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2012. 10. 7. 오후 11:02:11

글자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마태5,6)

넉넉한 의로움
마태오 복음서 5장 20-26절을 읽고
 
徐公錫 신부
 
 
“여러분의 의로움이 율사와 바리사이의 의로움보다 한결 넉넉하지 않으면 여러분은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말씀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예수께서는 율법의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해석하신다. 살인을 안 할뿐 아니라, 사람에게 성을 내지도 말고, 사람을 바보 혹은 어리석은 놈이라고 욕하지도 말라는 말씀이다. 형제와 원한 관계에 있거든, 즉시 화해하라고도 말씀하신다. 성내고, 욕하고, 원한 관계 안에 있는 것은, 다른 사람과 함께 있는 방식이 아니다. 다른 사람과 나 자신을 갈라놓고, 나와 그 사람이 다르다는 사실을 불행으로 생각하는 일이다. 나와 다른 그 사람을 긍정하고 살려서 함께 사는 것이 아니라, 다르다는 사실에 시선을 빼앗긴 나머지, 그 사람을 부정하고 경멸하는 행위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는 율사와 바리사이가 가르치고 실천하는 의로움은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서 부족하다고 말씀하신다.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서는 그보다는 ‘한결 넉넉한 의로움이’ 요구된다는 말씀이다. 율사와 바리사이는 율법을 잘 지켜야만 한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이다. 실제로 그들은 율법을 문자 그대로 잘 지키고 또 사람들에게 그렇게 강요했다. 율법을 잘 지키면 하느님은 상주시고 못 지키면 벌주신다고 믿고 있는 그들이었다. 이 세상의 질서에서는 당연한 일이다. 지킨 만큼 또 바친 만큼 혜택을 받는 우리의 세상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서 그런 의로움은 부족하다는 예수의 말씀이다.
 
율사와 바리사이는 사람들을 갈라놓는다. 율법을 잘 지키는 이와 못 지키는 이, 의인과 죄인, 경건한 이와 경건하지 못한 이를 갈라놓는다. 그들은 한 쪽에는 하느님의 축복을 약속하고, 다른 한 쪽에는 하느님의 벌을 약속한다. 예수가 오늘 복음에서 지적하는 것은 이렇게 사람을 갈라놓는 의로움은 하느님 나라의 의로움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서가 말하는 의로움을 보자. 구약성서의 예언자 아모스는 기원전 8세기에 이렇게 말했다.
“너희 순례절이 싫어 나는 얼굴을 돌린다.
축제 때마다 바치는 분향제 냄새가 역겹구나
너희가 바치는 번제물과 곡식제물이
나는 조금도 달갑지 않다...
다만 의로움을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
서로 위로하는 마음 개울같이 넘쳐흐르게 하여라“(아모 5,21-24).
 
지키고 바치는 일은 하느님이 싫어하시고 얼굴을 돌리신다고 말한다. 의로움을 강물처럼 흐르게 하고, 서로 위로하는 마음 개울같이 넘쳐흐르게 하라는 말씀이다.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데려나와서 해방과 자유를 베푸셨으니까, 사람도 사람에게 베풀어서 의로움을 실천하라는 말씀이다. 하느님의 백성은 하느님이 베푸셨다는 사실을 강물처럼 바라보고, 서로 위로하는 마음, 곧 서로에게 베푸는 실천을 개울같이 넘쳐흐르게 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사람들의 의로움은 바치는 자와 바치지 않는 자를 갈라놓지만, 하느님이 원하시는 의로움은 당신의 베푸심을 강물처럼 흐르게 하고, 사람들이 서로 위해 주는 실천을 개울같이 흐르게 하는 데에 있다는 말씀이다. 의로움은 사람과 사람을 갈라놓는 데에 있지 않고, 하느님의 베푸심을 따라 강물처럼 함께 흐르는 데에 있다는 말씀이다. 서로 위해 주고 위로하면서 개울같이 함께 흐르라는 말씀이다.
 
신약성서 복음서들 안에는 예수로 말미암아 발생한 이야기들이 있다. 그 이야기들은 예수로부터 시작한 신앙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펼쳐 보인다. 복음서의 말씀들은 우리가 지켜야 하는 법이 아니다. 우리 앞에 펼쳐진 이야기들이다. 우리가 읽고 배워서 이해하면, 이해한 그만큼 우리 삶의 이야기도 비슷하게 꾸미라고 초대하는 이야기들이다. 예수가 말씀하신 ‘넉넉한 의로움’이 무엇인지 우리는 복음서들이 전하는 이야기들 안에서 들어보아야 한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예화가 있다. 바리사이와 세리가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하는 이야기이다(루가 18,9-14). 바리사이의 기도 내용을 들어보자. ‘하느님, 감사드립니다. 사실 나는 강탈하는 자나 불의한 자나 간음하는 자 따위 다른 인간들과는 같지 않을 뿐더러 저 세리와도 같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하는 일을 나열한다. ‘한 주간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수입에서 십분의 일을 바칩니다’. 바리사이는 거짓으로 말하지 않았다. 실제로 바리사이들은 훌륭하게 율법을 지킨 사람들이다. 그러나 바리사이는 자기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강조하였다. 그는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갈라놓으면서 다른 사람들을 부정하고 멸시한다.
 
