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페낭신학교

2012. 4. 27. 오후 6:5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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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새해 특집] 특별탐사 -페낭 신학교를 가다 1

 

 
; 갑신년 새해를 맞아 차기진(루가) 양업교회사연구소장의 특별 탐사기 페낭신학교 - 조선 신학생들의 애환과 성인들의 유해 를 4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페낭 신학교는 박해 이후 처음으로 탄생한 한국인 성직자들의 애환이 서려 있고 103위 순교 성인들인 앵베르 주교아 샤스탕 신부가 교수로 활동하던 곳이어서 한국 천주교회사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사적지입니다. 차기진 박사의 페낭 신학교 탐사기를 통해 선조들의 신앙 숨결을 함께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동양의 진주. 우리에게는 말레이 반도로 잘 알려진 말레이시아 서쪽의 아름다운 섬 페낭 (Penang)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120년 전인 1884년 갓 열살의 나이로 이곳에 발을 디뎠던 조선 신학생 이종국(바오로)에게 그 섬은 아름답게만 느껴지지 않았을 것이다. 낯설고 물설은 이국 땅. 습하고 습한 바다 바람.
 프랑스 선교사들은 이미 접해왔기 때문에 그렇다고 치자. 검은 피부의 인도나 코친 차이나(지금의 베트남) 샴(지금의 태국) 버어마(지금의 미얀마) 출신 신학생 중국과 현지 말레이시아 신학생. 모습도 다르고 말도 통하지 않았다. 손으로 집어먹어야 하는 음식. 아침마다 나오는 빵 조각도 입에 맞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신학생 형들이 동행하기는 했지만 아직 부모 품에서 자라야 할 어린 바오로 신학생에게는 모든 것이 두렵기만 하였다.
 무엇 때문에 그 먼 페낭까지 가야만 했을까? 하느님의 종이 되기 위한 사제의 길이 그에게 용기를 주었던 것일까? 아니 한 사제의 설명처럼 바오로가 오랜 여정 끝에 도착한 곳은 눈물의 신학교 일 뿐이었다(최승룡 신부의 교회사 산책 평화신문 668호 참조).

 지난해 11월10일. 우리 일행은 인천공항을 출발하여 여섯 시간의 여정 끝에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프르에 도착했다. 현지 한인교회 회장을 맡고 있는 박찬흥(빅토리노) 형제가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반겨준다. 다음날에는 지체없이 페낭으로 출발했다. 쿠알라에서 다섯 시간 고속도로를 달려 도착한 페낭대교는 현대건설이 파도 위에 건립한 것이라고 한다. 이곳까지 자신의 차로 안내해 준 최치홍(프란치스코) 형제가 고맙기만 했다.
 페낭에서 1박을 한 다음날 12일 아침. 프란치스코 형제가 우리를 데려다 준 곳은 페낭 섬의 북쪽 해안 언덕에 자리잡은 마리오필(Mario
hile)의 신학교였다. 탄중 붕가(Tanjung Bungah) 지역의 잘란 센가이(Jalan Cengai) 골목에 있는 교구 신학교로 수업이 한창 진행중이었다.
 그런데 한국에서 미리 수집해 간 페낭 신학교 사진과 흡사하기는 했지만 크기나 형태가 달랐다. 그렇다. 이 마리오필의 신학교는 우리가 찾고자 했던 조선의 신학생들이 공부하던 그 신학교 건물은 아니었다.
조선 신학생들이 공부하던 신학교는 마리오필이 아니라 그곳에서 동남쪽으로 약 3km 떨어진 곳 그러니까 현재 페낭 섬의 중심 도시인 조지타운에 있었다. 1808년 신학교가 부활되어 페낭에 정착할 당시에는 그 위치가 조지타운의 북서쪽 지역인 풀라우 티쿠스 (Pulau Tikus)였으니 조선 신학생들이 공부한 곳이 바로 여기다.
 페낭 신학교는 1665년 파리 외방전교회에서 샴의 수도 아유티아(Ayuthia)에 세운 천사들의 신학교 에서 시작된다. 이후 신학교는 내전으로 인해 1765년 코친 차이나의 혼다트(Hondat)로 옮겨졌다가 1770년 인도의 폰디체리(Pondicherry)로 다시 옮겨졌고 1783년에는 일시 폐교되는 운명을 맞이했다.

그러나 프랑스 선교사들의 끈질긴 노력 덕택에 25년 만인 1808년에 부활되어 페낭의 풀라우 티쿠스에 정착하게 되었다. 지금의 마리오필에 새 교사를 신축하고 학교를 이전한 것은 최근 일이다.

