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박해기의 신리(거더리) 공소와 순교사
1. 머 리 말
합덕의 新里聖地(옛 新里公所)는 당진의 지방사에서나 한국 천주교사에서 볼 때, 다음과 같이 몇 가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곳으로 알려져 왔다.
첫째, 신리 성지는 내포 천주교회 창설 초기에 천주교 신앙이 전파되면서 박해기 내내 이 지역의 교회사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 敎友村(비밀 신앙 공동체로서의 ‘카타콤브’)으로 자리를 잡아왔다.
둘째, 신리 성지는 제5대 조선교구장 다블뤼(A. Daveluy, 安敦伊, 1818~1866) 성인 주교가 오랫동안 거처하던 내포 지역의 사목 중심지 가운데 하나요, 다블뤼 주교가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과 조선 순교사 비망기를 비롯하여 초기의 한글 교리서를 저술하고 이를 목판으로 간행한 장소였다.
셋째, 신리 성지는 孫子善(토마스, ?~1866) 성인이 태어나 자란 곳으로, 박해가 계속되는 동안 수많은 순교자를 탄생시킨 ‘순교자들의 본향(못자리)’인 동시에 순교자들의 시신이 안장된 ‘순교자들의 영원한 안식처(묘자리)’였다.
이처럼 신리 성지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곳이다. 다만, 두 번째의 의미 중에서 ‘다블뤼 주교가 오랫동안 거처했던 신리’라는 사실과 ‘다블뤼 주교가 순교사나 교리서를 저술하고 간행한 장소가 신리’라는 문제는 더 면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2. 신리(거더리) 교우촌의 형성과 공소 설정
현재의 행적 구역상으로 신리는 당진군 합덕읍 신리(성지는 신리 151번지)이고, 거더리는 예산군 고덕면 상궁리이다. 규장각의 ‘1872년 지방도’ 중 <홍주 지도>에 따르면, ‘신리’는 조선 후기까지 홍주군 合南面의 새말[新里]․下開(혹은 下介)와 合北面의 섬말[島村] 등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러다가 1914년의 행정 구역 개편 때 지금과 같이 합덕 신리로 합쳐지게 되었는데, 교회사에서 말하는 신리는 이 중에서 새말을 말하며, 지금의 신리와 구분하여 원신리(元新里)라고도 부른다.
다음으로 ‘거더리’는 1872년의 <덕산군 지도>에 나오는 居等面 下里의 다른 이름이다. 이 하리가 1914년의 행정 구역 개편 때 거등면의 上里․傍里․宮里 등과 합쳐져 지금의 상궁리가 된 것이다. 이처럼 행정 구역상으로는 거더리와 신리가 엄격하게 구분되어 왔지만, 실제로 두 마을은 한 마을이나 다름이 없을 정도로 인접해 있다.
교회 기록을 보면, 손자선(토마스) 성인의 출신지는 ‘홍주 거더리’로 나온다. 또 1866년의 丙寅迫害 순교자들에 대한 기록, 특히 孫氏 집안의 순교자들 기록에는 자주 ‘홍주 신리 출신’이라고 나오며, 다블뤼 주교 관련 기록에는 1866년 3월 11일(음력 1월 25일)에 체포된 장소가 ‘홍주 거더리’로 나온다. 반면에 당시의 신자들은 다블뤼 주교가 거처하다가 체포된 곳을 ‘홍주 신리’ 혹은 ‘홍주 거더리’로 증언하거나 ‘신리 거더리’ 혹은 ‘거더리 신리’, ‘신리라고도 하고 거더리라고도 하는 큰 공소’, ‘그더리(거더리) 다블뤼 주교의 공소 주인’, ‘다블뤼 주교의 신리 본 공소’, ‘신리에 있던 다블뤼 주교의 복사 黃錫斗(루카, 1812~1866)’ 등으로 증언하였다. 이처럼 박해기의 신자들이 신리와 거더리를 거의 구분하지 않고 부르게 된 이유는, 행정 구역상의 구분과는 달리 하나의 교우촌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신리와 거더리는 이처럼 박해기의 교우촌이었으며, 훗날 사제들의 방문과 성사 집전의 결과 공소로 설정되기에 이른다. 그러면 신리와 거더리 마을에 천주교 신앙이 전파된 시기는 언제였을까?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 시기는 1785년 초 ‘내포의 사도’라 불리는 李存昌(루도비코 곤자가, 1759~1801)에 의해 여사울(현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의 천주교 신앙 공동체, 즉 내포 천주교회가 설립된 직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신리와 지척인 홍주 鷹井里(현 합덕읍 성동리)에 거주하던 원시보(야고보, 1730~1799)와 그의 사촌인 원시장(베드로, 1732~1793)이 1789~1790년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열심히 이를 실천했다는 기록과 그들 형제가 이웃에게 교리를 전파한 결과 30가족 이상이 천주교에 입교하였다는 기록에서 미루어 알 수 있다. 당시의 상황에서 볼 때, 원시보․시장 형제는 이존창에게서 교리를 배웠을 것이고, 신리(거더리)와 그 인근 지역에 처음 천주교 신앙을 전한 사람은 원시보․시장 형제였던 것 같다.
