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옴) 내포 순교자

2014. 11. 12. 오후 1:23:07

글자

II. 여사울의 천주교와 순교사 관련 자료

 

 

1. 순교자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

 

1) 다블뤼 주교의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 pp. 149153

 

공주

1801년 음력 228.

단원이라는 별명을 지닌 이(존창, 李存昌) 안드레아 혹은 곤자가의 루도비코(17591801)가 신유년 음력 228일에 참수당하였다.

 

호적상 이름이 존청(Tson Tsieng, 존창의 잘못)인 안드레아(루도비코 곤자가의 잘못)는 그 주변에서 존경받는 한 평범한 집안 출신이었고, 내포에 있는 천안 고을의 여사올(Ie Sa Ol, 즉 여사울)에 살고 있었다. 신중하고 확고하며 곧은 성격을 가진 그는 천성적으로 우수한 자질을 부여받았으며, 어려서부터 그의 고향에서 문과 공부에 전념하였다. 일정한 나이에 이르자 학문과 예지에 대한 갈망에 조급해진 그는 그것에 자신을 완성시킬 목적을 위해 어떤 유명한 스승의 수업을 받으러 갈 것을 생각했고, 양근(楊根) 고을에 있는 권씨 집안이 도처에서 누리고 있던 대단한 명성에 이끌려 그는 그의 고향에서 매우 먼 데도 불구하고 거기에 갔고, 그들의 제자들 중에 받아들여지는 혜택을 청했으며, 그것은 허락되었다.

아직 외교인이었고, 당시 이 집안의 가장들이었던 권(철신, 權哲身) 암브로시오와 권(일신, 權日身) 하비에르는 머지않아 그들의 제자의 마음과 정신에서 훌륭한 자질을 알아보았고, 그래서 그들은 특별히 그를 애지중지하였으며, 그의 탁월한 재능을 배양하는 데 그들의 모든 정성을 기울였다. 조금 더 지나 1784년에 권씨 집안은 이벽(李檗, 세례자 요한)에 의해 전교되었는데, 권 하비에르는 즉시 천주교의 진리에 설득되었고, 지체 없이 그것(천주교 교리)을 실천하기 시작했으며, 그의 제자에게 그것을 전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존창) 안드레아(루도비콘 곤자가)는 그 즉시 진리에 순종하였고, 천주교의 모든 위대함을 직감하면서 열의를 다해 그것을 깊이 파고들었다. 덕목과 학식을 함께 갖춘 스승의 지도 아래 그는 짧은 시일 내에 교리를 잘 알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천주교의 덕목들의 실천에도 도야되었다. 그 결과 하비에르는 머지않아 그(이존창)가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능력이 있다고 판단하여, 그의 친척과 지인들 사이에서 그의 온 힘을 다하여 천주교를 전파하라는 사명과 함께 그의 집안으로 돌려보냈다.

안드레아(루도비코 곤자가)는 완전하게 스승의 기대에 부응하였다. 그의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그는 우선 자신의 가족에게 전교하였고, 이어 먼 친척들에게 (전교하였다). 마음들을 사로잡는 그의 특별한 재능에 더하여 그의 뛰어난 자질은 많은 청중을 그에게로 이끌었고, 그의 언사의 영향력에 저항할 수 있는 자는 거의 없었으며, 그 결과 천주교인의 수는 그 부근에서 나날이 증가하였다. 그의 박식함에 대한 명성이 퍼져 나가면서 그는 머지않아 모든 인근 고을에서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을 보게 되었고, 그의 집에 군중이 얼마나 모였던지 당시 유행한 격언이 생겨났었다. “사람들이 배불리 먹으러 원 동지(元同知 혹은 元同志) 집에 가는 것처럼 학문을 구하러 이 단원 집에 간다.” 원 동지는 거기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부유한 천주교인이었는데, 모든 그의 객들을 후하게 대접하는 것으로 이름나 있었고, 몇 해 지나지 않아 순교자(가 되었다).

1787년에 권 하비에르와 다른 사람들이 천주교를 조선에서 번창하게 하고 또한 강화하기 위해 성직자를 선출해야 한다고 결정했는데, 내포(內浦)에서 신부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안드레아(루도비코 곤자가)가 거명되었고 임명되었다. 열성으로 가득 차고 가장 크나큰 선의 안에서, 그는 오직 그가 신앙을 전파하고자 하던 갈망을 충족시키는 수단만을 보았고, 이 임무를 수락하였으며, 이 날로부터 자신을 이 중대한 일에 완전히 바친 그는 주저 없이 거기 전념하였고, 다른 생각은 더 이상 갖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박해들의 잠재적 위험도 그를 멈추지 못했다. 그는 사방에 가서 설교하고, 세례를 주고, 고해를 듣고, 미사를 집전하고, 한 마디로 모든 사제 직무를 그의 힘껏 수행했는데, 그는 거기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천주교는 이 시기에 내포에서 대단히 번창하게 되었는데, 그곳에 신앙의 싹을 대량으로 심은 자가 안드레아(루도비코 곤자가)였고, 그 신앙은 오늘날까지 그 열매를 맺는 것을 멈추지 않았으며, 이 고장을 조선에서 천주교인들의 못자리로 만들었다.

2년 정도 후에 천주교 서적들을 읽고 사제직 수행의 적법성에 대해 의심이 생겨나게 되자, 다른 사제들과 즉시 그 임무를 중단하였고, 그들은 북경의 주교에게 자문을 구하는 서한을 보냈다. 그리고 회신이 도착했을 때 각자는 자신의 무분별함을 인정하였고, 전적으로 순응하였다. 또한 조상들의 신주를 보존하는 것의 금지를 그 때 알게 된 안드레아(루도비코 곤자가)는 그것들이 놓여있던 장소와 함께 그것들을 파괴해 버렸는데, 모든 친족에 대한 그의 영향력이 어떠했던지 어느 누구도 그를 막기 위해 단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천주교인들의 수를 증가시키고 그들을 유지하기 위해 일했고, 그의 명성은 멀리까지 퍼졌다.

1791(즉 신해박해)에 윤지충이 참수당한 후 많은 고을에서 박해가 일어났고, 안드레아(루도비코 곤자가) 자신도 이미 몇 번의 억압을 당했었으므로 머지않아 수색될 것이 분명하다고 예상하고 은둔하기 위해 피신할 것을 생각했다. 이 해의 마지막 날 야간에 그는 그의 맏형에게 작별 인사를 했는데, 이 장소에서 살고 있던 30가구 이상 되는 모든 그의 친척들뿐만 아니라 이 마을에 살고 있던 300 이상 가구들의 모든 주민들이 그 때 그의 주변에 모였고, 아무도 작별을 결심할 수 없었지만, 다가올 위험의 예상이 그를 붙들 수 없게 했다. 이는 감동적이고도 가슴 아픈 장면이었는데, 저마다 아버지나 형제나 친구를 잃는 것 같아 보였고, 이 장면은 선교사들이 천주교도들을 떠나는 상황과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홍산(鴻山) 고을에 가서 정착하였는데, 천주교의 선을 위해 일하는 것을 계속하였다. 1795년에 조선에 입국한 주(문모, 周文謨 야고보) 신부가 안드레아(루도비코 곤자가)에게 말했다. “승인 없이 무분별하게 성사를 주었으니 어떻게 너는 충분히 회개할 수 있겠는가? 순교만이 너를 용서받게 할 수 있을 것이다.그래서 그는 기꺼이 고된 모든 작업과 온갖 힘든 일에 전념하였고, 이 죄의 사면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순교에 대비하는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감사가 그의 신주들을 파괴하고 천주교를 전파한 명목으로 안드레아(루도비코 곤자가)를 붙잡으라는 명령을 수령에게 보낸 것은 아마도 같은 해 말경이었을 것이다. 그의 부모를 붙잡아 그의 은신 장소를 알아내기 위해 그들을 고문에 처했다. 한편 모면할 수 있다는 것을 단념한 안드레아(루도비코 곤자가)는 자진 출두하였고, 그는 머지않아 청주에 있는 병사 주재지로 보내졌다. 그는 거기서 고문을 받았고, 배교하려고 하지 않자 그를 매질하는 사람들의 계급에 두라는 명령과 함께 그는 그의 고향 천안으로 보내졌다. 수령은 그에게 이 직업을 시키지 않았고, 그를 한 개인의 보증 아래 집에 수용하였으며, 그는 아전들의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매달 1일과 15일마다 그를 매질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아전들의 친구로서 그가 심하게 고통받지 않도록 매질을 하였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그의 감금 기간을 6년에서 7년으로 판단하고 있다.

마지막에 그는 고문을 위하여 또다시 청주로 이송되었고, 이어 수도 서울로 (이송되었다). 우리는 그가 감내해야 했을 형벌들을 모르고 있지만, 주요 우두머리로서, 그리고 천주교의 전파자로서의 그의 평판으로 미루어볼 때 그는 매우 심하게 다루어졌을 것이다. 그는 사형 선고를 받았으며, 온 백성이 겁먹게 하기 위해 조정은 그를 그의 지방 소재지인 공주에서 형을 집행시키도록 명령하였다. 그래서 그는 거기로 인도되었는데, 그곳으로 가면서 포졸들이 그에게 단지 유배를 가게 될 것이라고 단언하므로 그는 유배형에 대해 격렬히 항의하고 다른 사람들 같이 사형을 요청하기 위해 감사에게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실상 결안에는 이미 사형이 기재되어 있었고 그는 머지않아 처형되었는데, 그의 머리는 6번째 칼질에서야 떨어졌다. 그의 부모가 야간에 그의 시신을 거두어 그것을 가져갔다. 그를 매장하기 시작했을 때 그의 머리는 목 위에 단단하게 다시 붙어 있었으며, 목 위에는 그를 쓰러뜨린 칼자국들이 흰 실처럼 둘러져 있었다고 전해진다.

안드레아(루도비코 곤자가)는 그의 재능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그의 덕행과 신앙을 증거하는 데 (보여준) 그의 항구심에 의해서도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의 이름은 여전히 존경받고 있으며 모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그가 서품의 은총을 받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하느님은 그에게 사도직의 은총을 허락하신 것 같다. 사람들은 오늘날 천주교인들의 절반 가까이가 그가 전교한 자들의 후손이라고 추산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우리는 그의 열성과 덕행에 대해 짐작할 수 있다. 사람들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표현대로 그는 사도직의 이 은총을 그의 방계 자손들에게 전달했다. 아닌게 아니라 조선인 최초의 신부이고 1846년에 순교한 김(대건, 金大建) 안드레아 신부의 할머니는 이(존창) 안드레아(루도비코 곤자가)의 맏형의 딸이었고, 두 번째 조선인 신부이며 오늘날에도 이 나라에서 많은 결실을 거두며 사제직을 수행하고 있는 최(양업, 崔良業) 토마스의 어머니(즉 이성례 마리아)는 이 동일한 이(존창) 안드레아(루도비코 곤자가)의 한 조카의 딸이었다.

 

Kong tsiou 1801 28 de la 2e l.

Ni André ou Louis de Gonzague surnommé tan ouen i décapité le 28 de la 2e lune Sin iou.

 

André dont le nom légal était Tson Tsieng descendait d'une famille honnête, considérée dans les environs et habitait à Ie Sa Ol au district de Tien An de la Napo. D'un caractère grave, ferme et droit il avait reçu de la nature brillantes qualités, et dès lenfance se livra à l'étude des lettres dans son propre pays. Arrivé à un certain âge, pressé du désir de la science et de la sagesse, il pensa dans le but de s'y perfectionner à aller prendre les leçons de quelque grand maître et attiré par la haute réputation dont jouissait partout la famille des Kouen au district de Iang Keun, il s'y rendit quoique ce fut fort loin de son pays, et sollicita la faveur d'être reçu au nombre de leurs disciples, ce qui lui fut accordé.

Kouen Ambroise et Kouen Xavier encore payens et alors chefs de cette famille, eurent bientôt reconnu les belles qualités du cœur et de l'esprit de leur élève, aussi le chérissaient-ils spécialement et mettaient-ils tous leurs soins à cultiver ses heureuses dispositions. Un peu plus tard, en 1784, la famille Kouen évangelisée par Ni Pieki, et Kouen Xavier immédiatement convaincu de la vérité de la religion, se mit de suite à la pratiquer et ne put s'empêcher de la comuniquer à son élève. André se rendit aussitôt à la vérité et entrevoyant toute la grandeur du christianisme, il s'empressa de l'approfondir. Sous la direction d'un maître aussi savant que vertueux il réussit en peu de temps non seulement à bien connaître la doctrine, mais aussi se forma à la pratique des vertus Xtiennes, de telle sorte que Xavier le jugeant bientôt capable d'instruire et de former les autres, le renvoya dans sa famille avec la mission de propager la religion de toutes ses forces parmi ses parents et connaissances. André répondit parfaitement aux espérances de son maître. A peine de retour chez lui qu'il prêcha d'abord sa propre famille, puis les plus éloignés. Ses talents distingués joints à un don particulier d'attirer les cœurs lui attirait beaucoup d'auditeurs et peu savaient résister à l'influence de sa parole, si bien que le nombre des Xtiens augmentait chaque jour dans ses environs. La réputation de son érudition se répandant, il vit bientôt arriver des personnes de tous les districts voisins et la foule était telle chez lui, qu'il se forma alors un dicton popluaire : On va chercher la science dans la maison de Ni tan Ouen I, comme on va rassasier dans la maison de Ouen Tong Tsi. Ce dernier était un riche Xtien, non loin de là, renommé pour traiter généralement tous ses hôtes et martyrs peu dannées après. - En 1787 Kouen Xavier et autres ayant décidé qu'il fallait élire un clergé, pour étendre et consoler la religion en Corée, André fut appellé et désigné pour remplir les fonctions de prêtre dans le Nai po. Plein de zèle et dans la plus grande bonne foi, il ne vit là quun moyen de satisfaire au désir qu'il avait de propager la foi, accepta cette charge et dès ce jour se voyant entièrement consacré à cette grande œuvre, il s'y livra sans hésiter et semblait n'avoir plus d'autre pensée. Le danger des persécutions probable ne l'arrêtait pas, et il allait de côté et d'autre prêchant, baptisant, confessant, célébrant la messe et remplissant en un mot de son mieux toutes les fonctions du ministère où il eut un grand succès. La religion devint à cette époque très répandue dans le Nai po, et c'est André qui y déposa en grand le germe de la foi qui jusqu'à nos jours n'a cessé de produire ses fruits et a rendu cette contrée la pépinière des Xtiens dans la Corée. - Environ deux ans plus tard, la lecture des livres de religion ayant fait naître un doute sur la limité de l'exercice du ministère, il en cessa de suite les fonctions, ainsi que les autres prêtres, on envoya une lettre consultative à l'Evêque de Péking et sa réponse étant arrivée, chacun reconnut son imprudence et se soumit entièrement. André ayant aussi connu alors la défense de conserver les tablettes des ancêtres, les détruisit ainsi que le local où elles étaient placées et son ascendant sur tous ses proches était tel que personne ne lui dit un mot pour l'arrêter. Il continuait de travailler à augmenter le nombre des Xtiens et à les soutenir et sa réputation était répandue au loin. - En 1791, Ioun Tsi Tsiongi ayant été décapité la persécution s'éleva dans beaucoup de districts, André lui-même avait déjà subi q.q. vexations et prévoyant devoir être recherché pensa à fuir pour se cacher.

Dans la nuit du dernier jour de cette année il fit ses adieux à son frère aîné ; non seulement tous ses parents dont plus de 30 maisons habitaient ce lieu, mais encore tous les habitans des 300 et plus de maisons de ce village se réunirent alors autour de lui, aucun ne pouvait se résoudre à la séparation, et toutefois la perspective du danger prochain empêchait de la retenir ; ce fut une scène aussi touchante que déchirante, chacun semblait perdre un père, un frère, un ami et on ne peut la comparer qu'aux circonstances du départ des chrétientés des missionnaires. Il alla s'établir au distr. de Hong San et continua à travailler pour le bien de la religion. En 1795 le P. Tsiou étant entré en Corée dit à André : Après avoir administré follement les sacrements sans autorité, comment pourrais-tu assez faire pénitence? Le martyre seul poura te faire pardonnerAussi il se livrait volontaire à tous les travaux pénibles et à toutes les fatigues et pensait sans cesse à se préparer au martyre pour obtenir la rémission de ce péché. Ce fut probable-ment vers la fin de cette même année que le gouverneur envoya au mandarin l'ordre de saisir André pour avoir détruit ses tablettes et propagé la religion. On saisit ses parents et les mit aux tortures pour connaître le lieu de sa retraite ; André désespérant d'ailleurs de pouvoir échapper se livra lui même et fut bientôt envoyé au chef lieu militaire à Tsieng Tsiou. - Il y subit les questions et ne voulant pas apostasier, il fut renvoyé à son district de Tien An avec ordre de le mettre au rang des fustigateurs. Le mandarin ne lui fit pas exercer ce métier, mais le mît en dépôt chez un particulier sous caution, et il enseignait les lettres aux enfants des prétoriens. Il y avait ordre de le faire battre tous les 1ers et 15 de chaque mois, comme ami des prétoriens on le faisait sans le faire beaucoup souffrir. On porte généralement de six à sept ans le temps de sa captivité. A la fin il fut transféré de nouveau à Tsieng Tsiou pour la question, puis à la Capitale. Nous ignorons les supplices qu'il eut à endurer, mais sa réputation de grand chef et propagateur de la religion laisser à penser quil dut être traité bien violemment. - Il fut condamné à mort et le gouvernement ordonna de le faire exécuter à Kong Tsiou chef-lieu de sa province, pour un intimider tout le peuple. Il y fut donc conduit et en s'y rendant les satellites lui assurant qu'il allait seulement en exil, il fut et présenta au gouvernuer une requête pour se recrier[récrier] contre la peine de l'exil et demander la mort comme les autres. La sentence du reste portait peine de mort et il fut bientôt exécuté, sa tête ne tomba qu'au sixième coup. Ses parents recueillirent son corps pendant la nuit et l'emportèrent. On dit que quand on se mit en devoir de l'ensevelir, la tête se trouva recolée et solide sur le coup, les traces du coup de sabre qui l'abattit paraissaient être un fil blanc placé autour du coup.

