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옴) 진산사건

2012. 6. 22. 오후 9:08:33

글자

 

오류신고

 
정조 33권, 15년(1791 신해 / 청 건륭(乾隆) 56년) 11월 7일(무인) 2번째기사
전라도 관찰사가 죄인 윤지충과 권상연을 조사한 일을 아뢰다

 
 
 

전라도 관찰사 정민시(鄭民始)가 죄인 윤지충(尹持忠)권상연(權尙然)을 조사한 일을 아뢰기를,
지충이 공술하기를 ‘계묘년5288) 봄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갑진년5289) 겨울 서울에 머무는 동안, 마침 명례동(明禮洞)에 있는 중인(中人) 김범우(金範佑)의 집에 갔더니, 집에 책 두 권이 있었는데, 하나는 《천주실의(天主實義)》이고 하나는 《칠극(七克)》이었습니다. 그 절목(節目)에 십계(十誡)와 칠극(七克)이 있었는데 매우 간략하고 준행하기 쉬워서, 그 두 책을 빌려 소매에 넣고 고향집으로 돌아와 베껴 두고는 이어 그 책을 돌려보냈습니다. 겨우 1년쯤 익혔을 때 떠도는 비방이 매우 많았기 때문에 그 책을 혹 태워버리기도 하고 혹 물로 씻어버리고 집에 두지를 않았습니다. 그리고 혼자 연구를 하고 학습을 하였기 때문에, 원래 스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곳이나 함께 배운 사람도 없습니다.
천주(天主)를 큰 부모로 여기는 이상 천주의 명을 따르지 않는 것은 결코 공경하고 높이는 뜻이 못됩니다. 그런데 사대부 집안의 목주(木主)는 천주교(天主敎)에서 금하는 것이니, 차라리 사대부에게 죄를 얻을지언정 천주에게 죄를 얻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집안에 땅을 파고 신주를 묻었습니다. 그리고 죽은 사람 앞에 술잔을 올리고 음식을 올리는 것도 천주교에서 금지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서민(庶民)들이 신주를 세우지 않는 것은 나라에서 엄히 금지하는 일이 없고, 곤궁한 선비가 제향을 차리지 못하는 것도 엄하게 막는 예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신주도 세우지 않고 제향도 차리지 않았던 것인데 이는 단지 천주의 가르침을 위한 것일 뿐으로서 나라의 금법을 범한 일은 아닌 듯합니다.
나아가 조문(吊問)을 거절했다는 일로 말하면, 내 부모가 돌아가신 것을 위문해 주었으니 감사하고 애통스러워 맞아 곡하기에도 겨를이 없어야 하거늘 어찌 차마 거절한단 말입니까. 만약 믿지 못한다면 조문한 손님이 있으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부모를 장사지내는 일로 말하면 관곽(棺槨)·의복·곡읍(哭泣)·천효(穿孝)5290) 천주교인일수록 더욱 두텁고 근실하게 하는 것인데, 어찌 감히 부모를 장사하는 일을 소홀히 했겠습니까. 상여를 잡는 예와 4척의 높이로 무덤을 만드는 것은 풍속대로 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다만 5월에 모친상을 당했는데도 8월 그믐날에야 기한을 넘겨 장사를 지낸 것은 집안에 마침 전염병이 돌아 외부 사람들과 접촉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원근의 친구들은 비록 장례에 참석하지 못하였어도 동네의 평민들은 모두 와서 거들어 주었으니, 이것도 한 번만 물으면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소문은 정말 황당무계한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상연은 공술하기를 ‘저는 윤지충과 내외종(內外從) 사이로 같은 마을에 살고 있습니다. 《천주실의》《칠극》을 수 년 전 윤지충의 집에서 얻어 보았는데, 그 때는 지충이 책을 태우거나 씻어버리기 전이었습니다. 제례(祭禮)는 이미 폐지하고 거행하지 않았습니다만, 사판(祠版)은 훼손한 적이 없습니다. 제가 일찍이 부모를 잃었기 때문에 그동안 부모를 장사지낸 일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 학문을 한 이후로 일가의 여러 종족들이 모두 「네가 이미 제사를 폐지했으니 신주도 역시 반드시 훼손해버렸을 것이다. 너 때문에 족당(族黨)에게 피해가 미칠 것이다.」 하면서 못하는 말 없이 꾸짖고 책망하였는데, 이에 없는 일이 부풀려져 비방이 떠돌아다녀 이런 지경에까지 이른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지충상연을 다시 자세히 문초하고 매 30대를 치니, 지충이 공술하기를 ‘양대(兩代)의 신주를 과연 태워버리고 그 재를 마당에다 묻었습니다. 그래서 전에 묻었다고 공초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8월 모친 장례 때에도 신주를 세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스승으로부터 전해 받았다는 한 조목으로 말하면, 그 책을 얻어 그 학문을 익힌 것에 지나지 않는데 어찌 전해받은 스승이 있겠습니까. 교주(敎主)라는 말은 서양(西洋)에 있다고는 들었어도 우리 나라에 있다는 소리는 못 들었습니다. 도대체 어떤 사람을 지목하여 하는 말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이에 대해서는 홍낙안에게 물으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신도를 많이 늘렸다는 말은 더욱 애매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는 사람들이 스스로 터득하는 학문일 뿐 애초부터 권하고 가르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형제처럼 친한 경우에도 본래 전해주지 못하는데, 어떻게 신도를 늘렸겠습니까. 또 망령되게 증거하지도 말고 남을 해치지도 말라는 천주의 가르침이 계율(誡律) 가운데 있으니, 더욱 다른 사람을 끌어다가 증거할 수는 없습니다.’ 하였습니다.
상연은 공술하기를 ‘저의 집의 신주를 애초에 땅에 묻으려 하였으나, 이목이 번거로울까 두려워 남몰래 불태워버리고 그 재를 무덤 앞에 묻었습니다. 천주교에 대한 책은 지충에게 빌려보았을 뿐 애초에 베낀 일이 없는데, 어떻게 감추어둔 것이 있겠습니까.’ 하였습니다. 그리고 지충의 동네 사람들을 또 추문(推問)했더니, 회격(灰隔)5291) 횡대(橫帶)5292) 를 예대로 했고, 시기를 지나 장사지낸 것도 사실이라고 하였습니다.
천하의 변괴가 어찌 한량이 있겠습니까마는, · 두 사람처럼 극도로 흉악한 자는 있지 않았습니다. 부모의 시신을 버렸다는 것은 비록 사실이 아닌 것으로 낙착되었지만, 그 위패를 태워버린 것은 그 자도 역시 실토하였습니다. 아, 이 두 사람은 모두 사족(士族)입니다. 그리고 지충으로 말하면 약간이나마 문자를 알고 또 일찍이 상상(上庠)5293) 의 유생이었으니, 민간의 무지스러운 무리들과는 조금 다른데, 사설(邪說)을 혹신(酷信)하여 완전히 딴사람이 되어 버린 채 단지 천주가 있는 것만 알 뿐 군친(君親)이 있는 줄은 모르고 있습니다. 나아가 평소 살아계신 부모나 조부모처럼 섬겨야 할 신주를 한 조각 쓸모없는 나무라 하여 태워 없애면서도 이마에 진땀 하나 흘리지 않았으니, 정말 흉악하기만 합니다. 그러니 제사를 폐지한 것 등은 오히려 부차적인 일에 속합니다.
더구나 형문을 당할 때, 하나하나 따지는 과정에서 피를 흘리고 살이 터지면서도 찡그리거나 신음하는 기색을 얼굴이나 말에 보이지 않았고, 말끝마다 천주의 가르침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임금의 명을 어기고 부모의 명을 어길 수는 있어도, 천주의 가르침은 비록 사형의 벌을 받는다 하더라도 결코 바꿀 수 없다고 하였으니, 확실히 칼날을 받고 죽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는 뜻이 있었습니다.”
하니, 상이 형조 판서 김상집(金尙集)과 참판 이시수(李時秀) 등을 불러 보고 이르기를,
“이제 전라 감사가 조사해 아뢴 것을 보면, 윤지충권상연이 신주를 태워버린 한 조목에 대해서는 이미 자백하였다 하니, 어찌 이처럼 흉악하고 이치에 어긋나는 일이 있겠는가. 대저 경학으로 모범이 되는 선비가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점차 물들어 이처럼 오도되기에 이른 것이니, 세도(世道)를 위해서 근심과 한탄을 금할 수가 없다.
선조(先朝) 무인년 연간에 이른바 생불(生佛)이란 자가 해서(海西)에서 나왔을 때 어사를 보내 단지 그 괴수를 죽이도록 명하였을 뿐, 일찍이 윤음을 내려 제시한 것은 없었다. 그런데 나는 이번 일에 대해서 이미 많은 교시를 내렸으니, 이는 《논어》·《맹자》의 가르침을 모방해 늦추고 엄격하게 하는 데에 차별을 두려는 것이었다. 이 뜻은 이미 유생들의 상소에 대한 비답 가운데에서 언급했었다. 대개 이번 일이 대부분 좌상(左相)이 아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나왔기 때문에 외간에서는 혹 내가 좌상의 얼굴을 보아준다고 말하는 듯도 하다마는, 이 일이야말로 위정 벽사(衛正闢邪)에 관계되는 것인데, 내가 어찌 한 대신을 위해서 치죄를 소홀히 하겠느냐.
조사하는 일이 아직 결말이 나지 않았을 뿐만이 아닌데 사학을 하는 자가 어찌 ·뿐이겠는가. 그러나 지금 만약 낱낱이 조사하여 사람마다 따지고 든다면, 이는 가르치지 않고 처형하는 것과 비슷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다만 마땅히 하나를 징계하여 백을 경계시키는 법을 써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이미 드러난 자들을 법대로 처벌한다면, 이것은 살리는 도리로 사람을 죽이는 것이 된다. 이렇게 한 뒤에 방방곡곡에 효유하고 금조(禁條)를 엄격히 세우는 일을 결단코 그만두어서는 안될 것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좌상의 차자 가운데 ‘동요시킨다.[敲撼]’는 두 글자야말로 어찌 더욱 개탄스럽지 않겠는가. 진실로 동요시키려는 마음이 있었다면, 그 죄로 처벌하기만 하면 될 것이다. 어찌 감히 동요시킨다는 두 글자를 글로 나타내어 팔방(八方)에 반포함으로써 마치 먼저 문제를 일으키는 것처럼 한단 말인가. 엊그제 유생들의 상소에서도 묘당이 토죄를 늦추고 있다고 하였는데, 대신은 마땅히 그것을 과오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이 일이 대부분 대신의 친지와 관계되어 있으니, 대신이 어찌 형적에 혐의가 없을 수 있겠는가.
들으니 유생들의 상소문을 내도록 통문을 돌린 것은 바로 목인규(睦仁圭)인데, 끝내는 상소의 내용 중 대신을 핍박하는 것이 있다고 하여 그 이름을 깍아버리고 내놓았다 하니, 참으로 이른바 탄문서(呑文書)5294) 라고 하겠다. 채홍리(蔡弘履)가 처음으로 이런 짓을 하더니, 이수하(李秀夏)·이기경(李基慶)이 또 이런 짓을 하기를 어렵지 않게 여기니, 정말 경악스럽다.”
하였다. 시수가 아뢰기를,
일신을 추문할 때에는 책을 간행했는지의 여부를 마땅히 문목(問目)에 넣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책을 바친다면 간행한 것이건 등사한 것이건 따질 것 없이 수화(水火) 가운데 던져넣은 뒤에야 길이 근본을 끊어버릴 수 있을 것이다. 대개 이 일은 형정(刑政)만으로 다스릴 수는 없다. 사학(邪學)을 물리치려면 무엇보다도 정학(正學)을 먼저 밝혀야만 한다. 그러므로 일전에 책문(策文) 제목을 내면서 명말(明末) 청초(淸初)의 문집에 대한 일을 성대하게 말했던 것이다. 대체로 명·청 시대의 글은 초쇄기궤(噍殺奇詭)5295) 하여 실로 치세(治世)의 글이 아닌데, 《원중낭집(袁中郞集)》이 가장 심하다. 요즈음 습속을 보면 모두 경학(經學)을 버리고 잡서를 따라감을 면치 못하고 있다. 세상에 유식한 선비가 없어서 어리석은 백성들이 보고 느끼는 바가 없게 된 것이다. 내가 소설(小說)에 대해서는 한 번도 펴본 일이 없으며, 내각에 소장했던 잡서도 이미 모두 없앴으니, 여기에서 나의 고심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46책 257면
【분류】 *사법(司法) / *사상-서학(西學)









