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및 한국과 관련된 예수회 자료의 성격 | ||
| 박철(한국외국어대 서반아어과 교수, 스페인문학) | ||
| 목 차 1. 머리말 2. 스페인어로 기록된 16세기 예수회 자료 3. 16세기 예수회 신부들이 기록한 조선인 순교자들 4. 세스뻬데스 예수회 신부의 방한과 의미 5. 맺음말 1. 머리말 지금까지는 한국교회사 연구에 고전으로 간주되어온 것은 1874년 파리에서 간행된 샤를르 달레(Charles Dallet)의 한국천주교회사(Historia de I' Eglise de Cor럆)였음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1) 그러나 상당량의 16세기 동서양 접촉사에 대한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이태리어 등으로 쓰여진 원문 자료들이 유럽의 여러 도서관과 고문서 보관소에 파묻혀 있었다. 특히 외국어에 대한 인식 부족으로 이에 대한 연구가 국내 학자의 손에 의해 이루어진 바가 매우 미흡하였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16세기 당시 극동에서 유럽의 선교사들에 의해 쓰여진 보고서, 서간문, 역사서 및 문학작품에까지 나타난 조선인 가톨릭 신자와 순교자에 대한 기록들을 한국교회는 더 이상 모른 체 할 수 없는 때가 왔다고 본다. 그중에서는 예수회 신부 루이스 프로이스(Luis prois)가 1549년부터 1593년까지 극동에서 행한 선교활동을 집대성한 『일본의 역사』(Historia de Jap뾫)는2) 16세기 극동의 천주교회사 연구에 불후(不朽)의 명저라 본다. 프로이스의 『일본의 역사』는 달레의 『한국교회사』보다3) 300여 년 이전에 극동에 머물면서 직접 기술한 것이기에 훨씬 그 중요성이 크다 하겠다. 프로이스의 『일본의 역사』 외에도 예수회 신부 루이스 데 구스만이 1601년에 쓴 『선교사들의 이야기』도4) 한국교회사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는 책이다. 최근 국내에서 이같은 연구에 조금이나마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필자가 1985년 스페인 마드리드 국립대학교에서 발표한 “16세기 스페인 선교사들이 극동에서 행한 문학적 활동에 관한 문헌적 증언"이라는 연구가 시발점이 되었다. 이 연구는 1986년 스페인 외무성 출판부에서 단행본으로 발간되었으며, 국문판으로는 1987년 서강대학교 출판부에서 발간된 바 있다. 필자의 박사 논문(1985년 6월 5일)은 로마 예수회 본부에 있는 루이스 데 메디나 신부의 저서 『한국 천주교 전래의 기원』(Origenes de la iglesia catolica coreana desde 1566 hasta 1784)보다 약 일년 앞서 발표되었다는 사실을 주목해 주기 바란다.5) 필자는 연구를 위하여 유럽의 여러 고문서 보관소와 도서관 등을 직접 방문하면서 자료를 발굴하여 논문을 작성하였다. 본인이 방문한 곳은 포르투갈의 아쥬다 왕궁도서관, 리스본 국회도서관, 꼬임브라대학 도서관, 에보라 고문서 보관소, 스페인 왕립역사학한림원 도서관, 마드리드 국립도서관, 살라망카대학 도서관, 마드리드시청 고문서 보관소, 비야누에바 데 알까르데떼시청 고문서 보관소, 로마 예수회본부 고문서 보관소, 일본 상지대학 그리스도교 도서관, 천리대학 도서관 등지이다. 수 백년 동안 유럽의 도서관에서 햇빛을 보지 못한 한국방문 최초 서구인 세스뻬데스 신부의 서간문등 당시 기록들을 하나하나 찾아내면서 밝혀진 1592년∼1598년 임진왜란을 계기로 수 천명의 조선인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하였으며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하였고, 꿋꿋한 의지로 가톨릭교를 수호하면서 모진 고문과 고통을 참고 순교자의 길을 택하였노라는 당시 선교사들의 기록을 우리는 계속 외면할 수 없다고 본다. 임진왜란이라는 불행한 역사의 그늘에 가리운 채 당시 서구인들의 조선에 대한 기록을 무시해 버리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역사에 얼굴을 돌리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이 모든 보고서와 역사기록문 등, 자료들은 16세기와 17세기 유럽 선교사들이 제 3자의 견지에서 객관적으로 당시 일본의 조선 침략과 상황을 기술하고 있음에 역사적 가치 면에서 중요한 자료로 평가해야만 할 것이다. 풍신수길(豊臣秀吉)의 무모한 조선침략으로 시작된 임진왜란은 우리 민족 전체에 엄청난 상처를 안겨주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조선인이 인질로 잡혀가 노예로 팔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수많은 조선인들이 이국 땅에서의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극복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하였으며, 그 중 상당수가 순교하기도 하였다. 예수회 신부들은 천주교 신도 대명(大名)들을 통하여 많은 조선의 포로들이 노예로 매매됨을 적극 막았으며 참 생활을 할 수 있는 신앙인으로 인도하였다. 2. 스페인어로 기록된 16세기 예수회 자료 1549년 스페인 및 포르투갈의 예수회 선교사들의 노력과 소망에 의해 일본 땅에 그리스도교가 첫발을 딛게 되었다. 1543년 포르투갈인들이 처음으로 일본의 다네가시마(種子島)에 도착하였다. 1549년 예수회 스페인 신부 프란시스코 하비에르는 동료 꼬스메 데 또레스와 후안 페르난데스 신부와 함께 일본 땅에 첫발을 내딛는 서구의 최초의 선교사가 되었다. 일본 교회의 역사는 1549년 하비에르 신부에 의해 설립된 이후 1650년까지 거의 1세기 동안 계속되었는데 피비린내 나는 탄압까지 크게 나누어 그리스도교의 전성시대(1549∼1587)와 수난시대(1587∼1650)를 겪었다. 일본과 인접해 있는 조선왕국에 대한 서구 선교사의 관심은 어떤 것이었느냐는 당시 서간문 기록을 통해서 잘 알 수 있다. 역사적으로 볼때 1571년 예수회 선교사 ‘가스빠르 비렐라' 신부가 처음으로 조선 땅에 복음전파 시도를 했던 서간문을 접할 수 있다. 그는 세 차례나 편지에서 조선 방문 의도를 간절히 갈구했음을 알 수 있다. 가스빠르 비렐라 신부가 1571년 11월 3일 인도 고아(Goa)에서 예수회 총장 신부 프란시스코 데 보르하에게 쓴 편지에서 이미 1566년 명확하게 조선 땅에 그리스도교 복음전파의 첫 구상을 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6) “저는 총장 신부님께 일본의 외곽, 그리 멀지 않은 어떤 나라에 관하여 알려드리려고 합니다. 그곳에 선교단을 파견하신다면 훗날 좋은 결실을 맺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이틀 동안 가면 중국과 일본 사이에 꼬라이(Coray)라 불리는 왕국이 있습니다. 저희들은 그들을 타타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들의 언어는 일본어도 중국어도 아닙니다. 그들은 중국인들이 사용하는 문자를 가지고 있어서 그것을 이용하여 쉽게 서로 의사 소통을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용맹스럽고 활을 잘 쏘며 모든 종류의 무기를 갖고 있고, 특히 활로 무장하여 말을 타고 싸우는 데 매우 익숙해 있습니다. 이들과 교역을 하며 매년 그곳에 가는 일본인들은 그 왕국이 매우 크다고 말합니다. 제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그 왕국은 매우 높은 산맥의 경계에까지 이르고 있으며 다른 편에는 백색 인종이 있는데 산에 살고 있는 많은 맹수들이 위험하기 때문에 교역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추측해 보건대, 반대편에 있는 땅은 독일인것 같습니다. 이 타타르인들은 심성이 매우 온순하다고 합니다. 그쪽에 사제를 보내 할 수 있는 일을 알아보는 것이 뜻깊은 일로 꼬스메 데 또레스 신부에게 받아들여지는데 5년이 걸린 것 같으며 마침내 제가 그같은 일을 해야 하는 사제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나라로 가는 길목에서 일본인과 다른 사람들간에 있는 많은 전쟁 때문에 장애를 받아 제 소망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더 정확한 이유는 후에 저의 일본 체류로 인하여 그 계획이 중단되었기 때문에 아마도 주님 뜻이 아닌가 합니다. 그 보물같은 땅은 그곳을 가치 있다고 여기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만일 사제들이 그곳으로 간다면 주님께 많은 봉사를 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일본 제후들의 도움으로 많은 노력 없이도 그곳으로 쉽게 갈 수 있습니다. 저는 어떤 제후가 그곳을 알고 있기 때문에 서한을 보냈습니다. 따라서 그곳에 충분히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일본으로부터 필요한 물품을 공급하면서 그곳에 거주할 사제들을 도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매년 일본 상인들이 그 땅을 방문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왕국의 항구를 통해서 중국의 황제가 살고 있는 북경이라 불리는 도시까지 갈 수 있습니다. 적절한 시기가 될 때 저희가 그곳에 들어간다면많은 장애가 놓여 있지는 않습니다. 저는 저희 모두가 총장 신부님에 대해 갖는 의무 때문에 많은 일들에 관하여 총장 신부님께 알려드렸으며, 또한 그것을 들어주신 점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비렐라 신부의 서간문을 통해서 일본에서 1549년 예수회 선교활동이 처음 시작된 지 7년 만에 조선까지 복음활동을 구상한 것을 알 수 있다. 비렐라 신부는 1572년 인도에서 죽고 말았다. 그후 예수회 선교사들이 조선 땅에 복음전파를 하고자 하는 노력은 굳게 닫힌 폐쇄적인 조선의 문호를 열지 못했기 때문에 이루지 못했다고 본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조선 왕국의 존재가 최초로 예수회 선교사들에 의해 글로써 기술되어 유럽에 알려지게 되었다. 