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예산 여사울과 내포의 사도 이존창
1. 머 리 말
한국 천주교회사 안에서 충청도 內浦 천주교회가 지니는 의미는 아주 크다. 우선 서울을 비롯하여 楊根․全州․內浦․忠州 지역에 형성된 교회 창설기의 지역 교회 중에서 1801년의 辛酉迫害 이후까지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곳은 오직 내포 지역뿐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그 뿌리가 아주 깊었고, 천주교 신앙 전파의 폭도 아주 넓었다. 실제로 1815년 경상도 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乙亥迫害의 순교자들이나 1827년 전라도와 경상도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丁亥迫害의 순교자들 대부분이 내포 지역 출신으로 나타나며, 이러한 현상이 1866년의 병인박해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처럼 내포 지역 교회가 일찍부터 터전을 잡게 된 배경에는 교회사가들이 ‘내포 혹은 충청도의 사도’라고 불러 온 李存昌(루도비코 곤자가, 1759~1801)이 있었고, 그가 처음으로 천주교를 전파한 여사울(현 충남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이 있었다. 그러므로 그 동안 자주 내포 천주교회를 이해해 보려는 노력이 있어 왔으며, 최근에는 이존창에 대한 연구도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또 교회 안에서는 여사울의 교회사적 의미를 중시하여 일찍부터 이곳을 사적지로 개발하려는 노력을 해왔고, 최근에 와서는 지역 사회에서도 교회 사적지 여사울에 대해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이에 본고에서는 우선 내포의 사도 이존창과 관련하여 그의 탄생지 여사울과 그 지역에 형성되어 있던 星湖學派의 일맥을 살펴보고, 이러한 배경 아래서 이존창의 학문 성향을 설명해 보려고 했다. 다음으로 이존창의 천주교 입교와 초기 활동은 물론 내포 천주교회의 설립과 여사울의 천주교 신앙 공동체가 갖는 의미를 이해해 보았다. 뿐만 아니라 1791년에 여사울을 떠난 이존창이 어떠한 상황에서 교회 활동을 하다가 순교하게 되었으며, 이후 여사울 신앙 공동체는 어떻게 변모되었는지를 살펴보고, 이를 바탕으로 여사울이 지니는 사적지로서의 의미도 조명해 보고자 하였다.
2. 이존창의 탄생지 예산 여사울과 성호학파
예산 여사울의 良人 집안에서 태어난 이존창은 일명 ‘단원’(Tan Ouen)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으며, 천주교 세례명은 ‘루도비코 곤자가’였다. 본관은 慶州로 알려져 있으나, 그의 부모나 인척, 부인 등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가 없다. 어느 정도 경제력이 있는 집안에서 태어났던 것 같고, 맏형과 또 다른 형, 딸 멜라니아, 사촌 누이 멜라니아, 그리고 완전히 모자라는 손자 하나가 있었다는 사실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여사울’ 혹은 ‘여술’은 고종 32년(1895년) 지방 관제 개정 때 예산군에 편입되기 전까지는 천안군 新宗面에 속해 있었고, 천안의 任內인 신라 때의 新宗部曲은 아산․신창을 지나 예산현의 북촌에 위치해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여지도서 천안조에는 신종면이 ‘서남쪽으로 온양․신창 경계 너머에 있으며, 新里․新宗里․宅洞里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1872년 지방도>의 천안군 지도에는 신종면에 上新里․下新里․新宗里․宅洞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여사울은 이 중에서 상신리를 말한다.
조선 후기에는 여사울의 한자 표기를 餘村 혹은 餘湖로 적었으며, 교회 기록에는 ‘천안 여사울(Ie Sa ol)’로 나오지만, 다른 기록에는 ‘예산 여촌’으로 나온다. 후자와 같이 여사울(여촌)을 예산 땅으로 생각한 이유는, 이곳이 예산의 북쪽에 붙어 있는 천안의 월경지였기 때문인 것 같다. 다음에 설명하겠지만, 여사울은 이존창의 고향이면서 그의 스승인 洪儒漢(隴隱, 1726~1785년)이 1757년 서울에서 落南한 이래 1775년까지 살던 곳이었다.
이존창은 양인 신분으로 죽을 때까지 그 신분을 벗어날 수는 없었지만, 당시의 사회 질서에 순응하면서 그 자신의 위치에 만족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양인으로서는 여전히 어려웠던 학문적 욕구와 실천을 바탕으로 스스로의 신분을 극복하려 했던 인물로 알려지고 있다.
다음에 인용한 A-①③⑤의 내용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이존창은 본래 재주가 있었으며, 학문에도 열심이었다. 또 처음에는 혼자서 학문을 닦았으나 軍役을 벗어나게 된 후부터는 스스로 스승을 찾아 나서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일반적으로 군역을 지게 되는 16세(1774년) 무렵의 일이었을 것이다. 그가 군역을 면하고자 한 사실은 학문의 길을 추구하겠다는 적극적인 의사 표시였고, 실제로 그는 지방 수령에 의해 군역을 면제받으면서 본격적으로 학문의 길로 들어설 수 있게 되는데, 이것은 그의 생애에서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다.
그러면 이존창은 누구에게 사사하였던 것일까? 지금까지의 연구에 따르면, 이존창은 홍유한을 비롯하여 李基讓(茯菴, 1744~1802), 權哲身(鹿菴 암브로시오, 1736~1801), 權日身(稷菴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1742~1792) 등 성호학파의 여러 인물들과 師承 관계를 맺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배경에는 지금의 예산 북쪽 일대, 즉 이존창의 고향인 여사울과 그 인근의 덕산현 지역에 형성되어 있던 성호학파의 일맥이 있었다.
우선 덕산 지역에 李瀷(星湖, 1681~1763)의 학맥이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은 1757년(영조 33년)이다. 이 해 경기도 안산에 거주하던 李秉休(貞山, 1710~1776)가 양부 李潛(剡溪, 1660~1706)이 살던 剡曲의 이웃인 덕산현의 長川里(현 예산군 고덕면 상장리)으로 이거한 것이다. 또 1765~1766년 무렵에는 경기도 인천에서 살던 그의 제자 이기양이 스승을 따라 덕산으로 이거했는데, 그가 이병휴로부터 가르침을 받기 시작한 것은 1763년 무렵이었다. 이어 1768년 무렵에는 경기도 양근 땅의 권철신이 이병휴에게 처음으로 서한을 보내 가르침을 받기 시작하였다. 이때 이병휴는 젊은 학자들 가운데서 촉망되는 인물로 이기양을 지목하고 권철신에게 교류를 권했는데, 이후 둘은 아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한편 권철신의 제자인 경기도 광주의 李檗(曠菴 세례자 요한, 1754~1785)도 1774년에 덕산 장천으로 이병휴를 방문한 적이 있으며, 이병휴가 사망하자 제문을 지어 그를 추모하기도 했다.
여사울의 성호 학맥은 서울 아현에서 거주하던 제자 홍유한이 여사울[餘村]으로 이거하면서 뿌리를 내리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가 여사울로 이주한 해도 1757년이었다. 아마도 그의 이주 이유는, 예산 출신인 그의 재종 洪亮漢과 함께 ‘예산으로 내려가자’고 약속한 때문인 것 같다. 홍양한은 훗날 천주교 신자로 참수된 洪樂敏(루카, 1751~1801)의 부친으로, 홍낙민은 예산 여사울에서 성장하였다. 이에 앞서 홍유한은 열여섯 살이 되던 1741년에 처음으로 이익을 방문하고 그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으며, 여사울에 정착한 뒤로는 이병휴를 비롯하여 권철신․이기양 등과 깊이 교유하다가 1775년 영남의 순흥 九皐里로 이거하였다.
이처럼 예산 여사울과 덕산의 장천 지역에는 1757년 이래로 성호의 학맥이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학문적으로 가장 선배인 이병휴와 홍유한, 그리고 제자 이기양과 홍낙민 등이 이웃해 살았고, 경기도 양근의 권철신과 광주의 이벽도 이들과 학문을 교류하였다. 여사울의 이존창은 바로 이러한 환경에서 군역을 벗어나게 된 열여섯 살(1774년) 무렵에 처음으로 이기양을 방문했으며,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학문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된 기록들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A-① 이존창은 天安의 常賤이다. 일찍이 이름이 軍籍에 올라 있었다. 그가 학문을 하기 위하여 太守에게 (軍役에서 면해 주기를) 청하자 태수가 그의 재주를 아껴 免役을 허락하였다.
A-② 저(이기양)는 갑오(1774년)․을미(1775년) 연간 德山에 거처할 때 (이존창의) 얼굴을 알게 되었고, 그 뒤 場屋(科場)에서 또 얼굴을 보았습니다.
A-③ 저(이존창)는 이기양이 덕산에 있을 때 가서 배웠으며, 이기양이 利川으로 이사한 뒤에도 여러 해 가서 머무르며 과거 공부를 했습니다.
A-④ (이기양은) 또 일찍이 이존창을 집안에서 양육하면서 문필을 가르쳤고, 전에는 최창현과 가깝게 지냈습니다.
A-⑤ 비범한 재능을 타고났던 그(이존창)는 집에서 먼저 글을 익혔다. 그러다 차츰 큰 포부로 일하고 자연의 이치를 깊이 알려는 열망을 품고 스승을 찾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던 중 고향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경기도 양근에 있는) 권씨(權氏) 집안의 명성을 듣고 끌리어 그들(권철신․일신 형제)을 찾아가 제자가 되었다. 권(일신) 하비에르는 이 제자의 훌륭한 성품과 뛰어난 재능에 매료되어 그에게 세심한 정성을 쏟았다. 그때 이미 그(권일신)는 유럽의 학설들(doctrines européennes, 즉 西學)을 안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였다.