1. 사건 개요

신해년(정조 15, 1791) 호남의 진산군(珍山郡)1)에 사는 윤지충(尹持忠)이라는 선비가 있었다.2) 그는 해남 윤씨 가문의 일원으로서 윤선도의 6대손이었다. 그리고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삼형제의 외조부였던 윤덕렬(尹德烈)의 친손자로서, 약전 형제들과는 고종사촌간이었다. 윤지충의 외가는 안동 권씨 가문이었다. 그래서 같은 진산군에는 외삼촌 권세학의 아들 권상연(權尙然)이 살고 있었다. 윤지충은 1759년생이며, 권상연은 1750년생이었으니, 권상연이 윤지충의 외종형인 셈이었다. 사건이 나던 해에 윤지충은 32살이었고, 권상연은 41살이었다.
신해년 가을 진산군 일대에는 괴상한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사학하는 사람 윤지충이 어미가 죽었는데도 상장(喪葬)의 예(禮)를 쓰지 아니하고, 다만 효건(孝巾)만 쓰고 상복(喪服)은 입지 않았으며, 또한 조문(弔問)도 받지 아니하였다더라. 그리고 그 무리 권상연과 함께 신주를 불태우고 제사를 폐지하였다더라.”
소문이 퍼지자 진산군수 신사원(申史源)이 좌의정 채제공(蔡濟恭)에게 편지를 보내어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를 물었다. 하지만 몇십 일이 지나도 답장을 받을 수 없었다. 그 때에 홍낙안(洪樂安)이라는 인물이 소문을 듣고 매우 놀라면서 먼저 진산군수에게 글을 보내어 왜 일이 지체되고 있는지를 물었으며, 또 채제공에게도 글을 올려서 임금님께 상달하여 엄하게 베이기를 청하였다. 1752년생인 풍산 홍씨 홍낙안은 남인이면서도 안정복과 함께 대표적인 공서파(攻西派)였다. 이미 그는 4년 전인 1787년(정조 11)에 이승훈과 정약용 등이 성균관 근처 반촌(泮村)에 있던 김석태의 집에 모여 천주교 서적을 강학한다는 말을 이기경에게 듣고는 이들을 고발하여 이른바 정미반회사건(丁未泮會事件)을 일으킨 바 있었다.
사태가 확산되자 진산군수는 윤지충의 집으로 찾아갔다. 군수는 사당에서 위패를 넣어두는 주독( )을 발견하고 열어보았더니 비어 있었다. 군수는 윤지충과 권상연이 신주를 불태웠다는 소문이 근거없는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하고, 두 사람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당시 윤지충과 권상연은 소문이 일파만파로 퍼지자 각기 다른 곳에 잠시 피신하는 길을 선택하였던 모양이다. 하지만 윤지충의 삼촌이 대신 진산군 관아에 붙잡혀 있다는 소식을 듣자 두 사람은 10월 26일 저녁 관아에 출두하였다. 저녁을 먹은 후에 곧바로 군수 앞에서 신문을 받기 시작하였다. 진산군수의 신문이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하자 두 사람은 29일 밤 전주에 있던 전라도 감사 정민시(鄭民始)의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10월 30일 아침부터 윤지충과 권상연은 전라감사 정민시로부터 간단한 인적 사항에서 시작하여 천주교를 배우게 된 계기, 학습한 서적들, 책을 돌려본 인물들, 신주를 불태우고 제사를 지내지 않은 이유 등에 이르기까지 강도 높은 신문을 받았다. 11월 1일에 지금까지 받았던 문초의 내용과 거의 같은 내용으로 공술서(供述書)를 작성한 두 사람은 감사의 명령에 따라 결안에 서명을 하고 형틀에 묶여서 곤장 30대를 맞았다. 그 후 감사는 정조에게 장계(狀啓)를 올렸다. 『정조실록』에는 정조 15년 11월 7일에 전라도 관찰사 정민시가 죄인 윤지충, 권상연 사건에 관하여 보고를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정조는 감사의 보고를 받았지만 일을 극단으로 몰고 갈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3) 하지만 전국에서 윤지충과 권상연을 극형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상소가 30건 이상 올라왔다. 게다가 남인에 속하였던 관계로 대체로 천주교 인물들에 호의적인 편이었던 채제공마저도 정조에게 사형을 건의하였다. 결국 정조는 11월 8일 윤지충과 권상연을 참수형에 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그들의 머리는 5일 동안 효시하도록 하였다. 정조의 명령은 전라 감사에게 전달되었다. 결안이 내려오자 두 사람은 곧 감옥에서 나와 형장으로 끌려갔다.4)
형 집행을 주재하는 관리는 나라의 관습대로 왕이 승인한 결안이 쓰여진 명패를 윤지충에게 읽으라고 하였다. 윤지충은 그것을 받아 큰소리로 읽었다. 그런 다음에 그가 머리를 커다란 나무 토막에 누이자 망나니가 그의 머리를 단번에 잘랐다. 권상연 역시 마찬가지의 절차를 거쳐서 머리를 잘렸다. 이 때는 신해년 11월 13일(양력으로 1791년 12월 7일)이었다. 윤지충과 권상연이 신주를 불태우고 제사를 폐지하였다는 이유로 참수형을 받은 이 사건은 ‘진산사건’으로 불린다. 그 후 사건의 여파로 권일신이 체포되어 유배형을 받았으나 가는 도중에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반면에 이승훈은 배교를 선언하였고, 몇몇의 인물들이 천주교 서적 소지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배교하고 석방되었다. 다만 원시장이라는 양민이 형벌을 받다가 사망하였다. 이 일은 신해교난, 신해박해, 신해사옥 등으로 불린다. 진산사건을 기점으로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은 결정적인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되었다. 조상제사를 거부함으로써 박해를 감수할 것인가, 조상제사를 수긍하고 천주교를 버릴 것인가. 그 후 조선 천주교회가 걸어간 길은 익히 알려진 바대로이다.

