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건 가문의 신분에 대한 재검토
김수태 (충남대)
- 목차 -
1. 머리말
2. 프랑스 선교사들의 이해
3. 한국인 연구자들의 연구
4. 양반설의 비판적 검토
5. 평민설의 새로운 음미
6.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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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리말
이 글은 필자가 김대건 성인에 대해서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소박한 질문에서 비롯된 것이다. 같은 성과 본관을 가지고 있다는 점도 일정한 영향을 주었겠지만, 무엇보다 솔뫼 성지에 갈 때마다 김대건 성인의 생가지를 보면서 왜 기와집으로 저렇게 만들어놓았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그 이유에 대해서 김대건 가문의 신분이 양반이었기 때문에 당시 양반이 살았을 가옥을 염두에 두고 그렇게 한 것이라는 간단한 설명이 따른다. 또한 김대건 가문이 족보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족보가 양반신분임을 드러내주기 때문이라는 말이 덧붙여지기도 한다.
그러나 김대건 가문이 몰락한 양반 집안이라고 한다면 당시에 이런 집을 짓고 살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은 떨쳐버릴 수 없었다. 무엇보다 김대건 가문이 천주교를 믿었으며, 그들이 살았던 솔뫼가 아산만에 인접한 해안 지역이라는 부분과 관련된 것이기도 하다. 이때 신리 성지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던 다블뤼 주교의 내포지역의 지리적 조건에 대한 설명이 크게 참고가 된다.
그는 위의 편지에 계속해서 내포에 관해 썼다. 전에 교우촌의 온상이었고 요즈음에도 약 4,000명의 교우들이 있는데, 이들 중 상당수는 외교인들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추억이 충만한 이 지방은 광대한 늪지이며 바다 쪽으로 펼쳐져 있는 저지대 늪과 해협이 많이 있고 밀물 때 바닷물이 들어오는 자연분지로 인해서 사방이 차단되어 있습니다. 매우 습하지만 샘물은 자주 귀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거의 항상 더럽고 자주 악취가 나는 늪의 물을 마십니다. 그래도 이 물은 해롭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물맛에 익숙해지면 됩니다. 땅은 모두 하천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이 하천들 사이로 좀 덜 낮은 부분에 지어진 집들은 자주 물에 잠깁니다. 집들과 마을들은 때때로 작은 섬이나 보통 섬처럼 됩니다. 이곳이 바로 제가 사목 순방 6개월의 대부분을 보낸 곳입니다.
솔뫼 성지가 위치하고 있는 지역 역시 신리 성지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사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바로 해안에 인접한 지역인 솔뫼 지역에서 김대건 가문이 양반으로 상당한 경제적 기반을 유지하면서 그와 같은 기와집에서 살고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다. 김대건 가문이 족보를 가졌다는 부분도 조금 더 생각해볼 측면이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알고 있듯이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 족보의 위조가 크게 유행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족보만으로 김대건 가문의 신분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하는 점부터 시작하여, 김대건 가문이 과연 양반신분이었을까 하는 근본적인 물음까지 일어나게 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여러 질문들이 제기되는 것은 김대건 성인에 대한 기존 연구에 대한 필자의 불만도 어느 정도 작용하였다. 이제는 세계 천주교회에서 공식적으로 기억하는 인물로서, 한국 사람이면 신자와 비신자의 구별 없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김대건 성인을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정작 구체적인 부분에 들어가 보면 제대로 이해되지 않거나 밝혀지지 않은 내용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것은 김대건 성인에 대한 교회와 연구자의 학문적인 관심이 여전히 부족하다는 사실을 드러내주는 것이다. 특히 역사적인 측면에서의 구체적인 연구가 그러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은 김대건 성인에 대한 관심과 공경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그것이 올바른 연구와 이해를 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오히려 문제가 될 수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김대건 성인에 대해서는 그 분이 순교한 이후 지금까지 여러 측면에서 다양한 관심이 있어왔다. 특히 역사적인 측면에서 김대건 성인에 대한 본격적인 분석이 시도된 것은 시성식이 있은 이후의 일이었다. 1997년에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김대건 성인의 순교 150주년을 기념해서 만든 전기 자료집과, 그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들을 담은 학술지를 발간하였던 것이 하나의 분기점으로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이후 계속해서 이어지지 못했던 것이 우리의 학문적 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에 들어와서 수원교회사연구소의 학술행사를 통해서 김대건 성인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가 다시 시도되기도 하였다. 이때 이들 연구가 새로운 국면을 열어주고 있기는 하지만, 한편으로 김대건 성인에 대한 연구가 그 기초적인 문제부터 하나씩, 하나씩 점검하면서 체계적으로 정리하려는 자세와 노력이 필요함을 다시 일깨워준다. 무엇보다 이 분을 그냥 최초의 한국인 사제이며 순교자라는 단순한 몇 마디로 규정하기보다 오늘 이 시대, 이 사회, 특히 교회와 관련해서 새롭게 읽혀져야 한다는 점 때문이다. 이때 최근에 보여주고 있듯이 김대건 성인의 탄생지인 솔뫼 성지와 그곳에 자리를 잡고 있는 대전교구 내포교회사연구소의 또 다른 노력은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이 글에서는 그러한 연구의 하나로 김대건 가문의 신분문제를 재검토해보고자 한다. 김대건 가문의 신분에 대해서 프랑스 선교사들의 이해는 어떠하였으며, 한국인 연구자들은 이를 어떻게 파악하였으며, 그리고 현재 한국인 연구자들에게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통설인 양반 신분설의 논거가 과연 타당한가 하는 문제를 집중적으로 살펴보며, 프랑스 선교사들의 견해인 평민설을 다시 제기해보고자 한다. 이러한 검토를 통해서 앞으로 김대건 성인에 대한 보다 본격적인 연구가 진행되기를 기대해본다.
2. 프랑스 선교사들의 이해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신부들의 김대건 가문의 신분에 대한 이해는 어떠하였을까를 먼저 알아보자. 이들 프랑스 선교사들은 김대건 성인과 함께 지냈던 인물과 후대의 인물로 구분된다.
김대건 성인과 함께 활동하였던 인물은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주교이다. 페레올 주교는 1846년 11월 3일자 그의 서한에 첨부된 자료를 통해서 김대건 성인의 약전을 전해주고 있다. 이는 김대건 가문의 신분을 말해주는 가장 빠른 자료라고 할 수 있다.
A-① 김 안드레아는 1821년 8월 충청도에서 태어났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그의 가족은 조선이 아직 작은 여러 국가들로 나뉘어져 있었을 때 조선의 남쪽에서 다스리던 한 옛 왕가의 후예라고 한다. 이와 같이 저명한 (집안의) 유래에도 불구하고 안드레아의 가족은 조선 왕국에서 그렇게 존경을 받지 못하고 있다. 현 왕조는 400년간 존속되어 오는데 안드레아의 가족 등 여럿은 종의 신분같이 낮은 계급에 속해 있었고, 그래서 그들은 왕족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② 안드레아는 1821년 8월에 충청도에서 출생하였습니다. 그의 가문은 조선의 모든 지방이 하나의 왕국으로 통일되기 전에 조선의 남쪽 지방을 다스리던 왕족으로부터 내려오는 집안이라 합니다. 김해 김씨의(필자 주 : 원문에는 김해가 나오지는 않는다) 가문은 이제는 왕족의 존귀함은 다 없어지고, 종교적으로 훨씬 더 유명한 집안이 되었고 많은 순교자들을 배출하였습니다.
A의 ①은 서한에 첨부된 「병오박해 순교자 8인의 행적」, 즉 「병오일기」 안에 포함된 김대건 성인의 약전이다. 페레올 주교는 이를 프랑스로 번역하여 파리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가 있던 홍콩으로 보냈는데, 한국사와 관련하여 김대건 가문의 신분을 설명하고 있다. 이는 한국사의 고대로부터 조선후기에 이르기까지 김대건 가문의 신분적인 변화상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옛 왕가(필자 주: 가야)의 후예로 본래는 저명한 집안이었지만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제는 왕족에 속하는 것으로도 간주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결과 당시 김대건 가문은 종의 신분같이 낮은 계급에 속해 있었다고 당시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이때 기록에 나오는 종은 샤를르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에 의하면 양반과 서민 다음의 마지막 신분이었다.
A-② 역시 김대건 성인의 순교행적 기록이다. 이 자료는 페레올 주교가 프랑스어로 작성한 「병오일기」를 매스트르 신부가 라틴어로 번역한 것으로, 최양업 신부의 「기해․ 병오 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에 포함되어 있다. 페레올 주교의 그것과는 대체로 서로 유사하지만 약간 차이가 나고 있다. 신분에 대한 부분이 축약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김대건 가문이 과거 옛 왕족의 후예였다는 부분에서는 같은데,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 왕족의 존귀함이 다 없어졌다는 사실만을 알려주고 있다. 종의 신분과 같이 낮은 계급에 속해 있다는 말을 생략하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그러한 신분보다는 종교적으로 훨씬 더 유명한 집안임을 강조하고 있다. 매스트르 신부가 왜 이와 같이 하였는지에 대해서 그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이러한 기록에서도 당시 김대건 가문의 신분이 그리 높은 것이 아니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김대건 성인과 함께 활동한 다블뤼 주교 역시 김대건 가문의 신분에 대한 자료를 남겨두고 있다. 「순교자 비망기」자료이다. 이들 자료는 샤를르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에 그대로 전하고 있다. 서로 같은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이를 통해서 다블뤼 주교의 이해를 알아보고자 한다.
B-① 같은 해에 김진후 비오도 파란 많은 일생을 마쳤다. 그는 면천군 솔뫼의 양가(良家)에 태어나 미신과 사술(邪術)과 지술(地術)에 깊이 탐혹되었는데, 나이 50세쯤 되었을 때에 비로소 천주교 이야기를 들었으나 이 세상의 권세와 재물과 쾌락만을 추구하는 그의 마음은 그때 이 은총의 부르시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감사 밑에서 무슨 조그만 구실을 하나 얻어 하게 되자, 그는 친 아들의 권고를 그냥 오랫동안 물리쳤다. 그러나 끝내는 그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께 끌려갔으니 그는 관직을 버리고 외교인 친구들과 교제를 끊고 열심히 신자의 본분을 지키기 시작하더니, 1791년 처음으로 법정에서 신앙을 고백하였다.
② 다음은 김 「시명」(제준) 이냐시오이다. 이 분은 1814년에 죽었다는 이야기를 한 일이 있는 김진후 비오의 손자요, 1846년에 순교한 신부 김대건 안드레아의 아버지다. 그는 여러 차례 박해로 시련을 당한 서민(필자 주 : 평민)의 집에 태어나 산골에서 살았고, 15세 된 아들 안드레아를 모방 신부에게 맡겨 마카오에 유학을 보내었다.
김대건 성인의 증조부인 김진후와 아버지 김제준에 대한 언급이다. B-①은 김진후가 양가에서 태어났다고 하며, ②는 김제준이 서민(평민)의 집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모두 평민(상민) 신분임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설명은 페레올 주교의 견해와 일정한 차이를 보여준다. 우선 김대건 가문의 신분이 종과 같은 가장 낮은 신분이 아님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종이 아니라 평민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김대건 가문의 신분이 평민이었지만, 당시 처지가 가장 낮은 노비와 같은 신분으로 여겨질 정도였음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한다. 즉 페레올 주교의 설명은 당시 김대건 가문의 신분이 이전 보다 더욱 낮아진 상태를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한편 달레가 한국천주교회사를 저술할 때 다블뤼주교의 자료를 바탕으로 하였지만, 페레올 주교의 서한도 보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달레는 페레올 주교의 이해를 따라 김대건 가문의 신분을 서술하지 않고, 다블뤼 주교의 견해를 그대로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조선시대 이전 김대건 가문의 신분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을 하지 않고, 김진후가 감사 밑에서 조그만 관직을 가지고 일하였음을 새롭게 알려주고 있다. 그것은 그가 평민 신분이었다는 점에서 그리 높지 않은 자리가 아닌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달레가 최초의 한국천주교회사 통사인 한국천주교회사에 이와 같이 서술함으로써 당시 교회의 김대건 가문의 신분에 대한 공식적인 해석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김대건 가문의 신분에 대한 이러한 모습은 1857년에 만들어진 가경자 문헌을 통해서도 파악할 수 있다. 조선 순교자들의 시복 추진과정에서 있은 「1857년 가경자 절차 문헌」의 발췌문에 나오는 「김대건 신부의 순교에 관한 신앙 보호관의 진술」 내용이다.