이기양 문하에 들어가서 학문을 닦던 이존창은 2년 후인 1776년 4월경, 이기양이 경기도 南川(현 이천)으로 이주하자, 다시 그의 집을 왕래하면서 과거 공부를 하였다. 그리고 바로 그 해 5월경에는 이기양의 아들 李寵億과 함께 권철신의 문하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 시기는 바로 권철신이 문도들을 받아들이면서 鹿菴系가 형성된 시기였으며, 충주로 이주해 살던 홍낙민도 그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홍낙민과 이존창은 어려서부터 잘 알던 사이였다. A-④에서 인용한 것과 같이 다블뤼(St. A. Daveluy, 安敦伊) 주교는 권철신․일신 형제가 이존창의 첫 스승인 것처럼 설명했지만, 이는 그 이전에 있었던 이기양과의 관계를 몰랐거나 천주교 신앙과의 관련성을 중시한 때문일 것이다. 권철신의 문하에 들어갔을 당시 이존창의 나이는 열여덟 살이었다.
이존창은 이에 앞서 같은 마을에 살던 홍유한에게도 글을 배웠다. 권철신이 홍유한에게 보낸 서한에서 자주 이존창의 신상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를 알 수 있다. 그러나 1775년에 홍유한이 순흥으로 이거했으므로 그에게 배운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을 것이다. 또 권철신은 이존창을 제자로 받아들이기 전에 이미 홍유한과 이기양을 통해서 이존창을 알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권철신은 이존창을 제자로 받아들인 다음해 즉 1777년 여름에 이기양과 함께 덕산 장천을 거쳐 餘湖(즉 여사울)로 이존창을 방문하고 그의 집에서 유숙한 사실을 홍유한에게 전하기도 했다.
이존창은 이처럼 1774년 이래 약 2년 동안 이기양에게서, 1776년 이후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는 1784년 무렵까지는 권철신에게 사사한 것으로 생각된다. 다시 말해 이존창은 이기양보다 권철신으로부터 더 많은 영향을 받았음이 분명하다. 다만, 그가 권철신의 문하에 들어간 이후에도 이기양과의 관계는 어떠한 형태로든 지속되었던 것 같다.
A-②③에서 살펴볼 수 있는 것처럼 이존창이 학문의 길을 택한 첫 번째 이유는 과거 때문이었다. 여기에는 관료 지향적이었던 이기양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반면에 권철신은 38세 때인 1773년 무렵에 이미 과거를 멀리한 지식인이었다. 또 그는 스승 이병휴나 홍유한, 친우 이기양과 같이 필요한 경우에는 陽明學의 이론을 받아들였으며, 경전 해석에서도 혁신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다시 말해 그의 학문은 朱子의 이론을 비판하는 脫朱子學의 성향[원칙론적인 반성]과 자주적인 학문 성향[방법론적인 반성]에 터전을 둔 ‘내적 쇄신 과정’으로 진행되었다. 아울러 그는 原始儒學에 대한 개안을 통해 敬天․畏天 사상과 天崇拜의 종교성[존재론]을 회복하고 있었던 반면에 실천 윤리[당위론]도 중시하고 있었다.
이렇게 볼 때 이존창이 1776년부터 녹암계의 일원으로 권철신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게 된 것은, 그의 생애에서 또 다른 전환점이 된 것으로 생각된다. 앞에 인용한 A-⑤의 기록을 따른다면, 이존창은 한때 자연의 이치에 대해 깊이 연구해 보려는 생각도 지니고 있었던 것 같다. 또 이후로는 스승 이기양과 권철신의 영향을 받아 한때 양명학을 접하면서 여기에 심취한 적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를 양명학자로 볼 수는 없다. 스승 권철신의 영향을 생각한다면, 이존창은 과거 지향적이고 관료 지향적인 성향에서 벗어나 스승과 같이 개혁 성향을 가진 지식인으로 성장했을 것이라고 이해된다. 그 과정에서 그의 학문적 관심은 스승과 녹암계 인물들의 학문 풍토에 영향을 받아 언제부터인가 점차 西學으로 기울어지게 되었음이 분명하다.
이와 같이 여사울은 덕산의 장천과 함께 성호학파의 일맥이 오랫동안 뿌리를 내려 온 곳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서 학문을 지향하던 이존창이 1774년부터 성호학파의 제3세대인 이기양․권철신의 문하에 들어가면서 이총억․홍낙민 등과 함께 성호 학통을 잇게 된다. 아울러 이 사실은 1775년에 홍유한과 조카 홍낙민이 영남으로 이주한 뒤에도 여사울의 성호 학통이 이존창을 통해 계속 이어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아울러 이존창은 권철신이나 녹암계 인물들과의 교류 과정에서 과거나 관료 지향적인 성향에서 이탈하여 탈주자학적이고 개혁적인 학문 성향을 지니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당시대의 통념적인 양인 신분의 한계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그의 학문 과정과 교유 관계는 이후 서학을 이해하고 천주교 신앙을 수용하는 직접적인 배경이 되었다.
3. 이존창의 천주교 입교와 여사울 공동체의 형성
1) 이존창의 입교 과정
성호 이익과 문도들이 西學書를 접하기 시작한 것은 1724~1725년부터였고, 그 제3 세대인 녹암계 인물들이 서학 내지는 천주교 신앙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은 1776년 무렵이었다. 그러나 이들도 그 이전부터 서학에 대해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녹암계 인물들은 1776~1782년에 천주교 교리를 이해하는 과정을 겪었고, 이후로는 천주교를 새로운 신앙으로 받아들일 자세를 갖추게 된다. 1779년 겨울에 열린 走魚寺講學도 이 시기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이존창은 1776년 이래 녹암계의 일원이 되었으므로 서학 내지는 천주교 신앙과 관련해서는 그들과 학문적 보조를 맞추게 되었음에 틀림없다.
다블뤼 주교의 기록과 이존창의 진술에서 그의 천주교 신앙 수용 과정과 관련된 내용을 발췌해 보면 다음과 같다.
B-① 권(일신) 하비에르는 이 제자의 훌륭한 성품과 뛰어난 재능에 매료되어 그에게 세심한 정성을 쏟았다. 그때 이미 그(권일신)는 유럽의 학설들(즉 서학 내지는 천주교)을 안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였다. 천주교를 배우자마자 이내 그(이존창)는 그리스도교의 근본 원리뿐만 아니라 신앙의 제 의무에 대한 실질적인 실천도 튼튼히 다져나갔다. 그(권일신)는 기대 이상으로 성공을 했고, 이내 이(존창) 루도비코는 다른 이들을 가르칠 정도가 되었다. 그는 스승으로부터 가족과 친지들을 가르치고 천주교를 가능한 널리 전파하라는 소명을 받고 집으로 돌아왔다.
B-② 저(이존창)는 이 (천주)학을 중인 金範禹에게서 배웠습니다.…제가 앞서 이 천주학을 배울 때에는 김범우를 우두머리로 삼아 그 책자들을 얻어 배웠으며, 김범우의 동생도 착실하게 천주학을 배웠는데 그 이름은 잊었습니다. 권일신은 일찍이 김범우의 집에서 보았습니다.
B-③ 제(이존창)가 사악한 (천주)학을 배운 것은, 정확히 기억할 수 없지만, 서른 한두 살 때(즉 1789~1790년) 처음으로 이 천주학을 배운 것 같습니다.
B-④ (이존창은) 처음 洪樂敏에게서 서양 서적을 얻어 보고 마음을 다해 (이를 배우는 데) 노력하였다.
위에서 설명한 녹암계와 서학 내지는 천주교와의 관계를 생각해 본다면, B-②③과 같은 이존창의 진술이나 B-④과 같은 눌암기략의 내용은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 그가 어찌 권일신을 金範禹(토마스)의 집에서 처음 보았겠으며, 1789~1790년에서야 비로소 천주교를 알게 되었단 말인가. 물론 이존창이 일찍이 김범우와 조우했을 가능성은 많다. 그러나 1801년의 추국에서 이미 1785년(혹은 1786년)에 사망한 김범우의 이름을 거론한 것은 스승 권철신을 보호하기 위해, 그리고 권철신․권일신과의 관계를 숨기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또 홍낙민은 일찍부터 이존창과 같은 녹암계로서 학문적으로 교유한 것만은 틀림없지만, 이존창이 그로부터 맨처음 서양 서적을 빌려보았다는 말은 믿기 어렵다.
이존창의 천주교 신앙 수용은, B-①의 기록에서와 같이 권철신․일신 형제, 더 나아가서는 녹암계 인물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그는 1776년 이래 권철신․일신 형제로부터 학문을 배우게 되었고, 특히 권일신의 가르침에 따라 서학 내지는 천주교 교리를 알게 되었으며, 점차 천주 신앙에 기울어지면서 세례를 받고 입교했음이 분명하다. 이와 같은 사상의 전이 과정은 스승 권철신․일신은 물론 녹암계인 이벽․홍낙민․李承薰(蔓川 베드로, 1756~1801) 등과 결코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B-①의 기록에서는 이존창이 권일신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것처럼 설명하고 있으나, 초기 교회의 신자들이 대부분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고려해 볼 때 이존창 또한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았을 가능성이 많다.
