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옴) 韓國敎會와 敎皇廳

2012. 7. 23. 오후 4:19:28

글자

1984년 3월 92호

韓國敎會와 敎皇廳

崔奭祐 (한국교회사연구소장·신부)

1. 머리말
모든 사람이 구원되기 위해서는 그들이 그리스도의 福音을 듣고 믿을 수 있어야 하고 또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세계 도처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실천하고 하느님을 찬미하는 教會가 세워져야 한다. 실제로 그리스도께서 전인류의 救援(구원)을 위해 교회를 창설하고 사도들에게 복음전파를 위임한 이래 무수한 교회가 세워졌고 또 계속하여 수없이 교회가 세워질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교회를 部分敎會 또는 地域教會(지역교회)라 부른다. 지역교회들의 牧者는 사도들의 후계자인 主教들이다. 그런데 이런 지역교회들은 本 교회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생존할 수 없다. 본 교회란 바로 로마교회를 말한다. 왜냐하면 로마주교는 곧 敎皇으로서 그리스도의 代理者요 또한 使徒團(사도단)의 으뜸인 베드로의 後繼者(후계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지역교회가 오로지 로마교회와의 결합에서 생존하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고 또한 이 결합이 견고하면 견고할수록 지역교회의 생명이 더욱 활기 있고 힘참을 볼 수 있게 된다. 한국교회의 역사는 이러한 진리에 대한 새로운 증명이다.
한국교회는 지금으로부터 2백 년 전인 1784년에 이미 탄생을 보았으나 정식으로 로마교회와 관계를 맺게 된 것은 그로부터 근 50년이 지난 1831 년에 이르러서였다. 이 해에 朝鮮敎區가 설정되고 또 주교가 파견됨으로써 한국교회는 비로소 使徒的 로마교회에 연결되어 普遍敎會(보편교회)의 정식 일원이 되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조선교구가 설정되기 이전에 이미 教皇청과 간접적으로 여러 번 접촉을 가졌고, 그 때문에 조선교구의 설정이 더욱 빨리 실현될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교구설정 이후 한국교회와 교황 聖座와의 관계는 점점 긴밀해지면서 유례없는 비약을 보였고 마침내는 교회의 최고 목자인 교황으로부터 직접 司牧訪問까지 받게 되었다.
한국교회와 교황청과의 관계에 관한 체계적인 연구는 지금까지 전혀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만큼 이 문제가 필자에게 더욱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를 槪說的(개설적)으로나마 정리해 보려는 것은 교황의 訪韓을 목전에 두고 교황 성좌와의 결합이 오늘의 한국교회 발전의 기초와 원천이 되었음을 밝힘으로써 교황의 방한이 그 결합을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어 선교 제3세기를 향해 더욱 발전할 수 있는 전기가 마련되는 데 조금이나마 기여하고자 하는 뜻에서이다.