그 반면 세리의 기도 내용은 퍽 단순하다. ‘하느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기도한다. 이 세리의 기도에는 다른 사람과 자기를 갈라놓는 내용이 전혀 없다. 하느님의 자비가 자기 안에 흘러 들것을 빌고 있다. 강물처럼 흐르는 하느님의 자비가 자기 안에도 개울같이 넘쳐흐를 것을 빌고 있다. 예수는 이 예화를 이렇게 결론짓는다. ‘나는 말하거니와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가 의인이 되어 돌아갔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위한 넉넉한 의로움은 세리와 같이 하느님의 자비를 자기 안에 흘러들게 하는 데에 있다는 말씀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타란트의 비유’ 이야기가 있다(마태 25,14-30). 어떤 주인이 여행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자기 재산을 나누어주었다. 한 종에게는 다섯 탈란트, 또 한 종에게는 두 탈란트, 셋째 종에게는 한 탈란트를 주고 떠나갔다. 다섯 탈란트와 두 탈란트를 받은 종들은 받은 것을 자기 자신만을 위해 보관하지 않고, 각각 나가서 받은 것을 활용하여 더 벌었다고 한다. 그러나 한 탈란트를 받은 사람은 그것을 자기 손 안에 쥐고 생각한다. 그 탈란트를 활용했다가 잃어버리면, 주인으로부터 문책을 당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땅을 파고 그 탈란트를 숨겼다. 주인이 돌아왔을 때 앞의 두 사람은 칭찬을 받고, 마지막 사람은 비난을 받은 것으로 이 이야기는 끝난다.
 
이 비유에서 탈란트를 활용한 종들은 자기 자신만 생각하지 않았다. 주어진 탈란트는 활용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받았으니까 그 탈란트를 필요로 하는 곳에 내어 주어서 활용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그 탈란트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하나가 되었다. 탈란트를 가진 사람과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함께 있었다. 그러나 한 탈란트를 받은 사람은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자기의 안중에 없었다. 이 사람은 자기 자신은 알아도 다른 사람들을 모른다. 자기와 다른 사람들을 갈라놓고 생각한다. 자기 자신의 미래만이 소중하다. 하느님이 베푸셨으면, 우리는 그것을 다른 사람들과 나눌 때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이다. 나 자신만을 위한 의로움이 아니다. 그것은 율사와 바리사이들이 지향하던 의로움이다. 예수가 가르친, ‘하느님의 나라를 위한 넉넉한 의로움’은 하느님이 주신 것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면서, 그들과 함께 하는 것이다. 하느님이 맡기신 것은 우리의 시간일 수 있고, 우리의 재물일 수 있고, 우리가 가진 지식이나 기술일 수도 있다. 물론 우리의 마음도 함께 나누어야 하는 탈란트이다.
 
우리가 잘 아는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 이야기(루가 15,11-32)가 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이야기이다. 아들이 유산을 받아 집을 떠나 먼 곳에서 방탕한 생활로 유산을 탕진하고, 배가 고파서 아버지 집에 돌아오는 이야기이다. 아들로서 살기 위하여 오는 것이 아니라. 종으로라도 취직하여 먹고살겠다고 돌아오는 이야기이다. 아버지가 그 아들을 기쁘게 맞아들인 사실은 우리가 잘 알고 있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큰아들을 우리는 유심히 보아야 한다. 큰아들은 아버지가 동생을 받아들인 사실이 못마땅하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항의한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를 두고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어긴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제게는 벗들과 함께 즐기라고 염소새끼 한 마리 주신 적이 없더니, 아버지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버린 아들이 돌아오니까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이 큰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지 않고 잘 모셔온 자기 자신과, 유산을 받아 멀리 떠나가서 그것을 탕진해버린 자기 동생을 갈라놓고 생각한다. 우리의 삶에서는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인간의 행실을 보고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구별한다. 이 갈라놓음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넉넉한 의로움은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늘의 비유에서 아버지는 아들의 불평에 이렇게 답한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으며 내 것이 모두 네 것이다. 네 아우는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찾았으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단다“. 하느님과 함께 있는 것이 살아 있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아버지를 오랫동안 모신 큰아들도 중요하지만, 작은아들이 돌아온 사실에 대해서도 기뻐해야 한다는 아버지의 말이다. 이 기쁨에 참여할 때 두 형제는 갈라지지 않고 함께 있을 수 있다. 이것이 하느님 나라의 넉넉한 의로움이다.
 