한편 교회 창설 이전에 있은 이벽과 이존창의 스승 이기양의 논쟁을 중시한 연구도 있다. 이때 이벽은 천주교의 주요 교리, 즉 천지창조, 우주의 질서, 하느님의 섭리, 인간의 영혼, 상선벌악 등의 원리를 증명해서 설명했으나, 이기양은 이러한 논증에 대해 답변하지도 못하고 시인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다만, 이존창이 이벽과 스승 사이의 논쟁을 알았다고 한다면, 이는 천주교 교리에 대한 그의 관심을 더욱 높여 주었을 것이 분명하다.
이존창이 어떤 이유에서 천주교를 수용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학문을 바탕으로 신분 상승을 꾀하던 그였으므로 천주교의 平等思想이 입교 과정에서 크게 작용하였을 것이라는 견해, 혹은 양명학자로서의 도덕적 나약함을 主宰的인 天主說로 극복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입교하였을 것이라는 견해는 어느 정도 그 개연성을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를 뒷받침할 만한 구체적인 자료를 발견할 수 없으므로 이존창의 천주교 수용 배경을 설명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B-①의 기록을 따른다면, 이존창은 천주교인의 본분과 실천 방법 즉 천지창조․강생구속․삼위일체․상선벌악 등 주요 교리를 분명히 이해하고 입교했으며, 입교 당시부터 교리에 충실한 신자가 되었다. 또 다음에 설명한 것처럼 1786~1787년의 平信徒假聖職制 아래에서 그가 신부로 활동하게 된 사실이나 이후의 전교 활동 또한 그의 종교적 성실성과 관련이 있다고 이해된다. 실제로 천주교 신앙의 수용은 그가 권철신에게 사사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학문․사상에서 또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음에 틀림없다. 따라서 이러한 전환은 ‘개혁적인 지식인에서 실천하는 신앙인으로의 변모였다’고 설명해도 좋을 것 같다.
2) 여사울 공동체의 형성과 내포 천주교회의 설립
천주교 입교 이후 이존창의 활동은, 크게 입교 활동기(1784~1791년), 回頭 활동기(1791~1795년), 시련 순교기(1795~1801년) 등 세 시기로 구분된다. 이 중에서 첫 번째 시기인 1784~1791년의 ‘입교 활동기’는,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이후 고향 여사울로 내려가 전교하던 중 1791년의 辛亥迫害로 체포되었다가 석방되면서 같은 해 12월 31일 鴻山으로 이주하기 전까지이다. 이 시기에 이존창이 이룬 가장 큰 업적은, 전교 활동에 노력하여 내포 천주교회의 기반을 닦고 그 중심지인 여사울로부터 인근 지역까지 널리 천주교를 전파한 것이다. 이와 관련된 다블뤼 주교의 기록과 관변 자료의 내용을 차례로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C-① 그(이존창)는 스승(권일신)으로부터 가족과 친지들을 가르치고 천주교를 가능한 널리 전파하라는 소명을 받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권일신)의 가르침에 충실했던 이(존창) 루도비코는 즉시 가족과 친지들을 개종시켰는데, 그의 학식과 아름다운 품행은 모든 이들의 호감을 샀으며, 그는 사람들의 심금을 사로잡는 방법을 완벽하게 알고 있었다.…그곳(내포 지방)에는 우리 (천주교) 진영을 보충할 학식 있고 뛰어난 집안은 더 이상 없었고, 이 지역에서 영향력을 가진 이들은 평민과 농민이었다.…단원(즉 이존창)의 탁월한 재능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특별한 재주와 함께 날마다 많은 추종자들을 불러들였고, 그의 영향력 있는 말 앞에서 저항할 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신자들의 수가 인근에서도 상당히 증가하면서 그의 명성은 두루 퍼져 이내 인근의 모든 지역 사람들이 그를 찾아왔고, 그의 집은 사람들로 넘쳐나 당시 이런 속담이 생길 정도였다. ‘학문은 이단원의 집에서 찾고 배는 원동지의 집에서 불린다.’
C-② 요즈음(1788년) 듣자 하니 湖右(즉 충청도 서부 지역) 일대는 거의 집집마다 (천주교 서적을) 소장하여 전하면서 암송하고 있으며, 언문으로 번역하거나 베껴서 부녀자와 아이들에게까지 미쳤다고 합니다. 관장이 이를 금하여도 안될 뿐만 아니라 마을에서 도리어 본받는 법으로 삼고 있다고 하니, 실로 급히 이들을 구제하지 않는다면 말하기 어려운 지경에까지 이를 것입니다.
C-③ 李秀夏(보령 출신으로 승지를 지낸 인물)의 집은 충청도 보령현에 있는데, 사학이 더욱 성한 곳입니다. 그 고을의 현감 李日運이 천주교 신자 10여 명을 징계하여 다스렸어도 효과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매번 간행하여 비밀히 감추어둔 (천주교) 서적들을 찾아내려고 하였지만, 워낙 비밀히 감추어 둔 탓에 마침내 찾아내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또 충청도에서 천주교 서적이 성행한다는 것은 이수하의 말뿐만이 아닙니다. 진산 군수 申史源이 앞서 예산에 있을 때, 민간에 있는 요사한 서적들을 거두어 관리에게 맡겼다는 것을 전에 이미 저에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또 이번에 (신사원이) 저에게 회답한 편지 가운데서 이르기를 “예산의 촌민들이 가지고 있는 언문 번역본 또는 베낀 서적들을 刑吏의 궤 속에 맡겼는데, 그 중에서 聖敎淺說, 萬物眞源 두 책은 모두 증거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C-④ 이수하가 말하기를, “저의 집이 湖中에 있는데, 이곳에서는 사대부가 서학을 한다는 말을 듣지는 못하였고, 다만 염전의 일꾼이나 농부들이 많이 邪敎에 빠져있다는 것을 듣고는 마음으로 매우 놀랐지만, 그 늘어나는 형세가 금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라고 하였다.
다블뤼 주교는 C-①의 내용, 즉 이존창의 입교와 내포 천주교회의 설립을 1784년 겨울에 이루어진 최초의 세례식, 즉 한국 천주교회 창설 다음에 기록하였다. 그런 다음 柳恒儉(아우구스티노, 1756~1801)에 의해 이루어진 전라도 공동체의 설립을 기록하고, 광주 마재(현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의 馬峴)에 있던 丁氏 집안의 입교 사실, 홍낙민의 입교 사실들을 차례로 설명하였다. 이 점에서 유추해 볼 때, 이존창은 교회 창설 직후 권일신으로부터 교리를 배우고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았으며, 즉시 고향으로 내려가 전교 활동을 시작하면서 1785년 초에는 ‘여사울 신앙 공동체’를 이룩하게 되었음이 분명하다.
여사울 공동체의 형성은 이른바 ‘내포 천주교회’의 설립과 출발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내포 천주교회는 여사울의 작은 공동체에서 시작되었고, 이후 이존창의 활동으로 여러 지역에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면서 교회가 확대되어 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존창을 ‘내포의 사도’ 즉 ‘내포 교회의 설립자’라고 일컫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이처럼 여사울은 내포 교회의 출발점이요, C-①에서 추측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적어도 이존창이 여사울을 떠나는 순간까지 그 중심지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나 C-②③④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내포 교회는 1791년 이전에 이미 그 출발지인 여사울은 물론 예산과 보령 일대, 내포 해안의 염전 지역 등으로 확대되었다. 따라서 이존창의 입교 활동기는 곧 ‘내포 천주교회의 정착기’였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 시기에 이존창이 천주교를 전한 신자로는 우선 딸 李 멜라니아(金震厚 비오의 아내요 金大建 안드레아 신부의 조모)와 사촌 누이 李 멜라니아(최양업 신부의 모친 이성례 마리아의 고모)가 있었다. 또 인척인 慶州李氏(최양업 신부의 조모), 崔漢馹(최양업 신부의 증조부)과 漢驥 형제, 金淙鉉(즉 希顔, 김대건 신부의 종조부), 여사울 출신의 金廣玉(안드레아), 덕산의 洪弼周(필립보), 앞에서 언급한 적이 있는 홍주 응정리 출신의 원동지(원시보 야고보 혹은 원시장 베드로), 면천 출신으로 덕산으로 이주한 뒤에 영세한 유군명(시메온) 등이 그로부터 천주교 신앙에 대해 배웠을 것으로 생각된다. 뿐만 아니라 서울 崔必恭(토마스)의 사촌 동생 崔必濟(베드로)도 이존창에게 교리를 배운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실제로 이존창이 천주교에 입교시킨 사람들은 이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다.
당시 이존창의 전교 활동에 도움을 준 것은 1786년 봄 한국 천주교회 지도층 신자들이 수립한 平信徒假聖職制였다. 이때 가장 먼저 이승훈이, 그리고 홍낙민․권일신과 丁若銓(每心齋, 1758~1816) 등이 신부로 임명되었으며, 이존창․유항검․崔昌顯(요한, 1759~1801)도 신부로 임명되었던 것이 거의 확실하다. 내포의 사도 이존창이 교회 지도층의 일원이 된 것이다. 천주교 교리와 제도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데서 이루어진 당시의 평신도 가성직자단은 1년 뒤인 1787년에 정약전이 그 오류를 지적함으로써 해산되었다. 이존창은 이 기간 동안 꾸준히 복음을 전하면서 신자들에게 성사를 집전하였다. 그리고 이후에는 다시 평신도 지도자로 활동하면서 1789~1790년에는 밀사 尹有一(바오로)을 북경에 파견하는 일에 참여하였다.