2. 사건의 의문점들

본격적으로 조선 천주교회가 창설된 것은 1784년의 일이었다.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온 이승훈이 주변 인물들에게 세례를 주고 명례방에 있던 김범우의 집에서 처음으로 집회를 열었던 것을 시발로 보기 때문이다. 이 때로부터 신해년의 진산사건이 터지기까지는 불과 7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렇게 짧은 시간에 해남 윤씨 사대부 가문의 촉망받는 젊은 선비가 당시에는 누구나 당연한 것으로 여기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올리는 일을 거부하여 참수형을 받은 사건이 발생할 수 있었을까?
또한 윤지충은 언제부터 천주교 신자가 되었으며, 어떤 계기로 이른바 폐제분주(廢祭焚主)를 감행할 정도로 충성스러운 천주교 신자가 되었을까? 정민시가 올린 장계에 실린 윤지충의 공술 기록을 보면, 계묘년(정조 7, 1783) 봄 진사시에 합격하고 갑진년(1784) 겨울 서울에 머무는 동안, 우연히 중인 계급에 속하는 김범우의 집에 갔었다고 한다. 윤지충은 김범우의 집에서 『천주실의』와 『칠극』을 보고는 빌려서 고향집으로 돌아와 베껴 두고 책들을 돌려보냈다. 1년 뒤 서학에 대한 비방이 많아서 그 책들을 태우거나 물에 씻어버렸다. 그 뒤 혼자서 연구하고 학습을 하였기 때문에 원래 스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거나 함께 배운 사람은 없었다. 이것은 윤지충이 공술한 내용이다. 액면 그대로만 보자면 윤지충은 1784년 김범우의 집에서 서학 서적들을 빌려 보았고, 혼자서 연구한 결과 조상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이 천주교에서 금지하는 것임을 깨닫고 그것을 실행에 옮겼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닐 것이다. 천주교회의 기록에 윤지충의 세례명은 바오로, 권상연의 세레명은 요한 또는 야고보로 나온다. 이 말은 교회에 속한 사람으로부터 세례를 받았고, 또 기본적인 교리 교육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게다가 『천주실의』와 『칠극』에는 신주와 제사를 금지해야 한다는 내용이 들어있지 않다. 왜냐하면 당시 중국에서 한문으로 저술된, 혹은 한문으로 번역된 천주교 서적들은 많은 경우에 예수회가 표방하였던 보유론(補儒論)을 기본적인 사상으로 깔고 있었기 때문에 제사 문제에 대해서 금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을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윤지충에게는 도대체 어떤 입교 과정이 있었길래 길게 잡아야 7년의 신앙 생활로 유교 사회의 근본 질서로부터 이탈할 수 있었을까?
그런데 유교 조상제사 거부의 심각성을 미루어 볼 때 ‘조선 천주교회 창설 이래 7년’이라는 기간 설정도 사실상은 무의미하다. 오히려 불과 1년도 못되는 시간이라고 보아야 맞다. 왜냐하면 조선 천주교 신자들이 천주교에서 조상제사를 금지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1790년 겨울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천주교회가 창설된 다음 해인 을사년(정조 9, 1785)에 ‘추조적발사건(秋曹摘發事件)’이 있었다. 김범우의 집에서 열리던 천주교 집회가 형조에 적발됨으로써 비밀리에 창설되었던 천주교회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조정에서는 북경에서 서학서를 가져오는 것을 금지하고 보관하고 있던 서학서들도 소각하였다. 관련자들이 대부분 양반이었던 관계로 훈방 조치되었으나, 중인이었던 김범우만은 형벌을 받은 뒤 귀양으로 간 곳에서 1786년 가을에 사망하였다.
추조적발사건을 겪은 뒤 천주교회는 다시 회합을 가졌으며, 한문교리서를 연구하다가 성직제도 혹은 교계제도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승훈, 권일신, 홍낙민, 유항검 등 10여 명이 신부가 되어 이른바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를 운영하였다. 아마 1786년 봄에 조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로마 교황청에서 반포한 교회법상으로는 이러한 조직은 불법조직이다. 미사를 거행하고 성사를 베풀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지는 것은 주교로부터 신품성사를 받은 사제에게 한정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선의 가짜 성직자들은 대단히 성실하게 자신의 직무를 수행하였던 모양이다.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에는 이들이 세례성사, 고백성사, 성체성사, 견진성사를 거행하고 미사를 집전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미사 거행은 조선의 제사와 비슷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제의(祭衣)를 화려한 중국 비단으로 만들었는데, 로마식이 아니라 조선 사람들이 제사드릴 때 쓰는 옷과 비슷하였다고 하니까 말이다.
이야기가 너무 장황해졌으니 그만 원래 하려던 대목으로 돌아가자. 몇년 동안 가성직제도를 성공적으로 운영하였는데, 1787년 내지 1788년 무렵에 문제가 제기되었다. 교리서들을 정독하던 어느 지도급 인사가 이러한 성직 수행과 성사 집행이 독성죄(瀆聖罪)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승훈에게 편지를 보내어 성사를 중단하고 북경의 신부들에게 지시를 받자고 한 것이다. 이에 따라 밀사로 선발된 윤유일이 이승훈과 권일신의 성직제도 문의 서한을 소지하고 1789년 10월 장삿군으로 변장하고 동지사 일행을 따라 북경으로 떠났다. 북경에 도착한 윤유일은 이승훈에게 세례를 베푼 예수회 회원 그라몽(Grammont) 신부는 만나지 못했다. 왜냐하면 이승훈이 북경에 갔을 때 그라몽 신부가 있었던 것은 1773년에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예수회 해산 명령이 내려지고 선교지 관할 구역 내의 사무 처리는 라자로회가 담당하기로 되었기 때문에 그 업무의 인수인계 문제로 그라몽 신부가 잠시 체류하고 있었던 연유였다. 윤유일은 대신에 라자로회의 로(Raux) 신부를 만났다. 로 신부를 통해서 조선에 새로 천주교회가 세워졌다는 소식을 들은 북경교구의 구베아(Gouvea) 주교는 즐거운 마음으로 사목교서를 작성하였다.
구베아 주교의 회답을 받은 조선의 지도부는 이미 미사 거행과 성사 집행을 중지한 상태였기 때문에 기꺼이 그 가르침에 순응하는 한편, 성직을 제대로 수행할 신부를 보내달라고 요청하기로 하였다. 1790년 9월 청나라 건륭제의 팔순을 축하하는 사신 일행이 떠날 때 윤유일이 다시 북경으로 따라가서 조선 지도부의 서한을 구베아 주교에게 전달하였다. 이 서한에서 조선 지도부는 선교사 파송 청원 이외에, “자기들 나라의 계약 관계와 미신과 조상숭배와 그 밖의 몇 가지 어려운 점에 대한 여러 가지 질문”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이 서한에 답장을 보내면서 구베아 주교는 신부 파견 약속과 더불어 조상제사를 금지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구베아 주교가 먼저 제사 금지령을 선포한 것이 아니라 조선 신자들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금지시킨 셈이 되는데, 이 서한은 누가 쓴 것일까? 이승훈이 확실한 것 같다. 그는 “1790년 성령 강림 축일 후 7주일(양력 7월 11일)”에 북경의 북당 선교사들에게 보내는 서한을 썼다고 한다. 이 서한이 구베아 주교에게 전달되었던 것 같다. 왜 이승훈은 그런 질문을 하였을까? 이미 조선 천주교회 내부, 적어도 지도부 내부에서는 제사 문제가 제기되었던 것일까?
여하튼 구베아 주교의 서한은 1790년 10월에 북경을 떠나 조선으로 돌아온 윤유일을 통하여 지도부에 전해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략 1790년 11월에서 1791년 1월 사이가 조상제사 금지령이 조선 천주교회에 알려진 시점이 될 것이다. 그리고 나서 1791년 10월에 진산사건이 터진 것이다. 1년도 못 되는 그 짧은 시간 동안에 구베아 주교의 제사 금지령을 전달받은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은 충격에 휩싸였을 것이고,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였을 것이다. 그 서막을 올린 인물이 바로 윤지충이었다. 진산사건의 장본인 윤지충, 그리고 그의 결행에 동참한 외종형 권상연, 그들은 어떻게 해서 제사 폐지를 실천에 옮길 수 있었을까? 왜 하필 그들이었을까? 이승훈을 비롯한 지도부들은 제사 문제에 대해서 어떤 판단을 하였고, 어떤 대응을 하였을까?

