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봉모 신부님의 강론 노트
제목 : 일상 삶 속에서의 기도: 성찰기도의 수행
일시: 2002년 11월 3일 일요일 11:47-03:05
장소:서강대학교 이냐시오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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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혹시 지난 2002년 5월 5일 어린이날 특집 기사로 가톨릭 신문에 보도된 기도에 대한 조사 기사를 본 적이 있으십니까? 이 내용에 따르면가톨릭 신자의 60%가 기도를 한번도 하지 않았다?하고 그 중 젊은 20대 경우에는 86%가 한번도 기도하지 않았다는 충격적인 상황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 오신 분들은 대부분 신자들이시고 특히 견진교리를 듣고, 하느님의 영적 전쟁에 있어서 전사, 아니 장교가 되겠다고 준비하러 오신 분들이 대다수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조사자료에 근거햐면 여러분들 중에도 그동안 신앙생활을 해오시면서 정기적, 규칙적으로 기도를 하시는 분들이 많지 않으실 겁니다. 아니 가끔이라도 기도하시는 분들이 역시 많지 않을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기도하지 않으면 절대로 예수님과 친밀한 관계 유지하지 못합니다. 가까운 사람과 대화가 뜸해지면 친밀감이 없어지고 소홀한 관계가 됩니다. <관계>에 생기가 없어지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뜻에 가치를 두지 않고 세상적인, 인간적인 것에만 가치를, 중심을 두고 살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삶의 중심을 어디에 두고 살아야 합니까? 바로 예수님 이십니다. 그런데 기도하지 않으면 예수님을 어떻게 삶의 중심에 모실 수 있습니까? 여러분이 여기에 견진성사를 행사로만 생각하고, 또한 떼우는 생각으로 여기 와 있다면 이 견진교리를 듣는 의미가 없습니다. 저희들은 기왕에 은총으로 영세를 받은 사람입니다. 이 시간은 저희들의 신앙에 도움이 되는 은혜로운 시간으로 만들어야 하고, 견진성사를 통해서는 실제로 하는님 뜻대로 더욱 굳건히 살아가야겠다고 결심하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교보, 바오로 딸 등, 서점에서 기독교 종교서적 중 제일 많은 책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기도서라고 합니다. 왜? 왜? 기도서가 그렇게 많은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흥미가 많아서라구요? 천만에요! 아니요! 오히려 기도가 잘 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불행한 사실은 기도하는 방법에 대한 강의를 하는 사람조차, 많은 경우 기도를 잘, 제대로 하지 않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서두가 조금 무겁지만, 진실로 중요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도하지 않으면 내적 힘이 없어집니다 특히 시련 중에, 환경이 바뀌어지는 경우는 드뭅니다. 시선을 바꾸지 않으면 우리의 삶에 평화를 찾을 수 없습니다. 시련을 극복해 나갈 수 없습니다. 바로 이 <시선 바뀜>이 기도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정말 중요한 문제임으로 우리 함께 이 시간에 깊이 생각해 보십시다.
고대사에 <한나>라는 한 신심이 깊은 여인의 얘기가 나옵니다. 이 여인은 아들을 낳지 못했습니다. 당시 사회에서는 이는 수치스러운 일이었고 미래가 불안함을 내포하는 것이었습니다. 한나의 남편은 다른 부인을 얻었고 그로부터 자식을 얻었고 그 다른 부인은 불행히도 한나를 무시하였고 멸시하였습니다. 한나는 그 가슴 아픔, 원통함, 억울함, 소외됨에 대
해 성전에 나아가 울부짖으면서 고하고 기도를 하였습니다. 열심히 호소하였습니다. 거의 술취한 사람이 소리를 지르듯 간절히 외치면서 기도하였습니다. 그 때 성전 관리인이 이 여인이 정신병자나 술취한 사람이 아닌가 하여 내쫓으려고 하였습니다. 이 여인은 슬픔에 쌓여 "저는 포도주나 다른 술을 마신 적이 없답니다. 제 정신은 말짱합니다. 단지, 서러움에 북받쳐서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하고 말을 하고 기도를 마쳤습니다.
샤무엘서에는 한나가 기도 후 평화를 얻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기도후 그 여인은 하느님께서 자식을 주시겠다는 언약이라도 받았다는 것입니까? 아니었습니다. 그 질곡속에서도 하느님만큼 자신을 사랑하는 분이 없으시다는 것, 그 사랑받는 느낌, 온전히 받아들여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 확신을 갖게 되었기에 평화를 얻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기도의 힘입니다.> 기도는 당장 응답이 있어서 힘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를 변화시켜 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중병에 걸렸을 때 좌절에서 떨치고 일어날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입니다. 중병 앞에서 인내하고 평정가운데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하느님께 의지하고 간절히 기도하면 좌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힘이 생기는 변화가 오는 것 입니다.
요즘 많은 젊은 사람들이 직장을 구하는데 있어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원하는 직장을 얻는 것이 너무나 어려워 좌절에 빠져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으면, 기도로부터 힘을 얻지 못한다면.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없습니다. 일상적인 방법인 술에 의존하거나 친구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이 좌절을 이겨내고 헤쳐나아갈 마음의 평화와 힘이 결코 생겨나지 않습니다.
앤질리온?이란 미국 영화배우가 있었습니다. 여기 계신 대학생들의 경우는, 여러분들이 어렸을 때 활동?하였으니 아마 기억하지 못할겁니다만. 그녀의 20대 후반?에 은퇴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녀가 한참 유명해있던 20대 초반?에 health club에서 운동을 하다가 우연히 가슴에 딱딱한 것이 만져지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녀는 혹시 유방암이 아닐까 생각이 들어 우울한 마음이 들었고 정밀검사를 받았는데? 그 검사결과를 기다리는 동안에 밤중에도 잠을 자지 못하고 공포감과 초조감에 떨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병원에 가는 날, 운전을 하고 병원으로 향하는데, 좀 일찍 떠났다고 합니다. 마침 시간이 여유가 있어서 가던 길에 갑자기 마음이 바뀌어 성당으로 가는 길로 핸들을 꺽었습니다. 그녀는 천주교신자이었던 것입니다.
성당에 도착하여 성당을 들어가려고 하니, 그동안, 예전부터 늘 있어 왔었던 것이었으나, 그녀가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것이 갑자기 눈에 띄는 것을 알았습니다. 바로 성당 문에 쓰여진 글귀를 볼 수 있었다 합니다. 여러분, 우리도 대부분 그렇지 않습니까? 미사참례 시 성당에 겨우 일분 전에 도착하지요...너무 바빠서...?
하여간 그 사람도 그랬던 모양입니다. 언제나 있었던 그 글귀를 그 날에사 보았던 것입니다. 살레시에? 프란체스코 성인이 그 성당의 주보 성인이었는데 그 분의 말씀이 씌여 있었던 것입니다.
그 글은 이렇게 되어 있었습니다.
"언제나 주님은 너의 삶을 주관하시고 계신다(?). 하느님이 항상,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너를 고통 가운데서 함께 하시고 평화를 주신다. 그러니 모든 평안하여라, 모든 근심을 털고, 걱정을 놓아 두고 살아가면서 평안하여라..."라는 의미의 말씀이...
그녀는 성당 안으로 들어가서 기도를 드렸는데 그녀가 기도로 청한 내용은, 방금 전에 읽은 말씀이 자신의 것이 되어지도록 해달라고, 믿을 수 있게 해달라고, 고통을 견딜 수 있게 해달라고, 눈물로서, 기도를 드렸다 합니다. 성당을 나설 때는 그녀에게 참평화가 찾아 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았고) 그 결과 유방암 3기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경우 거의 희망이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었다 합니다. 그러나 다행히 수술 후 의외로 기적처럼 완치가 되었다 합니다. 하여간 그 병원의 의사와 간호사 등 진료진들이 그녀로 인해 천주교신자가 된 사람이 많게 되었는데 그것은 그녀가 수술 전후로 죽 보여준, 보통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한, 하느님을 믿고 깊은 평화가운데 임하여 행동하는 것을 보고 감동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 취직이 잘 안되어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들 중 어떤 사람들이 어딘가를 간다고 합니다. 어디요? 미아리 그리고 어디 어디에 있는 점집에 간다는 것입니다. 가톨릭 신자인 사람들은 그런 곳에 가지 않겠지요? 우리는, 신자로서 바른 기도를 드리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기도에 대해서 정말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문제 있습니다. 개신교 형제자매들과 비교해서 정말 너무 기도드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평신도는 물론이고 많은 신부나 수녀도 기도를 잘 드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디에서 영적인 힘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우리 모나미볼펜 알지요? 아직도 쓰고 있지요? 거기에 뭐라고 적혀있는 지를 한번 보세요. 153이라는 숫자가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아십니까? 이것에 대한 일화가 있습니다. 이는 최초의 모나미볼펜 회사의 사장이었던 송삼석사장?과 관련된 사연이 있는 것입니다. 그는 60년 대 초반, 파산을 했습니다. 가족과 친척, 친구들의 돈까지...재산까지 다 날려버렸습니다. 갚을 돈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먹고 살아갈 돈도 없어서 자살까지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기도를 하러 산에 올라갔답니다. 며칠동안, 울부짖으면서 하느님께 도움을 청했답니다. 그런데 마침? 성서를 보자 요한복음 21장 11절이 눈에 들어 왔답니다. 이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가 예수님을 배반하고 도망가서 다시 옛날처럼 생활을 하고 있는 모습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물을 치고 밤새 고기잡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밤 사이, 고기가 한 마리도 잡히지 않고 있는데, 저 멀리 해변가에서 ...'오른쪽으로 그물을 치라'고 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렇게 하였을 때 그들은 그물 가득 큰 고기 <153마리>를 잡았습니다. 이 구절을 보면서, 송삼석사장은 다시 힘을 얻어서 죽을 마음을 거두고, 하느님께 도와주십사고 기도를 드리고 이 말씀에 의지해서 다시 열심히 살겠다고 산을 내려 왔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사업의 성과는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 수익금은...올바른데 사용하겠다고 결심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친구들에게 염치를 불구하고 도움을 요청해서 다시 사업을 시작하여 그 유명한 모나미볼펜사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모나미볼펜!. 디자인도 별볼일도 없는 단순한 흰색에...좀 오래 쓰면 '똥'까지 나와서 하얀 종이와 손까지 지저분하게 만들지요? 그저 별...볼일 없는 싼 볼펜이지요. 그러나 이넌 흔치 않는 기적적인 사연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많이 쓰이고 있지요. 그리고 그것 아십니까? 이 모나미볼펜이 먹지를 대고 두 장 복사하려 할 때, 선명하게 가장 잘 쓰여지는 볼펜이라는 것을요?