1790년 말 조선에 전달된 북경 주교의 ‘조상 제사 금지령’ 이후 한국 천주교회는 큰 시련을 겪게 되었다. 특히 양반층 신자들이 많던 서울과 경기도 지역의 교회가 그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존창은 용기를 잃지 않고 복음 전파에 온 힘을 기울였다. 또 C-③④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하층민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던 내포 천주교회는 제사 금지령에 큰 영향을 받지 않고 꾸준히 확대될 수 있었다. 이 점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 다블뤼 주교가 “내포 지방 공동체는 조선 천주교회에 큰 광채를 보이며 천주교의 못자리가 되었고, 매우 유명한 순교자들을 배출했다”고 한 것처럼, 훗날 내포 지역이 한국 천주교회의 중심지 역할을 하게 된 것도 그 교회가 폭이 넓은 하층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특성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1784년의 교회 창설 직후에 영세한 이존창이 즉시 고향 여사울로 내려가 천주교를 전파함으로써 1785년 초에는 여사울에 신앙 공동체가 형성될 수 있었으니, 이는 곧 내포 천주교회의 설립과 출발을 의미한다. 이후로도 이존창은 전교 활동을 계속하여 인근 지역으로 천주교가 확산될 수 있도록 했으며, 이 교회가 짧은 기간 안에 정착하는 결실을 얻을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이존창은 내포의 사도(내포 교회의 설립자)이자 교회 지도층의 일원으로 자리를 확고히 하게 되었고, 여사울 공동체는 내포 교회의 출발지이자 중심지 역할을 하게 되었는데, 특히 처음부터 하층민 중심으로 천주교가 전파되면서 이 교회는 제사 금지령에도 큰 영향을 받지 않고 유지될 수 있었다.
4. 이존창의 이주․순교와 내포 천주교회
1) 이존창의 이주와 내포 천주교회의 확대
1791년에 일어난 전라도의 珍山事件과 이로 인해 발생한 신해박해는 이존창과 내포 교회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앞의 C-③④ 기록도 이와 관련된 조정에서의 논의였다. 그 결과 내포 지역에서는 당진 출신 배관겸(프란치스코) 등 여러 사람이 체포되었으며, 이존창은 1791년 11월 3일 이전에 체포되어 천안에서 형벌을 받은 뒤 공주 감영으로 이송되어 다시 한 번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만 했다. 당시의 기록에 따르면, 이존창은 이때 “邪學을 배척해 부르기를 요술이라고까지 하는 등 허물을 뉘우치고 正道로 돌아올 뜻을 갖게 되었다.”는 충청도 관찰사 朴宗岳의 장계에 따라 석방될 수 있었다. 또 여기에는 천주교 신자들의 처분에 비교적 관대했던 정조와 채제공의 영향, 즉 정치적인 배려도 있었다. 다음에 설명하겠지만, 당시 이존창의 배교는 형식적인 것에 불과하였다.
공주에서 석방된 이존창은 확실히 교회로 돌아왔고, 1791년 12월 31일 밤에는 여사울을 떠나 부여 鴻山으로 이주했다가 얼마 뒤에는 다시 錦山으로 이주하였다. 이것이 ‘회두 활동기’(1791~1795년)의 출발로, 이 시기의 특징은 신앙 생활의 회복과 전교 활동의 재개로 요약될 수 있다. 이존창의 전교 활동은 천주교 신앙이 더 넓은 지역으로 확산되는 데 기여하게 된다.
1795년 봄에 이존창은 전주의 柳觀儉과 함께 서울 崔仁吉(마티아)의 집으로 가서 周文謨(야고보) 신부를 만나는 행운을 얻게 되었다. 아마도 이것이 그에게는 더욱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1794년 말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입국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를 자신의 집에 영접할 요량으로 전라도 高山으로 다시 이주하였다. 마침 그 무렵 주 신부의 입국 사실이 알려지면서 5월 11일(양력 6월 27일) 그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졌고, 이어 乙卯迫害가 시작되었다. 그러자 주 신부는 즉시 신자들의 도움으로 피신길에 나서 남대문 인근에 있던 姜完淑(골롬바)의 집과 양근 등을 거쳐 충청도 連山에 있는 李步玄(프란치스코)의 집으로 갔다. 바로 이때 주 신부를 인도한 이가 이존창과 유관검이었다.
주문모 신부는 이어 고산 이존창의 집을 방문하였으며, 전주 유항검의 집에서도 유숙하였다. 또 藍浦․公州․溫陽 등지와 內浦 지역도 방문했던 것 같다. 이존창의 집에 머무를 때 주 신부는 尹持憲(프란치스코)을 만나 세례를 주었다. 또 이존창에게는 가성직제 아래에서 마음대로 성사를 집전한 일과 그 동안의 악행을 들어 그 보속으로 순교를 준비하도록 했으며, 이존창은 이를 받아들여 힘든 일을 자청하고 순교를 준비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또 주 신부는 이러한 사목 순방 과정에서 덕산의 印彦敏(마르티노), 서산 출신으로 고산에 머물고 있던 金綱伊(시몬), 덕산의 鄭山弼(베드로) 등에게 세례를 주고, 정산필을 내포 회장에 임명하였다. 아마도 주 신부의 방문과 위와 같은 일들은 내포 교회가 더욱 굳건해지는 데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이 시기에 이존창은 韓山 처가에 와있던 전라도 茂長 사람 崔汝謙(마티아), 공주의 高潤得과 金明柱․仁喆․弘喆 부자, 홍주 출신 黃日光(시몬)과 청양의 李哥, 천안 출신 최구두쇠[崔去斗金]와 아들 千明․億明, 훗날 교회 밀사로 활동하는 덕산 출신 黃沁(토마스)과 보령 출신 金有山(토마스) 등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특히 최구두쇠의 아들 최억명은 이존창이 금산으로 이주할 때 따라가 살았다는 사실에서 볼 때, 적어도 이존창이 홍산에 거주할 때 이미 천주교에 입교한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이존창의 회두 활동기는 바로 ‘내포 천주교회의 확대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이어지는 세 번째의 ‘시련 순교기’(1795~1801)에 이존창은 1795년의 乙卯迫害로 체포된 후 공주와 천안에서 투옥과 연금 생활로 고난을 겪다가 1801년의 신유박해로 공주에서 참수를 당하게 된다. 1795년 말 주문모 신부를 추적하던 포교들에 의해 고산에서 체포된 이존창은 공주 감영으로 압송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고 투옥되었다. 그리고 1797년 충청도를 중심으로 시작된 丁巳迫害 때 다시 한 번 문초를 받아야만 하였다. 이때 그는 “道臣이 직접 가르치고 경계하여 개과천선한 효과가 있으면 방면하고, 그렇지 않으면 법을 적용하는 한이 있더라도 기필코 고치게 하라.”는 정조의 명에 따라 죽음만은 면하게 되었으며, 적어도 1799년 6월 이전까지 감영의 옥에 투옥되었다. 다시 한 번 정조의 온건한 척사 입장과 정치적인 배려가 반영된 것이다.
감영의 옥에 있으면서도 이존창은 교회 밀사를 북경에 보내는 일을 도왔다. 즉 1796년과 1797년에 자신이 입교시킨 밀사 황심의 북경 파견에 관여한 것이다. 또 1798년에는 자신이 입교시킨 밀사 김유산을 북경에 파견했고, 1799년에는 다시 그로 하여금 明道會長 丁若鍾(아우구스티노)의 서한을 가지고 북경을 다녀오도록 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성직자 영입 운동과 洋舶請來 계획의 실현을 통해 禁令의 이완 내지는 신앙의 자유를 획득해 보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북경 구베아(A. Gouvea, 湯士選) 주교의 대답은 계속 부정적이었다. 1797년 황심이 받아온 회답에서는 양박을 조선에 보내기 어렵다고 하였으며, 1800년 초 김유산이 받아온 회답에도 ‘조선의 수로가 얕고 좁아 큰 선박[大舶]이 뜨기 어려우므로 용이하게 나올 수 없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이러한 회답을 들은 이존창도 결국에는 서양 선박의 파견을 기대하지 않고 “중국 교회에서 별도로 변통하는 방법이 있을 따름”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만큼 기대가 줄어든 것이다.
이후 이존창은 1797년의 정사박해가 1800년까지 계속되면서 마음이 약해졌던 것 같다. 훗날의 진술에 따르면 1799년 6월경에는 그 동안 굳게 지켰던 신앙이 약해져 다시는 천주교를 믿지 않겠다는 자복을 했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행동은 구베아 주교의 회답과도 연관이 있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그 결과 이존창은 같은 해 6~8월 사이에는 감영의 옥에서 석방되어 천안으로 이송되었고, 이후 천안의 관가 근처에서 혹은 연금 상태에서 살게 되었다. 훗날의 기록에서 ‘이존창이 行首軍官․將校․官校 등을 지냈다’고 한 시기는 바로 천안에 거주할 때였으며, 이러한 직임은 그가 ‘정도로 회귀하였다’고 생각한 조정에서 내려준 반대급부였음에 틀림없다.
시련 순교기에 이존창이 복음을 전한 사례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1799년까지는 교회 활동을 도운 것이 분명하다. 또 1800년에는 공주 병영에서 천주교 신자들의 죄를 논할 때 곤장을 맞고 석방된 적도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그 전해에 있었던 배교가 형식적인 배교였음을 설명해 주는 하나의 증거라고 생각된다. 그러던 중 1801년의 신유박해가 일어나면서 이존창은 2월 9일 다시 공주로 압송되어 감영의 옥에 갇혔으며, 그곳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고 서울로 이송되어 2월 16일부터 추국을 받았다. 그리고 2월 26일에는 참수가 결정되어 다시 공주로 이송되었으며, 2월 28일(양력 4월 10일) 그곳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이존창의 시련 순교기는 ‘내포 천주교회의 시련기’였다.
