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옴) 이승훈 베드로

2014. 11. 12. 오후 1:13:40

글자

 

 

 

 

묘소위치 : 인천시 남동구 장수동 산 132-1

관할 본당 : 인천교구 만수1동 천주교회

1.

증보한국천주교회사

 

중에서 ․․․․․․․․․ 2

 

저자 : 유홍열(로렌조) 출판 : 가톨릭출판사

2.

하늘에서 땅끝까지

 

중에서 ․․․․․․․․․․․․ 6

 

저자 : 주평국 신부 출판 : 가톨릭출판사 내용 : 전국 성지 안내

3.

가천문화재단 문화행사

 

중에․․․․․․․․․․․․ 8

 

97 문화유산의 해 베드로 이승훈선생 추모행사

가천문화재단 부장 이형석 교육학 박사 집필

4.

이승훈(베드로)의 묘

 

․․․․․․․․․․․․․ 11

 

한국천주교회의 선각자,

최초의 영세자 이승훈(이승훈) 베드로의 묘 글쓴이 : 한종오(베드로)

5.

만수1동 본당 10년사

 

중에서․․․․․․․․․․․․ 13

 

6.

묘비문

 

․․․․․․․․․․․․․․․․․․ 17

 

7.

7대손 이태석 신부

 

․․․․․․․․․․․․․ 18

 

[순교자성월 특집] 한국 첫 세례자 이승훈 7대손 이태석 신부

평화신문 제544호 연중 제 23주일 19999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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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x223943984이승훈묘 인천대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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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동구청

남 동 구

 

 

서창인터체인지

 

 

 

11장 이승훈의 입연(入燕)과 조선 천주교회 창설

 

선 천주교회의 새싹이 경기도 광주 및 양근 지방을 근거로 하여 남인 학자들 사이에 움트기 시작하였을 즈음에, 여기에 새로이 나타난 어려운 문제는 그 교리와 여태까지 전해 내려오던 조선 풍속과 서로 맞지 않는 점, 즉 천주교 사회와 옛조선 사회와의 사이에 차이(差異) 및 모순(矛盾)을 느끼게 된 점이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하여 교리 연구원(敎理硏究員)을 북경 천주당에 보내려고 그에 가장 알맞는 인물(人物)을 고르게 되었다. 이에 뽑힌 사람이 곧 1783(정조 7)에 동지사 겸 사은사 황 인점의 서장관으로 가게 된 이 동욱(李東郁)의 아들 이 승훈(李承薰)이었다. 이것은 정기적(定期的)으로 북경에 가는 사신의 한 사람이라는 핑계로 오고가는 도중에 무서운 감시인(監視人)의 눈을 피()하여 그 목적을 쉽게 이룩하려고 한 데서 나온 것이니, 그 당시에 있어서는 개인으로서는 도저히 북경에 들어갈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승훈이 북경에 감이승훈은 그 본(本貫)을 강원도(江原道) 평창(平昌)에 둔 사람으로서, 1756(영조 32)에 훌륭한 양반집 아들로 태어나, 열살 때에 이미 그 뛰어난 재주가 세상에 알려졌다. 20세 전후에는 학식(學識)이 크게 늘어, 옛 성현의 도를 닦는 한편, 그의 뛰어난 재주와 인격으로써 훌륭한 분들과 사귀어 놀았다. 그는 1780(25)에 진사(進士) 시험에 합격하여, 1790년에는 평택(平澤) 지방의 현감(縣監=지금의 군수 - 郡守)을 지냈다. 가족적(家族的)으로는 정 약용의 누이()를 그의 아내로 맞이 하였으며, 이 벽과도 사돈(査頓) 관계를 맺었다. 그의 어머니는 이 익의 종손(從孫)인 이 가환의 누님이며, 그 아우 치훈(致薰)은 권 이강(權以綱)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하였으니, 이들 네 사람은 모두 남인 학자이며, 인척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렇게 친한 사이를 이용하여 이 벽이 주동(主動)이 되어 동지(同志)들로부터 여비를 모아서 이 승훈으로 하여금 북경에 다녀오게 하였다. 이리하여 이 벽은 즐거움에 넘친 나머지, 이승훈을 찾아가서 다음과 같은 간곡한 부탁을 하였다.

󰡒이번에 자네가 북경에 들어가게 된 것은 참으로 하늘이 우리들에게 성교(聖敎)의 참된 뜻을 가르치고자 하시는, 천년만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하는 좋은 기회이다. 이 교리만이 성현의 도()이며, 만물(萬物)을 만들어낸 주인인, 오직 하나 뿐이고 모든 일을 다 할 수 있는 천주에게 봉사하는 참된 교()이므로 구라파사람들은 이것을 가장 높이 받든다. 이것을 빼 놓으면 우리들은 아무 힘도 없어지고, 아무 일도 할 수 없게 되어, 마음을 가다듬을 수도 없고, 만물을 연구하고 알아낼 수도 없다. 나라를 다스리는 요긴한 깨우침, 세상 살아 나가는 표준(標準), 천지의 만들어냄과, 그 처음과 끝, 천체(天體)의 움직이는 법칙, 옳고 그르고, 착하고 나쁨의 판단, 정신과 신체의 융합(融合), (인간의) 죄를 구하고자 천주의 아들이 사람으로 태어난 탁신(托身)의 뜻, (죽은 후) 천당에 있어서의 영광(榮光)과 행복, 그리고 지옥에 있어서의 징계(懲戒)와 형벌 등 모든 것이 이것으로써 정()하여진다. 이번 자네가 북경으로 가게 된 것은 참으로 천주께서 우리의 이 작은 나라를 불쌍히 여기사 우리를 구하고자 하시는 섭리이다. 북경에 들어가거든 곧 천주당에 가서 구라파의 교사(敎師)를 만나고 모든 것을 그들에게 물어서, 교의(敎義)의 깊고 참된 뜻을 밝히며, 천주교리의 실천 방법을 자세히 살피고, 또 필요하고 중요한 교리에 관한 책을 모두 가지고 돌아오게.인간이 죽느냐 사느냐, 그리고 영원토록 행복 하느냐 불행 하느냐가 달린 큰 문제가 자네 손에 매여 있으니, 경솔히 행동하지 말고 몸가짐을 특히 주의하라.󰡓*

이때까지 아직 교리서(敎理書)에 그리 친하지 못하였던 이승훈은 그 말을 듣고 크게 감동하여, 그 때부터 교리 서적을 얻어 읽고 감격하고 기뻐하면서 자기가 맡은 바 구실을 반드시 이룩하고야 말 것을 결심하였다. 이것으로 보면 이벽과 그 동지들은 새로운 지식보다도 오히려 천주교의 교리에 굶주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천주의 성총(聖寵)을 받아들이기 위한 마음은 이미 정비(整備)되었고, 오직 구령(救靈)만을 가장 중대한 문제로 여기고 있던 이 벽의 열렬한 어조(語調)는 마침내 이 승훈의 마음을 크게 움직이게 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이 승훈은 1783(정조 7) 음력 1014일에 삼절년공(동지사) 겸 사은정사(三節年貢兼謝恩正使) 창성위(昌城尉) 황인점(黃仁點)과 부사(副使) 유의양(柳義養), 그리고 아버지인 서장관(書壯官) 이동욱(李東郁)을 따라서 서울을 떠나, 123일에는 심양(瀋陽 = 지금의 봉천 - 奉天)을 거쳐, 그달 21일에는 북경에 다다르게 되었다. 일행은 그후 40여일 동안 북경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이 동안을 이용하여 그는 이 벽이 간곡히 부탁한 대로 자주 프랑스신부들이 맡아보던 북천주당을 찾아가서 필담(筆談)으로 교리를 배우고 영신상(靈神上)의 모든 준비를 갖추게 되었다.