이 얘기도 우리가 어려움이 생길 때 어디에서 힘을 얻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기도하는 모습은 어려움 앞에서 후퇴가 있어도 다시 한번 앞으로 나갈 수 있는, 전진을 다시 할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입니다. 앞으로 강론에서 약 30분? 동안 드릴 말씀도 다 이와 관련된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을 만나면 향기가 풍기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사람은 향기가 있어야 합니다. 향기있는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향기를 가지고 태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하기에 향기를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고매한 인격 형성은 인문학의 지식이 많다고 생기지 않습니다. 여러분, 정말로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 하느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가지려면 기도없이는 절대로 될 수 없습니다. 이 기도하는 것은 영적인 빵을 먹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이 삶에 대한 깨달음을 추구하는데 있어서는 고기를 먹고, 파계를 하고도, 술을 마시고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일한 신과의 인격적 만남의 종교인 그리스도교에서는 하느님을 만난다고 하지요. 다른 종교에서 그런 말을 사용합니까? 논어에서 공자님을 만난다고 합니까? 아니면 불교에서 불공을 드리면서 부처님을 만난다고 합니까? 왜 우리 종교는 그런 것일까요? 우리는 한분인신, 주님이신 예수님과의 만남의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젊은이들이 이성을 사귈 때도 이와 같습니다. 서로 만나야만 알게 됩니다. 서로 사랑한다면 서로 만나고 싶어 합니다. 주님과의 만남도 기도를 통해서 이성의 만남처럼 만나야만 서로 바르게 알고 친해지게 됩니다. 주님과도 대화를 해야 친밀함이 생기게 됩니다.
부처님 안에서 산다고 합니까? 아니지요! 그리스도교인인 우리는 성서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일상생활에서도 하느님 안에서 산다고 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씀하셨듯이 '내가 사랑하는 주님을 만나게 되는 것은 기도해야만 친밀해지고 인격적 관계에서 만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인격적인 관계에서만 우리는 주님이신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려보게 됩니다
저의 경우를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하였고 26세에 예수회 수도원에 들어왔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친밀하기 위해 예수님 말씀을 바르게 알도록 하여야 하는 것을 저는 딴짓을 많이 하였던 것입니다. 저는 매일 매일 불교철학에 심취하여 불교관련 서적들에 탐닉하고 있었습니다. 한국적인 분위기 때문이기도 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사제의 길을 가는데 투신한 뒤, 그 10년 동안 부제품을 받을 때까지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기보다는, 성경을 읽기 보다는 불경을 더...많이 읽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부제품을 받고 천진암에 있는 깔멜수녀원에서 그 기념으로 강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강론이 끝나자 한 할머니수녀님께서 저를 부르셨습니다. 그분 말씀이 "부제님이 강론 내내, 금강경이 어떻고 부처님이 어떻고 불경이 어떻고 말씀을 하셨는데 단 한번도 마태복음이나 하느님에 대해서는 단 한 말씀도 하지 않으셨으니 도대체 어떻게 되신 분이십니까? 무슨 일입니까? 그렇게 제 멋에 취해서 불교철학을 한다고 하시려면 차라리 스님이 되시지 왜 신부가 되려고 하십니까?" 하셨습니다. 저는 그 말씀에 갑자기 뒷통수를 세게 한 대 맞은 것과 같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후 저는 제가 예수님을 진실로 사랑하게 해달라고 예수님께 미치게 해달라고 늘 빌었습니다. 특히 사제서품을 받게 되었을 때, 서품 기념 상본에 마르코 복음23장에 있는...' 예수가 미쳤다는 얘기를 듣고 가족들이 염려하여...'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를 적어 넣었습니다. 저는 사제서품을 받기 위해 명동성당의 바닥에 딱 엎드려 있는 동안 진심으로 진심으로 그렇게 빌었습니다. 예수님에게 진실로 미칠 수 있게 해달라고...
여러분, 우리는 그 분이 없으면 못살겠다고 하게 되어야 합니다.
레오베? 주교라는 불란서의 신부가 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철저히 그리스도교인으로 자랐습니다. 그리고 신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신부가 된지 10년이 되었었을 때, 그가 34세가 되었었을 때 일이었답니다?. 그가 리옹근처의 사뜰라르? 라는 곳의 예수회에서 모
니에...?라는 신부님으로부터 이냐시오 영신피정?을 받을 때, 깨달으심을 받으셨다 합니다.
<전지전능한 하느님인 예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여 사람으로 되시고 우리를 계속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 우리가 사랑받는 존재라는 것, 그리스도교가 율법의 종교가 아니고 사랑의 종교라는 것을 느끼면서 홀연히 속박에서 벗어나 해방감을 느끼게 되면서 너무나 뿌듯하여 그야말로 '기뻐용약하는 느낌'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고백하기를 "제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바로 그때였다"고 말했습니다. 비로소 처음으로 깨달았다는 것을...>
우리는 대부분 그냥 성당에 <다니기만>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고,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고 그 분을 친밀하게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기도를 할 수 밖에 없지요. 아마 여러분이 이 사랑을 지금 못 느끼고 계신다면, 그것은 여러분에게는 아직 때가 아닌지도 모릅니다. 언젠가 시간이 되면 홀연히 그 분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 친밀한 관계를 느끼시게 될지도 모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함께할 벗과는 시간을 같이 나누어 친밀한 관계가 되어야 하지요. 그래야만 친밀한 관계가 유지되지요.
요즘 젊은이들이 미팅을 하면서 사용하는 언어들 중에 킹카와 폭탄이라는 것이 있다면서요? 만나자 30초면 계속 만나고 싶은 사람인지 아닌지 파악을 해서...이렇게 판단을 한다면서요? 어떻게 사람이 푸줏간의 소고기와 같습니까? 그냥 보기만 해도 좋은 등심인지 아닌지 아는 것처럼 사람을 알 수 있다는 것이 그렇게 가능한 겁니까? 그래 이목구비만 가지고 판단한다면 그렇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함께 오래 살아갈 사람을 이목구비만으로 판단한다는 것입니까? 참으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래 함께할 사람이라면 많은 시간을 서로가 함께 나누어 보아야 할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이 누군가와 사랑에 빠졌다면, 로맨스를 즐긴다면, 바쁘다고 여러분 대신에 다른 사람더러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과 자기 대신 데이트하라고 하겠습니까? 그러니 예수님 사랑한다면 예수님 만나는 시간인 기도의 시간을 갖지 않는다는 것은 정말 말도 아니됩니다. 어떻게 기도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정말, 저는 억울하게 생각되는 것이 있습니다, 정말이지 억울하고 원통하고 분한 생각까지 듭니다. 우리 개신교 형제자매들을 보십시오. 무릎꿇고 진심으로 기도하는 것을 많이 봅니다. 고속버스터미널 앞에 서서 비가오나 눈이 오나 예수님 사랑하자고 전도하고 계신 분을 보신 적이 있으시지요?(송신부님께서는 잠시...노트를 보시다가 청중을 향하시면서...웃으시며 말씀하시다...제가 가끔 강의하다 흥분하면 무슨 말했는지 놓칠 때가 있습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바빠서, 할 일이 많아서, 기도를 할 시간이 없다고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참으로 건방지고 교만한 때문입니다. 여러분을 하느님께서는 10분 뒤에라도 데려가실 수 있습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10분 뒤에라도 여러분에게 죽음이 찾아올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난리를 치던 바로 그 일들을 고스란히 다 놓고 가게 될 수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영적으로 퇴보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주일미사 참석만으로?는
영적으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우리 근육을 보십시오. 2주간만 병원에서 병상에 누워있다 나오더라도 우선 발이 휘청하면서 쉽게 걷지도 못하게 됩니다. 이와 하나도 다를 바 없습니다. 영적인 근육도 기도하지 않으면, 점점 바른 기도를 못하게 됩니다.
성서에서 예수님을 보십시오. 그 분은 너무나 바쁘셨습니다. 환자들을 치유하시느라고 종종 밥을 드실 시간조차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바쁘면 바쁠수록, 그분은 밤이나 새벽에 깨어 기도를 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 바쁠수록 기도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이 무엇 때문에 그리 바쁘셨습니까? 바로 하느님의 일 때문에 바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니까 절대 혼동하시지 마십시오. 기도하는 것과 하느님 일로 바쁜 것이 별개라는 것을!
하물며 우리는 무엇 때문에 그리 바쁩니까? 대부분 다 세속의 일을 하느라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는 하느님의 일 자체가 기도가 아닙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계속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있는 힘을 얻지 못합니다.
마더 데레사님을 보십시다. 그분도 좋은 일 하시느라, 가난한 사람과 거지들 보살피는, 하느님 일 하시느라, 봉사하시느라 끊임없이 바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수하 수녀님들에게 늘 말씀하시기를 <우리는 가끔 일하는 것을 멈추어야 한다>고 하셨답니다. 우리가 멈추어서 기도하지 않으면 가난한 자들, 우리가 돌보아야 할 사람들은 늘 이 자리에 있으나, 우리는 여기에 더 이상 없게 되는 날이 온다고 말씀하셨답니다. 그 말씀은 우리가 좋은 일한다고 기도하지 않으면 결국 언젠가는 우리들 자신이 영적으로 황폐하게 되어 더 이상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자리에 있을 수 없게 되는..즉 어떤 형태로 하느님 일을 하는 길을, 수녀의 길을 유지하지 못하고 떠날 수 밖에 없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요즘 우리들 생활에서는 우리는 바쁘기 때문에 기도할 수 없다...라는 말은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아니 됩니다. 우리가 얼마나 바쁩니까? 과거보다 더 바쁘다는 것입니까? 일주일 근무 시간이 48시간에서 앞으로는 5일 근무제가 되면 줄어들어 40시간으로 됩니다. 솔직히 우리를 돌아 봅시다. 왜 바쁩니까? 아무리 바빠도 우리는 영화도 보고 텔레비젼도 보고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는 엄청나게 시간을 쓰면서 기도하는데는 시간을 쓰지 않습니다. 바로 그래서 바쁘다고 , 노는 일 하느라고 바쁘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바쁨은 죄악입니다. 분석심리학자 융은 이런 바쁨은 악 자체라고 하였습니다. 왜 사는지..삶의 의미를 바르게 찾지 못하게 하는 바쁨은 악이라고 하였습니다. 성서의 말씀을 보십시다. <인자가 다시 오더라도 노아시대에 벌어진 것과 똑같은 일이 벌어질 것이다. 인자가 오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그리고 결혼하고 자식을 낳고 그러다가 모두가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다시 심판이? 들이닥쳐 멸망하게 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무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우리가 죄악을 저질러서 멸망한다고 하였나요? 아니, 십계명에 있는 어떤 대죄를 지어서 멸망한다고 하셨나요? 아닙니다! 그렇게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바쁘게 살더라도 아무리 분주하더라도 삶의 본질을 망각하지 말고, 아무리 바쁘더라도 왜 사느지를 가르쳐 주시는 참 사랑이신 예수님을 만나기 위한 기도를 절대로 게을리 하지 마십시오.