2. 朝鮮 布敎地에 대한 配慮
조선 지역이 교황청 문헌에 처음으로 나타나는 것은 1660년이다. 이때의 교황은 알렉산델 7세였다. 그는 신심과 학식을 겸한 분으로서 존경을 받았으며 또한 중국교회에서의 祭祀 금지령을 완화하는 등 중국교회에 대해서도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알렉산델 7세는 1660년 南京代牧區를 설정하면서 그 안에 조선도 포함시켰다. 조선 지역에 대한 교황의 이와 같은 배려는 당시 중국의 예수회 宣敎師(선교사)들이 조선에 전도하려는 노력에 호응하여 그것을 격려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 무렵 중국에서 두 차례 조선 傳道가 시도되었는데, 한 번은 徐光啓(서광계)에 의해서였고, 또 한 번은 昭顯世子를 통해서였다. 일찍이 마태오리치의 영향으로 천주교로 개종한 서광계는 당시 明나라 조정의 고관이었다. 그는 조선이 만주인에게 패한 후 1620년경 조선 왕국에 弔意를 표한다는 구실 아래 조선 전도를 시도하려 했었다. 그러나 그의 이런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그 후 明이 망하고 淸이 북경으로 천도하게 되자 인질로 잡혀갔던 소현세자가 귀국 도중 북경에서 예수회원 아담 샬과 친교를 맺게 되었다. 샬 신부는 조선 전도를 위해 소현세자와 함께 예수회원 한 명을 보내려 했다. 그러나 長上으로부터 거절당하자 소현세자에게 聖書와 聖物을 들려 보내는 것으로 그쳤다.
이런 배경에서 조선이 남경교구에 포함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1702년에는 조선이 남경교구가 아니라 북경주교의 관하에 들어가게 되었으니 여기에도 그럴 만한 배경이 있었다. 예수회원이 조선 전도를 거절했다는 소식은 프란치스코회 선교사 카발레라 신부에게 직접 조선에 전도할 용기를 일으켰다. 그는 1650년과 1657년 두 번 廣東과 山東에서 船便으로 조선에 잠입하려 했다. 그의 이러한 계획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의 정신만은 프란치스코회에 이어져 그 회원들이 조선 전도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특히 프란치스코 회원인 베르나르도 델라 키에자 북경주교는 조선이 남경보다 북경에 더욱 가깝다는 이유를 들어 조선 지역에 대한 裁治權(재치권)을 로마에 요청했다. 그래서 로마는 1702년 때까지 남경교구장에게 속해온 조선에 대한 재치권을 북경주교에게 넘겨주었다. 이때의 교황은 끌레멘스 11세였다. 이 교황도 중국을 위시해서 세계 포교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델라 키에자 북경주교의 사망과 더불어 조선은 로마에서 완전히 잊혀지고 말았다.
조선 포교지가 다시 북경주교의 관심사가 되고 나아가서 로마에까지 알려지게 된 것은 조선에 교회가 탄생한 1784년 이후의 일이다. 이때의 북경교구장은 구베아 주교였다. 그는 1785년 초에 북경에 부임하자 조선에 복음이 기묘하게 전해진 소식을 들었고, 1790년에는 북경에 온 조선교회의 밀사들과 李承薫 등의 서한을 통해 조선교회의 기원과 발전에 대해 더욱 자세한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이러한 소식을 로마에 정식으로 알리고 특히 조선포교지의 발전을 위해 책임자를 시급히 선정해야 할 필요를 느낀 끝에 1790년 10월 6일 포교성성 장관에게 두 통의 서한을 띄우게 되었다.
조선에 복음이 전래하고 발전한 경위를 보고하는 서한에서 구베아 주교는 조선에 선교사의 파견이 시급함과, 실제로 조선 교우들이 선교사를 요청했고 그래서 선교사 파견을 약속한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다. 그리고 나서 구베아 주교는 이 반가운 소식을 꼭 교황께 전해주기를 이렇게 간청하고 있다. "교황 성하께서 포교지들에 대해 기울이시는 극진한 열성으로 미루어, 일찍이 그리스도교가 들어간 일이 없었고 인간적으로도 도저히 들어갈 수 없는 이 나라에 거룩한 복음이 전파된 사실을 크게 반가워하시리라 믿습니다.”
과연 조선에 복음이 전해진 소식은 1792년 교황 비오 6세에게 전해졌고 교황은 이에 대해 느낀 기쁨을 포교성성 장관을 통해 북경주교에게 이렇게 알렸다. "우리의 훌륭한 교황께서는 당신이 묘사한 대단히 행복 된 사건에 관한 이야기를 가장 큰 열망을 갖고 읽으셨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셨으며 이렇게 먼 지방의 첫 수확을 하느님께 바칠 수 있게 된 것에 대해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느끼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교황께서는 아주 慈父的인 애정으로 이 유명한 예수 그리스도의 용사인 새로운 자녀들을 사랑하시고, 그 들에게 온갖 영적 善을 베푸시기를 원하십니다. 비록 몸은 그 땅에 없을 지라도 영신적으로는 그들을 바라보며, 비상한 사랑으로써 그들을 포옹하시고 전심에서 그들에게 교황 降福을 내리십니다,'’ 절대주의, 계몽주의 특히 프랑스 혁명으로 일어난 여러 문제로 苦惱(고뇌) 가운데 있던 교황이었기에 이런 소식에서 더욱 위 안을 느꼈을 것이다.
구베아 주교는 조선교회의 관할문제에 언급한 시한에서 물론 이에 대한 최종 결정은 교황청에서 할 일이지만 자신으로서는 북경교구의 평화를 유지하는 관점에서 보거나 또는 지리상으로 보거나 북경교구의 포르투갈 선교사들에게 조선교회를 위임하는 것이 바람직스럽다는 의사를 솔직히 표명했다.
포교성성에서는 1792년 1월 23인 추기경 회의에서 조선교회에 관한 문제를 토의하고 조선교회를 북경주교에게 위임하기로 결의하는 동시에 조선 교회를 위해 5백 銀货의 원조금을 보내기로 의결하였다. 이에 따라 교황 비오 6세는 정식으로 조선교회를 돌보고 보호하도록 구베아 북경주교의 개인 책임에 맡기셨다.

