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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탐구> 한반도 핵무기, 그 파괴적 유혹
연합뉴스 기사전송 2006-10-16 11:27
임형두 편집위원 = 핵무기 열풍이 한반도를 훑고 있다. 상황은 북한이 핵무기 실험을 했다고 지난 9일 전격 발표하면서 시작됐다. 정확한 실상은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한반도는 이미 심리적으로 원폭 투하상태다. 나아가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등 주변국도 사태해결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언론의 '선정보도'가 국민들의 불안심리를 지나치게 자극한다는 지적이 일부 있으나 북한의 핵보유 선언이라는 초유의 상황을 맞아 긴장상태로 빠져드는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하다. 북한의 핵실험 선언은 벌써 남한에서 미국의 핵우산을 제공받자는 논란으로 번지고 있다. 사태는 경우에 따라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공산이 있다. 물론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극적 반전과 상황의 연착륙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치명적 대량살상무기인 핵은 그 무서움만큼이나 유혹도 크다. 때로는 공격용으로, 때로는 방어용으로 상대방을 재기불능의 빠뜨리면서도 자신은 지킬 수 있다고 믿는다. 그 결정적 타격효과에 비해 소요비용은 저렴한 편이어서 '지옥의 문'이 잡아끄는 유혹은 더욱 집요하다.
하지만 핵무기는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극약처방이 부르는 후유증은 최소한 일방의 절멸을 가져오며 자신 또한 그에 버금가는 치명상을 입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위험이 상상을 초월하기에 오히려 안전하다는 역설이 현실을 지배하기도 한다. 사자와 호랑이는 일거에 상대를 괴멸시킬 수 있는 발톱과 이빨을 가졌기에 서로 싸우지 않는다는, 이른바 '핵클럽' 논리다.
한반도가 핵무기의 위기에 빠져든 것은 크게 봐서 이번이 세 번째다.
한국전쟁 초기에 맥아더 사령관이 수십 개의 핵폭탄 사용권을 트루먼 대통령에게 요청했다가 중도에 무산된 경우가 그 첫번째라고 할 수 있다. 북한은 당시 간발의 차이로 핵무기의 대재앙에서 벗어났다. 두 번째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핵무기 개발시도였다. 그러나 미국의 집중견제를 받아 유야무야된 가운데 추진자인 박 전 대통령은 비극의 운명을 맞았다.
북한은 1990년대 초반부터 핵무기 개발에 관심을 기울여왔다. 핵무기만이 자신의 생존을 보장한다고 믿는 듯하다. 다시 말해 이번에는 미국과 남한이 아닌 북한이 핵의 유혹에 말려들어 미국에 도전장을 던지고 남한을 10여년째 공포에 빠뜨리고 있는 것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도박은 과연 어떤 결과로 이어질 것인가. 상황이 급박하게 전개되는 현재진행형이어서 그 결말은 아무도 모른다.
지난 50여년 동안 한반도를 극한 상황으로 몰고갈 수 있었던 세 번의 핵무기 투하 계획 또는 개발 시도를 돌아본다.
◇맥아더의 핵무기 투하 추진 = "원자폭탄 사용을 적극 검토하고 있다"
중공군이 압록강을 건너 대대적으로 반격에 나선 가운데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1950년 11월 30일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도쿄 맥아더사령부의 정보처 특수계획과장이던 필립 코르소는 당시 한국에는 40개의 원자탄이 배치돼 있었다고 증언했다.
트루먼의 원폭 사용 선언에 깜짝 놀란 사람 중 하나는 영국의 클레멘트 애틀리 총리. 그는 급히 미국으로 날아가 12월 4일부터 8일까지 여섯 차례의 정상회담을 거듭하며 트루먼을 말렸다. 당시 애틀리는 한국에서 원폭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문서로 해달라고 요구했으나 트루먼은 구두로만 그러겠노라고 다짐했다.