 풀라우 티쿠스의 신학교 자리에는 지금 거니(Gurney) 플라자가 있다. 옛 모습과 학교 규모는 남아 있는 사진으로만 추측될 뿐이다. 아치형 창문이 죽 연결되어 있는 회랑식 2층 흰색 건물. 중앙 현관 앞은 넓은 운동장과 야자수들. 현지인과 말이 통하지 않았던 조선 신학생들은 그저 신학교 건물 안에 갇혀 하루하루를 보냈으리라.
 플라자 뒷편은 페낭 섬 북쪽 해안도로와 접해 있다. 인도양의 바다와 열대 수종들 야자수가 어우러져 아름답기 그지없다. 그러나 습한 바다 바람이 강하다. 또 오후 4시쯤 되자 그처럼 맑던 하늘에 갑자기 먹구름이 모이고 여지없이 열대 지방 특유의 스콜 (강풍과 함께 내리는 소나기)이 내린다. 120년 전 오늘처럼.    조선 신학생들이 페낭 섬에 첫 발을 내디딘 것은 바오로 신학생 일행이 오기 훨씬 전인 1855년 10월이다. 우리의 두번째 사제 최양업(토마스) 신부가 선발한 이만돌(바울리노) 김 사도 요한 임 빈첸시오 등 3명의 신학생들. 차례로 22세 19세 17세였다.
 신학생으로 뽑혀 충청도 배티 교우촌(현 청주교구 배티 성지)에서 생활하던 세 신학생은 1854년 봄 부활 시기에 최양업 신부의 전갈을 받고는 부랴부랴 서해안으로 달려가야만 했다. 전라북도 고군산도 앞에 있는 해안가 마을. 동이 트기 전 어스름 속에 숨을 죽이고 있던 그들은 최 신부의 지시에 따라 한 프랑스 선교사에게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는 작은 조선배에 올라탔다. 바로 그 선교사 장수 신부 즉 양수춘(프란치스코) 신부를 해변으로 인도해 온 배였다.
 신학생들을 태운 조선배가 난바다(먼바다)로 나가자 그곳에는 중국 정크선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그들을 멀리 홍콩으로 데리고 갈 것이다. 조심스럽게 정크선에 올라탄 신학생들은 말없이 기다려야만 하였다. 말이 통하지 않는 중국 교우들. 방향도 알 수 없는 기나긴 항해. 음식물과 배멀미로 인한 고통쯤은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달 만에 조선 신학생들은 홍콩에 도착하였다. 파리 외방전교회의 극동대표부가 있는 그곳. 모든 것이 낯설면서도 흥미로웠다. 리브와 대표 신부는 조선 신학생들을 위해 임시 신학교를 대표부 안에 설립하고는 그들 세 명에게 라틴어를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리브와 신부는 이미 마카오에서 우리의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와 최양업 신부를 가르쳤던 바로 그분이다.
 그러나 이 세 신학생에게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우선 언어가 통하지 않아 공부하는 데 애로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로부터 1년 반이 지난 1855년 10월. 리브와 신부는 조선 신학생들에게 페낭으로 가도록 명하였고 그들은 서양 여러 나라가 진출해 있던 말레이 반도의 영국령 말래카(현 쿠알라룸프르 남쪽의 해안 도시)를 거쳐 마침내 페낭 신학교에 도착하게 된다. 그해 10월12일이었다. 계속

페낭신학교 약사
▲1665년: 파리외방전교회가 샴(현 태국)의 수도 아유티아(Ayuthia)에서 천사들의 신학교 로 개교. ▲1765년: 챈타부리(Chanthaburi)를 거쳐 코친 차이나(현 남부 베트남)의 혼다트(Hondat)로 이전. ▲1770년: 말레이 반도 말래카(Ma - lacca)를 거쳐 인도 폰디체리(Pondicherry)로 이전. 성요셉 신학교 로 개칭.
▲1783년: 신학교 폐교 ▲1808년: 신학교 부활 페낭의 풀라우 티쿠스(Pulau Tikus) 정착. 포교지 신학교 로 개칭 ▲1855년: 조선 신학생 3명 입학(페낭 신학교 제1기) ▲1882~1884년: 조선 신학생 21명 입학(페낭 신학교 제2기) ▲1970년: 신학?
[기사원문 보기]
[평화신문 2004.01.01]


[2004년 새해 특집] 특별 탐사 - 페낭신학교를 가다 2

 