André fut un homme remarquable par ses talents aussi bien que par ses vertus et sa constance à confesser la foi. Son nom est encore en vénération et dans la bouche de tous. Il ne reçut pas il est vrai la grâce de l'ordination, mais il semble que Dieu lui ait accordé la grâce de l'apostolat. On calcule que près de la moitié des Xtiens d'aujourd'hui sont descendants de ceux qu'il a convertis, on peut par là se faire une idée de son zèle et de sa vertu. Il a transmis, qu'on nous passe l'expression, cette grâce d'apostolat à ses descendants collatéraux. En effet la grande mère du P. Kim André premier prêtre Coréen et martyr en 1846 était la fille du frère aîné de Ni André ; et la mère du P. Tsoi Thomas, second prêtre Coréen, qui exerce aujourd'hui le ministère avec tant de fruits dans ce pays était fille d'un neveu de ce même Ni André.

 

2) 다블뤼 주교의 󰡔조선 순교사 비망기󰡕

 

1718, 2728, 2930

당시 그(권일신)의 집에는 이단원 혹은 존창이라는 이름의 청년이 있었는데, 그는 나중에 곤자가의 루도비코라는 세례명으로 불렸다.

이 루도비코는 충청도 천안군 여사울이란 마을의 양민 집안에서 태어났다. 이 마을은 내포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드넓은 평야의 가장자리에 위치해 있었다. [내포는 바다 밀물이 들어오는 수천 개의 지류가 뻗어있는 드넓은 평야로 수도의 곡창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쌀이 일품인 곳으로 유명했다]

비범한 재능을 타고났던 그(루도비코)는 집에서 먼저 글을 익혔다. 그러다 차츰 큰 포부로 일하고 자연의 이치를 깊이 알려는 열망을 품고 스승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던 중 고향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권씨 집안의 명성을 듣고 끌리어 그들을 찾아가 제자가 되었다. (일신) 하비에르는 이 후학의 훌륭한 성품과 뛰어난 재능에 매료되어 그에게 세심한 정성을 쏟았다. 그때 이미 그(하비에르)는 유럽의 학설(즉 서학)들을 안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였다. 천주교를 배우자마자 이내 그(루도비코)는 그리스도교의 근본 원리뿐만 아니라 신앙의 제 의무에 대한 실질적인 실천도 곤곤히 다져나갔다. 그는 기대 이상으로 성공을 했고, 이내 이 루도비코는 다른 이들을 가르칠 정도가 되었다.

그는 스승으로부터 가족과 친지들을 가르치고 천주교를 가능한 널리 전파하라는 소명을 받고 집으로 돌아왔다. (하비에르)의 가르침에 충실했던 이 루도비코는 즉시 가족과 친지들을 개종시켰는데, 그의 학식과 아름다운 품행은 모든 이들의 호감을 샀으며, 그는 사람들의 심금을 사로잡는 방법을 완벽하게 알고 있었다. 이처럼 맨 처음 루도비코를 통해 그 기초가 다져진 유명한 내포 지방 공동체는 계속해서 조선 천주교회에 큰 광채를 보이며 천주교의 못자리가 되었고,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매우 유명한 순교자들을 배출했다.……

하지만 작은 양 무리(즉 내포 신앙 공동체)의 신앙은 위기의 순간에 전혀 무너지지 않았다. 교우촌이 한편으로는 몇몇 일원들의 변절로 큰 슬픔에 잠기긴 했으나 또 다른 한편으로는 위로를 받고 있었다. 군주의 박해보다 훨씬 견디기 힘든 집안의 박해 속에서도 대부분이 한결같았고, 날마다 이곳저곳에서 신입교우들이 생겨났다. 이 첫 번째 시범이 전반적인 열의를 많이 누그러뜨렸다고는 보이지 않고 계속해서 발전해 나갔다[상세한 내용은 이단원의 생애를 참조할 것].

당시 (천주) 신앙은 이단원 루도비코가 두루 다닌 이 내포 평야의 많은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우리가 앞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그(루도비코)는 권 하비에르의 문하에 들고자 집을 나왔다. 그곳(즉 내포 지방)에는 우리 진영을 충원할 학식이고 뛰어난 집안은 더 이상 없었고, 이 지역에서 영향력을 가진 이들은 평민과 농민이었다. 하지만 그들도 동일한 은총을 받고 있었다. 그들 역시 그들의 때가 되었을 때 두드러진 결실을 거두게 될 것이다.

[단원의 탁월한 재능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특별한 재주와 함께 날마다 많은 추종자들을 불러들였고, 그의 영향력 있는 말 앞에서 저항할 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신자들의 수가 인근에서도 상당히 증가하면서 그의 명성은 두루 퍼져 이내 인근의 모든 지역 사람들이 그를 찾아왔고 그의 집은 사람들로 넘쳐나 당시 이런 속담이 생길 정도였다. “학문은 이단원의 집에서 찾고 배는 원동지의 집에서 불린다.” 원동지는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살았던 부유한 신자로 손님들을 극진히 대접한 것으로 유명했다. 우리는 곧 그가 하느님을 위해 죽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이승훈(李承薰, 베드로)은 북경에서 영세를 받았다. 그는 그곳에서 주교와 사제들, 그 밖에 하급 성직자들로 이루어진 가톨릭의 교계 제도가 운영되고 있음을 보았다. 북경의 천주당에서 종교 예식과 전례에 참석했고, 성사의 대부분을 눈으로 확인했다. 게다가 신자용 예식서나 교리서 안에 담긴 다양한 설명의 도움을 받아 차츰 내용을 구성하고 성사 집행을 흉내낼 정도가 되었다. [특히 이 루도비코의 설교는 그 풍성한 결실에서 눈에 두드러졌다. 이제 그 자신이 천주교의 과업에 헌신하는 처지가 되자 전적으로 크게 전념했으며, 그것 외에 다른 생각은 더 이상 하지 않는 듯 했다. 혹여 일어날지도 모르는 박해의 위험도 그를 막지는 못했다. 그는 어디서나 최선을 다해 성직에 임했고 또 큰 성공을 거두었다. 당시 천주교는 내포라는 방대한 지역에 매우 널리 퍼졌다. 천주교는 거의 전적으로 자유롭고 공개적으로 행해졌고, 그는 그 지역에서 믿음의 씨앗을 크게 퍼뜨리는 영광과도 같은 행복을 누렸다. 그리하여 오늘날까지도 계속해서 그 결실을 거두고 있어 이 지방이 명실상부 조선 천주교의 못자리라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이처럼 모든 일이 더할 나위 없이 잘 조정되어 사목자들을 선출하기에 이르렀다. 권 하비에르는 그의 지위와 학덕에 있어 열외이긴 했으나 주교로 임명되었다. 이승훈 베드로와 이단원 루도비코는 여러 다른 이들과 함께 사제로 임명되었다. [내포 여사울의 최 야고보도 성직의 품계상 사제였던 듯 하나 우리는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항검, 柳恒儉) 아우구스티노와 최창현(崔昌顯) 요한 역시 사제였다.] 하지만 전승이 그(유항검)를 언급할 정도로 충분히 명확하지 못하다. 어쨌거나 전라도를 맡을 사제 한 명도 임명되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이(존창) 루도비코가 내포 지방을 맡고, 주교(신부의 잘못, 즉 권일신 하비에르)()승훈이 수도와 지방을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임시 도구로 임명된 이들 사제들을 서품하기 위한 어떠한 의식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이와 같이 모든 것이 세워지고 규정되자 각자가 저마다 맡겨진 자리로 향했고 일종의 신자들을 위한 성사 사목을 행하기 시작했다. 즉 설교하고, 영세를 주고, 고해성사와 견진성사를 주고, 종교 의례를 행하고 신자들에게 성체도 나눠줬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조모이자 이 루도비코의 조카딸은 그(루도비코)에게 영세를 받았는데, 그들이 금으로 된 성작을 사용했었다고 증언한 바 있다.]

 

Il avait alors chez lui un jeune homme nommé Ni Tan Ouen i ou encore Tson T'siang i, appellé plus tard Louis de Gonzague au baptême.

Ni Louis était d'une famille honnête de cultivateurs habitant le village de Ie Sa ol au district de T'sien an, province de T'siong T'sieng, sur les bords de l'immense plaine connue sous le nom de Nai p'o(Le Nai p'o est une immense plaine entrecoupée par mille canaux qui reçoivent le flux de la mer et renommée par sa fertilité en grains qui lui a fait donner à bon droit le nom de grenier de la Capitale. Notes sur les marées.)

Ayant reçu de la nature des talents peu communs il se livra d'abord chez lui à l'étude des lettres, mais bientôt le désir de travailler en grand et d'approfondir les secrets de la nature lui firent naître la pensée d'aller auprès de quelque grand maître, et attiré par la réputation de la maison des Kouen fort éloignée d'ailleurs de son pays, il se rendit auprès d'eux et se fit leur disciple. Kouen Xavier charmé du bon esprit et des belles qualités de cet élève lui donnait ses soins déjà depuis un certain temps quand il eut connaissance des doctrines européennes. Bientôt après il lui fit connaître la Religion et s'appliqua à le former solidement non seulement sur les principes fondamentaux du Christianisme, mais surtout à la pratique réelle de tous ses devoirs. Il y réussit au delà de tout espoir et bientôt Ni Louis devenu capable d'enseigner les autres retourna chez lui chargé par son maître de la mission d'instruire sa famille et ses connaissances et de répandre la Religion de tout son pouvoir. Ni Louis fidèle à ses instructions convertit immédiatement sa famille, ses proches et une multitude de connaissances que son savoir et sa belle conduite lui attiraient de toutes parts, et dont il savait parfaitement captiver les esprits et les cœurs. Ainsi fut tout d'abord jetté par Koeun Xavier le fondement de la célèbre chrétienté du Nai P'o qui a toujours jetté un si grand lustre dans l'Eglise de Corée, devint la pépinière de la Religion et lui donna de si illustres Martyrs comme nous le verrons par la suite.……

Cependant la foi du petit troupeau un moment ébranlée était loin d'être anéantie. Si d'une part la chrétienté se trouvait dans le deuil consolée et par la constance de la plupart au milieu des persécutions domestiques souvent plus difficiles à supporter que celles des tyrans et par les recrues que chaque jour amenait d'un côté et de l'autre, car il ne parait pas que cette première démonstration aît beaucoup ralenti l'ardeur générale et les progrès continuaient.* (* Détails à la vie de Tou[Tan] ouen I) La foi faisait alors surtout de nombreuses conquêtes dans la grande plaine de Nai p'o ou[où] était retourné Ni Louis dit Tan Oeun i que nous avons vu sortir de la maison et de l'école de Kouen Xavier pour y diriger ses pas. Là ce ne sont plus des familles doctes et distinguées qui récrutent nos rangs ; ce sont des familles honnêtes, des hommes de labeur, classe qui domine surtout dans cette région : mais la sève qu'ils reçoivent étant la même, ils produiront aussi en leur temps des fruits non moins remarquables. (détails à la vie de Tan ouen i) (Les talents distingués de Tan ouen i joints à un don particulier de captiver les c urs lui attiraient de jour en jour plus d'admirateurs et peu savaient résister à l'influence de sa parole aussi le nombre des Xtiens augmentait considérablement dans ses environs puis la réputation de son érudition se répandant on vit bientôt arriver des personnes de tous les districts d'alentour et la foule était telle chez lui qu'il se forma à cette époque un dicton populaire : On va chercher la science dans la maison de Ni Tan Ouen i comme on va se rassasier dans celle de Oeun Tong tsi, Xtien riche habitant non loin de là et renommé pour bien traiter ses hôtes que nous verrons bientôt mourir pour Dieu.)……

Ni Seng houn i avait été à Péking où il fut baptisé. Il avait vu là en action la hiérarchie catholique, l'Evêque, ses Prêtre et autres clercs inférieurs. Dans l'Eglise de cette ville il assista aux saints mystères, aux cérémonies religieuses et avait vu conférer la plupart des Sacrements : Aidé en outre par les diverses explications qui se trouvent dans les livres liturgiques ou dogmatiques à l'usage des chrétiens, il se trouvait en état d'organiser à peu près les choses et de simuler l'administration des sacrements.

(La Prédication de Ni Louis surtout se fit remarquer par ses fruits abondants. Se voyant désormais tout consacré à l'œuvre de la Religion il s'y livra en grand et semblait n'avoir plus d'autre pensée. Le danger des persécutions probables ne l'arrêtait pas. Il allait partout remplissant de son mieux toutes les fonctions de son ministère et y eut un grand succès. La Religion devint alors très répandue dans sa vaste région du Nai P'o ; elle s'exerçait avec une liberté et publicité presqu'entières, et il eut le bonheur comme la gloire d'y déposer alors en grand le germe de la foi qui jusqu'à nos jours n'a cessé de produire ses fruits, et a rendu cette contrée incontestablement la pépinière du catholicisme en Corée.)

Tout fut donc réglé le mieux que l'on put et on procèda à l'élection des pasteurs. Kouen Xavier que sa position, sa science et sa vertu mettaient hors de rang fut désigné Evêque. Ni Pierre dit Seng houn i et Ni Louis dit Tan ouen i furent nommés prêtres avec plusieurs autres peut-être : (T'soi Jacques de Je Sa ol au Nai p'o semble avoir été prêtre de St ordre. Nous ne le pension pas) (Niou Augustin et T'soi Jean dit T'siang hien i furent prêtres aussi (note d'Eur.)) Mais le tradiction n'est pas assez claire pour en faire mention. Il est probable toutefois qu'un Prêtre fut encore désigné pour la province de Tsien la ; car Ni Louis était chargé du Nai p'o, l'Evêque et Seng houn i restant pour soigner la Capitale et la province. On ignore du reste s'il y eut quelque cérémonie pour consacrer ces prêtres improvisés au service des outils. Tout étant ainsi établi et réglé chacun se rendit au poste qui lui était confié et se mit à faire une espèce d'administration des chrétiens, prêchant, baptisant, confessant, donnant la confirmation, célébrant les Saints mystères et distribuant la communion aux Fidèles. (La grand mère du P. André nièce de Ni Louis et baptisée par lui rapportait qu'ils se servaient d'un calice d'or.

 

5051, 6566, 113114

그 이름이 널리 퍼진 이단원 또한 수색자들의 증오를 피할 수 없었다. 그는 갖은 모욕을 달게 받고 결국 붙잡혀 공주 감영에 갇혔다. 우리는 그가 어떤 고문을 받았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또한 흔들렸다. , 참된 증거자들이 드물구나! 우리는 공주 감사 박종악(朴宗岳)(1791) 음력 122일에 쓴 편지를 찾았는데, 그는 편지에서 왕에게 이 죄인(이단원)의 굴복을 알리고 있다. 그는 배교했고, 매우 힘주어 그 같은 행동을 했으며, 헛된 교리에 이끌려 그가 겪은 고충을 증언했고, 그가 교리를 가르친 모든 이들을 설득하여 다시 참된 길로 이끌겠다고 다짐하고 맹세했다. 왕은 그의 회개가 아주 최근의 일이니 만큼 그가 완전히 돌아설 때까지 그를 방면하지 말라고 일렀다. 어쨌거나 그는 같은 달(음력 12) 5일에 풀려나 집으로 돌아왔다. 그처럼 명백한 배교를 했음에도 그는 다시 신앙의 의무를 실천했던 것 같다. 하지만 고향과 인근 지방에서 너무 잘 알려져 있었기에 적대자들이 퍼붓는 독설의 표적에서 조금이라도 면하고자 또 그들의 감시를 벗어나고자 이주를 결심했다.

그 해 마지막 날 밤 그는 맏형에게 작별 인사를 고했다. 그곳에 살던 30여 가구가 넘는 그의 친척들뿐만 아니라 그 마을에 사는 300명의 주민들이 그때 그의 주변에 운집했다. 아무도 선뜻 나서 작별을 하지 못했는데, 어쨌거나 그가 처한 입장을 고려하면 그를 붙들 수만은 없었다. 이는 참으로 가슴 아프고 애절한 광경이었다. 저마다 그를 떠나보는 것이 아버지이자 형제요 친구를 떠나보내는 듯 했으며, 교우촌에서 선교사들이 떠날 때의 상황과 똑같았다. 그는 홍산 지역에 정착하였고, 탁월함과 대중성에 있어 덜해지긴 했지만 다시 천주교를 위해 열심히 한결같은 마음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이 곤자가의 루도비코는 1791년에 배교하긴 했으나 다시 열심히 신앙을 실천하고 새로이 예비자의 수를 늘리는 데 힘썼다. (문모) 신부를 만나 한동안 그의 곁에 지냈던 것도 확실한 듯하다. 주 신부는 그에게 자주 이런 말을 하곤 했다고 전한다. “자네가 갖은 악행을 저지르고 터무니없이 권한도 없으면서 성사를 집전했으니 어찌 자네가 속량을 받을 수 있겠는가? 오로지 순교를 통해서만 자네가 저지른 과오를 용서받을 수 있을 걸세.”