전쟁초기에 일본군은 승승장구하여 부산성을 함락한 후 수도 서울을 거쳐 평양에까지 단숨에 도달한다. 그곳에서 조선과 명나라의 방어에 부딪쳐 고전을 하다가 일본군은 후퇴하여 이듬해 조선의 남해안 일대 해안가에 성곽을 짓고 전쟁은 소강상태에 빠진다. 이 무렵 1593년 12월 27일 예수회 세스뻬데스 신부가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소서행장과 여러 천주교 대명들의 주선으로 조선을 방문하게 된다. 그러나 신부의 방한은 극비리에 이루어진 비공식적인 것으로서 일본인 천주교 대명들은 전쟁의 어려운 상황에서 정신적 의탁을 위해 신부를 필요로 했으며, 예수회 선교사들은 1566년부터 조선에 복음을 전파하려 한 숙제를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여겼을 것이다. 세스뻬데스 신부의 체류 일년 만에 그의 방한과 활동이 풍신수길의 귀에 들어가자 천주교 대명들은 화를 입을까 두려워 신부를 급히 일본 땅으로 돌려보내고 만다. 이미 풍신수길은 1587년 일본땅에서 천주교 탄압령을 공포한 바 있었다. 세스뻬데스 신부가 방한 중에 어떤 활동과 한국인들에게 복음전파 사업을 했는지에 관해서는 다음 장에 다루기로 하겠다. 임진왜란 기간 중에 수많은 조선인 포로가 일본 땅으로 붙잡혀 갔다. 그리고 노예상인들에 의해 멀리 서양에까지 팔려갔다. 당시 예수회 신부들은 노예로 팔려가는 조선인 포로들을 구출하기도 했으며, 상당수의 조선인 포로들은 가톨릭 교도로 세례를 받고 열렬한 신자가 되었다. 그리고 상당수의 조선인들이 천주교 박해로 인해 죽음을 당하여 순교자가 되었다. 지금까지 발굴한 당시 예수회 신부들의 서간문과 기록 등을 통하여 나타난 조선인 가톨릭 신자에 대한 언급을 소개해 보겠다. 우선 루이스 데 구스만은 『선교사들의 이야기』에서 상당수의 한국인 포로가 시모(九州) 지역에서, 특히 아리마(有馬)와 오무라(大村)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기술하고 있다.7) “신부들의 계산에 의하면, 1594년 3월부터 10월까지 나가사끼(長嶠) 항구와 토키쯔(時津), 콩가, 꼰꾸라로 불리는 세 곳의 수도원에서 12,365명이 고백성사를 보았으며, 900명이 세례를 받았고, 그들의 대부분이 한국인들이었다. 이들은 오무라의 대명인 돈 산쵸가 보낸 사람들이었다. 1595년 동안 고백성사를 본 사람의 숫자가 15,000명에 이르렀는데 왜냐하면 천주교도들은 성탄절을 지내며 각별한 위안과 신앙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또한 아리마 지역에도 천주교 대명들이 보낸 상당수의 한국인 포로들이 도착하였으며 그들의 대부분은 예수회 신부들에 의하여 세례를 받았다고 루이스 데 구스만은 기술하고 있다.8) “천주교 대명(大名)들이 꼬라이에서 보낸 많은 포로들이 오무라(大村) 왕국과 아리마(有馬) 왕국에 있었으며, 그들은 천성이 아주 착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신부들은 중국 글자와 똑같은 그들의 글자를 읽고 쓸 줄 아는 몇 명의 소년들을 뽑아서 신앙교육을 받게 한 후에 그들의 언어로 번역하도록 했다. 1594년에는 2,000명 이상의 꼬라이 사람들이 세례를 받았고, 1595년에는 마침내 그 지역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세례를 받게 되었다." 이 세례의 사실로 보아, 상당수의 한국인이 전쟁동안 일본으로 잡혀갔음을 알 수 있으며 그들 중 많은 수가 예수회 신부들에 의해 교회로 받아들여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예수회의 『일본 개요 부록편』에서 일본에서의 천주교와 노예제도 문제에 관하여 기술이 나오고 있어 참고하고자 한다.9) “노예제도의 시행이 발리그냐노 신부의 주제하에 열린 나가사끼 협의에서 거부되었으나, 히데요시의 조선 침공으로 인하여 규슈(九州)에는 많은 조선인 포로가 들끓게 되었다. 1593년에는 나가사끼에서 300여 명의 조선인 남녀 노예들이 세례를 받았다." 일본에 있던 선교사들은 조선인과의 접촉을 통해서, 조선인들이 매우 재주가 있고 총명하며 천주교 신앙을 잘 수용하고 있음을 그들의 기술에서 밝히고 있다. 루이스 데 구스만도 다음과 같이 조선인 포로들을 잘 기술했다.10) “한국으로부터 천주교 대명들이 보내온 약 1,000명의 한국인 전쟁 포로 이외에도, 규슈(九州)지방에서 새로이 2,180명의 사람들이 신앙교육을 받은 후에 세례를 받았다. 이들 한국 사람들은 영리하여 이해를 잘하므로 천주교 개종이 매우 순조로왔다. 그들을 훌륭히 교육시키는 데 있어, 한국어를 잘 구사하는 어린 소년들이 큰 도움이 되었다." 이러한 기술에서 우리는 흥미있는 사실을 한 가지 발견할 수 있다. 선교사들에게 보내진 한국의 포로들 가운데 나이 어린 아이들이 많았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언젠가는 천주교도가 될 조선 어린이들이 그들 자신의 나라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파해 줄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다. 예수회 신부 루이스 프로이스(Luis Frois)는 1596년 총장 신부에게 보낸 서간문에서도 수많은 조선인 포로들이 가톨릭 신자가 되었으며, 매우 총명하여 언젠가 이들을 통해 조선 땅에 복음전파가 쉽게 이루어질 것임을 확신하였다.11) “올해 이곳 나가사끼(長嶠)에 있는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와 어린아이들도 포함된 많은 한국인 포로들이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들의 수는 1,300여 명에 이른다고 말들하며, 그들 중 대다수가 2년 전에 세례를 받았고 올해 고해성사를 보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우리의 성스러운 믿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 명백한 사실로 여겨집니다. 그들의 심성은 매우 다정하며, 기쁘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천주교인들을 만나는 것에 큰 위안을 받고 있습니다. 그들 중 대다수는 일본어를 곧 배워서, 거의 아무도 통역자의 중개로 고해성사를 볼 필요가 없습니다. 성(聖)주간 저녁에, 성당의 문을 닫고 토요일에 사용할 성수반(聖水盤)을 준비하면서 성당내를 정돈하고 있을 때, 그 일을 끝내기 위해 서두르고 있던 사제와 몇 명의 형제들은 성당문 근처의 밖에서 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들은 창문을 열고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문밖의 사람들은 아주 공손하게 무릎을 꿇고 대답했습니다. “신부님, 저희들은 한국인입니다. 저희는 죄에 대한 용서와 은총을 주님께 요청하러 지금 모두 함께 왔습니다." 그들의 행동은 그들이 속죄하는 소리를 듣고 보던 사제들에게 눈물을 흘리게 할 만큼 피를 뿌리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꾸밈이 없고, 훌륭한 분별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어느 면에서도 일본인들보다 못한 것은 없는 것 같은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우리의 주님께서는 이번 전쟁을 기회로 무엇보다도 그들 영혼의 최상의 행복을 저 한국이라는 왕국의 최초의 종들에게 빨리 주기를 원하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들에 대해 말하는 것은 복음의 전파가 한국에 이른다면(일본 항로를 통해 들어가는 것이 그렇게 어려워 보이지 않습니다) 쉽게 신앙이 받아들여질 것이고 그 왕국들에 신앙이 쉽게 전파될 것이라는 평입니다." 필자는 1971년 서울대학교 문리과 대학 부설 동아문화연구소(소장 李崇寧)에 의해 『임진란사 국외자료─天主敎關係報告書中에서』를 접할 수 있었다.12) 원문은 뺄 훌고니(PEL Fulgoni)신부가 1801년 쓴 자료를 토대로 한 것이다. 이 번역서는 2부로 되어 있는데 제1부는 1784년 이승훈 영세 이후 조선에서의 순교자들의 활동을 다루고 있고, 제2부는 16∼17세기 조선 천주교에 관한 보고를 다루고 있다. 여기서 우리에게 관심을 끄는 것은 제2부의 자료일 것이다. 이 번역서를 내면서 당시 동아문화연구소 소장 이숭령씨도 발간사에서 한국인으로서 최초의 영세자가 이승훈이 아니라, 일본에 납치된 한국인 포로일 가능성이 짙으며, 이는 매우 흥미있는 문제라고 말하고 있다.13) “외국 도서관에 소장된 한국학의 자료를 수집한다는 것은 우리의 오래 품어온 숙제이다.(…) 여기 로마의 바티칸 도서관에 비장된 기록의 전사(轉寫)를 입수하게 된 것은 의외의 소득이 아닐 수 없다.(…) 이 자료는 한국 천주교회사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은 물론이며, 그간의 李朝의 사회상도 엿볼 수 있어 귀중한 자료라고 하겠다(…) 제2편은 16세기 말의 임진왜란과 그 뒤 日本으로 납치된 한국인 포로들의 생활의 일단도 기록되고 이에 앞서 한국의 역사 지리 종교 풍속 등의 사정은, 비록 실정에 어두운 천주교 신부의 손에서 엮어지기는 하였으나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납치된 한국 포로의 천주교 입교와 박해에 있어서 스스로 순교의 길을 택하는 것, 그리고 두뇌의 명석함도 아울러 보고되고 있다. 우리는 이 제2편에서 사료로서의 가치는 史家의 판단에 맡길 것이니와, 이색적인 기록으로서 임진왜란사에서 아직껏 고려되지 않은 면에 새로운 자료를 제공하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인으로서의 최초의 영세자가 이승훈이 아니라, 日本에 납치된 한국인의 포로일 가능성도 짙으며, 또는 창검 아래 영세라고 하더라도 소서행장(小西行長)군의 점령지역의 영세 운운도 이 제2편의 기록대로라면 一次 고려해 볼 흥미 있는 문제라고 하겠다." 이숭령 박사의 발간사에서도 언급하듯이 우리는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16세기 사료(史料)들을 하나하나씩 발굴해 냄으로써 한국인으로서 최초의 영세자가 이승훈이 아니라 임진왜란시 일본에 납치되어 갔던 포로일 가능성이 짙으며, 이에 따라 한국교회사 연구에도 새로운 연구와 전환점이 필요하다고 지적했으나 이 자료도 한국교회사 연구가들에게 관심을 끌지 못한 채 외면당한 듯 보인다. 