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 김대건 신부님 유해 이동
1846. 9. 16 (음력 7월 16일) 새남터 군문효수형 순교 - 만 25세
순교후 김대건 신부의 시신은 여러 신자들에 의해
와서(瓦署, 지금의 서울 용산구 용산동 4-6)에 안장되었다가
서 야고보, 박 바오로(박순집의 부친), 한경선, 나창문, 신치관,
이 사도 요한, 이민식(李敏植 빈첸시오)등에 의해
미리내로 안장되었다.
1886년 기해, 병오박해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 조사를 할 때
교구 재판 판사인 프와넬(V.L. Poinel. 朴道行 1855-1925) 신부가
미리내에 있던 봉분 중앙을 헤치고 횡대(橫帶, 관을 묻은 뒤에 구덩이
위에 덮는 널조각)을 확인하였다.
1901. 5. 21 시복 재판 판사 프와넬 신부와 기록 서기인
드망즈(F. Demange 安世華 1875-1938) 신부가
안성 본당의 공베르(A. Gombert, 孔安國, 1875-1950) 신부,
미리내 본당의 강도영(姜道永 마르코, 1863-1929) 신부,
그리고 신자 30여 명이 참관한 가운데,
김대건 신부의 유해를 발굴하였다.
그런 다음 횡대는 무덤 안에 다시 넣고 원상대로 봉분을 쌓았고,
발굴된 유해는 강도영 신부의 사제관에 안치하였다가
1901. 5. 23 용산 예수성심학교로 옮겨 안치하였다.
이후 유해는 1950. 6. 25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1950. 9. 28 경상남도 밀양 성당으로 옮겨졌다가
1951 혜화동 소신학교로 옮김
1960. 7. 5 혜화동 대신학교로 옮겨졌다.
이때 유해 일부가 미리내, 절두산 순교성지에 분리, 안치되고
이후에는 각 본당 및 단체에도 분배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