2) 이존창의 신앙과 순교 문제
내포 천주교회는 이존창의 입교 활동기에 이미 정착될 수 있었고, 그의 회두 활동기에는 그 신앙의 범위가 더욱 확대되었다. 바로 이러한 신앙의 터전 때문에 내포 천주교회가 훗날 한국 천주교회의 중심지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이존창은 당시의 신자들 사이에서 ‘천주교의 敎主’로, 박해자들에 의해서는 ‘湖西 사학의 괴수’로 불리게 되었다. 또 이재기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이존창은) 그 술법이 점차 고명해졌고, 충청도 사람들이 그를 大敎主라고 불렀으니, 실로 靑出於藍이라고 하는 것이 이것이다.
문제는 샤를르 달레 신부가 1791년에 이존창이 보여준 행동에 대해 “내포 천주교 신자들의 가장 슬프고 가장 창피스러운 배교는 그들의 사도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의 배교였다…그의 마음이 흔들렸던 것은 사실인 것 같다.”고 표현한 것처럼 그의 신앙이 얼마나 확고하였는가 하는 데 대한 해답이다. 앞에서도 인용한 것처럼 충청도 관찰사 박종악은 이존창을 문초하고 조정에 올린 장계에서 ‘邪學을 배척해 부르기를 요술이라고까지 하는 등 허물을 뉘우치고 정도로 돌아올 뜻을 갖게 되었다’고 하였다.
실제로 다블뤼 주교의 기록처럼 1791년의 문초 과정에서 이존창의 마음이 흔들렸던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배교가 형식적인 것에 불과하였다는 사실도 함께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그 이름이 널리 퍼진 이단원(즉 이존창) 또한 수색자들의 증오를 피할 수 없었다. 그는 갖은 모욕을 달게 받고 결국 체포되어 공주 감영에 갇혔다. 우리는 그가 감내해야 했던 모든 고문들을 모르겠으나 그 또한 흔들렸다. 아, 참된 증거자들이 드물구나!
위의 내용에 이어 다블뤼 주교는 “(이존창은) 그가 교리를 가르친 모든 이들을 설득하여 다시 참된 길로 이끌겠다고 다짐하고 맹세했다”는 내용을 덧붙이면서 감사 박종악이 임금에게 올린 장계를 발견한 것처럼 기록하였다. 그러나 이존창이 마음속으로 천주교 신앙을 버리지 않았고, 교회나 신자들에게 해가 되는 말도 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또 정조가 박종악의 장계를 받아본 뒤, “(천주교에) 물든 것은 오래 된 반면에 善으로 돌아온 날은 얼마 되지 않으니, 그가 진실로 正道로 돌아왔는지의 여부는 그가 공로를 세워 속죄하려는 성실성 여부를 살펴 결정할 문제이다.”라는 단서를 달은 이유는, 그의 배교가 형식적인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심 때문이었다. 따라서 박종악의 장계에는 정조나 채제공의 뜻을 헤아린 의도가 들어 있지 않느냐 하는 추정도 가능하다.
다블뤼 주교도 결국에는 “(이존창은) 그처럼 명백한 배교를 했음에도 그는 다시 신앙의 의무를 실천했던 것 같다”고 기록하였다. 그리고 샤를르 달레 신부는 박종악의 장계 내용이 엄청나게 과장된 것으로 보았다. 형식적인 배교를 토대로 장계를 작성한 것이 아니냐는 의미로 이해된다. 당시 유생들도 이존창의 형식적인 배교 사실을 알고 ‘옥문을 나서자마자 옛날처럼 되었다’고 성토하였다. 실제로 박해 시대의 문초 기록을 보면, 천주교 신자들이 배교하는 척하면서 진실을 숨긴 경우가 자주 발견된다.
한편 이존창이 1791년에 보여준 태도는 이기양이 공주 감영의 옥으로 이존창을 방문한 사실과도 관련이 있지 않나 생각된다. 물론 이기양이 이에 대해 너무나 완강하게 부인하였으므로 진실 여부를 가늠하기는 어렵지만, 신유박해 때의 추관들이 먼저 이 내용을 꺼냈다는 점에서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이에 대해 이존창 자신은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이기양이 문의현령이 되었을 때, 저는 사학을 한다는 명목으로 천안의 郡獄에 갇혀 있었는데, 그가 본 군의 수령 趙鼎玉에게 편지를 보내 ‘저를 매우 다스려야 한다’고 하였다 합니다.…이기양이 문의현령이 된 시기나 천안 군옥에 갇혀 있던 시기를 기억할 수는 없습니다.
이처럼 이존창은 이기양의 옥중 방문에 대한 추관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이기양이 문의현령으로 있을 때 공주가 아니라 천안의 수령에게 처벌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낸 것처럼 진술하였다. 동시에 1791년의 사실과 1799년 이후의 사실을 혼용하여 답변하였다. 아마도 그 이유는 스승 이기양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이기양이 공주 옥으로 찾아온 것만은 사실이었을 것이고, 관직에 있는 이기양이 감영의 옥으로 이존창을 찾아와 한 말은 분명 懷柔策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회유에 이존창이 흔들린 것은 아닐까.
다블뤼 주교는 “이 곤자가의 루도비코는 1791년에 배교하긴 했지만, 다시 열심히 신앙을 실천하고 새로 예비 신자의 수를 늘리는 데 힘썼다”는 말로 이존창의 회두를 인정해 주었다. 그리고 이존창이 주문모 신부를 만난 뒤 순교의 길로 나아가기 위해 끊임없이 신심 함양에 노력한 것으로 설명하였다.
(이존창이) 주(문모) 신부를 만나 한동안 그의 곁에 지냈던 것도 확실한 듯하다. 주 신부는 그에게 자주 이런 말을 하곤 했다고 전한다. “자네가 갖은 악행을 저지르고 터무니없이 권한도 없으면서 성사를 집전했으니, 어찌 자네가 속량을 받을 수 있겠는가? 오로지 순교를 통해서만 자네가 저지른 과오를 용서받을 수 있을 걸세.” 루도비코 역시 스스로 고되고 힘든 일들을 자청하여 맡았고, 부단히 자신의 과오를 속죄하고자 순교를 준비하기로 결심했다.
1795년에 체포되었을 때 이존창에게는 다시 한 번 순교의 기회가 주어졌다. 다블뤼 주교는 이에 대해 “신문과 혹독한 고문을 받았으나 굴복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또 1797년 2월에 있은 조정에서의 논의 가운데 “이존창의 진술이 전(1791년의 진술)과 서로 달랐다”는 내용이 있는 것을 볼 때, 적어도 1795년에는 형식적인 배교조차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이전보다 굳은 신심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다음에 인용한 D-②의 내용에서 그 자신이 ‘여러 차례 刑訊을 받았으나 자복하지 않았다’고 진술한 점도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실제로 그는 옥중에서도 교회 활동을 돕기 위해 노력하였다. 또 신앙의 자유를 획득해야 하며, 그것을 획득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신앙을 버리지 않았던 것 같다.
이존창의 신앙 태도가 다시 변하게 된 것은 그 자신의 진술대로 1799년 6~8월경의 일이었다. 당시에 그는 자신이 원하던 신앙의 자유가 요원하다고 느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마음속으로까지 신앙을 등지게 되었는지도 알 수 없다.
D-① 충청도 관찰사 李泰永의 移文에 의하면, 李存昌이 석방되어 돌아온 뒤에 특별히 살려 준 조정의 고마움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스스로 지난 잘못을 뉘우치면서 새로운 길로 들어설 계책을 서둘러 세우기를 “지금 만일 시골 마을에 따로 떨어져 있다면 남에게 신임을 보이기가 쉽지 않으니, 고을 밑에 살면서 일상적인 언행이 사람들의 이목에 오르내리게 함으로써 선한 길로 옮겨간 보람이 세상에 드러나게 할 뿐만 아니라 혹 이단에 빠져들어 스스로 헤쳐 나오지 못한 자가 있으면 또 앞으로 가르치고 일깨워 기어코 성인의 교화 속으로 함께 돌아오게끔 하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즉시 관가 근처에 와서 살게 했는데, 그의 집안에서의 평소 행동을 특별히 살펴보고 이따금 물어 보면 완전히 마음을 바꿔 더 이상 미련이 남아 있지 않다고 합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염탐하여 살펴보도록 해당 고을에 특별히 당부하고, 보고가 들어오는 대로 매월 조정에 낱낱이 移文할 생각이라고 하였습니다.
D-② 을묘년(1795년)에는 충청 감영에 붙잡혀 여러 차례 刑訊을 받았으나 사실을 자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아침에 갑자기 뉘우치는 마음이 생겨서 기미년(1799년)에 감사 李泰永이 道를 다스릴 때 ‘다시는 邪學을 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진술하여 바쳤습니다. 그러자 영문에서 조정에 장계를 올려 ‘석방하라’는 회답을 들었답니다. 또 ‘天安 읍내에 유치한 뒤 동정을 살펴 날마다 秋曹(즉 형조)에 보고하라’고 하였고, 그래서 지금까지 3년 동안 將校로 차정되어 일하면서 일찍이 관문을 한 발자국도 벗어난 적이 없으며, 邪學을 단념한 것이 이제 5년이나 되었습니다.