하느님은 율법을 지키는 우리의 행실을 먼저 보고 우리를 영접하시는 분이 아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영접하면서 기뻐하시는 분이다. 우리에게 요구된 것은 하느님의 그 영접과 기쁨에 참여하는 일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우리의 이웃과 우리를 갈라놓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하느님의 일이 아니다. 이웃들, 그것도 잘못된 이웃들을 영접하여 함께 있는 노력을 해야 한다. 하느님 아버지의 넉넉한 가슴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하느님의 그 넉넉한 마음에서 나오는 넉넉한 의로움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비유들 중에 ‘선한 포도원 주인의 비유’(마태 20,1-16)가 있다. 포도원 주인이 이른 아침에 나가서 일꾼들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기로 약속하고 일꾼들을 포도원에 데려 왔다. 참고로 말하면, 한 데나리온은 당시 서민 한 가정이 하루 먹고사는데 필요한 비용이다. 주인은 그 후에도 오후 다섯 시까지 몇 번에 걸쳐 나가서 놀고 있는 사람들에게 적당한 삯을 주기로 하고 그들을 포도원에 데려 왔다. 일과가 끝나고 삯을 줄 때 주인은 뒤에 온 사람들부터 시작하여 한 데나리온씩을 주었다. 맨 먼저 온 이들은 더 받으려니 생각했다가 같은 한 데나리온씩을 받고 주인에게 투덜거렸다. 맨 나중에 온 이들은 겨우 한 시간 일했는데, 종일 노고와 무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우리의 의로움에서는 당연한 항의이다. 주인의 처사는 불공평한 일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의로움은 여기서도 사람과 사람을 갈라놓으면서 실현된다. 일꾼들은 일찍 온 사람들과 늦게 온 사람들을 갈라놓고 있다. 그들이 불평하는 것은 주인이 그들을 차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포도원 주인은 모두에게 한 데나리온씩을 주면서 사람과 사람을 갈라놓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주인이 불평하는 일꾼에게 하는 말로써 끝난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나는 맨 나중에 온 이에게도 당신과 같이 주고 싶소...내가 선하다고 해서 당신의 눈길이 사나워지는 거요?“ 주인은 사람과 사람을 갈라놓지 않았다. 모두에게 주고 싶은 그 주인의 넉넉함 안에 사람들은 모두 하나로 보였다. 이 비유 이야기는 하느님 나라의 넉넉한 의로움이 무엇인지를 말해 준다. 사람과 사람을 갈라놓는 우리의 사나운 눈길에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넉넉함이다. 하느님의 선하심과 자비로우심은 사람과 사람을 갈라놓는 우리의 잣대, 사나운 잣대로는 가늠할 수 없는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의 넉넉한 의로움을 그 질서로 하고 있다. 하느님의 선하심과 자비로우심의 넉넉한 의로움을 배우고 실천하라는 오늘 복음의 말씀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최후 심판’ 이야기(마태 25,31-46) 하나만 더 생각해 보자. 이 이야기를 최후 심판 이야기라 부르는 것은 최후 심판 장면을 묘사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이 가져야 하는 최종적 가치관을 말해 준다는 뜻이다. 하느님의 ‘함께 계심’, 곧 하느님 나라의 가치관으로 행동하는 사람이 최종적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해 준다는 뜻이다.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이다. 오른 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임금이 하는 말이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 맞아들였다. 헐벗었을 때 입혀 주었고, 병들었을 때 돌보아 주었으며, 감옥에 갇혔을 때 찾아와 주었다”. 왼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임금은 같은 말을 반복하면서 그들은 먹을 것, 마실 것을 주지 않았다고 말한다.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은 이미 발생한 갈라놓음을 없애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이다. 굶주린 사람과 굶주리지 않는 사람, 목마른 사람과 목마르지 않는 사람, 헐벗은 사람과 헐벗지 않은 사람, 병든 사람과 건강한 사람, 감옥에 갇혀서 자유를 잃은 사람과 자유로운 사람, 이런 차이를 없애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이다. 베풀고 돌보아서 모두 함께 배부르고, 모두 함께 건강하고, 모두 함께 자유롭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이다.
 