이 승훈이 세례를 받음그리하여 그는 마침내 돌아오기를 앞서 그곳에서 다음해(1784) 양력 2월에 예수회의 드그라몽(Louis de Grammont)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조선 교회의 주춧돌이 되라는 뜻에서 베드루(Peter = 바위)라는 본명(本名, 즉 영명 - 靈名)을 받았다. 달레(Dallet)조선 교회사에는 이승훈이 북경 주교 알렉산델구베아(Alexandre de Gouvea, 중국 이름 탕사선-湯士選)를 만나 보았다고 쓰여 있으나, 구베아 주교는 178475일에 마카오에 상륙(上陸)하여 다음해(1785) 1월에 북경에 들어왔던 것이니, 그는 도저히 이 승훈을 만나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구베아 주교는 성 방지거 제3신부로서 북경에 들어와 건륭 황제의 사랑을 받고, 흠천감정(欽天監正) 겸 국자관(國子舘) 및 산학관(算學館)의 장()이라는 좋은 벼슬자리에 올랐다. 그는 전교(傳敎)에도 크게 힘을 기울여, 중국의 전례문제(典禮問題)에 관한 로마 교황청의 명령을 엄하게 지키고, 신자로 하여금 유교적 의식(儒敎的儀式)에서 떠나게 하려고 힘쓴 유명한 주교의 한 사람이다. 이승훈이 세례를 받은 그 다음해에 구베아 주교가 북경에 들어왔는데, 그 전해(1782)에 그가 북경 주교로 임명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착오(錯誤)를 일으킨 것 같다.

유명한 황 사영(黃嗣永)백서(帛書)에는 󰡒이승훈이 천주당에 이르러 세례 받기를 청하였으나, 여러 신부들은 그가 교리에 밝지 못하므로 허락하지 아니하고 다만 양() 신부만이 힘써서 세례를 주었다.󰡓라고 씌어져 있으니, 이 양 신부가 곧 드그라몽 신부인 것이다. 달레의 교회사에서도 이승훈이 북경에서 관계를 맺고 있던 유럽 사람으로는 80세를 넘은 삭 덕초(Sak Tek-tso 索德蕉)와 젊은 냥(Niang, 梁棟材)이라는 사람이 있었다고 말하고 있으니, 이 냥이라는 사람이 곧 드그랑몽 신부이었다. 삭덕초는 1759년 북경에 들어와 흠천감(欽天監)의 감정(監正)을 지내다가 180578세로 별세한 예수회의 포루투갈 신부 드 알레메이다.(J.V. De Almeida)이고 냥신부는 1763년 프랑스에서 예수회가 한때 해산되자 북경으로 나와 북천주당을 지키던 예수회의 프랑스 신부 8명 중의 하나이었다.

방따봉 신부의 보고그 때 북경에 있던 예수회 관구장 드방따봉(de Ventavon 汪達洪)신부는 17841125일자로 이 반가운 사실(事實)을 본국에 있는 친한 벗에게 다음과 같이 알리었다.

󰡒아직 어떠한 성직자가 한 사람도 발을 들여놓지 못한 한 왕국에서 복음의 빛을 빛나게 하기 위하여, 천주께서 쓰시(使用)려고 하신 바의 한 사람이 개종(改宗)하게 된 이야기를 그대는 위안과 즐거움으로써 들으시리라고 믿는다. 그 왕국은 중국 동쪽에 있는 반도의 나라인 조선이다. 그 나라 왕은 중국에 속해 있어서 해마다 중국 황제에게 사신을 보낸다. 그리하여도 그 왕은 조금도 손해를 보는 바가 없다. 많은 방물(方物)을 황제에게 바친다 하여도, 황제로부터 내리는 증물(贈物)은 더욱 많다. 작년 겨울에 들어온 조선의 사절과 따라온 사람들이 우리의 성당을 구경하러 왔으므로 우리는 그들에게 종교 서적을 주었다. 그들 중 나이가 27세로 귀족의 아들이며 학식(學識)이 많은 한 청년은, 즐겨 이 종교 서적을 읽고 진리를 믿었다. 그는 성총(聖寵)으로 마음이 움직이게 된 결과, 깊은 연구를 거듭하여 우리 종교를 믿고 그것에 의지(依持)하겠다고 결심하였다. 세례를 주기 전에 우리는 여러 가지로 물어 보고, 충분히 만족할 만한 대답을 얻었다. 국왕이 그대의 행동을 그르다 하고 신앙을 버릴 것을 강제로 요구하면 어찌할 생각이냐고 물어 보았다. 그는 서슴지 않고 자기가 진리라고 믿는 종교를 버리는 것보다는 오히려 어떠한 고문(拷問)이나 죽음이라도 달게 받겠다고 대답하였다. 복음의 가르침은 한 남자가 여러 부인을 가짐을 허락치 않는다고 주의시키니, 자기는 정처(正妻)외에는 아무도 없으며, 결코 다른 여자를 생각치 않는다고 잘라 말하였다. 마침내 돌아가기 전에 그 아버지의 동의(同意)를 얻어, 그라몽 신부께서 그에게 세례를 주고 베드루라는 본명(本名)을 주었다. 그의 성()은 이()이며, 임금과 친척 관계에 있다. 자기 나라에 돌아간 후에는 이 세상에서 영달(榮達)해 보자는 마음을 버리고, 가족과 더불어 시골에 내려가, 전원(田園)에 숨어 살면서 자기의 구령(救靈)에만 오로지 힘쓸 생각이라고 확실히 말하였으며, 또 해마다 그 소식을 우리에게 보내어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사절(使節)들도 자기들 나라 안에 서양사람을 불러들이도록 임금에게 아뢰겠다고 약속하였다. 북경에서 조선의 서울까지 가려면 육로(陸路)로 약 3개월 걸린다. 우리들은 필담(筆談)으로써가 아니면 조선 사람들과 이야기 할 수 없다. 그들이 쓰는 글자는 그 모양이나 뜻이 중국사람의 그것과 마찬가지다. 약간 차이가 있다 하여도 그것은 문제 안되고, 오직 발음(發音)이 전혀 다를 뿐이다. 조선 사람은 자기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글로 써낸다. 우리는 그 글을 보고 그 뜻을 알아차리며, 그들도 우리가 쓴 대답을 보고 뜻을 깨닫는다.󰡓*

