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옴) 이순이 루갈다의 순교와 남긴 편지들

2012. 6. 22. 오후 8:4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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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이 루갈다의 순교와 남긴 편지들

 

                                         정 두 희
                                         서강대학교 사학과 교수

 

   이순이 루갈다(1782-1801)는 독실한 천주교 가정에서 출생하고 성장하였다. 그녀는 어릴 적부터 신앙심이 돈독했다. 그녀가 14세 때였던 1795년의 부활 전날 첫 영성체를 받던 때부터,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믿고, 바라고, 사랑하고, 공경하며 자기의 영혼과 육신 일체를 예수께 드리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고 가르친 주문모 신부의 말씀대로 살기로 마음먹고, 천상배필이신 예수께 자신의 동정을 바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고 이로부터 약 2개월 후 주문모 신부는 초기 한국 천주교회의 중심적 역할을 하였던 전주의 유항검의 집을 방문하여 그의 큰아들 유중철(요한)에게도 첫 영성체를 베풀었는데, 유 요한도 이 루갈다와 같은 마음으로 처음으로 모신 성체의 효과를 보존하기 위해 동정지키기로 결심하고 그 뜻을 주 신부에게 밝혔다. 그 후 이 루갈다도 자신의 마음 속으로만 간직했던 이 뜻을 주 신부에 고하고 조력을 청했으며, 그녀의 사람됨을 잘 아는 주 신부는 이를 흔쾌히 승낙하였다.
   이 두 남녀의 깊은 뜻을 다 알고 있던 주 신부는 당시 조선의 상황에서 이들의 뜻을 이루는 길은 이 둘이 결혼은 하되 서로 오누이처럼 지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하고 중매에 나섰다. 1797년 주 신부의 중매로 이 루갈다와 유 요한의 결혼은 성사되었다. 그리고 1798년 9월 시댁인 전주의 초남리로 와서 살았다. 이 두 사람은 순교할 때까지 4년을 동거하면서 오라비와 누이로 부르며 지냈다. 그러나 이들이 결혼을 하고 전주에서 살기 시작하던 직후부터 조선왕조의 대대적인 천주교도 박해가 싹트기 시작하였으며, 마침내 1801년 신유년의 대박해 때에는 이들 부부의 온 집안이 쑥밭이 되기에 이르렀다.
   1801년 3월, 이 루갈다의 시아버지인 유항검은 체포되어 그 해 9월 사지가 찢겨 여섯 토막이 되는 참혹한 죽음을 당하였다. 그리고 그녀의 남편 유중철은 아버지가 체포된 직후에 체포되어 전주 감옥에 갇혔으며, 그해 9월에는 그녀의 시어머니, 그녀의 두 시동생과 사촌 시동생도 체포되었다. 그리고 이 루갈다 자신도 이 때에 같이 체포되어 같은 해 12월 28일에 형장에서 순교하였다.

   이처럼 그녀는 당시의 수많은 순교자 가운데 하나였지만, 한국 천주교 회사에서 그녀는 매우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녀는 체포되어 사형되기 전 약 3개월 동안 감옥에 있으면서 두 통의 편지를 남겼다. 한 통은 그녀의 어머니에게 보낸 것이며, 또 한 통은 그녀의 친언니와 올케에게 남긴 것이었는데, 이 두 편지에 순교를 기다리고 있던 그녀의 슬프고 안타까운 심정과 아름답고도 매서운 신앙이 너무나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녀의 사랑하는 남편도, 그처럼 존경하고 따르던 시부모도, 친동생처럼 보살피던 시동생들도, 그리고 자신의 친오빠도 모두 잡혀 죽을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너무나 기가 막힌 현실이었다. 그러면서도 잡히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자신의 친어머니와 친언니와 남편을 잃게 될 올케를 생각하면 더 처참한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그러기에 어머니께 보낸 편지에서 그녀는,

모녀가 서로 헤어진 지 4년이 되었으니... 망극한 정이야 오죽하리오마는, 모두가 천주의 명입니다. 우리를 주심도 (천주의) 명이요, 앗으심도 명이니, (이것저것) 생각하는 것이 도리어 우스운 일입니다. 만 번 엎드려 바라옵나니 슬픔을 억제하시고, 영세에 모녀의 정을 다시 이어 온전케 하옵소서.