3. 의문을 풀기 위한 실마리들

윤지충과 권상연이 폐제분주한 일, 그리고 사학을 버리고 정학으로 돌아오라는 전라감사의 권유를 뿌리치고 참수형을 선택한 일에 담긴 의문들을 풀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많은 실마리들을 모아서 사건의 전후 관계를 재구성하고, 사건이 발생하게 된 직·간접적인 원인 내지는 동기를 추적해야 한다. 진산사건의 경우에는 조선 천주교회 창설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시점에 발생한 만큼, 조선 후기 사회의 전반적인 흐름에서 18세기가 차지하는 특이점을 검토하는 데 필요한 실마리들, 말하자면 조선 후기 종교사, 사상사의 맥락에 담긴 것들을 먼저 살펴보겠다. 그 다음에는 창설 초기 조선 천주교회 내부의 맥락에 속하는 실마리들을 수집하여 의문을 해소하는 데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를 검토하겠다.

1) 조선 후기 유교사에서 18세기의 의미
① 일반적으로 조선왕조는 예교주의를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하였다고 말한다. 유교적 전통의 핵심을 예(禮)로 보고, ‘예로써 다스림, 예의 가르침, 예에 관한 학문’을 뜻하는 예치(禮治), 예교(禮敎), 예학(禮學)의 담론과 실천들이 조선왕조를 지탱하는 근간이었다고 보는 것이다.5) 또한 조선 시대는 제사의 전성시대라고 한다. 국가와 민간에서 수많은 형태의 제사들이 행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예법의 표준은 국가의 경우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였고, 민간의 경우에는 『주자가례』가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조선 초기에는 유교 의례가 사회 전반에 쉽게 보급되지 않았지만, 성리학이 심화되기 시작한 16세기 중엽부터 비로소 양반 사대부 사회에서 『주자가례』가 정착하게 되었다.6)

② 16세기 이후에 들어서 조선의 양반 사회에 유교식 제사의례가 일반화되기 시작하였음을 보여주는 근거로는 주로 16세기 중반부터 『주자가례』 중심의 생활규범서로서 각종 제례서들이 출현하기 시작하였다는 점,7) 가묘와 재실과 같은 제사 건축물들이 주로 17세기 중반 이후로 일반되었다는 점이 거론된다.8) 뿐만 아니라 상속제도에서 자녀균등상속관행이 17세기를 거쳐 18세기로 접어들면서 장자우대상속으로 정착되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9) 아울러 입향조를 중심으로 하는 문중조직이 종법적인 가족질서를 확립하여 향촌사회를 주도하는 사회조직으로 부각되는 것 역시 16세기 말에 시작하여 17세기 중엽까지 진행된 일로 생각된다.10)

③ 이처럼 지금까지 조선 후기에 진행되었던 유교의례의 전국적 확산이나 예학의 번성에 대한 논의들은 주로 17세기까지의 상황을 연구 대상으로 삼고 있다. 그에 반해서 18세기에 접어들면서 어떠한 변화 양상을 보였는지에 관해서는 상세한 연구를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대략적인 추세는 고영진의 논조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고영진은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전반을 기점으로 조선 시대 예학사에서 중요한 변화가 발생하였다고 말한다. 그는 변화의 특징으로 『주자가례』의 정착, 왕례의 재정비와 더불어 국가의 향례(鄕禮)을 들고 있다. 즉 향촌 사회에서 사족의 지배력이 쇠퇴하고 수령권이 강화되면서 기존의 사족 중심 지배 체제에서 수령 중심, 관료 주도의 지배 체제로 변화하였다는 것이다. “정조의 명령으로 편찬된 『향례합편』은 향례를 집대성한 것으로 국가가 지방 포섭의 일환으로 향례의 시행을 개인이나 향촌 차원이 아닌 국가 차원에서 주도하려고 시도한 데서 나온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 중기에 역사적으로 구현된 예치의 주도권이 사족에서 국가, 왕실로 옮겨갔다. 더욱이 사회가 농업에서 상공업으로 중심축이 이동해가고 향촌에서 사족의 지배력이 쇠퇴함으로 인해 예의 사회적 역할이 줄어들고 부정적인 측면이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예치는 더 이상 발전적으로 기능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개인에서부터 국가까지 각 부분을 유기적, 통일적으로 결합하였던 운영 원리가 기능하지 못하자 사회 각 부분은 분열되었고, 근대 이후 100년이 지났지만 예치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운영 원리는 아직도 세워지지 않고 있다.”11)

④ 위의 인용문을 토대로 생각할 때 1700년대부터 진산사건이 터진 1791년까지의 시간 동안에는 향촌 사회에서 사족 지배력이 쇠퇴하고 예교주의의 이념이 힘을 잃어가는 현상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말하자면 1680년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일단락된 예송 논쟁을 최정점으로 하여 18세기에 들어오게 되면 조선 사회, 적어도 지방의 향촌 사회에서는 『주자가례』에 입각한 유교 의례의 강력한 통합력에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겨나지 않을까 한다. 그리고 그 연장선 위에서 서학 - 천주교로 이어지는 새로운 사상 운동 내지 종교 운동이 발생한 것을 올려 놓고, 진산사건 역시 그러한 맥락 속에서 이해한다면 어느 정도 개연성을 입증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⑤ 이런 추측에 힘을 실어주는 또 다른 사례를 한 가지 거론하겠다. 그것은 황사영의 『백서』에 실린 김건순이라는 인물에 관한 기록이다. 김건순은 김상헌의 자손으로 노론계의 인물이었는데, 1801년에 벌어진 신유교난 때에 참수당하였다. 황사영은 김건순이 천주교에 입교하기 전이었던 18세 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조선의 상복이 송나라 유학자의 제도를 그대로 따라 써서 옛날 법을 많이 잃었는데, 김건순이 열여덟살에 양부의 상을 당했을 때 이것을 고쳐서 바로 잡았다. 그러자 세속의 잘 알지 못하는 선비들이 크게 놀라고 의아해하며 글을 보내어 힐책하였다. 이에 김건순이 글을 지어 응답하였다. 그 인용한 근거가 충분하고 문장이 넉넉하고 커서, 이가환이 읽어보고 감탄하여 말하기를 ‘나는 도저히 따라가지도 못하겠다’고 하였다.”12) 여기서 송나라 선비의 제도란 『주자가례』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김건순이 천주교에 입교하기 이전에 『주자가례』의 복제를 비판하면서 고례를 도입하는 일을 행하여 당대의 여러 유학자들과 논쟁을 벌였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천주교에 입교한 상당수의 양반 유학자들은 이미 주자가례의 의례 규범과 예교주의 질서를 상대화시킬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던 것이 아닐까?

⑥ 지나가는 말이지만 예교주의 질서와 성리학적 세계관은 생각만큼 그렇게 강고한 시스템을 구축하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임난과 호란을 거친 뒤 양반층 내부에서 기존 질서와 세계관을 벗어나려는 움직임들이 간혹 출현하게 된다. 허균 같은 인물이 대표적이다. 1607년 3월 23일 삼척부사에 임명된 허균이 삼척에 내려온 지 13일만에 파직을 당했다. 사헌부에서 계를 올려 허균이 불경을 외우고 읽으며, 평소에도 중의 옷을 입고 부처에게 절하며 지낸다는 것이 이유였다. 허균은 파직당하고 쓴 시가 있다.

예절의 가르침이 어찌 자유를 얽매리오/ 뜨고 가라앉는 것은 다만 천성에 맡기리라.
그대들은 모름지기 그대들의 법을 지키게/ 나는 나름대로 내 삶을 이루겠노라.
禮敎寧拘放 浮沈只任情 君須用君法 吾自達吾生

⑦ 조선 후기 유교사의 변동 가운데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주자가례』에 입각한 신주 제작과 기제사 거행을 거부하는 데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또 한 가지 사항은 양명학이다. 1990년대 이후의 연구들에서 천주교의 수용이 양명학을 매개로 하여 이루어졌다는 주장들이 대두하였다.13) 송석준에 따르면,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 1649~1736)를 태두로 하는 강화학파와는 별개로 성호 이익의 문하에서 형성된 양명학이 또 다른 흐름을 형성하였으며, 이들은 양명학을 매개로 하여 전통 유교로부터 천주교로 귀의해 가는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14) 말하자면 성호학파 내에서 발생한 양명학은 기존의 양명학과는 달리 종교적 특성이 발견되는데, 그들이 천주교로 귀의하는 데에는 규범적 형식에 구애됨이 없이 대상을 객관적으로 파악해 가는 양명학적 사유구조가 이질적인 천주교를 편견없이 이해하는 데 기여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15) 또한 서종태의 주장을 따르자면, 성호학파의 양명학자들이 천주교의 수용과 발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된 것은, 그들이 당시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극복할 희망의 메시지를 서학에서 발견하게 되었고, 또한 그것을 적극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사상 체계를 갖추었기 때문이라고 한다.16) 그러므로 성호학파 내에서 좌파에 해당하는 인물들이 송대 성리학과는 다른 노선을 걸었던 양명학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서학과 천주교 수용의 토대를 형성하였다는 논리를 극단까지 밀고 나간다면 『주자가례』가 표방하는 의례적 규범에서 이탈하여 가묘에 신주를 모시고 기제사를 준행하는 것을 부정하는 결과 역시 충분히 예견 가능하지 않을까?