“안드레아 김(그는 이렇게 불렀습니다)은 1821년에 빛나는 순교자들의 집안에서 1839년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순교한 복자 김 이냐시오에게서 태어났습니다. 소년시절부터 최상의 품행을 교육받은 그는 1836년에 복자 모방 신부님에게 동료와 함께 선발되었습니다.
김대건 성인의 신분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는 것이다. 물론 가경자 절차 문헌에서 그의 신분을 밝힐 필요는 없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집안에서 빛나는 순교자들이 나왔음만을 말하고 있다. 역시 양반이 아니었음을 시사해주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 선교사들이 주도한 시복식 자료에서도 그와 같은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이들 기록은 「시복재판의 증언기록」에 실려 있다. 고향과 소년시절을 언급한 부분에서는 그의 신분에 대한 설명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김대건 성인이 체포될 때의 또 다른 기록을 알려주고 있다.
해상의 관장이 신부 배에 와서 징발하려 하였다. 이에 김 신부는 “어떻게 양반 배를 징발하려 하는가”라고 말하였다. 이렇게 단호하게 거절하자 관장은 돌아갔다. 한 아전이 어떤 양반인지 알아보아야 하겠다고 생각하였다.
김대건 성인의 신분과 관련하여 양반이 처음으로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이 자료는 주목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시복 당시까지 김대건 가문의 신분에 대한 프랑스 선교사들의 이해는 평민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달레의 김대건 가문의 신분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에 들어와서 크게 달라진다. 역시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신부로서, 한국천주교회사를 연구한 피숑 신부에 의해서 기존과 다른 해석이 제시되었던 것이다. 그는 일제강점기 김대건 성인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한 인물이다. 그에 의해서 김대건 성인의 생년월일이 확정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는 1934년 7월에 발간된 가톨릭 청년 14호의 「조선 가톨릭사 편영 (9) : 복자 안드레아 김대건의 약력」에서 김대건 성인의 신분을 언급하였다.
C-라 신부(모방)의 수긔에 의하면 김 안드레아는 충청남도 밋내 놀매에서 탄생하였다. 시복식에 참고된 문헌에 의하면 그는 면천에서 탄생하엿다 한다. 그러므로 이를 종합하면 충청남도 면천군 놀매에서 탄생하엿다고 볼 수 잇다. 열심한 가톨릭 신자 김 이냐시오(김제준)와 고 울술나를 부모로 하고 1821년 그는 (1)지식(?)이라는 일흠을 바덧다.
(1) 안드레아의 일흠은 여러 가지로 기록되어 잇다. 지식이라는 것은 김씨 족보에 잇는 일흠이오 자긔 편지에는 김해김이라고 긔명하였다. 1839년 자긔 부친의 공술한 바에 의하면 안드레아의 릴흠은 재복이라 하엿다. 1846년 안드레아는 자긔 일흠이 우대건이라도 하고, 김안덕이라고도 하엿다.
비록 열심한 가톨릭적 가정에 태어낫스나 「병오일긔」의 말과가티 엇더한 사정으로 인하여 14세가 되엿슬 때 1836년 라신부가 조선에 나온 다음에만 령세하엿다. 소년은 그때 량반의 자제들과 가티 품행이 단정한 중 한문을 공부하고 잇섯다. 신체는 좀 허약한 편이엇다.
피숑 신부는 김대건 성인의 신분이 양반이었음을 처음으로 시사해주고 있다. 물론 양반이라는 말은 구체적으로 나오고 있지는 않다. ‘양반의 자제들과 같이’라는 말은 그와 같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아마도 글의 내용에 김해김씨 족보가 언급되는 점으로 보아, 족보를 바탕으로 이해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 말은 복합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김대건 가문의 신분은 여전히 평민이라는 것을, 혹은 평민에서 신분을 상승시켜 양반이 되어 양반 자제들과 함께 공부를 한 것으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아직까지는 단정적으로 김대건 성인의 신분이 양반으로 이해된 것은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다.
3. 한국인 연구자들의 연구
일제강점기에 들어와서 김대건 가문의 신분이 그 이전과 달리 평민이 아니라 양반으로 새롭게 인식되는데, 그 흐름을 주도한 것은 한국인 연구자들이었다. 그것은 1930년대의 일이었다.
물론 가톨릭 청년 16호의 「복자 안드레아 김신부 특집호」에서 피숑 신부가 쓴 김대건 성인의 약력과 함께 게재된 「김 신부 소전」에서는 조금 다르게 설명되고 있다.
“조선인 신부의 운조가 되는 복자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는 1821년 8월에 충청도 내포지방 면천군 놀매에서 탄생하얏다. 한문을 배호고 잇섯다.”
위의 글은 저자가 명확하지 않지만, 아마도 한국인 연구자로 생각된다. 피숑 신부의 언급과 거의 비슷하지만, ‘양반의 자제들과 같이 품행이 단정한’ 부분은 생략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당시까지도 양반설이 확정된 견해로 통일되지 못하였고 있음을 말해준다. 따라서 이후 어떠한 흐름 속에서 김대건 가문의 신분이 양반으로 자리를 잡게 되는가를 계속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1) 193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의 연구
김대건 성인의 가문이 양반으로 이해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김해 김씨의 족보였을 것이다. 1930년대에 들어와서 김대건 성인의 후손에게서 족보가 발견된 것이다. 김대건 가문의 족보를 처음으로 주목한 사람은 한국인 사제인 주재용 신부였다. 그는 1934년에 나온 가톨릭 청년 16호 특집호에 주 신부라는 이름으로 「김해김씨 안경공파 김지식(대건신부)씨 세보에 대하야」라는 글을 게재하였다.
D-① 이제 그 족보에 대하야 몃마듸를 말하려하거니와 이는 4년 전 우연히 어떠한 기회에 필자가 발견하게 된 것인바 아직 거기대한 충분한 연구를 다 못하였음은 필자의 죄라 스스로 죄송하며 마지 안는 바이다. (가) 족보에서 보는 바와 가티 김신부님은 금령군(목경) 16대손 되는 운조씨로부터 천주교에 들어왓는데 약 1788년 경인듯 십고 그 후손들은 오늘날까지 다 열심 수계하는 중이다 (중략) (비오의)그 막내 아들 희현씨 후손은 전주군 운선면 되재 성당부근 옥배 또는 구제리에 살고(족보는 이 집안에 잇슴)
② 여기 특별히 몃몃 씨명에 잇서서 교회 혹은 나라 문적과 맛지 안는 점이 적지 안흠을 누구나 느낄 것이요 따라서 이 족보의 진위를 의심할 자 잇슬지도 모를 것이다 그러나 먼저 생각할 것은 본래 보학상으로 보아 모든 족보에 반듯이 항열자를 중대시하게 되므로 혹시 실명이 항열자와 맛지 안는 때는 반듯이 새 이름 - 이른바 보명-을 지어 너키도 하며 또는 바꾸기도 하니 실명과 보명이 서로 맛지 안흠은 조금도 이상할 것 업거니와 설혹 보학상으로 보아서는 아무 바꿀 필요가 업는 때라도 다른 여러 가지 이유로써 흔히 엉뚱한 이름을 만들어 너키도 함은 누구나 잘 아는 바이다. 하물며 순교자들의 이름이랴? 그 시 외교인들의 눈에는 이 거룩한 순교자들이 다 나라의 「죄인」이 아니더냐! 그러니 뉘 즐겨 그 이름 그대로를 족보에 실고자 하엿스랴?
③ 그리고 김신부의 보명은 「지식」인데 그 부친과 정 바오로 공초에는 아명을 「재복」이라 하엿고 당시의 공초에는 「대건」이라 하엿으니 이 어찌 우연한 이름이랴 조선 가톨릭의 신비로운 대건물을 크게 세우(대건)섯고 조선의 존재와 함께 그 명예스런 이름을 세계에 크게 세우(대건하)섯고 마지막 당신과 아울러 조선 가톨릭신자들을 위하야 영주소(永住所) 조선마을을 저 천상에 크게 세우(대건하)섯스니 진실로 대건이시오 수선탁덕으로서 홀로 「발마」가지를 잡으신 그 복된 몸에 「천상천하」에 「복자」라는 귀한 이름을 더 한층 겸하엿스니 이어찌 또한 거듭된 자가(재복씨) 아니시랴. 마지막으로 이 족보를 구득함에 많흔 편의를 주실 뿐 아니라 이번에 사진까지 박아 보내주신 되재 본당 신부 이성만씨에게 감사의 뜻을 부언해둔다.
4페이지의 분량인 이 글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둘째 부분이 족보와 관련된 내용이다. D-①은 이 족보가 현재 김진후의 막내아들인 김희현의 후손이 가지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4년 전인 1930년에 우연히 족보를 발견하였다고 한다. ③에서는 전주 되재 성당 이성만 신부의 도움이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에 주재용 신부는 이미 4년 전에 족보를 발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충분한 연구를 하지 못한 점을 사과하고 있다.
주재용 신부는 김대건 성인이 금령군 김목경의 16대손으로, 그 한 분파인 안경공파에 속한 인물임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②에서 언급되고 있듯이 족보에 나오는 내용들이 교회와 국가 기록과 서로 맞지 않아 족보의 진위를 의심할 수도 있는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족보와 교회 및 국가의 기록을 비교해 볼 때 이 자료가 김대건 성인의 가문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무엇보다 실명과 보명에 주목하고 있다. 실명이 보명과 맞지 않을 때에는 보명을 지어 넣는다는 것이다. 이에 ③에 보이듯 김대건 성인의 이름을 족보의 명칭을 따라 지식으로 파악하였다. 글의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김대건 성인의 이름을 족보에 나오는 이름인 지식으로 크게 부각시키고 있다. 그리고 김대건 성인의 여러 이름들인 재복과 대건이 가지는 의미를 나름대로 해석하고 있다. 이밖에 김대건 성인 집안에 속하는 사람들의 이름이나 혼인, 상호관계, 묘소 등을 간략하게 비교 분석하였다.
프랑스 선교사가 아니라 한국인 사제에 의해 김대건 가문에서 족보가 발견됨으로써 김대건 가문의 신분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우선 피숑 신부가 김대건 성인의 신분을 양반과 연결시켜 이해하려고 한 것은 한국인 주재용 신부가 김대건 가문의 족보를 발견한 데에 크게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주재용 신부 역시 김대건 가문의 신분을 양반으로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피숑 신부 보다는 항렬자의 사용 등을 지적하고 있다는 점에서 양반 신분임을 보다 구체적으로 파악하려고 노력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1940년대에 들어와서도 여전히 피숑 신부의 단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다. 한국인 사제인 유영근 신부에 의해 저술된 수선탁덕 김대건에도 김대건 가문의 신분이 언급되었다.
E-안드레아는 1836년 영세할 때 받은 본명이오, 어려서는 재복이라 불럿스며 자는 대건이요 보명은 지식이라고 기록되였다. 그 부친은 김제준, 자는 신명이오 보명은 제린이니 이가 곧 복자 김 이냐시오 이오 모친은 고 울술라이시다. (중략) 오직 조선가톨릭교회사의 권위 높으신 삐숑 신부님의 저서에서 아래와 같은 간단한 구절을 얻어 보게 된다. “(김재복) 소년은 그때 양반의 자제들과 같이 품행이 단정한 중 한문을 공부하고 잇섯다. 신체는 좀 허약한 편이었다.” 이는 추측상으로도 어그러짐 없는 사실로 믿는다.
이 책은 김대건 성인에 대한 첫 전기서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피숑 신부의 견해가 그대로 인용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김대건 가문의 신분이 양반이라고 구체적으로 명시된 저술은 해방 후인 1960년대 초반에 나온 김구정의 성웅 김대건전이다.