서울대학교 동아문화연구소에서 번역 발간한 『임진란사 국외자료─天主敎關係報告書中에서』에 따르면, 조선인 개종자에 관한 부분에서 조선인 포로로 끌려가서 천주교도가 된 숫자 중에서 순교한 사람만 5,000명이 넘을 것이라고 적고 있다.14) “일본의 천주교가 조선의 상당히 여러 지역에 移植된 바 있고, 또 그것이 일본의 천주교를 말살시키는 어떤 흉계에서 비롯하였음을 위에 고찰하였다. 이제부터 일본에 포로로 끌려온 조선인 천주교도들에게 눈을 돌리자. 그들 가운데서는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교자들이 많았던 것이다. 조선 포로들의 선량하고 개방된 성격은 선교사들을 놀라게 하였다. 福音전파에 그토록 민감한 사람들을 여태까지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조선 포로인들이 맨처음 일본에 도착한 지 얼마 안된 1596년 그 가운데 백여 명이 나가사끼에서 盛大한 禮式으로 洗禮를 받았다. 주인이 믿는 종교나 풍습이 제각기 다른데도 그들은 천주교도가 된 것이다, 모두가 기대보다는 훨씬 뛰어난 재주를 갖추고 있는지 떠보기 전에 벌써 선포되는 하느님의 말씀을 자기 안에 깨닫고 있었다. 그리하여 처음 들인 努苦로 무려 2천 명의 領洗者를 내는 크나큰 결실을 내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救道하고서도 끝까지 천주교도가 안되고 남아 있는 자는 전혀 없거나 서너 명에 불과하다. 그들의 열심은 새로 入敎한 자들이 入敎시켜 준 자들의 모범이 될 정도로 극진하였다. 이듬해인 1597년에도 수천 명의 세례자가 나왔다. 그네들의 열심은 때때로 상례를 벗어나기까지 하였다. 어느 史家가 이야기한대로 그 해 성 수요일밤 수많은 조선 新入信徒들이 선교사의 교회 안으로 몰려 들어와 자기 몸을 매질하며 커다란 소리로 주님의 자비와 용서를 빌더라는 것이다. 이 소동에 어리둥절한 성당지기는 영문을 몰랐다. 한참만에야 까닭을 알고서 누구냐고 묻자 이런 대답을 하더라는 것이다. “우린 종으로 끌려 온 조선 신도들이외다. 종놈들인지라 내일이면 聖堂에 우리 자리는 남지 않을 게 아닙니까?" 이듬해에도 조선에서 수많은 포로가 끌려 왔는데, 시모(Ximo) 섬에서만 해도 수천 명이 세례를 받아 그 곳의 일본인 신도 1180명보다 훨씬 많은 숫자가 되었다." 이들 모두는 조선에서 세례, 입교하고서 일본에 잡혀 온 동포들과 함께 대부분 신앙 때문에 순교하였다. 그러나 일본인 신자나 마찬가지로 이름이 알려진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우리가 대략 기억해 낼 수 있는 숫자만 해도 조선인 순교자의 수는 5천 명은 족히 넘을 것이다. 조선인 포로들의 신앙생활과 고귀한 순교자로서 죽음을 겁내지 않았던 모습이 유럽의 선교사들에 의해 기록으로 생생하게 남아있는 것이다. 3. 16세기 예수회 신부들이 기록한 조선인 순교자들 풍신수길의 무모한 조선 침략으로 시작된 임진왜란은 우리 민족 전체에 엄청난 상처를 안겨 주었을 뿐 아니라 수많은 조선인이 인질로 잡혀가 노예로 팔리는 결과를 가져 왔다. 한편 수많은 조선인들이 일본에서 예수회 선교사들의 보호와 도움으로 세례를 받고 굳건한 신앙 생활을 하다 순교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을 한국 천주교회가 오늘날까지 외면하거나 묵살한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임을 지적하고 싶다.15) 임진왜란이 한국 민족의 가장 큰 불행이요 가장 큰 치욕의 사건이기 때문에 모든 역사적 사건과 사실을 외면하면서 부정한다는 것은 역사에 대한 더 큰 죄(罪)를 짓는 것이며, 임진왜란의 발발 동기 및 결과에 대한 역사적 진실마저 외면하는 일이 될 것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자료들을 통하여 16∼17세기 조선인 순교자들에 대한 사례를 소개해 보겠다. 뻬드로 모레혼(Pedro Morej뾫) 신부가 1627년 3월 31일자 서간문 보고서에서 조선인 신자들이 임진왜란 중 다수 생겼고 자신도 몸소 세례를 준 순교자 가요(Gayo)와 비센떼(Vicente)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16) “주님께서 행하신 경이로움 중의 하나는 한국과의 전쟁에서 태초부터 예정되었던 많은 영혼을 그 땅에서 구원해 주시기 위한 방편으로 일본의 왕인 다이꼬 사마의 야망과 교만을 거두어 들이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사람들은 훌륭한 천주교 신자가 되도록 하시기 위한 것이었으며, 다른 사람들은 순교자가 되도록 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한국은 동 서 남의 3면이 바다로 둘러 싸인 큰 왕국이고, 단지 북쪽으로만 중국과 동(東)타타르와 접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재능이 있고, 성격이 유순하며 부드럽고 섬세하지만 외국인과의 접촉에는 매우 폐쇄적이어서 많은 노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나라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1591년부터 다이꼬가 죽은 1598년까지 전쟁 중에 그들이 끌고 온 포로들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으며, 그들 대부분은 천주교 신자가 되었습니다. 한편 그 기간동안을 이용하여 신부 두 명이 한국에 들어갔습니다. 우리 집에 들어왔던 많은 한국인들 중에는 제가 세례를 주었던 순교자 가요(Gayo)와 비센떼(Vicente)가 있었습니다.(…) 가요는 1614년 신부들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자 그들과 죽음을 같이하려고 했습니다. 후에 그는 필리핀으로 갔으나 신부들과 신자들을 돕기 위한 열망으로 다시 일본으로 돌아왔습니다. 나가사끼에서 그는 천주교 서적들을 읽어주고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그 일 때문에 잡혀 많은 고통을 받았습니다. 박해자들은 천주교 신자들과 어울리지 않고, 그들에게 책을 읽어주지 않겠다는 조건하에 풀어주겠다고 했으나 그는 천주교 신자임을 포기하지도 않을 것이며 책을 읽어주는 일도 그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자신은 예수회 신부들의 복사라고 덧붙이고, 전부터 천주교를 위해 죽기를 결심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1623년 11월 15일 나가사끼에서 수도자들을 집에 투숙시켰다는 이유로 형을 받은 다른 천주교 신자 하꼬보(Jacob?와 함께 화형에 처해졌습니다. 가요(Gayo)는 50세가 넘었고 반 평생을 교회에서 신부들을 도우며 살았습니다. 그에게 말할 기회는 없었으나 우리 예수회에서 받아들여도 좋다는 승낙을 받았었습니다." 특히 필자가 발견한 사실은 17세기 스페인 극작가 로뻬 데 베가(Lope de Vega)의 작품 『일본왕국에서 신앙의 승리』(Triunfo de la fe en los reino del Jap뾫)에서 1614년 일본의 천주교 박해 중에 미겔 데 꼬레아(Miguel de Corea)와 뻬드로 데 꼬레아(Pedro de Corea)라는 두 한국인이 고치노츄(口之津)에서 순교하였다고 기술되어 있다. 이것이 우리의 교회사 속에는 잘 기억되지 않으나 오히려 스페인의 문학 작품 속에서 한국인 순교자의 이름이 서술되고 있어, 비록 당시 한국 땅에서 직접적인 복음전파가 이루어지지 않았을지라도 수많은 한국인들이 일본 땅에서 열렬하게 천주교에 앞장섰음을 다시금 기억하게 해 주는 자료라 아니 할 수 없다. 조선의 순교자 미겔과 뻬드로의 장렬한 죽음에 관하여 까를로스 스삐놀라 신부가 1615년 3월 18일 나가사끼에서 총장 신부에게 발송한 서간문에서 상세히 기술해 주고 있다.17) “기혼자이며 구지노쯔(口之津) 거주자인 미겔(Miguel)은 48세 된 한국 태생으로서 말씀드린 교수대에 매달리는 것만 제외하고 모든 고문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매달리는 것 대신에 그들은 두 나무 사이에 그의 다리를 압박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모든 사람앞에서 내 이름은 꼬라이 미겔이고 나에게 베푸신 하느님의 은총에 감사드린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이 그의 무릎 뒤 힘줄을 잘랐을 때 그는 쓰러져 죽어갔고 병사들은 참수하고 몸을 토막내었습니다. 미겔은 임진년 전쟁의 두 번째 되는 해에 포로가 되어 나가사끼에 와서 세례를 받았고, 급료를 받았으며 전쟁에 참가하여 다시 자신의 나라로 보내졌을 때 도망칠 수도 있었으나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일본에 돌아와서 노예가 된 누이를 구하기 위해 몇 년간 봉사를 했습니다. 그는 일상생활에서도 매우 신중하게 행동하였으므로 모든 사람들은 그를 모범적인 천주교인으로 여겼습니다. 후에 구지노쯔(口之津)에서 결혼했고, 결혼 뒤에는 예전처럼 주님의 은총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부인에게 종종 말했다고 합니다. 당시 구지노쯔에는 신부가 없었기 때문에 그는 밤에 신부가 있는 가쯔사까지 가곤 했습니다. 하느님은 그의 길을 별로 밝혀 주셨고, 또한 아무 두려움 없이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한국 출생의 38살된 꼬라이 진꾸로 뻬드로(Jincuro Pedro)는 구지노쯔에서 결혼해서 살았습니다. 박해자들은 그의 다리에 주리를 튼 후, 땅에 내던졌고 콩팥 부위 허리에 큰 돌을 올려놓았습니다. 그러나 수 차례 성스러운 예수의 이름을 부르며 용감하게 신앙을 버리지 않겠다고 말을 하자, 입을 망치로 때려 입술을 으깨었습니다. 그렇게 했음에도 굴복하지 않자 어깨에 칼질을 하며 신앙을 포기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결코 배교하지 않겠다고 대답하자 머리를 자르고 그의 몸을 토막내었습니다. 