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와 영의 식별 - 심종혁 신부님

2008. 7. 28. 오전 1:40:13

글자
강론제목: 기도와 영의 식별
강론자: 심종혁신부님
(1991년 12월 이태리 로마 그레고리안 대학 교의신학 박사,
현:신학 대학원 영성 신학 교수 재직 예수회 신부님)
일시: 2002년 10월 30일 저녁 6:30(40)-8:00
장소: 서강대학교 이냐시오성당

18:30-18:40 The 10 minutes missed...

18:40-20:00
(그리스도교 신자는 예수님을 바르게 알고 그 분의 뜻에 따라서 살기로 결심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예수님을 바르게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럼, 여러분들이 누군가를 안다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 것입니까? 예를 들어 Mr. Bush,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에 대해서 알고자 한다고 합시다. 그 사람에 대한 책자들을 읽어서 알 수가 있겠지요. 그러나 <그 사람에 '대해서' 안다>는 것과 <그 사람'을' 안다>는 것은 너무나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을 안다는 것은 그 사람과 함께 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현재 인간의 눈으로 보아서는 이곳에 안 계십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영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가지려면 어떤 방법이 있겠습니까?

첫째는, 성서를 읽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서 안에 예수님이, 영이 살아 계시다고 믿기에 바로 성서를 틈틈이 읽는 것, 그것이 모든 기도와 성찰의 시작이고 마침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하느님을 바르게 아는 것은 바로 이 성서읽기를 통해서 성서 안에서 하느님을 만남이 가능한 것입니다

이 성스런 말씀이신 예수님이 들어 계신 성서...그러니까 너무나 <귀한 성서>이니까 책꽂이에 모셔두고 있다구요? 낡아서 버려질까봐...아껴두신다구요? 여러분 염려 마십시오. 성서가 닳아지면 저희한테 연락하십시오. 얼마든지 새 성서를 제공해 드리겠습니다.

사도 바오로가 지적하셨듯이 성서는 참된 지식이 담긴 보고입니다.
바로 이 성서를 읽는 것이 예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을 얻는 첫 번째 방법입니다.

둘째는 분별력을 갖추어 읽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알기 위해서는 참된 것을 잘 식별하는 분별력을 갖추어 알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 매일 매일의 단조롭고 무미건조하고 변화없는 삶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고, 읽고, 그 찾아진 말씀, 가르침에 따라 산다는 것, 실천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러면, 나의 매일의 삶 속에서 하느님을 찾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자 예를 들어 봅시다. 우리가 이곳 신촌에서 명동성당을 가는데 버스 몇 번을 타야 하나요? 아니면 지하철을 타는 것이 좋겠습니까?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주시는 분이 하느님은 아니시지 않겠어요? 이런 일상의 사소한 질문에 대한 가르침을 주신다는 것은 아니지요. 내 일상에서 <내 삶의 본분>에 맞는 합당한 하느님의 뜻을 찾고 그에 따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찾는다는 것, 귀한 것을 찾는다는 것...에 대해서... 그럼 예를 들어봅시다. 여러분 초등학교 시절에 소풍가서 보물찾기 많이 해 보셨지요? 이런 보물찾기 같은 것이 하느님의 뜻을 찾는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이는 바로 오류를 범하는 것이지요. 갑자기 일회성의, 깜짝쇼와 같은 어떤 것을 찾는 것을 말하지 아니합니다. 구체적인 매일의 내 삶에서, 계속적으로 자기 신분에 합당한 소명을, 하느님의 뜻을 찾는 것을 말합니다.

