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옴) 윤음

2014. 11. 11. 오후 3: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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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유제도도신윤음(諭諸道道臣綸音)
정조가 1794년(정조 18) 9월 22일 자신의 생일을 맞이하여 전국의 감사들에게 백성들을 진휼하는 데 각별히 힘쓸 것을 명하기 위해 내린 윤음이다. 이 해에 특히 3남 지방에 흉년이 들어 기근이 심했는데도 다음 해인 1795년이 혜경궁 홍씨의 환갑인 관계로 각 도에서 내년을 위해 물자를 비축하려고 진휼을 하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이에 관계없이 적극 진휼할 것을 명한 것이다.

(24) 위유호남육읍민인윤음(慰諭湖南六邑民人綸音)
1794년(정조 18) 10월 13일 서영보를 호남 6읍의 위유사(慰諭使)로 삼으면서 내린 윤음이다. 이 해 8월에 제주에 태풍이 불어 피해가 심하여 제주목사가 육지의 곡식 2만섬을 배로 실어다 주기를 청하였다. 이에 전라도 강진, 해남, 장흥의 곡식을 모아 영암에서 배에 실어가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이 해에는 3남에도 흉년이 들어 백성들의 고통이 심하였고 곡식을 내는 고을도 제주와 마찬가지로 태풍의 피해가 있었으므로 백성들이 제주로 곡식을 실어가는 것에 불만을 가질 것에 대비하여 환곡을 정퇴해 주고 각종 세금을 감면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마침 서영보가 강진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는데 이를 용서하여 10월 2일 위유사로 삼고 12일에는 유시(諭示)를 내렸으며 제주로 배를 띄우기 위해 제사를 지내는 13일에 이 윤음을 내린 것이다.

(25) 양로무농반행소학오륜행실향음의식향약조례윤음(養老務農頒行小學五倫行實鄕飮儀式鄕約條例綸音)
1797년(정조 21) 정월 초하루를 맞이하여 내린 윤음이다. 노인을 봉양하고 농사에 힘써야 한다는 내용과, 풍속을 교화하기 위해 《소학(小學)》,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 그리고 향음의식(鄕飮儀式), 향약조례(鄕約條例)에 관한 책을 간행하여 반포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26) 유중외대소민인등척사윤음(諭中外大小民人等斥邪綸音)
1839년(헌종 5) 10월에 천주교의 폐해를 막고자 반포된 윤음이다. 이 해 3월부터 제2차 천주교 박해인 기해사옥이 시작되었는데 10월에 와서 박해를 매듭짓고 이 윤음을 반포하였다. 이 윤음의 실제 지은이는 조인영으로 알려져 있다. 기해사옥은 표면적으로는 천주교를 박해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벽파(僻派)인 풍양조씨가 시파(時派)인 안동김씨로부터 권력을 빼앗기 위해 일으킨 것이다. 1834년에 헌종이 즉위한 후 순조의 비 순원왕후가 수렴청정하고 그 오빠 김유근이 보좌를 하였다. 그러나 김유근은 병으로 인해 은퇴를 하게 되었고 세례를 받고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이후 천주교를 적대시하던 우의정 이지연이 정권을 잡게 되었는데 그는 형조판서 조병현이 천주교 전파에 대한 보고를 올리자 1839년 3월 입궐하여 천주교인은 무부무군(無父無君)의 무리이므로 근절하여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이에 따라 수십 명의 천주교인이 잡히고 9명은 끝내 사형당했다. 5월부터 천주교 박해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정하상 등 신도 수십 명과, 주교 앵베르, 신부 모방과 샤스탕 등이 잡히거나 자수하여 처형되기에 이르렀다. 결국 이 사건으로 권세가 안동김씨에서 풍양조씨로 옮겨지게 되었다.

(27) 어제유대소신료급중외민인등척사윤음(御製諭大小臣僚及中外民人等斥邪綸音)
1881년(고종 18)의 이른바 신사척사론(辛巳斥邪論)에 대한 회유책으로 내린 윤음이다. 1876년 강화도 조약을 체결한 이후 개화파들에 의한 개화의 움직임이 점차 활발해졌는데 이런 추세에 대항하여 위정척사를 주장하는 유림들이 결집하게 되었다. 특히 김홍집이 일본에서 《조선책략》을 들여와 전국 유생에게 배포하고 정부가 개화의사를 표명한 것에 대하여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를 비롯한 유생들의 척사상소가 잇따르게 되었다. 정부에서는 이에 대하여 상소의 주모자들을 잡아들이는 억압책을 쓰는 한편 5월 16일에는 이 윤음을 반포하여 전통적인 척사의 태도를 표명하는 회유책도 같이 사용하였다.

(28) 어제유팔도사도기로인민등윤음(御製諭八道四都耆老人民等綸音)
1882년(고종 19) 7월 20일에 임금의 실정을 자책하고 유신(維新)을 다짐하기 위해 전국에 내린 윤음이다. 이 해 6월 9일 병사들이 봉급 지급에 불만을 품고 임오군란을 일으켜 개화파를 몰아내고 대원군이 다시 집권을 하였다. 그러나 7월 13일 대원군이 청나라 군대에 의해 납치되고 다시 개화파가 집권하므로써 임오군란을 끝을 맺게 된다. 이에 고종은 흐트러진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고자 이 윤음을 내린 것이다. 그 동안의 실정을 조목조목 들어 모두 임금의 잘못임을 밝히고 앞으로 올바른 정치를 새롭게 해 나갈 것을 다짐하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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