저 개인을 두고 봅시다. 서강대학교 교수로서 신학대 원장으로서 그리고 11개 위원회의 위원으로 양성 담당 위원 등등등으로 정말 너무 바쁩니다. 그리고 제가 결심한 일인 2년에 한번씩 저술하는 일로 원고를 쓰느라 참으로 바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 때문에 바빠야지요.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에 충실하기 위해 진정 바빠야 합니다. 시간을 꼭 내어야 합니다. 새벽 4시에라도? 깨어서 기도를 하셔야 합니다. 어차피 우리는 죽어서 예수님께 갑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당신은 누구세요? 나는 당신을 모르겠는데요?> 하시면 어떡하실건가요?
우리가 힘든 일이 많을 때, 시련에 처해 있을 때, 원서를 아무리 내어도 취직이 되지 않을 때 미팅에 가면 늘 폭탄으로 걸릴 때, 이렇게 현실적으로 구하는 것이 있을 때 간절히 기도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필요할 때 기도드리는 것은 흔히 말하는 기복신앙입니다. 물질적 축복을 청하고 현실적 도움을 청하는 기도만으로는 예수님 만날 수 없습니다.
진정한 기도는 사랑하는 분,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하고, 예수님 마음을 헤아리고 닮고 싶어하는 마음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고 3이 되어서 정말 공부도 열심히 하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게 되기를 바라면서 기도도 참으로 열심히 하였습니다. 마침내 좋은 S대(이 S대인지 저 S대인지...는 모르나)에 입학하였습니다.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런데 학교에 들어가서는 기도하는 것은 까맣게 잊고 신나게 놀고 미팅하고 지냈습니다. 그런데 불행히 마침 졸업할 때가 되자 IMF가 관리체제가 되어 취직이 되지 아니하여 일 년여 동안을 집에서 백수로 지내야 하였습니다. 그래서 홀수 날은 왼쪽편 머리로 베개를 베고 자고 짝수 날은 오른쪽편 머리로 베개를 베고 누워 방안에서 딩굴딩굴하면서 지옥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이러한 인생의 어두움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다시 하느님께 진심을 다해서 기도를 드렸습니다. 마침 기도가 통했을까요? 졸업 후 1년 반만에 대기업에 취직이 되었고 아주 승진도 잘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인물도 번듯, 학벌도 번듯, 직장도 번듯한데 아무리 해도 결혼하고 싶은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또 기도를 열심히 했습니다. 자기는 수도원에 들어가고 싶은 생각도 눈꼽만큼도 없고 독신생활할 생각도 없으니 애인을 달라고 말입니다. 또 기도 덕분인지 기도 시작 후 100 여일 만에 마음에 드는 여자가 나타나 연애를 하다가 결혼을 하고 알콩달콩 즐겁게 결혼생활을 하고 자식도 낳고 잘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또 웬일입니까 바로 이 귀여운 아들 자식이 초등학교를 다니기 시작하면서 문제가, 걱정거리가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이가 학교에서 매를 맞고 오기 시작한 때문입니다. 풍파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지요. 부부는 무릎을 꿇고 또 합심해서 기도를 하였습니다. 기도 후에? 태권도..를 배우는 것으로 결정?이 났고 아들이 태권도를 한 2년 배우게된 무렵이었습니다. 아니 이게 또 웬 날벼락입니까? 이번에는 경찰서에서 출두 명령이 났습니다. 이유인즉슨 아들 녀석이 태권도 좀 배웠다고 이제 골목대장이 되어서 여러 아이들을 주어패기 시작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러고 저러고...살아오고 있는데 이제 세월이 가면? 노인이 되어 류마티즘에 걸리고 당뇨병에 걸리고 살아가게 되겠지요. 그럼 그럴 때마다 기도를 하겠지요... 그는 평생기도를 하고 살아가겠지만 그 기도는 철저히 자기중심적이고 기복신앙에 근거한 기도입니다. 이런 기도는 진정한 의미의 기도가 아닙니다. 그는 참기쁨을 모르고 살아갈 것입니다. 필요에 의해 복을 달라고 하고 병을 낫게, 건강하게 해달라고 하는 것이 바른 기도가 아닙니다. 이는 진정한 목적이 없는 기도인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기도를 통해서 예수님과 친교를 하고 바르게 섬기는 것, 하느님을 통해서 참 기쁨, 진정한 평화를 누리면서, 하느님 닮아서 빛과 소금으로서의 사명을 이루게 해달라고 빌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 구체적으로 기도는 어떻게 하는 것인가 생각해 봅시다
첫째, 우리는 매일 규칙적으로 정해 놓은 시간에 기도를 하여야 합니다.
가장 사랑하는 분을 절대로 소홀히 해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서로를 절대로 소홀히 하지 않습니다. 하루 일과표를 짜 놓고 가능한 일정한 시간에, 고정된 시간에 기도하도록 하십시오.
생떽쥐베리의 어린왕자를 읽으셨지요? 거기에서 어린왕자에게 여우가 하는 말이 있었지요. <너 다음부터는 이런 식으로 하지 말아...약속을 하면 꼭 지켜야 해...나는 네가 4시에 온다고 하면 내 마음은 벌써 3시부터 너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가득차 있어...그런데 네가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나는 기쁜 마음으로 너를 맞이할 준비를 할 수가 없어요.> 이렇게 말입니다. 예수님도 그렇습니다.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사랑하는 분입니다. 그러니 그 분을 우리의 일과 중에 만나는 일을 가장 중요한 일로 놓으셔야 합니다. 개신교 형제 자매님들을 보십시오. 나이에 상관없이 얼마나 기도를 열심히 합니까! 저희 가톨릭에서 우리 신부님들도 신자들에게 기도를 하도록 강조를 하지 않는 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가능한 가장 집중이 잘되는 장소를 택하여 기도를 하도록 하십시다.
서강대 학생들 경우에는 얼마나 좋습니까! 서강대 성당만큼 기도하기에, 잠심에 들기에 좋은 성당이 많이 없습니다. 여러 성당에 들어가보면 알겠지만 각각 그 기도의 기운이 다르게 느껴집니다. 기도에 들어가면 경건한 자세를 잃지 마십시오. 진심으로 경건한 자세를 취하십시오. 우리가 진심으로 기도할 때 껌을 짝짝 씹을 수 있겠습니까? 아니 발을 꼬나궤고, 팔을 깍지끼고서? 경건한 기도가 되겠습니까? 기도하는 태도에도 진지한 마음이 그대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럼 구체적으로 어떻게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1. 교목처에서 기도하는 방법들 포함하여 자료를 확보하거나 기회가 제공되 수 있을겁니다
2. 성서를 읽으면서 기도할 수 있겠지요
3. 일상 생활을 통해서 기도할 수 있겠고?
4. 가톨릭 교회 본당을 통해서도 다양한 신자 재교육프로그램 등을 통해서 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선 기도하는 방법은 네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 성당에서 조배를 하면서
2. 성서를 읽으면서 우리 삶에 대한 도전을 받아들이면서
3. 생활을 하면서 그 안에서
4. 그리고 특별히 성찰기도라고 이름할 수 있는 기도가 있습니다
저는 이중에서 성찰기도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이를 유인물을 통해서 설명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하루를 살면서, 우리의 영적생활에 대해서
1. 이끌어 준 것(의식생활)에 대해서
2. 잘못 된 것(양심성찰)에 대해서 성찰하는 기도라고 하겠습니다.
어떤 식으로 기도를 하는 것이 바람직한 지를 유인물을 읽으면서 설명을 하겠습니다.
저희 예수회 수도자들은 여러 종류의 기도의 의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마침 너무 바빠서, 또는 아파서...기도를 해야 하는 것을 못하게 되는 경우, 다 면제 되나, 성찰기도만은 치매가 걸리지 않는 한 반드시 하루에 두 번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점심 전 15분 그리고 잠자기 전 15분입니다. 이것을 일곱단계로 정리하여 보았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이것은 꼭 해야 합니다.
대나무 자라는 것을 보면 중간에 마디, 막, 매듭이 있습니다. 이러한 매듭이 없다면 대나무가 곧게, 높이 자랄 수 없다고 합니다.
첫째 단계로 조명을 구하는 기도를 드립니다. 우리도 하루에 생활 속에서 한번 멈추어 서서 반성이 필요합니다. 성찰을 통해서 다시 한번,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겠노라고 매번 다짐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예를 들어 친구가 못되게 굴었을 때, 또는 내가 그에 대해 바른 대응을 하지 못하고 성질을 부렸거나 이구XX하고 욕설을 했을 때...반성을 해야 합니다.
자기 반성이 결여되면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성찰을 통해서 끊임없이 변화를 갖지 않으면 퇴화되고 속물적이 되고야 맙니다. 그래서 예수회에서는 꼭 성찰기도만큼은 의무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현존 앞에 무릎을 꿇고 15분 동안 기도를 하고 나서면 세상에 다시 나아갈 때 자신감을 얻게 되고 위축되지 않을 것입니다.
두 번째 단계로 성찰기도에서는 감사기도를 드립니다.
저의 오늘 저녁 성찰기도에서는...제가 조폭의 언어를 쓴 것을 반성할 수 밖에 없을 겁니다. 그러나 저는 이 강론을 듣고 계시는 여러분의 반짝이는 눈을 기억하고 감사기도를 분명 드릴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쌀쌀하기는 하지만 청명한 이 가을 날씨 그리고 따스한 햇살을 느낄 수 있었던 오늘 하루를 주신 것에 대해서도 감사를 드리는 것을 빠뜨리지 않을 겁니다.
세 번째 단계로는 하루의 삶에 대해 구체적으로 성찰을 하는 것입니다. 이 성찰은 유인물에 있는 것처럼...해보면 성찰하기가 쉽습니다. 즉 내가 오늘 하루를 살면서 행동하였던 것 하나 하나를, 내 안에 계신 주님과 얼마나 함께 했는가를 살피는 방식입니다. 하루에 우리 자신의 행동에 대해, '내가 했다'를 '우리가 했다'로 하나 하나 바꾸어 보십시오. 즉 예수님과 내가 얼마나 함께 했는지..를 살펴가면서 성찰하십시요.