기도란...성서 속에 계시는 예수님을 알고 친하게 되고 그분의 안목으로 세상을 보고 알게 되는 것을 청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또한 성서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성서 속의 예수님을 아는데 있어서 오류를 범하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되는데, 한번 살펴봅시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예수님께서 첫 번째 행하신 기적이 무엇인지 기억하시죠? 예, 가나안의 혼인잔치에 가셔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신 것이지요. 그 자리에는 성모님도 예수님의 제자들도 함께 계셨지요. 그래, 술이 떨어지니까 그 자리에 계셨던 어머니께서 예수님에게 그 사실을 알리셨습니다. 이 상황을 어떻게?이해, 설명해 볼 수 있을까요? 아마 이 혼인잔치는 예수님의 친척집에서 거행된 것이어서 이분들이 초청받았을 거라는 설명도 가능하겠지요.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너무 이분들에 대해 환상을 많이 만들기를 좋아합니다. 오히려 오늘 날에 비추어 보면, 요셉 성인이 세상을 떠나서 살림이 궁해져 성모 마리아님은 아마 파출부로 나갔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 더욱 타당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예수님은 요샛말로 직업도 제대로 없는 건달?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보세요. 성서 속에서 예수님의 행보를...마시기 좋아하지....일정한 직업이 없지...깡패건달은 아니지만...그리고 요셉성인도 그렇습니다. 대단한 전문가 목수였다고 생각이 잘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잡부에 가까운, 미장이 같이 역할을 했었을거고 성모 마리아님 또한 우리가 흔히 성모상에서 보는 아름답고 젊은 그런 분이 아니시고, 손은 거칠고 얼굴은 주름으로 주굴대고 막노동 등으로 인해 까맣게 된 그런 얼굴의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떻습니까? 어렸을 때부터 가출한 사람이고 성모님 속깨나 태운 아들이었을 것입니다. 하물며 홀로된 어머니를 부양하지조차 않고 떠돌아다녔던 아들일 것입니다. 그래서, 그 가나안 혼인잔치에 간 것도, 먹을 것이 없어서 얻어 먹으러 간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오히려 타당한 설명일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렇게 보아야 합니다...즉 환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런데, 어머니께서 술이 떨어졌다고 하자...예수님께서는 그것이 저와 무슨 상관입니까? 아직 때가 되지 않았습니다. 라고 답하시었지요. 그러나 뒤에?...어머니께서 아들이 시키는대로 하라고 집사에게 알리자 집사는 항아리를 준비하고 거기에 물을 가득히 채웠고 예수님께서는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러면 과연 이러한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기적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단순히 화학적 조성이 변하는 과학적 기적인 것일까요?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심오한 뜻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매일 매일 되풀이되는 삶, 그저 대부분이 다람쥐 챗바퀴 도는 삶, 그럭 저럭 살아가는 삶이라는 것이 오히려 현실입니다. 젊은 여러분들에게는 꿈이 있을 것입니다. 삶을 생기있게 하는 그런 꿈 말입니다. 맹숭맹숭하지 않는 삶 말입니다. 자, 그런데, 잔치집의 열기를 생각해 보십시오. 경쾌한 분위기에....파티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도 우리의 삶에 이러한 파티를 원하는 생기를 원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이루기를 원하는 꿈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월드컵열기와 함께 월드컵 경기장에 펼쳐졌던 ...꿈은 이루어진다☆...캐치 프레이즈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꿈은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이루어집니까? 이건 정말 대부분의 경우 망상 아닙니까? 우리의 일상생활이란 대부분 그럭저럭 영위해가는 삶입니다. 맹숭맹숭하고 생기가 사라져 버린 삶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세 받을 때 가졌던 그 생기를 잃어가고 무미해지고 그렇지 않습니까? 영세 받고 나면 성당에서 교리 공부를 계속 하지요...그저 바른 길로 가라는 교육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세요. 학교에서 문제아들 중 많은 학생이 가톨릭신자나 개신교 신자인 것을 보면 기가막히지 않습니까? 신부인 저도 그렇습니다. 저도 중2에 영세를 받았고 잘했는지 못했는지 신학교를 갔고 신부가 되었습니다. 꿈과 생기를 잃어갑니다. 신부나 수녀도 대부분 그렇습니다. 저도 수도회를 들어올 때 풍운?의 꿈을 꾸면서 예수회에 입회했지요. 모든 사람을 위해서 희생하고 봉사하는 삶을 살겠다는 각오도 단단히 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저의 수사시절에 사립갱생원에 가서 봉사를 해야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글쎄 동상걸려 죽은 행려자의 시신을 처리하는 것이었는데 몸에 이가 드글드글거리는 것을 보고 너무 싫어서 도망가버렸지 무업니까, 그냥 영화보러 가버렸다니까요. 그래요. 힘들고 더러운 일에서 도망하여 버린 적이 있었지요.

