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옴) 윤지충의 순교

2012. 6. 8. 오전 7:53:53

글자
주 제 尹持忠의 순교
부 제  
저 자 도날드 베이커 (브리티쉬 콜롬비아 대학 교수)
번 역 김세윤 (부산여대 교수, 국사교육과)  
 
尹持忠의 순교
­18세기 조선의 西洋 宗敎와 東洋 典禮­

이 글은 도날드 베이커 교수의 논문을 번역한 것이다. 原題와 수록된 곳은 “The Martyrdom of Paul Yun: Western Religion and Eastern Ritual in Eighteenth Century Korea,” Transactions, Royal Asiatic Society, Korean Branch, 54(1979)이다.
조선에 천주교가 들어 온 것은 선교사가 아닌 예수회 서적을 통해서였다. 중국에 사신으로 간 조선인들이 이 책들을 들여 온 것이다. 예수회 서적에는 천주교 사상 뿐만 아니라 서양 과학에 대한 내용도 있어 조선인들의 많은 관심을 끌었다. 이 책을 접한 대부분의 조선인은 서양 과학에 대해서는 호의적이었으나 천주교리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 그러나 이런 과정에서 천주교 사상을 믿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1779년 天眞菴 走魚寺 講學會가 그 첫 출발이었다. 1784년 李承薰이 북경에서 영세받아 옴에 따라 조선 천주교회가 탄생하며, 교인의 숫자도 점차 증가하였다.
1785년 譯官 金範禹 집에서 있은 천주교 의식이 적발(秋曹摘發事件)되고 1787년 성균관에서의 천주교 학습 사건(泮會事件)이 알려지면서, 천주교는 세인의 주목과 함께 격렬한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천주교를 적극적으로 탄압하지는 않았다.
1791년 全羅道 珍山의 尹持忠이 제사를 금지하는 북경의 지시에 따라 조상의 神主를 불태우고 모친상을 치르면서도 신주를 세우지 않은 사실이 알려지면서(珍山事件), 천주교에 대한 유혈 탄압의 국면이 전개되었다. 이 사건은 천주교와 유교가 정면으로 충돌한 첫번째 사건이었다. 본 논문의 副題에 나타나듯이, 西洋 宗敎인 천주교가 東洋 典禮인 제사를 금지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이 바로 이것이다.
16세기 말 중국에 온 예수회는 천주교를 보다 널리 전교하기 위하여 유교 사회의 관습과 풍속을 인정하는 이른바 適應政策을 폈다. 제사 허용도 이 정책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뒤에 중국에 들어온 다른 수도 단체들이 예수회의 이러한 정책을 迎合主義라고 비판하면서 이를 교황청에 제소하였다. 오랜 논란 끝에 18세기 초 교황은 중국으로부터 예수회 철수를 명하였고, 중국은 예수회가 아닌 다른 수도 단체들의 관할하에 놓이게 되었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조선인들은 예수회 책을 통하여 천주교를 접하였다. 이 책에는 제사 금지의 말이 없었다. 1790년 북경 주교로부터 제사 금지의 지시가 오자 많은 조선인은 난감하였다. 첫 영세자이며 조선 교회의 영수인 이승훈을 비롯한 많은 교인들이 배교하지만 윤지충과 같은 인물은 교회의 지시를 충실히 이행하였고, 그 결과 그는 처형되었던 것이다.
이 논문은 천주교의 초기 수용 과정을 설명하면서 이 윤지충 사건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 사건은 유교와 천주교가 정면 충돌한 첫 사건으로 한국 천주교회사에 있어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필자는 윤지충 사건을, 유교가 중시하는 忠孝의 표현으로서의 제사가 우상 숭배 금지라는 하느님의 명령과 상충되므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 밖에 없는 사건으로 설명하고 있다. 즉 사건의 원인을 동양과 서양의 근본적인 입장 차이에서 찾고 있다.
이 글은 윤지충 사건을 주로 설명하고 있지만 천주교 受容史를 요령있게 정리한 글이라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초기 천주교회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가치있는 논문이다. 이 글의 이해를 위해 『釜山敎會史報』 3, 4호에 실린 같은 필자의 글도 함께 참고하기 바란다.
이 논문은 영어로 발표되었고 또한 한국내 연구자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학술자에 게재된 관계로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이 번역을 통해 많은 연구자들이 이용할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번역해 주신 김세윤 교수와 번역 과정에서 좋은 글이 될 수 있도록 조언해 준 부산여자대학교 안원현 교수에게 감사드린다.
(편집자주)

1. 천주교에 대한 초기 반응: 호기심과 비판
2. 조선 천주교회의 탄생
3. 제 사
4. 윤지충, 권상연의 체포와 순교

1791년 12월 8일 {譯者 註: 정확하게는 12월 7일이다. 이에 관해서는 Charles Dallet, Histoire de l’Eglise de Cor럆: 安應烈촵崔奭祐 공역, 『韓國天主敎會史』(분도출판사, 1979), 上, p. 355의 註 40)을 참조할 것.}, 전라도 全州의 豊南門 앞에서 윤지충(尹持忠) 바오로는 神主를 불태운 죄목으로 참수형을 당하였다. 제사 때에 신주(神主)를 모시도록 한 조선의 법률과 관습을 거부하라는 북경의 유럽인 主敎의 지시를 윤지충이 그대로 이행한 이유로, 국왕 정조(正祖)는 양반 신분인 그의 처형을 명령한 것이다. 따라서 윤지충은 조선 최초의 천주교 순교자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이는 조선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천주교 사제가 처음 조선에 입국하기 3년 전의 일이다.
윤지충에 관한 이야기, 즉 그와 친구 그리고 친척들이 어떻게 천주교를 믿게 되었으며, 또 새로운 신앙으로 말미암아 어떻게 이들이 유교 국가 및 사회와 갈등 관계에 놓였는지 등을 통하여 우리는 2세기 전 조선인의 가치관과 믿음의 성격에 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서양 종교와 동양 전례의 이러한 충돌을 검토함으로써 진리, 도덕 그리고 인간과 사회의 성격에 대한 유교와 천주교의 접근 방식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점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윤지충의 처형은 인간이 사회나 정부보다 고차원적인 헌신 대상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성실성과 양심이 요구한다면 인간은 때로는 목숨까지도 기꺼이 바쳐야 한다는 그의 확신이, 200년 전 천주교리와 유교 전례의 충돌에 관한 단순한 흥미거리 이상의, 그 자신이 처형되는 사건을 낳게 하였던 것이다. 1791년 윤지충이 목숨을 바쳐야 했던 신주라는 특정 사안이 오늘날에는 더 이상 문제되지 않겠지만, 양심의 명령과 사회의 요구는 여전히 갈등을 일으키고 있다. 1791년 윤지충이 부딪친 딜레마를 살펴보는 것은 1980년대 우리 자신의 도덕적 우선 순위를 돌아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1. 천주교에 대한 초기 반응: 호기심과 비판