3. 朝鮮敎區의 設定
조선교회를 돌보도록 북경주교에게 위촉하면서 포교성성은 북경주교가 조선에 선교사를 빨리 파견하고 또한 계속 파견할 수 있도록 조선교회의 책임자를 임명할 것을 기대했을 것이다. 과연 구베아 주교는 조선교회에 선교사 한 명 (周文謨 신부)을 파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선교사가 순교한 후 다른 선교사를 파견하지 못하였고 그러는 동안 1808년 북경에서 사망하였다.
한편 18이년의 대 박해로 거의 전멸상태에 빠졌던 조선교회는, 10년 만에 재기하면서 선교사부터 迎入하기로 하고 북경주교와 교황에게 각각 서한을 보내어 선교사를 시급히 파견해 주도록 호소하였다. 1811년 12월 9일 자로 교황에게 보낸 서한에서 조선 교우들은 빨리 선교사를 보내어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줄 것을 간청하고 있다. 이 서한은 마카오에서 대기 중이던 구베아 주교의 후임인 수자 사라이바 북경수교에게 전달되었고, 북경주교는 그것을 교황대사를 통해 교황청으로 보냈다. 이 무렵 교황 비오 7세는 나폴레옹에 의해 프랑스의 퐁뗀블로에서 감금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조선 교우들의 서한은 1814년 8월 리스본에 도착하였고 교황은 이보다 앞서 이미 5월에 로마로 귀환했으므로 퐁뗀블로에서가 아니라 로마에서 조선 교우들의 서한을 받아보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어쨌든
조선 교우들의 눈물겨운 호소 물을 읽으며 이들을 도와줄 수 없는 당시 교황의 안타까움과 괴로운 심정은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고, 교황은 그저 기도를 드리고 하느님께 호소할 뿐이었다고 한다.
한편 조선 교우들의 서한을 받은 수자 사라이바 주교도 조선교회에 관해, 1815년 12월과 1817년 1월, 두 번에 걸쳐 포교성성에 서한을 보냈다. 첫 번째 서한에서 북경주교는 조선교회에 대한 북경주교의 권한이 선임 구베아 주교의 사망으로 끝났음을 상기시키면서 그러나 조선교회의 긴급한 상황을 고려하여 교황대사의 승인 하에 임시로 조선교회를 돌보기로 하고, 북경의 총 대리에게 조속히 조선에 선교사를 파견하도록 지시하였다고 보고하였고, 다음 편지에서는 곧 2명의 선교사를 파견할 계획이라고 하였다. 포교성성에서는 조선 교우들의 교황에게 보낸 서한을 위시하여 조선교 회의 긴급한 상황을 알리는 북경주교의 편지들을 놓고 1815년 1월 추기경 회의를 열어 그 대책을 강구하였다. 동시에 간추린 朝鮮教會史를 작성하여 사전에 추기경들에게 조선교회의 사정을 주지시켰다. 추기경 회의는 조선교우들의 용기에 감탄하고 또한 긴급히 조선교회를 도와야 할 필요성을 느끼면서도 아직은 북경교구에 기대는 길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북경주교에게 서신을 보내어 조속히 조선교회에 선교사 한 명을 보내도록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북경주교는 두 명의 선교사를 조선에 파견하기로 결정 하였다. 그러 나 이 들이 모두 조선 입국에 실패함으로써 조선교회의 문제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뿐더러 그간 조선에 선교사를 입국시키려고 백방으로 노력하던 수자 사라이바 주교도 1818년 마카오에서 사망하였다. 그간 선교사를 헛되이 기다린 조선 교우들은 또 서한을 교황에게 보내고, 그들이 처해 있는 화급한 위험에서 빨리 구해주도록 애걸하였다. 이 서한은 1824년 내지 1825년에 북경교회에 보내졌고, 1826년 마카오에서 라틴어로 번역되어 포교성성에 전달되었다. 조선 교우들은 이 서한에서 종전처럼 선교사의 파견만이 아니라 선교의 보장책을 아울러 요청하면서 이 두 가지 문제는 서로 떨어질 수 없을 정도로 다같이 중요함을 강조 하였다. 당시 마카오 駐在 포교성성의 경리부장인 움삐에레스 신부는 조선 교우들의 서한을 로마로 보내면서 이런 의견을 덧붙였다. "조선교회는 그것을 맡아볼 修道會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조선교회를 북경교구에서 분리시키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조선 교우들의 서한에 접한 포교성성은 1828년 9월 추기경 회의를 열고 조선교회 문제를 진지하게 토의하였다. 이때의 '포교성성 장관은 카델라리 추기경이었는데 布教地에 대한 그의 각별한 관심 때문에 이때부터 조선교회 문제가 활기를 띠게 되었다. 카벨라리 추기경은 조선교회를 선교단에 위임하기로 하고 파리외방전교회와 교섭을 시작하였다. 그러는 동안 파리 외방전교회원인 브뤼기애르 주교가 조선선교사를 자원하였고, 카델라리 추기경은 1831년 2월 2일 교황에 당선되어 자신을 그레고리오 16세로 명명했다. 教皇 位에 오른 지 5개월 만에 열린 추기경 회의에서 조선에 교구를 설정하고 그것을 파리외방전교회에 위임하는 문제가 의결되어, 그레고리오 16세는 이 결의를 인준하고 9월 9일자로 조선교구의 설정을 선포하였다.