예를 들면 '내가 어떤 일에 화를 냈습니다.'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우리'가, 예수님과 제가 함께 화를 냈습니다. 라고 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이렇듯이 '우리'가 함께 할 수 없었던 일들에 대해서 더 성찰하고 반성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 성찰기도 방법은 교회의 2000년의 영성이 포함되어 있는 방법입니다. 구도자들이 수행을 통해서 세워온 길입니다. 따라서 이 기도의 길을 버리지 말고 따라 가도록 하십시다.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바빠서, 게을러서 기도할 수 없다고 하는 것, 정말로 이는 건방져서, 교만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주님으로부터 구원을 온다는 것을 진실로 믿는다면, 그 분 없이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어거지입니다. 그런데, 최근에 참 웃지못할 일들을 듣게 됩니다. 묵주를 들고 참선 방을 찾아 다니는 가톨릭 신자들이 많다고 합니다. 길상사, 송광사, 이러 저러한 선방을 찾는 사람의 3분의 일이 천주교 신자라는 것입니다. 그 신자라고 하는 사람들의 말이 '천주교에서 찾지 못한 평화를 여기에서 찾았다'고 한답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X같은 소리입니까? 영적인 갈증 속에 헤매다가? 명상센터에서 한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거기서 하는 것은 참여자들이 함께 좌정하고 벽을 보고 조용히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현각스님 아시지요? '하바드에서 화계사까지'라는 저서를 쓴 사람말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천주교 신자였다고 하면서 가톨릭에서 찾지 못한 것을 찾았다 하는데, 그사람은 주님과 제대로 함께 한 적이 있었을까요? 정말 주님을 알고도 주님께 실망을 했을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알려고 제대로 해보지도 않고서, 만나보지도 못하고서, 하느님, 천주교에 대해서 다 안 것처럼 하고, 그리고 실망하고 평화를 찾지 못했다고 소리치는 것입니다.
늦게 시작한 관계로 여기까지 말씀을 드리고 다음 단계부터는 유인물을 참조하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리스도께 찬미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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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물: <성찰 방법>
주님의 현존 앞에 정말 머물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하루에 두 번(한낮 점심 먹기 전과 한 밤 잠자기 전) 최소한 15분 이상은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머물러 있어야합니다. 10분 정도의 기도로는 주님의 현존을 느끼기 어렵습니다. 그것은 천국의 초인종을 눌러놓고 달아나 버리는 사람과 비슷합니다. 주님께서 문을 열고 만나 주시려 나와보니, 그 사람은 이미 대문을 떠나 어딘 가로 가버린 꼴입니다.
아래에 수록되어 있는 일곱 가지 단계는 당신으로 하여금 문제의 핵심에 이르게 하여 현재
의 당신과 당신이 앞으로 어떻게 변화되어야 하는지에 관하여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 수행
은 보다 심오한 것으로 <당신이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는가에 관한 것이 아니고>, 하느님이 어떻게 당신의 깊은 마음 안에서 당신을 움직이고 끌어당기고 있는가 하는 것과 죄 많은 당신의 심성이 어떻게 하느님 아버지를 떠나려 하는가에 관한 것입니다.
당신이 당신 안에 계시는 하느님의 활동을 잘 이해하게 됨에 따라, 당신은 반드시 변화하게 됩니다. 만일 당신이 이 수행을 계속 할 수 있다면, 당신은 방향을 잃고 이리저리 방황하거나, 영적으로 타락하거나, 날로 늘어가는 죄악의 구렁텅이에 빠지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 대신에 당신은 당신을 그분께로 더욱 가깝게 인도하시고 당신 자신의 진실된 모습을 찾도록 인도해 주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 하느님은 오늘도 당신을 당신과 함께 창조하고 계십니다.
○ 당신은 이것을 믿습니까?
○ 당신을 이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까?
1단계 : 조명을 구하는 기도
주님께 도움을 청하는 기도로 시작하십시요. 오늘 반나절이 어떠했는가를 회상하기 위해 당신의 기억에 의존하고만 있어서는 안됩니다. 당신의 삶을 깊이 볼 수 있도록 성령의 안내와통찰력을 구하십시오.
다음 시편 저자의 기도를 대신해도 좋을 것입니다. "하느님 나를 살펴보시고 내 마음 알아주소서. 나를 파헤쳐 보시고 내 근심 알아주소서. 죽음의 길 걷는지 살피시고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시편 139, 23-24)
2단계 : 감사 기도
당신은 성찰에 들어가기 전에 당신이 하느님 품안에서 안전하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설혹 아무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느님 아버지만은 변함없이 당신을 사랑해주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한다면, 당신이 심리적으로 안고 있는 어두운 모습들 중 많은 것들은 저절로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먼저 아빠 하느님께서 오늘 하루 당신에게 생명을 주시고, 일용할 양식을 허락하시어 하루를 살 수 있도록 해 주었음에 감사 드립니다. 이어 특별히 아버지께 감사드리고 싶은 사건이나 체험들이 있으면 그것을 기억하면서 감사 드립니다. 크고 중요한 선물이든, 또는 작고 아주 보잘 것 없는 선물이든 당신이 그분에게서 받은 모든 개인적인 선물에 대해서 깊이 감사 드립니다.
이어 당신이 평소 전혀 모르는 사이에 받은 선물들에 대해서도 감사드리십시오. 하루를 살면서 당연하게 생각할 수 있는 것들, 하지만 하느님이 당신에게 허락해 주신 소박한 선물들에 대해서 감사 드리십시오. 태양의 햇살과 찬바람에 대해서 감사 드리고, 하느님 뜻에 일치해서 살려했던 당신의 노력에 감사 드리고, 찬공기 푸른 하늘에 감사 드리고, 다른 사람들이 내게 준 인사와 미소, 격려와 칭찬에 대해서 감사 드리십시오.
이 모든 감사는 하느님의 사랑을 막연하게 생각하자는 것이 아니라 좀 더 구체적으로 느껴보자는 것입니다.
당신 자신의 부족함을 생각하면 감사할 마음이 쉽게 일어날 것입니다. 당신 자신은 나약하고 가엾은 존재입니다. 당신은 당신이 원하는 데로 선한 일을 하거나 남을 사랑할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3단계 : 삶에 대한 실재적 성찰
당신이 보낸 반나절을 다음같이 반성해 보십시오. 당신 혼자 경험한 것과 당신과 예수님이 함께 경험한 것을 대조하면서 반나절을 정리해 보십시오. 다음과 같은 식으로 하면 됩니다.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서 기도를 했습니다(그 당시에는 설령 주님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런 다음 우리는 식사했습니다. 식사 도중 내가 크게 화를 냈었습니다. 그 후 우리는 집안청소를 했습니다. 우리는 일터에 나갔습니다. 나는 차가 늦게 간다고 화를 냈습니다. 일터에서 나는 경솔하게 사람을 판단했습니다. 일이 끝나고 나서 우리는 성당에서
조배했습니다."
이렇게 성찰하는 것은 성서적 근거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안에 살아 계십니다. 따라서 당신은(성 바오로 사도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19)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위의 방식으로 반나절을 대략 (비교적 빠른 시간에) 반성한 다음 당신이 '우리'라고 말할 수 없고 '나'라고 말해야만 했던 경우들에 시간을 들여 특별 성찰하십시오. 예를 들어 "나는 경솔하게 사람을 판단했습니다. 나는 이기적으로 행동했습니다" 등에서 반성, 개심하는 시간을 충분히 가지십시오.
당신이 당신의 날들을 이와 같은 방법으로 경건하게 반성할 때 하느님께서는 당신으로 하여금 그분이 항상 당신을 어루만지시고 당신 곁에 계신다는 사실을 민감하게 느끼도록 해주십니다. 다시 말해서 그분은 당신이 당신의 삶에 있어서 다른 모든 활동과 충동으로부터 그분의 손길을 깨닫고 진단할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4단계 : 느낌에 대한 고찰
이렇게 성찰한 뒤에는, 반나절 동안 당신 안에서 일어났던 지배적인 느낌의 세계가 어떤 것이었는지 점검하십시오. 이점검은 일기예보 보도와 비슷합니다. 일기예보 보도는 객관적이고 전체적입니다. "오늘의 날씨는 점반적으로 흐리고..." 마찬가지로 반나절 중 지배적이었던 내면 세계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반나절 내내 못마땅한 마음이었는지, 의기소침해 있었는지, 초조해 했었는지, 혼란감 속에 있었는지, 방황하고 있었는지 등 등. 반대로 적극적인 느낌의 세계를 내면 안에서 체험할 수 있었는지? 예로서 하느님 현존을 느끼면서 지냈거나, 자신감을 갖고 살았거나, 감사스러웠거나, 사람들이 사랑스럽게 다가왔거나, 살아 있다는 사실이 고마움으로 다가왔거나 등 등.
이렇게 반나절 지배적이었던 느낌 세계를 파악한 뒤, 그 느낌이 하느님을 공경하고 인간을 사랑하는 삶과 관계해서 어떤 자리 매김을 하고 있는지를 보십시오.
5단계 : 삶에 대한 의식 성찰
이제는 다음 질문에 따라서 당신 삶(외부 세계 +내면 세계)을 반성하십시오.
-하느님은 내 안에서 어떻게 일하고 계셨는가?
-하느님은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계셨는가?
-하느님은 나를 어디로 인도하시는 것 같았는가?
-하느님은 대체 나에게 어떠한 영적 선물을 주려고 하셨는가?
-하느님께서 내가 깨닫도록 해주신 어떤 죄가 있는가? 또는 내가 떨쳐버리도록 바라시는 죄는?
6단계 : 청원기도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자비와 용서 그리고 계속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청하십시오. 아버지의 사람으로 양성되어 가면서, 당신에게 절실히 필요한 은총들을 어린 아이가 선생님에게 도움을 청하듯, 어린 자녀가 아빠에게 청하듯 하느님 아버지에게 아뢰십시오. 치유가 필요하면 치유를, 위로가 필요하면 위로를, 용기가 필요하면 용기를.
7단계 : 내일을 향한 희망에 찬 결의
하느님 도움과 당신의 결심으로 내일은 좀 더 만족스럽게 살아갈 것이란 희망찬 마음을 갖으면서 주의기도로 끝내십시오.