라고 어머니를 위로하였던 것이다. 그녀는 아버지를 어릴 때 여의었으며, 이제 그녀도, 그녀의 친오빠도 다 죽게 되면 홀로 남을 어머니가 너무나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어머니 육신의 안부만을 걱정한 것은 아니었다. 행여나 홀로 남은 어머니가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배교할까 더욱 걱정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비록 제가 죽게 되더라도 과도하게 상심하다가, (순교의 큰 은혜를 내려 주시는) 천주의 명을 배반치 마시고, 그 명에 기꺼이 순명하소서.... (천주께서 저에게 순교를 허락하심은) 보잘 것 없는 이 자식을 진실되고 보배로운 자식으로 만드시려는 것이니, 천만 번 바라옵건데 너무 상심치 마시고 부질없는 생각을 억제하소서.

라고 써서, 너무 슬픔에 겨워 하다가 신앙을 버리게 되는 일이 없도록 신신당부를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저 천상에서 영복을 누리며 살 날을 기다리며 먼저 천국에 가서 어머니를 맞이하겠다는 간절한 뜻을 이렇게 적었다.

이 세상을 꿈 같이 여기시고, 영원한 세상을 본향으로 알아 조심조심하여 순명 순명 하시다가 이 세상을 떠나시게 되면 이 못난 자식이 영복의 면류관을 받잡고 즐거운 영복을 띠고 손을 붙들어 영접하리이다.

 그녀의 슬픔도 억제하지 못할 이 상황에서 그녀는 어머니를 이처럼 위로하고, 또 실망하지 않도록 당부하면서, 저 세상에서 영원한 복락을 누릴 날을 기다리겠다고 하직 인사를 하였던 것이다.
   이 루갈다가 어머니께 보내는 편지는 비교적 짧으며, 감옥에서 갇혀 죽을 날만을 기다리는 그녀의 처참한 심정은 거의 비치지 않으려 하였다. 그러나 언니와 올케에게 보낸 편지에는 그녀의 안타까운 심정이 너무나 절절하게 표현되어 있다.

불쌍하신 오라버님, 죽으셨나 살으셨나? 9월 삼오일(15일)에 바람결에 들은 후, 내 몸이 잡히여 감감히 들어앉아, 소식 들을 길이 전혀 없어 매양 답답한 마음뿐이며, 만약 다시 관가의 판결을 받았다면 그 사이에 판결(오빠의 사형)이 났을 듯 하옵니다. 돌아가신 이야 복을 누리고 계실 것이니, 설마 저를 어쩔 것이 아니로되, 집안의 참혹한 형편과, 어머님, 형님 차마 어찌 견디시며, 일맥이 부지하여 계시지 않으실 듯하니(넋이 나가 이미 죽은 것 같다는 의미), 중도에 어지러운 생각이야 형용할 말이 어이 있사오리까? (오빠가 죽었다면) 초상 지낼 절차는 어찌하였는고? 오히려 이제껏 결단이 나지 않았다면 그 차가운 감옥에서 어찌 견디시고 있을까? (오빠가) 죽었으나 살았으나 어머님 간장은 한량으로 녹으실 것이나이다.

   그녀의 오빠 이경도도 체포되었다는 소문을 듣긴 하였지만, 현재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몰라 애타 하는 그녀의 심정이 너무나 잘 나타나 있는 위의 구절에서, 그녀는 두 자녀를 다 잃을 어머니의 넋이 빠지고, 슬픔과 아픔으로 간장이 녹아 날 것을 생각하면 어찌할 바를 몰랐던 것이다. 그러기에 그녀는 머지않아 남편을 잃게 될 올케를 위로하면서도 이렇게 홀로된 어머님을 당부하였다.

저는 태어나 20년에 병 없는 날이 없고 부모께도 불효만 끼치다가 종내 자식된 보람도 없이 돌아가니, 형님네는 제 몫까지 대신하여 착실히 효도를 하시옵소서.... 형세 곤궁하여 뜻대로 봉양치 못하나, 마음을 잘 받들고, 위로 보호하면 혼미한 정신을 잘 깨우치며, 혹 어머니가 늙어 올바른 정신을 잃으시어 그르치는 일이 있더라도 (그래서는 안된다는 식으로) 의리로 말하지 말고, 화한 얼굴로 간절히 충고하시며, 아무리 서러운 일이 있더라도 어머님을 생각하시어 슬픈 기색을 감추고, 혹 어리광도 하고, 혹 억지로라도 우스운 말도 하여 어머님을 보호하십시오.... 어머님을 너그럽게 도와 여생을 잘 맞고 이 세상을 잘 마칠 수 있는 은혜를 얻어, 모자 형제 즐거이 만나게 하옵소서. 부탁부탁하노니, 어련하시옵마는 저의 부탁을 생각하여, 두 배로 더욱 잘 하시옵소서. 부모 있는 사람은 서럽다고 너무 과히 서러운 대로 하지 못하오니 그것을 생각하시옵소서. 내 형님도 소홀하게 생각하시는 것은 아닐 것이지만, 형님도 하도 서러우신 사람이시기로 이렇게 (당부)하옵나이다. 
 