북경주교 구베아의 편지 북경 주교 구베아는 1797815일자로 사천성 교구장(四川省敎區長) 마르땡(de Saint Martin) 주교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조선의 새 교회는 그 발생(發生)의 시초(始初)1784년에 북경을 찾아온 그 나라 왕의 사절의 아들인 이()라는 청년의 개종에 둘 수 있다. 이 청년은 산학(算學)의 연구가로서, 서양 신부들에게 서양 과학에 관한 책을 요구하고 그것을 가르쳐 주기를 원하였다. 신부들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산학서(算學書)와 아울러 천주교서를 주어, 차차 천주교의 교의(敎義)에 가까이 하도록 꾀하였다. 다행이 필담으로써 행한 천주교의 강술(講述)은 청년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고, 큰 감명을 주어 개종할 뜻을 일으키게 하였다. 그는 여러 가지의 신조(信條)를 완전히 이해하고, 베드루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 해 자기 나라에 돌아갈 때에는 그는 천주교에 관한 많은 책을 가지고 갔다. 조선의 글자는 중국의 글자와 발음만 다르지, 전혀 똑같다. 따라서 한자(漢字)를 아는 서양인 신부와 중국인은 같은 글자를 쓰는 조선 사람과 필담으로 뜻을 서로 통할 수 있다. 그러므로 조선인도 서양인 신부가 지은 한문으로 된 천주교 서적을 충분히 읽고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이 승훈을 역학(曆學) 연구원이라 하여 1741년 이래 우리 나라에서 북경에 가는 사신에게 해마다 딸리어 보내어 흠천감(欽天監)으로 찾아가서 서양 역법을 연구하게 한 것과 같은 데에 그가 입교하게 된 동기가 있었다고 말하였으나, 이는 이 승훈의 본 뜻을 모르는 관찰이다.

이승훈의 귀국과 전교 활동이 승훈이 세례를 받은 날짜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그가 40여 일 동안 북경에 머무르고 돌아오기 직전이라고 하니, 1784년 음력 정월 그믐께(양력 2월 하순경)쯤이 아니었던가 한다. 이것은 그 일행이 돌아와 임금에게 인사를 드린 것이 1784(정조 8) 음력 324일이므로, 도중에 필요한 50여 일을 빼면 북경을 떠난 날짜가 같은 해 음력 2월 초()이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어떻든 그의 개종은 선교사의 전도의 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의 자발적인 구도심(求道心)에서 우러나온 것이었으니, 이 점은 세계의 모든 교회사상에서 우리 천주교회사만이 가지는 하나의 큰 특색이며 자랑거리인 것이다.

영신적(靈神的)으로 다시 살아난 이 승훈베드루는 1784(종조 8) 음력 3월에 수십종(數十種)의 교리서와 십자고상(十字苦像). 성화(聖畵), 묵주(黙珠), 그밖에 여러 가지 진귀한 물품을 받아 가지고 서울에 돌아와서, 염초교(焰炒僑 = 지금 서울역 북쪽) 부근에 있던 자기 집에서 종교 생활을 실천에 옮기는 한편, 그가 가져온 책을 이 벽에게 넘겨 주었다. 이러한 귀중한 선물을 받은 이 벽은 매우 기뻐하여, 곧 조용한 곳에 집을 얻고 그 곳에 파묻히어 열심히 교리서를 숙독하고 묵상하였다. 그 보람이 있어서, 종교 진리의 여러 가지 증명, 중국 및 조선서 행하는 미신(迷信)에 대한 반박(反駁), 칠성사(七聖事)의 설명, 공교요리(公敎要理)복음의 해설(解說), 매일의 성인전(聖人傳), 기도서 등을 완전히 이해하게 되어, 천주교의 큰 뿌리가 무엇인가를 파악하고, 그 세부(細部)까지 밝혀내게 되었다. 이 벽은 이 책들을 읽어감에 따라, 새로운 생명이 그 혼()속에 들어오는 것을 느끼고,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날로 강하여져서 마침내 천주의 이 선물을 널리 동포들에게 나누어주려는 생각이 복받쳐 오르게 되었다. 교리의 연구를 끝마친 이 벽은 숨어 있던 곳을 나와서 이 승훈과 정 약종, 정약용 형제를 찾아가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것은 참으로 훌륭한 종교이며 참된 도이다. 천주께서 우리 백성을 불쌍히 여기사, 우리들로 하여금 세계를 구하고 죄를 보속하는 은혜에 참여(參與)하게 하고자 하심이다. 이것은 천주의 명령이니, 우리들은 그 부르심에 귀를 막을 수는 없다. 모름지기 천주교를 널리 펴서 복음을 온세상에 선전하여야 한다.󰡓*

 

 

반주골(이승훈 묘)

묘 주인은 천진암으로

 

소 재 지 : 인천광역시 남동구 만수동 반주골

지리좌표 : 이승훈 묘소 앞 북위 372722동경 1264442

지 형 도 1 : 50,000 NJ 52-9-17 인천

문 의 처 : 만수1동 성당 (032-464-0888)

 

月落在天水上池盡(월락재천수상지진) 한국 최초의 영세자이며 한국 천주교회 창설자 중의 한 사람인 이승훈(베드로)의 묘 앞에 서면 그가 1801년 신유박해로 참수되기 직전에 읊었던 한시(漢詩)가 마음속에 떠오른다.

󰡒달은 비록 서산에 지더라도 하늘에 남아 있음󰡓과 같이 남이 비록 나더러 배교했다 말하더라도 내 신앙은 천주 안에 그대로 남아 있고󰡐물이 비록 못 위로 치솟아도 그 못 속에 온전함같이󰡑내 목숨을 앗아가도 내 신앙은 변함이 없다.󰡓

인간적 약점으로 인해 여러 차례 천주를 부인한 이승훈은 이승을 하직하는 자리에서 스스로에 대한 애절한 후회와 자책을 이 한 구절 시구(詩句) 속에 절절히 담았다. 그리고 그는 이 몇 마디 한시를 통해 결코 자신의 신앙은 변함이 없음을 스스로와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 주었던 것이다.

비록 몇 차례의 배교를 했다 해도 그가 한국 천주교회사 안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는 조금도 감소되지 않는다.

이승훈은 평창(平昌) 이씨 가문의 부친 이동욱(李東郁)과 모친 여주(驪州) 이씨 사이에서 1756년 태어났다. 24세의 젊은 나이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으나 벼슬길을 단념한 그는 당대의 명문가인 마재 정씨 가문 정약용의 누이동생과 결혼하여 그들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게 된다.