한편 1839년의 己亥迫害로 체포되어 서울에서 순교한 손경서(안드레아, 1799~1839)는 고향에서 부모로부터 신앙을 물려받았다고 하는데, 그의 고향은 홍주 신리이거나 이와 이웃한 지역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손경서는 다음에 언급한 신리 출신 손자중(바오로)의 부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한편 손경서의 당질로 거더리 출신인 손자선 성인도 이곳의 3대째 천주교 신자 집안 태생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적어도 1801년의 辛酉迫害 이전, 다시 말해 1790년대에는 신리(거더리) 지역의 주민들이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임으로써 일찍부터 천주교 교우촌이 형성되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훗날의 순교사에서 볼 때, 신리(거더리) 교우촌의 핵심 가정은 손자선 성인의 집안 즉 ‘손씨 집안’이었다.
신리(거더리) 교우촌이 공소로 설정된 것은 기해박해 이전이었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1868년 윤4월에 체포되어 좌포도청에서 문초를 받은 신리 출신의 손자중(바오로, 1817~1868)이 “8세 때 부친에게서 교리를 배웠으며, 11세(21세의 잘못인 듯) 때 羅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바오로’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그리고 21세(23세의 잘못인 듯) 때의 기해년(1839년) 옥사로 부친(손경서?)이 체포되어 참수되었다”고 진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1836년 1월 13일(음력 1835년 11월 25일) 조선에 입국한 첫 프랑스 선교사 모방(P. Maubant, 羅伯多祿, 1803~1839) 성인 신부가 이 지역을 방문하고 신자들에게 성사를 줌으로써 신리(거더리) 교우촌이 공소로 설정된 것이다.
3. 다블뤼 주교의 사목 중심지 신리(거더리)
신리(거더리) 공소의 이름이 다시 교회사의 기록에 나타나는 것은 1860년 성탄절이다. 이때 페롱(S. Féron, 權) 신부가 홍주 거더리 공소를 방문하고 이곳에 모이는 신자들에게 성사를 준 것이다. 그러나 페롱 신부 이전에 이미 메스트르(A. Maistre, 李, 1808~1857) 신부가 이 지역에 사목 중심지를 두고 있었으므로, 신리(거더리) 공소가 재건된 것은 그 이전이었을 가능성이 많다.