F-① 이 집안의 내력은 이 아래 자세히 이야기하겠다. 이 집안은 김해 김씨 안경공파 19대손이었던 김진후의 둘째 아들 택현씨의 집안이었다. 김진후씨는 솔뫼에서 양반이었고 부호가였다. 그의 명성이 그 지방에서는 매우 높았고, 공주 감영의 어떤 관직에 있어서 그 권세 또한 푸르렀었다. 그는 슬하에 아들 4형제를 두었는데, 종현, 택현, 한현, 희현이었다. 이상 이름은 모두 보명이었는데, 조선 교회사에는 여러 가지 이름으로 기재되었다. 참고로 여기에 대강 말하자면 종현은 국현이라고도 하였다. 한편은 자를 계원 혹은 종한 혹은 종현이라고도 하였다. 이 4형제한테서 또한 자녀손이 많이 나서 김씨네 집안이 솔뫼에서는 큰 가문이 되었다. 그래서 아무 집안도 겨눌 수 없었고, 그 집안의 부유함과 위력에는 아무도 당해낼 사람이 없었다. 다시 말하면 세상 부귀영화를 독차지하였던 셈이었다.
② 택현씨의 집안은 본래 가산이 부유하였고, 양반 행세를 하던 가문이었으니 그 형제 다 글을 배웠고 행신 범절의 교양을 받아 왔기 때문에 비록 난민촌에 와 살찌라도 그 손자들에게 글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택현씨는 역시 아들 3형제를 두었는데, 둘째 아들 제준(보명 제린, 자 신명)을 데리고 여기로 왔던 것이다. 제준씨는 교명을 이냐시오로 영세하였고 장흥 고씨댁으로 장가들었는데, 그 부인은 고 울술라라 하였다. 그들은 1821년 8월에 아들을 낳아 이름을 재복이라고 불렀다. 이 재복이란 아이가 자라서 우리 조선 수선탁덕이 되고 순교 복자로서 성웅이 된 김 안드레아 대건 바로 그분이다. 보명으로는 지식이라 하였고 대건은 그가 마카오 유학을 가서 지은 관명인 듯하다. 조선 풍습에 어릴 때 부르는 이름이 있고, 커서 관례를 행하게 되면 관명, 즉 어른 이름을 짓는 일이 있었던 고로 대건이라고 한 것이다. 안드레아가 그 관명 혹은 아호를 대건으로 지은 그 내면 이유는 필연 여러 가지였을 것이다. 이 이름으로써 자기의 포부를 역력히 드러내었다. 그가 크게 건설할 일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으니 부패한 사상과 종교와 학문으로 무너져가는 나라를 세계문화의 기초인 그리스도 사상 위에 대재건하여야겠고, 영원한 죽음과 멸망의 그늘 아래서 신음하는 겨레를 위하여 영원한 생명의 전당을 크게 세울 그 웅지와 장도를 하였을 것이다.
그는 주재용 신부의 견해를 바탕으로 김대건 가문을 서술하고 있다. 이제 주저 없이 양반으로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그 근거는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지 않고 있으나, 역시 김해김씨 족보를 바탕으로 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김구정 자신이 김해김씨였다는 사실도 일정한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에서 김대건 가문의 경제적 기반을 새롭게 언급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된다. 부호가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김대건 가문은 솔뫼 지역에서 그 위력과 부유함을 아무도 당할 수 없다고까지 말한다. 이와 함께 김대건 성인의 여러 이름에 대해서도 주재용 신부와 비슷하게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한국인 천주교 신자 연구자인 유홍렬에 의하여 그 다음해인 1962년에 저술된 한국천주교회사에서 김대건 가문의 신분이 새롭게 언급되었다.
G-① 그는 곧 조선인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의 증조부 김진후 비오였다. 그는 충청도 면천군 솔뫼의 훌륭한 양반집에서 태어나서 그 지방의 조그마한 벼슬을 살고 있었는데, 50세 때에 비로소 복음을 듣게 되었다.
② 김대건 안드레아는 1821년 8월 21일 충청도 내포의 솔뫼에서 출생하여, 본은 김해이고 아명은 재복, 보명(譜名)은 지식이라고 불렀다. 그의 증조부인 김진후 비오는 내포에 살던 명문의 자제로서, 한때 지방의 관리를 지냈으나, 그 후 50세 때에는 교우이던 그 아들의 권고로 입교하여 벼슬을 내놓고 열심히 신앙을 지키고 있었다.
달레와 마찬가지로 유홍렬도 김진후를 중심으로 김대건 가문의 신분을 서술하고 있다. 이때 김진후의 신분은 훌륭한 양반집 혹은 명문의 자제라고 한다. 또한 김대건 성인의 보명이 언급되고 있다. 김대건 가문의 신분이 양반으로 된 것이다.
유홍렬의 이러한 이해는 일제강점기 이래 주재용 신부를 시작해서 그동안 족보를 바탕으로 주장되어 온 사실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가 한국인 연구자의 새로운 주장들을 모두 그대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경제적 기반에 대한 설명은 전혀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수선탁덕 김대건이나 성웅 김대건전 등이 모두 연구서라기보다는 대중적인 성격을 지닌 데에도 중요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이들이 모두 정통 한국천주교회사가로 분류되지 않는다는 점도 일정한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유홍렬은 이들의 여러 의견 가운데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는 부분들을 제외시키고 김대건 가문의 신분이 양반이었다는 사실만을 받아들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에서 서술된 내용과는 크게 다른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 선교사들의 김대건 가문의 신분 인식은 한국인 연구자들의 연구에 의하여 크게 달라졌다. 물론 달레의 서술을 따른 점도 있다. 김진후가 솔뫼에서 작은 벼슬을 하였음은 공통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유홍렬의 책이 한국인 천주교 신자에 의하여 저술된 최초의 한국천주교회사 통사라는 점에서 이러한 서술은 교회 내에 또 하나의 새로운 해석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2) 1970년대부터 최근까지의 연구
족보를 이용하여 김대건 가문의 신분을 이해하려는 접근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김진소 신부가 1970년대와 1980년대 김대건 성인의 가문에 대하여 집중적인 관심을 가졌던 것이다. 「김대건 신부의 아우 김난식의 분묘 답사기」(교회와 역사 38, 1978), 「성 김대건 신부 가문의 보충자료」(교회와 역사 108, 1984)와 「성 김대건 가문의 무혈순교자들」(교회와 역사 127, 1986)이 바로 그것이다.
한편 1990년대에 들어와서 김용태․마백락은 김대건 가문의 가계를 족보의 내용을 바탕으로 보다 자세히 살폈다. 족보에 나오는 내용의 대부분을 역사적 사실로 파악하고 그것을 반영하였던 것이다. 어떤 족보를 사용하였는지는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그 분파과정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안경공 김영정은 문과 급제자였는데, 이후 김희현의 장남인 의직대에 무과급제자로 바꾸고 있음도 알려주고 있다. 한편 김진후에 대해서 통정대부로 나라의 관직(공주 감영)을 가지고 있었으며, 재산이 부유한 지방토호였다고 언급한다. 경제적인 부분은 김구정의 견해를 따른 것으로 이해된다.
그 다음 해 이원순 역시 족보를 바탕으로 김대건 가문의 가계도를 그렸다.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3종, 절두산 순교기념관 소장 2종, 부산교회사연구소의 2종을 참고하였는데, 구체적인 족보 자료를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이때 이들 기록이 서로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와 함께 김진후의 이동경로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김진후의 가문은 선대가 강릉에 살았으나 그 후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신촌리에 자리잡고 살았으며 김진후대에 계촌리에서 약 30리 떨어진 당진 솔뫼지역으로 거처를 옮겼다는 것이다. 이밖에 족보에서 언급된 김진후가 가졌던 통정대부의 의미를 파악하였다. 이를 통해서는 그의 관력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없다고 하면서 비록 현직은 아니나 관직에 종사한 인물로 보았다. 이에 김대건 가문의 신분은 역시 충청도 내포지방의 양반가문으로 정리되었다.
김대건 가문의 신분을 이해하고자 한 노력은 김대건 신부가 보낸 편지들에 보이는 성과 본관(성관) 사용의 의미에서도 찾아보고자 하였다. 이러한 작업은 김해김씨 족보가 가지는 의미를 보충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피숑 신부도 C에 보이듯 김해김씨라는 성관의 사용에 주목하였으나 그 의미를 찾지 못했다.
그러나 원재연은 김대건 성인이 그의 양반신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다고 보았다. 그것은 그의 서한 끝머리에 발신자인 자신의 성 앞에 김해라는 본관을 덧붙여 사용한 예가 많은 것에서 잘 알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예가 김대건 성인에 못지않은 양반출신인 그의 동료 최양업의 서한에서는 한 번도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이 김대건 성인만의 특징적인 가문의식을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즉 김해김씨라는 성관의 사용이 김대건 가문의 신분임을 양반임을 말해준다는 것이다.
한편 방상근은 김대건 성인의 아버지인 김제준의 진술을 중심으로 그의 신분을 설명하고 있다.
H-저는 용인에서 거주하였고, 본래 양반 신분인데(本有班名) 농사일로 생활하였습니다. 저의 삼촌 숙부인 종현이 천주교를 가르친 지가 비록 오래되었지만, 오랫동안 농업에 몰두하여 능히 열심히 익히지는 못했는데
본유반명(本有班名)에 주목하여 김제준이 자신을 양반으로 칭하였다고 해석하였다. 때문에 김제준의 신분은 양반인데, 당시에는 몰락 양반, 즉 잔반이 되었다고 보았다. 이것은 김구정 등이 김대건 가문을 부유한 양반 집안으로 파악한 것과는 크게 다르다. 위의 기록에서 스스로 농업으로 생활하였다는 점에서 그는 자작농으로 이해된다. 이제 김대건 가문의 신분은 양반 가운데에서도 몰락 양반으로 다시 정리되었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해방 후 한국인 연구자들에 의해 진행된 김대건 가문의 신분은 거의 대부분 양반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제 통설이 된 것이다.
4. 양반설의 비판적 검토
지금까지 김대건 가문의 신분에 대해 서로 다른 견해가 있음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양반설이 거의 현재의 통설임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김대건 가문의 신분을 양반으로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양반설에는 구체적인 근거가 많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1) 양반 기록에 대한 검토
우선 김제준의 진술내용과 관련된 것이다. H의 기사는 ‘본래 양반신분인데’로 번역하여 이해하였다. 그러나 반명은 사전적 의미를 따라 글자 그대로 ‘양반이라고 이를 만한 명색’으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그렇다면 본래 양반이라고 이를만한 명색이 있었다는 것이 된다. 이것은 곧바로 김제준의 신분이 양반임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 보다는 오히려 A-①의 페레올 주교의 「병오일기」에 나오는 내용 그대로 그가 옛날 가야시대에는 왕족이었음을 드러내주는 것으로 파악될 가능성도 있다. 시대가 달라졌다고 하더라도 왕족이었다는 점은 양반이라고 이를만한 이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두 기록은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연관성이 있는 사료로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한편 추안급국안 「사학모반 죄인 양놈․ 유진길 등 심문기록」에 실린 김제준에 관한 내용을 통해서도 당시 그의 신분을 엿볼 수 있다. 심문관이 김제준에게 “너는 어디에서 살았으며, 내력은 어떠한 사람이고”를 물었을 때 그는 “본래 청파에 살다가 용인 땅으로 이주했습니다. 제 큰 아버지가 일찍이 사악한 천주학을 익혔기 때문에 저도 또한 그것을 배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김제준은 자신이 살았던 장소를 이야기할 뿐 일성록에 기재된 내용과 같이 그의 신분 등 내력을 전혀 말하고 있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심문관에 의하여 “그는 시골구석(鄕谷)의 비천한 무리로서” 혹은 “죄인 김제준의 경우 그는 시골구석의 일개 어리석은 남자로서” 파악되고 있다. 때문에 추국청에서 김제준에 대한 심문 내용을 보고할 때 “죄인 김제준의 경우 얼굴의 생김새는 지극히 어리석어 보이고, 말은 지극히 융통성이 없으니 분명히 사악한 천주교도들 중에서도 비천하고 몰지각한 부류입니다”라고까지 언급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관찬 자료들 역시 당시 김제준의 신분이 양반이 아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한다. 만약 그가 양반이었다면 심문관 등 정부 관리에 의하여 쉽게 파악되었을 것이며, 그것은 비교적 간단하게 정리될 수 있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김제준의 진술만으로는 김제준의 신분을 양반으로 이해하기에는 여전히 설득력이 부족하다고 하겠다.