4. 두 차례의 諡福(시복)式
비오 9세 교황은 1866년 丙寅迫害로 목자와 가산을 잃고 슬퍼하는 조선 교우들에게 서한을 보내어 이렇게 위로했다. "올해의 기쁜 정초에 여러분에게 연이어 밀어닥친 불행한 소식을 듣고 눈물이 흐르도록 슬펐습니다. 만일 숭고한 신앙의 힘이 나의 연약한 人性의 감정을 억제하지 않았더라면,목자를 잃고 흩어져 생활에 필요한 것을 모두 빼앗긴 채 방랑하고 또는 옥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고통과 학살 등, 여러분을 짓누르는 모든 불행이 나에게 탄식과 눈물을 자아내게 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깊은 슬픔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재산과 생명까지도 바친 용감한 사람들의 영광으로 인하여 가라앉았을 뿐만 아니라 찬미의 노래로 변했습니다.’’ 교황은 조선이 순교의 땅임을 이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벌써 1857년 조선교회의 순교자 중 82명을 諡福(시복)에 필요한 까다로운 절차를 면제시키고 可敬者로 認許하는 혜택을 조선교회에 주었었다. 그러기에 그는 다시 박해를 받은 조선 교우들에게 "교회 안에 다시 생겨난 순교의 영광, 순교자들의 피에서 거두어진 새롭고 더 풍성한 수확, 이 모든 것이 나로 하여금 여러분에 대하여, 주님의 제자들에 합당한 동반자가 된 여러분의 행복에 대하여 거룩한 질투를 느끼게 합니다”라는 최고의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영광은 1925년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상기 82명 중 79명이 福者位에 오르게 됨으로써 그 절정에 이르렀다. 이때 시복식을 계기로 하여 교황은 한국교회의 대표단에게 하례나 특별 알현을 허락하면서 그때마다 한국교회의 영광에 언급하여 "이제 세계의 한 외롭던 邊方이 치명록에 오르게 됨은 성교회의 영광이요 본인과 여러분들의 동일한 즐거움입니다”고 하였다.
1925년에 이어 1968년 로마에서 다시 한국 순교자에 대한 시복식이 거행됨으로써 한국교회는 또24명의 새로운 복자를 탄생시켰다. 교황바오로 6세는 한국과 한국 순교자들에 대해 "오, 한국! 한국은 비록 지리적으로는 멀리 떨어져 있지만 정신적으로는 우리와 아주 가까이 있는 나라입니다. 피로써 신앙을 기록한 순교자들이 스스로를 희생함으로써 진리를 선포하고 기꺼이 죽음을 택한 이 신앙이야말로 이제로부터 영원무궁할 초자 연적 생명과 직결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고 하며 이러한 순교 자를 배출한 한국과 한국교회에 대해 지극한 사랑을 드러냈다. 당시 시복식에 참석했던 한 성직자는 바티칸의 10월 6일(諡福日)은 한마디로 완전히 한국의 날이었고, 한국의 영광만이 크게 두드러진 날이었다고 회고하였다. 한국의 한 외교관은 교황 바오로 6세를 알현했을 때 "저의 기도 속에는 늘 한국이 있습니다. 한국 국민을 위해 제가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이야기해 주십시오. 분단국가 국민이 겪어야 하는 슬픔에 대해 깊은 자비와 동정을 표현합니다”고 한 교황의 말을 회고하였다. 이처럼 바오로 6세는 정말 한국과 한국교회에 대한 사랑을 말씀과 행동으로 보여준 분이었다.