하느님은 당신이 그분을 잘 따를 수 있도록 은총을 내려 주시고, 그분의 권능으로 당신의 나약함을 강인함으로 바꾸어 주실 것임을 확신하기에,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제목 : 일상 삶 속에서의 기도: 성찰기도의 수행
일시: 2002년 11월 3일 일요일 11:47-03:05
장소:서강대학교 이냐시오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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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혹시 지난 2002년 5월 5일 어린이날 특집 기사로 가톨릭 신문에 보도된 기도에 대한 조사 기사를 본 적이 있으십니까? 이 내용에 따르면가톨릭 신자의 60%가 기도를 한번도 하지 않았다?하고 그 중 젊은 20대 경우에는 86%가 한번도 기도하지 않았다는 충격적인 상황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 오신 분들은 대부분 신자들이시고 특히 견진교리를 듣고, 하느님의 영적 전쟁에 있어서 전사, 아니 장교가 되겠다고 준비하러 오신 분들이 대다수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조사자료에 근거햐면 여러분들 중에도 그동안 신앙생활을 해오시면서 정기적, 규칙적으로 기도를 하시는 분들이 많지 않으실 겁니다. 아니 가끔이라도 기도하시는 분들이 역시 많지 않을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기도하지 않으면 절대로 예수님과 친밀한 관계 유지하지 못합니다. 가까운 사람과 대화가 뜸해지면 친밀감이 없어지고 소홀한 관계가 됩니다. <관계>에 생기가 없어지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뜻에 가치를 두지 않고 세상적인, 인간적인 것에만 가치를, 중심을 두고 살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삶의 중심을 어디에 두고 살아야 합니까? 바로 예수님 이십니다. 그런데 기도하지 않으면 예수님을 어떻게 삶의 중심에 모실 수 있습니까? 여러분이 여기에 견진성사를 행사로만 생각하고, 또한 떼우는 생각으로 여기 와 있다면 이 견진교리를 듣는 의미가 없습니다. 저희들은 기왕에 은총으로 영세를 받은 사람입니다. 이 시간은 저희들의 신앙에 도움이 되는 은혜로운 시간으로 만들어야 하고, 견진성사를 통해서는 실제로 하는님 뜻대로 더욱 굳건히 살아가야겠다고 결심하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교보, 바오로 딸 등, 서점에서 기독교 종교서적 중 제일 많은 책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기도서라고 합니다. 왜? 왜? 기도서가 그렇게 많은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흥미가 많아서라구요? 천만에요! 아니요! 오히려 기도가 잘 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불행한 사실은 기도하는 방법에 대한 강의를 하는 사람조차, 많은 경우 기도를 잘, 제대로 하지 않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서두가 조금 무겁지만, 진실로 중요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도하지 않으면 내적 힘이 없어집니다 특히 시련 중에, 환경이 바뀌어지는 경우는 드뭅니다. 시선을 바꾸지 않으면 우리의 삶에 평화를 찾을 수 없습니다. 시련을 극복해 나갈 수 없습니다. 바로 이 <시선 바뀜>이 기도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정말 중요한 문제임으로 우리 함께 이 시간에 깊이 생각해 보십시다.
고대사에 <한나>라는 한 신심이 깊은 여인의 얘기가 나옵니다. 이 여인은 아들을 낳지 못했습니다. 당시 사회에서는 이는 수치스러운 일이었고 미래가 불안함을 내포하는 것이었습니다. 한나의 남편은 다른 부인을 얻었고 그로부터 자식을 얻었고 그 다른 부인은 불행히도 한나를 무시하였고 멸시하였습니다. 한나는 그 가슴 아픔, 원통함, 억울함, 소외됨에 대
해 성전에 나아가 울부짖으면서 고하고 기도를 하였습니다. 열심히 호소하였습니다. 거의 술취한 사람이 소리를 지르듯 간절히 외치면서 기도하였습니다. 그 때 성전 관리인이 이 여인이 정신병자나 술취한 사람이 아닌가 하여 내쫓으려고 하였습니다. 이 여인은 슬픔에 쌓여 "저는 포도주나 다른 술을 마신 적이 없답니다. 제 정신은 말짱합니다. 단지, 서러움에 북받쳐서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하고 말을 하고 기도를 마쳤습니다.
샤무엘서에는 한나가 기도 후 평화를 얻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기도후 그 여인은 하느님께서 자식을 주시겠다는 언약이라도 받았다는 것입니까? 아니었습니다. 그 질곡속에서도 하느님만큼 자신을 사랑하는 분이 없으시다는 것, 그 사랑받는 느낌, 온전히 받아들여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 확신을 갖게 되었기에 평화를 얻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기도의 힘입니다.> 기도는 당장 응답이 있어서 힘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를 변화시켜 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중병에 걸렸을 때 좌절에서 떨치고 일어날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입니다. 중병 앞에서 인내하고 평정가운데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하느님께 의지하고 간절히 기도하면 좌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힘이 생기는 변화가 오는 것 입니다.
요즘 많은 젊은 사람들이 직장을 구하는데 있어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원하는 직장을 얻는 것이 너무나 어려워 좌절에 빠져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으면, 기도로부터 힘을 얻지 못한다면.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없습니다. 일상적인 방법인 술에 의존하거나 친구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이 좌절을 이겨내고 헤쳐나아갈 마음의 평화와 힘이 결코 생겨나지 않습니다.
앤질리온?이란 미국 영화배우가 있었습니다. 여기 계신 대학생들의 경우는, 여러분들이 어렸을 때 활동?하였으니 아마 기억하지 못할겁니다만. 그녀의 20대 후반?에 은퇴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녀가 한참 유명해있던 20대 초반?에 health club에서 운동을 하다가 우연히 가슴에 딱딱한 것이 만져지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녀는 혹시 유방암이 아닐까 생각이 들어 우울한 마음이 들었고 정밀검사를 받았는데? 그 검사결과를 기다리는 동안에 밤중에도 잠을 자지 못하고 공포감과 초조감에 떨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병원에 가는 날, 운전을 하고 병원으로 향하는데, 좀 일찍 떠났다고 합니다. 마침 시간이 여유가 있어서 가던 길에 갑자기 마음이 바뀌어 성당으로 가는 길로 핸들을 꺽었습니다. 그녀는 천주교신자이었던 것입니다.
성당에 도착하여 성당을 들어가려고 하니, 그동안, 예전부터 늘 있어 왔었던 것이었으나, 그녀가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것이 갑자기 눈에 띄는 것을 알았습니다. 바로 성당 문에 쓰여진 글귀를 볼 수 있었다 합니다. 여러분, 우리도 대부분 그렇지 않습니까? 미사참례 시 성당에 겨우 일분 전에 도착하지요...너무 바빠서...?
하여간 그 사람도 그랬던 모양입니다. 언제나 있었던 그 글귀를 그 날에사 보았던 것입니다. 살레시에? 프란체스코 성인이 그 성당의 주보 성인이었는데 그 분의 말씀이 씌여 있었던 것입니다.
그 글은 이렇게 되어 있었습니다.
"언제나 주님은 너의 삶을 주관하시고 계신다(?). 하느님이 항상,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너를 고통 가운데서 함께 하시고 평화를 주신다. 그러니 모든 평안하여라, 모든 근심을 털고, 걱정을 놓아 두고 살아가면서 평안하여라..."라는 의미의 말씀이...
그녀는 성당 안으로 들어가서 기도를 드렸는데 그녀가 기도로 청한 내용은, 방금 전에 읽은 말씀이 자신의 것이 되어지도록 해달라고, 믿을 수 있게 해달라고, 고통을 견딜 수 있게 해달라고, 눈물로서, 기도를 드렸다 합니다. 성당을 나설 때는 그녀에게 참평화가 찾아 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았고) 그 결과 유방암 3기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경우 거의 희망이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었다 합니다. 그러나 다행히 수술 후 의외로 기적처럼 완치가 되었다 합니다. 하여간 그 병원의 의사와 간호사 등 진료진들이 그녀로 인해 천주교신자가 된 사람이 많게 되었는데 그것은 그녀가 수술 전후로 죽 보여준, 보통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한, 하느님을 믿고 깊은 평화가운데 임하여 행동하는 것을 보고 감동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 취직이 잘 안되어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들 중 어떤 사람들이 어딘가를 간다고 합니다. 어디요? 미아리 그리고 어디 어디에 있는 점집에 간다는 것입니다. 가톨릭 신자인 사람들은 그런 곳에 가지 않겠지요? 우리는, 신자로서 바른 기도를 드리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기도에 대해서 정말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문제 있습니다. 개신교 형제자매들과 비교해서 정말 너무 기도드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평신도는 물론이고 많은 신부나 수녀도 기도를 잘 드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디에서 영적인 힘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우리 모나미볼펜 알지요? 아직도 쓰고 있지요? 거기에 뭐라고 적혀있는 지를 한번 보세요. 153이라는 숫자가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아십니까? 이것에 대한 일화가 있습니다. 이는 최초의 모나미볼펜 회사의 사장이었던 송삼석사장?과 관련된 사연이 있는 것입니다. 그는 60년 대 초반, 파산을 했습니다. 가족과 친척, 친구들의 돈까지...재산까지 다 날려버렸습니다. 갚을 돈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먹고 살아갈 돈도 없어서 자살까지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기도를 하러 산에 올라갔답니다. 며칠동안, 울부짖으면서 하느님께 도움을 청했답니다. 그런데 마침? 성서를 보자 요한복음 21장 11절이 눈에 들어 왔답니다. 이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가 예수님을 배반하고 도망가서 다시 옛날처럼 생활을 하고 있는 모습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물을 치고 밤새 고기잡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밤 사이, 고기가 한 마리도 잡히지 않고 있는데, 저 멀리 해변가에서 ...'오른쪽으로 그물을 치라'고 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렇게 하였을 때 그들은 그물 가득 큰 고기 <153마리>를 잡았습니다. 이 구절을 보면서, 송삼석사장은 다시 힘을 얻어서 죽을 마음을 거두고, 하느님께 도와주십사고 기도를 드리고 이 말씀에 의지해서 다시 열심히 살겠다고 산을 내려 왔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사업의 성과는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 수익금은...올바른데 사용하겠다고 결심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친구들에게 염치를 불구하고 도움을 요청해서 다시 사업을 시작하여 그 유명한 모나미볼펜사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모나미볼펜!. 디자인도 별볼일도 없는 단순한 흰색에...좀 오래 쓰면 '똥'까지 나와서 하얀 종이와 손까지 지저분하게 만들지요? 그저 별...볼일 없는 싼 볼펜이지요. 그러나 이넌 흔치 않는 기적적인 사연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많이 쓰이고 있지요. 그리고 그것 아십니까? 이 모나미볼펜이 먹지를 대고 두 장 복사하려 할 때, 선명하게 가장 잘 쓰여지는 볼펜이라는 것을요?
