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교

2012. 4. 12. 오후 12:19:06

글자

한국의 신학교 역사

 

1) 앵베르 주교님 사제관

정하상 바오로, 이재위 토마스 (이승훈 손자), 20살, 26살 두 청년

 

* 1838년 11월 30일 본국으로 보낸 편지내용 일부

“조선에 오자마자 젊은이들을 찾아보았다. 한사람은 1801년 순교한

정약종의 아들로 북경을 왕래하는 42살의 한사람과 32살의 상처한

사람, 26살 ,20살의 청년 등 4사람이며 나이 많은 이들은 하멜의 신학총서를 교육하고 청년 두 사람은 라틴어를 배운다.

 

* 1838년 12월1일 교황청에 보낸 편지

“ 우선 과제가 사제양성 인데 왜냐하면 마카오에 보낸 이들은 시간 이 많이 걸리므로

4명을 우선 선발해서(42살의 정하상, 32살의 홀아비 1784년 세례 받은 이승훈의 손자와 20살 25살의 두 명이 더 있다. 이들에게 라틴어를 가르치고 11월 1일부터 는 신학을 배운다.

 

* 1839년 3월 30일 교구장 신부에게 보낸 서한 중...

“ 북경 간 사람들이 돌아와서 하는 이야기가 가져올 것을 못 가져 왔다고 했다.

오래 전부터 준비해 왔던 여러 책을 잃어버려서 지금 교육하고 있 는 학생들에게 졸업이 많이 지연될 것 같다. 특히 하멜 신부가 쓴 ‘신학총서’가 없으면 부주교가 쓴 ‘간추린 신학서’라도 페낭으로 보내 달라

 

“ 신학교를 세우면 조선인 사제를 만들 수 있을 것 이므로 전임 사 제(하멜신부)가 쓴 신학교과서를 마카오로 보내니 조선으로 보내 주세요“

 

“ 1838년 부활 때부터 신학생을 모집해서 즉시 가르치기 시작했습니 다.3명의 학생을 더 보낼까도 생각중입니다.(3명은 이미 유학중)“

 

* 앵베르 주교님은 중국 사천성에서 신학교를 담당했는데 조선으로 파견되는 소 주교 에게 지원을 해 주겠다는 내용의 편지가 있다고 한다.

 

2) 배티

*1850년 세운 소신학교

여름에는 손골에서 겨울에는 배티에서 교육이 이루어지는 이동형 이었다가 정주형으로 정착됨

.1853년부터는 다블뤼주교 이어 최양업신부가 신학교 담당을 했으 며 이만돌, 김요한 , 임 빈첸시오 세 학생이 페낭으로 유학감에 따 라 폐교됨

3) 배론

* 1855년 메스트르 신부가 세움. 성요셉 신학당

푸르티에 신부가 교장으로 프티니콜라 신부가 교수로 장주기 요셉 이 한문선생으로 시작함. 현 가톨릭대학교가 그들의 전신으로 지목 한 격식을 제대로 갖춘 최초의 신학교.

두 신부가 1866년 병인박해 때 체포되면서 폐쇄됨.

 

4) 부엉골

* 1885년 블랑주교가 세움

페낭 신학교의 한국학생들이 기후와 풍토를 이기지 못해 일부학생이 귀 국을 하자 서둘러 신학교를 부엉골에 세운다.(1885년)

교장 서 요셉 신부가 혼자서 교육을 담당했고 학생은 페낭에서 온 4명과 조선에서 입학한 3명 등 7명으로 시작이 되었다.

그러나 콜레라로 학생 한명과 한문교사가 사망하고 1886년 한불조약으로 선교사 활동이 묵인이 되자 서울의 용산으로 옮기게 된다.

블랑주교는1882년부터 1884년 까지 말레이 반도에 있는 페낭 신학교로 21명을 보내며 1894년에는 뮈텔 주교의 명으로 페낭에 있던 모든 학생이 귀국해서 용산신학교에서 나머지 교육을 받고 졸업. 1896년부터 1900년 까지 12명이 서품 받는다.

