다. <큐티> 본질적인 질문 던져 보기. - 교회 왜 나가느냐? 신학교 왜 다니느냐? 내가 왜 사냐? 본질적인 질문 던지면 포로 되지 않는다. 여기서 성경을 많이 보진 못해도 성경을 보는 법을 배운다. 귀가 높아진다. 변화된다. 말씀의 비밀들을 경험하고 싶다. 삶이 뒷받침되지 못하면 헛된 것이다. 반복하고 되돌아보고, 계속 생각해 보기. 구경꾼이 되지 말아라. <큐티> 나는 봐야 할 것을 바로 보고 있습니까? 4. 요 9:39-41의 말씀을 묵상해 봅시다. <요 9;39-41>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가, 예수님의 사역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이 세상을 심판 나, 심판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려 하심 (본다고 생각하고 있으면 소경되게 합니다) ("하나님,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보이게 해 주세요!"하는 심령 은 보게 합니다) 본다고 하는데 못보고 있으니 너는 소경이라고 해도 깨닫지 못하니 소경 되게 합니다. 바리새인 서기관들은 성경을 잘 안다고 하면서 예수님 알지 못하고 있다. 나는 교회 오래 다녔지만 예수님을 모르고 모르니까 사랑도 못한다. 바리새인은 율법에 대한 지식을 많이 알뿐이다. 성경에 관해서는 많이 알지만 성경을 모르는 현실입니다. 고전 13장이 사랑장인 것을 알면서 사랑이 무언지 모른다. 성경의 주인공인 예수님 앉혀놓고도 예수님을 모른다. 율법, 전통에 가려 예수님을 못 알아본다. 율법, 전통 때문에 예수님 아는데 믿는데 방해될 때가 참 많습니다. 지금 예수님 오시면 나는 과연 알아볼 수 있을까요? 성경주의자, 현실주의자, 이상주의자 문제를 가지고 고칠 수 있는 것부터 고쳐 나가야지요. 비 성경 적인 신앙의 태도를 바꿔나가야 겠지요. 교권주의(명예에 포로 된 것) 성경에 '내 교회'란 말은 없습니다. 왜 그들이 소경 되었습니까? 그들의 관심사 때문입니다. 교권주의, 축복에 관심 가진 자. 사람의 관심사가 소경 되게 합니다. 내 신앙에 관심사가 무엇인가? 나의 관심사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 내 기준, 전통에 안 맞아도 성경 적이면 받아들여야. 교권주의, 기득권이 너무 완강해서 진정한 예수님 말씀 못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기도하는 방식도 그렇습니다. 생각하면서 기도해야합니다. 기도 기관총, 때론 차분히 하나님을 찾을 때도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진정한 의미에서 소경은 누구입니까? 바리새인(본다고 하는 자) 왜 그들이 소경입니까? 바리새인은 율법과 전통에 눈을 가려 보지(깨닫지) 못합니다. 선입견으로 굳어져 있어서. 그들은 예수님조차도 율법주의라는 안경을 끼고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그 렌즈 안에 들어갈 수 없는 분이십니다. (성경을 만약 '복'이라는 렌즈를 끼고 본다면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이 렌즈를 걷어 버려야 제대로 보입니다) 결국 전제(선입견)라는 것이 없어야 합니다. 말씀을 수단화하거나 자기 변명의 도구, 자기 주장을 합리화하는 도구로 쓰면 안 됩니다. 바리새인들은 말씀을 수단화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성경에 통달해 있다고 하지만 성경의 주인공인 예수님을 못 알아보았습니다. 낫 놓고 'ㄱ'자 모른다 → 예수님 놓고 하나님의 아들 모르는... 왜 못 알아보았겠습니까? 그들은 전통, 자기 주장, 자기 생각(틀)에 꽉 매여 있어 예수님이 안 보였던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생각인데 내 생각, 전통, 관습에 메여서 성경을 보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수가 있다. 예수님이 다시 오셨다고 한다면 오늘날 교인들이 과연 예수님을 알아 볼 수 있을까요? 예수님을 못 알아보는 이유는? 비 성경 적인 생각, 비 성경 적인 구조(교회), 비 성경적인 주장[헌법, 제도, 생활방식]을 갖고 있어서 예수님이 다시 오셔도 예수님을 알아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예수님을 거부하는 이유는 우리(신자)에게서 예수님의 모습이 안 보여서입니다. 오늘날 예수님은 사람들을 통해서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나타나는 길은 오로지 사람을 통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경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옳은 말씀에는 아멘 해야, 제도(전통)에 안 맞더라도 익숙하지 않더라도, 내가 손해본다 할지라도, 성경 적인 듯하면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알아보는 길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무릎 꿇지 않고 하나님 말씀을 판단하려 들면 곤란합니다. 