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을 열며(11/22)

2004. 11. 23. 오후 8:4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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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1월 22일 성녀 체칠리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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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요한 묵시록 14,1-3.4ㄴ-5
나 요한은 어린양이 시온 산 위에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어린양과 함께 십사만 사천 명이 서 있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양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적혀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큰 물 소리와도 같고 요란한 천둥 소리와도 같은 소리가 하늘로부터 울려 오는 것을 들었습니다. 또 그 소리는 거문고 타는 사람들의 거문고 소리처럼 들렸습니다.
그 십사만 사천 명은 옥좌와 네 생물과 원로들 앞에서 새로운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노래는 땅으로부터 구출된 십사만 사천 명 외에는 아무도 배울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어린양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다닙니다. 그들은 사람들 가운데서 구출되어 하느님과 어린양에게 바쳐진 첫 열매입니다. 그들의 입에서는 거짓말을 찾아볼 수 없으며, 그들은 아무런 흠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복음 루가 21,1-4
그때에 예수께서 부자들이 와서 헌금궤에 돈을 넣는 것을 보고 계셨는데 마침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작은 동전 두 닢을 넣는 것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이 가난한 과부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은 돈을 넣었다. 저 사람들은 모두 넉넉한 데서 얼마씩을 예물로 바쳤지만 이 과부는 구차하면서도 가진 것을 전부 바친 것이다."





어느 시골 마을에 아주 인색한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가 큰 병에 걸려 본당신부로부터 병자성사를 받으면서 말했지요.

“신부님, 저는 좀 더 살고 싶습니다. 만일 신부님이 하느님께 기도해서 저를 살려주신다면, 성당건립비 삼천만 원을 기부하겠습니다. 신부님, 불쌍한 저를 위해 꼭 기도해 주십시오.”

얼마 뒤 이 분이 기적적으로 나았습니다. 하지만 병자성사 때의 약속을 잊은 듯 성당도 가지 않고, 더군다나 본당신부를 만나려 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했나요? 그 분과 본당신부님이 길거리에서 맞부딪치게 된 것입니다. 본당신부님께서는 말했지요.

“이렇게 건강한 모습을 보니 참 반갑습니다. 하느님께서 특별한 은총을 베푸신 겁니다. 형제님, 이제 병자성사 때 약속하신 기부금을 내셔야죠?”

본당신부의 독촉을 받은 이 분은 멋쩍은 듯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하네요.

“신부님, 요즘도 저는 큰 병을 앓고 있습니다. 삼천만 원 때문에 잠을 통 못 자고 말라죽을 지경이 되었지요! 새 병이 생겼으니, 그 약속은 아직 못 지키겠습니다.”

화장실에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다고 하지요. 아마 이 분께서도 그런 것이 아닌가 싶네요. 하지만 우리들의 모습도 여기에 예외는 아닌 것 같습니다. 물론 저도 마찬가지이지요. 내게 어떤 어려운 문제가 생기게 되면 정말로 절박하게 기도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간이라도 떼어 줄 것처럼 이야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그 문제의 해결을 보게 되면 자신이 가졌던 생각은 완전히 잊고 말지요.

사실 제게도 이런 부탁을 하신 분들을 많이 만났지요.

“신부님, 이번 소송에서 제가 이기도록 기도해주십시오. 사실 저는 돈에 욕심 없습니다. 따라서 이번 소송에서 이기기만 하면 그 중의 절반을 교회에 봉헌하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있는 곳이 아닌 다른 곳에 남모르게 봉헌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소송에 이겼다는 소식은 들려도 봉헌했다는 이야기는 듣기가 힘들더군요.

오늘 복음에서는 가난한 과부가 헌금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가난한 과부가 봉헌한 작은 동전 두 닢은 돈 많은 사람들에게 적은 돈임에 분명하지요. 그러나 이 가난한 과부가 봉헌한 동전은 자신의 전 재산을 바칩니다. 따라서 이 봉헌을 함으로써 한 끼를 굶어야 하는 상황에 놓일 수도 있었던 것이지요. 왜 이런 모습을 보였을까요? 바로 하느님의 은혜를 알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알고 있기에 다른 사람의 눈으로는 어리석게 보여도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반면에 돈 많은 부자들은 정성을 다한 봉헌이 아니었지요. 남의 눈치만을 보는 봉헌이었고, 마지못해 하는 봉헌이었습니다. 따라서 그 액수가 과부보다 많다 하더라도 하느님께서는 결코 기뻐하지 않는다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지금 우리들은 주님께 어떤 봉헌을 하고 있나요? 그리고 나의 봉헌을 그 가난한 과부의 봉헌처럼 주님께서 기쁘게 받아들이실 지를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마음에 없는 약속은 하지 맙시다.



하느님을 기쁘시게

한 우화에 의하면 어느 날 아버지와 아들이 당나귀를 끌고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가다가 길에서 만난 한 사람이 둘이서 타고 갈 수 있는 당나귀를 옆에 두고 걸어가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냐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아버지와 아들이 나귀 등에 탔습니다.

그런데 멀리 가지 않아 두 번째로 만난 사람은 나귀를 타고 있는 그 두 사람을 비난했습니다. 그 이유는 나귀에게 너무나 무거울 뿐만 아니라 비인간적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아들이 나귀에서 내렸습니다.

조금 더 가다가 세 번째 만난 사람은 아버지는 나귀를 타고 아들을 걷게 한다는 것은 지각이 부족하다고 아버지를 꾸짖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아버지가 내리고 대신 아들이 나귀등에 탔습니다.

곧 이어 네 번째 사람을 만났는데 그는 아들이 자기보다 더 나이 많은 아버지를 위할 줄도 모른다고 아들을 책망했습니다.

결국 마지막에는 두 사람이 당나귀를 짊어지고 지친 걸음으로 터벅터벅 걷게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만일 남의 의견에 대해 지나치게 예민하면 불필요한 죄의식과 좌절감을 갖게 됩니다. 우리가 비록 다른 사람들이 인정해 주는 것을 고맙게 생각하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려고 노력은 하지만 궁극적으로 책임을 추궁할 분은 이런 사람들이 아니고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다른 이들의 시선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한 노력을 끊임없이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다른 사람이 희롱이나 비웃음으로 말하는 것에 상관하지 아니하고 하느님께서 "잘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기쁘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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