물론 김대건 가문의 경우 그 후손이 양반으로 언급한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김대건 성인의 일가로 언급되는 김명집 루드비코(루수)이다. 그는 병인치명사적에서 “김명집 루도비코는 충청 명가거족(名家巨族)이라”고 언급된다. 이것은 김대건 가문의 신분이 양반으로 이해될 수 있는 또 다른 근거가 된다. 그러나 이 기록 또한 문제가 있다. 우선 이 부분에서는 그가 김대건 성인의 일가로 언급되고 있지 않는 것이다. 더욱이 병인치명사적에 기록된 또 다른 두 개의 내용들은 “김 루드비코는 충청도 내포 구교우집 사람이요 김대건 신부의 일가라” 혹은 “김(명집) 루도비코는 충청도 면천 범천면 송산 사람이라”고 하고 있으며, 치명일기에서도 “김 루도비코 명집 : 면천 범천면 송산 교우이요, 김 신부의 일가”라고 하고 있다. 이때 그와 김대건 성인과의 관계를 전하고 있지만, 신분을 언급하고 있지 않는다는 점에서이다. 따라서 김명집과 관련되는 4개의 자료들 가운데 한 군데에서만 충청 명가거족이라고 되어 있다는 것과, 그러한 말에 이어지는 나오는 내용이 그가 매우 어려운 경제적 조건 속에서 생활하였음을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역시 쉽게 따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이와 함께 김대건 신부가 체포되거나 심문을 받을 때 양반과 관련해서 나오는 여러 내용들에 대해서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김대건 성인이 서울의 양반(京班)이라고 밝힌 일이 있었던 것이다. 즉 그가 순위도에서 체포될 때 자신의 신분을 양반으로 강조했다는 것이다. 이에 김대건 성인이 순교를 몰고 왔던 체포과정에서 만약 자신의 양반 신분을 내세우지 않고 적당히 관가의 비위를 맞추고 고개를 숙였더라면 체포를 면할 수 있었을 것으로까지 이해한다.
그러나 이 기록 역시 보다 자세한 검토가 필요하다. 이미 잘 지적되고 있듯이 김대건 성인이 그와 같이 언급한 것은 지체 높은 양반의 배는 함부로 징발하지 못하고, 또한 지체 높은 양반에 대해서는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이용하여 당면한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우리는 기품을 하나도 잃지 않고 어디든지 양반 행세를 하며 다녔어. 그날부터 우리는 계속 우리가 가는 주막마다 방을 차지하고 있던 사람들을 몰아내었지. 그러면 어떤 때는 그 가엾은 사람들은 추위에 몹시 떨어야 되었어. 아이들을 데리고 밖에서 자야 하니까. 난 마음속으로 그들을 불쌍하게 여겼지. 그렇다고 어떻게 하겠어? 이렇게 하는 것이 불행한 만남을 피하고 우리를 알아보지 못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인 걸.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그야말로 세르베르로 행동했지. 엄한 말투로 말하고 가끔은 협박도 하고, 조선의 양반들이 평소에 하는 대로 했어. 우리들을 밀쳐내지 못하도록 하면서 말이야.
페레올 주교와 함께 입국한 다블뤼 주교 일행의 공소방문 이야기이다. 선교사들이 박해자의 체포를 피하기 위해서 양반 행사를 하였는데, 선교사들이 선택한 부득이한 방법이자, 때로는 아주 편리한 방법에서 나온 것이었다. 김대건 성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가 떠난 후 관장이 부하들을 거느리고 우리 배로 와서 중국 배들을 물리치기 위해 우리 배를 사용하도록 청하였습니다. 조선 법은 공적인 일로 양반의 배를 사용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저는 주민들 사이에 이 나라의 지체 높은 가문의 양반으로 통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관장에게 저의 배를 양보하면 저의 체면을 잃게 되고 또 이후의 우리 원정에도 장애가 될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베난시오는 이러한 경우에 취해야 할 행동 기준을 제게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관장에게 내 배는 내가 사용해야 하고 따라서 그에게 양보할 수 없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김대건 성인은 그가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주민들 사이에 조선의 지체 높은 가문의 양반으로 통하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그 때문에 그렇게 행동하였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하인인 베난시오의 조언이 있었던 것이다. 그 사람만 아니라 선주 임성룡의 부친도 ‘이 사람은 성 안에 거주하는 친지인 양반으로’, 김대건 성인과 동행한 이의창도 ‘친척양반’으로 소개하였다. 이에 사공 엄수나, 임성룡은 김대건 성인을 양반으로 알고 있었다고 대답하였다. 그러므로 체포 당시 김대건 성인이 그의 신분을 양반으로 언급한 것은 자신의 본래 신분이나 의도와는 무관한 것이었다고 하겠다.
2) 성관 사용의 의미
성관의 사용을 통해서 김대건 성인의 신분이 양반임을 강조한 것도 그러하다. 여기에도 이미 비판이 나와 있다. 김해라는 본관을 특별히 밝힌 것의 의미를 새롭게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본관 사용이 김대건 성인이 김해김씨의 후손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이때 그 자랑하는 포인트가 다르다고 한다. 다름 아니라 그것이 양반의 후손임을 드러내기 위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그의 집안은 이미 몰락하여 잔반으로 전락한 상태여서 양반신분을 내세울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이에 김대건 성인이 김해김씨 후손이라는 점을 자랑스럽게 내세운 것은 그 보다는 자기 집안의 유서 깊은 신앙 및 순교전통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러한 견해 역시 따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편지들을 살펴볼 때 김대건 성인이 자기 집안의 유서 깊은 신앙과 순교 전통을 자랑스럽게 드러냈다는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가 크게 강조하고 있는 사람은 그의 부친인 김제준의 경우뿐이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가 어떠한 상태에 있는가를 궁금하게 여기고 있을 따름이다. 그 이외의 조상들에 대한 별다른 언급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 김해김씨라는 성관의 사용을 통해 자기 집안의 유서 깊은 신앙과 순교전통을 자랑스럽게 드러내기는 어렵다는 점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후술하겠지만 김해김씨라는 성관은 너무나 큰 범위여서 그것을 통해 자기의 가계를 구체적으로 드러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김해라는 본관의 사용을 통해서 그러한 기능을 확인하기가 힘들다고 하겠다. 따라서 보다 새로운 각도에서 성관의 사용의미를 찾아야 할 것이다.
우선 김대건 성인이 성과 본관을 어떻게 사용했는가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그는 앞서 인용한 「김대건 신부의 순교에 관한 신앙 보호관의 진술」 내용에 보이듯 스스로를 ‘안드레아 김’이라 불렀다고 강조하고 있다. 세례명과 성을 함께 사용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편지들에서 쉽게 확인되는 사실이다. 이밖에 그가 9통의 편지에서 김해김씨라고 사용했고, 4통의 편지에서 조선인이라고 사용했다는 점이 주목된다.
이것은 당시에 통용된 편지의 서식과 관련된 부분이 아닐까 생각한다. 19세기 프랑스의 경우 편지에 서명을 할 때 이름+성을 사용하였는데, 이때 성은 단순히 성을 나타내거나 아니면 그 사람과 관련된 지역명이 함께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즉 이름+성+지역명을 사용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라틴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이름+성+씨족명으로 표시하였던 것이다. 씨족명은 역시 지역으로 표시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김대건 성인 역시 편지에 서명을 할 때 그러한 서식을 따라 영세명+성(안드레아 김)을 사용하거나, 아니면 영세명+씨족의 출신지역을 의미하는 본관+성(안드레아 김해 김)으로 약간 바꾸어 사용하였던 것이 아닐까 한다.
조선인이라는 이름의 사용도 이러한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안드레아+김+조선인으로 표기하였던 것이다. 부제 혹은 사제임을 드러내는 것도 같은 의미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김대건 성인이 김해라는 본관을 사용하였을 경우에 여기에서 자신의 신분을 특별히 드러내기 위한 특별한 의미를 갖기 보다는 당시 편지의 양식을 따라서 사용했던 측면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조선후기에 들어와서 성관 사용의 예나 그 의미가 이전과 달리 크게 달라지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우선 조선후기 성관 사용의 사례를 통해서 김해김씨라는 성관의 사용이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의 신분이 양반임을 드러내는 것인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결론을 미리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그렇지 않았다. 물론 김해김씨라는 성관의 사용이 양반신분임을 드러내는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청도에는 5개의 저명한 성씨가 있었는데, 김해김씨는 이 지역 최고 명문가의 하나였던 것이다. 이들은 김해김씨로서, 그 유명한 김일손의 조카 집안이었던 것이다. 이와 달리 18~9세기 경기도 포천에 거주한 김해김씨 일가는 평민신분층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평민신분에서 벗어나 중인층으로까지 신분을 상승시켜나갔다. 이와 같이 김해김씨가 평민신분에서 양반층으로까지 신분을 상승시켜 나간 사례는 1786년 단성현 현내현 어리천촌에 거주한 김해김씨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러한 검토들을 따른다면 성관의 사용만으로 조선후기에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의 신분을 곧바로 알기는 어렵다고 하겠다. 물론 양반신분일 가능성도 내포하고 있지만, 다양한 신분의 사람들이 김해김씨라는 성관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닐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김해김씨라는 성관의 사용만으로는 김대건 가문의 신분이 양반임을 쉽게 말하기는 어렵다고 할 수 있다.
조선후기 성관 사용의 의미는 본관제도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 본관제도가 처음 만들어진 것은 고려의 건국과 함께였다.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 중앙정부는 백성을 통제 파악하기 위해서 백성들에게 본관을 주었던 것이다. 그 결과 노비의 경우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양인 이상의 모든 신분의 사람들이 본관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 본관은 바로 당시 사용되던 지방행정 구획명칭이었다. 따라서 이때 당시의 본관은 오늘날의 본적지와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이에 개경에 올라와 관직을 차지하는 등의 활동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 백성들의 본관은 거주지와 일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려 중기 이후에 들어가면 본관의 사용과 그 의미가 새롭게 달라진다. 성과 본관이 결합하여 오늘날 일반적으로 언급되는 성관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지방행정구획 명칭은 탈락되는데, 예를 든다면 김해부가 아니라 이제 김해라는 두 글자로 바뀌게 된 것이다. 이러한 성과 본관의 결합은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의 문벌을 상징하게 되었다. 그 누구의 후손임을 내세우기 위한 것이다. 그 누구는 시조가 될 수도 있고, 당시 고위관직을 차지한 인물이 될 수도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본관은 단순히 본적지로서의 본관이라는 의미를 지니든지, 아니면 본관과 성이 결합하여 문벌을 드러내게 되는 의미를 지니는 두 개의 내용으로 바뀌었다.