그러나 이후 원자폭탄 사용계획은 폐기되지 않았다. 특히 맥아더 사령관은 투하 원폭을 26개로 정해놓은 가운데 1950년 12월 30일 중국 본토 투하를 워싱턴의 합참에 요청했다. 당시 맥아더의 구상은 중국 공격을 통한 확전이었다.
맥아더의 원폭 요청은 끈질지게 이어졌다. 1951년 1월 10일, 그는 다시 합참에 "현 여건에서는 남한에서 전선을 유지하기 힘들다. 유엔군 철수가 불가피하다. 한반에서 철수할 것인지, 아니면 계속 한반도를 지킬 것인지 결정내려야 한다"는 내용의 긴급전문을 보내며 원폭 투하를 재촉했다.
하지만 트루먼은 그로부터 사흘 뒤 맥아더에게 친서를 보내 전쟁은 한반도 내에 국한시켜야 한다고 못박아 명령한다. 늘 삐걱거렸던 트루먼과 맥아더의 관계는 4월 11일 트루먼이 맥아더를 극동군사령관 겸 유엔군사령관직에서 해임함으로써 청산된다.
정일권의 증언에 따르면, 이승만 당시 대통령은 "미국만이 갖고 있는 원자탄을 왜 사용하지 않으려는가. 악독한 일본군벌도 원자탄 두 발로 깨끗이 끝장나지 않았던가"라며 분통을 터트렸다. 이승만뿐 아니라 한국의 반공주의자들은 미국이 원폭을 투하하지 않은 걸 안타깝게 생각하는 분위기였다.
맥아더의 후임이었던 매튜 리지웨이 중장은 "맥아더의 문제점은 미국은 한국전쟁을 통해 공산세력을 궤멸시키고 아시아에서 소련과의 냉전대결을 완전히 종식시켜야 한다고 믿었던 데 있었다"고 훗날 회고를 통해 밝혔다.
맥아더의 원폭투하 예정지는 애초에 알려졌던 26곳보다 더 많았다. 그는 회고록에서 30-50발의 원자탄을 사용할 계획이었다고 털어놨다. 다시 말해 26발은 1차분 투하량에 불과했던 것이다. 강준만 전북대 교수에 따르면, 미국은 군사적 어려움에 직면할 경우 원자탄 사용을 하기로 결정하고 1951년 10월에 '허드슨 하버'라는 암호명 아래 몇 차례 투하 연습까지 실시했다.
재래식 무기만으로도 전 국토의 70%가 파괴됐던 북한은 원자탄 투하 중도무산으로 파멸의 위기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이후 핵의 위협에서 완전히 해방되진 못했다. '범죄국가, 북한 그리고 미국'의 저자인 개번 매코맥 호주 국립대학 명예교수는 "미국은 휴전협정 4년 뒤 핵폭탄과 핵지뢰, 핵미사일을 한국에 들여왔고 이후 주기적으로 비무장 지대에 인접한 곳에 핵비축량을 늘려 북한을 협박하는 수단으로 썼다"라고 말한다. 이들 핵무기는 1991년에 한반도에서 철수했으나 이후에도 장거리 핵공격 연습은 공개적으로 계속됐다는 것이다.
◇박정희의 핵무기 개발 시도 = 박정희 전 대통령이 핵무기 개발을 시도했음은 이미 사실로 굳어졌다. 박 전 대통령이 핵을 가지려는 열망이 강했으며 그를 위한 구체적 시도가 측근들의 증언 등을 통해 속속 밝혀졌다. 이와 관련해 한 일간신문은 2004년 8월 박 전 대통령의 지시로 추진됐던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의 핵심인 '핵연료 재처리 시설 개념설계서와 기본설계도'를 보도하면서 계획대로 추진됐다면 1980년대 초에 핵무기를 보유할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박 전 대통령이 핵무기를 보유해야 하겠다고 결심한 것은 1970년대 초반으로 추정된다. 닉슨 대통령이 1969년 괌 독트린을 발표한 미국은 1970년 7월 이후 한반도 주둔 자국 지상군을 일부 철수함으로써 한국의 불안을 가중시켰다. 박 대통령이 핵무기의 필요성을 느낀 것은 이때였을 것이라는 게 일반적이다.