반면에 다블뤼 주교는 ‘천안에서 생활하는 동안에도 그는 과오를 범하지 않았고, 시련 속에서도 그는 보란듯이 꿋꿋하게 천주교를 실천했으며, 어느 정도 교회에 도움을 주었다’고 하였다. 또 어느 날 그는 여사울을 방문하였으며, 이때 진정한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준 것으로 묘사하였다.
어느 날 그는 고향인 여사울을 방문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고, (고향) 마을의 천주교 상황을 알아보았다. 그는 마을 사람들이 두려움에 모든 천주교 서적들을 한데 모아 장작더미를 만들어 공개적으로 불태워버렸음을 알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듣자 그는 흐르는 눈물을 참지 못했고, 그처럼 많은 사람들이 변절한 것에 애통해했다. 이윽고 단 한 권의 책이라도 그 불운한 방화를 면했는지 알아보았는데, 그의 친척 중 한 사람이 비밀리에 따로 챙겨둔 책 두 권을 가져왔다. 그것이 남아있는 책의 전부였다. 예전에는 열심한 신자들이 많아 그 수를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던 이 큰 마을이 무너질 줄이야, 이 같은 한탄스러운 상황이 오리라고 과연 짐작이나 했던가.
이존창은 신유박해가 일어날 때까지 천안에서 생활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다음의 E-①에 인용한 것과 같이 1800년 즉 정사박해 말기에는 다시 한 번 공주 병영에서 천주교 신자들을 잡아다 죄를 論勘할 때 다시 그곳으로 끌려가 곤장을 맞고 석방된 적이 있었다. 이는 그가 여전히 천주교 신앙과 완전히 결별하지 않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위에서와 같이 다블뤼 주교가 진정한 신앙인의 모습을 그에게서 발견한 것처럼 설명한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
그러다가 이존창은 신유박해가 일어난 뒤 다시 체포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박해와 동시에 신자 명단에 그 이름이 올라 있었던 데다가 일찍이 체포되었던 신자들로부터 그의 이름이 나오기 시작한 때문이다. 또 정조 재임시에 그의 처벌을 주장했던 노론계 인사들이 박해를 주도한 데도 한 원인이 있는 것 같다. 그는 이제 스승 권철신과 마찬가지로 전혀 비호를 받을 길이 없게 되었다. 1799년에 채제공이, 다음해 정조가 사망하면서 기호남인들을 비호해 줄 정치 세력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신유박해와 천주교 지도층 신자들의 처형을 정치적 갈등의 산물로, 이로 인한 畿湖南人의 좌절로 이해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1801년 2월 9일, 이존창은 체포되어 공주로 압송되었다. 그런 다음 16일에는 서울로 이송되어 그날부터 추국을 당하게 되었다. 이때 그는 F-②의 내용처럼 1799년 이래 3년 동안 관문을 벗어난 적이 없다고 하였으며, 천주교 신앙을 버린 지 5년이나 되었음을 강조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정의 관리들은 “여러 해 동안 사학에 오염되었으니, 실로 湖西 한 도의 괴수가 되는 자입니다. 여러 번 감옥에 들어간 데다가 變造하는 것이 無常하였으니, 中外의 멀고 가까운 사람들 가운데 이존창이 사학의 괴수인줄 모르는 이가 없습니다.”라고 하면서 그가 여전히 천주교를 신봉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하였다. 당시 조정에서 이러한 논의가 있었던 데는 이존창의 진술에서 충분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E-① 작년(1800년) 본 도의 병영에서 邪學을 한 여러 사람들을 붙잡아 와서 輕重에 따라 論勘하였으니, 혹은 杖斃하기도 하고 혹은 定配되기도 하였습니다. 저는 곤장을 맞고 석방되었습니다. 그러니 湖西에는 지금 다시 이 학을 하는 사람이 없어 진실로 고할 자가 없습니다. 이 밖에는 별도로 아뢸 말이 없습니다.
E-② 죄인 이존창은 스스로 범죄를 저지른 것이 최필공보다 아주 심한데도 중간에 특별히 용서를 받았으니 再生의 은혜를 어디에다 비기겠습니까? 그럼에도 감히 몰래 京鄕에 통하여 두루 聲氣를 퍼뜨려서 綠林․黃巾의 근심이 이르지 아니한 곳이 없었거늘 지금의 진술에서는 전적으로 이 사실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이미 서로 잊었다고 하는 말과 같은 것은 지극히 교악하고 간사하니 매우 분하고 한스러울 따름입니다. 청컨대 각별히 엄히 형벌하여 사실을 얻어내도록 하소서.
E-③ 서울에서는 최필공이 괴수이고, 호중(湖中)에서는 제가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괴수의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양근 지방은 권일신이 괴수입니다.……연전에 병영에 체포된 여러 사람 중에 아홉 명은 杖斃하고, 세 사람은 定配당하였으니, 이후로는 鄕中에 이 학을 하는 자가 거의 없었습니다. 어찌 와서 묻는 사람이 있었겠습니까?”
E-④ 제가 천안의 郡獄에 갇혀 있었는데, 이기양이 본 군의 수령 趙鼎玉에게 편지를 보내 ‘저를 매우 다스려야 한다’고 하였다 합니다. 이후 이기양이 상을 당하였을 때 제가 조상하는 편지를 지어 보냈고, 아울러 새우젓 네댓 되를 보냈습니다. 그의 아들이 대신 편지를 받아 본 뜻으로 답장을 보내 왔으나, 이기양은 답장을 쓰지 않았습니다.……홍낙민의 농장이 예산과 홍주 지역에 있으므로 어려서부터 서로 알고 있다가 제가 홍산으로 이주한 뒤 다시는 보지 못하였습니다.
이처럼 이존창은 추국 과정에서 결코 다른 신자를 밀고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G-①③에서와 같이 ‘湖西에는 지금 다시 이 학을 하는 사람이 없어 진실로 고할 자가 없습니다’라고 한 진술이 그 증거가 된다. G-②는 이러한 그의 진술에 숨김이 많다고 의심한 추관들의 말이다. 또 G-③에서와 같이 이존창의 입에서 이름이 나온 사람들은 이미 사망하거나 체포된 사람일 뿐이었다. 특히 G-④에서와 같이 그는 ‘(스승 이기양이 사학을 믿는) 저를 매우 다스려야 한다’고 했다는 말로써 이기양이 척사의 입장에 있었음을 강조하였고, 1791년 이래로 홍낙민을 만나지 못하였다는 말로써 그를 비호해 주고자 하였다.
이러한 내용들은 이존창이 신앙을 버렸다고 한다면 결코 할 수 없는 진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뜻 보면 그가 죽음을 면해 보려고 노력한 흔적이 엿보인다는 점도 부인할 수는 없다. 바로 이것이 그 순교의 勇德을 의심케 해주는 대목이다. 기록상으로 그의 순교 의지가 얼마나 굳었는지 판단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훗날 黃嗣永(알렉시오)은 “이존창은 아직 배교 중에 있었는데, 죽을 당시에는 어떠하였는지 알 수 없습니다.”라고 기록한 것도 이 때문이다. 반면에 총회장 崔昌顯(요한)은 훗날의 추국시에도 “제가 가장 존경한 사람은 권일신, 정약종, 이존창입니다.”라고 진술하였다.
이존창은 1801년 2월 26일 의금부에서 該道正法의 판결을 받았고, 이틀 후에는 공주에서 참수형을 받았다. 그의 머리는 여섯 번째의 칼날에 떨어졌다고 한다. 그는 신앙을 간직한 채 순교하였음이 분명하다. 이른바 순교의 세 가지 요소에서 누락된 부분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복 시성의 첫 번째 단계라고 할 수 있는 대상자 선정 과정에서는 우리에게 결단의 어려움을 준다. 다시 말해 과연 그를 ‘하느님의 종’(servus Dei)으로 선정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또 그에 대한 ‘성덕이나 순교의 평판이 높았는지’도 분명하게 확인할 수는 없다.
사실 다블뤼 주교는 1858~1859년에 정리한 한국 주요 순교자 약전(즉 비망기 제5권)에 이존창의 행적을 수록하면서 어떠한 단서도 달지 않았었다. 1860년에 다시 정리한 조선 순교사 비망기(즉 비망기 제4권)의 내용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또 다블뤼 주교는 그의 순교 행적을 마무리하면서 섣불리 순교에 대한 평판도 기록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존창에 대한 황사영의 평가에 대해서만은 의문을 나타냈다. 아울러 특별히 이존창의 순교 후에 다음과 같은 기적이 있었고, 훗날까지도 내포 지역 신자들의 입에서는 그의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었다는 내용을 마지막으로 기록하였다.
그의 결안을 보면 최후 심리 때에 그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는 전반적인 견해를 확고히 해주는 듯하다. (당시의) 정황을 알지 못한다고 고백한 황(사영) 알렉산델(알렉시오의 잘못)의 애매한 말이 (이런 결안에 대한) 권위를 흔들리게 했을 수도 있었으리라!……그의 친척들 가운데 여러 명이 처형 장면을 목격했는데, 그의 머리는 여섯 번째 칼질에 겨우 베어졌고, 그 장면을 목격한 모든 사람들은 (끔찍하여) 속이 뒤집어질 정도였다. 곧 유족들이 그의 유해를 수습해 확인해 보니 그의 머리가 목에 잘 붙어 있었다고 한다. 그 형제들의 말에 따르면, 목 주변에 흰줄이 그어져 있어 그것을 보고 칼에 베인 자국임을 짐작케 했다고 한다. 그의 시신은 옮겨져 선산에 안장되었다.