천주교 사상은 선교사가 들어오기 오래 전에 조선에 전해졌다. 17세기에 이미 유몽인(柳夢寅: 1559­1623), 이수광(李 光: 1563­1628)과 같은 조선 학자들은 중국의 예수회 선교사들 활동에 관하여 말하였다. 『어우야담』(於于野談)에서 유몽인은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서양은 神을 모시는데 있어 유교, 불교 그리고 도교와는 달리 매우 독특한 방식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우리의 도덕 규범을 극구 칭찬하지만 사실 우리를 적으로 여긴다. 그들과 우리 사이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1)
유몽인은, 최초의 한글 소설 작가인 허균(許筠: 1569­1618)이 북경에서 돌아오면서 유럽 선교사가 준 지도와 기도서를 가지고 왔다고 했다. 18세기 학자 안정복(安鼎福: 1712­1791)도 허균을 천주교 영향을 받은 인물로 보고 있다. 안정복은 허균이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고 한다. “男女의 情慾은 하늘이 주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행위를 통제하는 윤리는 聖人의 가르침에서 나온 것이다. 하늘이 성인보다 높기에 성인을 어길지언정 하늘이 주신 本性은 감히 어길 수 없다.”2) 천주교를 비판한 안정복을 비롯한 유학자들은, 허균의 이러한 표현이 곧 그가 조선에 “천학”(天學, 당시에는 천주교를 이렇게 불렀다.)을 소개한 장본인임을 보여주는 것으로 여겼다.
유몽인, 허균과 같은 시대 인물인 이수광 역시 『지봉유설』(芝峰類說)에서 천주교 선교사의 저술에 관해 알고 있었음을 보여준다.3) 「외국」(外國)이라는 항목에서 이수광은 중국에 온 이태리 예수회 소속 선교사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1552­1610)의 두 저술에 관해 간략하게 서술하고 있다. 그는 『천주실의』(天主實義)와 『교우론』(交友論)을 거론하면서, 하느님의 우주 창조와 천당 혹은 지옥에서의 死後 삶에 대한 천주교의를 언급하고 있다. 또 이수광은 리치와 같은 서양인이 친구를 자신의 일부로 여길 만큼 우정에 높은 가치를 부여한 중국 학자 초횡(焦 )의 견해를 인용하고 있다.
17, 18세기 북경의 예수회 선교사들은 중국인 신자의 도움을 받아 서양 종교와 과학에 관한 300여종의 서적을 한자로 출간하였다.4) 이러한 천주교 서적 일부를 북경에 사신으로 간 조선인들이 조선에 들여왔다. 18세기 초 이미 “서학”(西學)에 관한 상당 양의 책들이 조선에 들어와 있었으므로, 이 책으로부터 실학자 이익(李瀷: 1681­1763)은 종교는 물론 천문학, 지리학, 지도 제작법, 수학 그리고 의학에 관한 지식을 얻어, 이를 자신의 백과사전적 저술에 남길 수 있었다.5)
이익이 특히 관심을 가진 책은 천주교리와 실제를 설명한 『천주실의』와 『칠극』(七克)이다. 리치의 『천주실의』는 토마스 아퀴나스주의 철학의 자연 신학을 소개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삼위일체(三位一體), 동정녀 잉태설(童貞女 孕胎說)이나 칠성사(七聖事) 등과 같은 신의 계시에 근거한 천주교리보다는, 오직 자연 이성에 의해 지지될 수 있다고 생각되는 견해에 그 논의가 국한되어 있다. 리치가 기술한 바와 같이 이 책은, “우주에는 만물을 창조하시고 이를 계속 활동하게 보호하시는 하느님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인간은 불멸의 영혼을 가져 내세에 생전의 행위로 보상받는다고 하는 등의 진리를 다룬다.”6)
『칠극』(七克)은 윤리서로서, 여기에서 스페인 예수회 신부 판토하(Dedacus de Pantoja)는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죄악을 극복하기 위한 복오(伏傲: 교만하지 않음), 평투(平妬: 질투하지 않음), 해탐(解貪: 인색하지 않음), 식분(熄忿: 분노하지 않음), 색도(塞 : 음식을 탐하지 않음), 방음(防淫: 미색에 빠지지 않음) 그리고 책태(策怠: 나태하지 않음) 등 일곱 가지 덕목을 제시하고 있다. 理性으로 慾望을 통제하면서 검소하고 소박한 삶을 영위하는 도덕적 인간상을 판토하가 제안한 것은, 유교 이상으로서 마음이 육신을 다스리는 철학자적 학자를 존경하도록 교육받은 사람들에게 설득력을 갖기 위한 의도였다.7)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이익은 『칠극』에 관해 논의하면서, 그는 판토하가 말한 것이 극기와 금욕을 강조하는 유교 정신과 다르지 않다고 믿었다. 그리고 덕목과 관련하여 판토하가 구사하는 수사(修辭)가 유교 문헌에 나타나는 것보다 때로는 훨씬 더 효과적인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 책은 극기복례(克己復禮)의 공정(功程)에 도움이 크다고 할 것이다. 다만 천주와 귀신의 논설이 섞여 있는 것만이 해괴할 따름이니, 만약 모래와 자갈과 같은 잡설을 제거하고 명론(名論)만을 채택한다면 바로 유가자류(儒家者流)라고 할 것이다.8)

1724년 이익의 제자 신후담(愼後聃: 1702­1761)은 유교적 입장에서 천주교리를 논박하는 장문의 글을 지었다.9) 그는 『천주실의』에 나타나는 리치의 주장을 조목조목 분석하여 반박하였다. 이 천주교 신학의 소개서에 대한 논평에서 그는 『천주실의』 전편을 관통하는 하나의 공통된 실마리를 찾아보려 하였다. 신후담의 판단으로는 『천주실의』에서 천주를 숭배하라는 일관된 언급이, 사실은 근본적으로 지복(至福)과 심판의 약속에 관한 것이었다. 요컨대 리치는 사람들을 천주교로 끌어들이기 위한 목적으로 천당과 지옥, 영혼 불멸 등의 전제를 그 근거로 이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신후담이 보기에는 천당과 지옥, 영혼 불멸 등의 가르침이 명백히 불교의 설(說)이므로, 천주교가 유교와 다름이 없고 불교와는 같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망녕된 것이라고 이를 거부하였다.

그러한 말은 우리 유학의 글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구구하게 불교의 일부분 말들을 주워 모아 가지고 불교를 배척한다고 하니 그들은 우리 유학의 죄인일 뿐만 아니라 또한 불교의 반적(反賊)이기도 하다.10)

신후담이 논박한 또 하나의 책은 프란시스 삼비아시(Francis Sambiasi: 1592­1649)의 『영언여작』(靈言 )이다. 삼비아시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견해를 따라 인간의 영혼은 불멸하고 이성적이며 영적인 실체인 것으로 설명하였다. 신후담은 이러한 생각이 우주의 정기(精氣)가 순간적으로 응축된 것으로 이해하는 유교의 입장과 다르다고 이를 부인하였다. 그리고 영혼이 사후에 천당과 지옥을 떠돌아다닌다는 천주교의 설이 불합리하며 비도덕적인 것이라고 비난하였다. 군자(君子)는 부모와 어른을 섬기는 데만 관심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덕(德)은 개인 이익을 염두에 두지 않고 일상 생활에서 충(忠)과 효(孝)를 보여주는 것에 의해서만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유교 철학의 정수 즉 배운 사람의 행위 기준은 선(善)을 위한 선의 행함에 있다.

천주교가 하늘에서의 복을 구하는 것은 아들된 자가 부모를 섬기는 일에 마음쓰지 않으며 신하된 자가 임금을 섬기는 일에 마음쓰지 않는 것과 같으니… 천주교의 설은 윤리를 경멸하고 도리를 어기며 사사로이 이익을 찾는 데 머무르는 것이니 어찌 심히 미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른바 배운다는 사람이 지성(至誠)을 근본으로 삼지 아니하고 먼저 이익을 위하는 마음이 있으니 이것은 군자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11)

신후담이 비판한 예수회의 세번째 책은 알레니(Giulio Aleni: 1582­1646)의 『직방외기』(職方外紀)이다. 신후담은 알레니의 문화 지리학이 자칫 비유교 문화권의 오랑캐 나라들을 중국 문화권의 문명국들과 감히 대등하게 취급하지나 않을까하고 우려했지만, 그의 주된 공격은 예수회의 교육 철학에 관한 것이었다.12) 유교에서의 교육 목적은 도덕 규범을 가르치고, 청소년이 그 규범에 맞는 도덕적 행위를 하도록 훈련하는 데에 있다. 독법(讀法), 수학과 같은 기술은 이차적인 중요성을 지닐 뿐이며, 그리고 이는 초등 교육에 있어서도 단지 보다 높은 수준의 윤리적 목적을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신후담은 서양 교육의 목적이 애석하게도 덕성의 함양이 아닌 기술의 습득에 있다는 것에 주목하였다. 도덕적 가르침을 깨닫는 능력이 개발되기도 전에 독법과 문학을 먼저 배우는 것이다. 그리고 숫자를 다루는 것에 불과한 수학을 이러한 지식의 목적과 이용 방법을 충분히 이해하기 전에 가르친다. 교육에 있어서 이러한 우선 순위의 전도는 정신적, 도덕적 성장을 왜곡시킬 뿐이라고 신후담은 우려하였다.13)