이것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더욱 확산되는 양상을 보이게 된다. 다름 아니라 성관의 사용이 족보와 결합되면서 더욱 뚜렷하게 문벌을 상징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도 본관의 사용은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두 가지의 내용을 가지고 있었다. 단순히 거주지 혹은 본적지로서의 본관과, 성과 결합하여 시조 혹은 원조 혹은 현조의 출신지를 나타내며 문벌을 상징하는 본관이 있었던 것이다. 조선후기까지의 호적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듯이 일반 백성들은 여전히 거주지를 본관으로 하고 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선 전기에도 성과 본관이 병행된 성관의 사용자는 양반층에만 국한되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 이와 같이 성과 본관과 족보가 서로 결합하면서 신분을 상징하는 의미를 갖던 성관이 그 의미를 달리하게 된다. 성관을 사용하는 범위가 크게 확대되어 나갔다는 것이다. 이 점은 조선시대 성관의 변화에서 주목해야 할 현상이다. 이때 본관을 바꾸는 개관의 현상이 집중적으로 나타나게 되는데, 이른바 대본관으로의 통합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결과 조선후기 각 읍 호적 대상에 나타났던 무명의 본관들은 대부분 주로 현거주지와 일치하는 본관이었는데, 이들 본관이 개관되면서 자연히 소멸되어갔던 것이다. 이에 성관이란 더 이상 지배 양반의 그것으로만 의미를 지니게 되지는 않게 되었다. 그만큼 다양한 신분의 사람들로까지 성관의 사용이 크게 확대되었으며, 이러한 현상은 성관의 의미를 바꾸게 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조선초기의 성관에 대한 너무나 당연한 최근의 지적은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안동권씨의 예가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듯이 성관집단이라는 것은 역사적인 형성물이며, 현재와 같은 규모를 가지는 성관집단이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18세가 되면서부터였다는 것이다. 조선시대에 10개 파 이상으로 나누어져 있던 안동권씨의 경우 처음부터 그러한 것이 아니라 조선후기에 이르기까지 서서히 형성되어 온 집단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그 시조 혹은 원조가 아니라, 파 혹은 파 내부의 소집단인 문중을 중심으로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드러난 그 누구를 중심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까지의 연구에서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무시한 채 성관집단이 마치 조선 초기 혹은 한층 더 거슬러 올라가 고려시대부터 벌써 존재하고 있던 것처럼 보고 성관집단을 단위로 해서 연구를 행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러한 방법은 근본적으로 고쳐져야 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점은 특히 김해김씨의 경우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김해김씨는 조선시대 모든 씨족 가운데 가장 분산도가 높은 씨족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이다. 김해김씨는 총 121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여 30위에 올라있었다. 그런데 어느 씨족이든 문과 급제자의 3분의 2 정도는 씨족 내 소속 종족이 쉽게 파악되지만 김해김씨는 이와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문과 급제자가 가장 핵심적인 어느 한 가계에서 배출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렇게 통합적이지 않았던 것이 김해김씨의 중요한 특징이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김해김씨가 조선후기에 들어와서 가장 많은 사람을 가진 성관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조선후기 단성지역의 상황은 김해김씨의 경우 이러한 변화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17세기 후반 성과 본관을 모두 가진 호가 50% 정도였는데, 19세기 전반에는 99%의 비율을 점유하였다고 한다. 50%에 해당되는 호가 성과 본관 중 하나만 혹은 모두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이때 이들이 새롭게 성관을 갖는 방식은 완전히 새로운 성관을 만들거나 또는 기존의 성관을 새롭게 선택하여 바꾸는 두 가지 방식 중 하나였다. 거기에는 혈연적 연관이 있는 경우나 그와 상관없이 성관을 취하게 되는 경우 모두를 포함하고 있었다.
특히 김해김씨가 그러하였다. 1678년 호적대장에는 114호였던 김해김씨가 1717년에는 261호로 두 배 이상, 19세기 전반에는 총 3083호중 10%인 338명으로까지 대폭 증가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김해김씨가 크게 늘어난 점에 대해서 17세기 후반 호적대장에 등재되지 않았던 호들이 18세기 전반 이후 대거 독립호로 등재되었기 때문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보다는 김해김씨가 다른 지역에서는 이미 성관으로서의 입지를 가지고 있었지만, 단성지역에서는 상대적으로 사회적 위세를 갖지 못했던 데에서 그 원인을 찾고 있다.
김해김씨는 향안이 작성되고 있었던 17세기 후반에 이미 가장 많은 호수를 점하였지만 향안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지는 못하였다. 즉 이 시기에 김해김씨는 단성지역에서 사회적 위세를 가진 성관은 아니었던 것이다. 따라서 새롭게 성관을 갖는 사람이 김해김씨를 칭하는 것에 대해서 사회적 압력이 상대적으로 적었다고 한다. 다른 지역에서 성관으로서의 입지를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단성지역에서 상대적으로 쉽게 칭할 수 있는 성관을 선택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그러한 성관 중의 하나가 김해김씨였다는 것이다. 이것이 17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전반 김해김씨 호가 급증했던 주된 이유로 파악되고 있다.
김해김씨를 성관으로 하는 생원진사 급제자의 숫자가 18세기 후반에 들어와서 변화하는 양상도 이러한 김해김씨의 변화상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된다. 17세기 전반 78위, 17세기 후반 64위를 차지하는 것이 18세기 전반에는 33위, 18세기 후반에는 18위, 19세기 전반에는 15위, 19세기 후반에는 2위로까지 상승의 폭이 크게 늘어갔던 것이다 이와 같이 김해김씨가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게 된 것은 역시 김해김씨의 급증에서 찾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것은 경기도 지역의 호적자료를 분석할 때에도 마찬가지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19세기말 ~20세기 초 김해김씨는 호주의 성관으로 인구상 1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성관의 인구 순위가 고정된 것은 더 이른 시기였을 수도 있지만 늦어도 19세기 말에는 그렇게 되었다고 파악된다. 따라서 조선후기에 들어와서 김해김씨라는 성관의 사용은 어느 다른 성관의 숫자보다 급증하였음을 잘 말해준다고 하겠다.
이와 같이 김해김씨라는 이른바 대본관으로 통합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달라진 변화는 명조․현조를 확보해야 한다는 집념 아래 조상의 세계를 조작, 소급하는 풍조가 만연되어 갔다는 점이다. 그 결과 18세기 이래 김씨들은 김알지나 경순왕 또는 김수로왕에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각각 거기에 연결시켰던 것이다. 이때 페레올 주교의 「병오일기」에서 언급된 김대건 가문의 의미는 그러한 사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따라서 김대건 가문이 그들의 시조인 김수로왕에 대해서 인식하게 된 것은 이와 같이 조선후기에 일어난 성관 사용의 변화 결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솔뫼 출신인 김대건의 가문이 본래부터 김해를 본관으로 가졌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이미 지적되고 있는 김대건 가문의 이동경로는 여러 가지 점을 시사해주고 있다. 김진후의 가문은 선대가 강릉지방에 살았으나 그 후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계촌리에 자리를 잡고 살았으며, 김진후대에 계촌리에서 30리 떨어진 당진군 솔뫼 지역으로 거주지를 옮겨온 집안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정은 김대건 가문의 경우 처음부터 김해를 본관으로 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생각하게 해준다. 왜냐하면 강릉지역은 강릉을 본관으로 하는 강릉김씨의 대표적 근거지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강릉김씨의 경우 비교적 이른 시기인 1565년에 이미 강릉김씨 을축보를 만들고 있었다는 점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이와 함께 조선후기 일반 평민의 경우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거주지를 본관으로 하였을 가능성도 높다는 점도 생각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솔뫼 출신의 김대건 가문이 출신지도, 거주지도 아닌 시조의 출신지인 김해라는 본관을 강조하는 세계 인식을 보인다고 해서 그의 신분이 양반임을 바로 드러내주는 것으로 이해하기는 어렵다고 하겠다.
3) 족보기재의 의미
김해김씨라는 성관의 사용이 김대건 가문의 신분이 양반임을 드러내주는 것이 아니라면 족보에 김대건 가문의 가계가 기재되었다는 사실을 통해서 그의 가문이 양반신분임을 말하기도 어려울 것 같다.
사실 족보를 통해서 천주교 신자의 가문을 연구하기란 매우 어렵다. 최양업 신부의 경우 족보를 통해서 그 신분을 양반으로 파악하고 있는데, 다블뤼 주교는 양인으로 달리 언급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쉽게 알 수 있다. 주재용 신부나 이원순도 이미 이러한 부분을 지적하고 있다. 무엇보다 족보 마다 서로 차이가 나타나는 등 신뢰성에 많은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족보를 이용할 때에는 내용도 내용이지만, 언제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졌는가 하는 부분에 대해서도 면밀한 검토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조선후기의 족보와 관련해서 기억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조선후기에 들어오면 조선전기와는 달리 족보의 편찬이 양반신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사실 17세기까지 한국에서 족보는 양반의 전유물로 그들이 가진 권력과 특권의 상징물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17세기까지 양반이 아닌 다른 신분은 족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17세기 말 이후 족보는 양반이 아닌 사람들까지 소유하게 되었으며, 족보를 통해서 자신의 가계를 드러내게 되었다. 이제 양반만이 아니라 평민에 이르기까지 다른 신분의 사람들도 족보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 결과 오늘날에는 조선전기와 같이 그 일부가 아니라 한국인의 거의 전부가 족보에 기재되는 것으로 바뀌게 되었다.
조선후기에 들어와서 족보의 편찬이 신분을 막론하고 유행한 것은 이른바 대본관으로 성관이 통합되는 현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특히 18세기에 들어와서 성관이 같으면 동일한 조상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 분명하다는 믿음이 널리 퍼지게 되었으며, 성관이 같은 수십만 또는 수백만 명이 서로 혈연의식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족보의 편찬,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위조 족보의 유행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위조족보란 가계의 위조를 통하여 자신들과 본래 아무런 관계도 없었던 양반들의 족보에 싣는 것을 말한다. 평민들이 족보를 위조하는 이유는 족보를 위조함으로써 양반의 권위에 타격을 주는 동시에 양반이 누리고 있던 실질적인 혜택도 추구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평민들의 사회경제적 조건이 달라졌다는 점도 작용하였을 것이다. 이에 조선 왕조와 양반들은 이러한 위조족보의 편찬을 금지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만 했다. 그것은 18세기 후반에 들어와서 위조족보가 커다란 사회적 문제가 되었다는 사실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노력은 실효를 거둘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왜냐하면 평민들은 양반들의 신분적 절대 우위를 상징해온 족보를 수중에 넣음으로써 출생이 그들에게 씌운 신분의 굴레에서 벗어나기를 열망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에 위조 족보의 편찬은 더욱 유행하게 되었다.
17세기 말 이래 시작된 족보의 위조행위는 20세기 전반에 정점에 도달하였다. 일반적으로 족보의 편찬시기에 대해 17세기까지와, 18세기와 19세기, 한말 및 일제 강점기, 해방 이후의 시기로 구분되고 있다. 17세기까지의 족보는 대체로 사실에 충실하다고 본다. 그러나 18세기 이후 -17세기 후반도 포함될 수 있지만- 19세기까지 창간된 족보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당대인들의 수록에는 큰 문제가 없었으나, 그 성관의 유래와 선대세계에 관한 서술은 크게 어긋나 있다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당대인들의 기록에서도 그러할 수 있다는 비판적 이해도 함께 찾아진다. 그것은 별보와 파보와 관련해서이다.
한말 이후의 시기에는 대체적으로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특히 일제강점기에는 각 성관의 득성 유래와 조상세계․관직 등은 사실의 고증 없이 조작되어 있다는 것이다. 해방 이후 최근에 간행된 족보들은 그 내용에서 일제강점기 때의 그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고 한다. 이에 허위사실이 많이 발견되는 것이 20세기에 발간된 족보로 이해된다. 이러한 까닭에 현대 한국인의 대다수는 오늘날 그들이 가지고 있는 족보의 내용과는 달리 노비와 평민의 후손임이 분명하다고까지 극단적으로 언급되기도 한다.
이에 조선후기에 새롭게 나타난 족보의 유행은 족보의 소지여부만으로 지배양반이 될 수 없다는 견해가 나오게 되었다. 18~19세기에 지배양반이 되기 위해서는 보다 다양한 조건들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지배 양반되기의 제 1조건은 ‘호적상 유학 직역의 등재와 족보 보유’으로 언급된다. 그러나 이 조건에 충족되는 이른바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양반 비중은 19세기 전체 인구에서 60~70%에 달했다는 점이 문제가 된다. 다름 아니라 유학층의 비중이 너무 많다는 것과, 위조 족보의 유행이라는 측면이 고려되었을 것이다.
이에 그 범위는 다른 조건으로 더욱 축소된다. 제 2조건은 ‘유교적 의례의 준행과 다양한 특권’이었다. 이 조건을 충족시키는 양반은 10~15% 정도로 현저하게 축소된다. 제 3조건은 ‘문중과 동성촌락의 형성’이었다. 이제 이 조건을 충족시키는 양반은 전체 인구 대비 5%미만에 불과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3가지 조건 모두를 충족시키는 5% 남짓의 양반이야말로 18~9세기 조선후기 사회를 사실상 지배하는 ‘지배양반’들이었다고 분석하였다. 그러므로 김대건 가문의 경우에도 단순히 족보에 기재되었다는 사실만으로 그 신분을 양반으로 규정하기는 어렵다고 하겠다.