1852년 8월에 입국한 메스트르 신부는 조선어를 배우자마자 ‘성모승천구역’으로 불리는 지역, 즉 충청도 해안에서 경상도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때 그는 신리 이웃인 덕산의 황모실(지금의 예산군 고덕면 호음리)에 사목 중심지를 두고 활동하다가 1857년 12월 20일에 선종하여 황모실에 묻혔다. 그리고 메스트르 신부가 선종한 뒤에는 페롱 신부가 성모승천구역을 맡게 된다. 메스트르 신부의 활동 기간 동안 신리(거더리) 교우촌은 메스트르 신부의 사목 방문을 받았음 것임에 거의 틀림없다. 또 페롱 신부가 1860년 성탄절에 거더리 공소를 방문한 이유는 메스트르 신부가 선종한 이후 이 지역이 자신의 사목 관할 구역 안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1861년 10월에는 제4대 조선교구장 베르뇌(S. Berneux, 張敬一, 1814~1866) 성인 주교에 의해 전국이 8개의 지역 본당으로 다시 구분되는데, 이때 같은 해 4월에 입국하여 조선어를 배우던 랑드르(J. M. Landre, 洪, 1828~1863) 신부가 ‘성모왕고구역’으로 이름이 붙여진 하부 내포(충청도 해안) 지역을 담당하게 되고, 다블뤼 주교는 ‘성모성탄구역’으로 이름이 붙여진 상부 내포(충청도 홍주와 내륙) 지역을 담당하게 된다. 랑드르 신부는 이후 덕산 황모실에 사목 중심지를 활동하다가 1863년 9월 15일에 선종하여 그곳에 안장되었다. 따라서 1861~1863년 사이에 신리(거더리) 공소는 일단 랑드르 신부의 사목 관할 아래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한편 1845년 10월 조선에 입국해 활동하던 다블뤼 신부는 1854년 무렵부터 조선의 풍습과 역사, 천주교 순교자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 관련 자료들을 수집하기 시작하였고, 1856년에는 교구장 베르뇌 주교로부터 순교자 전기의 편찬을 위임받으면서 본격적으로 교회사와 순교 자료 수집에 전념할 수 있었다. 이어 1857년 3월 25일에는 계승권을 가진 보좌 주교로 서품되었으며, 이후로는 충청도 廣川에 거처를 두고 조선 순교사 자료 수집과 집필에 몰두하였다. 그 결과 다블뤼 주교는 1859년까지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즉 <한국 주요 순교자 선정> 및 <보유편>)을 완료하여 파리로 보내고, 1860년에는 조선사 서설 비망기와 조선 순교사 비망기를 완성하여 1862년 10월 홍콩의 리브와(Libois) 신부를 통해 파리외방전교회 본부로 발송할 수 있었으며, 이 밖에도 주요한 기도서와 교리서들을 한글로 편찬․저술하였다.
그 동안 다블뤼 주교는 1857년 12월 메스트르 신부의 선종으로 3개월 동안 교우촌을 순방한 뒤 광천으로 돌아와야만 했고, 1861년에는 崔良業(토마스, 1821~1861) 신부의 선종으로 경상도 중부와 남부 지역을 맡아 순회해야만 하였다. 그리고 1861년 10월에는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성모성탄구역’(홍주와 내륙 지역)을 담당하면서 본격적으로 자신의 사목 관할 구역 안에 있는 교우촌 순방에 나서게 되었다. 또 1863년 9월에 랑드르 신부가 선종한 뒤로는 그의 사목 관할 구역까지 맡아 순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사실은 신리 출신으로 1868년에 순교한 朴永信(안토니오, 1826~1868)이 “5년 전(1863년) 손자선의 권유로 안 주교를 손자선의 집(홍주 거더리)에서 뵙고 세례를 받았다”고 한 데서도 알 수 있다.
다만, 그 당시까지 다블뤼 주교의 사목 중심지가 정확히 어디였는지는 알 수 없다. 1854년 자료 수집을 시작할 무렵에는 둠벙이 공소(현 공주군 신풍면 조평리)를 사목 중심지로 삼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며, 1857년을 전후해서는 광천에 거처하였다. 그러나 1861년 이후의 사목 중심지에 대해서는 일말의 기록도 찾아볼 수 없다.
다블뤼 주교의 1862년 10월 서한을 보면 “휴식은 불가능하고 정착해 있을 만한 장소가 한군데도 없다”고 한 내용이 나타난다. 따라서 그는 정주형 사목 중심지를 정해 놓고 있던 것이 아니라 이곳 저곳의 교우촌을 옮겨다니면서 사목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다블뤼 주교는 자신의 주요한 성물과 자료들, 연구서들을 어느 교우에게 맡기지 않으면 안되었는데, 1859~1860년의 庚申迫害 때 이 물건들이 약탈당한 뻔한 일이 발생하였다. 이어 1863년 봄에는 주교댁에 화재가 발생하여 조선 순교자들의 행적에 대해 조선어와 한문으로 씌어진 원본들을 담은 상자가 소실되었지만, 다행히도 다블뤼 주교의 전교 회장 중 한 사람이 그 원본들만은 다른 집으로 미리 옮겨놓아 화재를 면할 수 있었다. 1865년에도 다블뤼 주교는 다시 한번 화재를 당해야만 했다. 주교댁 이웃의 불이 옮겨 붙어 손실을 입게 된 것이다.
