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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페낭 신학교 `성인 순교자 정원`. 왼쪽에 페낭 출신 베트남 성인 5위 동상이 보인다.2. 성 앵베르 주교와 샤스탕 신부 동상 앞에 선 차기진 소장(왼쪽)과 안내인 최치홍씨. |
갑신년 새해를 맞아 차기진(루가) 양업교회사연구소장의 특별 탐사기 '페낭신학교 - 조선 신학생들의 애환과 성인들의 유해'를 4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페낭 신학교는 박해 이후 처음으로 탄생한 한국인 성직자들의 애환이 서려 있고 103위 순교 성인들인 앵베르 주교아 샤스탕 신부가 교수로 활동하던 곳이어서, 한국 천주교회사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사적지입니다. 차기진 박사의 페낭 신학교 탐사기를 통해 선조들의 신앙 숨결을 함께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동양의 진주. 우리에게는 말레이 반도로 잘 알려진 말레이시아 서쪽의 아름다운 섬 '페낭'(Penang)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120년 전인 1884년, 갓 열살의 나이로 이곳에 발을 디뎠던 조선 신학생 이종국(바오로)에게 그 섬은 아름답게만 느껴지지 않았을 것이다. 낯설고 물설은 이국 땅. 습하고 습한 바다 바람.
프랑스 선교사들은 이미 접해왔기 때문에 그렇다고 치자. 검은 피부의 인도나 코친 차이나(지금의 베트남), 샴(지금의 태국), 버어마(지금의 미얀마) 출신 신학생, 중국과 현지 말레이시아 신학생. 모습도 다르고, 말도 통하지 않았다. 손으로 집어먹어야 하는 음식. 아침마다 나오는 빵 조각도 입에 맞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신학생 형들이 동행하기는 했지만, 아직 부모 품에서 자라야 할 어린 바오로 신학생에게는 모든 것이 두렵기만 하였다.
무엇 때문에 그 먼 페낭까지 가야만 했을까? 하느님의 종이 되기 위한 사제의 길이 그에게 용기를 주었던 것일까? 아니, 한 사제의 설명처럼 바오로가 오랜 여정 끝에 도착한 곳은 '눈물의 신학교'일 뿐이었다(최승룡 신부의 '교회사 산책', 평화신문 668호 참조).
지난해 11월10일. 우리 일행은 인천공항을 출발하여 여섯 시간의 여정 끝에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프르에 도착했다. 현지 한인교회 회장을 맡고 있는 박찬흥(빅토리노) 형제가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반겨준다. 다음날에는 지체없이 페낭으로 출발했다. 쿠알라에서 다섯 시간 고속도로를 달려 도착한 페낭대교는 현대건설이 파도 위에 건립한 것이라고 한다. 이곳까지 자신의 차로 안내해 준 최치홍(프란치스코) 형제가 고맙기만 했다.
페낭에서 1박을 한 다음날 12일 아침. 프란치스코 형제가 우리를 데려다 준 곳은 페낭 섬의 북쪽 해안 언덕에 자리잡은 마리오필(Mariophile)의 신학교였다. 탄중 붕가(Tanjung Bungah) 지역의 잘란 센가이(Jalan Cengai) 골목에 있는 교구 신학교로, 수업이 한창 진행중이었다.
그런데 한국에서 미리 수집해 간 페낭 신학교 사진과 흡사하기는 했지만, 크기나 형태가 달랐다. 그렇다. 이 마리오필의 신학교는 우리가 찾고자 했던, 조선의 신학생들이 공부하던 그 신학교 건물은 아니었다.
조선 신학생들이 공부하던 신학교는 마리오필이 아니라 그곳에서 동남쪽으로 약 3km 떨어진 곳, 그러니까 현재 페낭 섬의 중심 도시인 조지타운에 있었다. 1808년 신학교가 부활되어 페낭에 정착할 당시에는 그 위치가 조지타운의 북서쪽 지역인 '풀라우 티쿠스'(Pulau Tikus)였으니, 조선 신학생들이 공부한 곳이 바로 여기다.
페낭 신학교는 1665년 파리 외방전교회에서 샴의 수도 아유티아(Ayuthia)에 세운 '천사들의 신학교'에서 시작된다. 이후 신학교는 내전으로 인해 1765년 코친 차이나의 혼다트(Hondat)로 옮겨졌다가 1770년 인도의 폰디체리(Pondicherry)로 다시 옮겨졌고, 1783년에는 일시 폐교되는 운명을 맞이했다.
그러나 프랑스 선교사들의 끈질긴 노력 덕택에 25년 만인 1808년에 부활되어 페낭의 풀라우 티쿠스에 정착하게 되었다. 지금의 마리오필에 새 교사를 신축하고 학교를 이전한 것은 최근 일이다.