당대의 석학 이벽(李壁)과도 교분을 갖게 된 그는 정약용 형제들과 천진암 강학회에 참석하던 중 이벽의 권유로 1783년말 동지사(冬至使) 서장관(書狀官)에 임명된 부친을 따라 북경을 가게 된다. 그는 북경에 머무르는 동안 북당(北堂)에서 예수회 선교사들에게서 교리를 배워 이듬해 그라몽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한국 최초의 영세자가 된다.

영세 후 천주교 교리 서적, 십자 고상, 상본 등을 갖고 귀국해 이벽, 정약전약용 형제, 권일신 등에게 세례를 베풀고 다시 이벽으로 하여금 최창현, 최인길 등에게 세례를 베풀게 하며 1785년에는 서울 명례방 김범우의 집에서 종교 집회를 갖는 등 신자 공동체를 형성시켜 마침내 한국 천주교회를 창설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그러나 그 해 명례방 집회가 형조의 관헌에게 적발되는 이른바 을사 추조 적발사건(乙巳秋曺摘發事件)이 발생하자 그는 천주교 서적을 불태우고 벽이문(闢異文)을 지어 첫 번째 배교를 한다.

하지만 그는 1786년 다시 교회로 돌아와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를 주도한다. 그후 1790년 북경에 밀사로 파견됐던 윤유일이 돌아와 가성직 제도와 조상 제사를 금지한 북경 교구장 구베아 주교의 명을 전하자 조상 제사 문제로 다시 교회를 떠났다.

그 후에도 이승훈은 여러 차례 배교를 했고 마침내 1801년 신유박해로 322일 이가환, 정약용, 홍낙민 등과 함께 체포된 후 48일 다른 6명의 교우들과 함께 참수되었다.

비록 그는 이처럼 여러 번 배교 했으나 이 땅에 복음으 첫 번째 씨앗을 뿌린 선구자였고 그로부터 시작된 신앙은 후손들에게 이어져 아들 신규와 손자 재의는 1866년 병인 박해 때, 증손 이연구균구는 1871년에 각각 순교했다.

찾아 가는 길

2 경인 고속 국도 서창 분기점에서 북쪽으로 빠져 나가면 42번 국도인 수인 산업 도로와 닿는다. 자연 주유소 길 건너편에 안내 푯말이 있다.

남동 정수 사업소 울나리를 끼고 20분 정도 걸으면 이승훈 묘에 다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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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문화유산의 해󰡑

 

베드로 이승훈선생 추모행사

 

: 1997. 4. 27() 11:00 12:30

: 조곡산 이승훈선생 묘소옆 공지

 

사회 : 정재성

1

이승훈 선생께 드리는 현다식

가천 문화재단 예절반(조영아, 서양석)

색동회 인천지회 예절반(이순민, 김해인,윤은지, 강용환)

 

묘소앞에서 장소이동

 

2

이승훈선생 추모행사

인사말씀 - 김용모 남동구청장

- 이병찬(평창이씨 대종회장)

학술발표

- 이승훈선생의 생애 : 이형석 박사

(가천문화재단 문화부장)

한풀이 무용(해원무) - 예총 인천지회

터벌림 춤 - 송정희, 장정아, 김민정, 가수연

성주모심춤 - 이명선(인천 무용단 대표)

살 풀 이 - 이명선(인천 무용단 대표)

 

주 관 : 가천문화재단, 인천문화원

주 최 : 예총 인천지회, 색동회 인천지회, 이천문화연구회, 미추홀봉사단,

인천 땅이름연구회, 연수신문사, 인천 어린이 신문

후 원 : 남동구청, 만수1동 천주교회, 평창 이씨 종친회

 

한국 최초의 영세자

베드로 이승훈선생 묘소

- 427답사 및 헌다식 -

 

 

 

󰡒샛골에서 새를 잡아

장작골에서 장작피워 이 형 석

담방이에서 담방 담그어 (교육학 박사, 가천문화재단 부장)

음실에서 음실 음실 먹자󰡓

 

만수동의 샛골과 담방이 마을(만수3 택지), 서창동의 장자골, 운연동의 음실(陰室)4개의 마을 이름을 엮어서 민요조로 부르던 땅이름 노래가 전해 오고 있다.

만수동에서 으뜸되는 마을인 샛골은 조곡(鳥谷)이라고도 부른다. 1842년에 발행된 경지읍지에는 조동면(鳥洞面)으로 기록되어 󰡒()󰡓가 많아서 새골 또 한문으로 조동이라 불렀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그러나 풀(=-)이 많아 초곡산(草谷山)이라 부르던 것이 󰡐==(鳥谷)󰡑으로 변천되었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충청북도 괴산군과 경상북도 문경군 사이에 있는 새재는 조령(鳥嶺)이라고도 불러 새(調)와 관련 있는 고개이름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많으나 실제로는 풀(=억새,)이 많아서 유래된 땅 이름이다. (이 곳은 동국여지 승람에 초점(草岾)이라 기록되어 있다.

남동 정수장 뒷편에 위치한 이 산을 마을 노인들이 초곡산(草谷山)이라 부르는데 이 산에는 우리 나라 최초의 영세자이며 한국 천주교 창설자 중의 한사람인 이승훈(李承薰. 1756 1801)일가의 애닳은 사연이 서려있다.

만수동은 옛부터 평창(平昌) 이씨들이 살고 있었는데 이곳에서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고 이승훈을 비롯한 4대에 걸친 5명의 순교자를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

이승훈은 참판 이동욱(李東郁)의 아들로 서울 중림동에서 태어나 일찍이 문과에 급제(1780)하여 진사가 되었으나 벼슬은 하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이승훈은 1775년 정약용의 누이와 혼인했으며, 천주교도 이벽(李蘗 17541786)을 만나 감화를 받고 천주교에 입교하였고, 1783년에 아버지를 따라 청국에 가서 북경 천주교회당에서 교리를 익힌 후 그라몽(梁棟材)신부로 부터󰡐조선 교회의 주춧돌이 되라󰡑는 뜻에서 영세를 받고 한국 최초의 영세자가 되어 천주교 교리서적과 십자가를 가지고 귀국하였다.

1785년 서울 명동(明禮同) 중인(中人) 김범우(金範禹)집에 한국 최초의 천주교회를 창설, 정기적인 모임을 갖고 교리서를 언문으로 번역해 배포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을사추조적밀 사건이 일어나가 이승훈은 가족들의 권유로 서학을 이단으로 배척하는 척사문(斥邪文)을 짓고 배교했다.

1787년 다시 복교하여 권일신을 주교로 하고 자신은 스스로 신부가 되어 성사(聖事)를 집행, 은밀히 포교하던 중 1789, 평택현감을 재수 받았을 때 다시 배교하였다.