2. 조선 천주교회의 탄생

신후담이 천주교 사상을 혹평하였지만 그것이 이익의 젊은 제자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서구 사상과 예수회 서적에 대한 관심을 막을 수는 없었다. 1779년 이익의 제자 수 명이 이러한 서양 저술에 관해 연구 토론하기 위해 경기도 廣州 부근의 어느 사찰에서 모임을 가졌다. 실학자로 유명한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형인 정약전(丁若銓: 1754­1816), 이들과 사돈『譯者 註: 정약용의 맏형 若鉉의 처는 李蘗의 누이이다. 그리고 『黃嗣永帛書』 사건의 주인공 黃嗣永은 약현의 사위이다.』 관계인 이벽(李蘗: 1754­1786), 이승훈(李承薰: 1756­1801), 권철신(權哲身: 1756­1801) 그리고 몇몇 양반들이 바로 그들이다.14) 10여일 동안 이들은 하늘, 세상 그리고 인성(人性)에 관하여 탐구하였다. 예전 학자들의 모든 견해를 상고하고 고대 중국 성현의 저술을 탐독하였지만, 이들은 그러한 문제에 대한 만족할 만한 답을 얻지 못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예수회 선교사가 지은 철학, 수학 그리고 신앙 문제에 관한 책에 관심을 돌리게 되었다.15) 천주교 사제나 종교에 대해 제대로 교육받은 평신도조차 없으며, 그리고 서양 서적을 많이 갖추고 있지 못하였기 때문에, 주어사(走魚寺)에 모인 이들은 천주교를 완전히 이해하기에는 정보가 충분하지 못함을 느꼈다. 1779년 겨울에 있었던 여러날 동안의 독서와 토론은 이들의 지적 욕구만을 돋구었을 뿐이었다. 보다 많은 지식에 대한 이들의 갈망은 충족되지 못한 채 남아 있었다.
1783년 말 이벽은 이승훈의 아버지가 동지사(冬至使) 서장관(書壯官)으로 임명되고, 이승훈이 아버지를 수행하여 중국에 가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는 이벽이 기다리던, 서양 수학, 과학 그리고 종교에 관해 보다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는 이승훈에게 북경 북부 지역에 서양 선교사가 있는 천주교회가 있다고 말하고 그 교회에 가서 선교사들을 만나 보도록 권유하였다. 그리고 천주교리에 관한 서적과 영세를 요청하는 등 그들 종교에 많은 관심이 있다는 것을 반드시 보여주라고 하였다. “그렇게 하면 그 서양인들은 매우 기뻐할 것이며 기이한 선물을 많이 얻을 수 있을 것일세. 절대 빈 손으로 오지 말게.”16)
이승훈은 친구의 권유에 따라 북경에서 유럽 사제들을 찾았다. 선교사들은 그의 영세 요청을 처음에는 천주교리에 밝지 못하다는 이유로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신실함에 감명받아 그라몽(Louis de Grammont)신부는 마침내 그를 교회에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천주교리를 강습받은 후 이승훈은 조선 교회의 초석이 되라는 뜻에서 베드로(Peter)라는 이름으로 영세받았다.17)
조선인이 처음으로 천주교를 믿고 영세받은 소식은 방따봉(Jean­Matthieu Ventavon)신부가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유럽에 알려졌다. 이 편지에서 그는, 영세하기 전 서양 신부들이 이승훈에게 많은 질문을 하자 그는 이에 대해 모두 만족스러운 답변을 하였다고 적고 있다. 조선국왕이 새로 믿게 된 종교를 부인하도록 강요하면 어떻게 하겠는냐는 질문에, 이승훈은 “주저없이, 이 종교가 진실된 것이라고 분명하게 깨달은 이상 이것을 버리기 보다는 오히려 어떠한 고문도, 그리고 죽음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고 대답하였다.”18) 이승훈은 서약보다도 더욱 그의 영세명에 충실하였음이 드러난다. 선교사들에게 접근한 원래 동기가 서양 수학에 대한 지식을 더 얻기 위한 것이었다고 이승훈은 나중에 말하지만,19) 그가 처음에 가진 믿음은 진심에서 우러났던 것 같다. 그 뒤 16년 동안 세 차례나 이승훈은 자신이 지키기로 서약한 천주교를 부인하였다. 그렇지만 그는 세 번에 걸쳐 배교의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힌 뒤에도 그 때마다 천주교 의식에 몰래 참석하였으며, 결국 1801년 신앙을 지키기 위해 순교하였다.
1784년 이른 봄 이승훈은 18세기 서양 과학과 기술의 산물들과 함께 천주교 서적들을 가지고 북경에서 돌아왔다. 그는 곧 이벽을 찾아 자신이 영세받았음을 말하고 중국에서 가져온 물건을 나누어 주었다. 이벽은 천주교리에 관한 책을 열심히 읽고, 천주교야말로 그동안 자신이 추구해 온 진리라고 단정하였다.20) 그리고는 이벽은 곧 친구와 친척들에게, 이승훈보다 더욱 대담하고 열성적으로 천주교를 전하기 시작하였다.
초기 조선교회가 이벽과 같은 복음전도자를 가진 것은 행운이었다. 그는 자신의 신앙을 효과적으로 그리고 열렬하게 전하는 인물이었다. 달레(Dallet)신부는 자신의 조선 천주교회사에 관한 선구적인 저서에서 이벽의 인상적인 외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는 키가 8尺이요, 한 손으로 100斤을 들 수 있었다. 그의 당당한 풍채도 모든 이의 주목을 끌었다.”21) 그는 가문의 배경도 좋았다. 慶州 李氏 집안으로, 가까운 가족들은 고위 무관직을 역임하였다. 그의 조부는 무병사부총관(武兵使副摠管)을 지냈으며 이벽의 두 형도 武將이었다.22) 그의 학덕과 인품은 영향력 있는 이익의 많은 제자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당시 조선의 한 기록이 이벽을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고 달레는 전해준다. “그는 모든 문제를 연구하여 파고 들었으며, 經書를 배울 때에도 어려서부터 문장 속에 숨은 신비스러운 뜻을 탐구하려는 습성이 있었다.”23)
1784년 봄 이벽은, 사돈 관계이며 5년 전 주어사에서의 講學會에 같이 자리한 바 있는 정약전과 함께, 경기도 시골의 정씨 집안 고향에서 있은 이벽 누이의 제사에 참석한 뒤 서울로 돌아오는 배를 탔다. 이 배에는 정약전의 동생 정약종(丁若鍾: 1760­1801), 정약용도 함께 타고 있었다. 서울에 도착한 뒤 이벽은 이들 정씨 형제들에게 『천주실의』, 『칠극』 등의 천주교 서적들을 보여주었다. 바로 이 때부터 정씨 형제들이 천주교에 끌리기 시작했다고 하며, 이 때만 해도 천주교에서 제사를 금지한다는 말은 없었다고 정약용은 말한다.24)
이 무렵 이벽은 譯, 醫, 陰陽, 律 등 조선왕조 행정의 중요 분야의 세습적 기술관인 중인(中人) 신분의 친구들에게 관심을 돌렸다. 최창현(崔昌顯), 최인길(崔仁吉), 김범우(金範禹) 그리고 김종교(金宗敎) 등이 이 때 입교하였으며, 이들은 중인, 양반 그리고 양인(良人) 신분의 친구들에게 새로운 신앙을 전교하기 시작하였다. 점차 천주교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조선인 숫자는 증가하고 있었다.
이승훈의 외숙부이자 이익의 종손(從孫)이며 뒷날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지내는 이가환(李家煥)은 이벽이 천주교리를 조장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정약용의 기록에 의하면 이가환은 탄식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한다. “아! 나도 『천주실의』와 『칠극』을 읽어 보았다. 이 책에는 좋은 점도 있지만 결국 정학(正學)으로 받아들일 것이 못된다. 어떻게 이벽은 우리 유학을 이런 것으로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이가환은 이벽의 집에 찾아가서 그가 심각한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을 납득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이벽은 자기 입장을 장하(長河)처럼 웅변하고, 믿음을 철벽과 같이 고수하였다. 이가환은 이벽과의 이러한 논쟁에서 이길 수 없음을 깨닫고, 설득을 포기하고 다시는 그를 찾지 않았다.”25) 정약용은 이가환이 이벽의 확고한 믿음에 감명받았지만 그에 의해 천주교 신앙을 갖게 된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정약전의 조카 사위 황사영(黃嗣永)이 1801년의 박해 와중에 쓴 글에는, 이가환이 이벽을 통해 천주교를 믿게 되었으며 그리고 이벽에게 영세받기 보다는 북경에 가서 서양 사제들로부터 직접 영세받기를 바랬다고 한다.26) 조선 조정 역시 이가환을 천주교인으로 간주하여, 1801년 조카 이승훈 그리고 다른 양반 교인들과 함께 처형하였다.
1784년 가을 이벽은 1779년의 주어사 모임에 같이 있었던, 安東 權氏 권철신을 찾아가 그와 동생 일신(日身)이 천주교를 믿도록 하였다. 이로써 조선 천주교인의 명부에 또 하나의 유명 양반 가문이 추가되었다. 이승훈이 북경에서 돌아온 후 처음 몇 달 동안 이기양(李基讓), 유항검(柳恒儉), 홍낙민(洪樂敏) 그리고 윤지충 등도 천주교에 입교하였는데, 이들 모두 유명 양반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윤지충은 천주교를 이벽으로부터 직접 배운 것이 아니라, 이벽의 친구이며 조선 천주교회 탄생의 중심 인물인 중인 신분의 김범우를 통해서였다. 김범우의 집은 최초의 종교 의식이 행해진 곳이었다. 그리고 조정에서 천주교를 처음 주목한 곳도 김범우의 집이었다. 1785년 이승훈, 정약전, 정약용 그 외 몇 사람이 명동에 있는 김범우의 집에서 종교 의식을 위한 모임을 가졌다. 1785년 성균관 유생들이 연명한 통문(通文)은 이 모임의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이벽은 푸른 수건으로 머리를 덮어 어깨까지 드리우고 아랫목에 앉아 설법하였다. 이승훈과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삼 형제 및 권일신 부자(父子)가 모두 제자라 일컬으며 책을 옆에 끼고 모시고 앉아 있었다. 이벽이 설법하고 깨우쳐주는 것이 우리 유가(儒家)에서 스승과 제자간의 예법보다 더욱 엄격하였다.27)