 

페낭 신학교

 

파리외방전교회에서 아시아 지역의 선교를 위해 세운 말레이 반도 끝 페낭에 세운 신학교

 

용산 신학교

 

지금은 성심 여고 교정 안에 속하게 된 옛 용산 신학교 성당과 예수 성심 수녀회 관구 사무실로 쓰이고 있는 신학교 건물은 성소의 못자리였던 당시의 자취를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서울 특별시 용산구 원효로 4가에 위치한 옛 용산 신학교 성당은 1902년에 축성된 건물이다. 여기에는 한국 천주교회의 첫 방인 사제였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유해가 축성 당시부터 1958년까지 모셔져 있었고 조선 교구 초대 교구장이었던 소브뤼기에르 주교와 제8대 교구장이었던 뮈텔 주교의 유해가 거쳐 갔던 곳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교는 1855년 충청도 배론에 세워진 신학당에서 그 기원을 찾는다.

그 이전의 한국인 성직자 양성을 위한 노력은 이미 1830년대부터 시작되어 정하상에게

신학 교육을 시킨 바 있고 1836년에는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를 마카오에서 신학교육을 받게 했다.

배론 신학교는 1866년 병인박해로 폐교됐지만 신앙의 자유가 확보됨에 따라 1882년 21명을 페낭 신학교에 유학생으로 파견하기도 했다. 1885년에는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범골에 예수 성심 신학교가 문을 열고, 1887년에는 바로 이곳 서울 용산으로 이전한다.

그 후 1914년 성 유스티노 신학교, 1927년에는 함경 남도 덕원 신학교 등 여러 군데의 신학교가 생겨났고 서울, 대구, 광주, 부산, 수원, 대전에 이어 1996년에는 인천 가톨릭 대학이 개교하기에 이르렀다.

 

 

서울 대교구 가톨릭대학교 혜화동 성신교정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유해를 모신 사제 성소의 요람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이 있는 성신교정은 국내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신학 연구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으며, 수많은 성직자들을 배출한 예비 사제들의 사제성소 요람이다. 인간적 성숙과 그리스도적 삶을 닮고자 하는 올곧은 꿈이 실현되는 곳이 성신교정이다.

1855년 충북 배론의 교우촌에서 성 요셉 신학교로 출발한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은 이후 한국 근대사와 역사를 같이하며 박해와 일제 강점, 전쟁의 소용돌이 등 격변의 세월을 거쳐 왔다. 경기도 여주의 부엉골에서 설립되었던 예수성심신학교는 서울 용산으로 이전하였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1942년 폐교되었다가, 1945년 2월 경성천주공교신학교(京城天主公敎神學校)로 개칭하고 설립 인가를 받아 예과 4년과 고등과 2년의 중등 교육과정, 본과 4년과 연구과 2년의 고등 교육과정을 설정하고 해방 후 혜화동에서 정식으로 개교하였다.

1947년에는 성신대학(聖神大學)으로, 1959년 2월에는 교명을 가톨릭대학으로 변경하여 인가를 받았고, 신학부와 의학부의 편제를 두게 되었다.1992년 7월에는 교명을 ‘가톨릭대학’에서 ‘가톨릭대학교’로 개칭하고 동시에 신학부를 신학대학으로, 의학부를 의과대학으로 재편하고, 1995년도부터 가톨릭대학교와 성심여자대학교 측이 통합하여 가톨릭대학교는 명실상부한 가톨릭계 종합대학교로 부상하게 되었다. 현재 서울특별시 종로구 혜화동 성신교정에 신학대학이 있으며, 서초구 반포동 성의교정에 의과대학과 간호대학이, 경기도 부천시 성심교정에 인문·사회·자연·공학·예능 계열의 학과가 배치되어 있다.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순교한 성 김대건(金大建, 보명 芝植, 1821~1846, 안드레아) 신부의 시신은 순교한 지 40일 만에 미리내로 옮겨지게 되었다. 그 후 한국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시성작업이 추진되자, 1901년 5월 21일에는 무덤을 발굴하여 그 유해를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옮겨 안치하였고, 10월 17일 이를 다시 신학교 성당으로 옮겼다. 그리고 6·25 전쟁이 끝난 뒤인 1960년 7월 5일에 그 유해가 서울 혜화동에 있는 가톨릭대학 성신교정 성당으로 옮겨지면서 하악골만은 미리내 경당으로, 치아는 절두산 순교 기념관으로 분리 안치되었다.