⑧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단서들은 진산사건을 이해하는 데 방증 내지는 간접적인 근거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1790년 당시에 조선 천주교회의 지도부 내에서도 조상제사 금지에 대해서 입장이 엇갈렸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북경의 구베아 주교 서한에 복종하여 조상제사를 거부하였던 반면에, 다른 이들은 주교 서한에 당혹감을 표시하면서 기존 유교 질서로 회귀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18세기 조선 사회의 유교 동향은 진산사건의 외적인 환경으로 보아야 할 것이며, 직접적으로 진산사건이 발생하게 된 동인을 찾기 위해서는 조선 천주교 내부로 눈을 돌려야 할 것 같다.

2) 신생 천주교회 내부에서의 움직임들
① 윤지충, 권상연 그리고 진산사건 자체에 관해서 천주교회 내의 움직임을 추적하는 데 실마리가 될 수 있는 자료들로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를 정리해보자. 가장 먼저 들 수 있는 것은 샤를르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이다.17) 달레는 파리외방전교회 회원이지만 조선 천주교회에 파견된 선교사는 아니었다. 단지 파리 본부에서 근무하면서 조선 선교사들이 보낸 서한과 각종 보고서들을 정리하여 병인교난이 발생하던 1866년까지 조선 천주교회의 역사를 저술한 것일 뿐이다. 하지만 달레가 주로 참고하였던 것으로 보이는 다블뤼 주교의 서한과 보고서들은 당시 조선에서 수집한 자료들에 기초한 것이어서 대단히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18) 게다가 국역본 『한국천주교회사』에는 최석우 신부가 조선 내 한문 자료들을 섭렵하여 일일이 역주를 붙였기 때문에 그 역시 참고할 만한 가치가 있다. 달레의 저서 가운데 특별히 진산사건과 관련한 대목에서는 윤지충이 직접 한문으로 기록하였고 나중에 조선말로 번역되었다는 것을 옮겨놓았다. (『한국천주교회사 상권』, 337~352쪽) 이 기록은 윤지충 본인의 목소리가 담긴 것인 만큼 매우 중요하리라고 본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한문 원본이나 언문본은 아직 발견된 바가 없다. 다만 『사학징의』 말미에 천주교 신자 집에서 압수하여 소각한 서적 목록이 있는데, 그 중에서 윤현(尹鉉)이라는 사람의 집에서 발견된 서적들 중 『죄인지츙일긔』라는 이름이 보인다.19) 윤현과 윤지충의 관계가 어떠한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1801년 신유교난에 관련한 기록들을 모은 『사학징의』에 그 책 이름이 나타난다는 사실은 1791년 진산사건 이후 윤지충의 자기 고백이 담긴 기록이 언문으로도 번역되어 천주교 신자들이 돌려 읽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하겠다. 달레의 저서는 통사류의 역사 서술을 지향하였기 때문에 윤지충의 일기가 약간 각색되어 기록되었다. 하지만 달레가 인용한 다블뤼의 불어 번역문이 공개되었기 때문에 보다 더 윤지충의 원문에 가까운 내용을 볼 수가 있다.20) 그리고 달레 저서의 저본이 되었던 다블뤼의 보고서에 실린 윤지충 관련 부분도 공개되었기 때문에 이 역시 참고할 수 있다.21) 그리고 2000년에 들어와서는 로마 교황청 인류복음화성(과거의 포교성성) 고문서고에 소장되어 있던 초기 조선 천주교회 관련 라틴어 문서들이 국내로 반입되었으며, 일부가 번역 출간되어 연구 자료의 범위를 확대시켰다.22) 그 밖에 한문으로 기록된 자료들 가운데에서는 정약용의 『여유당전서』, 황사영의 『백서』가 있고, 그리고 조선 정부의 공식 기록과 천주교에 반대하는 인물들이 만든 자료로서 『추안급국안』, 『사학징의』, 『벽위편』, 『조선왕조실록』, 『일성록』, 『승정원일기』 등을 참고하는 일도 필요하다. 하지만 여기서는 해외에서 발견된 사료들[일단 윤지충 자신의 기록이라 일컬어지는 자료들(불어 번역문 및 한국어 중복 번역문) 그리고 교황청 소장 문서들]을 집중적으로 다루기로 한다.

② 먼저 윤지충이 천주교에 들어가게 된 경위를 따지기 위해서 천주교 수용 초기 상황으로 돌아가보자. 윤지충은 공술서에서 자신이 김범우의 집에서 빌린 『천주실의』와 『칠극』을 읽고 연구하여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고 하였지만, 이것은 자신과 관련된 교회 인물을 보호하기 위해 둘러댄 것으로 보인다. 죽고 없는 김범우을 끌어들이는 것이 안전했기 때문이다. 윤지충의 입교와 관련이 있는 인물은 누구일까? 정약용은 정약전의 묘지명을 쓰면서 “임인년(정조 6, 1782) 우리 형제(약전, 약용)는 윤모(윤지충을 가리킴)와 함께 봉은사에 머물며 경의과를 준비하다가 15일 만에 돌아왔다”고 적었다.23) 윤지충에게 약전 형제는 고모의 아들들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고종사촌간으로 가까이 지냈으며, 함께 과거 공부를 하기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약전 형제와 윤지충이 봉은사에서 함께 공부한 것은 1782년의 일이라고 한다. 그 5년 전에 있었던 일이 주어사 천진암 강학회였다. 권철신이 천진암이라는 곳에서 강학회를 열었고, 이벽이 여기에 참석함으로써 서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 강학회에 참석한 인물들의 전체 명단은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권철신, 정약전, 이벽 세 명의 이름은 확실하다. 그리고 이들은 신앙적인 차원에서 천주교 교리를 본격적으로 학습하였던 것으로 볼 수는 없지만, 적어도 과거 시험에 필요한 공부를 한 것은 아니었으므로 양명학과 각종 한문 서학서들을 독서하지 않았을까 한다. 그러므로 윤지충은 고종사촌형인 정약전을 통해서 처음으로 천주교를 접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교회가 창설된 뒤에는 약전, 약용 형제를 통해서 입교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입교 시기에 관해서는 다블뤼의 기록을 따르자면, 1784년 겨울 서울 김범우의 집에서 서학서를 구경한 지 2~3년이 지난 뒤 정씨네 집안(약전과 약용 형제를 말함)에서 천주교에 관련된 일련의 모든 책들을 본 후라고 한다.24) 그러니까 1786년에서 1787년 사이에 마재로 가서 약전, 약용 형제를 방문하고 그들을 통하여 천주교 서적들을 탐독한 후에 입교하였던 것 같다. 약전의 아우이자 약용의 형이었던 약종은 자신이 천주교에 입교한 것을 1786년 3월의 일이었다고 하였다. 아마 윤지충도 비슷한 시기, 혹은 같은 날에 약종과 함께 약전, 약용 형제를 통하여 입교하였을 것으로 보인다.25)

③ 위에서 진산사건의 의문점을 거론하면서 윤유일이 조선 교회의 밀사 자격으로 1790년 9월에 두 번째로 북경으로 구베아 주교를 만났을 때 전달한 서한에 ‘미신과 조상숭배에 관한 질문’이 들어 있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지도급 인사 가운데 한 명이 가성직제도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였다고 하였다. 이 사실에 관한 자세한 사정은 교황청 인류복음화성 고문서고에 소장되어 있던 서한들을 통해서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다. 그 서한들은 라틴어, 이탈리아어, 불어로 되어 있는데, 그 속에는 Hiuenchen이라는 사람이 가성직제도의 문제점을 이승훈에게 질책한 서한, 이승훈이 북경의 선교사에게 보낸 첫 번째 서한, 이승훈이 북경으로 보낸 두 번째 서한의 번역문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북경의 구베아 주교가 로마의 포교성성 장관에게 보낸 1790년 10월 6일자 보고서, 북경의 구베아 주교가 사천성 감목 디디에 주교에게 보낸 1797년 8월 15일자 서한도 특별히 중요하다.