뻬드로는 임진년 전쟁 당시 13세의 나이로 포로가 되었고, 일본에 끌려와 이교도들 사이에서 큰 고난을 겪으며 17년간 노예생활을 하였습니다. 후에 구지노쯔로 가서 생활에 항상 모범을 보이면서 교인이 되었고, 3년 전부터 박해가 시작되자 순교자가 되려는 뜻을 보였습니다. 구지노쯔의 우두머리들이 사효에 도노(Sahjoe Dono)에게 주려고 집을 갖고 있는 교인들의 명단을 만들 때, 그들은 뻬드로가 자신의 집을 갖지 못하고 임대한 집에서 살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쓰려하지 않았습니다. 그같은 소식을 들은 뻬드로는 몹시 슬퍼하였으며, 많은 간청과 애원으로 순교자가 됨을 원하지 않았던 집주인 대신 다른 이들처럼 자신의 이름을 명부에 올리게 하였습니다. 모두는 이를 우리의 주님께서 뻬드로에게 베풀고자 하셨던 특별한 은총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뻬드로는 자신을 이미 순교자라고 생각하면서, 다른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밤낮으로 순교를 위해서 준비하였습니다. 그같은 준비 이전부터 그는 일 주일에 세 번 금식을 하고 두 번 설교를 듣는 일에 습관되어 있었습니다. 순교 전날 밤,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면서 친구와 함께 있을 때 우리의 성모가 자신에게 나타났다고 말하고, 그같은 방문 때문에 매우 만족해하며 친구 또한 순교자가 될 것이니 나와 똑같은 순교를 위해 준비하라고 하였습니다. 다음날 아침, 얼굴에 나타날 정도로 기쁨에 가득찬 그는 순교의 장소에 도착한 첫 사람 중의 하나였습니다." 한국 땅에서 일 년을 머문 후 풍신수길에게 발각되어 일본으로 되돌아가던 도중에 세스뻬데스 신부는 쓰시마섬에 들렀다. 그곳에서 소서행장의 딸이자 쓰시마도주의 부인인 마리아 집에 포로로 잡혀 온 두 명의 아이들 중에 한 명을 일본으로 데려갔는데 그는 비센떼(Vicente)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뻬드로 모레혼 신부는 1627년 3월 31일자 마카오에서 쓴 서간문에서 비센떼의 생애와 순교를 상세히 적고 있다.18) “두 번째는 한국 태생이며 3천 기병대의 위대한 장군의 아들인 비센떼 권입니다. 당시는 전쟁 중인데, 일본인들이 쳐들어오고 있는 것을 안 왕은 궁에서 나와 산중으로 피신했으며, 비센떼의 아버지 역시 그의 가족들을 데리고 왕과 함께 갔습니다. 그리고 일본인들은 마침내 궁전과 도성을 점령했습니다. 비센떼는 12살 내지 13살이었는데, 자유롭고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긴해도 멀리 있는 일본군대를 보면서 자신에게 예정되어진 주님의 영광에 대해 많은 충동을 느껴 적들에게 갔습니다. 그의 수호 천사는 그를 군대의 장군인 고니시 아구스띤(小西, Agustin)의 천막으로 이끌었습니다.(…) 천사같은 그 아이를 장군의 어느 친척이 데려 왔습니다. 일본으로 돌아온 후에 그는 그 아이를 시끼섬의 교회에 데려갔고, 그 아이는 그곳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문자는 중국문자와 비슷하지만 여러 가지 면에서 다른 일본어를 배웠습니다. 그래서 교리 문답의 훌륭한 교육자가 탄생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덕망이 높고 아름다우며 뛰어난 재능을 갖춘 소년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는 동료들을 많이 도왔고, 후에 그들은 자신들이 천주교 신자가 되고 믿음 안에서 생활하게 된 것은 비센떼로부터 받은 크나큰 도움 때문이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같은 감사의 표현은 일본인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의 세례일은 1592년 말이었는데, 몇 년 후에 그의 뛰어난 재능을 알고 신부들이 비센떼를 안내와 통역을 맡은 다른 사람과 함께 데리고 한국에 들어가려고 많은 애를 썼으나 전쟁이 끝난 후여서 불가능했습니다. 그 대안으로 당시 한국은 일본에 대항하여 방위의 일익이 되어 준 중국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으므로 신부들은 비센떼를 북경의 왕실로 보냈으며, 그는 그곳에서 우리의 사제들과 약 7년을 있었습니다. 그는 출중하게 중국어와 한문을 익혔으며, 그 길을 통해 한국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기회는 오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신부들은 일본에 있는 중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동시에 한국인들과 일본인들을 도울 수 있는가를 알아보기 위해 그를 다시 일본으로 오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중국의 법률이 부당하다고 생각하여 일본으로 온 것이기 때문에 비센떼가 염탐꾼일 것이라고 두려워하여 그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음해에 그는 재능이 출중하고 덕망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회에서 받아들여졌고 중국으로 파견하기 위해 마카오로 보냈습니다. 일본의 신부들이 그에 대한 청원을 올린 것은 휠씬 후의 일이었고, 마침내 1620년 일본으로 다시 돌아왔으며 마지막 6년동안 그는 아주 열심히 신부들을 도왔습니다. 특히 성스러운 열의와 신부님들의 보살핌은 그의 여러 지역 순례와 영예를 받을 수 있는 훌륭한 성품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항상 겸손하며 덕망 높은 노력가였습니다. 투옥되어 말씀드린 바 있는 고통을 받았으며, 감옥에서는 모든 사람의 스승같았고 그런 연유로 그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는 짧게 끝날 자신의 생애에 대해 순교의 소망과 열의로 가득 찬 편지를 썼습니다. 그는 46세의 나이로 죽었고 그 중 33년은 우리집에 머물렀습니다." 조선인 비센떼의 장렬한 순교 장면을 서울대 동아문화연구소에서 발간한 『임진란사 국외자료』에서 다음과 같이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19) “1626년 시마바라(Ximabara: 島原)에서 다른 신도와 선교사들과 같이 체포되었다. 그런데 몬도(Mondo)라는 포악한 관리가, 빈첸시오가 중국 말에 능숙하다는 것을 듣고 그를 手下에 거두고자 온갖 甘言異說과 유혹으로 회유하려 들었다. 빈첸시오의 대답은 이러했다. ‘자기는 어려서부터 천주교도로 살아 온 몸이다. 생명은 내놓을 수 있겠지만 신앙만은 내놓지 못하겠다.' 포악한 관리는 당장 노기를 띠고 혹심한 추위 속에 그의 옷을 벗겨 官憲 뜰에 세운 다음 惡黨들을 시켜 쇠집게 같은 刑具로 살을 찝어 뜯고 손과 발톱을 휘젖히면서 背敎하라고 강요하였다. 하지만 고문이 심할수록 그의 의기도 더해 갔으며 그럴 수 없노라고 단호히 잘라 말했다. 노발대발한 몬도는 몸소 쇠집게를 들고서 그의 팔이며 심지어는 콧등과 코구멍까지 사정 없이 비틀어 찢었다. 그래도 마음대로 안되자 다른 형벌을 시작하였다. 차디 찬 물이 담긴 큰 그릇을 가져다 입언저리 얼굴에다 올려 놓고서는 그것에 손을 대지 않고 그릇을 얼굴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배 위까지 옮기라고 하였고 그 짓을 몇 차례나 시켰다. 그는 지칠대로 지쳤다. 그래도 입에서는 주여, 내 영혼을 주님 손에 맡기나이다 하는 기도를 聖三位께 바치고 있었다. 그러다가 엄청난 피를 토하고서 의식을 잃고 말았다. 아직도 바들바들 떠는 손 외에는 전신이 마비되어 있었다.’ 그들은 그를 알몸으로 나무에 묶어 두 시간이나 혹한에 세워 두었다. 의식이 돌아와 다시 물어도 전과 같은 대답이 나왔다. 몬도의 신하들조차도 자기 교를 지키는 데 용감하고 훌륭한 인물이라고 칭찬하게 되었다. 그같은 갖가지 고초를 겪은 끝에 결박되어 감옥에 갇혀 다른 刑罰, 아니면 죽음을 기다렸다. 그때 나가사끼에 새로 부임한 태수의 영이 내려 옥에 갇힌 죄수들을 모두 송치하게 하였다. 거기 당도해서 火刑을 선고받고 성산이라는 곳으로 끌려 갔다. 그곳은 하도 많은 신도들이 殉敎하여 거룩해진 땅이라 하여 이렇게 불렀던 것이다. 산에 이르러 빈센시오는 자기가 묶인 기둥을 부여안고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불타 죽으니 때는 1626년, 스스로 바라지 않던 최후를 맞은 것이다." 서울대 동아문화연구소에서 발간한 『임진란사 국외자료』에 따르면 조선인 포로 뻬드로 진꾸로와 고시로와 안또니오 가족의 순교를 적고 있다.20) “조선 최초의 信徒로서 종교 때문에 피를 흘린 사람들 가운데 뻬드로 진꾸로(Petro, Gincuro)가 있다. 원래 조선의 지체있는 집안에서 태어난 몸이었다. 열 세살에 세례를 받고 그때부터 殉敎할 각오를 하고서 기도와 苦行을 그치지 않고 일주일에 여러 날을 斷食하고 자신을 매질하였다. 1614년 잔인한 박해가 맹위를 떨치고 특히 신도 가정의 家長들을 수색해 내고 있을 당시 그는 고끼노주(Cochinozu)에 살고 있었다. 폭군의 수색에 발각되지는 않았으나 殉敎하기를 열망한 나머지 수많은 일본 신도들과 함께 자수하여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刑吏들은 그를 땅에 거꾸러트려 얼굴을 흙 속에 쳐박게 하는가 하면 모래 바닥에 눕히고 커다란 바위를 배 위에 올려 놓아 우악스럽게 누르기도 하였다. 그래도 굴하지 않자 하나가 한쪽 어깨를 칼로 베어 찌르며 “천주교를 버려라!”고 호통하였다. 뻬드로는 대답하였다. “그런 不測한 말은 못하겠오.” 刑吏의 두번째 칼은 그의 머리를 베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전날 밤에 그가 무척 공경하던 천주의 모친이신 동정녀께서 나타나시어 순교의 투쟁을 격려하시었다고 한다. 그이의 傳求를 입어 그는 1614년 11월 22일 하늘 나라로 凱旋하였다. 고시모 꼬레아(Cosimo Corea)의 殉敎도 그에 못지 않게 유명하다. 그는 다른 신도 넷과 함께 나가사끼에서 체포되어 일본에서도 가장 지독한 옥에 갇혀 삼년이나 신고를 치르게 되었다. 끝내는 다른 세 信徒와 똑같이 火刑을 言渡받았다. 그가 그 고통을 받는 몸이 하도 평온하고 즐거워 보였으므로 중국인 신도 하나는 크게 감명받은 나머지 불속으로 뛰어들려 했다 한다. 