여기서도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넉넉한 의로움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예수를 하느님의 말씀이라 부른다.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말씀이 그분 삶의 이야기들 안에 들어있다는 뜻이다. 그리스도 신앙은 인간이 세상을 바라보고 추리한 결과 발생한 것이 아니다. 예수라는 한 인물 안에 하느님이 함께 계셨다는 사실에서 시작하여 하느님의 일을 배우는 신앙이다. 예수가 실천하신 삶을 보면서 우리 안에 같은 삶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고 배우는 길이다.
 
예수가 보여 주신 삶의 모습은 우리의 합리성에서 추출된 모습이 아니다. 그것이 인간 합리성의 결론으로 얻어진 것이었으면, 예수는 인류 역사의 여니 현자같이 훌륭한 스승으로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젊은 나이에 십자가에서 처형되었다. 예수가 보여준 가치 체계는 이 세상의 시선에서는 어리석음으로 보였던 것이다. 바울로 사도는 고린토 사람들에게 이렇게 쓰신다. ‘유대인은 기적을 요구하고 그리스인은 지혜를 찾습니다’(1고린 1,22). 기적과 지혜는 모든 사람을 압도하는 방편이다. 그러나 예수는 사람들을 압도하신 분이 아니었다. 인간이 압도되어 하는 행동은 인간의 자유스런 행위가 아니다. 예수는 자유롭게 사신 분이었다. 율사와 제관들의 권위에도 그분은 압도되지 않았다. 하느님은 우리가 자유로울 것을 원하신다. 하느님은 우리의 자유가 움직여서 하느님 나라의 넉넉한 의로움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될 것을 원하신다.
 
하느님의 일은 우리의 자유가 움직여서 만드는 넉넉한 의로움에 있다. 예수가 병을 고치고 죄를 용서한 것은 그 넉넉한 의로움을 자유롭게 실천한 것이었다. 베푸심, 자비, 용서, 사랑, 이런 단어들이 모두 ‘하느님 나라를 위한 넉넉한 의로움’을 표현한다. 이 넉넉한 의로움은 우리가 전혀 모르는 것이 아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실천하는 의로움이며,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여주는 넉넉함이다. 여기에는 희생도 따르고 봉사도 따르지만, 우리는 그것을 실천하면서 행복하다. 잃었던 아들을 영접한 아버지가 큰아들에게 한 말이 ‘즐거워하고 기뻐하자’는 것이었다. 넉넉한 의로움을 실천하는 사람은 많은 것을 잃기도 하고, 자기의 화려한 꿈을 접기도 하지만, 그것은 즐겁고 기뻐하면서 하는 일이다. ‘하느님 나라를 위한 우리의 넉넉한 의로움’의 실천도, 큰 십자가를 지는 것 같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푸근하고 행복한 실천이다.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최대의 혜택을 받아내어 더 잘 살아 보겠다는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그분의 생명을 살겠다는 사람들이다. ‘하느님 나라의 넉넉한 의로움’은 우리가 쉽게 실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주저하면서 조금씩 할 수 있고, 실패하고 또다시 실천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면서 우리도 그 넉넉함 안에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길을 배울 것이다. 다 된 그리스도 신앙인은 없다. 우리는 신앙인이 되는 과정에 있는 사람들이다. 해가 거듭되면서 사순절도 거듭된다. 세월과 더불어 생명은 성장도 하고 유연성을 잃어도 간다. 하느님 나라의 넉넉한 의로움과 그것을 실천하는 즐거움과 기쁨이 우리 안에 자리잡도록 빌어아 하겠다. 사람들과 나를 갈라놓고 나는 다르다고 생각해도, 세월이 흐르면 우리 모두는 비슷하게 가진 것 없이, 비슷한 모습으로 사라진다는 것도 잊지 말자. 우리 모두가 만나는 곳은 ‘하느님의 넉넉한 의로움’ 안이다. 그 넉넉한 의로움에 이방인이 되지 않게 지금부터 조만한 실천이라도 시작하자.
 
<사순시기 신앙강의 2000. 3. 17. 방배동 성당>
<신부님 홈페이지 http://my.netian.com/~kosesye/에









<묵상자료2>


배티 성지 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찬미예수님

우리들은 9월 순교자 성월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지금 순교성월을 지내고 있는지, 보내고 있는지....

순교성월을 보낸다는 것과 지낸다는 것은 단어의 차이가 아니라 그 내용이 깊은 겁니다.

순교성월을 보낸다고 하는 것은 작은 열매라도 맺고 있다는 뜻이고, 순교성월을 지내고 있다고 하는 것은 물 흐르듯이 그냥 시간이 지나고 있다는 뜻일 겁니다.