이들은 날짜를 약속하여 이러한 모임을 여러 달 가졌는데, 양반과 중인 가운데 모이는 사람이 수십명이나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추조(秋曹) {譯者 註: 刑曹의 별칭이다.}의 금리(禁吏)가 김범우의 집을 지나다가 이상한 소리를 듣고 술마시고 노름하는 것으로 의심하였다. 금리가 들어가 보니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얼굴에 분을 바르고 푸른 수건을 쓰고 있었다. 해괴한 광경에 놀라 그 금리는 모두 체포하고 예수의 화상(畵像)과 서적 및 물건들을 압수하였다. 형조판서(刑曹判書) 김화진(金華鎭)은 이들이 양반의 자제로서 그러한 어리석은 일에 연루된 것을 애석하게 여겨 타일러 내보내고, 단지 김범우만 가두었다.28) 김범우는 열흘 동안 갇혀 있으면서 가혹하게 매질당하였다. 그리고 이때 입은 상처가 악화되어 충청도 유배지에서 1786년 가을에 죽었다.29) 이로써 김범우는 조선 천주교의 첫 번째 순교자가 되었다.
김범우 집에서의 모임이 발각된 사실은 조선 천주교회에 크나큰 타격을 주었다. 초기 교회는 김범우를 잃었고, 또 교회 창립을 주도해왔던 이승훈과 이벽이 일선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천주교 의식에 참여하였다는 소문이 널리 알져지자 이들의 이단 활동에 대한 가족들의 성화가 빗발쳤다. 이벽의 아버지는 아들이 천주교를 버리지 않으면 목을 메어 자살하겠다고 하였다. 효도와 신앙 가운데 하나를 택해야 한다는 고민 끝에, 이벽은 자신이 천주교로 인도한 친구들과의 모든 관계를 단절하였다. 일년 뒤인 1786년, 이벽은 티푸스에 걸려 설흔 셋의 나이로 죽게됨으로써 자신이 그 설립에 크게 기여한 조선 교회와 영원히 결별하였다.30)
이승훈 역시 아버지와 친척들로부터 배교를 강요당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모든 가족과 친척들을 불러, 함께 이승훈이 북경에서 가져온 책을 불태우고 선교사가 준 선물들을 부숴버렸다. 그리고 이승훈에게 천주교를 배척하는 글을 쓰게 하고 이 글을 형조(刑曹)에 보내게 하였다.31) 그러나 이승훈의 배교는 형식적인 것일 뿐, 그는 1785년 이후에는 더욱 조심스럽게 천주교인과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였다.
김범우가 고문당하고 이벽, 이승훈이 배교를 강요당하는 등의 사건이 있었지만 조선 천주교회는 계속 성장해 나갔다. 김범우가 잡혀가는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윤지충은 그에게서 『천주실의』와 『칠극』을 빌려 이를 필사하고 돌려주었다. 윤지충은 이미 1783년 23세의 나이로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였다. 이제 과거 준비에만 매달릴 필요가 없었으므로, 1791년 심문에서 밝히듯이, 그는 “사람의 마음과 행실을 바르게 하여 주는 공부”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32) 그는 서울을 떠나 고향인 전라도 珍山으로 돌아갔다. 여기서 그는 이웃에 사는 외사촌 권상연(權尙然)과 함께 두 권의 예수회 서적과 그 속에 담긴 천주교리에 대해 열심히 연구 토론하였다. 3년 간의 천주교리에 대한 명상과 성찰 끝에 윤지충은 천주교를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1788년 고종사촌 정약전의 도움으로 그는 바오로라는 이름으로 영세받았으며, 권상연 역시 야고보라는 이름의 천주교인이 되었다.33)
1787년 천주교는 또 다시 성균관 유생들의 격렬한 비판의 표적이 되었다. 이 때 이승훈과 정약용은 둘 다 성균관 유생이었다. 같은 유생인 이기경(李基慶)은, 이승훈과 정약용이 여문(儷文)짓는 것을 핑계삼아 성균관 근처의 집에 모여 다른 유생들에게 천주교 서적을 강습하고 그 교리를 설교한 사실을 알아차렸다. 이기경은 이전에 몇 권의 천주교 서적을 읽으면서, 이 책들은 얼른 보면 좋은 점이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그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유교 도덕 질서를 위협하는 사상을 내포한 것으로 결론지은 바 있었다.34)
처음에 이기경은 두 친구의 천주교에 대한 관심을 단념케하려고 설득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자신의 충고를 무시하자, 그는 성균관 유생 홍낙안(洪樂安)에게 유생들 가운데 서양 사상이 확산되는 것이 염려된다고 말하였다. 홍낙안은 곧 이 사실을 조정에 알려 이러한 이단자들이 엄중히 처벌받기를 요청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기경은 친구들이 공개적으로 망신당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대신 그는 외국 서적에 현혹되어 유교 도덕에서 빗나간 사람들을 조용하게 설득하는 편이 좋다는 견해를 폈다. 그는 이단을 다스리는 데에 물리력보다는 논리적 설득과 도덕적 수범(垂範)이 보다 효과적이라고 믿은 것이다.35)
일부 성균관 유생들의 사교(邪敎) 행위에 대한 소문이 퍼지자, 정약용은 이기경에게 분노에 찬 서신을 보내어 이러한 소문의 발설자가 이기경인 점과 자신과 동료들을 이단에 연계시켜 보는 점 등에 대해 힐난하였다. 정약용은 자신이 이기경을 믿은 것이 큰 잘못이라 하면서, 이기경이 다른 사람을 너무 성급하게 판단하는 허물을 저질렀다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형은 종일(終日)을 기다리지 않고 남의 의리(義理)와 동떨어진 말을 그릇 인정하였소.”36)
이에 대하여 이기경은 답신을 보내어 천주교의 위험성을 정약용에게 납득시키려 하였다. 그는 십계에 임금을 섬기라는 말이 없고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이 넷째 차례에 가 있으니, 결코 선비가 볼 만한 것이 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더욱이 그는 천주교 서적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그 사실을 부형(父兄)들에게 숨기고 있는데, 이것은 선비의 도리가 아니라고 지적하였다. 그는 천주교에 반대하는 자신의 입장을 다음의 말로써 정리하였다. “이는 윤리를 타락시키며 전혀 터무니없는 것이다.”37)
정약용에게 보낸 이기경의 편지는 천주교에 대한 유교의 대응에 있어서 대표적인 예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기경은 신의 존재, 예수 그리스도나 영혼 불멸 등 천주교리의 진위(眞僞)에 대한 논의에는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 신앙의 도덕적 실천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 그가 보기에 천주교는 사람들로 하여금 부모와 어른에 대한 책임을 등한시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 이유 하나만으로도 천주교가 유교적 도덕주의자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초기의 천주교인들은 친구들의 비판 이외에도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다. 1786년 이들은 자기들끼리 교계제도(敎階制度)를 세워, 이승훈을 교회 영수(領首)로 추대하고 양반과 중인 가운데 열 명을 神父로 선출하였다. 이들 가운데 정식으로 서품된 사제가 없으므로, 처음에는 자신들이 행하는 성사(聖事)가 교회 당국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였다. 1787년 이들은 자기들이 임명한 신부들의 적법성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북경으로부터 이에 대한 명확한 답변을 받을 수 있을 때까지 영세를 제외한 나머지 성사의 집전을 중지하였다.38)
1790년 봄, 회답이 도착했다. 이 글에서 구베아(Alexandre de Gouvea)주교는 불법적인 사제직 수행을 중지시키고, 보다 많은 조선인을 입교시키는 일은 계속하도록 격려하였다.39) 이 지시로 말미암아 조선 천주교회는 당혹하였다. 북경에서는 정식 사제를 4년 안에는 파견할 수 없는 형편이었으며,40) 게다가 조선의 천주교인들은 사제가 행하는 성사가 영혼 구제에 본질적인 것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788년 국왕 정조(正祖)가 개인이 소장한 모든 서양 서적들을 소각하라는 명령을 내림에 따라, 조선 교회는 또 다른 좌절을 겪게 되었다.41) 윤지충은 곧 필사한 『천주실의』와 『칠극』을 불태웠다. 일부 교인들은 책들을 없애지 않고 안전한 곳에 숨겨두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교인들은 이를 불태웠다.
그 뒤 1790년 구베아주교가 보낸 두번째 서신은 조선 교회의 기초를 흔드는 것이었다. 이 서신을 통해 처음으로 조선 천주교인들은 교황이 제사 참배를 금지한 사실을 정식으로 알게 되었다. 이승훈은 이 소식을 듣고 교회 지도자의 위치에서 물러나 자신의 권한을 권일신에게 넘겨 주었다.42) 정약용과 형 정약전 역시 제사 참배 금지를 안 후 교회 활동에서 손을 떼었다. 그렇지만 정약종은 1801년 박해시 처형되기까지 열성적인 교인으로 남아 있었다.
조선의 교인들이 원래 천주교를 믿은 것은, 유교 사회와 천주교 신앙이 상충하기보다는 양립할 수 있다는 점을 역설하는 17세기 예수회 선교사의 책을 통해서였다. 조선인이 본 책에는, 1704년 로마 교황이 예수회의 적응 정책을 잘못된 것로 결정하고, 그 대신 동양의 천주교인들에 비기독교 문화와 완전히 관계를 단절할 것을 요구한 사실에 관한 언급이 없었다. 문화적 다양성을 인정하자는 예수회의 주장을 물리치면서 교황은 동아시아의 충실한 천주교인들에게 조상의 이름이 적혀 있는 신주에 음식과 술을 바치는 유교 의식에 참여하는 일을 그만 두도록 요구하였다.43)
3. 제 사

조선과 중국의 천주교회로 하여금 수많은 어려움을 겪게 했던 이 의식의 본질은 무엇일까? 이것은 종종 ‘조상 숭배’를 가리키는 것이지만 한국말 ‘제사’를 그렇게 번역하는 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조상 숭배는 이 유교 의식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죽은 사람의 가족과 후손들이 단지 함께 모여서 효성과 가문 화합의 표현으로서 조상을 추모하는 것이다. 조상 추모의 의식은, 조금 과되게 말하면, 유교 사회를 결속시키는 접착제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 의식이 사람은 이 세상에서 혼자 사는 고립된 개체가 아니라, 의무, 책임, 은혜 그리고 보답을 수반하는, 가문과 지역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인식을 강화시켜준 것이다.
유교 사상에서는 사회가 가문의 연장으로 간주된다. 한 가문의 효자는 곧 국왕에게 충성하는 신하를 의미한다. 조선 천주교인들이 지시받은 바와 같이 조상을 공경하는 의식을 거부하는 것은 유교의 정치, 도덕, 사회 질서의 핵심에 도전하는 것이다. 18세기 조선에서 도덕과 충성은, 무엇보다도 헌신적으로 부모를 모시고 공경하고 따름으로써 자신의 효성이 지극하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을 뜻하였다. 이러한 의식의 거부는 곧 부모에 대한 합당한 공경을 거부하는 것이고, 군주에 대한 충성의 의무를 거부하는 것이며, 사회의 충실한 일원에 어울리는 태도를 거부하는 것을 뜻하였다.
제사에 있어서 교황청이 가장 문제삼은 요소는 신주였던 것 같다. 달레는 조선 문화를 소개하면서 신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신주는 대개 밤나무로 만드는데… 이 신주라는 것은 백연(白鉛)을 칠한 조그만 판자로 그 위에 한문으로 죽은 이의 이름을 써 놓은 것이다. 측면에는 혼이 들어가기로 되어 있는 구멍을 뚫는다. 신주는 네모난 상자에 넣어서 보관하는데, 부잣집에서는 특별한 방에, 서민들 집에서는 집 한쪽 구석, 일종의 벽감(壁龕) 속에 간직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종이로 신주를 만든다.44)