많은 이교도가 殉敎者들의 당당한 최후에 느낀 바가 커 入敎하였다. 때는 1619년 11월 28일이었고, 홀몸이 된 아내 아녜스(Agnes)도 3년 후인 1622년 9월 2일 목이 잘려 殉敎하였다. 같은 날 안또니오 꼬레아(Antonio di Corea)는 자기 아내 마리아, 열두 살 난 아들 요한과 세살 짜리 뻬드로가 눈앞에서 목이 잘리는 모습을 목격한 다음 火刑을 당했다." 1624년 죽음 앞에서 엄청난 용기와 믿음을 보이면서 순교한 조선인 포로 가미오 꼬레아에 대한 기록도 소개하고 있다.21) “같은 해 1624년 11월 5일 가이오(Caio)라는 사람이 ‘적은 불’에 타 죽은 유명한 殉敎가 있었다. 그는 야고보 고이시(Jacobo Coisy)라는 일본인 전도회장과 같이 순교하였다. 가이오는 자기 나라에서 한 사람의 哲人으로 행세하였다 할 수 있겠다. 그 굴에는 맹수가 살고 있었는데 그를 해치지 않을 뿐더러 이 손님에게 자리를 양보했다는 것이다. 풍신수길의 전쟁 때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끌려 갔는데… 한 천주교도를 만나 그에게 심중의 열망을 토로하였다. 그리하여 그에게서 敎理를 배우게 되고 드디어 東部에 있는 우리 성당에 안내되어 세례를 받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세례를 받은 순간 그는 內心에 非常한 만족감을 느꼈고 專心을 바쳐 하느님을 섬기겠노라는 크나큰 정열을 얻었다.(…) 화형을 당해야 한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그들은 더없이 즐거워하였다. 그 가운데서도 日本語와 中國語를 잘 알고 있었다. 가이오는 염원해 오던 그 소식에 접하여 붓을 들어 영혼에 느끼는 희열을 몇 줄의 詩句로 나타내었다. 그리고 옛 친구인 조선인이 찾아 오자 방금 받은 그 소식을 무슨 큰 喜報나 되는 양 이야기해 주면서 자기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자기에게 용기를 주시도록 하느님께 빌어달라고 청하는 것이었다. 이런 이야기가 채 끝나기도 전에 死刑執行人들이 나타나 두 사람을 옥에서 끌어내며 길 가는 도중 신앙 따위의 이야기는 꺼내지 말라고 명령하였다. 영혼들의 패하지 않는 守護者 신앙을 옹호해 온 사람답게 비상한 정성을 드러내며 커다란 소리로 성인들의 祈呼稱禱를 念하면서 그 분들의 도우심을 빌었다. 형장에 이르자, 오랜 감옥살이의 신고와 병으로 쇠약해질대로 쇠약해진 몸이면서도, 군중을 보고서는 커다란 희열을 드러내며 달려가 자기가 묶여 죽을 나무를 얼싸 안고 입을 맞추는 것이었다. 야고보도 그렇게 하였다. 그 다음 둘은 나무에 두 발을 묶이었다. 야고보는 바다 쪽의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고 가이오는 산 쪽의 하늘을 응시하고 있었다. 형 집행인이 드디어 장작더미 불을 붙이도록 명했다. 장작은 조금 떨어져 빙 둘러 싸여 있었으므로 불길이 오래 끌며 서서히 태워 죽이게 되어 있다. 불길이 드디어 가이오를 휩싸매 불길 속에 무릎을 꿇고서는, 바라고 바라던 그러한 죽음을 맞게 해 주신 하늘의 主君께 큰 소리로 사례하는 것이었다. 그는 자기가 묶였던 기둥을 다시 부여 안고 예수, 마리아의 聖名을 부르면서 전능하신 천주께 제물로 불타 창조주의 품으로 돌아가니 그 때 그의 나이 50이었다. 허황한 사상을 배워 익혔다는 사람 중 누가 감히 조선 가이오 앞에 설 수 있겠는가? 오랜 탐색 끝에 천주교 안에서 진리를 발견하고 그 진리를 위해 죽어간 가이오, 천주교를 모르는 異方에 태어났어도 드디어 그 진리와 구원을 획득한 가이오가 아니던가?" 이외에도 수많은 조선인 순교자들의 이야기가 선교사들에 의해 기록으로 전해지고 있다. 조선여인 오따 훌리아가 도꾸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부인의 하녀가 되어 총애를 받았으나 천주교를 포기하지 않음에 고즈시마(神津島)라는 외딴 섬으로 유배를 당하며 끝까지 신앙을 지킨 사실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 서울대 동아문화연구소의 『임진란사 국외자료』에 따르면 임진왜란 후 조선 땅에 천주교인이 존재했으며 천주교가 숨어서 생존했을 가능성을 제시해준다.22) “일본에 왔다가 돌아가는 조선 왕의 사신과 함께 신분있는 천주교인 한 사람이 있었다. 도중에 후시나(Fuccina)섬에 들린 일이 있었는데 그 섬에 천주교도가 있는지 아느냐고 백방으로 수소문하던 끝에 한 사람을 찾아냈다. 그 사람에게는 조선인들도 아는 중국어로 된 敎理書가 한 권 있었는데 조선인은 그것을 베껴가면서 그 책으로 자기 나라에 그리스도의 신앙을 펴겠다고 말하더라는 것이다. 그리고 또 비록 이루지는 못했지만 우리 수도회 신부 한 분을 꼭 모시고 가고 싶다 하더라는 것이다.(…) 일본에 붙잡혀 온 그들의 동포들 가운데 背敎한 자가 아무도 없는 점에서 볼 때, 그 끝의 신도들 역시 恒久했으리라고 추측하는 바이다." 순교자들의 피가 붉게 물든 1613년과 1614년에 이어 1619년, 1624년, 1626년, 1627년, 1630년, 1633년, 1643년에 잇따라 조선인 천주교 신도들이 순교했다. 앞에서 언급한 조선인 천주교 신도들의 순교는 신앙을 지키다가 투옥된 유럽인 신부들과 일본인 신자들을 도우면서, 자신과 가족 전체가 극형을 당할 위험 속에서도 선교사들을 과감히 숨겨준 때문이기도 했다. 불행하고 치욕적인 임진왜란 기간 중일지라도 수천명의 조선인이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하였고, 일본 땅에서일지언정 순교를 한 사람 또한 상당수에 이르고 있는데도 그들의 이름과 역사를 한국교회사에서 기억해주지 않는다면 누가 기억해줄 것인가? 그들은 분명 조선인 순교자인데도 일본교회사에서만 기록되고, 기억되어지게 내버려두어야 하는 것이 우리 학자들의 올바른 자세일까? 교황 인노첸스 11세가 그레고리오 로페스 主敎를 조선의 代理區長으로 임명하여 조선의 신도를 돌보게 한 바 있다. 로페스 신부 본인이 布敎聖省의 추기경들에게 자기의 庶任을 보고한 서한은 1684년 6월 11일자로 되어 있다.23) 그레고리오 로페스 신부는 중국 태생으로 도미니코 교단의 회원이었으며 이미 수년간 그 일대에서 선교를 하고 있던 중이었다. 로페스 주교가 교황으로부터 조선교회를 위촉받아서, 노력을 다했으나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다는 사실은 의심할 수 없다. 한국교회에 대한 로마교황청의 관심은 17세기 말까지 계속되었음은 매우 중요한 사실이며 한국천주교사의 전사(前史)로서 정리되어야 할 부분이다. 4. 세스뻬데스 예수회 신부의 방한과 의미 1) 세스뻬데스 신부의 방한 1597년 2월 26일자 세스뻬데스 신부의 편지에서 자신이 직접 기술한 바처럼 그는 한국 땅에 1593년 12월 27일부터 약 일 년 동안 체류하였다. 약 2,000명의 일본인 천주교 병사들을24) 중심으로 세스뻬데스 신부는 그들에게 강론을 하고 세례를 주었다. 앞에서 이미 지적한 대로 세스뻬데스 신부의 방한은 단순히 일본인 천주교 대명(大名)과 병사 2,000여 명을 위한 복음전파사업 말고도, 예수회 선교사들이 1566년부터 계획하기 시작했던 한국 땅에 복음전파하는 숙제를 실천에 옮길 계획도 있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그러한 측면에서 우리는 세스뻬데스 신부의 방한 기간 중 한국인과의 접촉 가능성을 조명해 볼 필요가 있다. 물론 그의 방한 기간이 불교도 대명 가등청정의 밀고 때문에 일년 만에 끝나는 바람에 충분히 원래의 의도와 계획을 수행할 시간이 없었을 것이나 최소한 일본군 요새 내에 붙잡혀 있던 수많은 전쟁포로들과의 접촉 가능성은 크다고 본다. 지금까지 자료만으로는 신부가 한국인들에게 복음전파사업을 했는지에 관한 직접적인 기술을 충분히 찾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발견된 자료와 편지에 의하면 세스뻬데스 신부는 단지 일본군의 요새 주위에서만 복음을 전파하였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한국 땅에 일년 머물고 있는 동안 세스뻬데스 신부는 일본 남부의 규슈(九州)지역, 특히 그가 좋은 친분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천주교 대명들인 아리마도노와 오무라도노의 영지에서 여러 해를 보내었다. 세스뻬데스 신부가 한국에서 쓴 편지는 아리마(有馬)와 오무라(大村)의 영주는 물론 그외 여러 명의 천주교 대명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것이 언급되었다.25) 세스뻬데스 신부는 한국 땅 및 중국 땅에까지 예수회의 숙원 사업이었던 복음전파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사실이 일본주재 예수회 부관구장 뻬드로 고메스(Pedro G뾪ez)의 편지에서 잘 나타나 있다.26) “어제 3월 21일 저는 천주교인인 다른 도노(殿)들과 아구스띤(小西行長)과 함께 그곳(한국)에 있는 일본인들로부터 고해를 받으며 한국에 머물고 있는 그레고리오 데 세스뻬데스(Gregorio de C럖pedes) 신부의 편지 한 통을 받았습니다.(…) 그 편지에서 그는 중국의 황제와 일본의 왕 사이에 있었던 평화협상에 참여한 중국 황제의 장군이 자신이 있는 그곳에 도착했다고 말했습니다. 아리마(有馬)의 도노(殿)에 의해 아구스띤과 함께 그 장군이 초대되었고 그레고리오 신부는 아구스띤의 배려로 그 장군을 만나러 갔었다고 합니다. 그곳에서 그는 장군에게 우리들은 단지 주님의 계율과 구원의 길을 설교하기 위해서 일본에 왔으며, 일본인들은 현명한 사람들로 그것을 받아들였다고 말했습니다. 그에게 주의 뜻을 중국에서 자유로이 설교할 수 있도록 장군께서 황제의 허락을 받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간곡히 그 일을 그에게 부탁했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 대한 그같은 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를 바랬기 때문입니다. 이와 더불어 그 장군은 이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할 아구스띤과 같은 편에 서서 그와 함께 허가를 요청해 보겠다고 말하고, 자신이 일본 왕의 외교 특사와 함께 궁전으로 돌아오는 5-6개월 후에 답을 가져오겠다고 말하면서 의도했던 것 이상으로 자청하고 나섰답니다. 