김대건 신부는 일찍이 마카오 신학교 시절에 온갖 난관을 인내와 용기로서 극복하고 마침내 1845년 8월 17일 한국 교회 최초의 한국인 사제로 서품됨으로써, 당시는 물론 오늘날까지도 모든 신학생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성신교정 성당은 성 김대건신부의 유해를 모셔 놓은 거룩한 곳이며, 또한 1984년 5월 3일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방문해 미사를 봉헌했던 역사적인 곳이기도 하다.

 

◆ 한국 가톨릭 신학교의 발전

 

한국 가톨릭 신학교의 발전은 두 가지 관점으로 그 기원을 추적해 볼 수 있다. 먼저 한국에서 최초의 가톨릭 신학 교육을 언제 시도했느냐 하는 관점과 또 하나는 언제 가톨릭 신학교를 설립하고 신학생들을 가르쳤느냐 하는 관점이다.

 

최초의 신학 교육

 

한국 천주교회의 설립 이후, 우선 국내에서 최초의 가톨릭 신학 교육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본다면, 그 기원은 1839년 기해박해로 순교한 3명의 프랑스 성직자와 신학생으로 선발된 정하상(丁夏祥, 1795~1839, 바오로), 이재의(李在誼, 1808~1868, 토마스)와 그들의 동료 2명에게까지 소급될 수 있다. 또한 한국 교회 설립 이후 한국인으로서 국외에서 최초의 가톨릭 신학교육을 받은 사람은 1836년 마카오에서 수업을 받았던 김대건(金大建, 보명 芝植, 1821~1846, 안드레아), 최양업(崔良業, 鼎九, 1821~1861, 토마스), 최방제(崔方濟, 과출,1821~1837,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였고, 이중에서 김대건과 최양업은 신품성사를 받고 귀국하여 사제로 활동하였다.

1850년 무렵부터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Ferr´eol,高, 1808~1853, 요셉) 주교의 지시로 처음에는 다블뤼(Daveluy, 安敦伊, 1818~1866, 안토니오) 신부가 용인 손골과 진천 배티에서, 후에 최양업 신부가 배티 등에서 몇몇의 신학생들에게 라틴어와 한문을 가르쳤던 일, 1854년 메스트르(Maistre, 李, 1808~1857, 요셉) 신부가 배티 신학교의 신학생 3명을 모두 말레이반도의 페낭(Penang, 彼南) 신학교로 유학을 보낸 일 등도 모두 한국인 성직자를 양성하려는 신학 교육의 일환이었다.

 

최초의 신학교

 

한편 2005년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서 설립 150주년 기념 화보집으로 제작한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1855~2005》에 의하면, 1855년 충청도 제천에 세워진 배론(舟論)의 성 요셉신학당에 현재의 가톨릭대학교의 기원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개항 이후 근대적 서구 문물과 함께 도입된 서구식 신학 교육의 출발점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1885년 10월 28일 강원도 원주 부엉골(현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부평리)에 설립된 예수 성심 신학교에 그 기원을 둘 수 있다.

부엉골 신학교는 교명, 교수진, 학생, 설립 이념 등을 감안할 때 현재의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의 직접적인 전신이 되고 있다. 1886년 한불 조약 체결 이후이 신학교는 1887년 3월 서울 용산(현 서울 용산구 원효로 4가 1)으로 이전하였다. 중등과 3년, 철학과 2년, 신학과 3년 과정으로 철학, 신학뿐만 아니라 라틴어, 한문, 역사, 지리, 천문 등을 가르쳤으며, 파리 외방전교회 출신의 리우빌(Liouville, 柳達榮, 1855~1893, 아나톨)신부가 초대 교장직을 맡았었다.