 
조선 신학생들은 말이 통하지 않는 페낭에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었을까?
 바로 라틴어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페낭 신학교 안에서는 일상생활이나 수업이 모두 라틴어로 이루어졌기에 언어가 제 각각이었지만 별 무리가 없었다. 그러나 교문 밖은 다른 세계였으니 그저 학교 안에 갇혀 지낼 수밖에. 조선 신학생들에게 문제가 된 것은 언어가 아니라 낯선 풍토와 음식이었다.
 결국 일이 터지고 말았다. 조선을 떠난 뒤부터 몸이 좋지 않았던 연장자 이만돌(바울리노)이 열대 섬 특유의 풍토병에 걸려 자리에 눕고 만 것이다. 홍콩의 루세이유(J. J. Rousseille) 신부도 진작부터 바울리노의 병약함을 걱정했었다. 조선의 빛나는 가로등이 되기에는 너무나 부족한 바울리노의 건강. 프랑스 선교사들은 페낭에서 온 전갈을 받고는 즉시 바울리노를 홍콩으로 데려오도록 하였고 그곳에서 요양을 하면서 신학 공부를 계속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바울리노는 풀라우 티쿠스에 있는 페낭 신학교에 도착한 지 정확히 1년 만인 1856년 10월 12일에 그곳을 떠나 홍콩으로 되돌아와야만 했다.

아우들을 페낭에 놔두고 떠나야만 했던 그의 심정은 과연 어떠했을까? 신학교의 아치형 창문과 높게 뻗은 야자수 사이로 석별의 정을 나누던 그들의 모습을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해진다.
 그러나 바울리노의 홍콩 귀환이 별리의 슬픔만을 준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예정되어 있는 하느님의 오묘하신 섭리 안에서 이미 정해져 있었다.
 1857년 3월 30일. 한참 공부에 열중하던 바울리노는 루세이유 신부에게서 한 조선인이 홍콩 대표부로 오고 있다 는 말을 듣게 된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어떻게 그 사람이 이 먼 곳까지 오게 되었는가? 누군가는 일본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바울리노는 그를 보자마자 금방 자기 나라 사람임을 알아보았다. 상투와 복장은 물론 사투리 가득한 어투까지…조선 사람이 분명했다. 그해 초 제주에서 풍랑을 만나 광동 앞 바다까지 떠내려갔다가 영국 배에 구조되어 온 장사꾼으로 이름은 김기량이라 하였다.
 대표부의 루세이유 부대표 신부는 다음날부터 김기량의 교리지도를 바울리노에게 맡겼다. 그리고 1857년 5월31일 김기량은 루세이유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귀국 길에 오르게 된다. 세례명은 펠릭스 베드로(Felix Pierre). 행운의 사나이. 앞으로 제주의 사도가 되기를 하는 바람에서 붙여준 세례명일 게다. 이후 펠릭스 베드로는 진실한 제주의 사도가 되어 열심히 복음 전파에 노력하다가 1866년의 병인박해 때 통영에서 체포되어 순교함으로써 제주의 유일한 하느님의 종 이 되었다.
 바울리노는 다시 페낭 신학교를 보지 못한 채 1861년에 조국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뒤를 이어 김 요한과 임 빈첸시오도 1862년 2월에 페낭 신학교를 떠나 홍콩에 머무르다가 다음해 3월에 귀국했다. 그 후 이들은 충청도 배론 골짜기에 설립되어 있던 성 요셉 신학교 에서 기쁨의 상봉을 했지만 아쉽게도 김 요한은 얼마 안 되어 신학교를 떠나고 만다.

 1864년 말 배론 신학교에서는 처음으로 서품식이 거행되었다. 교구장 베르뇌(장경일 시메온) 성인 주교가 임 빈첸시오에게 소품(小品)을 이 바울리노에게는 삭발례를 준 것이다. 그러니 이제 그들은 몇 해만 더 있으면 사제로 서품될 수 있었다. 김대건과 최양업 신부가 없는 상황에서 그들은 바로 조선의 가로등이었다.
 그러나 병인박해가 모든 것을 앗아가 버리고 말았다. 스승 신부들은 체포되어 순교하고 신학생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이제 페낭 섬에서 홍콩과 배론 땅으로 이어져 온 우리의 성직자 양성 사업 홍콩의 페낭 신학생 바울리노와 제주의 사도 펠릭스 베드로에게로 이어진 복음의 숨결은 기록으로만 알 수 있을 뿐이다. 페낭 유학 1기는 이렇게 하여 그 명맥이 끊어지고 말았다. 그렇지만 결코 영원한 단절은 아니었다.
차기진 박사 (루가 양업교회사연구소장)
[기사원문 보기]
[평화신문 2004.01.04]