그 일은 그렇게 일단락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그에게 어떤 돌파구를 주실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프란시스코 하비에르(Francisco Xavier) 수석사제가 주님의 뜻이 일본을 통해서 중국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말하는 소리를 여러 번 들었습니다. 중국 땅에 주님의 계율이 전해지는 방법에 모든 문이 닫혀버렸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목표를 잃었던 그 중국 땅에 주님의 은총과 자애가 내리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일년 만에 한국 땅에서 일본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세스뻬데스 신부는 또다시 쓰시마 섬을 들렀는데, 그곳에서 소서행장의 딸이자 쓰시마 도주의 부인인 마리아의 집에 포로로 잡혀 온 두 명의 한국인 아이들을 보고서 그는 일본에 있는 예수회 신학교로 그 두 어린이 중의 한 명을 데리고 갔다. 루이스 데 구스만(Luis de Guzm뇆)은 이 사건에 대해서 『선교사들의 이야기』에서 상세히 언급하고 있다.27) 세스뻬데스 신부에 의해 일본의 신학교로 데려 온 어린이는 비센떼(Vicente)라는 세례명을 받았으며, 신부들에 의하여 교육을 받았고 나중에는 훌륭한 교리 강론자가 되었다. 비센떼는 1614년에 후안 바우띠스따 솔라 신부와 함께 북경으로 가서 북쪽의 국경선을 통하여 한국 땅으로 들어가려고 4년 동안 머무르면서 국경을 넘어갈 기회를 엿보았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결국 1620년 12월 22일 시마바라(島原)에서 후안 바우띠스따 신부와 그외 여러 천주교 신자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감옥에 있으면서 그는 당시 일본 예수회 관구장인 프란시스코 빠체코 신부에 의하여 예수회에 받아들여졌다. 비센떼와 그의 동료들은 1626년 6월 20일 나가사끼에서 화형을 당하여 순교하였다. 비센떼의 활동과 순교에 대한 상세한 기술은 이미 앞장에서 소개한 바 있다. 이처럼 한국 땅에서 돌아온 이후, 세스뻬데스 신부는 한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그의 꿈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비센떼는 그러한 노력의 좋은 본보기 중의 하나였다. 임진왜란 중에 수많은 한국인 포로가 일본 땅으로 잡혀간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큐슈지방에서 예수회 선교사들은 천주교 대명들과 협조하여 한국인 포로들을 천주교 신자로 만들었고 어린아이들의 경우는 신학교에서 교육을 시키기도 하였다. 앞장에서 보았듯이 그중에는 수많은 한국인들이 가톨릭 신자가 되어 일본 땅에서 순교했던 것이다. 2) 세스뻬데스 신부에 대한 새로운 평가 스페인과 포르투갈인들을 중심으로 한 유럽예수회 선교사들에 의하여 처음으로 동양과 서양의 문화적 접촉이 16세기에 이루어졌음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나 서구 선교사들은 1592년 전까지는 한국에 대해서 올바르게 알지도 못했으며, 접근조차 이루어지지 못했다. 당시 조선왕국은 임진왜란을 계기로 하여 굳게 닫혔던 문호가 타의에 의해서 열렸고 전쟁을 통하여 그때까지 가려졌던 베일이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일본에서 활동 중이던 서구 선교사들은 한국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전쟁의 상황과 아울러 한국에 대한 기술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세스뻬데스 신부도 1593년 12월에 전쟁을 계기로 한국 땅을 밟게 되는 최초의 서구인이 되었으며, 머무는 동안 보고 들은 당시 상황을 글로 적은 4통의 서간문을 남겼다. 이런 점에서 그레고리오 데 세스뻬데스 신부를 포함한 예수회 선교사들은 16세기에 처음으로 한국의 존재와 모습을 정확하게 서구에 알린 주인공들임에 틀림없다. 세스뻬데스 신부의 방한은 천주교 일본 대명들의 주선에 의해 개인적으로 은밀하게 이루어진 것인데, 국내문헌에서는 일본군의 종군 신부라고 기술한 것은 잘못이라고 본다. 지금까지도 국내 교회사학자들은 세스뻬데스 신부를 임진왜란시 “일본군의 종군 신부"였다고 간주해 오고 있다.28) 세스뻬데스 신부를 이와 같이 불러도 괜찮을 것인가? 분명히 얘기해서 그렇지 않다고 본다. 이에 관해서 이미 필자가 종군 신부가 아니라는 논문을 소개한 바 있으며, 로마 예수회 역사연구소의 메디나 신부도 다음과 같은 8개의 이유를 들어서 반박하고 있다.29) (1) 세스뻬데스 신부 및 그의 동료 환깐 레옹(Hankan Leon)은 1587년 7월 25일자로 히데요시 칙령에 의해 공식 추방된 사람들입니다. 이와 같은 판결은 히데요시 생존기간 중 철회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1597년 3월 20일에 추인되었습니다. (2) 세스뻬데스 및 환깐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주둔지의 천주교도인 무장들 및 사병들의 요청에 따라 그들의 장상 뻬드로 고메스에 의해서 고문가이(웅천)에 파견되었습니다. 1592년과 1593년 본국으로 귀환한 일부 일본인들과는 달리 고니시 유키나가 휘하의 장병들의 경우 그들의 종교적인 연례의무를 이행할 수 없다는 것이 성직자 파견을 요청한 이유였습니다. 고니시도, 어떤 다른 장수도, 더구나 히데요시도 세스뻬데스 신부를 군종 신부로 임명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3) 세스뻬데스 및 환깐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함께 조선에 온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침략기간 중이나 서울 및 평양으로의 진격과정 중에서도 그리고 고문가이-부산으로의 후퇴기간 중 일본군을 종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일본군이 전열을 정비하면서 외교적 채널을 통한 평화적 해결을 기다리기에 적합한 곳에 머무른지 7개월 후에 조선에 도착했던 것입니다. (4) 세스뻬데스는 정체를 용이하게 감출 수 있는 환깐을 통하여 유키나가의 형제에게 도착한다는 사실을 알린 후에 고문가이에 은밀하게 상륙하였습니다. 일부 천주교 신도들은 물론 이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즉 모든 예방책을 강구한 후에 세스뻬데스는 조선 땅에 발을 딛었던 것입니다. (5) 조선에 도착한 날인 1593년 12월 28일 이후에 세스뻬데스 및 환깐은 고문가이 성채의 가장 높은 곳에 숨어 지냈습니다. 성직자가 조선에 와 있다는 사실을 비밀로 하라는 주의를 받았기 때문에 단지 영성체를 희망하는 천주교인들만이 그곳의 예수회원들에게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6) 구로다 요시타카(黑田孝高) 및 그의 아들 나가마사(長政)를 방문하거나 또는 소오 요시토시(宗義智)의 거처로 간다든지 하는 경우에만 매우 이따금씩 세스뻬데스와 환깐은 고문가이 성채를 떠났습니다. 즉, 그들은 비천주교도인 장병들에게 그들의 존재를 비밀로 하기 위해 예방조치를 철저히 강구했던 것입니다. (7) 유키나가 휘하의 중태에 빠져있는 장병들이 성직자의 도움을 요청하였을 때에도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세스뻬데스는 밤에 행동하였습니다. (8) 그리고 정상적인 군종 신부와는 달리 세스뻬데스 및 환깐은 장병막사에서 장병들과 형제로서 교제활동을 전개하지 않았습니다. 최소한 한국 및 여타의 국가에서 사용되는 “군종 신부"라는 용어의 의미에 비추어 볼때 군장병들이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숨어지내야 했던 성직자에게 “군종 신부"의 타이틀을 부여하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스뻬데스가 사람들의 눈에 띠지 않는 곳에 머무르려고 하였다는 또다른 증거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들 수 있습니다. 즉, 두 명의 예수회원들은 그들이 조선에 있다는 사실이 카토오 키요마사 도라노스케에 의해 탐지되자 1년 만에 일본으로 귀환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실로 인해 고니시는 비난을 받게 되었고 히데요시는 그에 대하여 의심을 품게 되었습니다. 임진왜란 중 또다른 선교사들이 한국에 왔었을까? 그렇습니다. 다무라(田村) R뾪an이라는 일본인 수사와 함께 스페인 출신 예수회신부인 프란시스코 데 라구나(Francisco de Laguna)는30) 아리마의 다이묘(大名)인 아리마 하루노부(有馬晴信) Protasio의 요청을 받고 조선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방문은 세스뻬데스의 경우보다 더 철저히 비밀을 유지한 채 이루어졌습니다. 1597년 라구나 신부의 한국 방문은31) 아리마 대명의 부인이 출산을 하던 중 부인과 아이가 모두 죽었는데 이들을 위한 성사를 집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방문은 세스뻬데스의 경우보다 더 철저히 비밀을 유지한 채 이루어졌습니다. 그들의 방문은 1597년 12월과 1598년 1월까지 2개월에 불과하였습니다. 우리 민족의 불행한 전란을 목격한 최초의 서구인 세스뻬데스 신부는 선교사의 입장에서 당시 전쟁을 객관적으로 기술하였으며 하루 빨리 조선 땅에 평화가 깃들기를 빌었다. 그는 풍신수길을 평하여 이성을 잃은 인간, 탐욕적인 인간, 비천한 인간, 천주교의 적으로 기술하였다. 세스뻬데스와 그의 동료 예수회 신부들은 많은 조선인 포로들이 일본 땅에서 노예로 매매됨을 적극 막았으며 참 생활을 할 수 있는 신앙인으로 인도하였다. 또한 그때까지 유럽에 알려지지 않았던 조선 왕국의 베일을 벗기면서 한국 문화의 우수성과 창의성을 소개하였고, 거북선과 조선 수군의 승리와 의병들의 용감한 전투에 대한 귀중한 기록을 우리에게 남겨주었다. 5. 