그렇습니다. 꿈은 시간이 흐르면 퇴색되어갑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혹 지나치게 보일지는 몰라도 솔직히 냉정하게 말해보면 이렇다고 생각됩니다. 세상에 우리나라에 현재 있는 그리스도인들만이라도 바르게 산다면 우리나라가 이모양 이꼴이겠습니까? 아니, 그는 관두고라도 스님, 신부님, 수녀님만이라도 다 바르게 산다면 우리나라가 이꼴로 있겠습니까? 바로 우리 주변을 봅시다. 서강대학교에 계시는 신부님들이 모두 예수님 말씀대로 살기로 작정했던 처음 결심대로만 산다면 서강대학교가 지금같겠습니까? 꿈이 이루어진다구요☆? 꿈을 이루어내려고 한다구요? 변화를 원한다구요?

아닙니다. 우리는 변화를 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일상에서 퇴색되어 갑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조잡한 인간이 위대한 꿈을 꾼다는 것조차 당치도 않는 소리입니다. 물론 그래도 대부분 좋은 동기들로 우리 삶을 출발하지요.

개도 잘못한 줄을 알고 꼬리를 내리는 것을 볼 수가 있는데, 하물며 사람이 바르게 살고자 하고, 또 영세를 받고 바른 삶을 살아가기로 결심했을 때, 그리고 잘못을 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 어찌 다시 바른 길로 가려고 노력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왜, 매일매일의 dull, 평범한 삶 속에서 의미를 찾는 것일까요? 우리는 좋은 동기로 출발하였고 바른 길로 가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가나안 혼인잔치의 의미를 생각해 봅시다. 이는 예수님께서 내 삶 속에서 함께 해주는 시간이, 현존이, 바로 활력을 되살려 준다는 기적을 행하신 것입니다. 생기가, 활발...하게, 발랄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실제 우리 삶에서는 지루해하고 살고 있으면서, 우리는 대부분 뭔가 화끈한 것으로 좋아합니다, 좀 더 강력한 것...좀 더...하고 찾습니다. 아스피린 한 알로 치유되던 두통이 이제 두알, 아니 세알이 필요합니다. 영화요? 흑백영화는 더 이상 보기 싫고 color영화여야만 되고, 폭력 영화는 한 사람 죽이는 장면으로는 더 이상 화끈함을 줄 수 없기에 두 명 아니...수 십명을 한꺼번에 죽이는 장면이 필요하게 됩니다. 그저 더 신기한 것을 찾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모순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잔잔하게 변화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작심삼일이라...3일만 지나면 대부분의 강렬한 결심도 어느새 무너져 버립니다. 기적을 보면 예수님을 믿겠다구요? 성령세미나에서 강렬한 체험을 하면 신앙이 계속 유지된다고요? 아닙니다. 저도 년전에 장충체육관에서 개최되었던 어떤 성령세미나에서 몇 건의 기적같은 일이 발생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기적을 본 것이 사람들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왔나요? 아닙니다. 변화되지 않습니다. 기적이 변화를 가져오지 않습니다. 내 안에서 불러 일으켜지는 변화가 없으면 예수님을 믿기보다 신기한 현상에만 관심을 가지면, 예수님의 현존을 인식하여 변화되지 않으면 진정한 변화란 오지 않습니다.