루도비코 역시 스스로 고되고 힘든 일들을 자청하여 맡았고 부단히 자신의 과오를 속죄하고자 순교를 준비하기로 결심했다. 우리는 그에게 (어떻게 하여) 새로운 태풍이 일어나게 됐는지 그 정황은 알지 못하지만, 감사의 명령이 내려졌고, 1795년 말경 그 고장의 감사에 의해 붙잡힌 듯하며, 도의 군사 주재지인 청주(공주의 잘못)로 이송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신문과 혹독한 고문을 받았으나 굴복하지 않았고, 이에 다시 그의 고향인 천안으로 이송되어 그곳에서 매질하는 직분을 맡게 되었다. 이는 당시 그 고장에서 관례적으로 행해지던 것으로, 지체 높은 신분의 사람에게는 매우 품위를 떨어트리는 형벌이었다. 그런데 관장은 그에게 그와 같은 비천한 일을 시키지 않고 대신 보석으로 한 개인 집에 두는 것으로 그쳤다. 이렇게 해서 그는 56년 동안 반쯤 수인으로 지냈는데, 대략 그 기간은 1801년 그의 재판이 재개되기 전까지다.

그는 그곳에서 많은 형리들의 자녀들에게 글을 가르쳤고, 뛰어난 재능과 빛나는 덕행으로 만인으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매달 초하루와 보름마다 그가 굴복할 때까지 신문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는데, 실제 그 명령이 있었고 행해지긴 했으나 이미 형리들의 친구가 된 그에게 그다지 심한 고문을 가하지는 않은 듯하다. 게다가 루도비코는 넘어가지 않은 듯 하고, 그런 시련 속에서 꾸준하게 공공연하게 신앙을 실천했으며, 그곳에서 약간의 돈도 모을 수 있었다.

어느 날 그는 고향인 여사울을 찾아가 방문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고, 마을의 천주교 상황을 알아보았다. 그는 마을 사람들이 두려움에 모든 천주교 서적들을 한데 모아 장작더미를 만들어 공개적으로 불태워버렸음을 알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듣자 그는 흐르는 눈물을 참지 못했고 그처럼 많은 이들이 변절한 것에 애통해했다. 이윽고 단 한 권의 책이라도 그 불운한 방화를 면했는지 알아보았는데, 그의 친척 중 한 사람이 비밀리에 따로 챙겨둔 책 두 권을 가져왔다. 그것이 남아있는 책의 전부였다. 예전에는 열심한 신자들이 많아 그 수를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던 이 큰 마을이 무너질 줄이야. 이와 같은 한탄스러운 상황이 오리라고 과연 짐작이나 했던가.

루도비코가 체포되기까지의 상황은 이상과 같다. 우리는 앞으로 그가 어떤 사건에도 더 이상 연루되지 않음을 보게 될 것이고, 좀더 나중에 결안이 내려지던 순간의 그를 살펴보게 될 것이다.……

(18012) 26일자의 동일한 사형 선고문에 이 곤자가의 루도비코도 포함되었다. 그는 명문가 출신은 아니었지만 오랫동안 천주교 전파를 위해 보여준 열정만큼이나 그가 지녔던 탁월한 재능에서 볼 때 의당 천주교의 핵심 인물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다른 인물들과 함께 참수되지 않은 것은 그가 복음을 전했던 주민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려는 목적에서 그의 출신 고장의 수도(즉 공주)에서 처형을 시키라는 명령이 내려졌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앞서 살펴본 것처럼 루도비코는 천안에서 보석을 받았으나 그 해에 다시 체포되어 도의 군사 주재지인 청주(공주의 잘못)로 이송되어 그곳에서 신문을 받았다. 이어 그의 사건도 다른 주요 인물들의 경우와 같다하여 수도(즉 서울)로 이송되었고 이내 사형 선고가 내려졌다.

그의 재판에 관한 자세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으나, 그의 결안을 보면 최후 심리 때에 그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는 전반적인 견해를 확고히 해주는 듯하다. (당시의) 정황을 알지 못한다고 고백하는 황(사영, 黃嗣永) 알렉산델(알렉시오의 잘못)의 애매한 말이 이런 판단력을 흔들리게 했을 수도 있었으리라! 동향인들에게 공포의 장면을 보여주도록 운명 지워진 그는 도의 수도인 공주로 이송되어 같은 달인 음력 228(양력 1801410) 참수되었다. 그의 친척들 가운데 여러 명이 처형 장면을 목격했는데, 그의 머리는 여섯 번째 칼질에 겨우 베어졌고, 그 장면을 목격한 모든 사람들은 (하도 끔찍하여) 속이 뒤집어질 정도였다. 곧 유족들이 그의 유해를 수습해서 확인해 보니 그의 머리가 목에 잘 붙어 있었다고 한다. 그의 형제들의 말에 따르면, 목 주변에 흰줄이 그어져 있어 그것을 보고 칼에 베인 자국임을 짐작케 했다고 한다.

그의 시신은 옮겨져 선산에 묻혔는데, 향년 5060(정확히는 43) 가량이었다.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적극적이며 열정적이었던 루도비코는 우리가 앞서 살펴본 바대로 나약함이 없지는 않았으나 천주교를 가장 잘 옹호한 이들 중 한 사람임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오늘날 신자들의 대다수가 당시 루도비코가 개종시켰던 이들의 후손들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이름은 내포와 이 지방의 다른 곳에서 여전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고 신기하게도 최초의 조선인 사제 2명 모두가 이 옛 사도의 외가쪽 후손들이다. [(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조모는 루도비코의 맏형의 딸이고, (양업) 토마스 신부의 어머니는 루도비코의 조카의 딸이다.]

오늘날 루도비코의 직계 후손으로는 천치바보인 손자 하나만이 남아 있다. 그의 가문 사람들 상당수가 박해 당시 신앙 실천을 그만두었으나 이내 다수가 재개하여 오늘날 그의 친지들 가운데 신자들이 많이 남아 있다.

 

Ni Ton ouen i dont le nom était si répandu ne pouvait échapper non plus à la haine des perquisiteurs. Il subit diverses vexations et (finit par être pris et renfermé à Kong Tsiou ; nous ignorons tous les supplices qu'il eut à supporter, mais lui aussi se laissa ébranler. Oh que les vrais confesseurs sont rares. Nous trouvons une lettre du gouvern.[gouveneur] de cette ville Pak Tsong aki datée du 2 de la 12eme lune, annonçant au Roi la soumission de ce coupable. Il apostasia, dit cet acte de la manière la plus forte, témoigna sa douleur de s'être laissé entrainé dans une mauvaise doctrine, mêlée de magie, etc. s'engaga à aller dissuader tous ceux qu'il avait endoctrinés et à les ramener à la vraie voie et en fit serment. » Le roi dit de ne le relâcher qu'après retour complet, sa résipiscence étant bien récente. Toutefois il fut relâché le 5 de cette même lune et retourna chez lui. - Malgré une apostasie si éclatante il parait qu'il reprit de suite la pratique de ses devoirs. ; mais trop connu dans le pays et les environs il prit le parti d'émigrer pour être moins en butte au[aux] traits de ses ennemis et tromper leur surveillances. Dans la nuit du……)

Dans la nuit du dernier jour de cette année il fit ses adieux à son frère aîné. Non seulement tous ses parents dont plus de 30 familles habitaient ce lieu, mais encore tous les habitants de 300 et plus de maisons de ce village se réunirent alors autour de lui. Aucun ne pouvait se résoudre à la séparation, et toutefois la perspective de sa position empêchait de le retenir. Ce fut une scène aussi touchante que déchirante. Chacun semblait perdre en lui un père, un frère, un ami, et on ne peut la comparer qu'aux circonstances du départ des missionnaires des chrétientés. Il alla s'établir au district de Hong San et recommença à travailler pour le bien de la Religion avec ferveur et constance quoiqu'avec moins d'éclat et de publicité.……

Ni Louis de Gonzague malgré son apostasie de 1791, avait repris une partie de sa ferveur et chercha de nouveau à augmenter le nombre des néophytes. Il parait certain qu'il vit le P. Tsiou et fut même probablement un certain temps près de lui. Le prêtre, lui répétait, dit-on, souvent : Après tous tes méfaits et avoir follement administré les sacrements sans autorité, comment pourrais-tu assez faire pénitence ? Le martyre seul pourra te les faire pardonner. Aussi Louis se livrait volontiers à toutes les fatigues et travaux pénibles et pensait sans cesse à se préparer en martyre pour expier ses fautes. Nous ignorons les circonstances qui excitèrent une nouvelle tempête contre lui, mais des ordres du gouverneur étant survenus, il fut repris probablement vers la fin de 1795 par son propre mandarin et envoyé à T'sieng tsiou chef lieu militaire de la province. Il y subit la question et de violents supplices ne se rendant pas il fut renvoyé à sa propre ville de T'ien an, pour être mis au rang des furtigateurs, punition en usage dans ce pays et très dégradante pour un homme de condition. Le mandarin toutefois ne lui fit pas exercer ce vil métier et se contenta de le placer chez un particulier sous caution. Il resta ainsi mi-prisonnier pendant 5 ou 6 ans, c.à.d. jusqu'à l'époque où repris son procès en 1801.

Il enseignait les lettres à beaucoup d'enfants des prétoriens et ses talents supérieurs joints à une vertu éclatante le firent aimer et respecter de tous.

Ordre était donné de le mettre à la question le 1er et 15 de chaque mois jusqu'à ce qu'il se rendit et ces ordres durent être, exécutés, toutefois il est plus probable qu'étant fort ami des prétoriens, on ne dût pas l'y faire beaucoup souffrir, du moins la plupart du temps. Du reste Louis ne parait pas avoir failli, dans ces épreuves il pratiqua constamment sa religion ostensiblement et put faire quelque bien dans ce pays. Ayant un jour obtenu permission d'aller visiter sa famille à Ie sa ol, il s'y informer de l'état de la religion dans le village. Il apprit alors que poussé par la crainte on avait réuni tous les livres de religion et en formant un bucher les avait brulés publiquement sur la place. A cette nouvelle il ne put retenir ses larmes et pleura amèrement tant de défections. Puis s'informant si aucun volume n'avait échappé au funeste incendie un de ses parents apporta deux volumes qui avaient été secrètement soustraits, c'est tout ce quil en restait. D'où on peut juger de la position déplorable où était tombé ce grand village qui comptait autrefois tant de fervents Xtiens.

La captivité de Louis le retenant ainsi, nous ne le verrons plus prendre part à aucune affaire, nous le suivrons seulement plus tard au moment de son dernier procès……

La même sentence de mort du 26 comprenait aussi Ni Louis de Gonzagues qui malgré une extraction peu distinguée était compté à bon droit au nombre des principaux chefs de la Xtienté tant par ses talents remarquables que par le zèle qu'il déploya si longtemps pour propager la religion, et si nous ne le voyons pas déposer sa tête sur le même échafaud, c'est que dans le but d'effrayer les populations qu'il avait evangélisées, on donna ordre de l'éxécuter à la Capitale de sa propre province. Louis, comme nous l'avons vu, gardé sous caution à la ville de T'ien an ; il fut pris de nouveau cette année et transféré à la ville de T'sieng Tsiou, chef-lieu militaire de la province et y fut mis à la question ; puis sa cause devant se confondre avec celle des grands chefs il fut envoyé à la Capitale où il dut bientôt entendre formuler son arrêt de mort. Aucun détail n'est resté sur ce procès et sa sentence nous paraît confirmer l'opinion générale qui ne lui reproche aucune faiblesse dans ces derniers combats ; Un mot obscur de Hoang Alexandre qui avoue ne pas connaître les circonstances, pourrait-il balancer ces autorités ! Destiné à servir de spectacle de terreur à ses compatriotes, il fut conduit à la ville de Kong tsiou, capitale de la province et le 28 de la même 2de lune (10 avril 1801) il tomba sous le fer de l'échafaud. Plusieurs de ses parents assistèrent à l'éxécution la tête ne tomba qu'au sixième coup et tous les assistants en avaient les entrailles bouleversées. La famille recueillit ses restes peu après, ou assure qu'au moment où le corps fut reconnu, la tête était posée sur le cou et y tenait attachée. Au dire de ses frères un fil blanc tout au tour du cou indiquait seulement la place du coup de sabre, on le transporta et enterra au tombeau de ses ancêtres, il était agé de 50 à 60 ans. D'un talent supérieur, actif et zèlé, Louis malgré les faiblesses que nous avons rapportées, est sans contredit un de ceux qui ont le plus servi la cause de la religion. On calcule qu'une grande partie des Xtiens d'aujourd'hui sont des descendants de ceux que Louis convertit alors ; son nom est encore dans toutes les bouches au Nai p'o et autres parties de cette province et choses singulières les deux premiers prêtres Coréens sont par leur mère parents de cet ancien apôtre de la Corée. (La gand'mère du P. Kim André était fille du frère ainé de Louis, et la mère du P. T'soi Thomas, fille d'un de ses neveux.

Il ne reste aujourd'hui des descendants directs de Louis qu'un petit fils tout à fait idiot. Une partie notable de cette famille cessa de pratiquer lors de la persécution, plusieurs reprirent ensuite et il y a aujourd'hui beaucoup de Xtiens de sa parenté.)

 

3) 󰡔추안 및 국안󰡕(推案及鞫案)

 

신유(1801) 216

같은 날 도사 박조원이 죄인 이존창을 잡아 가두다.……

같은 날 문초 죄인 이존창. 나이 43.

아룁니다.

󰡒네가 오히려 지금 천지간에 숨을 쉬도록 허용된 것은 국은 아님이 없다. 연전에 은혜를 입어 석방된 후이니 비록 네가 금수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어찌 차마 다시 사학(邪學)을 할 수 있느냐? 그런데도 감히 음침한 곳에서 서로 유혹하고 서울과 지방에서 바람에 쓸리듯 너를 추대하여 교주로 삼지 않음이 없으니 녹림(綠林)과 황건(黃巾)의 근심이 이르지 아니하는 곳이 없었다. 그간의 사정을 우선 바른대로 고하라. 너의 성기(聲氣)는 통하지 아니하는 곳이 없었으니, 서울의 소굴은 과연 누구인가? 요서(妖書)를 베껴 둔 곳은 과연 어느 곳인지 감히 숨기지 말고 속히 바른대로 고하라.󰡓

고 추문했더니,

󰡒저는 십여 년 전에 과연 서양의 사학을 하여 수년간 미혹되었으나, 저희 형이 금지하였던 까닭에 홍산(鴻山)으로 이거했다가 금산(錦山)으로 옮겨갔습니다. 을묘년(1795)에 충청감영에 붙잡혀 여러 번 형신을 받았으나 사실을 자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아침에 갑자기 뉘우치는 마음이 생겨서 기미년(1799)에 감사 이태영(李泰永)이 도()를 다스릴 때 다시 사학을 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글을 써서 바쳤습니다. 그러자 영문에서 조정에 장계를 올렸는데, 들으니 그를 석방하라고 했답니다. 또 천안읍내에 유치되어서는 그 동정을 살핀 것이 날마다 추조(秋曹, 즉 형조)에 보고되었고, 지금까지 3년 동안 장교(將校)로 차정되어 일하면서 일찍이 관문을 한 발자국도 벗어난 적이 없으며, 사학을 단념한 것이 이제 5년이나 되었습니다. 29일에 영문에서 저를 체포하여 공주(公州) 옥에 가두었지만, 새로 중병을 앓으면서 아직 진술을 들이지 못했는데, 지금 또 체포했으니 진실로 애매하옵니다.

저는 조금 문자를 이해하며 일찍이 사학에 빠졌습니다. 그러므로 전해 듣건대 지목이 모두 저에게로 귀착된다합니다. 만약 마음을 고쳐먹지 않았다면 본관(本官)이 어찌 죽이지 않았을 리가 있겠습니까? 제가 보았던 요서는 을묘년에 이미 감영 마당에서 불태워 버려서 집 안에 둔 것은 한 권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만약 책을 남겨 놓았다면 제가 어찌 감히 마음을 고쳐먹었다고 하겠습니까? 서울의 소굴이라는 것은, 제가 오랫동안 관역(官役)에 있으면서 고을 수령 앞을 떠나지 않았는데, 어느 겨를에 서울과 상통할 수 있었겠습니까? 또 제가 이미 살길을 찾은 후인데 어찌 다시 사학하는 사람들과 상통했겠습니까?󰡓

하였다. 묻기를,

󰡒많은 사학인(邪學人)들이 모두 너를 괴수라고 하는데, 네가 어찌 감히 발명하느냐?󰡓

하니, 공술하기를,

󰡒이미 마음을 고쳐먹은 후인데, 어찌 혹 한 터럭이라도 다시 죄를 범한 일이 있겠습니까? 여러 진술에서 저를 괴수라고 한 것은, 필시 예전에 사학을 한 사람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지목이 있는 것입니다.󰡓

하였다. 묻기를,

󰡒네가 비록 서울에 있는 사학의 소굴과 도당을 알지 못한다고 했을지라도, 호중(湖中, 즉 충청도)에 있는 사학의 무리들은 어찌 모를 리가 있겠는가?󰡓

하니, 공술하기를,

󰡒작년에 본도 병영에서 사학을 한 여러 사람들을 잡아다가 경중에 따라 죄를 논하여 처단하면서 혹은 장폐(杖斃)하기도 하고 혹은 정배(定配)하기도 했으며, 저는 곤장을 맞고 석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호서에는 지금 다시 이 사학을 하는 사람이 없어 진실로 아뢸 자가 없습니다. 이 밖에는 따로 아뢸 말씀이 없으니 헤아려 처분하소서.󰡓

하였다.