 

지방 신학대학의 설립

 

1911년 4월 대구대목구의 설정과 함께 1914년 10월 대구에도 성 유스티노 신학교가 설립되었으며, 1927년 베네딕도 수도회에 의해 함경도 덕원에 대신학교가 설립되어 덕원, 서울, 대구에서 각각 한국의 북부, 중부, 남부의 대신학교 교육을 나누어 담당하게 되었다.1929년 서울과 대구의 신학교를 대신학교로 개칭하고 전문부 3년과 대학부 4년을 두었다.

일제의 탄압으로 1942년 서울의 예수 성심 신학교는 폐교되었다가, 1945년 2월 경성천주공교신학교(京城天主公敎神學校)로 개칭하고 설립 인가를 받아 예과 4년과 고등과 2년의 중등 교육과정, 본과 4년과 연구과 2년의 고등 교육과정을 설정하였다. 이러한 교육과정을 갖추고 해방 후 혜화동에서 정식으로 개교하여 남한 출신의 신학생들과 덕원 신학교에서 피난 온 신학생들과 해외 유학에서 돌아온 신학생들을 받아들여 신학 교육을 실시하였다.

 

종합대학교로의 발전

 

1947년 성신대학으로, 1959년 2월에는 교명을 가톨릭대학으로 변경하여 인가를 받았고, 신학부와 의학부의 편제를 두게 되었다. 1972년부터 성직 희망자가 아니더라도 가톨릭 신학을 전공할 수 있도록 수도자와 평신도에게 입학이 허가되었고, 여학생에게도 입학이 허가되는 남녀 공학으로 학제를 개편하였다.

1992년 7월에는 교명을 가톨릭대학에서 가톨릭대학교로 개칭하고 동시에 신학부를 신학대학으로, 의학부를 의과대학으로 재편하고, 1986년부터 제기되어온 성심여자대학교와의 통합을 통한 종합대학교로 전환하는 데 노력하여, 1993년 12월 양측이 통합에 정식으로 합의함으로써 1995년도부터 가톨릭대학교는 명실상부한 가톨릭계 종합대학교로 부상하게 되었다.

 

◆ 초기의 사제들

 

한국인 사제 양성은 1831년 9월 조선교구가 설정되고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입국하면서부터 본격화됐다. 1835년 12월 조선에 입국한 첫 프랑스 선교사 모방(베드로) 신부는 이듬해 초부터 교우촌을 순방하면서 인재를 탐문, 신학생으로 김대건(안드레아), 최양업(토마스), 최방제(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을 선발, 그해 12월 마카오로 유학을 보냈다.

1837년 입국한 제2대 조선대목구장 앵베르(라우렌시오) 주교 역시 정하상(바오로), 이문우(요한) 등 4명의 신학생을 선발해 직접 신학교육을 시켰다.

김대건과 최양업은 1844년 중국 장춘 소팔가자에서 부제품을 함께 받고, 중국 상해에서 1845년 8월17일과 1849년 4월15일에 각각 사제품을 받았다. 김대건 신부는 사제품을 받은 지 1년도 채 못되어 순교하였고, 최양업 신부는 1849년 말 귀국, 1861년 6월15일 선종할 때까지 10년 6개월간 전국을 누비며 열정적으로 사목활동을 하였다.

조선교회는 박해 와중에도 한국인 사제 양성을 위해 1855년 충북 제천 배론에 '성 요셉신학교'를 세워 신학생들을 교육했으나 1866년 병인박해로 학교를 폐쇄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조선교회는 1882년부터 말레이 반도 페낭 신학교로 신학생을 선발해 유학을 보내 사제 양성에 힘썼다.

한국인 세 번째 사제는 김대건 신부가 사제품을 받은 지 50년 만에 탄생했다. 그 첫 결실이 1896년 4월 26일 약현 성당(현 중림동 성당)에서 뮈텔 주교에게서 사제품을 받은 강도영(마르코), 정규하(아우구스티노), 강성삼(라우렌시오) 신부이다.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사제품을 받았지만 나이순에 따라 강도영(1863~1928) 신부가 세 번째, 정규하(1863~1943) 신부가 네 번째, 강성삼(1866~1903) 신부가 다섯 번째 사제로 각각 기록된다.