그럼, 왜 우리 삶에서 우리가 변화되지 않는 것일까요? 그건 우리가 예수님에 대한 바른 인식을 받아들이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변화를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내 삶이 변화하는 것을 우리는 두려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앗씨시의 프란체스코 성인처럼 변화되기를, 방지거가 되기를, 거지가 되기를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저더러 지금 가난한 빈민촌에 들어가 살라고 하신다면 저 싫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알고 싶다고 말하지만 실은 저희는 바로 알기를 두려워 합니다. 알아도 5%만 알고 싶어합니다. 100% 알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알면, 가지고 있는 모든 기득권을 버려야 하는데...진실로 알고 싶겠습니까? 이는 허망한 망상일 뿐입니다. 우리는 자기가 좋아하는 부분, 그 부분만 취하고자 합니다. 성서교육을 받는 것도 나를 정당화시켜주고 권위를 주는 부분만의 예수님을 믿고자 하는 것입니다. 복음서에서 만나는 예수님은 변화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변화에 대해 두려워하고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럼, 복음서에서 만나는 예수님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으로 어떤 사람임을 보여주십니까?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는 것일까요? 마태복음 사가에 의하면 그리고 4장 23절에 의하면 예수님은 온 갈릴레아를 두루 돌아다니시고 회당을 돌아다니시면서 첫째, 하늘나라 복음을 선포하시고 둘째 백성을 가르치시고 셋째 병을 고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이 중요한 3가지 행동을 바꿔 말하면 소위 유식한? 고상한? 표현법으로 고쳐 말하면 첫째 예언자적 사명, 둘째 왕적 사명 셋째 사제적 사명을 수행하신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 행위, 현존이 나에게도 이러한 사명을 수행하라고, 변화를 통해서 예수님을 따르는 행위를 하기를 요구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복음서를 읽으면서 기도를 하게되면 어떤 변화가 불러 일으켜지게 되는 것일까요? 바로 <회개>라는 변화입니다

복음서에 보이는 예수님의 <5가지> 모습은

첫째, 필요한만큼 사회생활을 즐기신다는 모습입니다. 우리 주위에 기도를 열심히 한다고 하면서 친구도 사귀지 않고 안에만 박혀있는 사람들 있지요? 그것이 문제입니다. 뭐 또라이...라고 부를 수 있지요. 예수님 보세요. 잔칫집에 자주 가지 않습니까? 친구의 종류도 정말 다양합니다. 술도 마시시지요. 그리고 여자친구요? 있었지요? 마리아 막달레나 말입니다. 이러한 사실의 중요성은 하느님은 모든 것을 관계 속에서 행동하셨고 관계안에 머무르셨고 즉 관계이십니다. 예수님은 이 관계 안에서 머무르시면서 일그러진 관계를 쇄신코자 하시는 것입니다. 오해가 생긴 관계를 화해로 이끄십니다. 신약성서를 읽으면 예수님께서 <기도>에 대한 언급을 많이 하시는데 그 언급들의 앞 뒤에는 늘!, 꼭!, 반드시! <화해>의 요구를 하십니다. 여러분들의 경험을 한번 살펴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기도하면 어떻습니까? 꼭 누구하고 속상한 일이 있는 것이 먼저 떠오르지 않습니까? 기도하면서 그런 생각이 떠오르면 분심이 생긴 거라고 하는 사람이 있지요? 천만에요...입니다. 기도는 추상적인 것이어서는 안됩니다. 삶의 실상을 인식하고 갈등 속에서 자존심을 버리고 화해 할 것을 요구받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도는 화해를 요구합니다. 즉, 관계 속에서 화해를 요구하고 그것도 먼저 용서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참 모순 투성이지요? 왜냐구요? 교회를 보세요, 그저 갈라지고 싸우고 있지 않습니까? 세상을 보세요. 오히려 종교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는 모순이 보이지 않습니까?

다시 돌아가서 봅시다, 관계는 바로 공동체이고 공동체는 바로 교회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는 바로 관계의 덩어리입니다. 그것도 건강한 관계와 일그러진 관계가 섞여 있는 덩어리입니다.