   이 루갈다는 머지않아 남편을 잃게 될 올케를 위로하면서도 그 큰 슬픔 때문에 어머님 잘 모시기가 어려울까 걱정스럽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서러운 일이 있더라도 어머님을 생각하시어 슬픈 기색을 감추고, 혹 어리광도 하고, 혹 억지로라도 우스운 말도 하여 어머님을 보호”하라고 “부탁 부탁”하였던 것이다. 이런 부탁을 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지만, “형님도 하도 서러우신 사람”이기 때문에 그 슬픔에 못 이겨 지나친 상심에 빠질까 걱정되기 때문에 신신당부하는 말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언니와 올케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녀는 남편 유중철(요한)과의 애틋한 사랑과 정결한 부부 생활을 세세하게 고백하였다. 이 루갈다는 먼저,

우리의 만남은 두 사람의 소원을 천주께서 윤허하신 특별한 은총이라 생각하기에, (그 은혜에) 감사하여 죽기로써 보답코자 마음먹었습니다. 둘이서 언약하기를, (언젠가) 가업을 상속받는 날이 되면, (모든 재산을) 서너 쪽으로 나누어서 가난한 이를 구제하고, 동생들에게 후히 나누어주어 양친을 부탁하고, 세상이 펴이거든 각각 떠나 살자 하고, 피차 이 약속을 버리지 말자

고 다짐했음을 밝혔다. 그녀의 시아버지 유항검은 전라도 일대의 첫손꼽는 부자였으며, 그의 남편은 장남이었다. 그러므로 언젠가 가산을 다 받게 되면 일부는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일부는 동생들에게 주어 부모를 봉양케 하고 나서, 서로 헤어져 평생을 동정으로 지내며 천주를 섬기자고 맹세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결혼 생활 4년 동안 이 두 젊은 부부가 동정을 지킨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음은 다음과 같은 솔직한 그녀의 고백 가운데 잘 나타나 있다.

작년(1800년) 12월이라. 유혹이 너무나 심하여 마음의 두려움이 얇은 어름을 밟는 듯 깊은 물에 빠질 듯 위태로웠습니다. 우러러 이길 바를 간구하옵더니, 주의 특별한 도우심으로 겨우겨우 면하여 동정을 보존하여 피차 약속한 바를 금석처럼 단단하게 지켰으며, 서로 믿고 사랑하는 정이 태양처럼 크고 따뜻하였습니다.

 그녀는 옥에 갇히기 1년 전 겨울 밤, 남편을 원하는 마음이 너무나 치솟았음을 이렇게 밝히고 그 때에 자칫 동정을 지키자던 맹세가 깨지기 직전의 상태까지 갔었다고 고백하였다. 이 편지에는 그녀가 이런 유혹을 한 번밖에 느끼지 않은 것처럼 말하였지만, 어머니께 보낸 편지에 “(우리 부부가 지난 4년을 지내면서) 사실상 남매와 같더니, 중간에 유혹을 근 10차례나 당하여 어찌할 도리가 없을 뻔 하였습니다”라고 실토한 것을 보면 그 두 부부가 동정을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던가를 잘 알 수 있다. 이제 죽음에 이르러 그녀는 그들만의 이 순결한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된 것에 대하여 더할 나위 없이 안도하였다. 그래서 그녀는 자기의 결혼 생활을 눈여겨본 어머니와 언니와 올케에게 이처럼 솔직하게 내밀한 부부 생활의 비밀까지 다 밝혀 말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녀에게 이제는 더 두려울 것이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오직 “누우며 앉으며 원하는 바 치명(致命)의 은혜”뿐이었던 것이다.
  