5. 敎階制度의 設定
교황청은 현지인에 의한 교계제도의 수립을 가능한 한 속히 실현시키기 위해 邦人 聖職者의 양성을 수시로 강조해 왔다. 현대에 와서 현지인에 의한 교계제도의 설정이 교황 정책으로 뚜렷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특히 교황 비오 11세 때였을 것이다. 1926년 최초로 중국인 주교 6명을 聖成한 것은 그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1935년 한국의 최초의 방인 수도회인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가 교황청의 인가를 받게 되고, 또 같은 해에 제사 금지령이 완화되고 2년 후 전주교구가 최초의 邦人 教區(방인 교구)로 승격된 것 등은 당시 교황의 그러한 정책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비오 11세의 재위 기간 중 교계제도의 설정에까지는 이르지 못했고, 그것은 그 후의 교황, 즉 요한 23세 때에 가서야 실현되었다. 이 교황 때에 교회 행정의 지방 分權化가 널리 성취되었다면 한국교회의 교계제도 설정도 그러한 교황 정책의 일환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교계제도의 설정은 물론 한국교회에 대한 교황의 특별한 관심의 표명이겠거니와 그밖에 한국교회의 급성장, 한국의 순교자들로 말미암은 깊은 신앙의 유산, 한국교회에 대한 좋은 평판 등이 그러한 결정을 내리는 데 함께 작용할 것으로 생각된다.
어쨌든 1962년 3월 10일자 교황 친서로 한국에 교계제도가 설정됨으로써 한국교회는 비로소 포교지 교계제도를 벗어나게 되었다. 11개 교구가 모두 정식교구로 승격되었고, 뿐만 아니라 그 중에서 서울, 대구, 광주가 大教區로 승격되었다. 이것은 한국교회사에서 매우 중요한 계기를 의미한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한국교회가 이미 幼年期에 있지 않음을 최고 목자인 교황으로부터 인정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인정을 영광스럽게 생각하면서 이에 보답하기 위해, 精神的 財政的 자립을 통해 하루빨리 성숙한 교회로 성장해야 할 사명을 한국교회에 안겨준 것이었다.
1962년 말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에 참석한 한국주교들은 교황을 특별히 알현하는 자리에서 교계제도를 설정해 준 데 대해 교황에게 감사하였고, 이때 교황은 한국교회의 순교 역사를 치하하였다고 한다. 교계제도의 설정 역시 한국교회의 순교자들의 피의 대가에서 얻어진 영광임을 암시한 것이라 하겠다. 한국교회는 교황 바오로 6세 때 또 두 번의 영광에 참여하게 되었으니 즉 그로 말미암아 1968년 한국 순교자 24位가 시복 되었고, 1969년에는 한국교회에 처음으로 추기경이 탄생하였다.