관계라 하면...여러분은 수도자만큼 관계의 중요성에 대해 심각하게 느낄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왜냐구요? 생각해 보세요. 수도자들의 관계는 더 밀접하게 생활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더욱이 자석이 남과 남이 북과 북이 서로 밀어내듯이, 남자들만 모여 사는 수도회, 여자들만 모여사는 수도회, 수녀원에서 어떻게 불화가 더 심하게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성서 읽다가 말이지요...맞아 맞아 바로 이렇게 못된 사람은 꼭 바로 누구누구 같애...그래 그래 바로 똑이야...딱 맞아...라고 일그러진 관계의 대상자에 대해 생각드는 것이 한 두 번이 아닐 겁니다. 수도자들 사이의 관계라고 늘 온전하고 좋을 수 없지요.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세요. 루가복음에서 최후의 만찬 때에도 결국 제자들 사이에서까지도 싸움이 일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복음서를 읽으면서, 기도를 통해서 만나게 되는 예수님은 <내가 만나게 되는> 모든 관계를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고 요구하는 것이 있습니다. 불행히도 정답은 늘 하나입니다. 바로 <내가 먼저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안하고 싶게 됩니다. 기도 안하게 됩니다.

둘째는, 기본체제의 보물? 틀, 장점을 인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예언적 도전을 하신 분이라는 점입니다. 예수님이 학교를 다니셨을까요? 정규교육을 받지 않았다고 보입니다. 그렇다고 문맹자는 아니셨습니다. 그건 회당에서 독서를 하셨고 어디에선가? 가나안의 장례식?에서 글을 쓰신 적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태어난 곳의 유대교의 맥락 속에서 보면 당시 율법과 예언서를 충분히 알고 토론하였던 것 같습니다. 물론 12살에 회당에서 토론하였다고 하는 것은 아마도 꼭 그렇지는 아니하고 그 나이에 기특하게 여겨질 정도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였다는 정도가 아닐까요? 날이 갈수록 독서도 열심히 하고 안식일날 동네에서 독서?도 하였다고 이사야서에는 두루마리?에 글도 썼다 합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신자로서 교리를 잘 모르면 안되지요(깡통이면 어떻게 합니까?)
그러나, 한편 예수님은 소위 당시 사회질서 속에서 폼잡는 기득권자에 도전을 하신 것입니다. 즉 인정할 것은 인정하되 비판을 한 것이지요. 완전히 반골이 아니 반만 반골이라고 할까요? 이에 비하면 많은 예언자들은 거의 100% 반골, 야당기질이었지요. 하여간 예수님은 1. 위선자에게 도전하고 2. 가난한 사람의 대변인 역할을 하셨습니다. 요즘 같으면 종교지도자들격인 율법학자들을 사기군과 위선자로 몰은 것이지요. 그러니 결과적으로 잡혀서 사형당할 수 밖에요.

우리도 복음서를 읽으면 요청되는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많은 경우에 벙어리가 되고 맙니다. 사회적으로 마땅히 해야할 말을 하지 못하고 정신적으로 곰배팔이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마땅히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어야 하는데...그러지 못하고, 아니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은 약점을 고치시는 분이십니다. 소경, 벙어리, 앉은뱅이들을 고치셨지요. 마땅히 해야할 것을, 마땅히 보아야할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마땅히 해야할 말을 하도록 하십니다. 우리 주변의 병적인 관계, 일그러진 관계에 화해를 가져오십니다. 그러나...먼저 고치시기 전에 주님께서는 물어보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주랴?>하고 물어 보십니다. 고쳐달라고 해야 고쳐주십니다. 눈이 멀었다는 것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것, 즉 삐딱하게 보고 의심하고 왜곡하는 것, 즉 장님과 다를 바가 없지요. 마음의 눈이 감긴 것을 올바르게 보도록 해주십니다. 바로 주님께 청할 때 말입니다.