순교라고 하는 것은 영적순교와 육적 순교, 두 개가 합쳐진 것이라고 구분을 하고 싶습니다.

먼저 영적인 순교가 있습니다.

이 영적인 순교가 잘 되어야만 육적인 순교에 이를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생각하시기에 영적인 순교가 뭐겠습니까?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자기 입을 다스리는 겁니다.


한자로 거룩할 聖자를 머릿속에 그려 보십시오.

세 단어가 합쳐서 거룩할 성자가 이루어집니다.

첫 번째가 귀를 나타내는 귀 耳자에, 그 옆에 입을 나타내는 입 口자가 있고  밑에는 王자입니다.

이 王자는 뭘로 이루어졌느냐?

一획이 하늘이고 三획이 땅인데 중간에 십자가†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인은 다른 사람들이 아닙니다.

귀를 다스리고 입을 다스리고 하늘과 땅 사이에 자기 십자가로 이어 사랑하는 사람이 성인입니다.


창조주 하느님께서 사람을 진흙으로 빚으시고 난 다음에 눈, 코, 입 다 만들어 놓은 난 다음에 제일 고민하셨던 게 뭔지 압니까?

이놈의 혓바닥을 어디에 놓아야 말썽이 없을까?

고민 많이 하셨답니다.

처음에는 겨드랑에 붙여 놓았더니 걸을 때마다 자꾸 걸리적거려~~

그 다음에는 등짝에다 붙여 놓았더니 런닝 샤쓰 입을 때마다 자꾸 뒤집어져~~

그래서 고민 고민하다 “맞다, 거기가 최고의 장소다!”

컴컴하고 으슥하고~~

목젖에다 혓바닥을 붙여 놓았지~~

그러고도 창조주는 불안해서 담을 쳤습니다.

그 담이 뭐겠습니까?

사람의 입입니다.

그래도 불안하여 두꺼운 가죽을 두 개 대어 주었습니다.

그게 바로 사람의 입술입니다.

이렇게 입 조심하라고 숨기고 숨기고 만들어 주었건만~~

그저 침 튀겨 가면서 남 얘기로 시작해서 남 얘기로 끝나고~~

할머니는 틀니까지 빼 가면서 남 얘기로 시작해서 남 얘기로 끝나고~~


성인은 다른 것이 아니라 들을 걸 제대로 듣고/ 말할 때 제대로 정직하게 말해야 되고/ 침묵을 지킬 때 목에 칼이 들어와도 침묵을 지키는 사람이 바로 王이요, 바로 그 사람이 聖人입니다.


영적 순교의 첫 번째는 입을 다스리는 자다.


두 번째는 뭐겠습니까?

영적 순교가 이루어집니다.

이 입이 컨트롤되기 시작하면 쉽게 완덕으로 나가기 시작합니다.

그전 같으면 화가 나고 성질이 나면 입으로 다 했는데 입을 다스리기 시작하면 하느님께서 축복을 주십니다.

인내할 수 있는 축복을 주시고 분노가 나도 어떤 놈이 와서 쥐고 흔들어도 그 전에는 죽이고 싶도록 미웠고 복수하고 싶었는데  입을 다스리는 그 사람은 하느님의 은총을 받기에 분노가 일어나지 않고 비록 얺짢다 하더라도 화를 내지 않습니다.

사람이 하느님 앞에서 단순해집니다.

아이들은 애~앵 하고 울다가도 금새 팔딱대고 웃습니다.

바로 영적인 어린아이의 모습이 됩니다.

그러다 보면 원수를 사랑하는 단계에까지 가게 됩니다.


영적 순교라는 것은 입을 다스리는 것이요.

성질나는 것, 참는 것이요.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요

자기 악습을 이기는 겁니다.


영적순교를 한 마디로 표현하면 하느님 안에서의 포기입니다.

그런데 이 포기라고 하는 것은 상실이 아니라 회복입니다.

자기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부활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자꾸 포기하기 시작하면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을 덤으로 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내적기쁨입니다.

행복한 겁니다.


김대건신부님은 목이 잘리면서도 그 망나니에게

“목을 어떻게 내밀어야 쉽게 치실 수 있느냐!”

피를 닦고 있는 망나니는 섬찟했을 겁니다.

“내가 이놈 목을 치려고 하는데 이 사람 입에서 어떻게 목을 내밀어야 쉽게 칠 수 있는지요!”

칼을 치는 나를 다른 사람은 독을 품고 바라봤는데 이 사제는 웃으면서 온유하게 오히려 나를 위해 기도해 줄 때.....

이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닐 겁니다.

이러한 영적 순교가 잘 되어야만 육적인 순교....