관직에 있으면서 다시 입교하여 활동하던 중 󰡐서학(西學)의 서적을 발간하였다󰡑고 하여 관직을 박탈당하였다.

1794년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가 밀입국하여 포교활동하는 것을 도와주었다가 예산에 유배되었으며 1796년 유배가 풀린 후 주자백록동연의(朱子白鹿同衍義)를 짓는 등 교회활동을 단절한 입장을 밝혔다. 1801년 순조때 정순(貞純)황후와 심환지(沈煥之)등 벽파세력 및 남인의 관계를 이루고 있음을 계기로 사학(邪學)탄압을 내세우면서 신유(辛酉)박해를 일으켜 같은 해 226일 정약종, 최창현, 최필공, 홍교만, 홍낙민 등과 함께 연루되어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을 당하였다. 문집으로만천유교(曼川遺矯)가 있으며, 1856년 아들 신규(身逵)의 탄원으로 대역죄는 신원(伸寃) 되었다.

 

- 4대에 걸친 5명의 순교자 집안 -

이승훈의 아들 신규와 손자 재의(在誼)는 고종 3(1866)병인양요가 발생한후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가 더욱 심해진 가운데서도 비밀리에 포교활동을 하다가 1868년 서울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을 당하였다.

이승훈의 증손자 연구(蓮龜), 적구(籍龜)형제는 신미양요 때 경기도 관찰사 박영보(朴永補)의 지휘아래 제물포에서 증조부, 조부, 부친에 이어 참수형을 당하였다.

이들 다섯분의 순교자들은 만수동 남동정수장 북쪽 초곡산(草谷山)에 묻혀있는데 이승훈의 유해는 1981년 경기도 광주군, 천주교 성지인 천진암으로 옮겨져 현재는 비석과 터(가묘)만 남아있다.

4대에 걸친 5명의 순교자를 배출한 평창이씨의 집안! 필자는 비록 천주교 신자는 아니지만 장한 인물, 장한 집안이라고 찬탄하고 칭송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4대에 걸친 5명의 순교자 집안은 우리 나라는 물론, 세계에서도 그 착을 찾을 수 없는 일로 그 정신, 그 훌륭함은 후세에까지 길이 빛날 것이다. 그리고 이들 5분의 묘가 인천의 남동구에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인천의 큰 자랑거리이다.

장수동 인천대공원 서쪽에 위치한 초곡산의 이승훈일가 묘소로 향하는 산길에는 마치 골고다 언덕을 연상될 수 있는 글들과 시설물들이 설치되어 있어 찾는 이로 하여금 옷깃을 여미는 분위기를 만들어 놓았다. 한가지 덧붙이면, 우리 나라 최초의 천주교 신부(神父) 김대건(金大建, 18221846)은 용인사람으로 기해사옥 때 순교한 제준(濟俊)의 아들이다. 11846년 선교사의 입국과 주청 선교부와의 통신 연락에 필요한 비밀항로를 개척하기 위하여 백령도 연안을 답사하다가 체포되어 916일 서울 노량진 새남(沙場)터에서 처형 당하였는데 백령도 진리 백령 길병원은 개원 당시 명칭이 김대건의 세례명을 따서 지은 앙드레(Andre)병원이었으며, 현재 병원 경내에 김대건신부의 석상과 천주교회가 위치하고 있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알 수 없으니 우리나라 최초의 영세자이며 한국 최초의 천주교회(명동성당)을 창설한 베드로 이승훈, 한국인으로서 한국 최초의 신부인 앙드레 김대건, 이 부분의 유적이 인천광역시에 남아 있다는 사실은 인천광역시민 누구나 알고 가꾸어 나가야 할 것이다.

󰡐97 문화 유산의 해를 맞이하여 우리 색동회 인천지회에서는 가천문화재단, 남동구청, 천주교인천교구, 평창 李氏종친회와 함께 427일을 기하여 이승훈일가의 묘를 참배하고 의롭고 외로운 넋을 위로하는 헌다의식(獻茶儀式)을 거행하려고 준비중에 있다.

 

1) 평창이씨 족보, 인천지지에 초곡(草谷)산으로 기록, 풀에서 유래된 땅이름임이 입 증됨.

 

2) 동아대백과사전, 한국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 인천지지등에 4대에 걸친 5인의 순 교 기록됨.

한국천주교회의 선각자, 최초의 영세자 이승훈(李承薰-1756-1801) 베드로의 묘

 

이곳은 인천직할시 남동구 장수동 반주골로 한국천주교회의 선각자요, 최초의 영세자인 이승훈(베드로)과 아들 택규(宅嬀)의 묘가 있다. 산 밑에 넓게 펼쳐진 마을은 새들이 많이 찾아들어 조곡(鳥谷) 마을이라 불렀고, 평창(平昌) 이씨가 대대로 살아오는 곳이다.

이승훈(子 子術, 蔓川 혹은 晩泉) 베드로는 평창 이씨 가문에서 조부 광직(光溭), 부친 동욱(東都), 모친 여주(麗州) 이씨(李家煥의 누이) 사이에서 1756(營造32) 서울 반석방(盤石坊:中林洞 근교)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767(12)에 모친을 잃고, 1775(20)에 정약용(丁若鏞)의 누이와 결혼하여 택규, 국규(國逵), 신규 3형제를 낳았다.

1767(25),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진사(進仕)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갔고, 1783(28) 이벽(李檗)의 청으로 부친인 동지사(冬至使) 서장관(書狀官) 이동욱을 따라 북경에 도착, 북당(北堂) 천주교회 그라몽(Grammont) 신부로 부터 교리교육을 받고, 1784년에 부친의 승낙 하에 󰡐베드로󰡑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받아 조선인으로 최초의 영세자가 되었다. 그해 봄, 천주교 책과 십자가 상, 선물, 상본 등을 갖고 서울에 돌아 왔다. 그는 즉시 이 벽에게 북경에서 세례를 받은 내용 등을 말하고 갖고 온 책을 모두 넘겨주었다. 이 벽은 외딴 집을 세내어 받은 책들을 탐독, 교리연구에 전력하였다.

이승훈은 이벽, 권일신, 정약종, 정약용, 최창현 등에 세례를 주기 시작하여, 단시일에 많은 신자공동체를 형성했다. 그리고 영세를 준 그라몽 신부에게 밀사를 통해 그간에 신생 조선교회에 있은 일을 보고했다.

1785년 봄, 명례방(明禮防) 김범우(도마) 집에서 있은 종교 집회가 형조(刑曹) 금리(禁吏)에 발각되어 서학(천주교)을 금하는 효유문(曉兪文)이 반포되고, 유생(儒生)들의 척사통문(斥邪通文)이 나돌게 되자, 평창 이씨 종가 어른들에게 압력을 받은 부친 이동욱은 이승훈에게 서학을 버릴 것을 강요했다. 그래서 심약한 그는 서학을 이단(異端)으로 배척하는 벽이문(闢異文)를 지었다.