사제교육을 위한 이들의 여정은 험난했다. 서울을 출발, 인천 부산을 거쳐 일본 나가사끼 홍콩, 또다시 싱가포르를 지나서야 최종 목적지인 말레이 반도 페낭에 도착했다. 서울에서 페낭까지 무려 50여일이 걸린 유학길이었다.

페낭 유학 생활은 강성삼이 1882년에, 정규하가 1883년 그리고 강도영은 제일 늦은 1883년에 시작하였다. 이들을 비롯한 페낭의 조선 유학생들은 언어와 풍습, 기후와 음식이 다른 땅에서 풍토병에 시달리는 등 갖은 고생을 다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명예를 위하여 남에게 뒤떨어지지 않으려고 열심히 분투해" 2~3개월 만에 라틴어로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있을 만큼 뛰어났다. 이들 조선 유학생들이 다른 풍토와 기후 그리고 음식 등의 차이로 건강을 유지하기 어렵게 되자 제7대 조선교구장 블랑 주교는 국내에 신학교 설립을 준비하고 신학생들을 귀국시켰다.

블랑 주교는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부엉골에 「예수성심신학교」를 설립, 1885년 10월, 7명의 신학생으로 문을 열었다. 블랑 주교는 이듬해 1886년 한불조약으로 신앙의 자유를 얻자마자 서울 인근에 신학교 부지를 물색, 1887년 3월에 용산신학교 터(현 성심여고 자리)를 매입, 부엉골 신학교를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귀국한 페낭 유학생들은 용산신학교에서 수학, 마침내 1896년 4월26일 강도영, 정규하, 강성삼 세 부제가 사제품을 받았다. 한국 땅에서 거행된 최초의 사제 서품식이었다. 한국인 세 번째 사제인 강도영 신부와 네 번째 정규하 신부, 다섯 번째 강성삼 신부는 각각 경기도 안성 미리내 본당과 강원도 횡성 풍수원 본당, 경남 밀양(당시 명례) 본당 초대 주임으로 부임, 그곳에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사목활동을 하였다.

 

강도영 신부는 미리내에서 34년간 사목하면서 김대건 신부와 페레올 주교 묘소를 단장하고 그 옆에 기념 경당을 건립했으며, 애국계몽운동 일환으로 신자 비신자를 가리지 않고 양잠과 농업기술을 가르쳐 지역민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정규하 신부는 본당 부임과 함께 '투전'에 빠져 있는 신자들을 바로잡는 일에 힘썼으며, 지금의 풍수원 성당을 건립하였다. 또 1920년부터 매년 6월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에 '성체거동' 행사를 거행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아울러 성당 사랑방에 '삼위학당'을 세워 한글과 한문, 수학, 역사 등의 신학문을 가르쳤다. 삼위학당은 오늘날 광동초등학교로 발전하였다.

강성삼 신부는 밀양 본당에서 진양, 양산, 언양 등 14개 공소와 500여 명의 교우를 대상으로 사목하던 중 6년 만에 37세로 요절하였다. 페낭 신학생 시절 얻은 풍토병을 극복하지 못한 것이다. 그의 안타까운 죽음은 당시 사제가 되기 위해 걸어야했던 험난한 길을 그대로 말해주고 있다. 그와 함께 페낭 유학길에 올랐던 21명의 신학생 가운데 7명이 병사한 사실 역시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한편 조선교회는 이후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를 통해 1897년 여섯 번째 이내수(아우구스티노), 일곱 번째 한기근(바오로), 여덟 번째 김성학(알렉시오) 신부를 배출한 것을 시작으로 1900년까지 12명의 사제를 배출하였다.

그 후 1914년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 1927년 덕원 신학교 등이 연이어 설립되지만 1942년 예수 성심 신학교는 일제에 의해 문을 닫게 된다. 하지만 1945년 경성 천주 공교 신학교로 개칭, 다시 설립되고 그 후 성신대학이라는 명칭을 거쳐 가톨릭신학대학교로 지금에 이른다. (신학대학교나 신학과(대전가톨릭대) 설치된 교구는 서울, 수원, 인천, 부산, 대전, 대구, 광주 7개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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