다시 말하면 하느님을 위해 하나뿐인 생명을 바칠 수가 있는 겁니다.

때로는 못 먹을지라도 우리는 몸을 가지고 봉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육적인 순교입니다.


한국교회는 순교의 교회라고 합니다.

전 세계 교회가 한국교회를 부러워합니다.

교구마다 신학교를 만들 정도로 사제가 늘어나고 수도원도 수백명이 넘는 대형수도회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물론 내적인 문제가 따릅니다.

냉담자가 많이 늘어나고 있고 영성에도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때로는 사제 수도자의 영성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도 다른 나라에서는 한국을 축복받은 나라라고 보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

과연 이 축복이 현재 나에게 우리를 보고 내려주신 축복이라고 생각하는가!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200년 전에 우리 신앙 순교선열들의 피가 거름이 되어서 이제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것이지~~

현재 우리들이 삶이 아름답기 때문에 축복을 주시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 됩니다.


여러분이 생각하시기에 목을 내놓는 순교가 쉬웠겠습니까>?

천주교인들을 잡아다가 감옥에 가두고 모진 매를 때립니다.

나중에는 뼈가 막 불거져 튀어나가고 먹을 것도 주지 않고

너무너무 배가 고파서 피가 범벅이 되었던 가마때기를 뜯어서 입에 씹을 정도로...

수치감을 주기 위해 여자와 남자를 한 감방에다 집어넣습니다. 너희들이 부끄러우면 내외를 할 것이다.

포졸들이나 천주교 신자들이나 다 한동네 사람입니다.

그전 같으면 李서방, 朴서방...하던 사이였습니다.

포졸들도 그게 안타까워서 어떻게 해서든지 배교시켜서 자식들에게로 돌려보내고 싶어서 회유합니다.

“이 서방, 왜 그렇게 쉽게 죽으려고 하나~~ 자, 여기 십자가가 있으니 십자가를 발로 밟아 보게. 묵주가 있으니 묵주에다 침 한 번 뱉어. 그러면 살 수 있어~~”

밟았습니까? 안 밟았습니까?

나중에는 하도 답답해서 “이 사람아, 이렇게 목이 잘리는 것보다 새끼들한테 가는 게 네가 믿는 하느님 뜻이야... 그리고 밟고 나가서 천주교신자 다시 되면 되잖아 왜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

우리 신자들은 단 1%도 내가 이 세상을 살면서 하느님을 배반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요즘 계산적인 신자들의 계산방식으로 보면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아이, 바보, 그런 바보가 어디 있나...묵주 한 번 밟고 십자가에 침 한 번 뱉는 게 뭐가 그렇게 대단해, 나는 술만 먹으면 성모상 깬 게 수십번인데...그것 밟고 나가 고백성사 한 번 진하게 하고 보속 한번 진하게 하고 살면 되지~~ 왜 그것 한 번 못 밟고 목이 잘려~~ 아이구, 등신들...’

아마 이게 현대 우리 신앙의 현주소가 아닌가!


우리 본당에는 최양업신부님의 아버지인 최경환프란치스코 성인의 유해가 있습니다.

최경환프란치스코 성인은 아들을 마카오로 신학교를 보내고 난 다음에 그야말로 천주교 괴수가 되어가지고 잡혀 들어갔습니다.

최경환성인은 목이 잘리는 것을 소원했지만 결국에는 매를 맞아서 맷독에 운명하십니다.

최양업신부님의 어머니가 다시 핏덩어리 갓난아이를 안고 끌려 들어옵니다.

낮에는 하루 종일 매를 맞고 밤에 감옥에 들어 와서 하루 종일 울던 핏덩이 그 아이가 젖을 물려고 하니 젖이 나오겠습니까?

피로 범벅이 된 가마때기를 뜯어서 씹으며 어떻게 젖을 한 번 내어 볼까 하고 애를 쓰지만 젖이 나오지 않습니다.

결국 최양업신부님의 막내 어린 동생은 감옥에서 아사를 합니다.

그 핏덩어리가 굶어죽고 나자 이 어머니는 눈이 뒤집어집니다.

“나 하느님 안 믿소, 내 나가서 거지로 돌아다니는 나머지 새끼들이라도 내가 살려야겠소!”

어머니는 밖으로 나가서 아이들이 있는 굴속을 찾아 갑니다.

그러나 최양업신부님의 제일 큰 동생이 어머니 앞을 딱 가로막으며

어머니, 어떻게 찾아오셨어요...나중에 형님이 사제가 되어 한국에 왔을 때 어머니가 하느님을 배반하신걸 알면 어떻게 엄마가 형님의 얼굴을 대하겠소!우리들은 걱정 말고 어머니는 돌아가시오!“

그때야 어머니는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맞다, 우리 큰아들 사제가 되어 돌아올 때 내가 어찌 내 아들 얼굴을 볼 수 있겠는가! 하느님을 배반하고...”