 

신유 217

같은 날 문초 죄인 이존창. 나이 43.

다시 추문한 것을 아룁니다.

너는 스스로 죄를 범한 것이 거의 최필공(崔必恭)보다도 심하다. 중간에 임금께서 특별히 용서하여 재생(再生)의 은혜을 입었는데, 감히 몰래 경향(京鄕)과 통하여 두루 성기(聲氣)를 통했으니 녹림(綠林)황건(黃巾)의 근심이 이르지 않는 곳이 없다. 그런데도 지금 진술은 완전히 굳게 숨기면서 마치 이미 서로 잊어버린 것과 같이 하니 지극히 교묘하고 간교하며 지극히 분하고 통탄스럽다. 엄히 형벌하면서 문초하는 마당이니 속히 바른대로 고하라.”

고 추문하였더니,

제가 이전에는 미혹되어 깨닫지 못함으로써 여러 해 동안 충청 옥에 갇혔었으니 그 죄는 진실로 만 번 죽어도 아깝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번 깨달은 후에는 다시 그것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묻기를,

경향을 논할 것 없이 사학을 한 자 중에 누가 괴수인지 너는 반드시 알 것이니 하나하나 바른대로 고하라.”

했더니, 공술하기를,

서울에서는 최필공이 괴수이고, 호중에서는 제가 깨닫기 이전에는 괴수의 이름을 얻었었습니다. 양근에서는 권일신(權日身)이 괴수입니다.”

하였다. 묻기를,

너는 이 사학을 누구에게서 배웠느냐?”

했더니, 공술하기를,

중인(中人) 김범우(金範禹)에게서 배웠습니다.”

하였다. 묻기를,

사학의 무리들은 사람들을 모아 결탁해서 장차 도적질을 하려는 것이니, 너 이외에 어찌 괴수가 없겠느냐? 이른바 신부(神父)대부(代父)라고 하는 자는 누구냐?”

했더니, 공술하기를,

제가 전날 이 사학()을 할 때에는 김범우를 괴수로 삼아 그 서책을 얻어 배웠으며, 범우의 동생 또한 착실히 이 사학을 했는데 그 이름은 잊었습니다. 권일신은 일찍이 범우의 집에서 보았습니다. 서울에 있는 최가(崔哥)는 최필공의 가까운 친족으로 그 이름은 필제(必齊)인데, 제자(齊字)는 아직 그것이 어느 글자인지 자세히 알지는 못하겠으나 음은 제()자입니다. 최창현(崔昌顯) 또한 압니다.”

하였다. 묻기를,

네가 예전에 용서를 받은 이후로는 비록 다시는 하지 않겠다고 했을지라도 여러 죄수들의 진술에서는 모두 네가 끝내 잘못을 고치지 않았다고 하였다. 너는 장차 무슨 말로써 발명하겠느냐?”

했더니, 공술하기를,

저는 선왕의 망극한 은혜로 석방된 후로는 과연 그것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묻기를,

네가 스스로 다시는 하지 않았다고 진술했지만, 너 이외에 이 사학을 한 자가 와서 너에게 묻는 자 또한 어찌 그러한 사람이 없었겠는가? 하나하나 바른대로 고하라.”

했더니, 공술하기를,

연전에 병영에서 체포한 여러 사람 중에 아홉 명은 장폐하고, 세 사람은 정배되었습니다. 이후로는 고향에서 이 사학을 하는 자가 거의 없어졌습니다. 어찌 와서 묻는 사람이 있었겠습니까? 이 박에는 달리 아뢸 말씀이 없으니 헤아려 처분하소서.”

하였다.

 

4) 󰡔추국일기󰡕(推鞫日記)

 

신유 221

죄인 이존창, 나이 43.

다시 추문한 것을 아룁니다.

네가 호서 사학의 괴수라는 것은 따로 다시 물을 단서가 없다. 그런데 네가 이기양(李基讓)과 서로 친하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바이다. 네가 옥에 있을 때 기양이 방문한 것은 과연 어느 해인가? 전하는 말이 분명하다. 또 너에게는 조금도 죄가 더해질 단서가 없으니 사실대로 바로 고하라.”

고 추문하였더니,

저는 이기양이 덕산에 있을 때 가서 배웠으며, 기양이 이천으로 이사했을 때는 제가 여러 해 가서 머무르며 과거 공부를 했습니다. 그 뒤 기양이 문의(文義) 사또(즉 현령)가 되었을 때, 저는 사학한다는 명목으로 천안의 옥에 갇혀 있었는데, 이기양이 본 군 사또 조정옥(趙鼎玉)에게 편지를 보내 저를 매우 다스려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후 기양이 상을 당했을 때는 제가 조문 편지를 지어 보냈고, 아울러 새우젓 네댓 되를 보냈습니다. 그의 아들이 대신 편지를 받아보았다는 뜻으로 답장을 보내 왔으나, 기양은 답장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묻기를,

이기양이 문의 사또가 되었을 때 가서 만난 일이 없는가?”

했더니, 공술하기를

이기양이 사또가 된 그 해 한 번 가서 만났습니다.”

하였다. 묻기를,

이기양이 사또가 된 것이 어느 해인가? 그리고 이기양이 천안 사또에게 편지를 써서 너를 엄히 다스리라고 했는데, 너는 왜 기양에게 조문하는 글을 보냈는가?”

했더니, 공술하기를

기양이 사또가 된 해는 잊어버려 기억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제가 기양에게서 일찍이 배웠기에 조문하는 글을 지은 것입니다.”

하였다. 묻기를,

네가 사학한 것은 어느 해부터 시작되었는가?”

했더니, 공술하기를

제가 사학을 시작한 것은 정확히 기억할 수 없는데, 서른 한두 살 때 처음 이 학을 했습니다.”

하였다. 묻기를

네가 처음 (찬안) 군옥에 갇혔을 때가 어느 해인가?”

했더니, 공술하기를

제가 육십갑자를 외우지 못하므로 그 해를 기억하지 못합니다.”

하였다. 묻기를

너는 시골 사람인데 어디에서 사서를 얻어 보았는가?”

했더니, 공술하기를

김범우의 집에서 사서를 빌려 보았습니다.”

하였다. 묻기를

너는 홍낙민(洪樂敏)을 아는가?”

했더니, 공술하기를

홍낙민의 농장이 예산(禮山)과 홍주(洪州) 땅에 있으므로 어려서부터 서로 알았습니다. 제가 홍산(鴻山)으로 이사한 뒤 다시 보지 못했습니다. 이 밖에는 달리 아뢸 말씀이 없으니, 헤아려 처분하소서.”

하였다.

 

신유 226

죄인 이존창을 충청도 공주목으로 압송하였다.

 

5) 󰡔정조실록󰡕

 

33, 정조 15, 신해(1791) 113

또 예산의 백성 이존창(李存昌)이란 자가 있는데, 이미 본읍에서 형벌을 받고도 한결같이 뉘우치지를 않았다고 합니다. 그가 성인의 교화를 해치고 인륜을 망치는 것으로 보면 책을 간행한 것보다 더 심한 점이 있다 할 것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예산 백성의 행위가 진실로 이와 같다면 매우 통분할 일이나, 도신(道臣)에게 맡겨 처리하면 족할 것이다. 그 죄가 마땅히 죽일 것이면 조정에 보고토록 하고, 그 실정이 유배로 끝낼 수 있는 것이면 곧바로 결정하도록 해도에 분부하라.” 하였다.

 

又有禮山民李存昌者 已經本邑之刑治 而一向不悛云 其所梗聖化而敗民紀者 恐有浮於刊冊之事矣……

敎曰…… 禮山民人所爲 誠如是也 極爲痛惡 付之道臣處置足矣 其罪可誅也 則登聞 其情可竄也 則直決事 分付該道

 

신해 122

충청도 관찰사 박종악(朴宗岳)이 장계하기를,

천안(天安)의 이존창을 신의 감영에 잡아다 처음부터 엄히 매를 쳤으나 죽기를 각오하고 자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러 날을 가두어두고 여러 가지로 효유했더니, 그가 정신을 차리고 크게 깨달아 사학(邪學)을 배척해 부르기를 요술이라고까지 하는 등 허물을 뉘우치고 정도(正道)로 돌아올 뜻을 가졌습니다. 우선 그대로 가두어두고 계속해서 훈계하며 신칙하여 조금도 의심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뒤에 적절히 헤아려 처리할 생각입니다.”

하니, 회유하기를,

최필공(崔必恭) 같이 감화시키기 어려운 자도 이미 정도로 돌아왔지만, 기호 지방에서 감화시키기 어려운 자는 바로 이존창이었다. 그런데 이제 존창이 또 정신을 차려 죄를 뉘우치고 사학을 배척하여 요술이라 부르기까지 하였으니, 그가 깨달았음을 가히 알 수 있다. 그러나 물든 것은 이미 오래 된 반면에 선으로 돌아온 날은 얼마 되지 않으니, 이 뒤로 그가 진실로 정도로 돌아왔는지의 여부는 그가 공로를 세워 스스로 이를 입증하려는지의 성실성 여부를 살펴 결정해야 할 것이다.

지방관에게 명하며 그 근처 고을 사람들의 의혹이 풀어질 때까지 때때로 말로써 힐문하여 사실인지를 헤아려 보고, 그밖에 겉으로 드러난 모습도 참고해서 터럭만큼의 찌꺼기도 속에 남아 있거나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 없어진 뒤에야 영구히 석방해서 통쾌하게 그로 하여금 평민(平民)이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또 힘을 다해서 깨닫지 못한 어리석은 백성들을 효유하고, 이 후로는 이러한 연유로 감영에 보고해 오거든 경은 즉시 장계를 올리도록 하라.” 하였다.

 

忠淸道觀察使朴宗岳狀啓言 天安李存昌 捉致臣營 初加嚴杖 而抵死不服 故積日囚禁 多般曉諭 則渠乃怳然大覺 斥呼邪學曰妖術 有悔過歸正之意 姑爲仍囚 連加戒飭 明知其十分無疑 然後酌量決處計料

回諭曰 難化如崔必恭 雖已歸正 畿湖間難化者 卽李存昌 今則存昌又怳然悔罪 攻斥邪學 至謂妖術 其覺悟可知 然漸染旣久 遷善日淺 此後渠之眞箇歸正與否 以渠立功自效之勤慢 觀而決之 令地方官 限隣近邑解惑間 時加言辭招詰 稽之之外 考之貌色之間 無一毫査滓之內滯外見者 永爲放送 快使渠作平民 又竭力曉諭於未覺之愚氓 從後以其緣由報營 卿其卽爲狀聞

 

신해 1211

호서의 사학 죄인 이존창을 석방해서 평민을 만들도록 명하였다.

존창이 도백에게 글을 올려 스스로 정신이 번쩍 들며 잘못임을 깨달았다고 말했다는 것에 대해 전교하기를,

그 말이 이치에 가까우니, 그 마음이 정도로 돌아온 것을 증험해 알겠다. 죄 없는 평민이 되도록 해서 어리석은 백성들로 하여금 서로 본받아 나날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선으로 옮겨가는 아름다움이 있게 하라.” 하였다.

 

命釋湖西邪學人李存昌 許作平民 存昌呈書道臣 自言其怳然覺非 敎曰 其言之近理 驗得其心之歸正 許作無辜之平民 使愚氓轉相倣效 有日遷善不自覺之美

 

46, 정조 21, 정사(1797) 223

사학 죄인 이존창을 다시 도신(道臣)에게 명해 조사 문초토록 했다. 존창은 신창(新昌) 사람이다. 사학의 교주로 자처했는데, 병오년(1786, 신해년의 잘못인 듯)에 일이 발각되자 도신에게 명하여 끌어다 문초하였다. 존창이 마음을 고치고 새로운 길로 나가겠다고 진술해서 풀어주었는데, 을묘년(1795)에 또 다시 염찰에 걸려들어 감영의 옥에 가두었지만, 그 진술이 전과 서로 달랐다. 대간의 상소가 일어나자 형조에 명하여 대신에게 의논하게 하였다. 영의정 홍낙성 등이 모두 사형에 처하여야 한다고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형륙은 백성을 교화하는 데 있어서 말단의 방법이다. 그래서 사람은 사람답게 만들고 그 원인이 된 불순한 책만 불사르면[人其人 火其書] 묘족(苗族)처럼 완고한 자들도 감동하는데, 미천한 일개 존창이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도신으로 하여금 다시 조사하여 만에 하나라도 겉으로만 고친 척하고 마음은 고치지 않을 경우에는 연전의 최필공의 예에 따라 도신이 직접 가르치고 훈계하여 개과천선의 징표가 있으면 방면하고, 그렇지 않으면 법을 적용하는 한이 있더라도 기필코 고치게 하라.” 하였다.

 

命邪學罪人李存昌 更令道臣査問 存昌, 新昌人也 自處以邪學敎主 丙午事發 命道臣鉤問 存昌以革心自新輸供 命放送 乙卯 又入於廉察 囚營獄 其供與前相反 及臺疏發 命秋曹 議于大臣 領議政洪樂性等 皆言宜斷以一律 上曰 刑戮之於化民 末也 故曰人其人火其書 苗頑且格 何有於常賤一存昌乎 令道臣更査 萬有一面革而心不改 依年前崔必恭例 道臣親執敎戒 得其必遷善之效 則放送 否則限用法 期於知悛

 

51, 정조 23, 기미(1799) 64

임금이 이르기를,

이존창에 대해서는 도신이 아뢰어 용서해 주자고 청하였다. 이미 깨달았다고 하였는데, 말라죽게 하는 것은 또한 불순한 책만을 불사르고 그 사람은 사람답게 만들자는 뜻이 아니다. 심환지(沈煥之) 판부사의 이론 가운데 비록 그가 진실로 깨달은 것은 아니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그 말은 오히려 억측에 가깝다. 성인이 󰡔주역󰡕을 짓고 혁괘’(革卦)에서, 그 태도부터 고치고 마음을 고치는 데 이르게 하였으니, 어찌 먼저 마음부터 고치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설령 이존창이 과연 마음을 고쳤다는 실체가 없더라도 도신의 장계가 올라온 후이니, 조정의 체면으로서야 어찌 의심을 가지고 용서하는 데 인색해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上曰 李存昌 道啓請宥 而旣云覺悟 則使之瘦斃 亦非火其書人其人之義 沈判府議中 雖言其非眞箇覺悟 而此猶近於億逆 聖人作易 革之一卦 許其革面 而至於革心 則安能先責其革心乎 設令存昌果無革心之實 道啓登聞之後 在朝廷事面 豈可致疑而有所靳惜乎

 

52, 정조 23, 기미 83

형조에서 아뢰기를,

충청도 관찰사 이태영(李泰永)의 이문(移文)에 의하면, 이존창(李存昌)이 석방되어 돌아온 뒤에 조정의 살려준 깊은 뜻에 감축하면서 그 스스로 빨리 새로워지겠다는 계책을 세우기를 지금 만약 시골마을에 따로 떨어져 있다면 남에게 신임을 보이기가 쉽지 않으니 고을 밑에 살면서 일상적인 언행이 사람들의 이목에 오르내리게 함으로써 개과천선의 징표를 드러나게 하고, 만일 이단에 빠져들어 스스로 헤쳐 나오지 못한 자가 있으면 또한 앞으로 가르치고 일깨워 기어코 성인의 교화 속으로 함께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즉시 관가 근처에 와서 살게 했는데, 집안에서의 평소 행동을 특별히 살펴보면서 때때로 조사하고 힐문해 보니 완전히 깨달아 마음을 고쳐먹고 더 이상 미련이 남아있지 않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후로도 염탐하고 살펴보도록 해당 고을에 특별히 신칙하고, 보고가 들어오는 대로 매월 조정에 낱낱이 이문할 생각이라고 말했습니다.”

