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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를 막 넘긴 1964년 12월 26일 이례적으 로 문화재위원회 제1분과 제16차 회의가 서둘러 소집됐다. 직전회의 가 있었던 것이 불과 4일 전인 12월 22일이었으니 그 사이에 필시 무 슨 긴박한 사안이 발생하긴 했나 본데, 알고 봤더니 이 날의 토의사 항으로 올라온 것은 '성현(聖賢) 37인 조상도금(彫像鍍金) 보수사업 에 관한 당국 예비비 사용요청에 대한 건'이었다.
참으로 아득한 날의 얘기가 되고 말았지만, 한때 세종로의 중앙청에서 태평로의 남 대문으로 죽 이어지는 한길 양편으로 웬만한 역사위인들을 망라하여 그 형상을 만들어 세웠던 시절이 있었다. 듣자하니 이것들은 1964년 5월경에 서울 시내 미술대학생들이 연합하여 제작한 결과물이 라는데, 실상은 그 솜씨가 다분히 습작과 같은 정도로 대단치는 않았 던 모양이었다. 더구나 재질이 석고상이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더했다. 당연히 비가 오면 얼룩이 지기 일쑤고, 때로 강풍이 불어 넘 어지거나 깨지는 일도 심심찮게 벌어졌다. 말하자면 기껏 위 인들이랍시고 석고상을 만들어 세우긴 했으나 모양새는 둘째치고라 도 그것을 수선하고 관리하는 일에 돈이 더 들게 된 판국이었다. 앞 에서 '도금 운운'한 것도 석고상의 얼룩을 가리기 위한 방편의 하나 였던 것이다. 문화재위원회에 올라온 예비비 사용요청의 안건은 이러 한 상황을 반영하고 있었다. 그 일을 하필이면 문화재관리국 이 떠맡으려 했던 것이 누군가의 강청에 따른 것이었는지 자의적인 결정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 안건에 대한 문화재위원들의 판단 은 비교적 단호한 것이었다. 그 가운데 이홍직 분과위원장의 견해를 인용하면 대충 이러했다. "이 문제는 문화재관리국 소관이 아 니라고 보며, 또한 문화재관리국 자체에서 이런 일을 애써 맡아서 할 일이 못되며, 이 일에 예비비 100만원을 사용한다는 것도 부당하 다고 본다. 아울러 차제에 세종로에 있는 이 조상들을 철거하도록 하 는 것이 좋다고 본다." 문화재도 아닌 일에, 그것도 별 가치 도 없는 석고상에 문화재관리국이 공연히 나설 일이 아니라는 얘기 로 들린다. 결국 이날의 회의는 '철거론'이 대체로 우위를 지킨 가운 데 다음과 같은 결의로 끝을 맺었다. "1. 위인선열 자체는 역사상 남는 인물이나 조상 자체 는 문화재로서 간주할 수 없다. 2. 여론상 현조상(現彫像)은 임시 적인 습작으로 사회의 인정을 받고 있으나 이를 반영구화 또는 영구 화하는 것은 국민의 여론을 야기시킬 우려가 다분히 있다. 3. 일 정한 장소에 일시 이전보관하고 이를 참고기초로 하여 새로이 위인동 상건립위원회를 설치하여 연차적으로 영구적인 동상을 제작하여 서 울 시내 적당한 장소에 건립하는 방향으로 건의한 다."
하지만 세종로와 태평로의 석고상들은 그 후 로도 대략 2년 가량 더 그 자리를 지킨다. 문화재위원회의 견해 표명 은 어디까지나 그랬으면 좋겠다는 취지를 담은 것이었을 뿐 구체적 인 실행력을 갖춘 것은 전혀 아니었던 탓이다. 그런데 얼마 후 1966년 광복절이 되었을 때 이번에는 정말 '애국선열들의 조상건 립운동'을 알리는 안내문이 <서울신문>에 등장했다. 이름하 여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의 결성을 알리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추진된 구체적인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이때의 안내문에 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들어 있다. "이 운동의 발단은 제1회 5·16민족상 산업부문 장려상수상자 이한상(李 漢相)씨가 상금 50만 원을 본사에 기탁, 영구성(永久性) 있는 동 (銅) 또는 대리석(大理石)으로 선열들의 조상을 건립하도록 의뢰해 온 데 말미암은 것입니다." 명시적인 언급은 없었으 나 길거리에 너저분하게 늘어선 석고상들의 존재가 '견고한' 동상조 성운동의 직접적인 빌미가 되었음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이한상이라는 인물은 당시 풍전산업과 불교신문사 운영자였는데, 그런 탓인지 나중에 장충단 공원에 세우는 사명대사 동상은 자신의 몫으로 떠맡는다.