상중(喪中)이나 기일(忌日)에, 죽은 사람의 4代 직계 후손과 친척들이 제사를 지내며, 직계 후손 가운데 최연장자가 제주(祭主)가 된다. 이 의식은, 낮은 상 위에 신주를 두고, 그 앞에 술과 음식을 차린 후, 조상의 혼에 음식과 술이 바쳐지는 동안 그 신주의 조상에게 공경을 표하기 위해 여러번 절하는 것 등으로 이루어진다.45) 이러한 의식을 18세기 천주교회 당국은 죽은 사람의 혼이 신주 안에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는 일종의 종교 의식으로 이해하였다. 이렇게 판단함으로써 이 의식은 모든 천주교인에게 금지된 우상 숭배의 한 형태로 보였던 것이다. 중국에 있던 초기의 예수회는 가문 중심의 유교 사회에서 이 의식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인정하고, 그것이 상징적인 것일 뿐 천주교리에는 전혀 위배되지 않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후기의 선교사들은 이 의식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라는 지시를 교황청으로부터 받았다. 즉 신주에 절하고 음식을 차리는 행위에는 그 안에 혼이 실제로 들어 있다는 주장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다.
돌이켜 보면 제사의 실질적 의미에 대한 예수회의 이해가 보다 정확한 것으로 보인다. 1700년 淸 강희제(康熙帝)는, 제사란 사랑과 효성스런 추모의 표현이며 제사 지내는 사람이 복을 얻기 위함에 있지 않다라고 하고, 더구나 신주가 있다고 해서 그 안에 조상의 혼이 있다는 생각은 전혀 터무니 없는 말이라고 언명하였다.46) 강희제는 여기에서 중국의 오래된 미신적 관습에 대해 새롭고 합리적인 해석을 내리고 있지는 않다. 2000년 전의 『예기』(禮記)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제사는 일이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요, 속에서 나와서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다. 마음에서 두려워하여 받들기를 禮로 한다.”47)
이와 같이 유교 경전에 있어서도 제사는 신주 안에 죽은 사람의 혼이 존재한다는 주장이라기보다, 살아 있는 사람이 지닌 효성의 표현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사회학자 양(C.K. Yang)은 유교 철학의 초기 합리주의 전통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모든 전례 행위와 제수(祭需)는 혼이 현실에 존재한다는 믿음과는 별도로 죽은 사람의 영생(永生)을 기원하는 표현으로 해석되어야 한다.”48)
조선 유학자들 역시 제사의 상징적인 성격을 이해하고 있었다. 이들은 혼의 존재 有無보다 제사 지내는 사람의 마음 가짐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익은 「제사지리」(祭祀之理)라는 짧은 글에서 제사에 대해 논의하였다.49) 제수가 조상의 영생에 필요한 것이라는 일반적인 생각을 부인하면서, 성인이 정해 놓은 제사의 횟수가 사람의 식사보다 훨씬 적은데, 죽은 사람의 귀신이 살아 있을 때 만큼의 음식을 필요로 한다면 귀신은 모두 굶주리고 말 것이라고 말하였다.50)
이익은 제사가 죽은 사람보다 살아 있는 사람을 위한 것으로 보았다. 그는 성인이 인도(人道) 즉 사람의 마땅한 도리를 위해 이 의식을 마련하였다고 말하였다. 제사를 잘 지냄으로써 효자는 자신에게 생명을 준 부모에게 깊은 감사의 뜻을 표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효성의 진지한 표현이 유교 세계의 도덕과 사회 질서의 토대를 제공하는 것이었다.51)
제사받는 혼의 존재 有無는 부차적인 것이었다.
이익의 제자 안정복은 천주교의와 의식을 비판한 자신의 글에서 제사 때의 정성에 대해 이와 유사한 입장을 지녔다. 안정복은 조선의 천주교인에게 제사 금지 지시가 알려지기 이전에 지은 글에서, 신주 앞에 놓인 음식을 조상이 실제로 먹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천주교인들은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었다고 적고 있다. 또 천주교인들은, 사람들에게 이러한 미신적인 유교 의식에 참여할 때 하늘을 쳐다보면서 제사에 참여하라는 사회 압력을 이기지 못한 것에 대해 마음 속으로 하느님의 용서를 빌며, 마지못해 하는 자세를 지니도록 권유하였다는 것이다. 안정복은 이러한 권유를 “우리의 典禮를 타락시키고 유교를 훼손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고대 중국의 성인이 조상에 대한 공경심을 나타내기 위해 만든 제사의 도덕 원리를 천주교인들이 이해하지 못한다고 단언하였다.52) 안정복에게 있어 제사는, 이를 지내는 사람이 자신에게 생명을 준 조상에 대한 효성을 진지하게 나타내려고 할 때만 의미있는 것이었다. 천주교인들이 권유하는 것처럼 억지로 제사에 참여하는 것은, 조상에 대한 공경심이 부족한 부도덕한 행위이며 소중하게 지켜온 전통을 모독하는 것이었다.
유교 제사의 의미에 대한 교황청의 해석은 두 가지 오해에서 비롯된 것 같다. 첫째로 교황청은 중국의 학자 사회에서 수십 년간 경험을 쌓은 예수회의 학문적 견해를 무시하면서, 제사의 의미에 관한 유교 철학적 설명을 일반 백성의 미신과 혼동하였다. 기원 전 3세기 유교 철학자 순쯔(荀子)는 제사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제사는 사모(思慕)의 정(情)을 표하는 것이다… 군자에게는 사람의 마땅한 도리가 되고, 백성에게는 귀신과 연관된 일이 된다.53)

공자(孔子) 시대 이래로 학자들은 전통적 제사 의식을 그 도덕적 사회적 기능 면에 있어 중요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즉 이는 효도와 충성이라는 덕목을 신장시키는 한 방도로서 장려되었던 것이다. 순쯔가 주목하였듯이, 제사의 중요성은 귀신보다 사람에게 더 영향을 미치는 데 있다. 그러나 교육받지 못한 백성에게는, 제사가 죽은 사람의 혼을 위해 필요한 의식이라고 믿는 것이 허용되었다. 학자들이 이러한 믿음을 용인한 것은 이것이 백성들로 하여금 전통적인 유교 가치관을 따르는 데에 도움을 주기 때문이었다.54)
로마 교황청의 잘못은 제사에 대한 일반인들의 해석을 유교의 정통 해석으로 간주한 점이다. 교회 당국은 동양의 교육받은 천주교인들이 그 교의를 어기지 않고서도 제사에 참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이들을 포함한 유학자들에게 제사는 반드시 미신적인 의미를 지니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천주교회는 무지한 백성들이 그랬듯이 제사를 신주 안에 귀신이 실제로 있다는 암시로 보는 입장을 견지함으로써, 중국과 조선 사대부들의 호감을 살 수 있을 자신의 주장에 심각한 손상을 입혔던 것이다.
18세기 교황청의 두번 째 실수는 보다 심각한 것으로서, 유교의 관습과 풍속을 서구 관점에서 본 것이다. 로마 당국은 유교 의식이 덕목과 도덕의 증진에 유익한 효과를 준다는 중국인의 논의에 귀기울이지 않고, 그것이 암시하는 것 같아 보이는 실체론적 주장에 대한 검토를 계속 고집하였다. 로마에서 보기에는, 제사가 신주 안에 조상의 혼이 있다는 믿음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었다. 유학자에게는, 신주 안에 조상의 혼이 실제로 있는지 없는지의 문제는 부차적인 것이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제사의 역할로, 이는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가족 화합을 증진시키며 그리고 덕목의 실천을 장려하는 것이었다. 유교 사상을 연구하는 한 서양 학자가 지적하였듯이, 동양에서는 어떤 말에 대한 진위(眞僞)를 가리는 데에 대한 관심이 서양과 같지 않았다. 주어진 믿음이나 주장의 수용 여부를 결정함에 있어, 문제가 되는 그 믿음이나 주장이 함축하는 행동적 의미를 검토하려는 경향이 비교적 강하다.55) 천주교회가 제사를 잘못된 것이라고 결정한 것은, 곧 이 의식이 옳다는 유교 주장을 무시한 것이었다. 진리에 대한 서양의 편견은 도덕에 대한 유교의 관심과 충돌하였다. 그리고 이 충돌의 희생자는 중국과 조선의 천주교인들로서, 이들은 천주교의 종교적 진리 주장을 따르면서 유교 사회의 선량한 시민으로 살려고 노력했던 사람들인 것이다.