 

刑曹啓言 見忠淸道觀察使李泰永移文 李存昌放還後 感祝朝家好生之德意 亟圖方來自新之計策 以爲今若僻處外村 則未易見信 願居邑底 日用言行 塗人耳目 俾顯遷善之效 而如有溺未自拔者 則亦將誨而牖之 期於同歸聖化云 故卽令來接於官門近處 而其居家事爲 另行探察 時加考詰 則怳然革心 更無餘蘊云 向後探察之道 另加申飭 待報來逐朔枚移計料爲辭矣

 

6) 󰡔순조실록󰡕

 

2, 순조 원년, 신유(1801) 218

장령 이인채(李寅采)가 아뢰기를,

! 통분스럽습니다. 이기양의 죄는 죽여도 다 이룰 수 없습니다. 선대 임금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를 저버리고 사학의 무리가 도망하여 모이는 소굴을 달갑게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권일신(權日身)을 집에서 양육하고, 교주(敎主)의 칭호를 자처했으며, 이존창이 있는 감옥으로 찾아가 제멋대로 음식물을 공궤한 일이 많은 사람들의 입을 통해 떠들썩하게 전해졌으니, 많은 사람들의 눈을 가리기 어렵습니다.……

 

掌令李寅采啓言 噫嘻 痛矣 李基讓之罪 可勝誅哉 罔念先朝拂拭之恩 甘作邪類逋萃之藪 家蓄日身 自居敎主之號 獄訪存昌 恣爲餽贈之擧 衆口喧傳 萬目難掩

 

2, 순조 원년, 신유 225

영부사 이병모(李秉模)가 말하기를……

이존창은 사학에 오염된 지 여러 해가 되었으며, 실로 호서 한 도의 거괴(巨魁)가 되는 자입니다. 여러 번 감옥에 들어간 데다가 변사(變詐)가 일정하지 않을 정도여서 중외(中外)의 멀고 가까운 사람들 가운데 이존창이 사학의 괴수가 됨을 모르는 이가 없습니다. 이러함에도 그가 만일 살아서 옥문(獄門)을 나간다면 사방의 소문에 손상됨이 있을 뿐만 아니라 세상의 사악한 무리들이 모두 반드시 말하기를, ‘이존창도 살았으니, 다시 두려워할 만한 것이 없다고 할 것이니, 이 또한 일률(즉 사형)을 적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이에 의거하여 행하라. 그 중에서 이존창은 본도(本道)로 내려보내 백성들을 모아 놓은 뒤에 정법(正法)함으로써 한 도에서 경계가 되어 두려워하는 바탕을 삼도록 하라.” 하였다.

 

領府事李秉模曰……

李存昌 則染汚邪學 積有年所 實爲湖西一道之巨魁 屢入犴狴 變詐無常 中外遠近 無不知存昌之爲邪魁 此而若生出獄門 不但有損於八方聽聞 世之爲邪黨者 必皆曰 存昌且生 更無可懼云 此亦不可不用一律……

大王大妃敎曰 依此爲之 其中李存昌 下送本道 聚會民人後正法 以爲一道警懼之地也

 

2. 순교자 김광옥(안드레아)희성(프란치스코) 부자

 

1) 다블뤼 주교의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 pp. 118121

 

예산 1801년 음력 717(양력 825)

1801년 음력 717일 김광옥(金廣玉) 안드레아(?1801)가 예산에서 참수당했다.

 

안드레아는 예산 고을에 있는 여사올(ie sa ol, 여사울의 잘못) 마을의 한 양인 집안 출신이었다. 그는 재산이 있었으며, 과격한 성격으로 어느 누구도 그에게 고개를 바로 들 수 없었고 그를 반박하지도 못했다. 50세에 그는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으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웠는데, 모든 (사람들의) 예상과는 반대로 그것을 받아들이고 열심히 실천하며, 많은 그의 친족뿐만 아니라 그 마을의 다른 가족들까지 교화하였다. 외교인들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날마다 아침 기도와 저녁 기도를 함께 암송하기 위해 천주교인들을 불러모았고, 자주 교리를 설명하기도 하여 모든 그의 청중 사이에 열성이 생기도록 하였다. 사순절 기간 동안 그는 엄격하게 금식을 지켰고, 고행 실천에 전념하였으며, 그리고 나서 성격을 얼마나 길들이게 되었는지 사람들은 그가 젖먹이 어린아이 같다고 말하곤 하였다.

1801년의 박해 때 순교에 대해 그가 가지고 있던 갈망에도 불구하고, 감히 그 자신의 힘을 믿을 수 없었던 그는 박해를 피하기 위해 산 속에 은거하였다. 그러나 음력 1월에 고발당한 뒤 그는 자신의 고향 도시 예산의 포졸들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기쁨으로 그들을 뒤따랐다. “이제부터는 하느님의 지시하심이다.” 그러자 그를 보는 모든 이들이 말하였다. “참 특이하기도 하지. 저기 저 사람은 죽으러 가는데 저토록 즐거워하다니.” 첫 번째 신문에서 그에게 그의 서적들과 그의 공범자들을 물었다. 그가 대답했다. “나는 많은 천주교인들을 알고 있습니다만 그들을 나와 마찬가지로 다룰 것이므로 그들을 고발할 수 없습니다. 내 서적들에 관해서는 너무 귀중한 것이어서 그것들을 당신에게 줄 수 없습니다.” 그는 주뢰질과 몽둥이 찌르기를 받고 곤장을 맞았는데, 곧 의식을 잃었으므로 큰칼을 씌워 감옥으로 다시 데려갔다.

두 번째 신문에서 관장(즉 예산 현감)은 엄청난 공포의 기구를 내보이며 그에게 말했다.이번에는 네가 아주 분명하게 고발하지 않고 또한 배교하지 않으면, 매질로 죽으리라.” 그리고는 고문들이 다시 시작되었는데, 반나절 이상 동안 안드레아는 다음을 반복할 뿐이었다. “더 이상 나에게 재차 묻지 말아 주십시오. 충실한 신하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충실한 아내는 두 남편에게 몸을 맡기지 않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말했다. “그러니 좀 보십시오. 현감께서는 임금의 명을 어기겠습니까, 그를 배신하겠습니까. 아니오, 수만 번 아니오, 나는 나의 대왕(大王)이자 어버이를 부인할 수 없습니다.” 관장. “일상적인 형벌로는 이 놈이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어떠한 형벌로든지 그의 공범들을 고발하게 만들라. 만약 너희들이 인간적인 감정에 의해 그를 가볍게 친다면 내가 너희들을 죽음에 처하게 할 것이다.” 그는 마치 천둥치듯이 말하였고, 형리들은 제 정신이 아니었다. 정신을 차릴 시간도 없이 곤장으로 치는 자, 굵고 뾰족한 몽둥이로 치는 자, 저마다 그를 치기 시작하였다. 안드레아는 여전히 같은 어조로 대답하였고, 나졸들은 지쳐서 기진맥진하였다. 죄수의 몸은 그렇게 한 덩어리의 상처였고, 그의 피가 온 땅을 덮고 있었으나, 그는 아직 원기 있게 보였다. 관장이 말했다. “이 자는 인간의 종족에서 나온 존재가 아니다.” 그의 목에 무거운 칼을 씌우게 하고는 그를 다시 감옥으로 보냈다.

관장은 이 모두를 알리기 위해 영장(營將)에게 전보를 보내고, 영장은 죄인의 배교와 고발을 얻어 낸 후에 그에게 통고하라고 회답하였다. 그리하여 세 번째 신문이 다시 시작되었는데, 거기서 형벌은 배가 되고 모든 수단들이 동원되었으며, 하루종일 표현할 수조차 없는 방식으로 안드레아를 고문하였다. 그 후 아무 것도 얻어내지 못한 관장이 그에게 말하였다. “그러니 솔직하게 털어놓아라. 죽어서 뭐가 그리 좋을 게 있느냐?” “너는 처와 자식들, 재산이 있는데, 무엇이 네게 부족하단 말이냐? 왜 그토록 죽고자 고집을 부리느냐. 단 한마디면 너는 네 가족 곁으로 돌아가는데.” 그리고 나서 그는 온화한 말로 그의 마음을 끌려고 애썼다. 안드레아가 대답하였다. “나에게 더 이상 묻지 말아 주십시오. 삶에 대한 갈망은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된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나의 하느님을 부인할 수는 없으며, 그런 생각조차 할 수 없습니다. 저마다 처해있는 입장이 다릅니다. 임금으로부터 녹봉을 받는 관장께서는 임금의 명을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단지 당신이 나를 법에 따라 다루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더 이상은 나에게 묻지 마십시오. 내가 수만 번을 죽는다 할지라도 나는 달리 대답할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니) 원하는 대로 처신하십시오. 나는 모든 것에 대한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관장이 격노하며 말하였다. “이번에는 그를 죽여야 한다. 매질 수를 헤아리지 말라. 다들 다시 일어나 그를 쳐라. 하반신에서 시작하여 하반신이 으스러졌을 때 위로 올라가라.” 그와 같이 하여 그는 매를 맞았고, 매질한 수를 아는 것은 불가능했는데도 그는 죽지 않았다. 관장과 포졸들은 기진하였고, 그에게 자신의 결안에 서명하라고 말하자 그는 그렇게 했으며, 그 때 그는 환하게 빛나는 얼굴을 하고 온 마음으로 하느님과 마리아를 찬양했다. 감옥에 다시 보내진 그는 드러내놓고 그의 신앙 생활을 하였고, 그의 열성은 증가하였다.

안드레아는 청주에 있는 군사 주재지(즉 병영)로 이송되었고, 그가 대흥(大興) 출신인 인척 김대춘(베드로, 金丁得)과 동시에 확정적인 결안을 받게 되는 것도 그곳이다. 그리고 나서 둘 다 같은 날 참수되기 위해 각각의 고향 도시로 보내졌다. 그들이 헤어져야 할 갈림길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서로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그 다음날 정오를 서로 기약하였다. 그 후 그들은 각자 자신의 길을 계속 가서 안드레아는 예산에 도착하였다. 그 다음날은 음력 717(양력 825)이었다.

안드레아는 가벼운 마차에 실려 형장으로 갔는데, 그곳으로 가면서 묵주기도를 암송하고 있었다. 구경꾼들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는 죽는 것을 흡족해 하고, 노래한다. 참으로 특이하다.” 처형대 밑에 도착하여 그가 말하였다. “조금만 기다리시오. 나는 (아직) 내 기도를 끝마치지 않았소.” 그는 큰 소리로 모든 것을 끝마치고 나서 자진하여 그를 받치게 되어 있는 나무토막을 그의 턱 아래 위치시키고 몸을 숙였다. 형리가 칼로 그를 쳤지만 어깨만 스쳤다. 안드레아는 피를 닦고 그를 바라보며 말하였다. “귀중한 피요.” 그는 다시 나무를 그의 턱 아래 위치시키고 형리에게 말하였다. “주의해서 내 목을 단 칼에 베시오.” 그리고 나서 그는 대단히 침착하게 그의 희생을 완성하는 칼을 받았다. 1801년 신유년이었다.

 

Nieisan 1801 17 de 7e l.

Le 17 de la 7e l. 1801 Kim André, appellé Koang Ouki fut décapité à la ville de Nieisan.

 

André était d'une famille honnête du village de ie sa ol au distr. de Nieisan. Il avait de la fortune, et d'un caractère violent, personne ne pouvait lui tenir tête ou le reprimer. A l'âge de 50 ans il fut instruit de la religion par Ni tson t'siang et contre toute attente il l'embrasse, la pratique avec ferveur, et convertit non seulement beaucoup de ses proches, mais encore d'autres famille du village. Sans s'inquiéter des payens tout les jours il réunissait les Xtiens pour réciter en chœur les prières du matin et du soir, souvent aussi il expliquait la doctrine et faisait naître la ferveur parmi tous ses auditeurs. Pendant le carême il observait un jeûne rigoureux, et se livrait à la pratique de la mortification, puis parvint tellement à dompter son caractère, qu'on le disait semblable à un enfant à la mamelle.

La persécution de 1801, malgré le désir qu'il avait du martyre, n'osant se fier à ses propres forces il se retira dans les montagnes pour l'éviter. Mais ayant été dénoncé à la 1re lune il fut pris par les satellites de Niei San sa propre ville. Il les suivit avec joie, en diant : maintenant c'est l'ordre de Dieu, et tous ceux qui le voyaient, disaient : C'est bien singulier, cet homme là est tout joyeux d'aller à la mort. Au 1er interrogatoire on lui demanda ses livres et ses complices ; il répondit : Je connais bien des Xtiens, mais comme vous les traiteriez de même que moi je ne puis les dénoncer. Pour mes livres, c'est q.q. chose de trop précieux pour que je vous les donne. Il subit l'écartement des os, la puncture des bâtons et est battu de la planche à voleurs, bientôt ayant perdu connaissance, on le remet àla prison chargé d'une grande cangue.

Au 2de interrogatoire on déploie un grand appareil de terreur et on lui dit : Pour cette fois si tu ne dénonces pas tant clairement, et n'apostasies, tu meurs sous les coups. Et les tortures recommencent, mais pendant plus d'une demie journée, Andréne faisait que répéter : Ne m'interrogez plus de nouveau. Un sujet fidèle ne sert pas deux rois, une épouse fidèle ne se donne pas à deux maris. Il disait encore : voyez donc un peu, vous mandarin, enfreindriez vous les ordres du roi, le trahiriez vous. Non, dix mille fois non, je ne puis renier mon grand roi et père. Le mand. avec des supplices ordinaires ce coquin làne se rendra pas. - Par q.q. supplices que ce soit faites-lui dénoncer ses complices et si par q.q. sentiment d'humanité vous le battez légèrement, je vous fais mettre à mort. - Il avait parlé comme un tonnerre, les bourreaux étaient hors d'eux-mêmes, et sans avoir le temps de se remettre, chacun le bat, qui avec la planche à voleurs, qui avec de gros bâtons pointus. André répondait toujours avec le même ton, et les valets étaient épuisés de fatigue ; le corps du patient ne formait qu'une plaie, son sang couvrait en grand la terre et toutefois il paraissait encore vigoureux. - Le mandarin dit : Ce n'est pas un être de la race humaine, et lui faisant passer au cou une lourde cangue il le renvoie à la prison.

On dépêche vers le juge criminel pour l'informer de tout, et celui-ci répond de l'avertir après avoir obtenu l'apostasie et les dénonciations du coupable. Recommence donc un 3e interrogatoire où les supplices sont doubles et tous les moyens mis en œuvre, tout le jour on fut à torturer André d'une manière inexprimable. Après quoi ne gagnent rien, le mandarin lui dit : Dénonces donc tout franchement, qu'y a-t-il donc de si bon à mourir. - Tu as une femmes des enfants, de la fortune, que te manque-t-il? Pourquoi t'obstiner à vouloir mourir, un mot seulement et tu retournes près de ta famille. Puis il tâche de l'attirer par de douces paroles. André répond : Veuillez ne plus m'interroger. Le désir de la vie est commun à tous les hommes, mais je ne puis renier mon Dieu, ni même en avoir la pensée. Chacun est dans sa condition, vous mandarins, payé par le roi, pourriez-vous rejetter ses ordres. - J'attends seulement que vous me traitez selon la loi, ne m'interrogez pas davantage, devrais je mourir dix mille fois, je n'ai rien autre chose à répondre, agissez comme vous voudrez, je suis prêt à tout. Le mandarin devient furieux et dit : Cette fois il faut le tuer, ne comptez plus les coups, relevez vous l'un l'autre pour le battre, commencez par le bas du corps et quand il sera broyé allez en montant. - Il fut ainsi battu, impossible de savoir le nombre de coups, et il ne mourrait pas. Le mandarin et les satellites étant épuisés, on lui dit de signer sa sentence, ce qu'il fait, il avait alors le visage rayonnant et s'occupait à louer Dieu et Marie. Renvoyé à la prison il faisait ostensiblement ses exercices de piété et sa ferveur augmentait.

André fut transportéau chef lieu militaire à Tsieng Tsiou et c'est là qu'il reçut la sentence définitive en même temps que son allié Kim tai t'sioun i de Taicheng puis tous deux furent envoyés le même jour pour être décapités dans leur ville respective. Arrivés à l'embranchement de la route où ils devaient se séparer, ils se firent leurs adieux et se donnèrent rendez-vous pour le lendemain à midi, puis chacun poursuivant son chemin André arriva à la ville de Niei San. Le lendemain était 17 de la 7e lune.

André fut porté dans un panier au lieu de l'exécution ; en s'y rendant il récitait le Rosaire et les curieux disaient : Il est content de mourir, il chante, c'est bien singulier. Arrivé au pied de l'échafaud, il dit : Attendez un peu je n'ai pas fini mes prières, il termine tout àhaut voix, puis se place lui-même sous le menton le morceau de bois qui doit l'étayer et s'incline. Le bourreau le frappe du sabre, mais n'atteint que l'épaule. André essuye le sang, le regarde et dit : C'est un sang précieux. Il place de nouveau le bois sous son menton et dit au bourreau : Attention, décapites moi d'un seul coup puis il reçut avec le plus grand calme le coup qui consomme son sacrifice. C'était en 1801 Sin iou.

 

2) 다블뤼 주교의 󰡔조선 순교사 비망기󰡕, pp. 157161

 

사건이 점점 더 심각하게 되자, 신앙을 포기한 사람들은 서둘러서 석방하거나 귀양을 보냈고, 가장 영향력이 있거나 혹은 가장 비중 있게 연루된 상당수의 교우들은 서울로 보내 조정에서 직접 재판을 받도록 했는데, 이들 중에서 우리가 아는 교우들은 유항검(柳恒儉, 아우구스티노)의 두 형제와 윤지헌(尹持憲, 프란치스코), 김유산(金有山, 토마스), ()우집(李宇集), 한정흠(韓正欽) 스타니슬라오, 최여겸(崔汝謙) 마티아, 김천애(金千愛) 안드레아가 있다. 마지막 이 세 사람은 서양인들과의 교섭을 위한 돈 사건에 연루된 것 같지는 않고, 다만 박해하는 천주교 신앙을 굽히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기소되었다.