하지만 처음부터 많은 혼선이 빚어지고 있었다. 우 선 누구의 동상을 건립할 것인지, 얼굴 한번 본 적도 없는 역사 인물 들의 모습은 또 제대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문제들이 속 속 드러났던 것이다. 비록 각계 인사들을 설문조사하여 건립 대상을 선정했다지만, 실제로는 헌납자의 의향에 좌우되거나 이런 저 런 외부 압력이 무수하게 작용한 측면이 적지 않았다. 세종로에 세워 진 충무공 동상의 경우에서 보듯 처음부터 역사고증에 대한 논란에 휩싸여 두고 두고 철거해야 한다거나 재건립해야 한다는 주장이 거듭 되고 있는 것은 얼마나 사전준비없이 이 작업을 했는지를 잘 보여준 다.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졸속'이었다. 새삼 지적할 것도 없 이 한정된 시간에 너무나 많은 동상들을 한꺼번에 만들어내야 했던 것이 그 원인이었다. 동상 건립을 추진하는 쪽에서는 서둘러 가시적 인 성과를 얻어야 했고, 제 철을 만난 조각가들로서는 이것저것 재 고 말고 할 여유조차 없었다고 보는 것이 옳지 않겠나 싶다. 뭐라도 그저 후딱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이 제일이었던 시절이었다. 또 동상을 배치해야 할 공간에 대한 고민도 그리 깊지는 않았던 듯 이 보인다. 특정한 인물의 동상이 어떠한 자리에 놓일 때는 일말의 역사적 관련성이랄까 장소성이랄까 하는 고려가 있어야 할 것 같은 데, 이 부분에 대한 사려 깊은 검토가 있었는지는 잘 알지 못한다. 기껏해야 몇 군데의 간선도로 주변과 유명한 공원지역을 위주로 그 저 '적절하게' 안배했던 것이 장소 선정의 기준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순신 장군에 대한 애착이 실로 대단 했는데, 이순신 장군 말고도 다른 애국선열들에 대한 애정(?)도 이 에 못지 않았는지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가 건립한 12번째 동상 준 공이 이뤄질 때까지 빠짐없이 모든 제막식에 참석했다. '민족중 흥'의 시대였으니 만큼 애국선열들의 존재가 그만큼 긴요했던 까닭 은 아니었을까? 1969년 이후에도 동상건립은 계속되어 사직공 원에는 이율곡 동상과 신사임당 동상이, 효창공원에는 원효대사의 동 상이, 시청광장에는 김유신 장군의 동상이, 남대문 앞에는 유관순 동 상이, 남산의 시립도서관 앞에는 정약용 동상과 이퇴계 동상이, 제2 한강교의 양편에는 정몽주와 을지문덕 장군의 동상이 이내 들어섰 다. 다만 1971년에는 완공된 동상이 없었고 1972년에는 절두 산 성지에 김대건 신부의 동상이 만들어졌다. 지방 쪽으로는 수원의 팔달산에 강감찬 장군의 동상이, 대전의 충무체육관 앞에는 윤봉길 의사의 동상이 따로 세워졌다. 이렇게 하여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 가 만든 동상은 모두 15기였다.
김유신 장군의 동상이 서울시청 앞 광장에 준공된 것은 1969년 9월 23일이었 다. 유관순 열사의 동상은 이보다 한 해가 늦은 1970년 10월 12일에 남대문 앞 녹지대에 세워졌다. 하지만 그로부터 6개월을 넘기지 못하 고 두 동상은 모두 해체되어 다른 곳으로 옮겨지는 처지에 놓인 다. 알고 보니 때마침 지하철 1호선 굴착공사가 벌어진 탓이 었다. 김유신 장군의 동상 쪽은 그렇다치더라도, 유관순 열사의 동 상 쪽에야 지하철 예정 선로가 그곳을 지난다는 사실 정도는 진작에 알려진 상태였을텐데, 그것을 알고도 그 자리에 그냥 건립했다는 것 인지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 바람에 '신제 품' 유관순 열사의 동상은 남산2호터널의 장충단공원 쪽 입구로 옮겨 졌고, 약간 '중고품'이었던 김유신 장군의 동상도 덩달아 힐튼호텔 인근의 남산공원으로 즉시 자리를 옮겨야만 했다. 이것과는 약간 경우가 다르지만, 제2한강교 양평동 방면의 녹지대에 세워졌던 을지문덕 장군의 동상 역시 지하철2호선 및 인터체인지 확장공사의 영향으로 1981년 4월에 이르러 어린이대공원 후문 쪽의 한적한 공간 으로 밀려난 상태다. 비록 조악한 석고상의 형태나마 서른 아 홉 분에 달하는 성현들이 세종로와 태평로 일대에 한꺼번에 등장한 것이 벌써 40년 전의 일이다. 또 그 일을 계기로 열다섯 분에 달하 는 애국선열들이 단단한 재질로 탈바꿈하여 동상으로 거듭났으니, 이 때를 일컬어 가히 위인들의 전성시대라 할 만했다. 실상은 '동상파' 조각가들의 전성시대였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40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자면 위인들의 동상을 그토록 서둘러 양산 한 것이 반드시 잘한 일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모든 역사는 기념물 의 역사라는 얘기가 있긴 하지만, 그저 이름 있는 공원의 구석구석마 다 넘쳐나는 것이 동상이고 비석이고 기념탑인 것을 보면 언젠가는 서원철폐령과 같은 '동상철폐령'이 단행되지 말라는 법도 없지 않을 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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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5/12 오후 1: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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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4 OhmyNews | ||||||||||||||||||||||||||||||||||||||||||||||||||||
(퍼옴)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
2014. 10. 20. 오전 9:5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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