그러나 1787, 이승훈은 교회 지도자들이 고해성사, 미사집전 등을 행했던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가 독성죄(瀆聖罪)가 된다는 유항검의 이의를 제기하자 즉시 중단을 시켰다. 그리고 1789년 겨울, 이승훈은 북경교구 밀사로 윤유일을 파견하여, 1790년 봄에 조상제사를 금하고 가성직제도가 부당하다는 구베아 주교의 사목서한을 받고 공동체에 알렸다. 같은 해, 이승훈은 윤유일을 다시 북경으로 밀파, 조선교회의 구원 방법으로 선교사 파견을 요청하고, 동시에 신자집단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면제 해 줄 것을 요청했다.

17916, 평택 현감이 되었으나, 11월 진산(珍山)사건과 관련하여 서울에 소환되어 신문당하고 면직되었다. 그러나 그해 황사영이 그에게 서학책을 빌려 보고 입교를 했다.

1794(39), 부친 이동욱이 죽고, 1795년 주문모(周文模 야교보) 신부가 입국했으나 관여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해 봄, 회개하여 주신부를 만나려 했으나, 신부 입국 안내 관여자 윤유일, 지황, 최인길이 잡혀 장살(杖殺)되어 교난이 발생되자 뜻을 이루지 못했다. 더욱이 7, 유생들이 서학의 괴수 이승훈을 처벌하라는 계속된 상소로 예산현(禮山縣)에 유배되어 17964월에 풀려났다. 그래서 주신부와의 만남은 더욱 어렵게 되었다.

1801(44) 신유교난이 일어난 2, 이승훈, 이가환, 정약용 등 사학의 원흉으로 의금부에 구금되어 6차의 신문을 받고, 이승훈은 정약종, 최필공, 최창현 등과 함께 서울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었다. 시신은 자택으로 옳겨진 후 선영산이 있는 이곳 인천 만수동 반주골로 옮겨 묻히게 되었다.

그리고 그해 3, 부친 이동욱은 자식의 죄로 추삭(追削)이 내려지고, 5월에는 동생 이치훈(李致薰)은 사학의 괴수의 동생이라고 향리(鄕里)로 축출되었다.

그후 1868, 셋째 아들 신규와 손자 재의(在誼)는 서학 관련자로 서소문 밖에서 참수 치명되었고, 손자 재겸(在謙)은 옥독(獄毒)으로 순교했으며, 1871, 증손자 연구(蓮龜), 균구(筠龜), 재겸의 부인 정()씨가 제물포에서 참수 치명했다.

 

1973, 인천시 도시계획으로 이곳에 있는 선영의 묘는 시흥군 군자면 군자리 낙화산골로 이장되었고, 이승훈과 그의 아들 신규, 택규 묘만 남게 되었다.

19811128, 이승훈 묘가 개봉되어 유해 일부가 한국천주교 발상지 천진암으로 옮겨졌다.

이때 묘에서 成均進士李公承薰墓라고 쓴 사발이 출토되었다.

 

1980년 이승훈의 후손을 찾아 나선 고 오기선 신부에게 반주골 조곡 마을에서 대대로 살아온 이승훈의 6대손 이병규(63)씨가 이승훈 선조가 참수 전 마음에 뜻을 남긴 최종시月落在天 水上池盡/달은 비록 지더라도 하늘에 그저 있고, 물은 비록 치솟아도 그 못 속에 온전하다.는 시가 구전으로 대대로 전해 온다고 증언해 주어, 오늘 이승훈 선각자의 묘를 순례하는 이들에게 많은 것을 묵상하게 한다.

 

 

 

말씀드림/

매우 부족한 글입니다.

이승훈 선조의 묘 안내에서 유의 할 것으로는

이승훈은 배교자, 만수동의 묘는 천진암으로 완전 이장되었으니... 등으로

결과만 흐리게 알려져 있다는 점입니다.

이를 신앙의 후손으로 바르게 인식하고,

인간 역사 속에 드러난 인간의 나약함을 하느님의 사랑으로 묵상해 보는

바른 순례가 이승훈의 묘 순례에서 갖기 위해 비교적 있은 역사를 소상히

소개, 순례자들의 묵상자료로 안내, 스스로 우리 후손은 현재 어떻게 믿음의 삶

을 살아야 하는가? 에 대한 묵상을 하도록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앞으로 단체 순례보다 소단위, 개인의 순례가 많아지리라 보아 공식적인

안내판의 글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좀 길게 쓰게 되었습니다.

부족한 내용 지도 바랍니다.

1999629

작성자 한종오(베드로)

 

 

 

 

 

 

 

 

2장 만수1동 본당이 설립되기까지

한국 천주교의 창설 배경

서양의 강대국들은 근대 초기에 이루어진 지리상의 발견을 계기로 동양으로 눈길을 돌리기 시작하였다. 서양 강대국들의 동양 진출로 말미암아 서양의 학문, 곧 서학(西學)은 동양에 전해지게 되었다. 아울러 서양의 종교인 천주교도 중국과 일본에 전해지게 되었다.

임진왜란 때 일본의 예수회는 스페인 예수회 회원인 세스페데스(G. de Cespedes) 신부를 조선 남해안에 파견해 일본인 천주교 장병들의 신앙을 돌보게 하였다. 물론 세스페데스 신부는 조선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하려 했을 것이다. 한편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강제로 끌려간 사람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천주교로 개종하였다. 이들의 개종은 일본의 예수회 회원들에게 조선에도 복음을 전할 수 있다는 희망과 관심을 일으켜 조선 전교를 시도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일본의 예수회 회원들의 이러한 시도들은 모두 좌절되었다.

한편 중국의 예수회 선교사들도 북경에 오가는 조선 사신들을 통해 조선 전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북경을 방문하는 조선 사신들은 서양 문물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얻기 위해 서양 선교사들을 자주 찾았다. 선교사들 역시 이들을 기꺼이 맞이하였고, 조선의 사신들과 함께 서양의 학문과 종교에 대한 필담을 나누었다. 이렇게 해서 서양 문물은 조선 사신들을 통해 처음으로 조선에 소개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병자호란 때 볼모로 끌려가 있던 소현세자(昭顯世子)와 친교를 맺었던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Adam Schall, 湯若望)은 소현세자를 통해 조선 전교를 시도하려 하였으나, 소현세자가 귀국한 지 2달만에 원인 모를 병으로 갑자기 죽는 바람에 좌절되고 말았다. 이처럼 중국으로부터 시도된 조선 전교 역시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중국의 서양 선교사들이 한문으로 쓴 천주교 서적들은 17세기초부터 계속 조선에 소개되었다. 당시 조선은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의 결과로 청나라에게 사대의 예의를 취하게 됨에 따라 북경으로 해마다 많은 사대 사신(事大 使臣)을 보내었다. 한역 서학서들은 이들 사신들을 통해 조선에 소개되었고, 남인계(南人係) 학자들에 의해서 깊이 있게 연구되고 전파되었다.