그는 1975년 6월 26일자 워싱턴 포스트지 회견에서 "미국의 핵우산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된다면 우리는 우리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핵무기의 개발을 포함한 모든 가능한 수단을 동원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한국의 핵무기 개발의 본격화는 카터 행정부가 주한미군의 완전철수정책을 추진한 때(1977-79년)와 겹친다. 그는 1977년 5월 20일 청와대 출입기자들과의 간담회에서 "우리가 핵무기를 만들 능력은 있다. (미국이) 핵을 거둬간다면 우리가 핵무기를 개발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발언했다.
청와대 공보비서관을 지낸 선우연에 따르면, 박 전 대통령은 1981년 전반기에 핵폭탄을 완성해 그해 10월 1일 국군의날에 세계 앞에 공개할 예정이었다. 그 후속조치로 1976년 12월에 한국 핵연료 개발공단을 만들어 실험용 원자로를 통한 핵분열물질의 생산에 나섰으며 원자탄의 운반수단인 미사일 개발에도 착수해 1978년 8월에 중거리 유도탄 개발시험에 성공하기에 이른다.
한국의 핵무기 개발시도에 미국이 급제동을 건 것은 이 무렵이었다. 핵무기로 박 전 대통령이 '안보 홀로서기'를 하는 상황을 핵 패권의 미국은 용납할 수 없었던 것. 결국 자주국방을 외쳤던 박 전 대통령은 1979년 10월 김재규가 쏜 총탄을 맞고 피살됐고, 전두환 대통령 시절이던 1980년대 초에 핵무기 개발사업은 미국의 압력을 받아 관련기관 해체와 더불어 중단됐다. 그리고 노태우 전 대통령은 한반도 비핵화선언을 하기에 이른다.
이에 대해 김용태 전 공화당 원내총무는 언론 인터뷰에서 "박 대통령의 핵무기 개발 의지는 카터 대통령의 주한미군 철수정책에서 연유했다"면서 "연구진이 뭔가 개가를 올렸다는 보고를 받고 연구진을 부둥켜안고 울면서 기뻐했다"고 당시의 분위기를 전했다.
김진명의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는 당시의 상황을 소재로 한 소설이다. 김씨는 박 전 대통령의 핵무기 집념과 연구진의 천재성을 바탕으로 작품을 내놔 선풍적 인기를 모은 바 있다.
◇김정일의 핵무기 실험 강행 =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가 미국이나 남한의 핵무기 사용계획 또는 개발시도가 논란이 됐다면, 1990년대 이후는 북한의 핵무기 개발 움직임이 한반도의 긴장을 강화했다.
1985년 핵무기비확산조약(NPT)에 이어 1990년대 초반에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안정협정에도 서명했던 북한은 1993년 3월 NPT 탈퇴를 전격 발표함으로써 핵 위기를 불러왔다. 클린턴 정부는 이에 대해 북한의 핵시설을 공격해 파괴하는 내용의 작전계획 5027을 실행에 옮기려 했으나 결행 직전에 중단한다.
북한이 핵무기 개발에 관심을 가진 것은 그것이 자신의 안보를 보장하고 세계와의 관계 정상화를 가져온다고 믿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핵무기 없는 북한은 그저 빈곤하고 무의미한 나라일 뿐으로, 이것이 있어야 미국과 일본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는 것이다.
상황 반전은 1994년 미국과 북한의 제네바 기본합의였다. 이 합의에 따라 북한은 NPT 탈퇴를 번복했으며 2003년까지 경수로 2기를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에서 제공받고 매년 기름 330만 배럴을 넘겨받기로 했다. 대신 플루토늄을 함유한 8천 개 남짓한 사용 후 핵연료봉을 원자로에서 수납하는 작업 등 핵연료 프로그램을 전면동결키로 했다.