위에서 1863년 화재 때의 주교댁이 어디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1865년 화재 때의 주교댁은 ‘방사골’(Pang-sa-kol, 혹은 방아사골)에 있었던 것이 거의 확실하다. 이와 관련된 기록이 1866년 다블뤼 주교가 체포될 때의 상황에서도 발견된다.
포졸 몇 명은 베르뇌 주교의 집에서 압수한 돈과 귀중품들을 떠올리고는 다블뤼 주교님께 재물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주교님은 ‘나는 항상 재물이 거의 없고, 그나마 내가 가지고 있던 것이 몇 달 전에 내 작은 오두막이 완전히 탈 때 타버렸소’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러자 다른 포졸들이 ‘그래, 맞아. 사실 우리도 아콘(Acône, 다불뤼 주교의 주교 명의) 주교님이 방사골(Pang-sa-kol)에서 큰 화재를 당하셔서 재산을 모두 잃었다는 얘기를 들었지’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다블뤼 주교는 두 차례의 화재를 당하면서 그때마다 자신의 거처가 있는 교우촌으로는 갈 수 없었을 것이다. 화재 사실이 인근에 널리 알려져 위험이 따를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다블뤼 주교는 1865년 10월의 서한에서 “화재가 난 곳으로는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다”고 했으며, 따라서 “저의 습지에서 여름을 보낼 숙소를 하나 찾아보려고 내려가고 있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저의 습지’는 다블뤼 주교의 사목 관할 구역인 내포의 낮은 지역을 말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곳이 바로 신리(거더리) 지역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다블뤼 주교가 신리(거더리) 지역에 새 거처를 두고, 이곳을 사목 중심지로 삼은 것은 1865년 10월 이후였음이 분명하다.
이와 관련하여 병인박해 때 체포된 신리 출신의 孫汝一(필립보, 1847~1868)․孫如會(필립보, 1848~1868)․孫子汝(갈리스토, 1830~1868) 등은 “을축년(1865년)에 안 주교에게 세례를 받았다”고 진술했으며, 孫致景(안드레아, 1817~1868)은 “병인년(1866년) 1월에 안 주교와 민 신부, 吳(오메트르) 신부를 만났고, 안 주교에게 세례를 받았다”고 진술하였다. 반면에 裵成魯(안드레아, 1830~1868)는 “25세(1854년) 때 황석두의 집에서 安(다블뤼) 주교에게 세례를 받고, 뒤에 閔(위앵)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받았다”고 하는데, 그가 진술한 시기(1854년)에는 문제가 있지만, 황석두의 집(신리로 추정됨)에서 다블뤼 주교에게 세례를 받은 사실만은 분명한 것 같다.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박해기의 신자들은 다블뤼 주교가 체포된 장소에 대해 신리 혹은 거더리로 증언하고 있다. 두 마을이 하나의 교우촌으로 인식될 정도로 인접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증언과 함께 ‘신리 본 공소’라는 증언도 있고, 주교의 복사인 황석두 성인이 거처하던 곳이 ‘신리’라는 증언도 있다. 따라서 굳이 신리와 거더리를 구분하자면, 다블뤼 주교는 평상시에 신리 본 공소집에 거처해 왔지만, 박해가 일어날 당시에는 거더리 공소집에 머물다가 체포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다블뤼 주교가 이곳 신리(거더리)를 최후의 사목 중심지로 삼아 활동한 기간은 1865년 10월부터 다음해 3월 11일(음력 1월 25일)까지 5개월 동안이었다.
4. 박해와 신리(거더리) 출신의 순교자
신리(거더리) 지역의 첫 순교자는 제2대 조선교구장 앵베르(L. Imbert, 范世亨) 성인 주교의 복사를 하다가 1839년의 기해박해로 체포되어 순교한 손경서(안드레아)를 꼽을 수 있다. 그러나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그의 고향을 신리로 단정하는 데는 어려운 점이 있다. 또 홍주나 덕산 출신으로만 나오는 순교자들 가운데서도 신리 출신이 있을 가능성이 있지만, 기록으로 이를 확인할 수는 없다. 정확히 신리(거더리) 출신의 순교자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은 1866년의 병인박해 때였다.