맺음말 임진왜란이 불행한 사건이라 하여 그 자체를 외면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며 임진왜란을 계기로 서구인에 의해 기록된 조선인들에게 뿌려진 가톨릭 신앙과 순교자들의 흔적을 우리 스스로가 무시하는 것은 양심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일본 땅에서 이루어진 조선인들의 가톨릭 개종과 순교가 그 이후 조선의 교회사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는 직접적인 증거가 미미하다 해도 그리고 한국교회사의 기원과 시발점으로 삼느냐 아니냐의 문제를 차치하고서라도 한국교회사의 전사(前史)로서는 인정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교회사 연구에 고전으로 간주되어온 것은 1874년 파리에서 간행된 샤를르 달레의 『한국교회사』 (Historia de L'Eglise de Cor럆)였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의 전교 신부였던 달레 신부가 조선에 와보지도 않은 채 수집된 2차적 자료를 갖고서 펴낸 이 책은 한국천주교회사에 관한 不朽의 名著로 널리 평가되고 있음이 사실이다. 상·하 2권으로 된 이 책은 한국학개론인 序說과 순교사를 중심으로 한 한국교회사의 2부로 편제된 대질의 저서로 한국교회사 편찬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한 通史書라 하겠다. 그래서 오늘날 국내 교회사 연구가들이 가장 애용하는 연구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그러나 16세기 예수회 선교사들이 일본과 중국 그리고 조선 땅에까지 도달하였고 극동에서 선교에 힘썼던 것은 주지하는 역사적 사실이다. 예수회 신부 루이스 프로이스(1532∼1597)는 일본 땅에 머물면서 선교사들의 모든 활동을 기록하였으며 1593년까지 극동과 조선에 관한 귀중한 기록을 남겼다. 그는 1563년 일본에 도착한 후 34년 동안 머물면서 100통 이상의 서간문 보고서와 예수회 일본 연례 보고서를 작성한 장본인이다. 이 글 속에는 일본의 천주교 전래 기원은 물론, 선교활동과 1592년 임진왜란의 발발 배경과 전쟁 상황, 그리고 조선인 포로에 관한 기록과 천주교인으로 세례받은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루이스 프로이스 신부가 남긴 기록은 1976년부터 포르투갈 리스본 대학에서 로마 예수회 역사 연구소 죠셉 비키 신부에 의해 현대본으로 옮겨져 『일본의 역사』 (Historia de Jap뾫) 5권으로 출간되었다. 교회사 연구를 하는 학자라면 필수적으로 읽어야 할 책이 바로 『일본의 역사』이기에 국내에서도 5권의 완역이 시급히 요청된다. 한국교회사 연구에 있어서 시야를 넓히고 16세기 동서양의 최초 접촉 및 근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샤를르 달레의 『한국교회사』에 집착할 시대는 이미 지나갔으며,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의 역사』, 루이스 구스만의 『선교사들의 이야기』와 기타 고문서들을 사료(史料)로 삼고, 16세기 한국교회사 연구를 진지하게 시작할 시점에 있다고 본다. 그리고 16세기 스페인어 및 포르투갈어로 된 고문서 및 자료 연구를 본격적으로 할 수 있는 교회사 연구가가 나타나서 우리의 올바른 한국교회사를 정립하여야 하겠다. 조선인의 순교자들 중에 가요와 비센떼 등은 복자 품에 추서되었다고 하나 뻬드로, 미겔 등 수많은 순교자들은 복자 추서도 되지 못하였다. 우리 학자들의 연구와 고증에 의해 무지했던 16세기 한국 천주교회 전사(前史)에 대한 정립이 시급히 요구된다. 토론요지 전수홍(로마 그레고리안대, 교회사) 일반적으로 “역사는 인과관계 없이 갑작스럽게 만들어지지는 않는다”는 말처럼 오늘 발표자이신 박철 교수님께서는 한국의 천주교회사도 1784년 이승훈의 영세를 중심으로 한 당시의 한국천주교회 창설이라는 기원문제에 대해 일종의 전사(前史)로서 2백년을 앞당긴 임진왜란 시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즉, 당시에 일본에서 선교활동을 담당하던 예수회 선교사들이 일본교회의 상황이 어려워짐에 따라 전부터 관심을 가져오던 조선선교를 위한 여러 서신들과 기록들을 다양한 국내외 자료들을 바탕으로 해서 16, 17세기 일본 및 한국과 관련된 예수회 자료들을 연구하고 그중에서도 조선관계 자료들을 발췌해서 한국 천주교회사의 여명기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특히, 스페인 예수회 선교사 세스페데스 신부의 조선입국과 그분의 입국목적에 대한 새로운 견해와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들 중 수천 명이 세례를 받고 남다른 신심생활의 모범을 보이고 순교한 사실들을 토론자로서도 공감하고 인정하는 바입니다. 지난 1993년 12월 28일자 로마 교황청 신문 오세르바토 로마노(Osservato Romano)에서도 로마 그레고리안대학교 선교학부 학장인 로페즈 가이(Lopez-Gay) 신부님도 「한국 천주교회의 탄생 4백주년 기념」이란 제목으로, 즉 세스페데스 신부의 조선입국 4백주년을 기념해서 신문의 2면에 걸쳐서 소논문으로 발표한 바 있습니다. 이 소논문의 출처도 루이스 데 메디나 신부의 저서 “한국 천주교회의 기원”에서 그 바탕을 두고 있는데 문제는 예수회 대학의 본산이라고 할 수 있는 로마 그레고리안대학교의 선교학부나 교회사 학부에서 가르치는 한국 천주교회사가 이런 내용만을 강조하고 있고 한국에서 주장하는 18세기 말의 자발적인 조선 천주교회의 창설부분은 간과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까지 한국교회사 학계에서는 선교와 교회창설이란 것은 교회법적으로도 속지주의(Territorialism)가 적용되는 바 조선영토 내에서 신앙공동체가 형성되는 시기가 중요하다고 보고 임진왜란 이후 일본서 영세한 신자들이 귀향 후의 신앙활동 흔적이(성물 문헌 책자…) 전혀 발견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에 대한 교회사적 가치를 간과해 온 것도 사실입니다. 반면 유럽의 예수회 측에서는 만일 일본에서의 최초의 조선인 영세와 조선교회의 창설을 긍정했을 때 1) 조선교회는 평신도들에 의한 자발적인 교회창설도 아니요, 프랑스 파리 외방 전교회에 의한 조선교회의 형성(교계제도, 영성, 전례, 심신생활…)이라는 종래의 설은 예수회에 의해서 전래되었다는 설로 바뀌게 되며, 2) 조선교회는 중국으로부터 서적을 통한 신앙의 전래라는 종래의 설이 일본으로부터의 전래라는 설로 바뀌는 혼란 때문에 이 견해를 도외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고 문제를 제기합니다. 이와같은 이견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진실을 추구하고 있었던 사실에 대해 무시나 극단적인 과장없이 밝혀져야 할 것입니다. 이런 점들과 관련해서 몇 가지 질문을 드린다면, 1) 발표자의 박사논문 『16세기 스페인 선교사들이 극동에서 행한 문화적 활동에 관한 문화적 증언』에서 선교사들의 문화적 활동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성격의 내용을 의미하는지 간략하게 설명해 주십시오. 2) 필자께서 첫 페이지에 서술한 유럽의 여러 도서관과 고문서실들을 방문하셨는데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 어떤 장소에 어떤 관계문헌들이 소장되어 있다는 것을 몇 가지라도 설명해 주실 수 있는지, 아니면 특히 어느 곳에 한국관계 자료가 많이 소장되어 있는지 설명해 주신다면 후배들을 위해서라도 유용하리라고 생각됩니다. 3) 세스페데스 신부가 조선에 입국한 것이 공식 군종 신부의 자격으로 입국한 것이 아님은 공감하지만 그가 조선체류 1년 동안 조선인과의 접촉이 있었다는 사료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결국 일본의 군인들을 위해 사목활동을 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생각되는데 필자의 견해는 어떠신지요? 4) 필자께서는 16세기 말의 일본에서 수많은 조선인들의 세례와 신앙생활, 순교 등을 한국천주교회의 기원으로 보시는지요? 답변요지 1) 본인의 박사논문 제목은 우리말로 번역하면 『16세기 스페인 선교사들이 극동에서 행한 문화적 활동에 관한 문헌적 증언』입니다. 선교사들의 문화적 활동이란 서간문이나 예수회 연례보고서를 작성한 것 외에도 1590년 이후 인쇄 활자를 일본에 도입한 후 스페인의 교리문답서(Gu뭓 de Pecadores), 이솝우화(F놺ula de Esopo) 등 모두 29책을 발간했습니다. 그중에는 15책이 종교적 성격이며, 9책이 문학 작품이고, 5권이 어학에 관한 것입니다. 그외에도 복음을 전하는 데 어린아이나 장님을 이용해서 중세의 음유시인들이 시를 노래하듯이 전파하였습니다. 또한 교회에서 종교극 성격의 연극을 통해서도 교리와 가톨릭을 전파하고자 하였습니다. 제 논문은 종교사적 측면에서의 연구가 아니라 예수회 신부들이 남긴 서간문 기록과 연례보고서 등 기록들의 발굴을 통하여 극동에서 스페인 선교사들이 남긴 기록을 문학적 측면에서 연구 정리하고, 앞에서 언급했듯이 그들이 복음을 전파하는 과정에서 행한 문화적 활동을 연구한 것입니다. 2) 16∼17세기 예수회 선교사들이 남긴 서간문들과 기록들은 세계 여러 곳에 산재해 있습니다. 우선 리스본의 “아쥬다 왕궁 도서관"에는 루이스 프로이스가 남긴 『일본의 역사』의 고본이 보관되어 있다. 리스본에 있는 국회도서관에도 엄청난 양의 자료들이 미정리된 상태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외에도 꼬임브라대학교 도서관이나 에보라(Evora) 시의 고문서 보관소도 16∼17세기 자료들을 많이 소장하고 있습니다. 스페인 마드리드에 있는 왕립역사학한림원 도서관, 마드리드 고문서보관소, 마드리드 국립도서관, 살라망카대학 도서관 등에도 많은 자료들이 있습니다. 