기소된 이들이 모두 모든 진술서와 재판 서류들과 함께 서울로 이송되자, 천주교의 적들 사이에서는 곧 큰 소란이 벌어졌는데, 그들은 죄인들에게서 끌어낸 자백들을 약삭빠르게 이용하여 이 사건 안에서 조선 정부에 대항하는 음모를 보고 싶어했다. 그러나 피고인들을 어떤 죄목으로 다루어야 하는지를 놓고 수천 번 토의를 벌이는 동안, 다른 한편으로는 천주교를 고집하면서 신앙을 굽히지 않던 수감된 몇몇 교인들의 소송을 끝내기 위해 음력 713[821] 5명에게 결안이 내려졌는데, 이 용감한 신앙 고백자들은 각각 다른 지방 출신들이나 그들의 항구함 때문에, 혹은 다른 사정에 의해서 서울의 옥안에 모여 있었다. 결안은 사교(邪敎)의 전파를 막고 주민들에게 겁을 주기 위해서 그들을 각각 고향으로 보내 처형하라는 것으로 내려졌다. 김 안드레아와 김정득은 충청도 출신이었고, 한 스타니슬라오, 김 안드레아, 최 마티아는 전라도 출신이었다. 우리는 그들에 관한 감화 내용을 전하고자 한다.

내포 지방의 예산 여사울 출신인 김광옥 안드레아는 양민 집안에서 태어났고, 재산이 많았으며, 면장(面長) 직책을 맡았었다. 아주 과격한 그의 성격 때문에 사방에서 그를 무서워하였고, 어느 누구도 그를 제지하거나 누를 수 없었다. 50세에 예상치 않게 같은 마을에 살던 이(존창) 곤자가 루도비코에 의해 천주교를 배워, 모든 이들이 크게 놀랍게도 즉시 천주교에 입교하여 아주 열심한 신자가 되었으며, 외교인들에게도 스스럼없이 드러내면서 공공연하게 실천하였다. 그는 가족을 입교시켰고, 많은 측근들과 마을 사람들도 입교시켰을 뿐만 아니라 어느 계절이든 막론하고 매일 모두 모여서 아침저녁 기도를 함께 드렸다. 그는 종종 교리를 설명하기도 하여 듣는 이들로 하여금 기쁨이 충만한 열의를 갖게 할 줄도 알았다. 사순 기간 동안에는 엄격하게 단식을 지켰으며, 여러 가지 고행을 실천하는 데 전념하였고, 매우 성실하게 덕행을 실천함으로써 어찌나 자신의 성격을 다스렸는지, 사람들은 그가 젖먹이 아이처럼 되었다고 말할 정도였다.

1801년에 박해가 크게 일어나는 것을 본 그는 박해를 피해 공주에 있는 산 속으로 들어갔지만, 음력 1월부터 밀고되어 그의 고향 마을의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그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집에 앉아서 기다리는 것이 나에게는 파렴치한 행동으로 보였습니다. 내가 내 자신의 힘을 과신하는 것처럼 보였을 테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나는 위험을 피해 피신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속으로는 순교야말로 내가 가장 바라던 소원 중의 하나였습니다. 오늘 내가 붙들린 것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명에 의한 것이니 아무 회한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가 어찌나 만족스러워하고 기뻐했는지 포졸들과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 놀라 어안이 벙벙해졌다.

관장 앞에 끌려간 그는 곧 모든 질문을 받으며 그가 피신해 그를 찾느라고 고생을 했다는 비난을 받아야 했으며, 관장은 그에게 공범자들을 고발하고 천주교 서적들을 내놓으라고 명령했다. 안드레아는 대답했다. “저는 같은 신앙을 가진 이들이 많습니다만 당신이 그들을 저처럼 다룰 것이므로 그들을 알려드릴 수 없고, 제가 가지고 있는 서적들에 대해서 말씀드리자면 그것들은 너무나 소중하기 때문에 당신에게 내놓을 수 없습니다.” 이에 분노한 관장은 형벌을 배가하였고, 안드레아는 여전히 굳게 입을 다물고 있다가 의식을 잃자, 그에게 무거운 칼을 씌워 옥으로 다시 데려갔다.

그는 곧 두 번째 신문을 받았는데, 이 번에는 그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키게 하려고 아주 혹독한 방법을 동원하였다. 관장은 그에게 이렇게 말을 하면서 시작하였다. “이 번에는 이미 너에게 명했던 모든 내용을 고발하고 배교를 해야만 네 목숨을 보존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네가 조금이라도 대항한다면 매맞아 죽을 것이다.” 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주뢰질과 치도곤 등의 고문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반나절이 지나도록 꿋꿋한 신앙 고백자는 오직 이 말만을 했을 뿐이다. “더 이상 제게 묻지 말아주십시오. 충실한 신하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정숙한 아내는 두 남자에게 몸을 내주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러니 사또, 관장께서는 임금님의 명을 어기시겠습니까? 임금님을 부인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만 번이라도 아닙니다. 저는 저의 대왕이시며 저의 아버지를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임금이나 부모를 대함에 있어서는 밖으로 드러내는 행동과 마음의 심정이 일치되지 않는 경우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하느님께서는 가장 깊이 숨어 있는 생각들도, 심정도, 의향도 보시는 분이시므로 그분 앞에서는 속으로도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더 이상 제게 묻지 말아주십시오.”

화가 치민 관장이 이렇게 말했다. “보아하니 보통 형벌로는 이 놈이 굴복하지 않을 것이니 모든 형벌을 동원해서라도 이 놈에게서 고발이 나오게 하도록 하라. 모두들 시작하라. 만일 조금이라도 인정을 생각하여 매질을 봐준다면 내가 너희들을 모두 죽게 할 것이다.” 그의 목소리는 천둥처럼 쩌렁쩌렁 울렸고, 형리들은 안색이 변하여 숨 쉴 틈도 없이 명령에 따라 그를 때렸는데, 곤장으로 치는 자, 굵은 몽둥이로 치는 자, 서로 다투듯이 정신 없이 매를 때렸다. 곧 형리들은 지쳐 기진했고, 안드레아의 몸은 상처투성이였으며, 온 몸에서 피가 쏟아져 땅을 적셨지만 그는 여전히 원기 왕성해 보였고, 빛나는 얼굴로 이따금씩 제게 더 이상 묻지 마십시오라는 말만 되풀이하곤 했다. 관장은 놀라서, “사람이 아니로다라고 말했다. 결국 그에게 무거운 칼을 씌우고 다시 옥으로 데려가도록 했다.

상세한 신문 내용이 영장에게 전달되었고, 영장은 그에게서 배교와 밀고를 얻어냈을 때 자기에게 알리라고 무뚝뚝하게 답하였다. 그래서 세 번째 신문을 해야 했고, 이번에는 형구들이 아주 특별한 방법으로 활용되었으며, 형리들의 잔인성이 하루 종일 유감 없이 발휘되었다. 그리고 나서 관장은 그에게 말했다. “네가 법정 명령에 복종하지 않으면 너를 처형하라고 영장이 내게 명을 내리셨으니 이제 그 명령대로 해야겠다. 헌데 너는 죽는 게 무엇이 그리 좋으냐? 너는 처자식이 있고 재산도 있으며 한 마디만 하면 살아서 돌아갈 터인데 왜 그리 고문을 받으며 죽기를 고집하느냐?” 관장은 그렇게 부드러운 말과 숱한 방법으로 안드레아의 마음을 돌리게 하고 유혹해 보려고 애를 썼지만 그는 바위와 같아서 흔들림이 없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제가 삶과 죽음에 초연해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저는 저의 하느님을 부인할 생각이 없습니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의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관장 사또께서는 임금님으로부터 녹을 받으시므로 임금님의 명을 따르셔야 할 터이니, 저는 다만 사또께서 그 명을 집행하시기를 기다릴 뿐입니다. 제가 사또의 매에 죽는다 해도 더 이상 제게 묻지 말아주십시오. 제가 일만 번을 죽는다 해도 달리 대답할 것이 없습니다. 사또께서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저는 모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격분한 관장은 형리들에게 말했다. “이번에야말로 저 자를 죽여야 하겠다. 더 이상 수를 헤아리지 말고 매를 때려라. 너희들은 교대를 하면서라도 매를 칠 것이며, 몸 아래쪽부터 치기 시작해서 완전히 부서진 다음에야 위로 올라가며 치거라.” 그렇게 해서 그의 몸은 헤아릴 수 없는 매질 아래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그가 마음을 바꾸지 않자 형리들은 기진하였고, 그에게 결안에 서명을 하라고 말했다. 그는 기쁨에 빛난 얼굴로 서명을 하였고, 그런 다음 오직 하느님과 마리아께 감사를 드렸다. 옥으로 돌아온 그는 밤이고 낮이고 드러내놓고 기도를 하였으며, 기회가 닿을 때마다 천주교의 진리를 설명하였고, 천상 은총으로 강화된 그의 열심은 더욱 커가기만 하였다.

그 뒤로 안드레아는 병사 주재지인 청주로 이송되었다가 다시 서울로 이송되었던 것 같은데, 거기서 그의 확정적인 결안이 내려진 것 같다. 조정의 명령이 그를 고향 마을 예산에서 처형하라는 것이어서 그는 같은 날 선고 받고 예산과 인접한 대흥에서 처형되기로 되어 있는 그의 인척 김대춘과 함께 길을 떠났다. 길을 가는 내내 두 신앙 고백자는 서로를 격려하였으며, 길이 갈라지는 갈림길에 왔을 때 그들은 작별을 고하면서 서로 다른 곳에서 참수 당하기로 되어 있던 이튿날 정오에 천상 본향(本鄕)에서 만나자고 기약했다. 그야말로 단두대 밑에서 나눈 이 두 신앙 고백자의 대화는 얼마나 감동을 주는 것이었고, 주님 품안에서 만나자는 이 작별인사는 얼마나 아름답고 감동적인가!

과연 이튿날, 옥에서 7개월을 보낸 후 안드레아는 짚으로 만든 들것에 올려져 형장으로 실려갔다. 그리로 가는 내내 그는 큰 소리로 묵주기도를 바쳤고, 구경꾼들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로다, 죽는 게 좋다고 노래를 부르며 형장으로 가는구나했다. 안드레아는 왜냐하면 나는 영복을 누리러 오늘 하느님 곁으로 가기 때문이오.”라고 대답했다. 형구 밑에 도착하자 그는 기도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조금만 기다리시오하고는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기도를 마치고는 머리를 받치게 되어 있는 나무토막을 직접 턱 밑에 갖다대고는 몸을 숙였다. 망나니가 그를 내리쳤는데 잘못하여 그만 어깨 위로 떨어졌다.

안드레아는 몸을 일으켜 수건으로 피를 닦고 다시 원래의 자세를 취하고는 망나니에게 잘 해서 단 칼에 내 머리를 자르시오라고 말하고는 아주 평온하게 이 마지막 칼을 받고 그의 희생을 완성하였다. 때는 음력 717[825]이었고, 안드레아의 나이는 약 60세 정도였다.

 

Les choses devenant de plus en plus graves, on se hâta de relacher ou d’engager en exil ceux qui avaient renoncé à la foi et une certain nombre des plus influents ou des plus compromis furent envoyés à la Capitale pour y être jugés par le gouvernement lui même ; de ce nombre nous ne connaissons que les deux frères Niou Hang kem, Ioun tsi hen i, Kim Iou San i ou Tsipi, Han Stanislas appellé Tsieng Heum i, T’soi Mathias, dit Ie Kiem i, et Kim André dit T’sien ai, ces trois derniers toutefois ne paraissent pas avoir été compromis dans l’affaire de l’argent donné pour les rapports avec les étrangers, ils étaient seulement sous le poids d’accusations pour leur invincible attachement à la religion persécutée.

Tous ces accusés ayant été transférés à la Capitale avec toutes les dépositions et pièces du procès, une grande rumeur s’éleva bientôt parmi tous les ennemis de la religion, et profitant adroitement des aveux tirés aux coupables on voulut voir dans ces faits un aveu complet contre le gouvernement Coréen. Mais pendant mille débats qui eurent lieu pour savoir sur quel pied on devait traiter les accusés, on voulut en finir avec quelques prisonniers trop attachés à leur religion pour oser la renier et le 13 de la 7ème lune (21 Août) une sentence de mort était portée contre cinq généreux confesseurs de diverses provinces que leur constance ou dautres circonstances réunis dans les prisons de la Capitale ; la sentence portait qu’ils devaient être envoyés éxécuter dans leur district respectif pour effrayer les populations et arrêter la propagation du mal. Deux étaient de la province de T’siong T’sieng, Kim André et Tieng Teuk i ; les trois autres de la province de Tsien la ce sont : Han Stanislas, Kim André et T’soi Mathias, sur lesquels nous allons donner quelques détails édifiants.

Kim André, appellé Koang ok i, était de Ie Sa ol au district de Niei San dans le Nai p'o ; né d'une famille honnête, il avait de la fortune et exercea[exerça] la fonction de chef de Canton ; son carctère très violent le faisait craindre partout et personne ne pouvait le contenir et réprimer. A l'âge d'environ 50 ans il fut instruit de la religion contre toute attente par Ni Louis de Gonzague qui était presque du même village, et au grand étonnement de tous il l'embrassa de suite, devint très fervent et pratiquait ostensiblement sans se mettre en peine des payens. De plus il convertit sa famille, beaucoup de ses proches et d'autres personnes du village, et tous les jours en quelque saison que ce fût tous se réunissaient pour réciter en chœur les prières du matin et du soir ; souvent aussi il expliquait la doctrine et savait faire naître parmi ses auditeurs une ferveur toute mêlée de joie. Pendant la Ste Quarantaine il observait un jeûne rigoureux, se livrait à diverses pratiques de mortifications et par une grande assiduité aux exercices des vertus il parvint à mâter[mater] tellement son carcatère, qu'on le disait devenu semblable à un enfant à la mamelle.

Quand il vit la persécution de 1801 s'éleva avec force, il se retira pour l'éviter dans les montagnes de Kong Tsiou, mais ayant été dénoncé dès la 1re lune il fut saisi par les satellites de sa propre ville. Il disait alors : Ils[Il] eut paru impudent de ma part d'attendre assis dans ma maison, et j'aurai semblé me fier à mes propres forces, j'ai donc dû fuir et éviter le danger, mais au fond le martyre est un de mes grands désirs, aujourd'hui que je suis pris uniquement par l'ordre de Dieu, je n'ai aucun regret.» Et il paraissait content et joyeux au point que les satellites et autres témoins en étaient stupéfaits.

Conduit au mandarin il fut mis aussitôt à la question et tout en lui reprochant de s'être enfui pourdonner la peine de le chercher, on lui commanda de dénoncer ses complices et ses livres de religion. André répond : J'ai beaucoup de coréligionaires, mais comme vous les traiteriez comme moi, je ne puis vous les faire connaître, pour mes livres, ils sont trop précieux pour que je les livre entre vos mains. Le mandarin en colère fait redoubler les supplices et André toujours ferme dans son silence, ayant perdu connaissance on le chargea d'une lourde cangue et le reconduisit en prison.

Un second interrogatoire ne tarda pas à lui être imposé, on y déploya une grande sévéritépour lui inspirer la terreur et le juge débuta en lui disant : cette fois tu ne peux sauver ta vie qu'en déclarant tout ce que je t'ai déjà demandé et par l'apostasie : si tu résistes tant soit peu, tu meurs sous les coups. En même temps les tortures sont mises en jeu, l'écartement des os, la puncture des bâtons, etc. mais pendant plus d'une demi journée, le vaillant confesseur n'avait qu'un seul mot à la bouche : Ne m'interrogez plus de nouveau, un sujet fidèle ne sert pas deux rois, une épouse fidèle ne se donne pas à deux maris. Il ajoutait encore : Voyez donc, vous mandarin, voudrez-vous enfreindre les ordres du roi? Oseriez-vous bien le renier? Non, dix mille fois non, je ne puis renier mon grand roi et mon père : Vis àvis des rois et des parents, il y a bien des circonstances où les actes extérieurs ne sont pas en harmonie avec les sentiments du cœur ; mais notre Dieu voyant les plus secrètes pensées, les sentiments et les intentions, on ne peut devant lui pêcher même intérieurement, ne m'interrogez donc plus.

Le mandarin était à bout, je vois bien, dit-il, qu'avec des supplices ordinaires ce coquin-làne se rendra pas, par quelque supplice que ce soit il faut en tirer des dénonciations, mettez-vous à l'œuvre et si par q.q. sentiement d'humanité, vous ménagez les coups, je vous fais mettre tous à mort : Sa voix avait retenti comme un tonnerre, les valets changeaient de couleurs, et sans prendre le temps de respirer ils le battaient selon les ordres qui avec la planche à voleurs, qui avec les gros bâtons, sans précaution aucune et comme à l'envie. Bientôt les valets furent épuisés de fatigue ; tout le corps d'André ne faisait qu'une plaie, son sang coulait de toutes parts et inondait le sol, toutefois il paraissait encore vigoureux et le visage enflammé il répétait de temps en temps : Ne m'interrogez plus làdessus. Le mandarin étonné disait : Ce n'est pas un être humain. Enfin on fut obligé de lui repasser une lourde cangue et de le faire retransporter àla prison.