충청남도의 병인박해는 거더리의 손치호(니콜라오) 회장 집에 있던 다블뤼 주교가 체포되면서 시작되었다. 이어 세거리(현 당진군 합덕읍 대합덕리의 삼거리인 듯)에서 덕산 쇠재(현 예산군 봉산면 금티리)로 피신해 있던 위앵(M. L. Huin, 閔, 1836~1866) 성인 신부, 자신의 거처인 수원 샘골로 돌아가지 않고 소덜 교우촌(현 당진군 합덕읍 점원리의 서더리인 듯)에 머무르던 오메트르(P. Aumaitre, 吳, 1837~1866) 성인 신부, 다블뤼 주교의 복사 황석두 성인 등이 포졸들에게 자수한 뒤 다블뤼 주교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었으며, 여기에 제천에서 체포되어 온 배론 신학교의 집 주인인 장주기(張周基, 요셉) 성인이 추가되었다. 이들 5명은 1866년 3월 30일(음력 2월 14일) 보령 水營 서문 밖에 있는 渴馬津頭(일명 갈매못, 현 보령시 오천면 영보리)에서 순교하였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4명의 순교 성인은 신리(거더리)에서 거주하거나 활동하기는 했지만, 신리(거더리) 출신은 아니다. 따라서 신리(거더리) 출신의 첫 순교자는 1866년 3월 30일(음력 2월 14일) 공주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한 손자선(토마스) 성인으로 보아야 한다. 이후 병인박해가 1870년대 초까지 이어지면서 신리(거더리) 교우촌에서는 수많은 순교자들을 탄생시키게 되는데, 이를 종합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신리(거더리) 관련 성인 현황>(5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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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세례명) |
거처(체포 장소) |
순교일(나이) |
순교 장소(형식) |
비 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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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블뤼(安 안토니오) |
홍주 신리(거더리) |
3월 30일(48세) |
갈마진두(군문효수) |
제5대 조선교구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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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앵(閔 루카) |
홍주 세거리(덕산 쇠재) |
″ (30세) |
″ |
프랑스 선교사 |
|
오메트르(吳 베드로) |
수원 샘골(덕산 소덜) |
″ (29세) |
″ |
″ |
|
황석두(루카) |
연풍(홍주 신리) |
″ (53세) |
″ |
다블뤼 주교 복사 |
|
손자선(토마스) |
홍주 거더리 |
3월 30일(28세) |
공주 옥(교수) |
서울 순교자 손자여의 아우. |
<신리(거더리) 출신 병인박해 순교자 현황>(37명)
① 서울․경기 순교자(23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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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세례명) |
거처(체포 장소) |
순교일(나이) |
순교 장소(형식) |
비 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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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행(필립보) |
홍주 거더리 |
1867년 9월경(40세) |
수원(미상) |
김양범의 아들 |
|
김양범(빈첸시오) |
원주(홍주 거더리) |
″ (64세) |
″ |
1815년 원주 순교자 김강이(시몬)의 차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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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永信(안토니오) |
용인(홍주 신리) |
1868년 윤4월경(43세) |
서울 좌포청(미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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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춘화 |
덕산 섬말(신리) |
1870년(미상) |
서울(미상) |
섬말 : 신리 島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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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충만 |
충청도(덕산 섬말) |
1868년(미상) |
″ |
박 마티아의 사촌 |
|
박충복 내외(2명) |
충청도(덕산 섬말) |
1868년(미상) |
″ |
″ |
|
성명(세례명) |
거처(체포 장소) |
순교일(나이) |
순교 장소(형식) |
비 고 |
|
박태양 |
충청도(덕산 섬말) |
1868년(미상) |
″ |
″ |
|
박 마티아 |
충청도(덕산 섬말) |
1868년(미상) |
서울(미상) |
박충만의 사촌 |
|
裵成魯(안드레아) |
홍주 신리 |
1868년(39세) |
″ |
|
|
백청여 |
대흥(홍주 신리) |
1869년(미상) |
서울(미상) |
|
|
손소사(손조이?) |
거더리(신창 찬우물) |
1867년(미상) |
서울(교수) |
다블뤼 주교 복사 |
|
孫汝一(필립보) |
홍주 신리 |
1868년 윤4월경(22세) |
서울 좌포청(교수) |
1839년 서울 순교자 손경서(안드레아)의 손자 |
|
孫如會(필립보) |
홍주 신리 |
1868년 윤4월경(21세) |
″ |
손자중(바오로)의 아들 |
|
孫子汝(갈리스도) |
홍주 신리 |
1868년 윤4월경(39세) |
서울 좌포청(미상) |
손자선 성인의 형. |
|
孫子仲(바오로) |
홍주 신리 |
1868년 윤4월경(52세) |
서울 좌포청(미상) |
손여도․여회의 부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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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致景(안드레아) |
홍주 |
1868년 윤4월경(52세)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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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치호(니콜라오) |
홍주 거더리 |
1868년 4월(미상) |
서울(수원) (미상) |
거더리 공소 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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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龜鉉(도미니코) |
청주(홍주 신리) |
1868년 6월경(65세) |
서울 좌포청(교수) |
최양업 신부의 사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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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흥여(루치아노) |
면천․신창(거더리) |
1868년 5월경(55세) |
″ (미상) |