140여파에 달하는 김해김씨의 족보편찬에 대해서는 현재 한국사회에서 이들 성관이 차지하는 비중을 고려할 때 그 양상과 의미를 구체적으로 파악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러나 김해김씨 안경공파 세보에 나오는 김해김씨의 족보편찬 자료를 통해서 단편적으로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족보를 편찬할 때 나온 두 개의 서문이 실려 있기 때문이다. 「소전공 구보 편술기록」과 송시열이 지은 「김해김씨 무신보서」(1668)이다. 소전공의 경우 1628년 족보편찬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이때 금령군을 파조로 삼았다. 이후 나온 「김해김씨 무신보서」는 이를 보다 자세히 보여주고 있다. 김해김씨만큼 세상에 드높은 성씨는 없다고 한다. 때문에 김해김씨 역시 이전에 세보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에 불탔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 결과 김해김씨는 경향각지에 각파로 흩어져, 이미 옛날 같지 못하고 혈록(血錄)이 없는 행인처럼 소원해져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에 세족이 소홀하게 된 바를 비분강개한 사람이 있어 세보를 작성한 다음 자기에게 서문을 부탁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임진왜란 이전에도 세보가 있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17세기에 들어와서 김해김씨 역시 족보를 편찬하려고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김해김씨인 김대건 가문의 경우는 어떻게 족보에 기재되었을까. 17세기 후반에 본격적으로 김해김씨 족보가 만들어졌을 때 바로 거기에 기재가 되었을까 하는 문제가 있다. 아마도 그것은 그렇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족보기록을 따를 때 김진후의 생몰연대가 1735년부터 1814년이라는 비교적 빠른 시기인데 이것은 그가 처음부터 기재되었을 가능성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시에 설혹 그가 양반신분이었다고 하더라도, 그의 거주 지인 솔뫼지역이 월경지라는 점에서 처음부터 김해김씨 족보에 들어갈 수는 없지 않았을까 한다.
더욱이 그가 천주교 신자였고, 박해를 받았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그와 함께 그의 후손이 곧바로 족보에 들어가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것은 당시 천주교 신자에 대한 가족박해를 고려할 때 그러하다. 천주교 신자들로 말미암아 다른 비신자 친척들이 영향을 받기를 꺼려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후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천주교 신자였던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 족보에 기재될 수 있었을까 하는 질문이 제기된다.
현재 김대건 가문이 기재된 족보의 편찬연대도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원순이 이용한 자료를 보면 1840년과, 1862년이라는 19세기에 편찬된 2개의 자료와, 1917년과 1930년 및 1933년이라는 20세기에 만든 3개의 자료가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1862년의 자료는 다른 것과 달리 활자본이라는 점에서 연대의 고증이 필요하다. 한편 대전의 한국족보박물관에는 1830년, 1850년, 1851년에 나온 김해김씨 족보를 소장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김대건 가문을 직접 확인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김대건 가문의 족보 자료는 대부분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것을 이용하였다고 하겠다. 이때 앞서 지적하였듯이 일제강점기의 족보가 가지고 있는 특징을 염두에 두고 김해김씨의 족보편찬을 이해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김대건 가문의 경우 처음에는 족보를 가지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 한다. 김진후의 경우 그를 비롯해서 그의 선대 관력이 보잘 것 없다는 점이 주목된다. 이를 몰락양반으로 볼 수 있는 근거로 삼을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김진후 가문이 사족이라기보다는 평민집안이었을 가능성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보다 더 주목해야 할 사실은 김대건 가문의 경우 파보라는 점이다. 이것은 김대건 가문의 족보 편찬에 새로운 이해를 가능하게 해준다는 점이다. 김용태․마백락에 의하면 김해김씨는 금령군파를 비롯해서 142개의 파가 분파되어 있다. 이때 경 4파가 제일 많은 숫자를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김대건 가문은 경파의 한 인물인 김영정을 파조로 하는 안경공파에 속한다. 그는 성종대 인물이다. 그런데 그 3대손인 인물인 김희현이 아산공파로 다시 분파하였다. 명종대의 인물인 그가 아산현감을 역임하였기 때문이다. 김대건 가문의 경우 계속해서 분파되고 있는 가계에 연결시키고 있다는 점이 중요한 특징이다.
이때 조선후기 파보가 나타나는 배경에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조선후기 위조족보의 유행을 도저히 막지 못하게 되자 양반들은 드디어 족보 편찬에 있어서 일대전환을 시도하였기 때문이다. 이제 리니지의 구성원이 아닌 사람들도 족보에 실어주되 본래의 리니지와는 명칭상 구별을 하기로 한 것이었다. 가계의 연결 관계가 불분명한 사람들을 이른바 별보 또는 별파라는 명칭 아래 족보에 격리 수용하였다. 따라서 별보와 파보에 기록된 사람들의 대부분은 본래 해당 리니지와 아무런 관계가 없었던 사람들이었다. 물론 별보에 수록된 인원들은 불행히도 중간에 계보를 잃는 경우도 있었겠지만, 아무래도 그것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보학이 양반의 필수교양으로 받아들여졌던 시대에 양반으로서 자신이 속한 계파를 모르게 되었다고 하는 주장을 믿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것은 양반들로서는 사실상 숙고 끝에 마련한 대책이었다. 위조 족보의 유행에 겁을 낸 양반들은 ‘별보’와 ‘별파’라는 격리 장치를 고안하여 사태를 진정시키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별보나 파보에 기재된 사람들이 양반의 족보에 완전히 흡수되기를 바라는 갈망이 너무나 컸고, 그것이 일종의 사회적 압력으로 인식된 결과 ‘별보’와 ‘별파’는 결국 위조 족보를 합법화하는 수단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로써 별보와 별파가 가계위조의 합법적인 수단으로 변모하였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고 하겠다. 따라서 양반들의 족보에 별보나 별파로 기재되었다가 나중에 흡수 통합되었던 사람들은 그 대부분이 해당 리니지와는 본래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김대건 가문 역시 처음에는 족보를 가지지 못하다가 그 이후의 시기에 파보에 연결되면서 족보를 가지게 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점에서 최양업 신부 가문의 족보 편찬이 주목된다. 최양업 신부의 동생인 최선정이 족보 편찬에 깊은 관심을 가진 시기는 1863년의 일이었다. 최선정은 1863년 봄에 경상도의 경주 개무더미에 있던 최진사 집을 방문하여 선대의 내력과 종파의 갈린 촌수를 적어가지고 올라와서 병인보(1866)에 입참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왜 이 시기에 들어와서 최선정이 족보 편찬에 관심을 가졌는지 그 배경에 대해서는 자세히 살필 수 없다. 그것은 족보를 없애버린 조부 최인주의 가르침을 어긴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김대건 가문 역시 적어도 이 무렵에는 족보에 관심을 가졌을 것으로 보아도 좋지 않을까 한다. 이때 김해김씨의 여러 파 가운데에서 솔뫼 지역과 가장 인접한 지역인 아산에서 활동한 김희현의 아산공파에 주목하면서 거기에 자신의 가계를 연결시켰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최선정의 경우에 보이듯이 경주최씨 족보의 내용에 혼란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계속적으로 수정 정리해 나갔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것은 일제강점기의 김해김씨 족보에 반영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상의 검토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족보기재를 통해서 김대건 가문의 신분을 곧바로 양반으로 파악하기는 역시 어렵다고 하겠다.
5. 평민설의 새로운 음미
현재 통설로 받아들여지는 김대건 가문의 양반설에 문제가 있다면 평민설을 새롭게 음미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 점은 김대건 가문의 신분을 이해할 때 당대의 사료를 중시해야 하는가, 아니면 후대의 해석을 중시해야 하는가의 문제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이때 아무래도 후자보다는 전자에 더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올바른 역사적 접근방법이 아닐까 한다.
사실 조선후기의 천주교회사연구와 관련해서 이 문제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미 검토되었듯이 내포의 사도인 이존창의 순교에 대한 해석에서 그러한 측면을 쉽게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당대의 자료에서 언급된 내용보다도 오늘의 입장에서 파악한 해석에 크게 치우친 점을 찾아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오늘의 한국천주교회사 연구에서 이와 같이 당대의 사료를 소홀히 여기며 해석을 강조하는 분위기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궁금함을 갖게 한다.
그런데 페레올 주교나 다블뤼 주교가 남겨준 자료들은 이들이 김대건 성인과 함께 살았던 인물이라는 점에서 1차 사료로서 당시의 사정을 구체적으로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페레올 주교 역시 조선후기의 신분제 사회를 나름대로 이해하고 있었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에 관해서는 최양업 신부의 말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최양업 신부는 페레올 주교가 양반중심의 교회운영을 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던 것이다.
다름이 아니라, 베르뇌 주교님의 선임자이신 페레올 고 주교님이 생존하셨을 때, 신자들 사이에 말이 많아 주교님을 원망하는 소리가 높았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페레올 주교님께서 당신을 보좌하는 복사들을 잘못 쓰셨기 때문입니다. 그 복사들은 크게 비난받을 짓을 많이 범하고서도 양반임을 내세워 항상 너무 거만한 행세만 부리므로 모든 교우들한테 미움을 샀습니다. 그러나 유독 페레올 주교님께서는 그들만 사랑하고 신임하시어 그들하고만 모든 일을 의논하셨습니다.(중략) 그런데 앞에서 말씀드린 (페레올) 주교님은 양반 계급만 너무 편애하시어 이미 너무나 비참하고 억눌려 있는 일반 서민들을 더욱 억누르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리하여 신자들 사이에 나날이 더욱 불화가 심해지고, 많은 이들이 의분을 느끼고 자포자기에 빠졌습니다.
페레올 주교와 최양업 신부 사이에 양반출신의 복사들의 행태를 둘러싸고 이견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서한이다. 여기에서는 페레올 주교의 신분관을 논의하기 보다는, 다만 페레올 주교가 조선후기 양반의 존재와 행태를 어느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자 한다. 더욱이 김대건 성인은 페레올 주교가 가까이 데리고 있던 유일하게 유능한 인물이었다고 말하면서, 그에 대한 애정과 안타까움을, 그리고 존경을 드러냈다. 이러한 페레올 주교가 김대건 성인의 신분을 A-①에서와 같이 종과 같은 낮은 신분의 사람이라고 서술했다는 점에서 김대건 성인의 신분을 양반으로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김대건 성인의 순교 이후 그에 대한 교회 내의 공적인 현양운동이 스승이자 장상인 페레올 주교에 의하여 「병오일기」가 수록된 1846년 11월 3일자 편지에서 촉발되었다는 점에서도 더욱 그러하다. 비록 그가 양반신분의 신자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김대건 성인의 가문에 대해서는 그를 올바르게 기억하기 위해서 객관적인 자료를 남기려고 노력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이 보다는 조선의 양반제도가 가지고 있는 모순을 크게 비판한 최양업 신부가 페레올 주교가 종의 신분과 같은 낮은 계급에 속하고 있다고 말한 부분을 A-②에서 왜 생략하고 있는가 하는 점을 문제로 삼아야 할 것이다.
물론 A-① 기록을 의미를 달리 해석하여 양반으로 파악한 견해도 찾아볼 수 있다. 페레올 주교가 김대건 성인이 양반 중에서도 신앙심이 깊은 집안 출신임을 분명히 밝힌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에 페레올 주교가 조선에서 사목활동을 전개할 때 김대건 성인과 같은 양반 신자 계층을 지목하고 이들에게 믿고 의지하는 경향을 보였다고 설명한다. 특히 김대건 성인이 페레올 주교의 양반 편향성에 일정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까지 보고 있다. 김해라는 본관의 사용에서 보여주었듯이 양반 신분을 자랑스럽게 여겼던 김대건 성인이 중국에서 페레올 주교를 보좌한 결과 페레올 주교가 거기에 익숙해져서 가지게 된 관습으로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과 다르고, 지나친 해석으로 생각된다. 이미 검토하였듯이 페레올 주교가 조선시대 김대건 가문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와 같이 파악하기는 어려울 것 같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정은 페레올 주교 보다 자료를 보다 풍부하게 남기고 있는 다블뤼 주교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역시 달레가 저술한 한국천주교회사를 통해서 다블뤼 주교의 신분관을 보다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는 천주교 신자들을 기록할 때 그들의 신분을 파악할 수 있으면 그 직업과 함께 밝히고 있는 것이 서술의 중요한 원칙으로 삼고 있었다. 김진후에 이어 바로 언급되는 유군명 시메온의 경우 면천 소약골 시골 양반집에서 태어났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을해박해 때 순교한 김강이 시몬의 경우 충청도 서산 지방 중인의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리고 또 다른 신학생인 최양업은 양인으로, 최방제는 홍주의 양반으로 분명히 차이를 두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즉 양반, 중인, 평민 등으로 신분을 구별하고 있다.