   그녀가 이처럼 오로지 치명의 은혜를 갈구하며 자신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사랑하는 남편 유중철의 격려가 컸다. 남편 유중철과 시동생 유문철은 1801년 10월 9일 전주옥에서 교수형을 당하였다. 그리고 이 두 형제가 순교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는데, 유중철의 시신을 거두었더니 그 옷에서 “누이에 부치는 글” 곧 이 루갈다에게 쓴 편지가 발견되었다. 그 편지에는 “권면하고 위로하여 천국에 가 다시 보자”는 당부가 있었다고 그녀는 언니와 올케에게 쓴 편지에서 말하고 있다.
   유중철과 이 루갈다는 서로 다른 날에 체포되어 서로 다른 감옥에 수감되었지만, 시동생 유문철은 그녀와 같이 수감되었다. 그러다 그 두 형제에게 사형이 집행된 10월 9일 간수들이 시동생 문철을 불러 가니 그녀는 왜 그러는지 까닭을 알 수 없었다. 이 때의 걱정스럽고 안타깝고 그리운 마음을 그녀는 언니와 올케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적어 놓았다.

시동생은 요안이라, 10월 초9일에 요안을 불러 가니 뜻을 몰랐어라. 어디로 가심이냐? 관가의 명령이라. 큰 옥으로 데려다가 형제(유중철과 유문철) 한 데 두라신다. (칼로) 베일 듯이 데려가니 오냐 저를 어찌하리? 한 데 가 계시소서. 피차에 잊지 마사이다, 신신이 부탁하되 동일동사(同日同死) 하라더라 요안에게 전하소서. 재삼 부탁하고 손을 나눠 돌아서니, 남은 바 네 사람이 처져 의지하여 주의 도우심만 바라더니 일각이 겨우되어 부음이 들려 오니, 인정의 참혹함은 오히려 둘째되고, 요안이 (순교의) 복을 받음은 기뻐기뻐하오나, 오호통제라, 요안(남편 유중철 요한을 말함)은 어찌되었는고!

   시동생이 잡혀갈 때 형제를 같이 죽이려 한다는 내용을 어렴풋이 듣기는 했다. 그래서 시동생을 보내면서 남편에게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죽기로 하자는 자신의 뜻을 전해 달라고 부탁하였던 것이다. 그렇게 시동생을 보내고 얼마 있지 않아 그가 사형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녀는 그의 죽음에 너무나 마음이 아팠지만, 그가 무사히(?) 순교하게 된 것을 또한 깊이 기뻐하였다. 그러나 이 때에 그녀의 남편에 대한 소식은 접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심각한 걱정에 쌓였다. 그녀는 남편이 혹시 살아나게 되었을까 하는 가능성 때문에 마음을 쓴 것이 아니라 혹시 남편이 배교하고 순교의 기회를 버렸을까 그처럼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그런 걱정에 휘말려 있을 때 집에서 남편 유중철이 교수형을 당했다는 기별이 왔다. 그녀는 인간적으로 슬프기 짝이 없었으나 무사히 순교하게 된 운명에 깊은 시름을 덜게 되었던 것이니, 이 때의 정황을 그 편지에 이렇게 써 두었다.

집에서 기별하되 (남편 유중철의) 시체를 내어다가 입었던 옷을 보니 “누이에게 부치는 글”이라 편지가 있었는데, (그 편지에는) “권면하고 위로하여 천국에 가 다시 보자” 했다더라. (우리 부부가) 뜻을 정한 지 4년이라 염려를 부렸사오며, 저의 평생 행위를 살필진대, 구태여 애련할 일이 없고, 속태를 벗어나 족히 노성(老成)하다 할 만하고, 흔근(欣謹) 열애(熱愛) 성실함은 항복(恒福)함이 되는지라. 서로가 오래 원하던 바, 뜻과 같이 이루오니, (이는) 저도 또한 원한 바라.