이 얘기도 우리가 어려움이 생길 때 어디에서 힘을 얻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기도하는 모습은 어려움 앞에서 후퇴가 있어도 다시 한번 앞으로 나갈 수 있는, 전진을 다시 할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입니다. 앞으로 강론에서 약 30분? 동안 드릴 말씀도 다 이와 관련된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을 만나면 향기가 풍기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사람은 향기가 있어야 합니다. 향기있는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향기를 가지고 태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하기에 향기를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고매한 인격 형성은 인문학의 지식이 많다고 생기지 않습니다. 여러분, 정말로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 하느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가지려면 기도없이는 절대로 될 수 없습니다. 이 기도하는 것은 영적인 빵을 먹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이 삶에 대한 깨달음을 추구하는데 있어서는 고기를 먹고, 파계를 하고도, 술을 마시고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일한 신과의 인격적 만남의 종교인 그리스도교에서는 하느님을 만난다고 하지요. 다른 종교에서 그런 말을 사용합니까? 논어에서 공자님을 만난다고 합니까? 아니면 불교에서 불공을 드리면서 부처님을 만난다고 합니까? 왜 우리 종교는 그런 것일까요? 우리는 한분인신, 주님이신 예수님과의 만남의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젊은이들이 이성을 사귈 때도 이와 같습니다. 서로 만나야만 알게 됩니다. 서로 사랑한다면 서로 만나고 싶어 합니다. 주님과의 만남도 기도를 통해서 이성의 만남처럼 만나야만 서로 바르게 알고 친해지게 됩니다. 주님과도 대화를 해야 친밀함이 생기게 됩니다.
부처님 안에서 산다고 합니까? 아니지요! 그리스도교인인 우리는 성서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일상생활에서도 하느님 안에서 산다고 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씀하셨듯이 '내가 사랑하는 주님을 만나게 되는 것은 기도해야만 친밀해지고 인격적 관계에서 만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인격적인 관계에서만 우리는 주님이신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려보게 됩니다
저의 경우를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하였고 26세에 예수회 수도원에 들어왔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친밀하기 위해 예수님 말씀을 바르게 알도록 하여야 하는 것을 저는 딴짓을 많이 하였던 것입니다. 저는 매일 매일 불교철학에 심취하여 불교관련 서적들에 탐닉하고 있었습니다. 한국적인 분위기 때문이기도 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사제의 길을 가는데 투신한 뒤, 그 10년 동안 부제품을 받을 때까지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기보다는, 성경을 읽기 보다는 불경을 더...많이 읽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부제품을 받고 천진암에 있는 깔멜수녀원에서 그 기념으로 강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강론이 끝나자 한 할머니수녀님께서 저를 부르셨습니다. 그분 말씀이 "부제님이 강론 내내, 금강경이 어떻고 부처님이 어떻고 불경이 어떻고 말씀을 하셨는데 단 한번도 마태복음이나 하느님에 대해서는 단 한 말씀도 하지 않으셨으니 도대체 어떻게 되신 분이십니까? 무슨 일입니까? 그렇게 제 멋에 취해서 불교철학을 한다고 하시려면 차라리 스님이 되시지 왜 신부가 되려고 하십니까?" 하셨습니다. 저는 그 말씀에 갑자기 뒷통수를 세게 한 대 맞은 것과 같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후 저는 제가 예수님을 진실로 사랑하게 해달라고 예수님께 미치게 해달라고 늘 빌었습니다. 특히 사제서품을 받게 되었을 때, 서품 기념 상본에 마르코 복음23장에 있는...' 예수가 미쳤다는 얘기를 듣고 가족들이 염려하여...'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를 적어 넣었습니다. 저는 사제서품을 받기 위해 명동성당의 바닥에 딱 엎드려 있는 동안 진심으로 진심으로 그렇게 빌었습니다. 예수님에게 진실로 미칠 수 있게 해달라고...
여러분, 우리는 그 분이 없으면 못살겠다고 하게 되어야 합니다.
레오베? 주교라는 불란서의 신부가 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철저히 그리스도교인으로 자랐습니다. 그리고 신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신부가 된지 10년이 되었었을 때, 그가 34세가 되었었을 때 일이었답니다?. 그가 리옹근처의 사뜰라르? 라는 곳의 예수회에서 모
니에...?라는 신부님으로부터 이냐시오 영신피정?을 받을 때, 깨달으심을 받으셨다 합니다.
<전지전능한 하느님인 예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여 사람으로 되시고 우리를 계속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 우리가 사랑받는 존재라는 것, 그리스도교가 율법의 종교가 아니고 사랑의 종교라는 것을 느끼면서 홀연히 속박에서 벗어나 해방감을 느끼게 되면서 너무나 뿌듯하여 그야말로 '기뻐용약하는 느낌'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고백하기를 "제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바로 그때였다"고 말했습니다. 비로소 처음으로 깨달았다는 것을...>
우리는 대부분 그냥 성당에 <다니기만>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고,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고 그 분을 친밀하게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기도를 할 수 밖에 없지요. 아마 여러분이 이 사랑을 지금 못 느끼고 계신다면, 그것은 여러분에게는 아직 때가 아닌지도 모릅니다. 언젠가 시간이 되면 홀연히 그 분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 친밀한 관계를 느끼시게 될지도 모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함께할 벗과는 시간을 같이 나누어 친밀한 관계가 되어야 하지요. 그래야만 친밀한 관계가 유지되지요.
요즘 젊은이들이 미팅을 하면서 사용하는 언어들 중에 킹카와 폭탄이라는 것이 있다면서요? 만나자 30초면 계속 만나고 싶은 사람인지 아닌지 파악을 해서...이렇게 판단을 한다면서요? 어떻게 사람이 푸줏간의 소고기와 같습니까? 그냥 보기만 해도 좋은 등심인지 아닌지 아는 것처럼 사람을 알 수 있다는 것이 그렇게 가능한 겁니까? 그래 이목구비만 가지고 판단한다면 그렇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함께 오래 살아갈 사람을 이목구비만으로 판단한다는 것입니까? 참으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래 함께할 사람이라면 많은 시간을 서로가 함께 나누어 보아야 할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이 누군가와 사랑에 빠졌다면, 로맨스를 즐긴다면, 바쁘다고 여러분 대신에 다른 사람더러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과 자기 대신 데이트하라고 하겠습니까? 그러니 예수님 사랑한다면 예수님 만나는 시간인 기도의 시간을 갖지 않는다는 것은 정말 말도 아니됩니다. 어떻게 기도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정말, 저는 억울하게 생각되는 것이 있습니다, 정말이지 억울하고 원통하고 분한 생각까지 듭니다. 우리 개신교 형제자매들을 보십시오. 무릎꿇고 진심으로 기도하는 것을 많이 봅니다. 고속버스터미널 앞에 서서 비가오나 눈이 오나 예수님 사랑하자고 전도하고 계신 분을 보신 적이 있으시지요?(송신부님께서는 잠시...노트를 보시다가 청중을 향하시면서...웃으시며 말씀하시다...제가 가끔 강의하다 흥분하면 무슨 말했는지 놓칠 때가 있습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바빠서, 할 일이 많아서, 기도를 할 시간이 없다고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참으로 건방지고 교만한 때문입니다. 여러분을 하느님께서는 10분 뒤에라도 데려가실 수 있습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10분 뒤에라도 여러분에게 죽음이 찾아올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난리를 치던 바로 그 일들을 고스란히 다 놓고 가게 될 수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영적으로 퇴보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주일미사 참석만으로?는
영적으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우리 근육을 보십시오. 2주간만 병원에서 병상에 누워있다 나오더라도 우선 발이 휘청하면서 쉽게 걷지도 못하게 됩니다. 이와 하나도 다를 바 없습니다. 영적인 근육도 기도하지 않으면, 점점 바른 기도를 못하게 됩니다.
성서에서 예수님을 보십시오. 그 분은 너무나 바쁘셨습니다. 환자들을 치유하시느라고 종종 밥을 드실 시간조차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바쁘면 바쁠수록, 그분은 밤이나 새벽에 깨어 기도를 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 바쁠수록 기도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이 무엇 때문에 그리 바쁘셨습니까? 바로 하느님의 일 때문에 바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니까 절대 혼동하시지 마십시오. 기도하는 것과 하느님 일로 바쁜 것이 별개라는 것을!
하물며 우리는 무엇 때문에 그리 바쁩니까? 대부분 다 세속의 일을 하느라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는 하느님의 일 자체가 기도가 아닙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계속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있는 힘을 얻지 못합니다.
마더 데레사님을 보십시다. 그분도 좋은 일 하시느라, 가난한 사람과 거지들 보살피는, 하느님 일 하시느라, 봉사하시느라 끊임없이 바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수하 수녀님들에게 늘 말씀하시기를 <우리는 가끔 일하는 것을 멈추어야 한다>고 하셨답니다. 우리가 멈추어서 기도하지 않으면 가난한 자들, 우리가 돌보아야 할 사람들은 늘 이 자리에 있으나, 우리는 여기에 더 이상 없게 되는 날이 온다고 말씀하셨답니다. 그 말씀은 우리가 좋은 일한다고 기도하지 않으면 결국 언젠가는 우리들 자신이 영적으로 황폐하게 되어 더 이상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자리에 있을 수 없게 되는..즉 어떤 형태로 하느님 일을 하는 길을, 수녀의 길을 유지하지 못하고 떠날 수 밖에 없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요즘 우리들 생활에서는 우리는 바쁘기 때문에 기도할 수 없다...라는 말은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아니 됩니다. 우리가 얼마나 바쁩니까? 과거보다 더 바쁘다는 것입니까? 일주일 근무 시간이 48시간에서 앞으로는 5일 근무제가 되면 줄어들어 40시간으로 됩니다. 솔직히 우리를 돌아 봅시다. 왜 바쁩니까? 아무리 바빠도 우리는 영화도 보고 텔레비젼도 보고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는 엄청나게 시간을 쓰면서 기도하는데는 시간을 쓰지 않습니다. 바로 그래서 바쁘다고 , 노는 일 하느라고 바쁘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바쁨은 죄악입니다. 분석심리학자 융은 이런 바쁨은 악 자체라고 하였습니다. 왜 사는지..삶의 의미를 바르게 찾지 못하게 하는 바쁨은 악이라고 하였습니다. 성서의 말씀을 보십시다. <인자가 다시 오더라도 노아시대에 벌어진 것과 똑같은 일이 벌어질 것이다. 인자가 오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그리고 결혼하고 자식을 낳고 그러다가 모두가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다시 심판이? 들이닥쳐 멸망하게 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무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우리가 죄악을 저질러서 멸망한다고 하였나요? 아니, 십계명에 있는 어떤 대죄를 지어서 멸망한다고 하셨나요? 아닙니다! 그렇게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바쁘게 살더라도 아무리 분주하더라도 삶의 본질을 망각하지 말고, 아무리 바쁘더라도 왜 사느지를 가르쳐 주시는 참 사랑이신 예수님을 만나기 위한 기도를 절대로 게을리 하지 마십시오.