Tous ces détails furent transmit au juge criminel qui répondi sèchement de l'informer quand on aurait obtenu son apostasie et les dénonciations voulues. Il fallut donc en venir à un 3ème interrogatoire où les appareils de supplices furent déployés d'une manière toute spéciale et où la cruauté des bourreaux put librement s'exercer pendant tout le jour. Après quoi le mandarin lui dit : Le juge criminel m'ordonne de te mettre à mort si tu n'obéis aux injonctions qui t'ont étéfaites, on va maintenant s'achever ; mais que trouves tu donc de si bon à mourir? Tu as une femmes[femme], des enfants et de la fortune, tu n'as qu'un mot à dire et tu retournes au jour, pourquoi t'obstiner à mourir dans les tourments? Il tâcha ainsi par de douces paroles et par mille moyens d'émouvoir et de séduire le cœur d'André, mais celui-ci semble un rocher et ne se laisse pas ébranler. Il disait : La vie et la mort son[sont] loin de m'être indifférents, mais je ne puis avoir la pensée de renier mon Dieu. Chaque homme est dans sa condition, vous mandarin payé par le roi, vous devez suivre ses ordres, moi j'attends seulement que vous les exécutez. Devrais-je mourir sous tes coups ; ne m'interrogez plus ; devrais-je mourir dix mille fois, je n'ai rien autre chose à répondre, agissez comme vous voudrez, je suis prêt à tout.

Le mandarin furieux dit à ses gens : Cette fois il faut le tuer, ne comptez plus les coups, relevez-vous les uns les autres pour le battre, commencez par le bas du corps et quand il sera broyé[,] allez en montant. Il fut ainsi abimésous un nombre incalculable de coups, mais ne changeant pas de sentiments, ses bourreaux furent mis à bout et lui dirent de signer sa sentence, ce qu'il fit d'un visage rayonnant de joie, puis s'occupait à louer Dieu et Marie. Renvoyé à la prison le jour et la nuit il faisait ostensiblement ses prières, développait quand il en avait l'occasion les vérités de la religion et sa ferveur fortifiée par la grâce d'en haut ne faisait qu'augmenter.

Il paraît qu'André fut envoyé plus tard au tribunal de Tsien[Tsieng] tsiou, chef lieu militaire de la province et probablement envoyé de là à la Capitale d'où semble être émancé[émané] sa sentence définfive. Les ordres de la Cour portent de le faire éxécuter à la ville de Niei San, son district natal, il fut mis en route accompagné de Kim tai t'sioun i, son allié condamné le même jour que lui et qui devait être mis à mort à Tai Heng, district limitrophe de Niei San. Les deux confesseurs s'exhortaient mutuellement pendant le voyage, et arrivés à l'embranchement où la route se sépare ; ils se firent leurs aideux se rendant rendez-vous à la céleste patrie pour le lendemain à midi, jour où ils devaient chacun de leur côté avoir la tête tranchée qu'ils devaient être édifiants ces entretiens de deux confesseurs pour ainsi dire au pied de l'échafaud, et que ces adieux avec rendez-vous dans le sein du Seigneur nous paraissent beaux et touchants.

En effet le lendemain, après sept mois de détention, André étant porté sur une litière de paille au lieu des éxécutions. En s'y rendant il récitait son rosaire à haute voix et les curieux disaient : C'est bien singulier, il est content de mourir et va au supplice en chantant. André répondit : C'est qu'aujourd'hui je serai près de Dieu pour y jouir d'un bonheur sans fin. Arrivé au pied de l'échafaud, il dit : Je n'ai pas fini mes prières, attendez tant soit peu ; il se met à genoux, les termine à haute voix, puis se plaçant lui-même sous le menton, le billot qui doit le soutenir, il s'incline. Le bourreau le frappe, mais à faux et n'atteint que l'épaule.

André se relève[,] essuie le sang avec son mouchoir, se remet en position et dit au bourreau : Fais attention et coupes moi la tête d'un seul coup, puis avec le plus grand calme reçoit ce dernier coup qui consomme son sacrifice. C'était le 17 de la 7ème lune(25 Août) et André devait environ 60 ans.

 

3) 김희성(프란치스코) 약전

 

교우들 사이에는 경서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김희성(金稀成) 프란치스코(17651816), 1765년 예산 여사울의 부유한 중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예산에서 순교한 김광옥(안드레아)은 바로 그의 부친이다. 그러므로 어려서부터 전통 학문을 배워오던 그는 아버지가 신앙을 받아들인 이후에는 이를 버리고 천주교 교리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아주 열심한 신자가 되어 기도와 애긍 생활을 실천해 나갔으며, 언제나 영혼을 구하는 일에 힘쓰게 되었다.

1801년에 아버지가 순교하자, 프란치스코의 열성은 날로 높아져 갔다. 그리고 아버지의 모범을 따르겠다는 그의 의지는 더욱 굳어져만 갔다. 이후 프란치스코는 모든 재물을 버리고 경상도 일월산에 있는 영양의 곧은장으로 들어가 가족과 함께 생활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금욕 생활을 하면서 여러 가지로 고신극기를 실천하였다. 또 급한 성격을 극복하는 데 노력한 결과, 오래지 아니하여 양순함과 인내의 모범이 되기에 이르렀다.

18153, 을해박해가 일어난 지 얼마 안되어 밀고자가 포졸들을 이끌고 곧은장으로 쳐들어왔다. 그때 프란치스코는 산에 올라가 있었는데, 포졸들이 내려오라고 소리치는 것을 듣고는 아들 문악이에게 이렇게 당부하였다. “나는 천주의 명을 따라 가야 한다마는, 너는 나를 따라오지 말고 온 집안을 보살피되, 특히 할머니를 극진히 모시거라.” 그런 다음 프란치스코는 아주 기쁜 낯으로 하산하여 포졸들은 물론 밀고자까지도 관대하게 대접하였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하직 인사를 올리면서 상냥한 말로 위로하였으며, 아내에게는 어머니를 잘 봉양하고 자식들을 잘 가르친 뒤에 자신의 뒤를 따르도록 부탁하였다.

김희성 프란치스코는 웃는 낯으로 포졸들을 따라 나섰다. 이내 안동 관아로 끌려간 그는 그곳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결코 여기에 굴하지 않았다. 그러자 안동 관장은 그를 김종한(金宗漢, 안드레아)과 함께 대구로 이송하였고, 그들은 이곳에서 다시 형벌을 받게 되었다. 이때 프란치스코는 관원들이 당황할 정도로 항구한 신앙심을 보여 주었다.

대구 감사는 프란치스코의 심지가 너무 굳은 탓에 결코 배교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그의 최후 진술을 받아 조정에 보고한 뒤, 다른 신자들과 함께 옥에 가두어 두도록 하였다. 당시 대구 감사가 조정에 올린 사형 선고문 안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김희성은 집안에 천주교 서적을 숨겨왔으며, 평소에 십계명과 같은 요사한 글들을 이웃과 함께 외우곤 하였습니다.”

 

이후에도 프란치스코는 동료들과 함께 오랫동안 옥중 생활을 해야만 하였다. 그러다가 사형 집행에 대한 임금의 윤허가 내려와 18161219(음력 111) 대구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51세였다. 순교 후 그의 시신은 형장 인근에 매장되었다가 이듬해 32일 친척과 교우들에 의해 그 유해가 거두어져 적당한 곳에 안장되었다.

 

4) 기타 관련 기록

 

① 󰡔순조실록󰡕 2, 원년 423일 기사

형조에서 아뢰기를,

충청도의 사학 죄인인 공주의 백성 김정득, 예산의 백성 김광옥은 사학에 고혹되어 공주의 무성산(茂城山) 속에 숨어살면서 요서(妖書)를 상자에 숨겨 두고 더러운 물건을 주머니에 싸서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사는 무익한 것이라고 말하여 윤리를 패몰(敗沒)시켰으며, 어리석은 백성들을 속여서 유혹하는 등 정상이 몹시 패악하였는데, 이미 지만(遲晩, 늦게나마 자복함)하였습니다. 청컨대, 본 도()로 하여금 결안을 받아 정법하게 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刑曹啓言

忠淸道邪學罪人 公州民金丁得 禮山民金廣玉等 蠱惑邪學 匿處於公州茂城山中 篋藏妖書 囊裹穢物 謂祭無益 倫理敗沒 誑誘愚氓 情節絶悖 而旣已遲晩 請令本道 捧結案正法 從之

 

② 󰡔순조실록󰡕 3, 원년 713일 정해

형조에서 아뢰기를,

호서의 김정득김광옥 등과 호남의 한정흠, 최여겸, 노복 ()천애 등은 터무니없는 말로 그릇되게 하고, 독실하게 믿으며 따라 익혀서 십계(十戒)는 버리기 곤란하며, 한 번 죽음을 달갑게 받겠다고 하였다. 함께 지만을 받은 뒤 각각 해도(該道)로 압송하여 사형에 처하소서.”

하였다.

 

刑曹啓言

湖西之金丁得金廣玉等 湖南之韓正欽崔汝謙奴千愛等 譸張詿誤 篤信隷習 謂以難捨十戒 甘受一死 竝捧遲晩後 押送各該道 正法

 

③『사학징의1, 각도정법죄인질, 충청도 공주

광옥. 성은 김.

사형 선고문 : 사학에 깊이 빠져 직업을 버리고 고향을 떠나 자취를 감췄다. 제멋대로 외워 익히면서 (사학과 관련이 있는) 더러운 물건들을 숨겨 두었다. 결코 법을 두려워하지 않고, 십계를 버리기 어렵다고 하면서 스스로 생각하건대 한 번 죽음을 달게 받겠다고 했다.……신유년 7월에 사형을 집행했다.

 

廣玉 [姓金]

結案招 沈惑邪術 廢棄常業 離鄕匿跡 恣意誦習 藏置贓物 暋不畏法 謂以十戒之難捨 自分一死之甘受 云云 [辛酉七月 正法]

 

3. 성 홍병주(베드로)영주(바오로) 형제

 

1) 다블뤼 주교의 󰡔조선 순교사 비망기󰡕, pp. 492494

 

박종원(朴宗源, 아우구스티노)과 함께 홍병주(洪秉周, 베드로 : 17981840) 베드로가 처형되었는데, 이제는 그와 그의 아우 (洪永周) 바오로(18011840)를 소개해야겠다.

이 형제는 매우 유명한 가문의 자손들이며, 1801년에 순교한 홍낙민(루카)의 손자이고, 1개월 전에 전주에서 참수당한 홍(재영) 프로타시오의 조카들이었다. 그들의 부친은 1801년의 박해를 치르고 나서 내포 평야에 있는 예산(Liei San) 고을 여사울(Ie sa ol)로 이주해서 살았었다. 천주교 신앙과 단단한 교육만이 그가 자식들에게 남겨준 유일한 유산이었다. 이들은 그것을 아주 잘 이용했으며, 그들의 덕행으로 천주교에 영광이 돌아오도록 하였다. 둘이 다 회장으로 임명되어 열성과 교우들을 꾸준히 보살피는 것으로 사람들의 눈을 끌었다. 그들의 시간은 남을 가르치는 것과 격려와 병자 간호와 그 밖의 자선 사업에 골고루 바쳐졌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그들의 정성과 헌신에 감격하여 여러 차례 아주 중요한 일들을 그들에게 맡겼었다. 그들은 1839년의 (기해)박해 때에 얼마동안 어떤 선교사에게 은신처를 제공했었는데, 이 용감한 접대로 인해 목숨을 잃게 되리라는 것을 확신하고 전심하여 순교를 준비하였다. 과연 (밀고자) 김여상(金順性)이 어떻게 해서든지 체포해야 하는 유력한 교우를 적은 추방자 명단에 이들을 끼워 넣었다.

8월에 붙잡혀 서울 포도대장 앞으로 압송되었다. 신문은 가장 가혹한 것 중에 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형제는 진정한 순교자의 자손답게 잘 참아 받아 형조로 이송되었다. 형조판서는 이 사건을 아래 관리에게 넘겨주면서 모든 가능한 수단을 써서 그들을 배교시키되 사형을 언도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명령에 따라 모든 방법이 사용되었고, 가장 무서운 고문이 가해졌다. 뿐만 아니라 모든 옥졸들이 형조판서에게 잘 보일 생각으로 그들의 마음을 흔들리게 할 희망을 가지고 사정없이 괴롭히고 귀찮게 굴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쓸데없었다. 마침내 그들에 대한 사형 선고를 내려야만 하였고, 형인 홍(병주) 베드로는 박(종원) 아우구스티노와 같이 (1840131: 음력 18391227) 참수되었다. 그의 나이는 42세였다. 아우는 그 이튿날 그를 따라가게 되었다.…… 우선 전날 순교한 (홍병주) 베드로의 아우 홍(영주) 바오로가 있었다. 조선 법률에 언제나 형제나 부자를 함께 처형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의 형 집행을 24시간 늦추었던 것이다. (홍영주) 바오로의 나이는 39세였다.

 

Il était accompagné de Hong Pierre que nous devons faire connaitre[connaître] ainsi que son frère Paul. Ces deux frères Hong étaient d'une famille très distinguée, petits fils de Hong Nak min i martyr en 1801, et neveux de Hong Protais décapité à Tsien tsiou un mois auparavant. Leur père âprès[après] les désastres de 1801, avait été s'établir à Ie sa ol, district de Liei San, dans la plaine du Nai p'o, et ayant reçu la Religion comme patrimoine de famille, tous deux s'y adonnaient entièrement et leurs vertus étaient citées de tous côtés. Plus tard nommés catéchistes, leur ferveur s'en accrut encore par les soins assidus qu'ils donnaient aux Xtiens ; instructions, exhortations, soins des malades et toutes sortes de bonne œuvres se partageaient leur temps et les missionnaires frappés de leur aptitude et dévouement leur confièrent plusieurs fois des affaires très importantes. Ils donnèrent quelque temps asile au Pretre[Prêtre] pendant la persécution de 1839, et persuadés qu'ils ne pourraient échapper[échaper], ils se préparaient de tout cœur au martyr. En effet, leur nom était trop connu pour que le traitre[traître] ne les mit pas au nombre des Xtiens importants.

A la 8me lune, ils furent pris et conduits à la capitale au grand juge criminel. La question fut des plus violentes, mais les deux frères la supportèrent en vrais descendants de martyrs et furent transférés au tribunal des crimes. Le ministre des crimes était alors un de leurs parents. Il dut renvoyer la cause à son second, et dit de tout faire pour obtenir leur apostasie et par là éviter la mort. D'âprès[D'après] ses ordres on connait[connît] quelles tortures ont été infligées à nos deux frères, et ce qui ne fut pas moins pénible, tous les employés de la prison, pour s'en faire un mérite auprès du ministre, mirent en  uvre tourments et vexations pour les ébranler. Tout fut inutile, on les condamna donc à mort, et Hong Pierre, l'ainé[l'aîné] fut décapité avec Pak Augustin. Il était âgé de 42 ans.……D'abord Hong Paul frère du martyr précédent, remis sans doute à cause de la loi de ce pays qui fait éviter de mettre ensemble sur le même échafaud deux frères ou le père et le fils. Il reçut le coup de sabre à l'âge de 39 ans.

 

2) 󰡔기해일기󰡕, 82b84a.

 

홍 베드로 : 회장

홍 바오로 : 그의 아우

홍 베드로와 바오로는 형제로 명문 거족이었다. 그 조부가 신유년에 위주치명하자, 부친은 충청도 내포로 낙향하였다. 성교는 본디 가정지학(家庭之學)이었으므로 형제는 함께 열심히 수계하였고, 그 덕망은 여러 사람이 일컫는 바가 되었다. 신부께서 입국하신 뒤 그 지방의 회장으로 선정하여 여러 교우들을 도와 살피게 하시자, 더욱 열심을 나타내 염경 묵상과 서적 읽기를 부지런히 하며, 집안과 모든 교우들을 제성 권면하고, 빈궁한 사람들을 돌보며, 신공에 부지런했으니, 그 아름다운 표양을 모든 이들이 기꺼이 따랐다. 또 신부께서는 간혹 요긴한 일들을 부탁하기도 하였다.

기해년에 군난이 크게 일어난 뒤에는 아주 위험한 가운데서도 신부를 집에 모셨으며, 치명할 것을 스스로 다짐하였다. 8월에 서울 포졸들이 내려와 체포하였다. 포장이 묻기를 배주하고 책과 교우들을 대라고 하면서 문초와 형벌을 심하게 했지만, 형제가 한결같이 굴하지 않자 형조로 이송하였다.

형조판서는 (그 형제의) 친척이므로 직접 형벌을 하지 않고 아래 관리에게 미루면서 모쪼록 배주토록 하라고 하니, 혹독한 형벌과 힐난이 아주 심하였다. 또 옥졸들은 판서에게 공을 세우려고 어떻게 해서든지 배교하는 말을 얻어내려고 포악하게 굴었지만 끝내 굴복하지 않았다. 형벌과 문초 세 차례에 모진 매를 때린 뒤 사형 선고를 내리고 옥에 가둔 지 5개월 후인 1227일에 형 베드로는 여섯 사람과 함께 당고개에서 참수 치명하였으니, 나이 42세였다. 바오로는 그 이튿날 당고개에서 두 사람과 함께 참수 치명하였으니, 나이 39세였다.

그들의 삼촌(즉 홍재영 프로타시오)은 신유박해 때 (전라도 광주로) 유배를 가서 수십년을 열심히 수계하다가 기해년에 다시 체포되어 전라 감영에서 며느리(즉 심 바르바라)와 함께 치명하였다. 신유기해 두 해의 큰 풍파에 삼대 다섯 사람이 치명을 했으니, 이는 또한 조선에서 드문 일이었다.