세례명은 혹 ‘루치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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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성(요한) |
충청도(홍주 신리) |
1869년(미상) |
서울(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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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여 |
홍주 거더리 |
1866년(혹67년)(미상) |
서울(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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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 프란치스코 |
홍주 거더리 |
미상(미상) |
수원(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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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공주․홍주․해미 순교자(14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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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세례명) |
거처(체포 장소) |
순교일(나이) |
순교 장소(형식) |
비 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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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 그레고리오 (혹 필립보) |
연풍(홍주 거더리) |
1868년(혹67년)(63세) |
홍주(서울․수영) |
신 그리산도와 함께 순교 |
|
신 그리산도 |
덕산(홍주 거더리) |
1868년(혹67년)(51세) |
홍주(서울․수영) |
간 그레고리오와 함께 순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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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아드리아노 (혹 세바스티아노) |
신창(홍주 거더리) |
1866년(61세) |
홍주(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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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명(세례명) |
거처(체포 장소) |
순교일(나이) |
순교 장소(형식) |
비 고 |
|
손사준 |
홍주 신리 |
1867년(37세) |
″ |
손치호 회장의 조카 |
|
손사중 |
홍주 신리 |
1866년(47세) |
해미(교수) |
손치황(요한)의 재당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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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여도 |
홍주 거더리 |
1868년(32세) |
홍주(교수) |
서울 손자중의 장남 |
|
손자진 |
홍주 신리 |
1867년(46세) |
″ |
해미 손사중의 사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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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치양(孫京老, 사도 요한) |
홍주 거더리 |
1868년 5월(50세) |
갈마진두(참수) |
1839년 서울 순교자 손경서(안드레아)의 사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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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치황(요한) |
홍주 신리 |
미상(60세) |
해미(교수) |
공주 토마스의 부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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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마르첼리노 |
홍주 신리 |
1868년(49세) |
홍주(교수) |
홍주 손자진의 6촌 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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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아우구스티노 |
홍주 거더리(?) (덕산 강당리) |
미상(미상) |
″ |
혹 서울 손자여(갈리스토)의 부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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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정심(가브리엘) |
홍주 신리 |
1866년 11월(51세) |
해미(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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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안드레아 |
덕산(덕산 거더리) |
1869년(28세) |
공주(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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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성 |
홍주 거더리 |
1868년 7월(41세) |
홍주(옥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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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신리 사적지의 개발과 손자선 성인의 무덤
신리의 공소집은 박해의 와중에서 마을의 부호였던 박경래의 소유가 되었다. 그러나 이 집이 다블뤼 주교가 거처하던 바로 그 공소집이라는 사실은 오랫동안 지역 신자들 사이에서 전해져 왔던 것 같다. 그러므로 합덕 본당의 주임으로 재임하던 페랭(P. Perrin, 白文弼) 신부는 그 집의 역사적 의미를 새삼 확인하고는 1927년에 이 집을 매입하여 같은 해 5월 1일 서울교구 부주교로 서품된 라리보(A. J. Larribeau, 元亨根) 주교께 기념으로 봉헌하였다. 사실 당시까지도 박해 시절의 신리 공소집을 증언해 줄 만한 신자들이 분명히 생존해 있었을 것이므로 그 확인에는 큰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페랭 신부가 그때 매입하여 교회 소유로 이전한 것은 단지 공소집의 초가 건물만이었다. 대지는 여전히 박경래의 소유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곳이 한국 천주교회의 중요한 순교 기념지라는 사실을 알게 된 박경래가 대지 전부를 서울교구 천주교회 유지 재단에 기증하였고, 후에는 그 자신도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고 한다.