④ 우선 이승훈에게 가성직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서한을 보낸 사람은 유항검이라고 한다.26) 유항검은 서한에서 이렇게 말한다. “지난 마지막 모임에서 많은 논의를 거친 끝에 제가 미사와 견진성사를 집전하는 일을 맡아보도록 결정이 났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여러분 명령에 순순히 따르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집에 돌아와서 우리 성교회에 대한 책 여러 권을 아주 집중적으로 찬찬히 읽어 보고 저는 그만 기절초풍하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사제품을 받으면 인호(印號)를 받게 되는데, 바로 이 인호가 없는 사람은 사제의 직무 가운데 그 어떤 것도 수행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여러 책에서 말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27)
그런데 이 서한에는 조상제사 문제가 거론되어 있지 않다. 이승훈이 쓴 두 통의 서한에도 신주와 제사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느냐고 질문하는 내용은 실려 있지 않다. 대신에 두 번째 서한의 후반부에 “윤바오로가 출발하는 날짜가 너무나 촉박하기 때문에 저희가 미처 글로 다 쓸 수 없었던 내용들에 대해서는 윤 바오로가 직접 신부님들께 말씀드리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28) 그렇다면 아마도 신주와 제사에 관한 문제를 문의하였다면 그것은 윤유일이 구두로 물어본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⑤ 구베아 주교는 진산사건이 일어난 지 6년 뒤에 사천성 감목 디디에 주교에게 보낸 서한에서 이런 언급을 한다. “조선교회에서는 지난 1790년 자신들이 궁금해 하는 여러 가지 의문점들과 질문 사항들을 저에게 보내왔는데, 그 중에는 조상들의 신주를 만들어 모셔도 되는지 또한 이미 모시고 있던 조상들의 신주들을 계속 모셔도 되는지에 대한 질문이 끼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황청에서는 베네딕도 교황의 칙서인 ‘엑스 쿠오(Ex quo)’와 클레멘스 교황의 칙서인 ‘엑스 일라 디에(Ex illa die)’를 통해서 이 문제에 대하여 아주 단호한 입장을 표명하였더랬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러한 교황청의 결정에 따라 절대로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대답하였습니다.”29) 그렇다면 분명히 윤유일이 조선 천주교회를 대표하여 신주와 제사 문제에 관한 질문을 구베아 주교에게 했고, 이에 대해서 구베아 주교가 단호한 금지 명령을 내렸다고 볼 수 있다. 구베아 주교의 금지 명령서는 이승훈이 계속 보관하였으며, 1801년 신유교난이 발발하였을 때 압수당하였다고 한다.30)

⑥ 그러면 제사 문제를 제기한 조선인 신자는 누구였을까? 여기에 대한 해답은 이승훈의 첫 번째 서한에 들어 있다. “제(이승훈)가 독성죄(瀆聖罪)를 지었다는 사실은 1786년에 가서야 알았습니다. 1786년 봄이었는데 사제직에 임명된 열 사람 가운데 한 사람(유항검)이 자신이 사제직에 임명되자 라는 책을 열심히 그리고 아주 꼼꼼하게 읽었습니다. 그러다가 바로 그 책에서 제가 어떤 죄에 떨어졌었는가를 모두 알아내었던 것입니다. 그 사람은 즉시 거기에 대하여 충고해 주기 위해서 저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여기에 그 사람의 편지를 동봉해 드립니다.”31)
여기서 유항검이 읽고 가성직제도의 문제를 파악했다는 책은 무엇일까? 이 책이 만약 『성교절요』(cheng kiao tsie iao, 聖敎切要)라면 의문이 쉽게 풀린다. 1695년 중국에 입국한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의 오르티즈(Hortis Ortiz, 白多瑪) 신부가 1705년에 간행한 『성교절요』는 1784년 봄에 이승훈이 북경에서 돌아오면서 전한 것으로 추정되는데,32) 1789년 무렵에 가서는 일반 신자들 사이에도 열독되던 교리서였다.33) 십계명 중에서 제1계명을 거스르는 죄를 거론하면서 조상제사에 관련된 조항들을 열거하고 있다.34) 그렇다면 유항검이 1786년에 이미 『성교절요』를 꼼꼼히 읽었으며, 그런 과정에서 천주교가 신주를 모시는 것과 유교식으로 조상제사를 거행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⑦ 이제 실마리 찾기의 막바지에 도달한 듯하다. 유항검과 윤지충의 관계만 해명하면 윤지충이 폐제분주를 감행한 천주교 내부의 동인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런데 이에 대한 대답은 의외로 쉽다. 즉 유항검과 윤지충은 가까운 사이였고, 윤지충이 유항검과 마찬가지로 『성교절요』를 구해서 읽었거나 핵심 내용을 배웠다는 것을 입증하면 된다. 1756년 생으로 윤지충보다 3살이 어린 유항검의 어머니가 권씨였다. 즉 유항검의 어머니와 윤지충의 어머니는 같은 권씨로 친자매였다. 그러니까 이들은 이종사촌이었던 것이다.35) 결국 유항검, 윤지충, 권상연은 같은 전라도 전주와 진산에 거주하는 족친들이었던 셈이다.36) 그리고 유항검은 윤지충에게서 교리서적을 빌려보고는 이를 더 깊이 연구하기 위해서 권일신을 찾아가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고 한다.37) 그렇다면 유항검보다 먼저, 또는 유항검과 비슷한 시기에 윤지충도 유항검이 신주와 조상제사에 대해서 품었던 것과 유사한 문제에 직면하였을 것이고, 이에 대해서 자신의 입장도 정립하게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⑧ 윤지충은 진산군수와 전라감사에게 신문을 받을 때 폐제분주에 관하여 어떤 입장과 논리를 전개하였을까? 이에 대해서는 윤지충이 지었다고 전해지는 『죄인지츙일기』의 불역본, 윤지충이 작성한 『공술서』 두 가지가 가장 구체적인 자료가 될 것이다. 먼저 천주교회 내에서 전승되는 불역본 자료들에 나타난 윤지충의 목소리를 들어보자.38)

군수: 너는 공자의 서적도 읽지 않았느냐?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부모가 살아 계신 동안 모든 규정에 따라 그들을 섬기고, 그들이 돌아가신 후에는 모든 규정에 따라 장례를 치를 것이며, 끝으로 관습에 따라 제사를 지내야 비로소 효심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느니라’고 하였다.
대답: 이 모든 것이 천주교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은 것입니다.
군수: 하기야 과거에도 불도와 노자 사상으로부터 뒤늦게 되돌아 온 성현들이 있었으니, 네가 지금부터라도 마음을 바꿀 생각을 한다면 그분들의 발자취를 따를 수 있을 것이다.
대답: 제게 바뀔 여지가 있다면 처음부터 그렇게 했을 것이고,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번에는 전라 감영에서의 신문 가운데 일부 내용이다.39)

감사: 너는 신주들을 모두 있는 그대로, 아니면 그것들을 불태운 후에 묻었느냐? 그것들을 불태웠는지 아니면 단지 묻기만 했는지가 다소간 네 죄의 경중을 정한다.
대답: 저는 그것들을 불태웠고, 그리고 나서 묻었습니다.
감사: 네가 그것들을 네 부모같이 공경했다면, 신주를 묻는 것은 그나마 묵인된다 하더라도 어떻게 그것들을 불태울 수 있다는 말이냐?
대답: 만약 제가 그것이 제 부모님이라 믿었다면, 어떻게 그것들을 불태울 결심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저는 (신주에) 부모님에 대한 그 어떤 것도 없다는 것을 아주 분명하게 알기 때문에 그것들을 불태웠으며, 그것들을 땅에 묻든 불태우든 여하튼 먼지로 되돌아가니, 거기에 심각함이 더하고 덜할 것이 없습니다.
감사: 너는 사람들(조상)의 신주들을 불태운 대가로 법적 징계를 받는 것을 인정하느냐.
대답: 만약 제가 부모님이 거기 계신다고 생각하면서 신주들을 불태웠다면 형벌은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신주에) 부모님에 대한 그 어떤 것도 없다는 것을 아주 분명하게 알고 있는 저인데, 어떤 잘못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감사: 후회하지 않느냐?
대답: 천주교 그 자체에서는 구체적으로 신주를 불태우라고 지시하고 있지 않습니다. 제가 경솔하게 불태운 것을 전적으로 후회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밖에는 후회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위의 기록은 『죄인지츙일기』를 구해서 번역하였다는 다블뤼 주교의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에 실린 내용이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작성된 다블뤼 주교의 『조선 순교사 비망기』에는 약간 다른 내용이 실려 있다.40)

전주에서 주재하고 있는 그 당시의 전라 감사는 정민시였다. 위패를 가지고 무엇을 했느냐는 신문을 받은 바오로(윤지충)는, 처음에는 ‘그것들을 땅에 묻었다’고 대답했는데, 아마도 그가 나라의 이념에 충격을 보다 덜 주기 위해서 한 대답인 모양이다. 그러나 그가 지적한 곳을 파보았지만 그것들을 찾을 수가 없자, 그에게 갖은 형벌과 혹독한 고문을 가했다. 그가 다음과 같은 말로써 명백하게 굳건한 신앙 고백을 했던 때가 바로 그때였다. “사람이 죽으면 육신은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하늘나라로 가든지 지옥으로 갑니다. 죽은 이의 집에 남아 있을 수 없고, 또 남아있어야 할 영혼도 없습니다. 이는 제가 확실하게 알고 있는 증명된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위패 나무 조각 하나를 모셔두고 거기에다 제사를 지내며 음식을 바치는 것은 부모님께 거짓된 도리로써 효심과 사랑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 위패들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산에서 잘라온 나무 조각 위에다 장인(匠人)이 재단하고 거기에 끌이 지나간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 장인의 수고가 부모님의 영혼이 거기에 와서 머물게 할 수 있는 것입니까? 그러니 이 위패들은 아버지도 어머니도 아닙니다. 그저 나무토막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제가 어떻게 그것들을 아버지나 어머니처럼 여겨 받들 수 있겠습니까? 우리 참된 천주교는 당연히 그러한 미신을 금합니다. 더욱이 저는 그리스도인이고 하느님의 계명을 지킵니다. 그래서 저는 그 물건들을 불태웠습니다.”

한편 윤지충이 작성하였다는 공술서는 전라감사 정민시가 장계를 만들어서 정조에게 올릴 때 함께 첨부되었으며, 『정조실록』에도 그 내용이 실려 있다.