로마 예수회본부 고문서보관소에는 Jap. Sin으로 분류되는 일본과 중국에 관계되는 자료에 조선에 관한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로마 교황청 도서관도 언젠가는 자세히 발굴 작업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일본 상지대학교의 그리스도교 도서관(Kiristan Bungko)에도 유럽의 도서관에 있는 자료들을 복사하여 마이크로 필림으로 보관하고 있으며, 천리시에 있는 천리대학 도서관에도 훌륭한 고문서들이 엄청나게 많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이외에도 많은 곳에 16∼17세기 당시 기록들이 산재되어 있으리라 봅니다. 스페인어나 포르투갈어를 잘 이해할 수 있는 교회사 연구가들이 많이 배출되어서 위의 도서관이나 고문서 보관소들을 하나하나씩 철저하게 연구 조사하여 잊혀지고 유실된 우리 역사의 흔적을 하루속히 규명해야 할 것으로 압니다. 3) 세스뻬데스 신부가 1593년 조선에 입국한 것은 당시 조선의 남해안에 머물고 있던 큐슈지방 출신 영주들의 도움이 컸습니다. 그러나 논문에서도 밝혔듯이 자료에 의하면 이미 1571년에 가스빠르 비렐라 신부가 예수회 총장 신부에게 쓴 편지에서 1566년부터 조선 땅에 복음을 전파하고자 하는 일을 구상하고 있음을 적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세스뻬데스 신부는 예수회가 숙원하던 조선 입국을 전쟁의 와중에 일본 가톨릭 영주들의 도움으로 할 수 있었으며, 일본군 성채 중에서 눈에 띄지 않는 은밀한 곳에서 머물러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1587년 풍신수길은 천주교 탄압령을 선포한 이후 선교사들의 활동이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때에 세스뻬데스 신부가 일본군의 종군 신부로 조선에 입국했다고 말하는 것은 합당치 못하다고 봅니다. 이는 일본 학자 山口正之가 그의 논문에서 세스뻬데스 신부를 종군 신부라고 한 것을 1964년 김양선 목사가 단순히 일본어로 된 이 논문을 인용하면서 일본교회사 측면에서 아전인수 격으로 속단한 사실을 우리가 세스뻬데스를 종군 신부라고 속단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속단이 한국 천주교회사에 정설로 되어버렸습니다. 우리의 역사를 우리가 직접 연구하고 확인해보지도 않은 채 일본 학자의 주장을 받아들여서 그대로 쓴다는 것은 학문의 올바른 자세가 아니라고 봅니다. 세스뻬데스 신부가 일년 남짓 조선에 체류한 끝에 일본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내륙으로의 이동이나 활동이 전쟁의 와중에 잘 이루어지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미 1566년부터 예수회는 조선 선교를 의도한 사실로 볼 때 신부의 한국 입국은 조선교회사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한다고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특히 풍신수길의 전쟁 도발을 비난하는 조선 땅에서 남긴 4통의 서간문은 우리의 역사에 귀중한 자료라 아니 할 수 없다고 봅니다. 4) 지금까지 연구된 16∼17세기 예수회 선교사들의 기록을 토대로 하여 볼 때 임진왜란을 계기로 수많은 조선인들이 일본 땅에서 세례를 받았고, 다수가 순교를 한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들은 일본인이 아니라 조선인입니다. 언젠가는 한국가톨릭교회가 이같은 순교자들을 로마 교황청에 정식으로 건의하여 조선인 순교자로서 인정을 받도록 해야 할 것으로 봅니다. 시간을 갖고서 한국 천주교회의 기원과 역사를 객관적으로 연구함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역사의 기록은 진실된 것입니다. 방청석 질문: 1. 프란시스코 하비에르는 스페인어라고는 하나 바스크인이라 하는 편이 올바른 것은 아닌지요? 바스크어와 스페인어는 발음상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최근 일본에서는 샤비에르(바스크식)라고 하는 연구도 있다. 답: 국내에서는 현재 “프란시스코 사베리오”라고 표기하는데 이는 잘못된 것임으로 “프란시스코 하비에르"라고 함이 옳습니다. 바스크인이라고는 하나 지방색을 내세우기보다는 스페인 국민의 일원임으로 스페인어 발음으로 부르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2. 루이스 데 구스만의 사료는 비판의 여지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세스뻬데스를 종군 신부라 하지 않았으면 구스만은 무엇이라고 불렀는지요? 구스만은 일본에 온 적이 있는지요? 답: 구스만은 종군 신부라는 호칭을 누구에게도 쓰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신부라고 불렀을 뿐입니다. 구스만은 일본이나 동양에 직접 온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저서 『선교사들의 역사』는 당시 예수회 신부들의 서간문을 토대로하여 매우 정확하게 기술하여, 유럽에서 처음으로 필사본이 아닌 인쇄본으로 발간된 책입니다. 당시 시대 연구에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한 자료입니다. 3.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의 역사』에서 임진·정유왜란을 일으킨 동기는? 답: 한마디로 말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불행한 역사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서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필자가 쓴 『세스뻬데스』(서강대 출판부)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4. 선교사들에게 보내진 한국인 포로들 중에 어린이가 많았다면 그중에 신학교에 보내져 사제나 수사등이 된 사람은 없었습니까? 만약 있다면 김대건 신부님 일행을 최초의 신학생으로 볼 수 없을 것 같은데요? 답: 본인이 알기로는 사제가 된 사람은 없으며, 세스뻬데스 신부가 대마도에서 데려가 성장한 비센테 권이 조선 전교를 애쓰다가 죽었는데, 마지막에 수사가 된 것으로 압니다. 이에 대한 연구는 앞으로 많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1) 샤를르 달레 원저, 안응렬, 최석우 역주, 『한국천주교회사』, 분도출판사, 1979. 2) Luis Frois, Edic땚 anotada por Jos Wicki, Historia de Jap뾫, I (1549∼1565), II (1565∼1578), III (1578∼1582), IV (1582∼1588), V (1588∼1593), Biblioteca Nacional, Lisboa. 3) 샤를르 달레는 한국천주교회의 기원을 임진왜란까지 올라가는 것으로 볼 것인가라는 문제에 대해 검토할 가치가 없다고 속단하였다. 한편 국내 연구가들은 세계로 나아가서 16∼17세기 교회사 자료를 찾아서 일차적 연구를 별로 하지 않은 채 외국 학자의 주장을 자의적으로 받아들였다. 4) Luis de Guzm뇆, Historia de las Misiones de la Compa뼊a de Jes웧 en la India Oriental en la China y Jap뾫 desde 1540 hasta 1600, Alcal? 1601. 5) 필자의 연구를 통하여 세스뻬데스 신부의 국적, 신분, 활동 등이 정확히 국내외 학계에 알려졌다. 이로써 한국을 최초로 방문한 서구인은 헨드릭 하멜(1653년)이 아니라 세스뻬데스 신부(1593년)임이 밝혀졌다. 박철, 『세스뻬데스 : 한국방문 최초 서구인』, 서강대 출판부, 1987.: 「한국방문 최초 서구인 그레고리오 데 세스뻬데스 硏究」 『외대사학』 창간호 참조, pp. 99-144. 6) ARSI(로마예수회본부도서관), Jap.sin 7 III, f 80.; 박철 옮김, 메디나 신부 지음, 『한국 천주교 전래의 기원』, 서강대 학술총서 19, 서강대 출판부, pp 165-166. 국문 번역 참조. 7) Luis de Guzm뇆, op. cit., p. 588. (박철, 『세스뻬데스-한국방문 최초 서구인』, 서강대 학술총서 17, p. 88 참조.) 8) Luis de Guzm뇆, op. cit., p. 590. 9) Alejandro Valignano, Adiciones del Sumario de Jap뾫, Ed. by J.L.Alvarez Teladriz, 로마예수회본부도서관, 1984년, p. 502(박철, 『세스뻬데스』, 서강대 출판부, p. 89 참조). 10) Luis de Guzm뇆, op. cit., p. 622(박철, 『세스뻬데스』, 서강대, p. 91 참조). 11) ARSI(로마예수회본부고문서보관소), Jap.Sin, 52, 203v(박철 옮김, 메디나 신부 지음, 『한국천주교 전래의 기원』, 서강 대 참조). 12) 당시 서울대 이원순 교수에 의해 자료 제공을 받았다. 13) 서울대 동아문화연구소, 『壬辰亂史 國外資料』, 1971년, pp. 1-2 참조. 14) 서울대 동아문화연구소, 『壬辰亂史 國外資料』, 1971, pp. 85-86. 21) Ibid., pp. 80-81. 22) Ibid., pp. 80-81. 23) Ibid., pp. 81-82. 24) 샤를르 달레는 그의 저서 『한국천주교회사』에서 “임진왜란에 참전한 일본군의 대부분은 천주교 신자였으니 풍신수길이 일본 안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종교를 없애 버리기로 비밀히 결심하였다." 라고 적고 있으나, 세스뻬데스 신부의 당시 증언으로 샤를르 달레의 기술은 자의적인 추측에 불과했음이 드러났다. 25) 박철, 『세스뻬데스』, 서강대, 참조. 26) 박철 옮김, 메디나 신부 지음, op. cit., p.170. 27) 박철, 『세스뻬데스』, 서강대, p. 91. 28) 김양선 목사는 1964년 『史學硏究』 18호에서 「임진왜란 종군신부 세스뻬데스의 대한 활동과 그 영향」이라는 논문에서 일본 학자 山口正之의 주장대로 종군신부라고 속단하였다. 그후 국내 학계에서는 김양선의 논문을 16세기 천주교 활동에 대한 고전으로 여겼다. 아울러 김양선은 Luis de Guzm뇆의 『선교사들의 이야기』를 일본어판으로 보면서 여러가지 오류를 범하였다. 29) 루이스 데 메디나 신부, 『한국천주교 전래의 기원』, 1987년 10월 6일 서강대학교 동아연구소 주최 학술 세미나 원고에서 인용함.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