 남편 유중철이 감옥에 갇혀 죽을 때까지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떻게 지냈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위의 대목을 보면 그도 또한 부인 이 루갈다를 깊이 사랑하고 신뢰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기에 그는 죽음을 앞두고 그녀에게 당부하는 말을 남기고 싶었던 것이다. 아마 그도 이 루갈다가 입을 온갖 고통 때문에 말할 수 없이 안타까워했으며, 나아가 혹시라도 그 아픔을 견디지 못하여 순교의 기회를 잃게 될 것을 걱정하였던 것이다. 그러기에 “권면하고 위로하여 천국에 가 다시 보자”고 당부하였던 것이다. 이 루갈다는 이 편지를 받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리고 죽음을 향해 나가는 자신의 길에서 아무 미련도, 아무런 걱정도 없었다. 그녀는 사랑하는 남편이 자랑스러웠으며, 그와 더불어 지난 4년간을 동정을 지키며 정결하게 살아오다 이제 그 뜻을 지키고 천주를 위해 순교까지 하게 되었다는 것에 대하여 마음 속 깊이 다행스러워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유중철과 자신의 4년간의 만남을 볼 때 세속의 잡다한 것에서 벗어나 “족히 노성하다 할 만”하다고 자긍할 수가 있었다. 남편의 순교와 그녀를 위해 남긴 마지막 편지를 통해 그녀는 남편의 꿋꿋함과 깊은 사랑을 새삼스럽게 깊이 느꼈으며, 그런 이상 이 세상에서 그녀보다 행복한 사람은 없었다. 세상에서는 남편과 더 할 수 없는 아름다운 사랑을 나누었으며, 위로는 천주께 대한 열렬한 사랑을 갈망하여 얻었으니 그 보다 더 구할 것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오직 죽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갈구하던 치명의 은혜도 쉽사리 찾아오진 않았다. 그녀의 시아버지 유항검과 그 동료들을 처형한 다음, 1801년 10월 6일, 전주 판관 정지용은 그 남은 가족들을 어떻게 처벌할 것인지에 대하여 중앙 정부의 조처를 구했다. 그는 “유항검의 아들 중철(이 루갈다의 남편, 23세)과 문석(18세)이 지금 전주옥에 수감 중이오니 곧 금부도사를 보내어 지방관과 함께 모두 형법에 따라 교수형에 처하고, (유항검의) 처 신희는 함경도 경원부의 노비로 삼고, (어린 아들) 일석(6세)과 일문(3세)은 모두 나이가 차지 않았으므로 형법의 조문에 의하여 교수형은 면제하여, 일석은 전라도 나주목 흑산도, 일문은 전라도 강진현 신지도에 보내어 노비로 삼고, 며느리 순이(이 루갈다를 말함)는 평안도 벽동군으로 보내어 노비로 삼고, 조카 중성은 함경도 회령부로 멀리 유배를 보내고, (유항검의 동생) 유관검의 처 육희는 평안도 위원군의 노비로 삼되, 이들 죄인들이 전주부의 옥에 수감되어 있으니 형조에 명령을 내려 각각 유배지로 압송하는 것”이 좋겠다고 보고하였던 것이다. 그러자 중앙 정부에서는 전주 판관 정지용의 요청대로 시행하도록 명령을 내리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명령에 따라 그녀의 남편 유중철 형제는 10월 9일에 교수형에 처해 졌으며, 10월 13일 남은 가족들은 처분대로 유배지로 떠나야만 하였다. 그러면 이 루갈다가 그처럼 원했던 “치명의 은혜”는 입을 길이 없이 모진 목숨을 저 멀리 변방에서 치욕스럽게 유지해야만 하였다. 그녀로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유배를 떠나게 되었다는 처분을 듣자 그녀는 맹렬하게 항의하였으며, 그러한 사정은 그녀가 언니와 올케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적혀 있다.

우리들은 천주를 공경하노니 국법대로 죽겠노라 하니, (관리들이) 바삐 쫓아 나가더라. 다시 더욱 들어앉아 성주(전주 판관을 말함)에게 소리 높여 다시 하되, “국록을 먹으면서 나라의 명령을 순종치 아니하신다”고 여러 가지로 말을 하되 들은 체도 아니하고 끌어내므로, 하릴없이 길을 떠나 도중에서 구하는 바 더욱 간절했더니 백리를 겨우 지나 다시 잡혀 오니, 이는 극진하여 다시 더 할 것 없는 은총이다. 어떻게 (천주께) 감사해야 마땅할꼬?