4. 윤지충, 권상연의 체포와 순교

1790년 조선 천주교인들은 교회 당국의 지시를 충실히 따르면 사회, 가족, 친구 그리고 이웃과 필연적으로 갈등을 일으킬 것을 알면서도, 종교 의식을 계속할 것인가의 여부를 결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대립을 무릅쓰기로 결심한 인물이 윤지충과 권상연이었다. 1791년 봄 윤지충의 어머니가 죽었다. 그와 외사촌 권상연은 모든 유교 장례 의식을 따르되 신주를 수반하는 부분은 제외하기로 했다. 구베아주교의 지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들은 윤지충 어머니의 신주를 만들지 않았을 뿐 아니라 집안에 있는 모든 신주를 불태워 땅에 묻었다. 장례 의식에서 신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므로, 이를 모시지 않는 사실이 문상하러 진산에 온 친척들에게 알려지지 않을 수 없었다.56)
윤지충과 권상연이 죽은 어머니에 대한 공경심을 관습대로 표명하지 않음으로써 유교 전통을 어겼다는 소문은 곧 퍼져 나갔다. 이 소문은, 이기경의 친구이며 1787년 성균관에서의 천주교 학습 사건으로 일찍이 이승훈과 정약용을 처벌하려고 한 홍낙안의 귀에 들어갔다. 당시 승정원(承政院) 가주서(假註書)로서, 조선의 사대부에게 유교 정통 교의의 고수를 요구할 권한과 책임이 자신의 직책에 있다고 생각한 그는 자신과 윤지충이 함께 속해 있던 남인(南人)의 영수 좌의정(左議政) 채제공(蔡濟恭)에게 장문의 서신을 보냈다. 이 글에서 홍낙안은 암적 존재 같은 천주교가 널리 확산되고 남인은 물론 조선 사회와 정부 전체를 위협하기 전에, 윤지충과 권상연에 대해 단호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요청하였다.
홍낙안은 천주교인들이 임금이나 아비 보기를 길가는 사람같이 하며, “윤리 버리기를 헌신짝같이 한다”고 비난하였다. 강상(綱常)은 영원히 변하지 않으며 우리는 예의를 수천년동안 나라의 토대로 삼았다고 단언하면서, 그는 “패륜하여 크게 무도(無道)한 사람도 부모가 생존할 때는 잘 섬기고 돌아가시면 제대로 장례지내는 예법을 어기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윤지충과 권상연은 스스로를 오랑캐와 짐승으로 비하시켰으며, “허황되고 괴물같은 신”을 핑계대고 장례를 제대로 치르지 않았다. 이들은 윤지충 어머니의 신주도 세우지 않고 심지어 조상의 신주까지 불태웠다.57)

슬프고 애통하도다! 천지가 생긴 후에 어찌 이런 변괴가 있겠는가? 법률에 의하면 신주를 헐어서 다치게 하면 그 죄가 살인과 같다고 하였는데, 하물며 자기 손으로 아비, 할아비의 신주를 불태우고 헐었다니, 이는 역적의 변과 조금도 다름이 없습니다. 설령 지충의 무리가 실성하여 미쳐서 이런 변을 저질렀다 해도, 법률이 용서치 못할 것입니다. 하물며 이들은 사설(邪說)을 빌어와, 우리의 정도(正道)에 힘껏 항거하면서 선왕(先王)이 제정한 예법을 원수같이 보며, 흉악하고 패륜한 행동을 즐기는 자들입니다. 그 죄악을 구명한다면 또한 흉악한 역도(逆徒)보다 백배나 더하니, 이런 것을 처형하지 않으면 삼강오륜(三綱五倫)을 다시 찾아볼 땅이 없으며, 동방 사천년 예의의 나라를 장차 짐승과 오랑캐의 지역으로 빠뜨리게 할 것입니다.58)