저 개인을 두고 봅시다. 서강대학교 교수로서 신학대 원장으로서 그리고 11개 위원회의 위원으로 양성 담당 위원 등등등으로 정말 너무 바쁩니다. 그리고 제가 결심한 일인 2년에 한번씩 저술하는 일로 원고를 쓰느라 참으로 바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 때문에 바빠야지요.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에 충실하기 위해 진정 바빠야 합니다. 시간을 꼭 내어야 합니다. 새벽 4시에라도? 깨어서 기도를 하셔야 합니다. 어차피 우리는 죽어서 예수님께 갑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당신은 누구세요? 나는 당신을 모르겠는데요?> 하시면 어떡하실건가요?
우리가 힘든 일이 많을 때, 시련에 처해 있을 때, 원서를 아무리 내어도 취직이 되지 않을 때 미팅에 가면 늘 폭탄으로 걸릴 때, 이렇게 현실적으로 구하는 것이 있을 때 간절히 기도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필요할 때 기도드리는 것은 흔히 말하는 기복신앙입니다. 물질적 축복을 청하고 현실적 도움을 청하는 기도만으로는 예수님 만날 수 없습니다.
진정한 기도는 사랑하는 분,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하고, 예수님 마음을 헤아리고 닮고 싶어하는 마음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고 3이 되어서 정말 공부도 열심히 하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게 되기를 바라면서 기도도 참으로 열심히 하였습니다. 마침내 좋은 S대(이 S대인지 저 S대인지...는 모르나)에 입학하였습니다.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런데 학교에 들어가서는 기도하는 것은 까맣게 잊고 신나게 놀고 미팅하고 지냈습니다. 그런데 불행히 마침 졸업할 때가 되자 IMF가 관리체제가 되어 취직이 되지 아니하여 일 년여 동안을 집에서 백수로 지내야 하였습니다. 그래서 홀수 날은 왼쪽편 머리로 베개를 베고 자고 짝수 날은 오른쪽편 머리로 베개를 베고 누워 방안에서 딩굴딩굴하면서 지옥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이러한 인생의 어두움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다시 하느님께 진심을 다해서 기도를 드렸습니다. 마침 기도가 통했을까요? 졸업 후 1년 반만에 대기업에 취직이 되었고 아주 승진도 잘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인물도 번듯, 학벌도 번듯, 직장도 번듯한데 아무리 해도 결혼하고 싶은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또 기도를 열심히 했습니다. 자기는 수도원에 들어가고 싶은 생각도 눈꼽만큼도 없고 독신생활할 생각도 없으니 애인을 달라고 말입니다. 또 기도 덕분인지 기도 시작 후 100 여일 만에 마음에 드는 여자가 나타나 연애를 하다가 결혼을 하고 알콩달콩 즐겁게 결혼생활을 하고 자식도 낳고 잘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또 웬일입니까 바로 이 귀여운 아들 자식이 초등학교를 다니기 시작하면서 문제가, 걱정거리가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이가 학교에서 매를 맞고 오기 시작한 때문입니다. 풍파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지요. 부부는 무릎을 꿇고 또 합심해서 기도를 하였습니다. 기도 후에? 태권도..를 배우는 것으로 결정?이 났고 아들이 태권도를 한 2년 배우게된 무렵이었습니다. 아니 이게 또 웬 날벼락입니까? 이번에는 경찰서에서 출두 명령이 났습니다. 이유인즉슨 아들 녀석이 태권도 좀 배웠다고 이제 골목대장이 되어서 여러 아이들을 주어패기 시작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러고 저러고...살아오고 있는데 이제 세월이 가면? 노인이 되어 류마티즘에 걸리고 당뇨병에 걸리고 살아가게 되겠지요. 그럼 그럴 때마다 기도를 하겠지요... 그는 평생기도를 하고 살아가겠지만 그 기도는 철저히 자기중심적이고 기복신앙에 근거한 기도입니다. 이런 기도는 진정한 의미의 기도가 아닙니다. 그는 참기쁨을 모르고 살아갈 것입니다. 필요에 의해 복을 달라고 하고 병을 낫게, 건강하게 해달라고 하는 것이 바른 기도가 아닙니다. 이는 진정한 목적이 없는 기도인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기도를 통해서 예수님과 친교를 하고 바르게 섬기는 것, 하느님을 통해서 참 기쁨, 진정한 평화를 누리면서, 하느님 닮아서 빛과 소금으로서의 사명을 이루게 해달라고 빌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 구체적으로 기도는 어떻게 하는 것인가 생각해 봅시다
첫째, 우리는 매일 규칙적으로 정해 놓은 시간에 기도를 하여야 합니다.
가장 사랑하는 분을 절대로 소홀히 해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서로를 절대로 소홀히 하지 않습니다. 하루 일과표를 짜 놓고 가능한 일정한 시간에, 고정된 시간에 기도하도록 하십시오.
생떽쥐베리의 어린왕자를 읽으셨지요? 거기에서 어린왕자에게 여우가 하는 말이 있었지요. <너 다음부터는 이런 식으로 하지 말아...약속을 하면 꼭 지켜야 해...나는 네가 4시에 온다고 하면 내 마음은 벌써 3시부터 너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가득차 있어...그런데 네가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나는 기쁜 마음으로 너를 맞이할 준비를 할 수가 없어요.> 이렇게 말입니다. 예수님도 그렇습니다.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사랑하는 분입니다. 그러니 그 분을 우리의 일과 중에 만나는 일을 가장 중요한 일로 놓으셔야 합니다. 개신교 형제 자매님들을 보십시오. 나이에 상관없이 얼마나 기도를 열심히 합니까! 저희 가톨릭에서 우리 신부님들도 신자들에게 기도를 하도록 강조를 하지 않는 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가능한 가장 집중이 잘되는 장소를 택하여 기도를 하도록 하십시다.
서강대 학생들 경우에는 얼마나 좋습니까! 서강대 성당만큼 기도하기에, 잠심에 들기에 좋은 성당이 많이 없습니다. 여러 성당에 들어가보면 알겠지만 각각 그 기도의 기운이 다르게 느껴집니다. 기도에 들어가면 경건한 자세를 잃지 마십시오. 진심으로 경건한 자세를 취하십시오. 우리가 진심으로 기도할 때 껌을 짝짝 씹을 수 있겠습니까? 아니 발을 꼬나궤고, 팔을 깍지끼고서? 경건한 기도가 되겠습니까? 기도하는 태도에도 진지한 마음이 그대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럼 구체적으로 어떻게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1. 교목처에서 기도하는 방법들 포함하여 자료를 확보하거나 기회가 제공되 수 있을겁니다
2. 성서를 읽으면서 기도할 수 있겠지요
3. 일상 생활을 통해서 기도할 수 있겠고?
4. 가톨릭 교회 본당을 통해서도 다양한 신자 재교육프로그램 등을 통해서 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선 기도하는 방법은 네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 성당에서 조배를 하면서
2. 성서를 읽으면서 우리 삶에 대한 도전을 받아들이면서
3. 생활을 하면서 그 안에서
4. 그리고 특별히 성찰기도라고 이름할 수 있는 기도가 있습니다
저는 이중에서 성찰기도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이를 유인물을 통해서 설명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하루를 살면서, 우리의 영적생활에 대해서
1. 이끌어 준 것(의식생활)에 대해서
2. 잘못 된 것(양심성찰)에 대해서 성찰하는 기도라고 하겠습니다.
어떤 식으로 기도를 하는 것이 바람직한 지를 유인물을 읽으면서 설명을 하겠습니다.
저희 예수회 수도자들은 여러 종류의 기도의 의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마침 너무 바빠서, 또는 아파서...기도를 해야 하는 것을 못하게 되는 경우, 다 면제 되나, 성찰기도만은 치매가 걸리지 않는 한 반드시 하루에 두 번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점심 전 15분 그리고 잠자기 전 15분입니다. 이것을 일곱단계로 정리하여 보았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이것은 꼭 해야 합니다.
대나무 자라는 것을 보면 중간에 마디, 막, 매듭이 있습니다. 이러한 매듭이 없다면 대나무가 곧게, 높이 자랄 수 없다고 합니다.
첫째 단계로 조명을 구하는 기도를 드립니다. 우리도 하루에 생활 속에서 한번 멈추어 서서 반성이 필요합니다. 성찰을 통해서 다시 한번,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겠노라고 매번 다짐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예를 들어 친구가 못되게 굴었을 때, 또는 내가 그에 대해 바른 대응을 하지 못하고 성질을 부렸거나 이구XX하고 욕설을 했을 때...반성을 해야 합니다.
자기 반성이 결여되면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성찰을 통해서 끊임없이 변화를 갖지 않으면 퇴화되고 속물적이 되고야 맙니다. 그래서 예수회에서는 꼭 성찰기도만큼은 의무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현존 앞에 무릎을 꿇고 15분 동안 기도를 하고 나서면 세상에 다시 나아갈 때 자신감을 얻게 되고 위축되지 않을 것입니다.
두 번째 단계로 성찰기도에서는 감사기도를 드립니다.
저의 오늘 저녁 성찰기도에서는...제가 조폭의 언어를 쓴 것을 반성할 수 밖에 없을 겁니다. 그러나 저는 이 강론을 듣고 계시는 여러분의 반짝이는 눈을 기억하고 감사기도를 분명 드릴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쌀쌀하기는 하지만 청명한 이 가을 날씨 그리고 따스한 햇살을 느낄 수 있었던 오늘 하루를 주신 것에 대해서도 감사를 드리는 것을 빠뜨리지 않을 겁니다.
세 번째 단계로는 하루의 삶에 대해 구체적으로 성찰을 하는 것입니다. 이 성찰은 유인물에 있는 것처럼...해보면 성찰하기가 쉽습니다. 즉 내가 오늘 하루를 살면서 행동하였던 것 하나 하나를, 내 안에 계신 주님과 얼마나 함께 했는가를 살피는 방식입니다. 하루에 우리 자신의 행동에 대해, '내가 했다'를 '우리가 했다'로 하나 하나 바꾸어 보십시오. 즉 예수님과 내가 얼마나 함께 했는지..를 살펴가면서 성찰하십시요.