다시 돌아가서 감방 문을 두드리고

“나 아까 한 말 취소~~다시 하느님 믿겠습니다!”

형 날짜가 정해졌습니다.

언제 어머니가 목이 짤린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아이들이 장례집, 결혼식 집을 찾아다니면서 쌀을 한 바가지씩 얻어서 쌀을 몇 말 준비합니다.

그 쌀을 짊어지고 아이들 셋이서 엄마의 목을 칠 망나니의 집을 찾아갑니다.

“아저씨, 이 쌀 받으시고 오늘 밤새 칼을 잘 갈아서  내일 우리엄마 단 한 번에 목이 떨어지게 해 주십시오”

옛날에 망나니들은 한 번에 목을 자르지 않았다고 그럽니다.

고통을 주기 위해서 처음에는 칼등으로 목뼈만 부러뜨립니다.

그다음 칼날을 바로 세워서 세 네 번에 나누어서 끊었다고 그래요....

한 번에 끊을 수 있는데도 고통을 주기 위해서....

망나니도 사람을 치는 사람이었지만 자식을 기르고 있는 처지라 그 아이들이 쌀을 모아서 (우리 엄마 한 번에 죽게 해 주십시오!) 라는 말을 듣고 이 짠했을 겁니다.

“그래, 걱정하지 마라, 내일 너희 엄마 한 번에 죽게 해 주마!”

다음날 아침 엄마는 끌려 나가서 머리를 풀어헤치고 칼을 받을 준비를 했습니다.

아이들 보고 절대 그 자리에 나타나지 말라고 했건만 막내 아이는 사람들 틈에 끼어서 울기 시작합니다.

큰 아이가 막내 동생의 입을 가로막으면서 “너 울면 안 된다, 엄마가 우리 쳐다본다...”

어찌 엄마가 자식의 흐느끼는 소리를 못 듣겠습니까!
막내아이의 그 울음소리에 소리에 얼굴을 들어보니 아이들 셋이서 사람들 틈에 끼어서 입을 다물고 울고 있는 모습이 보였어요.

순간 많이 흔들렸지만

“제가 하느님을 위해 죽는데 제 자식들 지켜주실 줄 것을 믿습니다.”

망나니는 그 아이들을 쳐다보고 엄마를 쳐다보다가 칼춤 추는 것도 포기하고 단번에 엄마의 목을 잘라 냈습니다.


순교하는 것이 어디 쉬웠겠습니까?

그 후에 아이들은 거지가 되어 떠돌아다녔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의 어머니도 역시 아들을 신학교 보냈다는 것 때문에 모진 매를 맞고 정신병자처럼 거지가 되어 떠돌아다녔습니다.

그때 천주교를 순교했던 그 가족들은 칠족을 멸했고, 어느 집안에서 천주교신자 하나가 나오면 일가친척이 벼슬길이 막히고... 그 동네에서 쫓겨나던 그 시절에 순교하는 것이 쉬웠겠습니까?

나로 인해서 내 부모가 온 친척들이 박해를 받을 것을 생각하면 목을 내놓기가 쉬웠겠습니까?

이렇게 순교는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닐 겁니다.

영적 훈련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하루아침에 어찌 순교가 가능하겠습니까?


그 영적훈련은 과연 어떤 훈련이었겠습니까?

첫 번째, 우리 신앙의 순교성인들은 수계생활에 철저했습니다.

수계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십계명을 지키는 겁니다.

하느님을 흠숭하고 인간을 존중하는 것이 십계명의 내용입니다.

십계명을 지켜도 소극적인 수계생활을 한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수계생활을 했습니다.


십계명 가운데 하지 말라! 하는 것 지키는 건 당연한 겁니다.

적극적인 수계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사랑의 계명을 철저하게 적극적으로 행하는 겁니다.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를 아실 겁니다.

라자로를 부잣집 문앞에 동네 사람들이 데려다 놓습니다.

부자는 식사 때마다 손 닦는 식빵쪼가리를 주워 다가 라자로를 먹여 살립니다.

부자는 속으로 ‘주님, 저는 축복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저 라자로는 나 아니면 벌써 굶어 죽을 놈이었습니다.

나중에 죽었는데 자기의 예상과는 빗나가게 지옥으로 떨어집니다.