 

3) 󰡔기해병오박해 순교자 증언록󰡕

 

회차 80

쥬의 일홈을 인야 아멘.

이 공번된 문셔로 뭇사이 알기오쥬 예수 강후 일쳔팔팔십년 양 오월 이십삼일 진시 말 갑신 二十九일 교종 네오 뎨십삼위 칠년에 됴션 젼교신부 민아스딩이 교화황과 부쥬교의 명을 밧와 긔와 병오년 치명 일긔 기로 서울 한양골 본에 좌뎡시매 죄인이 셔소임으로 참예온즉,

증인 김 방지거 드러오매 당신이 을 분부신즉 젼과 치 허원여 왈 텬쥬와 밋 이 거륵신 셩경이 나이러시 도아 주쇼셔. 아멘.

후에 문을 닷고 무뎨목을 내여 을 다시 온즉

 

가히 공경五十三 홍베드루

五十四 홍바로 형뎨

 

十一 됴목대로 무즉 답왈, 죄인은 홍베드루 홍바로 형뎨보지 못엿시나 말은 닉이 듯, 명문거죡이라 그 조부 홍락민이 신유년 군난에 유쥬 치명고 형뎨 포셔 살며 열심 슈계고 덕망잇인 고로 회쟝 소임을 맛핫더니 그 모든 교우들이 착고 셩교에 타당으로 닐코내다

十二 됴목대로 무즉 답왈, 년에 경포교들이 려와 형뎨잡아다가 서울노 올닌 말은 드럿시나 다 졍은 모로내다

二十三 됴목대로 무즉 답왈, 죄인이 말 듯기형뎨 죵시 불굴야 결안후 참슈 치명말만 셰히 드럿내다

二十四 됴목대로 무즉 답왈, 형뎨 치명후에 교우들이 신톄  왜고에 장지내엿시나 칩고 히 언밤에 몰내 장 고로 흘 깁히 파지 안코 엿게 뭇은지라, 교우들이 공묘야 다시  죄인이 현갸로와 최비리버와 다교우와 가지로 가셔 조곰 파 본즉 손가락 썩은 거시 드러나지라 다시 깁히 파뭇엇시나 지금은 분묘 모로내다

 

회차 96

쥬의 일홈을 인야 아멘.

이 공번된 문셔로 뭇사이 알기오쥬 예수 강후 일쳔팔팔십년 양 十二시 초 乙酉 九初五일 교종 네오 뎨십삼위 팔년에 됴션 젼교신부 박위도리ㅗㅣ 교화황과 쥬교의 명을 밧와 긔와 병오년 치명 일긔 기로 서울 난동 큰에 좌뎡시매 죄인이 셔소임으로 참예온즉,

젼에 쳥던 증인 니베드루 드러오매 당신이 진실 비밀 졍을 누셜치 아니기로 을 분부신즉 무릅고 텬쥬 셩경에 손을 혀 허원여 왈,

내가(니베드루) 내 압희 잇거륵신 텬쥬 셩경에 손을 혀 무과 찰고됴목로 진실말을 기로 오니,  누셜치 아니,  말과 긔 픔달게던지 도모지 드러내지 말기로 허원, 그러치 아니면 죄와 즉시 당기졀벌에 걸닐 거시며, 림죵 시 외에 고샤죄지부의 읏듬이라도 샤지 못, 홀노 교화황이 샤실 줄노 알고 이러케 허원노니 텬쥬와 밋 이 거륵신 셩경이 나이러시 도아 주쇼서. 아멘.……

五十三홍벨베두아와 五十四홍바로 형뎨서울 명가 거죡이온, 그 조부신유년에 치명후로 가산이 졈졈 탕매 형뎨 츙쳥도 포로 이야 농업으로 간곤이 살며 형뎨 열심히 셩교 홍바회쟝 소임을 당야 도리 강논도 잘며 영 셰도 만히 엿다 던 말을 긔 일가 홍요셉의게 드럿, 구월에 형뎨 가지로 잡히여 서울 포텽으로 드러오죄인이 친히 보앗오나 형벌과 문목 졍은 모로굴치 아니으로 이형조 엿더니 후에 드즉 참슈 치명 내다

 

회차 99

쥬의 일홈을 인야 아멘.

이 공번된 문셔로 뭇사이 알기오쥬 예수 강후 일쳔팔팔십년 양 十一初二丙戌 十初七일 교종 네오 뎨십삼위 구년에 됴션 젼교신부 박위도리ㅗㅣ 교화황과 쥬교의 명을 밧와 긔와 병오년 치명 일긔 기로 서울 졍동 본에 좌뎡시매 죄인이 셔소임으로 참예온즉,

젼에 쳥던 증인 최베드루드러오매 당신이 진실 비밀 졍을 누셜치 아니기로 을 분부신즉 무릅고 텬쥬 셩경에 손을 혀 허원여 왈,

내가(최베드루) 내 압희 잇거륵신 텬쥬 셩경에 손을 혀 무과 찰고됴목로 진실말을 기로 오니,  누셜치 아니,  말과 긔 픔달게던지 도모지 드러내지 말기로 허원, 그러치 아니면 죄와 즉시 당기졀벌에 걸닐 거시며, 림죵 시 외에 고샤죄지부의 읏듬이라도 샤지 못며 홀노 교화황이 샤실 줄노 알고 이러케 허원노니 텬쥬와 밋 이 거륵신 셩경이 나이러시 도아 주쇼서 아멘.

후에 문을 닷고 무뎨목을 내여 즉시 을 시쟉……

五十三홍베드루와 五十四홍바로 형뎨포 사이온 즁 교우오 신유 풍파 브터 그 집에셔 여러히치명엿시며, 형뎨 다 회쟝 소임을 맛하 타당이 봉고 슈계 범졀에 독실다가 긔군난에 치 잡히여 서울 좌포텽으로 와 갓첫더니, 이형조매 형판 홍셕조베드루와 팔촌이라, 아모조록 교 식히랴고 혹독히 형벌나 오히려 다교우보다 여나게 텬쥬증거며 견의야 불굴니 나죵에 결안야 형뎨 다 치명엿시니, 베드루 로 몬져 법쟝 나갈말노 쇼 며 쥬모 신셩갈 길이 밧부다 며 나죵으로 참슈 치명내다

 

4) 󰡔일성록󰡕

 

헌종 기해 1211

사학 죄인……홍병주는 홍낙민을 조부로, 홍재영을 숙부로 두었으며, 제멋대로 법(교리)를 전하여 사람들을 미혹시킨 것이 아주 심하였습니다.

邪學罪人……洪秉周 則以樂敏爲祖 以梓榮爲叔 傳法有自蠱惑尤甚

 

헌종 기해 1216

사학 죄인 홍영주는 요사한 (교회) 서적과 사악할 술법(교리)을 가정의 학문이라고 스스로 일컬었으며, 마귀 족자(즉 상본)와 추악한 근본(즉 서적과 성물)들을 천지를 주재하는 형상이라고 무함하며 날조하였습니다. 극형을 달갑게 여기고 죽기를 다짐하면서 후회함이 없었습니다.

邪學罪人洪永周 則妖書邪術 自稱家庭之學 魔簇醜本 誣捏主宰之像 甘心刑辟 矢死無悔

 

헌종 기해 1227

형조에서 아뢰기를, “사학 죄인 박종원(朴宗源, 아우구스티노), 손소벽(孫小碧, 막달레나), 이인덕(李仁德, 마리아), 권진이(權珍伊, 아가타), 이성례(李聖禮, 마리아), 이경이(李璟伊, 아가타), 홍병주 등을 오늘 사장(沙場, 즉 당고개)에서 참수에 처하였다고 하였다.

該曹啓言 邪學罪人朴宗源孫女小碧李女仁德權女珍伊李女聖禮李女璟伊洪秉周等 當日沙場處斬

 

헌종 기해 1228

형조에서 사학 죄인 홍영주이문우(李文祐, 요한)최영이(崔榮伊, 바르바라) 등을 참수에 처하고 아뢰었다.

秋曹 以邪學罪人洪永周李文祐崔女榮伊等處斬 啓

4. 병인박해 이후의 여사울 출신 순교자

 

<범 례>

치명일기 : 󰡔치명일기󰡕, 서울교구, 1895. * 번호는 󰡔치명일기󰡕 수록 일련 번호.

증 언 록 : 드브레 주교 정리,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필사본),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한국교회사연구소, 1987.

* 번호는 필사본의 정리 번호.

치명사적 : 󰡔병인(박해)치명사적󰡕(필사본), 절두산순교기념관 소장. * ‘치명사적 23-45’󰡔병인치명사적󰡕 23, 45을 말함.

 

성명(세례명)

출신지

거주지

순교지

순교 형태

순교 연월일

관련 기록

비 고

김준명

 

여사울

공주

미상

1866

치명사적 1-4 / 증언록 3

 

빈무관

내포

여사울

공주

미상

186611

치명사적 1-65 / 증언록 55

 

박의서(사바)

수원 걸매

여사울

수원

교수

186788

(혹은 3, 62)

치명사적 11-50, 24-12 / 치명일기 387/ 증언록 163

회장

박원서(마르코)

수원 걸매

여사울

수원

교수

186788

(혹은 3, 51)

치명사적 1-34, 11-50 / 치명일기 388/ 증언록 27, 163

박의서 동생

이 마리아

수원 걸매

여사울

수원

 

186788

(혹은 3)

치명사적 24-12 / 증언록 163

박원서 부인

박익서

수원 걸매

여사울

수원

교수

186788

(혹은 3, 45)

치명사적 11-50, 24-12 / 치명일기 389/ 증언록 163

박의서 동생

김영지

내포

여사울

수원

미상

18713

치명사적 1-65 / 증언록 55

 

이선경(바오로)

여사울

평택

군문리

서울

미상

1871

(혹은 1867)

치명사적 1-31, 2-134 / 치명일기 256/ 증언록 25, 135

 

1) 병인년(1866) 순교자 : 2

 

(1) 김준명

치명사적, 1-4

김준명이는 베드로7촌이다. 예산 여술(즉 여사울) 살더니 병인년에 본읍 포교에게 잡혀가 배교하고 나와 살며 배교하고 나옴을 원통하다 말하더니, 재차 공주 포교에게 잡혀 치명하였으나 사정은 모르노라.

증언록, 3: 치명사적, 1-4와 동일.

 

(2) 빈무관

치명사적, 1-65

죄인 고산 한대골 김 요한이가.

빈무관이는 본래 내포 사람으로 천안 여사울 살더니, 병인년 10월에 본읍 포교에게 잡혀갈 때 그 잡힌 것은 죄인이 보았고, 본읍에서 15일 후에 공주로 이수하여 그 치명함은 죄인이 보지 봇하고 여사울 교우 백청여에게 들었나이다. 이 백청여는 죽었느니라. 때는 병인 11월이요, 나이는 40여 세.

증언록, 55: 치명사적, 1-65와 동일

 

2) 정묘년(1867) 순교자 : 4

 

(1) 박의서(사바)

치명일기, 387

회장. ()의서는 3형제 중 장남이다. 두 아우와 함께 유다스 김영전()의 고발로 잡혀 수원에서 치명하니, 나이 62세요, 때는 정묘 3월이었다.

치명사적, 11-50

수원. 박의서원서익서니 3형제이다. ()의서는 본래 수계가 착실하여 회장으로 생활하면서 동네 교우에게 이익을 많이 받게 하였다. ()익서도 좋은 사람으로 지냈다. ()원서는 본래 태중 교우로 마음이 우람하여 수계를 잘못하고 노름도 약간 하고 섯탈구탈 지냈기 때문에 그 형이 항상 걱정으로 살았다.

병인 풍파를 당하여 3형제가 함께 잡혀 수원으로 올라가면서 ()원서가 말하되 내가 평생에 천주를 공경함이 진실하지 못하였는데, 오늘 주께서 나를 부르셨다하며, 즐겁게 장차(將差)에게 말하기를 나를 이번에 올라가면 졸연치 말고 바로 죽여주면 우리 주모께로 가서 살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형님과 아우를 보고 권면하거늘, ()의서는 그 아우가 그 전에 한 일들을 생각하고 마음에 즐거움을 이기지 못하면서 자기 마음에는 입을 열고(배교한다 말하고) 살 생각이 있더니, 동생의 모양을 보고 마음을 깨달아 자기도 죽기로 작정하고 아우를 도리의 말로 풀어 이르기를 동생 들어보소. 우리 3형제가 함께 올라가 위주치명하자하였다.

조금도 변개함이 없이 3형제가 수원으로 올라가니, 영장이 문 왈 네가 천주학을 하느냐?” “과연 하나이다.” 그때는 한다하면 문초 없이 내어 죽이고, ‘안 한다하면 살릴 때다. 두말 없이 내어 바로 조사(早死) 치명하니, 나이는 ()의서가 60이요, ()원서는 51세요, ()익서는 45세였다. 때는 강생 후 1866(1867년의 잘못) 경묘(정묘의 잘못) 3월이었다. 이들 3형제 잡아죽이기는 유다스 김영진이가 잡아죽였다.

치명사적, 24-12

박 회장 의서 사바와 동생 (박원서) 마르코와 ()익서와 마르코의 아내 이 마리아 네 사람은 본래 수원 걸매 사람으로, 군난을 피하여 예산 여사울로 가서 살더니, 정묘 4월에 수원 포교에게 잡혀 수원으로 가서 동일 치명하니, 때는 정묘 8췅 초8일이요, 시체를 거둔 이는 지금 함영 용왕동 사는 박 회장 바오로로, (박의서) 사바의 당질이었다.

증언록, 163: 치명사적, 24-12와 동일

 

(2) 박원서(마르코)

치명일기, 388

()의서의 아우이다. 형제가 함께 잡혀 치명하니, 나이 51세였다.

치명사적, 1-34

죄인 고산 한대골 김 요한이가.

󰡔치명일기󰡕 388번에 있는 박원서. 수원 포교에게 잡혀 갈 때 죄인이 친히 보았고, 수원으로 가서 치명함은 그 본동 외교인 이중헌에게 들었습니다. 이중헌은 죽은 사람.

치명사적, 11-50 : 박의서(사바)의 순교 행적과 동일

치명사적, 24-12 : 박의서(사바)의 순교 행적과 동일

증언록, 27: 치명사적, 1-34와 동일

증언록, 163: 박의서(사바)의 순교 행적과 동일

 

(3) 이 마리아

치명사적, 24-12 : 박의서(사바)의 순교 행적과 동일

증언록, 163

박 사바의 형수 이씨는 본래 서울 사람으로 수원 걸매로 시집와 살더니, 무진년에 본읍 포교에게 잡혀 본읍으로 가 옥중에서 병들어 죽으니, 나이는 대개 38세였다. 지금 함열 용왕동 박 회장 바오로의 숙모였다. 일기에 불기(不記).

 

(4) 박익서

치명일기, 389

()의서의 아우이다. 두 형과 함께 잡혀 치명하니, 나이 45세였다.

치명사적, 11-50 : 박의서(사바)의 순교 행적과 동일

치명사적, 24-12 : 박의서(사바)의 순교 행적과 동일

증언록, 163: 박의서(사바)의 순교 행적과 동일

 

3) 신미년(1871) 순교자 : 2

 

(1) 김영지

치명사적, 1-65

죄인 고산 한대골 김 요한이가.

김영지는 본래 내포 사람으로 천안 여사울 살더니, 신미년 3월에 수원 포교에게 그 아내와 한가지로 잡혀 수원으로 가서 치명할 때, 그 잡히던 사연은 영지의 모친 김 아가다, 죽은 사람 김 아가다가 친히 보았고, 그 치명함은 아가다와 죄인이 보지 못하였으나, 그 치명한 때는 신미년 3월이요, 나이는 50여 세.

증언록, 55: 치명사적, 1-65와 동일

 

(2) 이선경(바오로)

치명일기, 256

본래 홍주 마수머리 살다가 신창 땅 형제 방축 주막에 이사하였더니 홍주 포교에게 잡혀서 서울로 와 치명하니라. 50세요, 때는 신미년이라.

치명사적, 1-31

이 바오로. 자는 선경. 본업은 농업.

본래 천안 여사울 살다가 평택 군문리로 우거하더니, 병인 군난을 당하여 거리를 바장이다(부질없이 오락가락함)가 상처하고 거처가 없던 중 노인과 의남매를 맺고 서로 의탁하며 떡장사로 생명을 하더니 신창 옹원 주막에서 그 아내를 위하여 연옥도문(연옥 영혼을 위한 기도)을 하다가 경포에게 잡혀 서울로 가서 치명하였다 하더라. 태어난 해는 갑신(1824).

이 사정을 아는 사람은 홍주 엄섬이 사는 이 요셉, 자는 경우. 잡힌 때는 정묘 2월 그믐께라 하더라.

치명사적, 2-134

서울 이선경. 본래 홍주 마수머리 살더니, 신창 형제 방축 주막에 이사하여 살다가 홍주 포교에게 잡혀 서울로 와 대개 신미년에 치명하니, 나이는 50여세 올시다. 증인 종현 성당(현 명동 성당)에 있는 이 시몬올시다.

증언록, 25: 치명사적, 1-31과 동일.

증언록, 135: 치명사적, 2-134와 동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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