위의 내용은 다블뤼 주교가 한국 주요 순교자 약전에 이존창의 행적을 비판 없이 수록한 것과 함께 그에 대한 공경 활동과 시복 시성 추진 과정에서 대단히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어쩌면 그의 신앙과 순교에 대한 그 동안의 의문이나 오해를 불식시켜 줄 수 있지도 않을까 생각된다.
5. 이존창 이주 후의 여사울 공동체와 순교자
1) 김광옥(안드레아)․희성(프란치스코) 부자의 순교
1791년 말 이존창이 홍산으로 이주한 뒤에도 여사울의 신앙 공동체는 그대로 존속되었다. 특히 이곳의 양인 출신으로 그곳 면장을 지냈다고 하는 金廣玉(?~1801)은 이존창에게서 교리를 배운 뒤 아들 金稀成(프란치스코, 1765~1816)을 비롯하여 가족과 인척은 물론 이웃 사람들에게 교리를 전하는 등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였다. 大興 출신인 金丁得(베드로)이 교리를 배운 사람도 인척인 김광옥이 거의 확실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후 그 둘은 순교할 때까지 함께 신앙의 여정을 걷게 된다.
1801년의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김광옥은 인척인 김정득과 함께 공주 茂城山으로 들어가 신앙 생활을 하다가 그들의 행적을 추적하던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각각 예산과 홍주로 압송되었다. 그런 다음 그곳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은 뒤 신앙을 굳게 지키고 함께 청주로 이송되었으며, 다시 서울로 압송되어 사형 선고를 받고 1801년 7월 17일(양력 8월 25일) 예산과 대흥에서 각각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김광옥은 형장으로 가는 동안에도 묵주신공을 암송했다는 기록이 전하며, 순교 당시의 나이는 약 60세로 나타난다. 다블뤼 주교는 그의 순교 용덕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옥에서 7개월을 보낸 후 (김광옥) 안드레아는 짚으로 만든 들것에 올려져 형장으로 실려갔다. 그리로 가는 내내 그는 큰 소리로 묵주기도를 바쳤고, 구경꾼들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로다, 죽는 게 좋다고 노래를 부르며 형장으로 가는구나’ 했다. 안드레아는 ‘왜냐하면 나는 영복을 누리러 오늘 하느님 곁으로 가기 때문이오’라고 대답했다. 형구 밑에 도착하자 그는 ‘기도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조금만 기다리시오’ 하고는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기도를 마치고는 머리를 받치게 되어 있는 나무토막을 직접 턱 밑에 갖다대고는 몸을 숙였다. 망나니가 그를 내리쳤는데 잘못하여 그만 어깨 위로 떨어졌다. 안드레아는 몸을 일으켜 수건으로 피를 닦고 다시 원래의 자세를 취하고는 망나니에게 ‘잘 해서 단 칼에 내 머리를 자르시오’라고 말하고는 아주 평온하게 이 마지막 칼을 받고 그의 희생을 완성하였다.
김광옥의 굳은 신앙은 아들 김희성에게 그대로 이어졌다. 김희성은 훗날 여사울을 떠나 경상도 일월산에 있는 영양의 곧은장으로 들어가 가족과 함께 신앙 생활을 했는데, 경상도로 이주한 시기는 신유박해 직후였던 것 같다.
1815년 3월, 乙亥迫害가 일어난 지 얼마 안되어 김희성은 포졸에게 체포되었다. 그리고 곧 안동으로 압송되어 문초와 형벌 속에서 신앙을 굳게 증거하고 다시 대구로 이송되었다. 이후 그는 동료들과 함께 오랫동안 옥중 생활을 하다가 1816년 11월 1일(양력 12월 19일) 대구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당시의 나이는 51세였다. 순교 후 그의 시신은 형장 인근에 매장되었는데, 이듬해 봄에 친척과 교우들이 그 유해를 거두어 적당한 곳에 안장하였다고 한다. 김광옥․희성 부자는 2002년 3월 7일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에서 ‘하느님의 종’으로 선정되고, 다음해 10월 6일 교황청 시성성의 교령 인준에 따라 시복 재판이 진행되고 있다.
2) 성 홍병주(베드로)․영주(바오로) 형제의 순교
김광옥․희성 부자의 순교 이후 여사울 공동체에 대한 기록이 다시 나타나는 것은 1839년의 己亥迫害 때였다. 즉, 1840년 1월 31일(음력 1839년 12월 27일)과 2월 1일에 서울 당고개(현 서울 용산구 신계동 소재)에서 洪秉周(베드로)․永周(바오로) 형제가 참수형으로 순교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 형제가 신유박해로 조부 홍낙민이 서울에서 순교한 뒤 집안의 장남이던 부친 洪柏榮을 따라 조부의 고향인 예산 여사울(현 충남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열심히 신앙 생활을 했다는 기록에서 볼 때, 여사울의 공동체는 이들 가족에 의해 신앙의 맥을 잇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다음의 가계도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豊山洪氏 집안에서는 홍낙민의 순교 이후로도 신앙의 맥이 꾸준히 이어지면서 많은 순교자들이 탄생하였다. 우선 홍백영의 아우 洪梓榮(프로타시오, 1780~1840)은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전라도 광주로 유배되었다가 기해박해 때 순교하였고, 홍병주․영주 형제와 홍재영의 며느리 심조이(바르바라)도 이 박해로 순교하였다. 뿐만 아니라 1866년의 丙寅迫害 때는 오랫동안 교회 활동을 도운 것으로 유명한 홍재영의 아들 洪鳳周(토마스)가 서울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순교하였다.
<성 홍병주․영주 형제의 신앙 가계도>(豊山洪氏)
(16세) 樂敎 甲榮 병주(1840년 순교, 성인)
亮漢 樂敏(루카) 柏榮 영주(1840년 순교, 성인)
(1801년 순교) 櫟榮
梓榮(프로타시오) 鳳周(토마스, 1866년 순교)
(1839년 순교) +
沈(바르바라, 1839년 순교)
林榮 達周
儒漢 樂質 (18세) (19세)
홍병주․영주 형제 관련 기록들에서 볼 때, 부친 홍백영도 열심한 신자였음이 확실하지만 아쉽게도 관련 자료들을 찾아볼 수는 없다. 이들 형제는 자신들의 수계 생활은 물론 교우들을 돌보면서 교리를 가르치는 데 노력하였고, 비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이나 갖가지 자선 행위에도 열중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다가 프랑스 선교사들이 입국한 뒤 모두 내포 교회의 회장으로 임명되어 열심히 활동하였다. 이들 형제를 내포 회장으로 임명한 선교사는 1836년 12월 31일(음력 11월 24일)에 입국한 뒤 자주 충청도 지역을 순방한 샤스탕(St. J. Chastan, 鄭牙各伯) 신부였을 가능성이 많지만, 1836년 1월 13일(음력 1835년 11월 25일)에 입국하여 가장 오랫동안 넓은 지역을 순방한 것으로 나타나는 모방(St. P. Maubant, 羅伯多祿) 신부였을 가능성도 있다.
1839년의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홍병주․영주 형제는 제2대 조선교구장 앵베르(St. L. Imbert, 范世亨) 주교의 명으로 함께 피신하던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에게 은신처를 제공하였다. 당시 두 선교사는 내포 지역을 거쳐 홍주 다래골(현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의 다락골)로 간 뒤, 모방 신부는 그곳에 남고 샤스탕 신부는 전라도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체포된 앵베르 주교로부터 자수를 권유하는 편지를 받고는 모두 피신처에서 나와 포졸들에게 자수하였다.
이 무렵 홍병주․영주 형제는 이미 순교를 결심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선교사의 종적을 추적하던 배교자 金順性(일명 ‘여상’)에 의해 선교사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한 것이 탄로되었고, 그 결과 8월에 체포되어 서울 포도청으로 압송되었다. 이후 그들 형제는 포도청과 형조에서 혹독한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 했지만 조금도 신앙을 굽히지 않았다. 그런 다음 동료들과 함께 사형 판결을 받고 당고개(현 서울 용산구 신계동) 형장으로 끌려가 홍병주가 1840년 1월 31일(음력 1839년 12월 27일)에, 홍영주가 이튿날에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당시의 나이는 각각 42세와 39세였다. 이들 형제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으며, 1984년 5월 6일 교황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3) 병인박해와 여사울 출신의 순교자들
여사울의 신앙 공동체는 이처럼 1791년의 신해박해, 1801년의 신유박해와 1839년의 기해박해로 인해 오랫동안 수난을 당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경우에는 남아 있던 신자들마저 박해의 위협 때문에 다른 곳으로 이주하면서 신앙 공동체가 와해되거나 기록상에서 사라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여사울의 경우는 달랐다. 왜냐하면 1866년에 발생하여 훗날까지 지속된 丙寅迫害의 순교록에 또다시 여사울 출신의 순교자들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병인박해 때 순교한 여사울 출신 중에는, 다음의 표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김영지․김준명․빈무관 등과 같이 내포 출신으로 여사울에서 신앙 생활을 해오다가 그곳에서 체포되어 수원․공주에서 순교한 경우가 있다. 다음으로 이선성(바오로)과 같이 여사울에서 다른 곳으로 이주해 살다가 서울에서 순교한 경우도 있고, 수원 걸매(현 충남 아산시 인주면 걸매리)의 密陽朴氏 집안과 같이 훗날 여사울로 이주해 살다가 체포되어 수원에서 순교한 경우도 있다. 박씨 집안 순교자 가운데 여사울에서 신앙 생활을 하다가 체포된 신자로는 박의서(사바) 회장을 비롯하여 동생 박원서(마르코)․이 마리아 부부, 동생 박익서 등이 있다.