한국 천주교의 전래와 이승훈의 세례

이렇게 소개된 천주교 서적들은 특히 남인(南人) 학자들에게 환영받았다. 이 책들에 대한 연구는 남인 학자들이 중심이 된 실학운동에 자극을 주었고, 마침내 서학이란 새로운 학풍을 낳게 하였다. 그러다 마침내 실학자 이익(李瀷)의 제자들 가운데는 학문 차원의 관심을 넘어 서학에서 인생의 진리를 발견하고 신앙을 실천하는 학자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홍유한(洪儒漢)은 처음으로 천주교 계명을 실천에 옮겼는데, 그때가 1770년경이었다. 이어 권철신(權哲身), 정약전(丁若銓), 이벽(李檗), 이승훈(李承薰) 등에게서 천주교 신앙이 싹트게 되었는데, 주어사(走魚寺)에서 가진 강학(講學, 일종의 연구 토론회)이 그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유교의 경전에서 인생의 중요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지 못하자, 천주교 서적에서 이를 찾고자 했고 기도 등 천주교 계명의 일부를 실천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벽을 뺀 나머지 사람들은 이러한 생활을 계속하지 못했다. 이벽 또한 천주교 서적의 부족으로 천주교 진리를 폭넓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1783년 겨울 이승훈은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將官)으로 임명된 그의 부친 이동욱(李東郁)과 함께 북경으로 가게 되었다. 이벽은 자신의 친구인 이승훈이 동지사(冬至使)편에 북경으로 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찾아가 북경에 가면 선교사를 방문해 영세를 청하고 많은 성서와 성물을 갖고 돌아와 달라고 부탁하였다. 이러한 부탁을 받은 이승훈은 북경 북당(北堂)의 그라몽(de Grammont, 梁棟材) 신부로부터 필요한 교리를 배우고 베드로란 세례명으로 영세한 다음 많은 성서와 성물을 갖고 1784년 봄에 귀국하였다. 이승훈은 귀국한 다음 이벽과 더불어 교리를 연구하면서, 이를 자신들의 친척과 친지들에게 전교했고 그해 음력 9월부터는 영세를 주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세례를 받은 신자들로 구성된 교회가 탄생하였다.

이벽은 정약전과 정약용(丁若鏞) 형제를 찾아가 복음 전파의 필요성을 강조하였고, 중인(中人) 계급에게도 전교해 김범우(金範禹), 최인길(崔仁吉), 최창현(崔昌賢), 지황(池璜) 등을 입교시켰다. 또한 학문과 명성이 높은 이들의 개종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이벽은 양근(楊根)의 권씨 일가를 찾아가 전교하였고, 그 결과 권철신과 권일신(權日身) 형제를 개종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개종과 더불어 복음 전파의 열렬한 사도가 된 권일신은 이승훈, 이벽과 함께 갓 태어난 조선 교회의 삼대 지주(三大支柱)가 되었다. 권일신은 자신의 제자인 충청도 출신의 이존창(李存昌)과 전라도 출신의 유항검(柳恒儉)을 입교시켜 멀리 충청도와 전라도 지방까지 복음을 전파시켰다.

_x225842464박해의 시작과 가성직제도

그러던 중에 1785년 봄 을사추조적발(乙巳秋曹摘發)사건이 발생하는데, 이는 이승훈, 정약전, 정약용, 이벽, 권일신 부자 등이 명례방에 있던 김범우의 집에서 가졌던 종교 집회를 형조(刑曹)에서 적발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중인 김범우만이 고문을 당하다가 귀양을 갔고, 양반이었던 다른 이들은 풀려났다. 하지만 이들의 문중은 가문에 화가 미치게 될 것을 걱정해 이들에게 배교하도록 강요하였다. 이승훈도 문중의 강압에 못 이겨 배교하고 천주교 서적을 불태워 버렸다. 하지만 이승훈은 곧 다시 교회로 돌아왔다.

1786, 당시 교회 지도자들은 교회의 영수격이었던 이승훈을 먼저 신부(神父)로 선출하였고, 이어 이승훈이 또 다른 10명을 신부로 임명해 성사를 집전하였다. 이른바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였다. 물론 이러한 일은 교회법에 어긋나는 일이었지만, 그들은 무지와 선의에서 미사를 드리고, 고백성사견진성사 등을 집전하였던 것이다. 이 가성직제도는 약 2년 동안 계속되었다. 하지만 교회 지도자들은 점차 가성직제도가 잘못된 것이라고 느껴 이를 북경의 선교사들에게 문의하였다. 이러한 문의를 받게 된 북경의 선교사들은 그 잘못을 일깨워 주면서 성직자를 영입하라고 권고해 주었다. 이러한 권고를 받은 이승훈 등 교회 지도자들은 평신도 생활로 돌아가 신입 교우들과 비교인들에게 신앙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는 한편, 구베아(de Gouvea 湯土選) 북경 주교에게 밀사를 파견해 선교사 파견을 약속 받을 수 있었다. 한편 이승훈은 1789년 평택현감으로 임용되어 선정을 베풀었고, 17902월에는 금부도사로 이듬해 2월에는 서부도사로 임명되었다. 그러다가 1791년 윤지충(尹持忠)이 신주를 불사르고 조상 제사를 거부했던 진산사건(珍山事件)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은 신해박해로 윤지충과 권상연(權尙然)이 전주에서 순교하였고, 이승훈은 권일신과 함께 체포되어 예산(禮山)에 유배되면서 배교하였다.

마침내 1794년 말 중국인 주문모(周文謀) 신부가 조선 교회에 파견되었다. 1795년의 박해는 주문모 신부의 체포령으로 말미암아 시작되었는데, 주문모 신부는 피할 수 있었으나 그 대신 윤유일(尹有一), 최인길, 지황 등이 주문모 신부를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희생하였다(을묘박해).

주문모 신부의 노력과 신자들의 열렬한 전교 활동으로 말미암아 조선 교회는 크게 발전할 수 있었다. 주문모 신부가 입국했을 때 4천 명에 지나지 않던 신자는 1800년에 가서 1만 명으로 늘어났다. 특히 신자들은 명도회(明道會)란 신심 단체를 조직해 함께 교리를 익히고 이웃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명도회의 초대 회장이었던 정약종(丁若鍾)은 신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순 한글로 된 교리서 <주교요지>(主敎要旨)를 손수 편찬하기도 하였다.