교회에서는 1954년의 성모 성년을 맞이하여 신리 공소집을 새로 단장을 한 뒤 공소 건물로 이용하게 되었다. 이때 벽․기둥․서까래․대들보․주춧돌은 원래 집에 있었던 것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이 공소집은 1964년에 다시 한번 수리를 하게 되는데, 당시에 기록한 상량문에는 “天主降生 1815年 嘉慶 21年 丙子 2月 18日 辰時 上樑 (1954年 祝聖), 1964年 3月 23日 修理, 新里公所, 人間眞理 在於永生”이라고 기록하였다 한다. 그러나 이 상량문에는 잘못된 내용이 있다. 1815년은 ‘가경 21년(병자)’이 아니라 ‘가경 20년(을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량문의 앞 부분, 즉 “천주 강생 1815년 가경 21년 병자 2월 18일 진시 상량”이라는 내용이 본래의 상량문에 있던 내용인지는 확실하게 알 수 없다. 아마도 “1954년 축성, 1964년 3월 23일 수리, 신리 공소, 인간의 진리는 영생에 있다”라는 뒷 부분의 내용과 같이 1964년에 다시 상량문을 기록하면서 잘못된 내용이 들어가게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한편 1972년 봄에는 예전에 손자선 성인의 선산(합덕읍 대전리 소재)이었던 장소가 과수원으로 개발되는 와중에 연고자 없는 32기의 묘가 발굴되었다. 이들 묘에서는 한결같이 목이 없는 유해와 묵주가 함께 나왔다고 한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신리(거더리) 출신의 순교자들은 대부분 참수가 아니라 교수형으로 순교하였으므로 ‘목이 없다’는 내용에는 의심이 간다.
다만, 손자선 성인은 공주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한 뒤 “그 시신이 경건하게 거두어졌다”고 하며, 칼래(N. A. Calais, 姜 니콜라오) 신부는 이에 대해 “손자선 토마스의 유해는 가족들에게 전달되어 거더리(신리) 인근의 ‘덕산 지방 말파동’(Mal-pa-tong)으로 불리는 곳에 안장되었다”고 정확하게 기록하였다. 이 ‘말파동’은 그 당시 손씨 집안의 땅(혹은 후대의 선산)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손자선 성인과 같이 신리 출신 순교자들의 시신이 거두어져 고향에 안장되었을 가능성이 많고, ‘묵주가 함께 나왔다’고 한 사실에서 볼 때 순교자와 관련성을 인정해도 좋을 것 같다. 아마도 32기의 묘는 손씨 집안의 순교자 묘이거나 박해기에 살던 손씨 가족들의 묘가 아닐까 생각된다. 실제로 신리(거더리) 지역에서는 ‘손자선 성인의 선산에 있는 십 수기의 묘는 손씨 가문의 치명자’라는 구전이 내려왔다고 한다.
1972년에 발굴된 32기의 유해는 당시의 신자들에 의해 약 1km 떨어진 합덕읍 대전리의 공동 묘역으로 이장되면서 6개의 봉분에 나뉘어 안장되었다. 32기의 유해들을 6개의 봉분에 합장한 이유는 각각의 유해를 구분하기 어려웠던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로부터 13년이 지난 1985년 4월에는 대전리 상개(대전리 120-8번지)에서 다시 14기의 무연고 묘가 발굴되면서 십자가와 함께 유해들이 나왔고, 이들의 유해도 대전리 공동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십자가와 함께’ 발굴되었다는 이들 유해도 손씨 집안의 순교자 묘이거나 박해기에 살던 가족들의 묘일 가능성이 있다.