오늘날도 돈·숫자·명예에만 관심이 있지 하나님의 영광에는 관심 없는 이들이 있습니다. 자기 몫, 정치에 관심 있어서 예수님을 반대한 이유는 그들의 정치적 입지가 적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관심은 하나님, 예수님이어야 합니다. 예수 팔아먹고 사는 사람, 관심사가 잘못되어서는 안 됩니다. 관심사가 다른 데 있으면 소경이 되어 버립니다. 그들의 관심사는 율법을 지키는 데 있었습니다. 교회 채우겠다고 전도하면 관심사가 영혼구원에 있는 게 아닙니다. 내가 거울에 비춰야지 거울로 나를 비추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차승원처럼 보여졌으면"하는 생각은 잘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거울입니다. 그 거울에 나를 비춰야 합니다. 말씀의 정직성, 성경을 읽을 때 거울 앞에 다가가는 심정으로. 생각의 기도. 나의 낮춤을 통하여 형제가 세워지게 하소서! "마음을 다하여" 전심으로 했다.: 마음이 나뉘어지지 않았다. 우리의 관심사를 어디에 두고 있느냐에 따라 마음이 나뉘어 집니다. 시간이 있을 때 나는 주로 무엇을 하느냐? 돈이 있을 때 나는 주로 무엇을 하느냐? 시간이 남았을 때 누구를 만나느냐? 하나님나라, 주님말고 세상에 관심 둘 때 교회 왜 나가는가? 이에 대한 제자들의 답변들 (나를 찾기 위해서, 사랑의 교제, 살기 위해서, 영광을 위해서, 열매, 생활이 어려워서, 예수님을 알아가기 위해 공부, 예배, 말씀 통해 하나님 만나고 봉사하기 위해, 주님의 사랑이 좋아서, 더 사랑하기 위해서, 계명 지키기 위해서(안식일 지키기 위해서), 보답하기 위해서 등) 왜 교회가 세워졌느냐? 회개한 자들을 관리하고 세우기 위해. 오늘날 폐쇄적 교회, 그리스도인의 정서적 안정을 교회에서 찾아야 합니다. 육체 정신 영혼의 안식을 위해서. 안식이 지켜지는 날- 안식일이다. 쉼 평안의 말씀. 마 5:16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영광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이사야 1장 나의 삶의 현장에서 영광 돌리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교회는 사람을 키우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골1:2*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심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 교회의 사명입니다. 전도 양육비가 교회 예산의 20-30% 차지해야. 신학도가 교회의 시녀가 되어서 되겠는가? 하나님 나라의 종이 되어야지. 성도들은 아무 생각 없는 사람으로 키우기보다 뭔가 의식 있는 사람, 생각하며 사는 신앙인으로. 내 교회 키우는 일이 내 인생에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왜 사냐?" "내가 왜 아이를 낳았는가?" 등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면 본질적인 일을 할 수 있다. "내가 교사 왜 하냐?"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할 때는 본질적인 질문 던져야. 목자가 어떤 의식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서 주님 뜻에 가까이 갈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습니다. "뭐 하러 목회 해?" "왜 목회하나?" 구조. 흐름, 세류, 유행 따르는 목회. 신학교 갔기 때문에 교역자가 된다는 생각은 문제가 있습니다. 양심이 무뎌지는 것이 문제, 그런 상태에서 목회하면 문제가 됩니다. 시집 좀 읽으세요. 정서가 메마르면 피곤해집니다. 박노해 시 '사람만이 희망이다', 7,000원/ 이해인, 송명희 고전음악도 들으세요. 유모집도 읽으세요. 인간의 기본 감정들을 어루만질 줄 알아야 합니다. 분위기 따라 말을 부드럽게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부드러워질 때 부드러워져야. 지도자는 정서적인 안정을 가져야 합니다. 사람의 표정에는 만가지 이상이 있다고 합니다. 감정이 열리면서 영이 역사 해야 바람직합니다. 전도사들 정서교육부터 해야 합니다. 정서와 영, 지식이 함께 가야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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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성장의 첫번째 원리(2)
2008. 7. 28. 오전 1:3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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