천주를 큰 부모로 여기는 이상 천주의 명을 따르지 않는 것은 결코 공경하고 높이는 뜻이 못됩니다. 그런데 사대부 집안의 목주(木主)는 천주교에서 금하는 것이니, 차라리 사대부에게 죄를 얻을지언정 천주에게 죄를 얻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집안에 땅을 파고 신주를 묻었습니다. 그리고 죽은 사람 앞에 술과 음식을 올리는 것도 천주교에서 금지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서인(庶人)들이 신주를 세우지 않는 것은 나라에서 엄히 금지하는 일이 없고, 곤궁한 선비가 제향을 차리지 못하는 것도 엄하게 막는 예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신주도 세우지 않고 제향도 차리지 않았던 것인데, 이는 단지 천주의 가르침을 위한 것일 뿐으로서 나라의 금법을 범한 일은 아닌 듯합니다.41)

이상의 내용에 실린 윤지충의 자기 논리는 대략 세 가지이다. 첫째, 천주교에서 금지하는 일이었다는 점, 둘째, 천주교의 영혼 관념과 교리에 입각할 경우에 신주와 제사는 헛된 것이라는 점, 그리고 셋째, 신주를 세우지 않고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이 사대부의 예법을 위반하기는 하였지만 조선의 국법을 어긴 것은 아니라는 점 등이다. 첫 번째 논리는 『성교절요』를 깊이 학습하였고, 1790년 봄에 전달된 구베아 주교의 금지령을 알고 있는 윤지충으로서 당연히 표방할 수 있는 것이었다. 두 번째 논리는 상당한 자기 성찰과 지적 훈련을 거친 후에야 도출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다양한 서학 서적과 한문 교리서들을 읽은 결과가 아닐까 한다.
그렇지만 여기에 관해서는 보다 더 면밀한 분석적인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가령 윤지충과 주변 인물들이 읽었다고 확인되는 서학 사적과 한문 교리서들의 내용에 대한 검토가 선행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논리에는 향촌 사회에서 시행하는 향례와 국가의 국법을 분리시키는 태도가 들어 있다. 이것은 조선 사회를 지탱하던 예교 및 예치의 이념을 국가체제의 통치 시스템과는 다른 차원에 속하는 별개의 것으로 본다는 의미에서 예교주의 국가질서를 상대화시키는 논리를 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자칫 작은 실마리를 침소봉대하는 과대평가로 나아갈 위험이 있다. 그러므로 좀 더 많은 자료들을 발굴하여 상세하게 검토하는 작업을 거쳐야 할 것 같다.42)

⑨ 이제 남은 문제 한 가지를 거론하자. 진산사건을 전후한 시기에 제사를 거부한 자는 누구였으며, 그렇지 않은 자는 누구였을까? 즉 윤지충과 권상연만 제사를 거부하였을까, 아니라면 또 누가 이 대열에 동참하였을까?
먼저 윤지충, 권상연과 이종사촌간이며, 초기부터 천주교에 가담하여 전라도 지역에 천주교를 전파하였던 유항검, 관검 형제도 조상의 신주를 묘 옆에 파묻었다. 하지만 이들은 진산사건이 발생하자 신변의 위협을 느꼈는지, 다시 신주를 파서 상자에 넣고 빈 방에 안치해 두었다고 한다. 결국 항검, 관검 형제는 10년 뒤인 1801년 신유교난 당시에 체포되었으며, 배교를 선언하였음에도 죄질이 무거워 참수형을 당하였다.43) 그리고 제사 거부에 동참한 다른 인물로는 양반 가운데에는 정약종과 정철상 부자, 윤지충의 동생 윤지헌, 정약종의 사위 황사영, 이중배, 그리고 중인이었던 최창현, 최인철 등이었다고 한다.
반면에 이승훈, 권일신, 권철신, 정약전, 정약용, 홍낙민, 이가환 등은 제사 금령을 거부하고, 천주교에서 이탈하여 전통적인 유교 사회로 복귀하였다.44) 특히 조정으로부터 사학의 교주로 지목받은 권일신은 진산사건의 여파로 신해교난이 발생하였을 때 붙잡혀 혹독하게 문초를 당하고 제주도 유배형을 받았는데, 도중에 예산읍으로 유배지가 변경되어 예산으로 가는 도중에 사망하였다. 그는 이렇게 공술하였다. “권상연(權尙然)은 애초부터 서로 모르고, 윤지충(尹持忠)은 약간 안면이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이 만약 과연 사판을 태워버린 일이 있다면, 이는 진실로 놀랍고 망령된 짓입니다. 조상을 섬기는 한 조목은 특히 그 학술에서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니, 제사를 예법대로 할 뿐 아니라 심지어는 생일에도 제물을 올리는 것이 정례(情禮)에 합치된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이 사판을 태워버린 사람은 어떤 책을 보고서 이처럼 패역스럽고 망령된 일을 했는지 모르겠으나, 실로 이해하지 못할 바입니다.”45) 이승훈과 더불어 초기 천주교 지도부를 구성하였던 권일신마저도 이렇게 공술한 것을 보면, 진산사건을 전후한 시기에 제사를 폐지한 인물은 소수였을 것이며, 그나마 양반 신자는 위에서 언급한 정도에 불과하였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게다가 진산사건과 신해교난의 파장은 매우 컸으며, 천주교 내에서도 제사 문제를 둘러싸고 양자택일의 선택을 강요받으면서 각자가 나름의 선택에 따라서 자기 갈 길을 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 왕조가 들어선 이래로 관주도로 유교적 가치관과 행동 규범을 지방에까지 확산시키려는 노력이 사림의 성장과 더불어 결실을 보게 된 18세기 말에 돌연히 발생하였던 진산사건은 중앙 조정과 지방의 유교 지식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조선이라는 왕조 국가와 천주교 사이에 돌이킬 수 없는 균열을 가져다 주었다. 유교의 예 관념과 제사 관행에 새로운 국면이 초래된 것은 그로부터 100여 년이 흐른 뒤 개항과 식민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발생한 일이었다.

4. 추론

결론이라고 해야 할 자리에 추론이라고 말하였다. 진산사건을 다시 논하면서 사건의 의문점들을 푸는 데 도움이 될 실마리들을 차례대로 추적하였지만 제대로 된 결과를 산출하지 못했다는 점을 자인하는 의미에서 그렇게 하였다. 하지만 대략적인 그림의 얼개는 그려 보았다. 진산사건, 즉 전라도 진산의 선비 윤지충과 권상연이 천주교를 믿어 어머니의 상을 당하매 신주를 세우지 않고 제사도 지내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참수형을 받은 사건은 조선 시대 유교적 규범의 근간에 도전하는 행위였기 때문에 심각한 사안이었다.
그런데 조선에 천주교회가 세워진 지 불과 7년 밖에 되지 않은 상황에서 어떻게 주류의 규범 체계로부터 그런 근본적인 이탈이 가능하였는지가 의문의 시작이었다. 왜 하필 그들이었으며, 다른 이들은 어떠했을까? 제사 금지령이 조선에 알려지게 된 경위는 어떤 것이었을까? 여러 가지 의문들이 꼬리를 물고 제기되었다. 이러한 의문들에 대해서 몇 가지 해결의 실마리를 추적하였다.

첫째는 이미 조선의 유교 지식인 사회에서는 예학의 규범 체계로부터 이탈하는 사유의 가능성이 마련되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점에 주목하였다. 그리하여 18세기 예학의 중앙 독점 경향과 향촌 사회에서의 역동성 쇠퇴, 양명학을 통한 새로운 사유의 훈련 등에서 그 징후를 찾아보고자 하였다. 둘째는 조선 천주교 내에서 제사 문제와 관련하여 어떤 움직임이 있었으며, 이에 대한 신자들의 반응을 추적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신자들의 행적 속에서 제사 문제에 대한 반응 양상들을 개별적으로 모두 도출할 수는 없었으며, 윤지충의 행적 그리고 그와 가까웠던 유항검, 약전 형제들의 언행 속에서 제사 금지를 결행할 수 있는 천주교 내부의 동향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앞으로 좀 더 보완되어야 할 문제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우선 윤지충의 공술 기록과 일기들에 등장하는 용어나 개념, 논리 전개 방식 등을 상세하게 분석하는 작업을 진행할 필요가 있다. 또한 천주교 내의 다른 인물들이 제사 금지를 거부한 경우에 그들의 논리도 분석 대상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유교 지식인들이 올린 각종 상소문들과 개인 문집에 실은 관련 내용들도 살펴보아야 할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실제로 윤지충과 권상연에게 적용된 법률 조항이 무엇이었는지, 이에 대해서 조정 내에서 아무런 이견이 없었는지, 그리고 구체적인 형 집행 과정에서는 어떤 문제가 발생하였는지 등도 따져보아야 하겠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 다 따져보고, 분석하고, 추측한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이성에 의해서 남김없이 다 밝혀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안다. 외적 환경과 내적 동기, 가능한 조건들, 다양한 개연성들을 다 검토해도 끝까지 남는 그 무엇이 있을 것이다. 왜 그들은 그러한 길을 걸어가야만 했을까?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러한 선택을 하도록 하였을까? 목숨마저 걸어야 하는 그 일을 후회없이 결행한 힘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천주교회는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을 이미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천주의 섭리가 그들에게 허락해준 용덕(勇德)일 것이리라.