6. 韓國과 敎皇廳
끝으로 대한민국과 교황 성좌와의 외교관계의 역사를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자.
한국에 교황사절이 처음으로 파견된 것은 1919년이었다. 그러나 이때에는 일본 주재 교황사절이 한국교회의 교황사절을 겸임한 데 불과했다. 대한민국에 교황사절이 파견된 것은 1947년 7월부터이다. 이때 미국 메리놀 회원 파트리치오 번 주교가 교황사절의 권한을 지난 교황 순찰사로 파견되었는데 2년 후 정식 교황사절로 승격되었다. 1963년 12월에는 서울의 교황사절 관이 公使館으로 승격되었고 이로써 한국과 교황청과의 외교관계가 정식으로 수립되었다. 이에 따라 당시의 교황사절 델 쥬리체 대주교가 교황공사로 승격되었고, 대한민국은 당시 스위스 대사인 李漢彬씨를 교황청 겸임 공사로 임명하여 교황 바오로 6세에게 신임장을 제정하게 했다. 1966년에는 양국이 대사급 외교사절을 교환키로 합의함에 따라 그 해 12월 12일 델 쥬리체 주한 교황대사가 신임장을 제정했고, 다음 해 1월 30일에는 鄭ᅳ永 당시 스위스 대사가 교황청 겸임 대사로 신임장을 제정했다.



7. 맺는 말
이상으로 한국교회가 어떻게 로마 교황성좌와 관계를 맺기 시작했고 또 그 관계가 어떻게 발전되어 왔는가를 개관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한국교회 및 교황청 양측의 깊은 상관관계를 직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거기에는 한국교회측의 動因과 함께 교황청 측의 동인이 함께 작용했다는 것이다. 일례로 조선 교우들이 두 번씩이나 교황에게 서한을 보내지 않았더라면 교황청이 조선교회에 그렇게 관심을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한편 또 그레고리오 16세와 같은 布教教皇이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조선교구의 설정이 그렇게 빨리 실현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또한 조선교구 설정이 조선교회에게는 뜻밖의 일이었음을 생각할 때 교황청과 지역교회와의 관계는 지역교회 자체보다는 교황 정책에 더욱 좌우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사실은 특히 교황 비오 11세의 정책과 한국교회와의 관계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지면 관계로 한 가지 예만 들기로 한다. 비오 교황은 시복과 시성을 통해 종교생활의 심화를 꾀하였다. 그래서 그는 5백 명을 시복하였고, 32명을 시성 하였는데,5백 명의 시복 중에 우리 79위 복자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한국 순교자의 시복식은 그러한 교황 정책의 일환에서 실현될 수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교계제도의 설정과 더불어 한국교회의 自主와 自立이 선언된 지도 어언 2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재정의 자립이 되지 않아 아직도 교황청 관계에 있어서 포교성성(人類福音化聖省)에 의존하고 있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한국교회는 제도상으로는 자립 교의이지만 실제로는 포교지교구를 면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며, 동시에 그만큼 전 교회에 기여해야 할 자기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된다.
지난번 공의회가 주교들에게 맡은 권한을 이양한 것은 무엇보다도 지역 교회의 주교들이 지역교회를 실정에 알맞게 자주적으로 발전시켜 나가기 위한 것으로 생각한다. 이런 의미에서 지역교회의 주교들에게 무엇보다도 자신의 교구의 이익보다는 그 지역의 모든 교구의 共同 善을 제일 목표로 삼고 각 교구간의 재정적 균형, 인적 교류 등을 주교회의를 통해 해결해 나아가야 할 사명이 주어졌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한국교회에서도 이 문제가 가장 심각하고 현실적인 문제로 지적되고 있는 것 같다. 주교회의가 아무리 協議體에 불과하다 해도 한국교회 전체의 공동 선을 앞세운다면 협의를 통해서도 해결될 수 있고 또 해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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