「서설」의 8장에서 ‘사회신분’을 통해서 이에 대한 내용을 자세히 정리하고 있다. 조선사회는 초기에는 양반과 종의 두 계급만으로 나뉘어 있었다고 말한다. 국민들 대부분은 종, 즉 농노와 노비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보았다. 그런데 이들이 차츰 자유를 획득함으로써 서민(평민)을 형성하였는데, 그리하여 지금 조선에는 이른바 양반, 서민(평민), 노비라는 세 계급이 있고, 그것은 또 여러 부류로 다시 나누어졌다고 한다. 그 결과 노비의 수가 줄어들어 꽤 적은 편이 되었다고 한다. 중인에 대해서도 주목하였다. 양반과 엄밀한 의미의 양인 사이에는 중인 계급이 있는 것으로 보았다. 중인은 실제로는 서울에만 있다고 하면서, 통역관, 천문관, 의관 등의 관직이 여기에 해당된다고 말한다.
양반의 경우에도 매우 구체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양반을 상층 양반과 하층양반, 즉 반양반 또는 향반으로 구분하고 있다. 이때 양반이 가지고 있는 신분상의 특권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으며, 그것이 야기하는 문제점을 지적한다. 그러나 조선후기에 들어와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양반계급이 발생한 이래 그 수효가 엄청나게 늘어난 점이라고 한다. 바로 오늘날 조선의 큰 약점이 되었고, 거기에서 수많은 폐단이 나온다고 설명한다.
특히 진짜 양반과 가짜 양반, 다시 말해서 벼락 양반을 구별하고 있다. 날 때부터의 양반 이외에 새로 된 양반이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임금이나 대신에게서가 아니라 어느 명문거족에게서 돈을 주고 양반 칭호를 사는 돈 많은 사람들이이다. 이때 당시 위조족보의 문제를 설명하고 있다. 그들은 그렇게 해서 아무개의 후손으로 족보에 실리게 되고, 그 후부터 그 집안사람들은 모두 정부와 사회에 대하여 이 새 양반들을 친척으로 인정하고 어떠한 경우에도 친척처럼 지지하고 보호한다. 이런 짓은 법률 규정에는 위반되는 것이나 오늘날 관습화되어, 대신들과 임금까지도 묵인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이때 기존의 연구와는 달리 족보 편찬을 둘러싼 양반과 평민의 갈등을 언급하고 있지 않은 점이 주목된다.
때문에 조선에서도 양반 칭호를 참칭하는 것이 드물지 않다고 보았다. 천주교 신자까지 그러하였다고 한다. 박해 때에 천주교인들은 박해를 모면하기 위하여 흔히 그런 수단을 썼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괜찮음을 알고는 계속 양반 행세를 하였다는 것이다. 그것은 앞서 언급하였듯이 선교사들이 박해를 피하기 위해서 양반행세를 한 것에서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때때로 이런 가짜 양반들을 좀 놀려줍니다. 그러나 진짜 양반인 여러 교우들은 이 일을 더 중대하게 여깁니다. 그들은 자기들 눈에는 커다란 죄로 보이고 이런 폐습에 심한 불평을 토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을 감히 대등하게 대하는 그 상사람들에 대하여 관용하는 잘못을 저지른다고 나를 탓하므로, 그들을 진정하는데 힘이 드는 때도 가끔 있습니다.”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에 인용된 다를뤼 주교의 편지는 천주교 신자들 안에서도 일어난 진짜 양반과 가짜 양반 신자 사이의 갈등까지를 전해주고 있다.
한편 평민의 상태에 대해서도 알려준다. 이들은 전혀 아무런 정치적 세력도 없으며, 법률상으로는 문무 관직을 얻기 위한 과거에 응시할 수 있으나, 실제로는 무슨 칭호를 얻는다 할지라도, 진사나 급제가 되어도 정부로부터 시시한 관직밖에는 결코 받지 못한다고 한다. 이러한 설명은 김진후가 평민으로서 감사 아래 조그마한 관직을 얻었다는 부분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더욱이 이러한 평민이 양반이나 수령들의 착취와 횡포에 서 벗어나기 위하여 토호의 집에 피해가서 그 계집종과 결혼하고 스스로도 노비가 되기를 청하는 예도 드물지 않다고 말한다. 따라서 이와 같이 조선 후기의 신분제도에 대해서 정확한 이해를 가지고 있던 다블뤼 주교가 김대건 가문의 신분을 양반이 아닌 양인 혹은 서민으로 서술한 것은 그대로 받아들여도 좋지 않을까 한다.
끝으로 김대문 성인이 스스로 양반신분임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그만의 특징적인 가문의식을 가지고 있었을까를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른바 김대건 성인의 신분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김대건 성인이 남긴 자료들을 볼 때 그가 스스로 양반임을 밝힌 것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한국의 역사에 깊은 이해를 보여준 김대건 성인이 조선의 신분제도를 나름대로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은 쉽게 알 수 있다. 「조선 순교사와 순교자들에 관한 보고서」에 실린 내용들을 통해서이다.
김대건 성인이 양반출신의 신자들을 언급한 예를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예는 여러 순교자들 가운데 4명에 불과하다. 이 아우구스티노 치문이 저명한 양반가문에서 출생하였으며, 정국보도 양반 가문출신이었다고 한다. 양반인 다미아노는 30세에 천주교의 진리를 이해하였으며, 정 바오로는 그 자신이 양반이면서도 종노릇을 자청한 사실을 알려준다. 이외에 배교자이며 밀고자인 김여삼을 설명할 때 그가 양반출신임을 말하고 있다.
김대건 성인은 양반이란 표현 대신에 저명한 혹은 고귀한 집안, 명문가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신분을 간접적으로 시사해주기도 하였다. 정 바오로의 경우에 처음부터 양반 출신임을 언급하지 않고, 본래 명문가 집안 출신이었다고 설명하였다. 이 막달레나가 저명한 가문에서 태어났다고 말하고 있다. 유진길에 대해서는 고귀한 집안에서 높은 벼슬을 한 부모한테서 태어났다고 말한다. 그러나 저명하거나 고귀하다고 해서 모두 신분이 양반임을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유진길에 대해서 역관이라고 추가로 직업을 알려주고 있는데, 이 경우 그의 신분은 중인이기 때문이다.
초기 교회 지도자들의 활동을 설명하면서도 신분을 밝히고 있지 않은 점도 주목된다. 이벽을 소개하면서도 그냥 유명한 사람이라고 하고 있다. 윤지충의 경우에는 탁월한 학자, 황사영은 고명한 철학자로 말하고 있다. 그들의 능력을 중심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에 일명 만물집 딸, 관리, 역관 등의 직업과 관련된 표현이 더 나오고 있다.
김대건 성인은 과부라든지, 동정녀라든지의 용어를 빈번하게 사용하였는데, 천주교 신자가 되었을 때의 상태를 설명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들의 출신을 기록하는데 별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밖에 경제적 기반을 이야기한 예도 찾아진다. 기해박해 때 순교한 손경서가 부자였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례들을 볼 때 김대건 성인의 경우 양반 중심의 신분제도에 대해서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만큼 김대건 성인은 천주교 신자들이 가지고 있던 지위나 신분보다는 그들의 신앙심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아가다가 신망이 두터운 부모한테서 태어났다고 설명하거나, 정 바오로가 양반이면서도 가장 낮은 신분인 종을 자청했다고 말하고 있는 데서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점들은 김대건 성인이 그만의 특징적인 양반의식을 가지지 않았던 것으로, 그의 신분이 양반이 아니었음을 말해주는 것으로 이해된다.
한편 「조선 순교사와 순교자들에 관한 보고서」는 사제들이 신자들과의 관계에서 어떠해야 함을 보다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어 주목된다. 특히 샤스탕 신부와 관련해서이다.
공경하올 샤스탕 신부님은 천성이 유순하고, 이웃 사람들에 대한 애덕이 특출하며, 인내심도 적지 않았습니다. 신자들의 고해를 들을 수 있을 만큼 조선말을 충분히 익히자 시골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동안에 목마름, 굶주림, 추위와 그 밖의 무수한 간난신고를 겪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겸손, 절제와 그 밖의 덕행들도 감탄할 만큼 두드러졌습니다. 신자들을 만날 때 가장 좋은 어머니와 같은 사랑으로 대하였고 좋은 아버지처럼 가르쳤습니다. 특히 비참함을 견디어 내면서도 그것을 오히려 행복으로 여겼습니다. 가난한 이와 비참한 신자를 보면 몸소 위로하였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후하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자기의 옷마저 그들에게 주는 경우가 자주 있었습니다. 박해가 일어나자 이곳저곳으로 피신하면서 신자들을 위로도 하고 도움을 주며 아버지다운 사랑으로 감싸주었고, 감옥에 갇힌 양들을 위하여 구호금을 모아 도와주었습니다. 나날이 하느님의 사업에 더욱 열중하였습니다. 신자들로 하여금 성사를 받아 튼튼해지도록 더욱 배려했습니다. 마침내 재판소로 오라는 주교님의 명령을 받은 그는 마치 잔칫집에 가는 것처럼 보일만큼 기뻐하였습니다. 그때 편지로 모든 신자들을 위로하고 체포되었습니다. 모방 신부님도 이와 같이 하였습니다.
김대건 성인이 샤스탕 신부에 대해서 언급한 사제로서의 표양은 그가 지향하고자 한 이상적 사제상을 드러내준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그가 양반신분을 자랑하면서 페레올 주교와 함께 양반중심의 교회를 운영하였을 것이라는 해석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위의 내용에 이어져 나오는 것으로, 김대건 성인이 순교한 프랑스 사제들을 위해 바친 긴 기도문을 통해서도 그의 지향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샤스탕 신부를 비롯한 세 사제가 조선의 불쌍한 천주교 신자들을 위하여 하느님께 기도해줄 것을 간절히 청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김대건 성인의 신분관은 오히려 최양업 신부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생각된다. 다블뤼 주교 역시 양반 중심의 조선사회가 가지고 있는 사회적 모순을 심각하게 인식하고 그것을 천주교를 통해서 변화시키려고 노력하였지만, 최양업 신부의 경우 그것을 더 분명하게 지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매우 신랄하게 조선의 양반제도를 비판하였다. 이에 김대건 성인과 최양업 성인은 신학교에서 생활하면서 조선의 사회적 모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을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즉 김대건 성인의 신분관은 최양업 신부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그와 마찬가지로 비판적이었다. 여기에 평민 출신의 김대건 신부나 양반 출신이지만 평민출신과 같이 자신의 신분을 낮추었던 최양업 신부와의 만남이 가지는 의미는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점에서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주교가 언급한 김대건 가문의 신분은 새롭게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교회 측 자료 이외에 김대건 가문의 신분을 파악할 수 있는 새로운 자료에 대해서도 크게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름 아니라 박지원의 연암집에 실린 내용이다. 1797년 7월부터 1800년 8월까지 면천군수를 역임하며 천주교 신자들을 배교시키려고 노력한 박지원은 「순찰사에게 올림」이란 글을 통해서 이 지역 출신의 천주교 신자인 김필군에 대해서 자세히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지난번에 본군 범천면 주민 김필군(金必軍)이 바친 책자를 영문에 보고한 일이 있었는데, 이 일로써 병영이 노발대발하여 심지어 그 죄를 형리에게 전가한 일까지 있었으니 너무도 불안스럽습니다.