토론요지

손숙경(동아대, 한국사)


조현범 선생님이 발표하신 「진산사건 다시 읽기」는 이미 잘 알려진 바와 같이 1791년에 발생한 진산사건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이 사건의 발생 배경과 원인을 규명하신 글로 생각됩니다. 이를 통해 진산사건이 일어나게 된 사회사상적 분위기와 초기 천주교회 동향의 일면을 볼 수 있었습니다. 천주교를 믿다 죽은 이들의 신앙적인 면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가 아직 부족한 점을 고려할 때 이 글은 진산사건을 통해 이들의 신앙적인 부분에 좀 더 초점을 맞춘 논문으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논의를 좀 더 진행시키자는 차원에서 덧붙여 생각해야 되는 부분에 관해 몇 가지만 말씀 드리겠습니다.

첫째, 이 글은 이야기체 방식으로 논문을 서술하고 있어 사건의 개요와 내용을 쉽게 이해하는데 도움을 줍니다. 그렇지만 이야기체 서술을 하더라도 이 글에 대한 문제제기가 반영되어야 내용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진산사건에 대한 기존의 연구는 무엇이며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데 이 논문에서는 어떤 면에서 진산사건을 다시 보고자 하는가에 대한 정확한 문제제기가 있으면 이 글에서 밝히고자 하는 목적이 좀 더 명확할 것 같습니다. 이에 덧붙여 이 글에서 밝히고자 하는 진산사건에 대한 다시 읽기는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을 해 주셨으면 합니다.

둘째, 이 글에서는 진산사건이 발생하게 된 원인을 당시 유교이데올로기와 연관하여 고찰하면서 이 시기 지역사회에서 사족 지배력이 쇠퇴하고 예교주의의 이념이 힘을 잃어가는 현상이므로 『주자가례』가 표방하는 의례적 규범에서 이탈이 가능하였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17세기 이후 『주자가례』는 절충과 변용을 거치면서 지역사회에까지 점점 더 확산되어 가고 있으며, 지역사회 사족들은 유교 이데올로기를 통해 지배력을 더욱 강화시켜 나가려고 하였습니다. 조선의 주자학자들은 오히려 『주자가례』에 만족하지 않고 주자가 꿈꾸었던 삼대(三代)의 회복을 위해 ‘고례(古禮)에로의 복귀’를 추구하여 완전한 유교 국가를 만들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또 다른 측면에서 이러한 사실을 고려해본다면 이 시기 유교이데올로기의 쇠퇴로 제사폐지와 신주를 불태우는 것이 가능하였다는 것은 다시 한 번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주자가례』와 관련한 유교 의례에 대한 기존의 또 다른 중요한 논의들을 검토해야만 진산사건이 발생한 사상사적 배경이 보다 분명해질 것 같습니다.

셋째, 진산사건이 발생한 의문을 풀기 위해 천주교회 내부의 움직임을 고찰하면서 윤지충이 천주교가 폐제분주를 감행한 이유가 유항검이 『성교절요』를 읽고 조상제사와 신주를 모시는 것을 금지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유항검과 윤지충은 이종사촌간이였으므로 윤지충도 이에 대해 충분히 깨달아 폐제분주를 감행할 수 있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선생님께서도 지적하셨지만 이 시기 이와 같은 천주교 교리를 알고 있었던 다른 신자들은 제사 문제와 관련하여 어떠한 태도를 견지하였는지에 대한 파악이 필요하다고 여겨집니다. 그래야만 초기 다른 천주교 신자들과는 달리 윤지충, 권상연이 폐제분주를 한 배경에 좀 더 설득력이 있을 것 같습니다.



답변 요지


먼저 핵심적인 부분만을 간략하게 추려서 잘 지적해주신 토론자 선생님께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토론자 선생님께서, 그리고 발표회장에 참석하신 여러 선생님들께서 지적하신 문제들에 대해서 저의 소견을 말씀드리겠습니다.

1. 문제의식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밝히라고 지적하셨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제가 글을 시작하면서 진산사건과 신해박해에 관한 기존 연구들을 충실히 정리하지 못해서 생긴 문제가 아닐까 합니다. 제가 가졌던 의문점들은 글의 본문에도 나와있듯이 윤지충, 권상연 두 사람이 어떤 계기를 통해서 폐제분주(廢祭焚主)를 단행하게 되었을까 하는 점이었습니다. 즉 진산사건이 발생한 것은 조선교회가 창설된 때로부터 7년이 흐른 시점이었습니다. 그리고 조선교회 내부에서 제사 문제를 둘러싸고 심각한 논의가 벌어진 적도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북경의 구베아 주교의 제사금령이 하달되자마자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불태우는 사건이 일어날 수 있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 경위를 세밀하게 추적하여 진산사건의 교회외적, 교회내적 배경을 밝히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2. 18세기 조선에서 성리학과 예교주의 이념이 쇠퇴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지적하셨습니다. 즉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불태우는 것이 가능하였던 사상사적 맥락을 찾으려고 한다면 『주자가례』와 관련한 또 다른 기존 논의들도 아울러 검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부분은 저의 독창적인 연구 결과가 아니라 다른 선생님의 논지를 끌어와서 이용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상반되는 주장이나 연구들도 함께 검토했어야 한다는 지적을 겸허하게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18세기 조선 사회를 어떻게 볼 것인가, 예교와 예치라는 지배 질서가 형해화하고 있었는가, 아니면 일반 민인들의 삶에까지 그 뿌리를 확장하고 있었는가 하는 문제는 아직 논란의 여지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토론자 선생님께서는 “[18세기 조선 사회에서] 예교주의 질서, 성리학적 세계관이 생각만큼 그렇게 강고한 시스템을 구축하지는 못했던 모양”이라는 저의 언급에 대해서 어떻게 보면 대단히 위험한 주장이 될 수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점에 관해서는 제 주장을 조금 더 견지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왜냐하면 숙종조의 여환 반란 이후로 영정조 시절에도 미륵 반란 사건이나 정감록 사건들이 매우 빈발하였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기존 질서에서 벗어나는 종교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지배계급에 저항하는 운동은 1860년 동학이 창도될 때까지 지속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사회의 중하층민들에게까지 성리학적 세계관이나 예교 내지 예치의 국가질서가 강력하게 영향력을 행사하였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나 생각합니다. 어쩌면 역사적 시기의 특정 국면을 해석할 때 지배층에 의하여 작성된 기록이 아닌, 피지배층 혹은 기존 지배 질서에 저항하고자 하였던 사람들의 목소리를 찾으려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진산사건을 적극적으로 읽어보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3. 윤지충, 권상연 외에 다른 주요 인물들의 입장도 파악해야 한다고 지적하셨습니다. 이에 관해서는 훌륭한 선행 연구들이 많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으며, 저도 글의 후반부에서 그 연구들을 인용하여 간략하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다만 제사금령 반대론과 찬성론 사이의 주요 쟁점과 논지, 그리고 그런 논의 속에서 검출할 수 있는 언술들을 분석하는 작업은 미처 시도하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이 방면의 연구를 더 기대해보아야 하겠습니다.

아울러 서종태 선생님께서는 “[윤지충이] 마재로 가서 약전, 약용 형제를 방문하고 그들을 통하여 천주교 사적들을 탐독한 후에 입교하였던 것 같다”는 저의 글귀에 대해서 도움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즉 명동성당 앞에 가면 윤지충의 선조였던 윤선도의 집터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뒤가 바로 정씨 형제들의 아버지가 한양에서 벼슬살이를 할 때 살던 집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윤지충은 마재로 가서 정씨 형제들을 만난 것이 아니라 윤씨 본가집에 갔다가 뒷집에 살던 정씨 형제를 만났을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이셨습니다. 미처 몰랐던 부분을 지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또한 한건 신부님께서는 윤지충이 어머니 상을 당해서 제사를 지내지 않고 신주를 만들지 않은 것은 어머니의 유언 때문이었다고 지적해주셨습니다. 제가 윤지충의 행적에만 초점을 맞추다보니 이 부분을 놓친 모양입니다. [발표를 마치고 돌아와서 확인해보니] 윤지충의 어머니도 천주교 신자였고, 자기 장례를 치를 때에 절대로 미신 행위나 우상 숭배 행위를 하지 말라고 당부하였다는 이야기는 북경의 구베아 주교가 사천 대목구장 디디에 주교에게 보낸 1797년 8월 15일자 서한에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이 서한이 유일한 출처입니다. 그런데 실록이나 기타 조선측 한문 자료에는 전혀 이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그리고 다블뤼 주교가 작성한 『주요 순교자 전기』와 『조선 순교자 역사 비망기』에도 그런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다블뤼 주교가 기록을 작성할 때 구베아 주교의 서한을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윤지충 어머니의 신앙심에 대해서는 한 마디로 하지 않은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앞으로 좀 더 연구해서 밝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댓글 0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