 그녀는 한사코 죽겠노라고 버텼지만 강제로 유배지를 향하여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전주 감영을 떠나 100여 리를 왔을 때 유배지로 떠나던 사람들 가운데 어른 다섯 명은 다시 유배가 취소되어 전주로 압송되어 왔다. 전주 판관은 감영에 보고하여 이들을 다시 심문하기로 하고 곤장을 치니 이 루갈다는 “살이 터지고 피가 흐르더니, 한참이 지난 후에 아픔이 그치니 갈수록 은총이라”고 기뻐하였다. 그녀는 유배가 아니라 순교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너무나 기뻤다. 그래서 고문 때문에 입은 상처도 사오일만에 다 나았으며, 고문을 당한 지 20여 일이 지나도록 아무런 고난도 입지 않았으니, “고난을 받는 자란 말이 아까울 뿐 아니라 진실로 상반하니, 남은 이르되 고난을 받는 자라 하나 나는 이르되 평안한 사람이라 하노니, 누가 집에 앉아 마음이 이같이 평안하리오?”라고까지 말할 정도였다. 그녀는 살아 치욕을 입게 되는 것을 죽는 것보다 더 두려워하였으니 그런 자신의 심정을 언니와 올케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적어 놓았다.

관가 노비의 형이라 함과 치명자의 형이라는 말이 피차에 어떻하겠나이까? 어머님도 치명자의 모친이라 하오면 이 이름이 어디고 가고 싶으옵니까? 내 감히 치명을 하면 그 기이함은 어느 치명에 비하겠습니까? 다른 성인들은 응당 할 일이어니와, 감히 우러러 볼 일을 이 미천한 저에게도 허락하시면, 그런 황송할 일이 있겠나이까?

   이처럼 당당하게 순교하기를 원하였지만, 그녀는 항상 “행여 내 이 소원을 못 이루고 살면 어쩔꼬? 이렇게 두렵사오나 죽어도 서러워들 말으소서.”라고 말할 정도로 자신의 의지가 꺾일까 봐 항상 두려워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녀는 잡혀갔던 그해 12월 28일, 전주 숲정이의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던 것이다. 이 때에 그녀의 나이 20세였다. 이 루갈다가 순교하기 며칠 전, 형조에서는 이들을 사형에 처해야 할 이유에 대하여 왕에게, “죄인 신희, 이육희, 이순이(루갈다), 유종성 등은 사교(邪敎)에 혹독하게 빠져 형벌에 따라 죽는 것을 마음 달갑게 여긴다고 하였으므로 민심을 현혹시키는 내용의 요사스러운 책을 선전한다는 죄목으로 사형 판결문을 내렸습니다.”라고 보고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루갈다의 죽음은 당당하고 분명한 신앙고백으로 선택한 죽음이었던 것이다.
   그 어린 나이에 천주를 위하여 정결하게 살기를 맹세하고, 박해에 임해서는 당당한 순교를 택하였던 그녀는 나이 어린 부녀가 빠지기 쉬운 맹신적 상태에 있었던 것이 결코 아니었다. 그녀는 나이는 어렸으며, 몸은 병약한 한 여인이었지만, 천주의 사랑을 깊이 느끼고 생활하면서 그 누구도 넘보지 못할 경지에 오른 사람이었다. 그것은 지금까지 인용했던 그녀의 편지를 통해서도 잘 알 수 있지만, 그녀가 언니와 올케에게 보낸 편지에 있는 다음과 같은 구절에 너무나 잘 나타나 있다.

깊이 깊이 살펴서 매사에 (천주께) 순명순명하는 것으로 마음을 다스리는 근본을 삼고, 지은 죄를 뉘우치며 선을 행하사 비록 적은 허물이라도 큰 허물처럼 살펴 큰 죄를 지은 것처럼 통회하고, 선을 행할 기회가 오면 비록 적은 선일지라도 버리지 말고, 항상 힘써 열렬한 사랑을 실천하고, 통회의 열렬한 사랑이 없을지라도 힘써 발하며 간절히 구하면 주시리니, 한시도 방심하였거든 놀라고 깨우쳐 열심히 천주께 드리면 점점 주께 가까워지오니 소원을 윤허하사 천주를 뵈오면 형제 모녀 이러구러 쉽게 만나면 아니 좋겠습니까? 남을 용서하며 자기를 성찰하고 화목을 힘써, 어머님은 주님의 뜻에 합당한 늙은이 되시고, 형님네는 사랑하는 딸이 되시면 아니 좋겠습니까?

 그녀는 어머니, 언니와 올케에게 주를 위하여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이처럼 간곡하게 당부하였던 것이다. 그녀는 정신적으로 이미 성숙한 사람이었으며, 진리를 깊이 깨달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을 온몸으로 전하고 있었다. 그녀는 천주의 가르침을 입으로 전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녀 스스로가 천주의 말씀대로 살면서 변모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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