김가는 본시 천주교도의 한 사람으로 지난 겨울 동안에 집을 비우고 도망 중이었습니다. 금년 9월 중에 그 자의 호가 속한 5가통 내의 주민 중에서 김가가 도로 제 집에서 지내고 있다고 고발했으므로, 우선 늦춰주어 그가 안착하기를 조금 기다렸다가, 색갈이를 독촉하는 창졸을 시켜 부르면서 패자도 쓰지 않고 관차도 시키지 않은 것은 그 뜻이 실로 알듯 모를 듯 긴가민가 하는 사이에 처지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가 과연 크게 의구심을 내어 즉시 와서 현신하고 소매 속에 든 책자를 바치며 아울러 소지까지 올려 자수하여 죄를 면하는 거리로 삼고자 하였습니다. 그 자는 본시 어리석고 무식한 자라서 책자가 있건 없건 본시 염려할 것이 없으며, 더구나 제가 이미 자진해서 바친 이상 기왕지사를 추궁하여 바야흐로 고쳐먹으려는 마음을 저해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장날을 골라 공개리에 불에 태워 버리라는 뜻으로 그 소지에 제시하고는 자못 위로하고 격려하는 뜻을 보이고서 즉시 물러가게 했던 것입니다.
그 후 병영의 하리가 지나는 길에 본군 이청에 들러 경내에 천주교도가 있는지 없는지 자세히 물었으므로, 여러 아전들이 말하기를,
“전날 천주교를 배우고 익히던 자들이 저절로 사라져 모두 평민이 되었는데, 그 중에 김필군이란 자가 가장 교화하기 어려웠으나 일전에 또 그 책자를 자진하여 바쳤으니 이제는 이 고을 안에 다시 의심할 만한 일이 없소.”
하자, 병영의 하리는 여러 고을을 정탐하려 나왔다는 뜻을 슬쩍 비치면서 바로 다른 곳으로 향해 갔으니, 본 사건의 우여곡절 또한 이와 같을 따름입니다.
김필군의 출신지로 나오는 면천군의 범천면이란 오늘의 당진군 우강면 지역으로, 바로 김대건 성인의 탄생지인 솔뫼가 속한 곳이다. 박지원은 천주교 신자인 김필군이 가장 교화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는데, 이제 스스로 자수하여 천주교 서적을 바친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그런데 김필군의 본관이 김해인지는 구체적으로 언급되고 있지 않는데, 김대건 가문이 이 지역에서 살았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그 역시 김해 김씨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하겠다. 이때 박지원은 충청 감사에게 그의 신분이 평민임을 밝히고 있다. 또한 무식하고 어리석은 자라고까지 말한다. 그렇다면 박지원의 이러한 언급은 솔뫼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김대건 가문의 신분이 어떠한가를 이해하는데 커다란 도움을 주는 자료라고 하겠다.
박지원은 「순찰사에게 올림」에서 부록으로 「병영에 올린 보첩의 초본」을 함께 싣고 있는데, 여기에서는 김필군의 진술을 전해주고 있다.
상기 조항의 김필군을 비밀 관문에 의거하여 잡아와 엄밀히 조사하고 자세히 캐물은 결과, 필군의 진술은 다음과 같다.
“이 몸은 농사짓는 어리석은 백성으로서 글자라곤 한 자도 모릅니다. 이 몸의 자식이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천성이 글 읽기를 좋아하더니 급기야 조금 상성해서는 유업(儒業)을 부지런히 익혔습니다. 그래서 마음대로 서울로 배우러 다니면서 과장(科場)에도 출입했습니다. 집안에 있을 땐 효도하고 공경할뿐더러 글공부를 그치지 않았으며 이따금 이 몸을 위하여 제가 읽은 책의 뜻도 풀어서 이야기했고, 또한 중이나 무당을 몹시 미워하여 간사하고 요망한 무리라 하였습니다.
그 아이의 평일 언동을 보면 절대로 패륜을 저지르거나 남을 속이는 일이 없어 시골구석의 어리석은 백성으로 제 몸을 잘못 가져 제 부모를 욕보이는 자와 너무도 달랐으므로, 이 몸이 과연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하는 말마다 다 들어주고 하는 일마다 다 따랐습니다. 그가 배운 것이 반드시 좋은 책이라 생각하고 그의 이야기를 즐겨 들었으며, 자식을 스승으로 삼아 오직 스스로 받들어 믿으면서 남이 몰라주는 것을 답답하게 여겼던 것일 뿐입니다.
지난 을묘년(1795) 2월 어느 날 그 자식 놈이 불행히도 죽자, 이 몸은 원통하고 슬퍼 날마다 하루라도 빨리 죽어 비하에서 서로 만나기를 소원했습니다. 매일 생각하고 생각할수록 전날의 일러주던 말이 귓전에 역력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남긴 손때 묻은 자취라고는 단지 이 한 책뿐이었으므로, 이 몸은 혹시 그 책을 유실하거나 더럽힐까 두려워서 열 겹으로 싸 간직하고, 움직이게 되면 반드시 몸에 지니고, 때로는 혹 열어 보기도 하여 그 얼굴을 다시 보는 듯이 여겼던 것입니다.
다만 이 몸은 진서(한문)를 모를 뿐 아니라 언문 역시 한자도 모르기 때문에 실로 그 가운데에 어떠한 요사스런 책이 들어있는지 몰랐는데, 이웃들이 이 몸을 지적한 것도 대개 이것 때문이었습니다. 자식 놈이 죽은 뒤에는 듣고 익힐 길이 없을뿐더러 해가 오래되니 자연히 잊혀서 다시는 이런 일로 마음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작년 가을에 사또께서 도임하신 이후로 천주교를 금단하는 일로 각 면에 명령을 전하기를 극히 엄중히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몸은 지레 겁에 질려 다른 곳으로 도망가 있었던 것입니다. ‘조정의 덕화가 하늘같으시어 가급적 형벌을 가하지 않으시니 본군 경내의 이런 무리들이 차차로 미혹을 깨닫고 각기 제 생업에 안착한다더라.’ 하기에 이 몸도 역시 지난달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감추어 두었던 책자를 당장 관에 바쳐야 했으나, 비단 이 몸의 실정이 위에 아뢴 바와 같을 뿐 아니라, 사또께서 확실한 증거물로 우겨서 이것으로 죄를 더할까 두려워하면서 몰래 물이나 불에 던져 그 흔적을 없애려고 했습니다.(중략) 책자의 출처는 이 몸도 그 소종래를 알 수 없으며, 열 두 권이랬자 모두 어린아이 손바닥만 하였으니, 필시 제 자식 놈이 생전에 지어 만들었던 것이라 생각됩니다. 화폭(畵幅)에 대해서는 매번 ‘서울에서 사왔다’고 말했는데, 처음에는 수놓은 것으로 잘못 알았다가 오래 뒤에 수놓은 것이 아니고 그림이라는 것을 깨달았사온데, 200여 냥의 비싼 값으로 사온 것은 실로 그 정도가 지나친 것이었지만, 당시에 이 몸은 죽은 자식을 깊이 믿어서 아무리 가산이 탕진되어도 어리석게도 아까운 줄을 몰랐습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자식 놈이 나이 어린 소치로 반드시 남에게 속임을 당했던 것일 것입니다.
더구나 그 놈이 죽은 뒤로 4년 동안은 간혹 꿈에 보이기도 하였으나, 이에 관한 일로써 문답한 적도 없고, 또한 천당에 가서 있다고 아뢰지도 아니하니, 생사와 죽은 뒤가 판이하게 다르므로 기대와 소망이 전혀 어그러졌습니다. 이로써 스스로 증험해보면 몇 해 동안 공을 쌓은 것이 과연 어디에 있다 하오리까?“
지금 이 필군이 전에는 비록 미혹되었지만, 뉘우치고 깨달은 것이 이전에 올린 소지에 이미 입증되었으며, 흉금을 드러내어 진심으로 복종하는 품이 조금도 숨김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 진술이 전날의 진술과 한결같고, 완전히 마음을 고쳐먹은 형상이 자못 말과 얼굴에 나타났습니다.
김필군은 진술을 통해서 그의 집안이 천주교를 믿게 된 과정을 설명해주고 있다. 그것은 아들을 통해서였다고 말한다. 승려나 무당을 미워하던 그의 아들이 유학을 공부하다가 서울에서 천주교를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때 그는 아들이 모두 12권이나 되는 천주교 서적이나 성화를 가지게 된 과정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그 시기는 아들이 죽은 해를 1795년이라고 말하고 있고, 그가 죽기 이전 몇 해 동안 공을 쌓았다는 말을 전해주는 점에서 1795년보다 몇 해 빠른 시기에 김필군의 아들이 천주교를 믿게 되었음을 시사해주고 있다. 이에 김필군 역시 이러한 아들을 통해서 천주교 교리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그가 아들의 죽음에 대해 ‘천당에 가서 있다고 아뢰지도 아니하니’라고 말하면서 천당을 언급하고 있다든지, 아들이 죽은 뒤에는 아들이 가지고 있던 천주교 서적을 소중하게 보관하면서 아들이 말한 교리를 되새겼다고 한 사실을 통해서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함께 김필군은 자신의 상황에 대해서도 보다 구체적으로 알려주고 있다. 그가 범천면이라는 시골구석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어리석은 백성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는 한문을 모를뿐더러 한글도 역시 한 글자도 모른다고까지 밝히고 있다. 이것은 앞서 박지원의 말에서 그가 무식한 백성이었다고 언급된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고 하겠다. 그리고 김필군은 당시 어느 정도의 경제력을 갖추었던 것 같다. 그의 아들이 서울에서 성화를 구입하는데 무려 200여 냥이나 되는 돈을 지불하였다는 점이나, 그는 스스로 무식한 백성이라고 하면서도 아들이 마음대로 서울에까지 가서 공부를 하도록 했을 뿐만 아니라 과장에까지 출입하게 하였다는 사실이 이를 알려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김필군이 매우 넉넉한 편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는 아들이 성화를 구입하는데 돈을 사용하였을 때 ‘가산이 탕진되어도’ 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김필군은 천주교를 믿기 이전까지 그의 아들로 하여금 과거를 통해서 평민에서 양반으로 신분이 상승되기를 기대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솔뫼 지역에 머물고 있던 김대건 가문의 상황 역시 김필군과 비슷하였던 것이 아닐까 한다. 즉 김대건 가문 역시 평민 신분으로서, 자립할 수 있을 정도의 경제력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헤아려지는 것이다.
6. 맺음말
지금까지 김대건 가문의 신분에 대해 새롭게 알아보았다. 그 결과 현재의 단계에서는 김대건 가문의 신분을 양반으로 받아들이기가 어렵다는 사실들을 구체적으로 검토해보았다. 그보다는 평민설이 오히려 설득력이 있는 견해임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만일 양반설이 올바른 이해라고 한다면 그러한 결론을 보다 실증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구체적인 노력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그렇지 않다면 김대건 가문의 신분에 대한 기존의 연구가 김대건 성인의 ‘양반 만들기’로 읽혀질 수도 있다는 점을 언급해 두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이 경우 최초의 한국인 사제의 신분이 굳이 양반일 필요는 없을 것이며, 양반으로 신분을 상승시켜 만들어야 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접근이 김대건 성인의 신앙과 삶을 제대로 해석하는 데 잘못된 영향을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김대건 가문의 신분에 대한 기존의 연구를 통해서 한국천주교회사의 연구사를 다시 볼 수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프랑스 선교사들의 한국천주교회사 이해와 한국인 연구자들의 한국천주교회사의 그것에 커다란 차이점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앞으로 프랑스 선교사들의 한국천주교회사 연구를 집중적으로 분석할 필요가 있음을 느끼게 해주었다. 이때 한국천주교회사의 연구사가 보다 전체적으로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김대건 가문의 신분에 대한 이해에서 볼 수 있듯이 한국천주교회사의 이해를 위해서 교회사 연구자들이 한국사의 시대사나 분류사의 연구 성과에 보다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함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재 이전보다는 많이 나아지고는 있지만, 일반사의 연구 성과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더욱 기울여야 한다는 점에서이다. 그것은 바람직한 한국천주교회사 연구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연구 자세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한국천주교회사연구와 한국사연구가 제대로 만날 때 한국천주교회사 연구는 더욱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