예를 들면 '내가 어떤 일에 화를 냈습니다.'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우리'가, 예수님과 제가 함께 화를 냈습니다. 라고 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이렇듯이 '우리'가 함께 할 수 없었던 일들에 대해서 더 성찰하고 반성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 성찰기도 방법은 교회의 2000년의 영성이 포함되어 있는 방법입니다. 구도자들이 수행을 통해서 세워온 길입니다. 따라서 이 기도의 길을 버리지 말고 따라 가도록 하십시다.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바빠서, 게을러서 기도할 수 없다고 하는 것, 정말로 이는 건방져서, 교만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주님으로부터 구원을 온다는 것을 진실로 믿는다면, 그 분 없이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어거지입니다. 그런데, 최근에 참 웃지못할 일들을 듣게 됩니다. 묵주를 들고 참선 방을 찾아 다니는 가톨릭 신자들이 많다고 합니다. 길상사, 송광사, 이러 저러한 선방을 찾는 사람의 3분의 일이 천주교 신자라는 것입니다. 그 신자라고 하는 사람들의 말이 '천주교에서 찾지 못한 평화를 여기에서 찾았다'고 한답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X같은 소리입니까? 영적인 갈증 속에 헤매다가? 명상센터에서 한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거기서 하는 것은 참여자들이 함께 좌정하고 벽을 보고 조용히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현각스님 아시지요? '하바드에서 화계사까지'라는 저서를 쓴 사람말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천주교 신자였다고 하면서 가톨릭에서 찾지 못한 것을 찾았다 하는데, 그사람은 주님과 제대로 함께 한 적이 있었을까요? 정말 주님을 알고도 주님께 실망을 했을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알려고 제대로 해보지도 않고서, 만나보지도 못하고서, 하느님, 천주교에 대해서 다 안 것처럼 하고, 그리고 실망하고 평화를 찾지 못했다고 소리치는 것입니다.
늦게 시작한 관계로 여기까지 말씀을 드리고 다음 단계부터는 유인물을 참조하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리스도께 찬미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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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물: <성찰 방법>
주님의 현존 앞에 정말 머물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하루에 두 번(한낮 점심 먹기 전과 한 밤 잠자기 전) 최소한 15분 이상은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머물러 있어야합니다. 10분 정도의 기도로는 주님의 현존을 느끼기 어렵습니다. 그것은 천국의 초인종을 눌러놓고 달아나 버리는 사람과 비슷합니다. 주님께서 문을 열고 만나 주시려 나와보니, 그 사람은 이미 대문을 떠나 어딘 가로 가버린 꼴입니다.
아래에 수록되어 있는 일곱 가지 단계는 당신으로 하여금 문제의 핵심에 이르게 하여 현재
의 당신과 당신이 앞으로 어떻게 변화되어야 하는지에 관하여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 수행
은 보다 심오한 것으로 <당신이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는가에 관한 것이 아니고>, 하느님이 어떻게 당신의 깊은 마음 안에서 당신을 움직이고 끌어당기고 있는가 하는 것과 죄 많은 당신의 심성이 어떻게 하느님 아버지를 떠나려 하는가에 관한 것입니다.
당신이 당신 안에 계시는 하느님의 활동을 잘 이해하게 됨에 따라, 당신은 반드시 변화하게 됩니다. 만일 당신이 이 수행을 계속 할 수 있다면, 당신은 방향을 잃고 이리저리 방황하거나, 영적으로 타락하거나, 날로 늘어가는 죄악의 구렁텅이에 빠지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 대신에 당신은 당신을 그분께로 더욱 가깝게 인도하시고 당신 자신의 진실된 모습을 찾도록 인도해 주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 하느님은 오늘도 당신을 당신과 함께 창조하고 계십니다.
○ 당신은 이것을 믿습니까?
○ 당신을 이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까?
1단계 : 조명을 구하는 기도
주님께 도움을 청하는 기도로 시작하십시요. 오늘 반나절이 어떠했는가를 회상하기 위해 당신의 기억에 의존하고만 있어서는 안됩니다. 당신의 삶을 깊이 볼 수 있도록 성령의 안내와통찰력을 구하십시오.
다음 시편 저자의 기도를 대신해도 좋을 것입니다. "하느님 나를 살펴보시고 내 마음 알아주소서. 나를 파헤쳐 보시고 내 근심 알아주소서. 죽음의 길 걷는지 살피시고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시편 139, 23-24)
2단계 : 감사 기도
당신은 성찰에 들어가기 전에 당신이 하느님 품안에서 안전하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설혹 아무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느님 아버지만은 변함없이 당신을 사랑해주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한다면, 당신이 심리적으로 안고 있는 어두운 모습들 중 많은 것들은 저절로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먼저 아빠 하느님께서 오늘 하루 당신에게 생명을 주시고, 일용할 양식을 허락하시어 하루를 살 수 있도록 해 주었음에 감사 드립니다. 이어 특별히 아버지께 감사드리고 싶은 사건이나 체험들이 있으면 그것을 기억하면서 감사 드립니다. 크고 중요한 선물이든, 또는 작고 아주 보잘 것 없는 선물이든 당신이 그분에게서 받은 모든 개인적인 선물에 대해서 깊이 감사 드립니다.
이어 당신이 평소 전혀 모르는 사이에 받은 선물들에 대해서도 감사드리십시오. 하루를 살면서 당연하게 생각할 수 있는 것들, 하지만 하느님이 당신에게 허락해 주신 소박한 선물들에 대해서 감사 드리십시오. 태양의 햇살과 찬바람에 대해서 감사 드리고, 하느님 뜻에 일치해서 살려했던 당신의 노력에 감사 드리고, 찬공기 푸른 하늘에 감사 드리고, 다른 사람들이 내게 준 인사와 미소, 격려와 칭찬에 대해서 감사 드리십시오.
이 모든 감사는 하느님의 사랑을 막연하게 생각하자는 것이 아니라 좀 더 구체적으로 느껴보자는 것입니다.
당신 자신의 부족함을 생각하면 감사할 마음이 쉽게 일어날 것입니다. 당신 자신은 나약하고 가엾은 존재입니다. 당신은 당신이 원하는 데로 선한 일을 하거나 남을 사랑할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3단계 : 삶에 대한 실재적 성찰
당신이 보낸 반나절을 다음같이 반성해 보십시오. 당신 혼자 경험한 것과 당신과 예수님이 함께 경험한 것을 대조하면서 반나절을 정리해 보십시오. 다음과 같은 식으로 하면 됩니다.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서 기도를 했습니다(그 당시에는 설령 주님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런 다음 우리는 식사했습니다. 식사 도중 내가 크게 화를 냈었습니다. 그 후 우리는 집안청소를 했습니다. 우리는 일터에 나갔습니다. 나는 차가 늦게 간다고 화를 냈습니다. 일터에서 나는 경솔하게 사람을 판단했습니다. 일이 끝나고 나서 우리는 성당에서
조배했습니다."
이렇게 성찰하는 것은 성서적 근거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안에 살아 계십니다. 따라서 당신은(성 바오로 사도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19)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위의 방식으로 반나절을 대략 (비교적 빠른 시간에) 반성한 다음 당신이 '우리'라고 말할 수 없고 '나'라고 말해야만 했던 경우들에 시간을 들여 특별 성찰하십시오. 예를 들어 "나는 경솔하게 사람을 판단했습니다. 나는 이기적으로 행동했습니다" 등에서 반성, 개심하는 시간을 충분히 가지십시오.
당신이 당신의 날들을 이와 같은 방법으로 경건하게 반성할 때 하느님께서는 당신으로 하여금 그분이 항상 당신을 어루만지시고 당신 곁에 계신다는 사실을 민감하게 느끼도록 해주십니다. 다시 말해서 그분은 당신이 당신의 삶에 있어서 다른 모든 활동과 충동으로부터 그분의 손길을 깨닫고 진단할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4단계 : 느낌에 대한 고찰
이렇게 성찰한 뒤에는, 반나절 동안 당신 안에서 일어났던 지배적인 느낌의 세계가 어떤 것이었는지 점검하십시오. 이점검은 일기예보 보도와 비슷합니다. 일기예보 보도는 객관적이고 전체적입니다. "오늘의 날씨는 점반적으로 흐리고..." 마찬가지로 반나절 중 지배적이었던 내면 세계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반나절 내내 못마땅한 마음이었는지, 의기소침해 있었는지, 초조해 했었는지, 혼란감 속에 있었는지, 방황하고 있었는지 등 등. 반대로 적극적인 느낌의 세계를 내면 안에서 체험할 수 있었는지? 예로서 하느님 현존을 느끼면서 지냈거나, 자신감을 갖고 살았거나, 감사스러웠거나, 사람들이 사랑스럽게 다가왔거나, 살아 있다는 사실이 고마움으로 다가왔거나 등 등.
이렇게 반나절 지배적이었던 느낌 세계를 파악한 뒤, 그 느낌이 하느님을 공경하고 인간을 사랑하는 삶과 관계해서 어떤 자리 매김을 하고 있는지를 보십시오.
5단계 : 삶에 대한 의식 성찰
이제는 다음 질문에 따라서 당신 삶(외부 세계 +내면 세계)을 반성하십시오.
-하느님은 내 안에서 어떻게 일하고 계셨는가?
-하느님은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계셨는가?
-하느님은 나를 어디로 인도하시는 것 같았는가?
-하느님은 대체 나에게 어떠한 영적 선물을 주려고 하셨는가?
-하느님께서 내가 깨닫도록 해주신 어떤 죄가 있는가? 또는 내가 떨쳐버리도록 바라시는 죄는?
6단계 : 청원기도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자비와 용서 그리고 계속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청하십시오. 아버지의 사람으로 양성되어 가면서, 당신에게 절실히 필요한 은총들을 어린 아이가 선생님에게 도움을 청하듯, 어린 자녀가 아빠에게 청하듯 하느님 아버지에게 아뢰십시오. 치유가 필요하면 치유를, 위로가 필요하면 위로를, 용기가 필요하면 용기를.
7단계 : 내일을 향한 희망에 찬 결의
하느님 도움과 당신의 결심으로 내일은 좀 더 만족스럽게 살아갈 것이란 희망찬 마음을 갖으면서 주의기도로 끝내십시오.
하느님은 당신이 그분을 잘 따를 수 있도록 은총을 내려 주시고, 그분의 권능으로 당신의 나약함을 강인함으로 바꾸어 주실 것임을 확신하기에,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