여러분들이 생각하시기에 부자가 지옥에 간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부자는 지나다니면서 라자로에게 폭행한 적도 없고, 악행을 라자로에게 한 적도 없지만 부자는 지옥에 갔습니다.

부자가 지옥에 간 이유는 악을 행했기 때문이 아니라 적극적인 선을 못 베풀었기 때문에 지옥에 간 겁니다.

다시 말하면 성서 어디를 찾아봐도 <착하게만 살면 천국 간다!>

그런 이야기는 어디에 봐도 없습니다.

적극적인 선을 행해야 합니다.

간음하지 않고 도둑질 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천국 가는 증표가 아닙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적극적인 수계생활을 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흉년이 들면 외인들 동네에서는 굶어죽는 이가 속출했지만 우리 천주교 교우촌에서는 오히려 빵의 기적이 일어나서 서로 가진 것을 내놓았기 때문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을뿐더러 곡식을 모아서 외인들을 살렸다고 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비록 귀동냥해서 배운 교리였지만 하느님이 세상의 주인이시라는 하는 것을 당당하게 외치다가 혓바닥이 뽑혀 죽은 신자들도 셀 수 없이 많았습니다.

철저한 수계생활에서 오는 영적 무장이 되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두 번재, 영적 훈련은 기도생활에 철저했습니다.

기도서도 없이 일일이 손으로 써서 외우고 글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라  귀동냥으로 외우는 기도문이었지만 삼종기도, 묵주기도, 식사 전후 기도를 감옥 안에서도 철저히 했습니다.

하루 일로 몸이 파김치가 되어도 포졸들에게 쫓겨 다녀도 기도만큼은 놓치지 않았습니다.

감옥 안에서 몸이 만신창이가 되어도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절대로...절대로... 배교하지 않고 순교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세상 유혹에 넘어가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이게 두 번째 영적 훈련이었습니다.


세 번째 영적훈련은 전교생활에 철저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이 좋으신데 이걸 어떻게 하면 알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하느님을 세상에 보여드릴 수 있을까~~ 고심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박해시절이라 대놓고 전교할 수 없던 시절~~

하느님나라와 천국을 알리기 위해서 집집마다 다니면서 전교했습니다.

목숨을 건 전교였습니다.

나는 과연 세례 받고 이제까지 몇 영혼이나 하느님께로 인도 했는가~~

우리 천주교회는 조금만 관심을 가져도 교회로 올 수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말 한마디만 해도 따라올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느 형제가 교리를 배우면서 천주교는 자기발로 왔습니다.

오게 된 동기를 얘기하는데 자기 한 사무실에 자기 상사가 천주교신자였대요.

손에는 늘 묵주반지를 끼고 그분과 십몇 년을 같이 살았는데도 한번도

“너 종교가 뭐냐! 성당에 나와라!

성당 가자는 말을  한 번도 안 해 주었대요~~

올해는 해 줄까~~ 올해는 해 줄까~~

성당에 가고 싶은데 저 양반이 한 번만 얘기해 줘도 내가 못이기는 척하고 끌려 갈 텐데....

기다리다 기다리다 나중에는 지쳐서 ‘에잇, 더러워서 내 발로 가겠다!’

이렇게 찾아온 분입니다.

내 무관심, 무성의 때문에 입교시킬 수 있는 사람을 못 입교 시켰다면 나중에 죽어서 심판거리가 될 겁니다.


우리 신앙선조들은  이 세 가지 영적 훈련... 첫 번째가 뭐라고 했습니까?

수계생활에 철저했고 그 중에도 적극적이 수계생활, 선을 행하는 수계생활을 했습니다.


두 번째는 뭐라고 했습니까?

그렇지요~~ 기도생활에 철저했다!

밤이나 낮이나 기도는 주님과 나의 끈이라고 생각했고 이 끈을 놓으면 나는 세상에서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세 번째 영적훈련은 전교생활에 철저했습니다.

전교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이 아니라 의무입니다.

나중에 심판거리 중의 하나가 주님 앞에 갔을 때

“너 천주교신자로 50년을 살다가 왔는데 네가 50년 동안 네 입으로 기도로 내 앞에 끌어다 놓은 영혼이 몇 명이나 되느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한 명도 없습니다.”

“그것도 입이라고 떠드냐?”

그 사람 갈 데는 뻔합니다.
우리도 영적 훈련을 게을리 하지 맙시다.


그리고 흔들릴 때마다 순교성인들께 전구 청합시다.

천상에 계신 순교성인, 김대건 안드레아신부님, 정하상 바오로 성인, 동료순교성인이시어!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시고 이 매괴성당이 성모성지로 거듭 날 수 있도록 빌어주소서! 아멘.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 카페에서
              
              
               
 

댓글 0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