신유박해와 이승훈의 순교

조선에 천주교가 전래된 이후 대규모로 이루어진 첫 박해는 1801년 신유박해이다. 순조가 즉위하고 정순왕후가 섭정하게 되자 남인시파를 숙청하기 위한 신유박해가 시작되었다. 이때 정약종은 양근(陽根)에서 박해를 피하여 서울로 와 있었는데 자기가 보관하고 있는 천주교 서적과 성물, 주문모 신부의 편지가 들은 고리짝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려다가 발각되었다. 그러자 그를 엄단하라는 상소가 연달아 올라왔다. 29일 이가환, 홍락민, 정약용, 이승훈 등이 체포되어 국문을 받기 시작했고 권철신, 정약종도 잡혀와 의금부에 갇혔다. 천주교도이자 남인의 거물들인 이들은 210일부터 26일까지 국문을 받은 다음, 이미 배교를 선언했던 이승훈과 김건순에게도 정치 보복의 성격을 띤 사형이 선고되었다. 이에 따라 180173일 이승훈은 서울 서소문네거리에서 45세의 나이로 참수당하였고, 김건순, 정약종, 홍락민, 최창현, 홍교만 등도 참수되었으며, 이가환과 권철신은 옥사하였다.

이때 황사영(黃嗣永, 17751801)의 백서 사건(帛書事件)이 발생하였다. 초기 교회에서 중요한 지도자 가운데 한 명이었던 황사영은 박해가 일어나자 피신하였다. 그는 피신처에서 박해의 상황을 알리고 구원을 요청하는 편지(帛書)를 북경 주교에게 보내려 하였다. 그러나 이 편지는 도중에 발각되었고, 그도 체포되었다. 이 편지의 내용에는 조선 왕조의 체제를 부인하는 강경한 표현들이 들어 있었다. 따라서 조선의 조정은 천주교가 널리 퍼지는 것에 대해 더욱 긴장하게 되었고, 황사영도 죽음을 당하였다. 신유박해는 교회를 거의 폐허로 만들어 버렸다. 주문모 신부는 물론 교회의 지도급 인물들 대부분이 죽음을 당하였다. 그러나 박해를 피해 뿔뿔이 흩어졌던 신자들은 정하상(丁夏祥), 신태보(申太甫) 등과 새로 입교한 유진길(劉進吉)과 조신철(趙信喆) 등을 중심으로 새로운 신자 집단을 형성하면서 성직자 영입운동에 나섰다. 이들은 북경 주교는 물론 교황에게도 1811년과 1825년경 두 차례에 걸쳐 편지를 보내 선교사 파견을 호소하였다. 조선교구의 설정은 이러한 배경 아래서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 베드로 승훈 (承薰)

 

 

 

이승훈(李承薰)은 본을 평창(平昌)에 두고 동욱(東郁)을 아버지, 이가환(李家煥)의 누이를 어머니로하여 1756년에 서울 중림동에서 태어나, 자를 자술(子述), 호를 만천(蔓川)이라 일컬으다. 재주가 뛰어나 열 살 때부터 글을 잘하고, 24세때에는 진사과에 급제하여 성균관에서 공부하다가 벗들과 더불어 천주교를 연구하여 이를 믿기 시작하다. 이 때 아버지를 따라 북경에 들어가서 그라몽 신부에게 한국 사람으로서는 처음 세례를 받고 1784년에 귀국하여 동지들에게 대세를 주고 서울 명동에 있던 김도마 범우(範禹)의 집을 빌어 교회를 세우다.

 

이 교회가 이듬 해에 발각되어 해산되자, 한 때 마음이 흔들렸으나 2년 뒤에는 마음을 돌려 권일신(權日身)을 주교로 삼고 스스로 신부 행세를 하다가 의심이 생겨 이를 그만두고, 북경 주교에게 편지를 보내어 신부를 보내 줄 것을 간청하다. 그리고 평택 현감을 3년 동안 지내다가 1791년에 일어남 박해로 그 벼슬을 빼앗기고 1795년에는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신부가 들어 온 일이 발각되어 예산으로 귀양가다, 1801년에 큰 박해가 일어나 먼저 잡히어 음력 226일에 서울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45세의 나이로 목을 짤려 순교하다.

 

 

1968 106

 

 

유 노렌조 홍렬 글 짓고

 

서울 대교구 성직자 일동 비 세움

 

 

 

 

[순교자성월 특집] 한국 첫 세례자 이승훈 7대손 이태석 신부

_x226075264"바래가는 순교정신 되살려야"

서울대교구 잠실7동 보좌 이태석(아우구스티노) 신부는 매년 순교자 성월이 되면 서랍 깊은 곳에 소중하게 보관해둔 족보를 꺼내본다.

1784년 이벽의 권유로 중국 북경에 가 예수회 선교사들에게 교리를 배운 후 그라몽(Jean Joseph de Grammont, 17361812) 신부로 부터 세례를 받은 한국 교회 최초의 세례자, 이승훈(17561801)7대 직계 후손.

 

외아들에서 외아들로 어렵게 이어온 이승훈 가계에서, 그것도 종손이 사제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는 드물다. 지난해 사제 서품자 면담과정을 통해 드러나기 이전에는 가장 가까운 동료사제들조차 그가 이승훈의 직계자손임을 몰랐을 정도. 그만큼 이 신부는 자신이 이승훈의 자손임을 드러내길 꺼렸다.

 

󰡒물론 마음속으로야 제가 한국교회 최초 세례자의 직계 후손이라는 점이 자랑스럽지요.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제가 지금 여기서 열심히 신앙안에서 사는 것만이 순교자들의 신앙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한국교회의 처음과 직선으로 맞닿아있는 그로서는 요즘 순교자성월이 남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비록 󰡐세 번의 배교󰡑󰡐자료부족󰡑 등 여러 이유 때문에 이승훈이 성인품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결국에는 신앙을 위해 순교했기 때문이다.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서도 교회의 반석이 된 것처럼 이승훈도 비록 세 번의 배교를 했지만 마지막 순교하기 전에는 자신의 신앙고백을 시로 남길 정도로 깊은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매일매일 배교하는 삶을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너무나 인간적인 순교자 이승훈의 영성이 더 가깝게 다가옵니다.󰡓

 

이 신부는 또 그늘에 가려진 수많은 무명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시성 작업이 하루빨리 이뤄져야 한다며 잊혀져가는 순교영성을 안타까워했다.

 

󰡒아직도 많은 신자들이 선조들의 깊은 순교신앙을 가슴으로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그분들의 잊혀져가는 순교정신을 오늘에 되살리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 신부는 오늘도 먼지 쌓인 족보속에 담겨진 신앙의 흔적들을 묵상한다. 우광호 기자<평화신문 제5449995일자>에서 발췌

 

 

 

 

 

이승훈 - 나주 정씨(정약용의 누이)

 

택규 국규 신규

 

재종 재의(순교) 재관

 

학호

 

홍모(어릴 때 병사) 원모

 

병기 병규

 

이형균

(한국평협 사회복지분과)

위 원 장

 

영균 대균

 

이태석 신부 이범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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