홍낙안의 비난은 정도가 지나치다 하여 묵살되었다. 관아에서 윤지충과 권상연의 집을 수색하였지만 신주는 발견되지 않았다. 즉시 이들을 체포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11월 말 경 이들은 진산군 관아에 구금되었다. 진산군수 신사원(申史源)은 마지 못해 윤지충과 권상연을 체포했는데, 그것도 서울로부터 분명한 지시가 있은 후에야 집행한 것이다. 그가 자신이 다스리는 지역에서 이단이 발생함으로써 난처해지기를 바라지 않아서 였음이 분명하다.
군수 신사원의 윤지충에 대한 신문 기록을 보면, 군수 자신은 물론 두 죄수의 평판도 지켜주려고 한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이들이 자신들의 지나친 극단적 행위를 부인하고, 이 서양 종교가 유교 정통 교의와 완전히 양립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이게끔 자신들의 천주교 신앙에 대해 해명하도록 유도하였다. 그러나 윤지충은 완강하였다. 신사원은 부모에게 받은 몸을 지켜야 하는, 효자의 도리에 관한 유교의 가르침을 윤지충에게 상기시켰다. 그리고 고문과 죽음을 택하면, 이는 가문의 몰락과 치욕을 초래하며,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생명에 대한 효성의 부족을 드러낸다고 회유하였다. 이에 동요하지 않고 윤지충은 고문과 죽음을 감수하더라도 언제나 옳은 것을 따라 행동하는 것이 효도라는 믿음으로 신사원의 말을 반박하였다. 군수 신사원은 윤지충이나 권상연에게 자신들의 종교를 포기하도록 설득할 수 없음을 깨닫고, 이들의 목에 칼을 씌워 전라도 감사(監司)가 있는 전주로 송치하였다.59)
전주에서도 윤지충은 천주교리를 믿음에 있어 어떤 잘못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제사의 불합리성을 논리와 이치를 들어 보여줌으로써 자신의 신주 훼손 행위를 정당화하였다. 유교 의식이 비합리적이고 미신적인 성격을 지녔다는 서양의 주장에 근거한 윤지충의 항변은, 제사를 상징적이고 윤리적인 의미로 보는 유교 입장과 충돌하였다. 전주에서의 심문 내용은 윤지충과 심문관 사이의 입장이 서로 다른 것임을 잘 보여 준다. 윤지충은 자신의 행위가 진리에 부합한다는 점을 확인하기 위하여 그러한 행동을 하였다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이에 반해 감사는 윤지충에게 자신의 행위와 천주교 서적의 내용이 비도덕적이라는 점을 시인하라는 입장을 취하였다. 윤지충은 논리와 이치에 맞지 않는 행위가 어떻게 도덕적일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감사는 진위(眞僞)에 대한 문제가 어떻게 사회적 의무 이행에 영향을 줄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60)
처음에 윤지충은, 나무 조각 속에 마치 부모의 혼이 들어 있는 것처럼 다루는 것이 오히려 부모의 존엄성을 모욕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부모를 공경하라는 넷째 계명을 인용하면서, 만약 부모가 실제로 신주 안에 계시다면 천주교인은 이 신주를 공경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이 신주들은 나무로 만든 것이고 “이것들은 살이나 피로 저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이것들은 나를 낳고 기르는 수고에 아무런 몫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어떤 일꾼이 만들고 꾸민 물건을 감히 가져다가 제 부모로 삼고 실제로 그렇게 부를 수 있겠습니까?”61)
그리고 윤지충은 혼이 위패(位牌) 안에 있다 하더라도 여기에 음식과 술을 드리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말하였다. 윤지충은 영혼은 비물질적 존재(非物質的 存在)이므로, 물질적인 것으로 양육될 수 없다고 지적하였다. 아무리 훌륭한 술과 맛있는 음식이 있어도 영혼을 기를 수는 없다. 더욱이 아무리 효성이 지극해도 부모가 주무시는 동안에는 음식을 드리지 않는다. “잠들었을 때 먹을 수 없는데, 돌아가신 후 음식을 드리는 것은 얼마나 더 어리석은 일입니까? 그러니 효자가 돌아가신 부모를 헛되고 거짓된 행동으로 공경할 수 있겠습니까?”62)
심지어 그는 모든 가치와 덕목의 근원인 충과 효를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유교 도덕의 근본 주장에 정면으로 도전하였다. 그는 이 두 덕목이 완전하며 자명하다는 사실을 부정하면서, “임금에 대한 충성의 근본도 천주의 명령이요, 부모에 대한 효도의 근본도 역시 천주의 명령입니다”라고 주장하였다.63) 이는 유교 사상의 핵심과 근본적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윤지충은 충효를 모든 것에 대한 판단 기준으로 여기기 보다는, 충효 그 자체가 모든 가치의 근원인 하느님의 뜻으로 인간에게 지워져 있는 조건적인 의무일 뿐이라고 보았다.
윤지충은 믿음의 대상보다 행위의 대상에 더 관심을 두는, 유교 세계의 행동 방침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천주교의 가르침에 대해 간략하게 공술(供述)하라는 명령에,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죄로부터 인간을 구원하는 권능에 관해 언급하지 않고 “우리가 실행할 것은 십계와 칠극에 포함되어 있습니다”라는 말로 대답하였다.64) 따라서 윤지충은 천주교 신앙을 도덕적 명령으로 보고, 윤리적 행위의 지침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천주교 도덕관으로 말미암아 그는 자신이 소속된 유교 사회와 피할 수 없는 갈등을 겪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는 주위 사람에 대한 것보다 하느님에 대한 의무를 더 중시하였기 때문이다. 심문관은 윤지충에게 천주교의 십계에 대한 진술을 요구하였다. 감사는 십계 가운데에 임금과 신민(臣民)의 관계에 대한 특별한 언급이 없음을 곧 알아차리고, 이 사실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였다. 이에 윤지충은 임금은 온 나라의 어버이이며 백성은 임금과 관장(官長)에게 부모에 대한 것과 같은 공경과 충성의 본분을 지켜야 하며, 이 모든 것이 제 4계에 포함되어 있다고 대답하였다. 심문관은 윤지충에게 천주교의 도덕 원리를 보다 자세하게 진술할 것을 명하면서, “임금에 대한 충성과 효성의 원칙을 내세움으로써 목숨을 보존할 방도를 찾아내는 것이 옳겠다”라고 훈계하였다.65)
윤지충은 공안(供案)에서 천주는 창조주이며 모든 이의 아버지라고 말하였다. 천주를 아버지로 간주하기에 그는 천주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었다. 신주를 집에 두고 신주로 상징되는 죽은 사람의 혼에 음식과 술을 드리는 것을 천주가 금하였기에, 이에 복종하지 않고 달리 할 수가 없었다.66)
윤지충은 또 충효의 표현 방식에 대한 유교와 천주교의 차이를 설명하면서, 천주교인은 문제가 있는 제사에 참여하는 것보다는 덕목의 열성적인 실행을 강조한다고 말하였다. 덕목의 실천에 대한 천주교인의 이러한 관심을 충효의 표현으로 보아야지 반역적이며 부도덕하다고 간주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덧붙여 윤지충은 평민과 가난한 양반들이 규정대로 제사지내지 않는다고 하여 엄한 책망을 당하지 않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그렇다면 왜 자기 집에서 몰래 천주의 명령을 따르기만 한 이들이 국법(國法)을 어긴 죄목으로 처형될 지경에 이르렀을까?67)
이러한 윤지충의 주장이 1980년대의 우리에게는 타당한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렇지만, 1791년에 있어서 유학을 신봉한 관리들에게는 부당한 것으로 여겨졌다. 당시 학자들은 신주 안에 죽은 사람의 혼이 실제로 있지 않다고 구태여 부인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이들은 제사 때에 神이 제석(祭席)에 와 있듯이 하라는 공자(孔子)의 가르침을 오랫동안 따라 왔던 것이다.68)
특히 기독교로 대표되는 서양에서는 지식, 믿음 그리고 사실의 문제가 주된 관심이 되어 왔다. 올바른 지식은 옳은 행동의 필수적 선결 조건으로 여겨져 왔으며, 최고의 도덕적 실천은 오직 하느님 아버지, 조물주 그리고 인류의 구세주로서의 神의 존재를 인식함으로써 가능하다. 이러한 서구 사고 방식을 받아들인 윤지충은, 충효가 모든 진리와 선(善)의 근원인 절대자의 명령으로부터 나올 때만 가치가 있다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이와 달리 유교에서는 인간이 무엇을 믿거나 아는 것보다 무엇을 행하느냐에 더 관심이 많았다. 중요한 것은, 개인 신념과는 상관없이 군주에게 충성하고 부모를 공경하는 일이었다. 진리보다는 선행(善行)이 유교에서 관심두는 촛점이었다. 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덕목을 세움으로써 윤지충은 전통적인 유교의 선후 관계를 뒤집어 놓았다. 그는 善이 眞을 결정하기보다 眞이 善을 결정하게 하였다.
유교의 입장에서 보면, 윤지충의 잘못은 자신의 개인적 신념이 부모와 사회에 대한 의무 이행을 거부하도록 용인한 데 있었다. 신념이나 종교적 혹은 형이상학적 사실에 대한 그 어떠한 언급도 그것이 윤리적 의무의 실행을 방해하는 한, 부도덕하며 따라서 거짓된 것으로 그 즉시 거부되어야만 했다. 그는 충효가 가장 우선한다는 점을 부인하는 잘못을 범하였던 것이다.
전라감사는 윤지충과 권상연이 신주를 실제로 훼손하였고 조상 대대로 내려온 유교 도리를 저버렸다는 사실을 서울에 보고하였다. 1791년 12월 3일 국왕 정조는 윤지충과 권상연을 지체없이 참수형에 처하라고 명령하였다. 12월 8일 설흔 세살의 윤지충과 마흔 한살의 권상연은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순교하였다. 이들은 도덕적 가정(假定)이 믿음의 대상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도덕을 결정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69)
천주교인의 박해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승훈으로부터 교회 지도자의 자리를 넘겨받은 권일신은 잡혀 들어가 심문받았다. 그는 여러 날의 고문 끝에 자신의 신앙을 모호하게나마 부인하였고, 이 때 입은 상처로 유배 도중에 죽었다.70) 중인 신분의 교인 최필공(崔必恭)은 한달 동안 투옥되어 고문을 당한 후, 결국 굴복하여 천주교를 비난하는 형식적인 진술을 하였다. 그렇지만 그는 그 뒤 자신의 신앙으로 되돌아가 1801년 순교하였다.71) 윤지충과 권상연 사건의 여파로 여러 다른 천주교인들도 고문 끝에 천주교를 일시적으로 배교하였다.72)
1791년 박해는 조선에 있어 천주교와 유교 사이의 유혈 대립의 시작에 불과하였다. 1801년, 1839년, 1846년 그리고 1866년 수백 명의 조선 천주교인이 신앙을 지키다 죽었다. 만약 로마 교황청이 동양 천주교인에게 제사를 거부하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면, 유교와 천주교 사이의 조화가 가능했을 것이며 수 많은 사람의 순교도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견해가 제시되어 왔다. 그러나 필자는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장례 의식을 둘러싼 갈등은 유학자와 천주교인 사이의 불화에 있어서 그 원인이라기 보다는 증후였다. 윤지충과 교인들은 도덕보다 진리를 강조함으로써 자신이 속한 문명이 지탱하는 근본 전제를 포기하였다.
유학자들은 전통적으로 이 세상에 안정되고 조화된 도덕 공동체를 세우는 데 관심을 두었다. 이들은 무엇보다도 사람들 간의 올바른 관계 유지에 주목하였다. 제사는 가문 화합과 사회 안정을 증진시키는 기능의 측면에서 필수적인 것이었다. 이와 반대로 천주교들인은 하느님과의 관계를 인간 관계보다 더 중요하다고 보았다. 사회의 요구가 하느님의 요구와 갈등을 일으킬 때, 인간은 하느님을 따라야만 했다. 제사가 사회에 아무리 유용한 것이라고 해도, 이것은 우상 숭배를 금지하는 하느님의 명령과 어긋나기에 따를 수 없었다.
유교와 천주교의 이러한 갈등 속에서 우리는, 한 인간이 도덕적이다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른 두 가지 견해를 찾아볼 수 있다. 유교에서 말하는 미덕은 사회의 훌륭한 구성원이 됨을 뜻한다. 즉 부모가 살아 계실 때 잘 섬기고, 돌아가신 후 예의에 맞게 공경하고, 어른의 말씀을 따르고 이웃 사람과 사이 좋게 지내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천주교회에 있어서 미덕이란 교회의 해석에 따른 하느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임금과 부모에 대해서는, 이들의 명령을 하느님의 율법에 어긋나지 않는 범위 안에서만 따르라는 것이다. 하느님은 진리요 善이기에 하느님의 요구는 인간 중심의 도덕 철학에서의 요구보다 상위에 있는 것이다.
이는 천주교인에게 제사를
허용한다고 감출 수는 없는, 유교의 사회 도덕에 대한 도전이었다. 천주교리는 도덕 행위를 결정하는 요인으로서의 인간 관계를 중시하는 유교 입장을 부인하였다. 유교는 현세에서 보다 나은 세상을 창조하기 위해 인간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가르쳤다. 천주교인의 눈에는 이러한 목표가 피상적이며 천박한 것이었다. 천주교에서는 내세의 보다 나은 세상에서 영생을 얻기 위해 인간이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를 가르쳤다. 유학자에게는 이러한 목표가 비도덕적이며 불합리한 것이었다.
천주교가 인간 공동체보다 초자연과 내세를 강조하는 이상, 충돌은 불가피하였다. ‘진리’와 ‘도덕’ 둘은 동시에 절대권을 주장할 수는 없다. 유학자들은 천주교가 하느님에 대한 복종을 강조하는 것이 교인들로 하여금 사회에 대한 책임을 등한하게 한다고 비난하였다. 이에 대해 유교가 사회적 의무를 강조하는 것은 누가 사회를 창조하였으며 그 분이 무슨 목적에서 그렇게 했느냐고 하는 더 큰 문제를 간과하는 것이라고 천주교인들은 반격하였다.
인간 존재의 의미와 목적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른 이러한 견해들은 결코 조정될 수 없다. 서로 간의 차이점을 인정하는 것은 일시적으로 가능할지 모르지만 결국 충돌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충돌이 1791년 윤지충과 권상연의 목숨을 앗아갔다. 이들은 초월적 ‘진리’의 세력과 지상의 ‘도덕’의 세력 사이에 벌어진 투쟁에서의 희생자였다. 미래에 이러한 희생자가 더 이상 없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순진한 생각일 것이다. 왜냐하면 개인의 양심이 지배하는 영역과 사회가 다스리는 영역을 확연하게 구분하는 결정적인 경계선은 지금까지 그어진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결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진리관에 따른 삶과 동료 인간과의 조화된 삶 간의 충돌 가능성은, 이 지구 상에 한 사람 이상이 사는 한 여전히 남아 있을 것이다.