네 번째로 주님께서는 우리를 배부르게 하시는 분입니다. 복음서를 읽을 때 진정한 삶의 음식을 탐구하고 이를 찾을 수 있도록 해주시는 분이십니다. 진정한 삶의 음식을 제공해 주시어 참 삶을 살도록 해주시는 분이십니다. 어떤 분은 '그물 안에 갇힌 고기는 죽은 고기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인간이 인간으로서 <참다운 삶을 살지 않을 때> 더 이상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즉 죽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의사이든, 사제이든 교수이든 본분을 다 하지 못하고 있을 때 죽은 것이라?할 수 있습니다. 정신의 음식, 참다운 음식에 대한 배고픔과 갈증을 채워주십니다. 우리의 질문은, 우리가 진정 무엇을 배고파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풍요로움을 주는 참다운 진리에 목말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빌라도에 의해 재판을 받고 사형을 당하게 되었을 때 두 사람간의 대화가 유명하지요. (B)너는 무엇하는 사람이냐? (J)나는 진리를 증언하는 사람이다. (B)진리가 무어냐(J) 그 질문에 대해 입다물다...

빌라도는 당대 최고의 교육을 받은, 당시 시대가 제공하는 최대의 지식인이며 권력자, 집정관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알고자 한다고 하고 교육을 더 받는 것은 실은 더 많은 salary와 더 높은 지위를 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B)진리가 무어냐...고 묻는 것은 도대체 진리가 그런 것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도대체 무슨 소용이냐?고 빌라도가 묻는 것입니다...그래 그게 도대체 중요한 거냐?고 묻는 것입니다. 요즘 세상에는 더욱 가관인 것은 쥐뿔도 모르는 사람들이 고위직에 앉아 권력을 바르게 쓰지 않고 휘두르고 있습니다. 진리, 참되고 옳은 것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지는가, 삶을 싱그럽게 해줄 무엇인가를 진정 목말라 하고 귀하게 여기는가?가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참다운 진리를 제공하여, 갈망하는 사람들을 배부르게 해주십니다

다섯 번째로, 예수님께서는 Omnibus omnia/All in all 이십니다.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어지시는 분입니다.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되어지십니다. 늘 강생하시어서 우리가 복음서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을 때 바로 이 다섯가지로서, 예수님의 현존이 우리 안에 내재한 진정한 꿈을 되살려 주십니다.

제가 <꿈은 무슨 꿈?>하고 비꼬았습니다마는 매일 매일의 침체된 생활, 다람쥐 챗바퀴도는 것과 같은 생활을 영위하는 저희들을 생기롭게하여 나의 <인식> 이전에 우리에게 이미 심어 놓으셨던 <순수한 꿈>을 되살려 주시는, 이 안에 참다운 나의 <소명>, 참다운 나 자신이 되고자 하는 <소명>을 되살려 주십니다. 이러한 <꿈>은 기도를 통하지 않고는 결코 발견할 수 없으며 개인의 소명, 나 자신의 바른 이름, 참다운 의미, 존재의 의미를 찾아낼 수 없습니다.