풀라우 티쿠스의 신학교 자리에는 지금 거니(Gurney) 플라자가 있다. 옛 모습과 학교 규모는 남아 있는 사진으로만 추측될 뿐이다. 아치형 창문이 죽 연결되어 있는 회랑식 2층 흰색 건물. 중앙 현관 앞은 넓은 운동장과 야자수들. 현지인과 말이 통하지 않았던 조선 신학생들은 그저 신학교 건물 안에 갇혀 하루하루를 보냈으리라.
플라자 뒷편은 페낭 섬 북쪽 해안도로와 접해 있다. 인도양의 바다와 열대 수종들, 야자수가 어우러져 아름답기 그지없다. 그러나 습한 바다 바람이 강하다. 또 오후 4시쯤 되자, 그처럼 맑던 하늘에 갑자기 먹구름이 모이고 여지없이 열대 지방 특유의 '스콜'(강풍과 함께 내리는 소나기)이 내린다. 120년 전 오늘처럼.
조선 신학생들이 페낭 섬에 첫 발을 내디딘 것은 바오로 신학생 일행이 오기 훨씬 전인 1855년 10월이다. 우리의 두번째 사제 최양업(토마스) 신부가 선발한 이만돌(바울리노), 김 사도 요한, 임 빈첸시오 등 3명의 신학생들. 차례로 22세, 19세, 17세였다.
신학생으로 뽑혀 충청도 배티 교우촌(현 청주교구 배티 성지)에서 생활하던 세 신학생은 1854년 봄 부활 시기에 최양업 신부의 전갈을 받고는 부랴부랴 서해안으로 달려가야만 했다. 전라북도 고군산도 앞에 있는 해안가 마을. 동이 트기 전, 어스름 속에 숨을 죽이고 있던 그들은 최 신부의 지시에 따라 한 프랑스 선교사에게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는 작은 조선배에 올라탔다. 바로 그 '선교사 장수' 신부, 즉 양수춘(프란치스코) 신부를 해변으로 인도해 온 배였다.
신학생들을 태운 조선배가 난바다(먼바다)로 나가자, 그곳에는 중국 정크선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그들을 멀리 홍콩으로 데리고 갈 것이다. 조심스럽게 정크선에 올라탄 신학생들은 말없이 기다려야만 하였다. 말이 통하지 않는 중국 교우들. 방향도 알 수 없는 기나긴 항해. 음식물과 배멀미로 인한 고통쯤은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달 만에 조선 신학생들은 홍콩에 도착하였다. 파리 외방전교회의 극동대표부가 있는 그곳. 모든 것이 낯설면서도 흥미로웠다. 리브와 대표 신부는 조선 신학생들을 위해 임시 신학교를 대표부 안에 설립하고는 그들 세 명에게 라틴어를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리브와 신부는 이미 마카오에서 우리의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와 최양업 신부를 가르쳤던 바로 그분이다.
그러나 이 세 신학생에게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우선 언어가 통하지 않아 공부하는 데 애로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로부터 1년 반이 지난 1855년 10월. 리브와 신부는 조선 신학생들에게 페낭으로 가도록 명하였고, 그들은 서양 여러 나라가 진출해 있던 말레이 반도의 영국령 말래카(현 쿠알라룸프르 남쪽의 해안 도시)를 거쳐 마침내 페낭 신학교에 도착하게 된다. 그해 10월12일이었다. <계속>
<페낭신학교 약사>
▲1665년: 파리외방전교회가 샴(현 태국)의 수도 아유티아(Ayuthia)에서 '천사들의 신학교'로 개교.
▲1765년: 챈타부리(Chanthaburi)를 거쳐 코친 차이나(현 남부 베트남)의 혼다트(Hondat)로 이전.
▲1770년: 말레이 반도 말래카(Ma - lacca)를 거쳐 인도 폰디체리(Pondicherry)로 이전. '성요셉 신학교'로 개칭.
▲1783년: 신학교 폐교
▲1808년: 신학교 부활, 페낭의 풀라우 티쿠스(Pulau Tikus) 정착. '포교지 신학교'로 개칭
▲1855년: 조선 신학생 3명 입학(페낭 신학교 제1기)
▲1882~1884년: 조선 신학생 21명 입학(페낭 신학교 제2기)
▲1970년: 신학교 운영 일체가 파리 외방전교회로부터 현지 성직자들에게 이관됨. 말레이시아 '교구 신학교'로 개칭.
▲1984년: 현재 위치인 페낭의 마리오필(Mariophile)로 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