6. 맺 음 말
첫째, 신리(거더리)는 1785년 내포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에 천주교 신앙이 전파된 박해기의 교우촌이요 내포 지역의 중요한 공소(신앙의 못자리) : 박해기의 신자들은 신리와 거더리를 거의 구분하지 않고 불러왔다. 비록 조선 후기의 행정 구역상으로는 신리(홍주군 합남면 새말)와 거더리(덕산군 거등면 하리)가 구분되어 있었지만, 두 마을이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인접해 있으므로 하나의 교우촌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이 합덕의 신리(거더리) 지역에는 일찍부터 천주교 신앙이 전파되어 1790년대에는 이미 손씨 집안을 중심으로 천주교 교우촌이 형성되어 있었으며, 이 교우촌은 1839년의 기해박해 이전에 프랑스 선교사 모방 신부에 의해 공소로 설정되었다.
신리(거더리) 공소는 이후 오랫동안 교회사의 기록에 나타나지 않다가 1860년 말에 다시 페롱 신부의 서한에 등장하게 된다. 그러나 신리(거더리) 공소는 그 이전, 즉 1852년 이후 덕산 황모실에 사목 중심지를 두고 활동하던 메스트르 신부의 사목 관할 구역 아래 들어가면서 그의 순방을 받게 된 것이 분명하다. 그러다가 1857년 말에 메스트르 신부가 선종하면서 페롱 신부의 사목 관할 구역 안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1861~1863년 사이에는 다시 랑드르 신부가 이 지역의 사목을 담당하게 되었다.
둘째, 신리(거더리) 공소는 제5대 조선교구장 다블뤼 성인 주교가 최후의 사목 중심지로 삼은 교우촌 : 제5대 조선교구장 다블뤼 주교가 신리(거더리)에 사목 중심지를 두고 활동한 것은 1865년 10월부터 다음해 3월 11일(음력 1월 25일)까지 5개월 동안이었다. 따라서 그가 순교 자료를 수집하고 한국 천주교회사와 순교사, 교리서를 집필한 장소는 신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1863년 랑드르 신부가 선종한 뒤 신리(거더리) 공소는 다블뤼 주교의 사목 관할 아래 들어간 것으로 생각된다. 다시 말해 1865년 10월 이전까지 다블뤼 주교는 사목 중심지를 다른 지역의 교우촌에 두고 있으면서 자주 신리(거더리) 공소를 순방해 왔던 것이다.
셋째, 박해기의 신리(거더리)는 순교자들의 고향이자 영원한 안식처 : 이곳 출신의 첫 번째 순교자는 1866년의 병인박해로 공주에서 순교한 손자선(토마스) 성인이다. 그에 앞서 1839년의 기해박해 때 서울에서 순교한 손경서(안드레아)의 고향이 정확히 이곳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손자선 성인 이후 신리(거더리)에서는 수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어 순교하는데, 기록에 나오는 숫자만도 서울․수원 순교자 22명, 공주․홍주․해미 순교자 14명 등 도합 36명에 이른다. 뿐만 아니라 1866년 3월 30일 보령 수영의 갈마진두(갈매못)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한 다블뤼 주교, 위앵 신부, 오메트르 신부, 황석두(루카) 회장 등 4명의 성인도 신리(거더리)에서 활동하거나 이곳과 깊이 연관되어 있는 순교자들이다.
손자선 성인은 공주에서 순교한 뒤 그 시신이 가족들에 의해 거두어져 거더리(신리) 인근에 있던 ‘덕산 지방 말파동’에 안장되었다. 마찬가지로 거더리(신리) 출신의 순교자들 중에는 후에 그 시신이 거두어져 살던 곳에 안장된 경우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대해서는 더 정확한 고증이 필요하겠지만, 순교자들의 무덤이 이곳에서 확인된다면 신리(거더리)는 순교자들의 영원한 안식처[本鄕]로 불리어도 좋을 것이다.
<차기진 / 양업교회사연구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