1) 李民樹 譯, 『於于野談』(서울: 正音社, 1974), pp. 92-93의 「西敎」. [卷 2 「宗敎篇」 「西敎] {譯者 註: 역자는 독자의 편의를 위하여 脚註에 인용된 典據 뒤에 [ ]의 형식으로 그 해당 부분의 구체적인 제목을 가능한 범위 안에서 제시하고자 한다. 이하 같음.}
2) 『順菴先生文集』, 卷 17: 12. [「雜著」]
3) 南晩星 譯, 『芝峰類說』(서울: 乙酉文化社, 1975), 卷 1, pp. 90­91. 原文은 p. 515. [卷 2 「諸國部」 「外國」]4) 李元淳, 「明淸來 西學書의 韓國思想史的 意義」, 『韓國天主敎會史論文選集』 1(서울: 1976), pp. 135­156.
4) 李元淳, 「明淸來 西學書의 韓國思想史的 意義」, 『韓國天主敎會史論文選集』 1(서울: 1976), pp. 135­156.
5) 李能化, 『朝鮮基督敎及外交史』(서울: 1977), pp. 9­21.
6) George Dunne, Generation of Giants(Notre Dame: 1962), p. 93에서 인용. 『천주실의』는 『천학초함』(天學初函)에 실려 있다. 『천학초함』은 최근 대만과 한국에서 재간되었는데, 『천주실의』는 한국본의 pp. 103­177에 있다.
7) 『七克』 역시 『천학초함』에 실려 있으며, 한국본 pp. 192­309에 있다.
8) 『星湖僿說』, 卷 11: 2. [「人事門」 「七克」] 최근에 나온 번역본(서울: 民族文化推進會, 1977)을 참조할 것.
9) 「西學辨」(李晩采 編 『闢衛編』: 서울, 再刊本, 1971, pp. 38­103)晩星 譯, 『芝峰類說』(서울: 乙酉文化社, 1975), 卷 1, pp. 90­91. 原文은 p. 515. [卷 2 「諸國部」 「外國」]
10) 같은 글, pp. 74­75. [「天主實義」]
11) 같은 글, p. 39. [「靈言 」]
12) 같은 글, pp. 89­90. [「職方外紀」]
13) 같은 글, pp. 95­97. [「天主實義」]
14) 『丁茶山全書』, 第 1 集, 卷 15: 352, 39a. [「鹿菴權哲身墓誌銘」, 「先仲氏墓誌銘」] 『譯者 註: 『丁茶山全書』, 第 1 集, 卷 15에는 p. 352가 없다. 본문의 내용으로 보아 35a [「鹿菴權哲身墓誌銘」]가 옳다.』
15) Charles Dallet, Histoire de l’Eglise de Cor럆, Paris, 1874, pp. 15­16.
16) 尹在瑛 譯, 『黃嗣永帛書』(서울: 1975), p. 55.


17) 같은 글.
18) 金昌文, 鄭宰善 共編, 『韓國 가톨릭의 어제와 오늘』(서울: 1964), p. 25.
19) 이승훈이 1789년 북경의 프랑스 선교사에게 보낸 서신은 Andrew Ch’oe, L’Erection du Premier Vicariate Apostolique et les Origines du Catholicism en Cor럆, 1592­1837(Switzerland: 1961), pp. 90­93에 불어로 번역, 게재되어 있다.
20) 『黃嗣永帛書』, p. 55.
21) Dallet, p. 13. 달레가 말한 ‘척’, ‘근’은 요즘의 ‘척’(30센티), ‘근’(600그램)과 다른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당시의 기준으로 보아 이벽이 키가 크고 힘이 센 인물이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22) 金玉姬, 『曠巖 李蘗의 西學思想』(서울: 1979), p.22.
23) Dallet, p. 14.
24) 『丁茶山全書』, 第 1 集, 卷 15: 42a. [「先仲氏墓誌銘」 「附見 閒話條」]
25) 같은 책, p. 24. [「貞軒墓誌銘」]
26) 『黃嗣永帛書』, pp. 58­59. {譯者 註: 본문에서 이가환이 이벽에게 영세받기를 원하지 않았다는 필자의 설명은 잘못된 것이다. 이가환이 이벽으로부터 영세받으려 하지 않은 것이 아니고 조카 이승훈으로부터 영세받으려 하지 않았다.}
27) 『闢衛編』, pp. 105­106. [卷 2 「乙巳秋曹摘發」]
28) 같은 글.
29) 『邪學懲義』(서울: 再刊本, 1977), p. 82 [卷 1 「正法罪人秩」 「金範禹」] p. 278. [卷 2 「酌配罪人秩」] {譯者 註: 『邪學懲義』, p. 278에는 김범우에 대한 언급이 보이지 않는다. 한편 여기에서 필자는 국내 학자들의 일반 견해를 수용하여 김범우의 유배지를 忠淸道로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사실과 어긋난다. 최근 慶南 密陽의 丹場에서 그의 직계 후손들을 찾아내고 관련된 古文書 등을 발굴하여, 그의 유배지가 忠淸道 丹陽이 아니고 慶南 密陽의 丹場임이 분명해진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이 참조된다. 孫淑景 編著, 『中人 金範禹 家門과 그들의 文書』(釜山敎會史硏究所, 1993), pp. 5­15.
30) Dallet, p. 43.
31) 李基慶, 『闢衛編』(서울: 再刊本, 1978), p. 80. [「平澤縣監李承薰供辭」] 이 책은 1801년 직후에 편찬된 『闢衛編』 원본으로, 註 9)에 인용된 李晩采의 『闢衛編』은 부분적으로 이 책을 근거로 한 것이다.
32) Dallet, pp. 28­29.
33) 같은 책, pp. 37­38. {譯者 註: 필자의 본문에는 註 33)의 번호가 보이지 않으며 脚註에는 註 33)이 있다. 본문의 註 33)은 譯者가 달레의 책 내용을 참조하여 붙인 것이다.}
34) 『闢衛編』, pp. 113­114 [卷 2 「丁未泮會事」 「洪進士樂安與李進士基慶書」] 및 李基慶, 『闢衛編』, pp. 139-147. [「草士臣李基慶疏」]
35) 『闢衛編』, pp. 114­117. [卷 2 「丁未泮會事」 「李進士基慶答書」]
36) 같은 책, pp. 117­118. [卷 2 「丁未泮會事」 「進士丁若鏞與李進士基慶書」]
37) 李基慶, 『闢衛編』, pp. 7­13. [「李基慶與進士丁若鏞書」]
38) Andrew Ch’oe, 위의 글. 그리고 朱在用, 『韓國 가톨릭史의 擁衛』(서울: 1971), pp. 60­65.
39) Dallet, pp. 32­33.
40) 중국인 주문모(周文謨)신부는 1794년 조선에 들어왔다. 그는 1801년 박해 때 처형되기까지 조선 천주교인의 정신적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41) 赤木仁兵衛, 「朝鮮における天主敎流入と其の典禮問題について」: 『韓國天主敎會史論文選集』 2(서울: 1977), pp. 129­130.
42) Dallet, pp. 34­35.
43) Kenneth S. Latourette, A History of Christian Missions in China(London: 1929), pp. 140­141.
44) Dallet, p. CXLIII. 여기서 필자가 참고한 영역본은 Human Relations Area Files, Traditional Korea(New Haven: 1954), p. 154이다. 이는 달레 책의 序說만을 번역한 것이다.
45) 오늘 날의 제사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Griffin Dix, “How to do things, with ritual: The logic of Ancester Worship and other offerings in rural Korea,” Studies on Korea in Transition, (ed. David McCann, John Middelton, Edward Shultz, Hawaii: 1979), pp. 57­88을 참조할 것.
46) Jonathan D. Spence, Emperor of China: Self­Portrait of K’ang­hsi(New York, 1974), p. 74.
47) 『禮記』. [第 25 篇 「祭統」] Feng Yu­lan, A History of Chinese Philosophy(trans. Derk Bodde, Princeton: 1952), v. 1, p. 350에 있는 번역을 참고했음.
48) C.K. Yang, Religion in Chinese Society(Berkely: 1961), p. 48.
49) 李瀷, 『星湖僿說』, 卷 16: 28b­30a. [「人事門」]
50) 같은 책, p. 28b. [「人事門」]
51) 같은 책.
52) 安鼎福, 「天學問答」, 『順菴先生文集』, 卷 16: 134b­35a. {譯者 註: 「天學問答」에는 pp. 134b­35a가 없다. 본문의 내용으로 보아 24b­25a가 옳다.}
53) 『荀子』, Sources of Chinese Tradition(ed. De Bary, Chan, Watson, New York: 1960), p. 110. [卷 13 「禮論篇」]
54) Yang, 위의 책, pp. 28­53, 253­55.
55) Donald Munro, The Concept of Man in Early China(Stanford: 1969), p. 55.
56) Dallet, pp.37­38.
57) 李基慶, 『闢衛編』, pp. 27­29. [「洪樂安上左相蔡濟恭書」]
58) 같은 책, pp. 29­30. [「洪樂安上左相蔡濟恭書」]
59) 같은 책, pp. 39­42. [「洪樂安與蔡洪遠書」] {譯者 註: 이 서신에는 본문에서의 내용이 보이지 않는다.}
60) Dallet, pp. 42­53. 진산, 전주에서 있은 윤지충 및 권상연에 대한 심문 내용은, 앞서 인용된 『한국 가톨릭의 어제와 오늘』, pp. 32­40에 영어로 번역되어 있다.
61) Dallet, p. 48.
62) 같은 책, p.49.
63) 같은 책, p. 47.
64) 같은 책, p. 43.
61) Dallet, p. 48.
62) 같은 책, p.49.
63) 같은 책, p. 47.
64) 같은 책, p. 43.
69) Dallet, pp. 53­54.
70) 같은 책, pp. 57­59. 權日身 심문에 관한 공식 보고서는 李基慶, 『闢衛編』, pp. 110­118 [「權日身推案」 「刑曹啓辭」]에 있다.
71) Dallet, pp. 60­61 및 李基慶, 『闢衛編』, pp. 128­134. [「崔必恭推案」 「刑曹啓辭」]
72) Dallet, p.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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