기도는 삶의 현장에서 하느님, 성령을 만날 수 있는 안목을 배양시켜주는 역할을 합니다. 삶의 현장에서 하느님, 예수님을 만나기 위한 준비인 기도를 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어떤 효과적인 기도방법을 모색하는 것보다 아니, 방법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이 현존하는 복음서, 성서를 매일 조금씩이라도 천천히, 속독하지 말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복음서를 읽어나가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복음은 도전에의 초대, 변화에의 초대이며, 우리 가운데 숨겨져 있는 진정한 참된 자신을 찾고, 참된 자신의 본분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예수님을 알기 위해서는 매일 매일 조금씩 성서를 읽어야 합니다. 특별한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기도하는 방법을 찾거나 하지 마십시오. 성서를 천천히 읽는 가운데 성서 속의 삶을 만나게 됩니다. 드라마틱하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평범하게 우리 삶에 나타납니다. 엔도쇼사쿠의 침묵에서 그러하듯이, 순교를 당할 때, 우리가 생각, 기대하는 것처럼, 하늘나라에서 천사가 내려와서 나팔을 불고 팡빠레가 터지지 않습니다. 이 위대한 순간에, 하느님을 사랑해서, 위해서 목숨을 내 놓아, 목이 달아나는 그 사형 집행의 순간에...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건 영화에서나 순교록 같은 영화에서나 그럴 뿐입니다. 너무나 평범하게...일상생활에서 하느님과의 만남은 평범하게 옵니다. 이렇게 말하면 오해가 생길 수도 있지만, 성서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것은 기도 중에 만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일상생활에서, 삶의 현장에서,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안목을 키우는 것이, 기도입니다. .하루에 성서를 읽는 것을 조금씩 하면, 일상적인 삶을, 주님의 안목으로 삶을 보게 합니다. 따라서 오히려 지극히 도전적인 만남이 됩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베드로 사도는 어부입니다. 루가복음 5장에서 예수님을 만날 때, 고기를 하나도 못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어부도 아닌, 즉 전문가도 아닌데, 베드로, 형님벌 같은 베드로에게 그물을, 비전문가가 다른 쪽에 치라고 한다면 그 말을 듣는 베드로가 어떤 기분이 되었겠습니까? 무시하는 발언이나, 욕설이 나오거나 하지 않겠습니까? 네가 뭘 안다고...그러냐는...그런데...베드로는 그래도 괜찮은 사람같습니다. 젊은 사람 기죽이고 싶지 않아서였을까요? 왜그랬을까요? 예수님말씀대로 다른 쪽에 그물을 칩니다. 즉 일상생활에 있어서 예수님과의 만남은 도전적입니다. 평범하게 아니 전문가적으로도 판단할 수 없읍니다. 주님께서는 여기 계셔, 저기 가면 만나지 못해...이렇게 주님에 대해, 신적인 것에 대해 전문가인 신부가 얘기했다 칩시다. 각자 이미 가지고 있는 판단 기준을 가지고 판단하게 되겠지요. 성당에 계시고 부엌에는 없단 말이야. 그런데 바로 이런 판단을 도전하는 시선을 갖게 하는 것, 바로 도전에의 초대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성서가 이러합니다. 일상적인 삶 속에서의 도전에의 초대...인 것입니다.

또 예수님 돌아가신 후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을 보십시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뭐라 하셨습니까? 예루살렘으로 가라고 하시지 않습니까? 꿈이 박살이 난 곳,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곳, 가고 싶지 않은 곳, 바로 거기에, 거기에 주님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시선을 바꾸라고 초대하는 것, 그래서 좌절감을 동반한 삶에 참여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마르타와 마리아의 경우도 보십시요. 얼마나 마리아는 얌체같고 부엍에서 일만 열심히 하던 마르타는 속이 상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무어라고 말씀하십니까, 너는 좋은 몫을 택했다고 하셨습니다. 수도원에서도 그렇습니다. 손님대접을 하는 경험이 신학원 시절 종종 있었는데...일은 실컷 다른 사람이 하고 손님 접대 자리에는 다른 사람이 앉아서 즐기는 경우가 왕왕 있지요.
이렇게 마르타가 겪는 그 좌절 속에서 바로 예수님을 응시하듯이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우리도 우리 삶 속에서, 자질구레한 삶, 좌절, 희망도 없는 이러저러한 삶 속에서, 자신의 본분을 어떻게 찾아내는가 하는 것이 우리의 소명입니다.

마지막으로 정리를 해보면
주님,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하는 마음으로 복음서를 읽어나가면, 우리 자신의 죄스러움, 나약함을 보게되고 그러나 우리 가운데 숨겨져 있는 진정한 참된 자신을 찾고, 자신의 본분을 찾도록 도와 주신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방법을 찾지 말고...조금씩 성서를 읽으십시오. 매일 매일...조금씩...조금씩

+영광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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