그러나 제네바 합의에 대한 불신이 누적되고 북한이 1998년 대포동 위성을 발사한 데 이어 2002년 1월 부시 대통령이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함으로써 상황은 원점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여기다 2002년 10월 평양을 방문한 제임스 켈리 국무부차관보에게 강석주 외교부상이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과 '그보다 더 강력한 무기'를 보유하고 있다고 밝힘으로써 양국 관계는 심각한 교착상태를 맞았다.
북한이 가장 원한 것은 불가침 협정 체결이었다. 이에 공화당의 커트 웰던을 대표로 한 6명의 미국 의회대표단은 2003년 5월 말 평양을 방문해 평양 측이 공식적이고 검증 가능한 방법으로 핵무기와 핵 연구 프로그램을 포기하는 대신, 미국은 외교적으로 북한을 승인하고 미국, 한국, 일본, 러시아, 중국이 참여하는 대북지원을 제공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평양 측의 긍정적 반응을 얻은 이 제안은 정작 워싱턴에서 묵살됐다.
평양은 핵 프로그램을 최대한 이용해 자신의 목표를 달성코자 했다. 이에 대해 일부에서는 북한의 핵 프로그램이 실질적 내용이 있다기보다 교묘한 위장에 불과하며 나아가 허세의 성격이 강하다고 평가절하기도 했다. 진짜 목표는 핵 개발 프로그램을 계속하는 게 아니라 미국과의 관계에서 돌파구를 마련하려는 것이라는 얘기다.
상황이 날로 꼬여가는 가운데 사담 후세인 체제의 이라크가 미국에 당하는 운명을 보면서 핵무기 보유만이 자신들의 생존을 보장할 수 있다고 북한이 결론 내린 듯하다고 매코맥 교수는 말한다. 후세인처럼 되지 않으려면 억지력인 핵무기를 갖고 싶어했다는 것이다. 남들에게 아무리 잘못된 것으로 비쳐질지라도 핵무기는 평양에게 50년 묵은 포위를 풀기 위한 길로 여겨졌으며 그 외에 초강대국 미국의 관심을 끌 만한 다른 카드가 없다는 뜻이다. 여기다 KEDO가 지원키로 한 경수로와 경제지원 약속이 빈 껍데기였음이 드러나면서 북한 역시 더이상 제네바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고 느꼈고 그 결과는 NPT를 다시 탈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후 전개과정은 힘과 힘의 치열한 맞대결 양상을 보여왔다. 급기야 북한은 최근 핵실험을 전격적으로 강행했고, 미국은 유엔을 통한 제재에 착수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14일 대북 제재 결의안을 채택하자 박길연 유엔 주재 북한대사는 "이를 전적으로 거부한다. 미국의 추가적 압력이 있을 경우 이를 선전포고로 간주할 것"이라고 경고한 뒤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등 강경자세를 조금도 굽히지 않고 있다.
나아가 북한의 핵실험은 남한 내에서 미국의 핵우산 제공문제를 또다시 불러냈다. 이와 관련해 정부는 20일 열릴 한.미 안보협의회(SMC)에서 북한의 실험에 따른 미국의 핵우산 제공문제를 심층적으로 논의할 방침이다. 1991년 한반도에서 미국 핵무기가 철수한 이후 15년 만에 핵우산을 다시 쓰는 방안이 고려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물론 남북비핵화공동선언의 철회를 의미한다.
이로써 한반도는 또다시 핵무기의 뜨거운 회오리 바람에 휘말리게 됐다. 생존을 위해 죽음의 무기에 기대는 역설적 상황이 숨가쁘게 전개되는 가운데 민족의 앞날에는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먹구름이 짙게 드리워졌다. 반세기 동안 아슬아슬하게 외줄타기 곡예를 하며 천 길 낭떠러지를 용케 건너왔듯이 대결에서 대화로, 재앙에서 평화로, 부정에서 긍정으로 그 먹구름을 걷어내는 지혜가 지금 우리 앞에 사활적 시험대로 놓여 있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