[2004년 새해특집] 특별 탐사 - 페낭신학교를 가다 4.끝

 

 
사실 프랑스 선교사들은 페낭 신학교를 잘 알고 있었다. 훗날 제2대 조선교구장에 임명되는 성 앵베르 주교는 1821년 페낭에서 교수로 활동한 적이 있고 성 샤스탕 신부는 1828년 이래 5년 동안 이곳에서 교수 생활을 했었다. 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나 처음 조선 땅을 밟은 성 모방 신부도 페낭에서 잠시 사목한 적이 있다.
 블랑 주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또 페낭에서 생활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조선에서는 여전히 존재하는 박해 위협 때문에 공식적으로 신학교를 설립할 수 없었고 신학생 교육을 선교사 개인에게 맡길 수 밖에 없었다. 아니 배론 신학교처럼 성직자 양성 사업이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 여기에서 블랑 주교가 생각해 낸 것이 바로 페낭 유학이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신학생을 페낭으로 보낸 것은 아니다. 블랑 주교는 주교 성성 이전인 1881년에 이내수(아우구스티노)와 강성삼(라우렌시오) 등을 나가사키로 보내 그곳 임시 조선대표부에서 예비 신학교육을 받도록 했다. 그리고 다음해는 마침내 위의 두 명을 포함하여 모두 7명의 신학생에게 페낭 유학을 명하였다.
 페낭으로는 1884년 10월까지 모두 다섯 차례에 걸쳐 22명이 유학을 하게 된다. 그 중에서 훗날 사제품을 받고 결실을 맺은 이는 11명. 특히 열다섯살 미만 신학생이 8명이었는데 여기에는 겨우 열살인 학생도 3명이나 포함되어 있었다. 아이러니는 이 어린 유학생들 중에서 훗날 사제가 된 이들이 6명이나 된다는 점이다.
 이제 마리오필 언덕으로 옮겨진 신학교 교정. 인도양을 바라보고 있는 앵베르 주교와 샤스탕 신부의 동상이 무엇보다도 반갑다. 페낭 신학교에서 교수를 역임한 성인들이다. 그 앞 성인·순교자 정원에는 페낭 신학교 출신 베트남 사제 성인 5명의 동상 46명의 베트남·캄보디아·버어마(미얀마) 순교자 명패석이 안치되어 있다.
 본관 위에 있는 박물관과 성당. 어찌 보면 초라할 수 있지만 신학교 역사를 유물과 함께 긴히 간직하려는 그네들 노력이 엿보인다. 안내자 신학생(Surain Durai Raj)의 설명도 매우 진지하고 자부심도 배 있다.
 작은 신학교 성당. 성인 유해가 담겨 있는 여러 성광과 성합 가운데서 한국 성인들 유해가 눈에 들어온다.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 그리고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유해. 어찌 경배하는 마음이 우러나지 않을 수 있으랴!
 성인들은 이미 그때부터 지켜보고 있었다. 동양 촌놈들이 몸에 맞지 않는 음식과 기후 갖가지 풍토병에 시달려야만 했던 것을…. 끊임없이 불어오는 바다 바람은 그들에게 두통을 가져왔고 어린 신학생들로 하여금 향수병을 앓도록 하였다. 그럴 때마다 우리 신학생들은 모든 슬픔을 참아가면서 서로를 북돋우어 주었으며 다른 신학생들에게 뒤지지 않으려고 밤을 새워 공부하곤 했다.
 성소의 은총과 열망은 언제나 그들에게 힘이 되어 주었다. 그러나 차츰 약해져 가는 육신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이 아우구스티노는 페낭에 도착한 지 2년 만에 귀국했다. 어린 이 바오로는 그곳에서 6년을 버티어냈다.

 강 라우렌시오는 8년을 견디었으나 결국 동료들에 앞서 돌아와야만 했다. 이후 강 신부는 1896년에 서품을 받고 절영도(지금의 부산 영도)로 파견되어 또 바다 바람에 시달리다가 37세로 요절하고 만다. 페낭 유학생으로 사제가 된 11명 중 4명이 사십을 넘기지 못하고 하느님 품에 안겼다.

 그들이 지낸 페낭 신학교. 지금 그 장소는 옮겨지고 신학생 기숙사도 현대식 건물로 바뀌었지만 그 곳에는 여전히 조선 신학생들의 애환과 열정이 담겨 있다. 그리고 오늘도 성인들 유해가 우리의 성직자 양성사를 그 의미를 그리고 페낭 유학생들 애환을 말해 주고 있다.
[기사원문 보기]
[평화신문 2004.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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