이처럼 여사울은 그곳에 살던 내포의 사도 이존창에 의해 충청도 지역에서 천주교 신앙이 처음 전파된 곳으로, 신앙 공동체가 형성된 이후 내포 교회의 출발지이자 중심지 역할을 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신유박해․기해박해․병인박해를 겪으면서 2명의 하느님의 종, 2명의 성인, 여러 명의 순교자를 탄생시킨 교우촌 즉 순교자의 못자리라는 역사적 의미도 지니고 있다.
<병인박해 이후의 여사울 출신 순교자 현황>
|
성명(세례명) |
출신지 |
거주지 |
순교지 |
순교 형태 |
순교 연도 |
비 고 |
|
김영지 |
내포 |
여사울 |
수원 |
미상 |
1871년 3월 |
|
|
김준명 |
|
여사울 |
공주 |
미상 |
1866년 |
|
|
빈무관 |
내포 |
여사울 |
공주 |
미상 |
1866년 11월 |
|
|
이선성(바오로) |
여사울 |
평택 군문리 |
서울 |
미상 |
1867년 |
|
|
박의서(사바) |
수원 걸매 |
여사울 |
수원 |
교수 |
1867년 8월 8일 (혹은 3월, 62세) |
회장 |
|
박원서(마르코) |
수원 걸매 |
여사울 |
수원 |
교수 |
1867년 8월 8일 (혹은 3월, 51세) |
박의서 동생 |
|
이 마리아 |
수원 걸매 |
여사울 |
수원 |
|
1867년 8월 8일 (혹은 3월) |
박원서 부인 |
|
박익서 |
수원 걸매 |
여사울 |
수원 |
교수 |
1867년 8월 8일 (혹은 3월, 45세) |
박의서 동생 |
6. 맺 음 말
지금의 예산 여사울[옛 천안군 신종면 상신리의 餘村 혹은 餘湖]은 덕산의 장천과 함께 1757년 이후로 오랫동안 성호학파의 일맥이 형성되어 있던 곳이다. 바로 그 해에 정산 이병휴가 안산에서 장천으로, 농은 홍유한이 서울 아현에서 여사울로 이주하기 때문이다. 이어 1765~1766년 무렵에는 인천에 살던 복암 이기양이 스승 이병휴를 따라 낙남했으며, 1768년 이후로는 경기도 양근에 살던 녹암 권철신과 제자인 광암 이벽이 이병휴를 스승으로 모시게 되었다. 또 여사울에서 성장한 홍낙민도 숙부인 홍유한과 스승인 권철신으로 따라 성호 학맥을 잇고 있었다.
바로 이러한 배경 아래서 여사울 출신의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은 1774년부터 이기양․권철신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했으며, 홍유한에게서도 사사를 받았다. 그러면서 홍낙민은 물론 이기양의 아들인 이총억 등 녹암계 인물들과 함께 성호 학통을 잇게 되고, 여사울의 성호 학통은 이존창을 통해 계속 존속될 수 있었다. 아울러 이존창은 탈주자학적이고 개혁적인 학문 성향을 지니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양인 신분의 한계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이존창은 녹암계 인물들과의 교류 과정에서 서학을 이해하고 천주교 신앙을 수용하게 된다.
이존창은 특히 권철신의 아우인 직암 권일신의 가르침에 따라 서학 내지는 천주교 교리를 알게 되었으며, 점차 천주 신앙에 기울어지면서 세례를 받고 입교하였다. 그리고 처음부터 교리에 충실했으니, 이는 개혁적인 지식인에서 실천하는 신앙인으로 변모하게 된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가 영세 입교한 시기는 정확하지 않다. 아마도 1784년 겨울의 교회 창설 직후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고, 즉시 고향으로 내려가 전교 활동을 시작하면서 1785년 초에는 ‘여사울 신앙 공동체’를 이룩하게 된 것으로 이해된다. 이 공동체의 형성은 곧 내포 천주교회의 설립과 출발을 의미한다.
이존창의 교회 활동은, 크게 입교 활동기(1784~1791년), 회두 활동기(1791~1795년), 시련 순교기(1795~1801년) 등 세 시기로 구분된다.
이 중에서 첫 번째 시기인 ‘입교 활동기’는 곧 내포 천주교회의 정착기로, 입교 직후 여사울로 내려가 전교하던 중 1791년의 신해박해로 체포되었다가 석방되면서 같은 해 12월 31일 홍산으로 이주하기 전까지이다. 그 과정에서 이존창은 내포 교회가 짧은 기간 안에 정착하는 결실을 얻을 수 있었고, 자신은 내포의 사도이자 교회 지도층의 일원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으며, 여사울 공동체는 내포 교회의 출발지이자 중심지 역할을 하게 되었다. 특히 이 공동체는 처음부터 하층민 중심으로 천주교가 전파되면서 교회의 제사 금지령에도 큰 영향을 받지 않고 유지될 수 있었다.
홍산으로 이주한 이존창은 그 후 금산으로 이주했고, 1794년 말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그를 자신의 집에 영접할 생각에서 다시 전라도 고산으로 이주했는데, 이 기간이 바로 ‘회두 활동기’에 해당한다. 이제 이존창은 신앙을 회복하고 전교 활동에 노력함으로써 천주교 신앙이 더 넓은 지역으로 확산되는 데 기여했으니, 이 시기는 내포 천주교회의 확대기에 해당한다.
이어지는 세 번째의 ‘시련 순교기’에 이존창은 1795년의 을묘박해로 체포된 후 공주에서 수감 생활을 했으며, 그 와중에서도 교회의 밀사 파견 활동 즉 성직자 영입 운동과 양박 청래 계획에 동참하였다. 그러다가 1799년 6월경에는 마음이 약해져 배교를 자복했고, 이후 천안에서 연금 생활을 하게 된다. 그런 다음 1801년의 신유박해 발생 직후 공주와 의금부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은 뒤 공주로 이송되어 2월 28일(양력 4월 10일)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이존창의 시련 순교기는 내포 천주교회의 시련기이기도 했다.
이처럼 이존창은 여러 차례 순교의 용덕을 보일 기회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때마다 마음이 약해지곤 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다른 신자를 밀고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또 추국 과정에서는 스승 이기양은 물론 동료 홍낙민을 비호해 주고자 했던 모습도 엿보인다. 실제로 이와 같이 엇갈린 기록들은 그를 ‘하느님의 종’으로 선정하는 데 어려움을 준다. 다만, 다블뤼 주교는 이존창의 행적을 기록하면서 마지막으로 그가 순교한 뒤에 기적이 있었고, 내포 지역 신자들의 입에서는 여전히 그의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었다는 내용을 기록하였으니, 이는 이존창에 대한 공경 활동과 시복 시성 추진 과정에서 대단히 중요한 요소가 될 것임에 틀림없다.
1791년 말 이존창이 여사울을 떠난 뒤에도 그곳의 신앙 공동체는 그대로 존속되었는데, 이 사실은 그곳 면장을 지냈다고 하는 김광옥(안드레아)과 김희성(프란치스코) 부자의 순교 행적에서 잘 드러난다. 이후 김광옥은 1801년에 예산에서 순교했고, 경상도로 피신해 살던 김희성은 1816년 대구에서 순교했으며, 2002년에 모두 하느님의 종으로 선정되었다.
한편 1801년의 신유박해 이후 김희성이 경상도로 피신한 반면에 서울에 거주하던 홍낙민의 장남 홍백영이 가족과 함께 여사울로 내려와 생활하면서 이곳의 신앙 공동체는 홍백영 가족에 의해 신앙의 맥을 잇게 되었다. 특히 그의 아들 성 홍병주(베드로)와 성 홍영주(바오로) 형제는 내포의 회장으로 활동하다가 1839년의 기해박해 때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으며, 1840년 1월 31일(음력 1839년 12월 27일)과 이튿날 당고개에서 순교하였다. 이들 형제는 1984년에 함께 시성되었다.
기해박해 이후 여사울의 신앙 공동체는 또 다른 신자들에 의해 계속 유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1866년의 병인박해 순교록에 여사울 출신의 순교자들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당시 여사울 출신의 순교자들 중에는, 첫째 김영지․김준명․빈무관 등과 같이 내포 출신으로 여사울에서 신앙 생활을 해오다가 체포되어 수원․공주에서 순교한 경우가 있고, 둘째 이선성(바오로)과 같이 여사울에서 다른 곳으로 이주해 살다가 서울에서 순교한 경우도 있으며, 셋째 수원 걸매 출신의 박의서(사바) 회장 가족과 같이 여사울로 이주해 와 살다가 체포되어 수원에서 순교한 경우도 있었다.
이처럼 여사울은 일찍부터 성호학파의 일맥이 형성되어 있던 곳으로, 그곳 출신인 내포의 사도 이존창에 의해 충청도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천주교 신앙이 전파된 곳이다. 이후 여사울의 신앙 공동체는 내포 교회의 출발지이자 중심지 역할을 하게 되었으며, 1866년의 병인박해 때까지 신앙의 맥이 이어지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신유박해․기해박해․병인박해를 겪으면서 2명의 성인, 2명의 하느님의 종, 여러 명의 순교자를 탄생시키는 순교자의 못자리 역할도 하였다. 그러므로 다블뤼 주교도 훗날 서울․경기․충청․전라도에서 체포된 수많은 순교자들이 내포 지역 교회와 어떠한 형태로든 연관을 맺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오늘날(1850년대)의 천주교 신자들 대부분이 그때(교회 창설기) 이존창이 입교시킨 사람들의 후손들”이라고 기록하였다.
<차기진 / 양업교회사연구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