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11/17)

2004. 11. 13. 오후 11:41:20

글자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 (2004-11-17)
독서 : 묵시 4,1-11 또는 1요한 3,14-18 복음 : 루가 19,11-28 또는 루가 6,27-38

믿음

그때에 사람들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신 것을 보고 하느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비유 하나를 들려주셨다. “한 귀족이 왕위를 받아오려고 먼길을 떠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종 열 사람을 불러 금화 한 개씩을 나누어주면서 ‘내가 돌아올 때까지 이 돈을 가지고 장사를 해보아라'하고 일렀다. 그런데 그의 백성들은 그를 미워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의 대표를 뒤따라 보내어 ‘우리는 그자가 우리 왕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하고 진정하게 하였다. 그 귀족은 왕위를 받아가지고 돌아오자마자 돈을 맡겼던 종들을 불러서 그동안에 돈을 얼마씩이나 벌었는지를 따져보았다. 첫째 종이 와서 ‘주인님, 주인님이 주신 금화 하나를 열 개로 늘렸습니다’ 하고 말하자 주인은 ‘잘했다. 너는 착한 종이로구나. 네가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을 다했으니 나는 너에게 열 고을을 다스리게 하겠다’ 하며 칭찬하였다. 둘째 종이 와서 ‘주인님, 주인님이 주신 금화 하나로 금화 다섯을 벌었습니다’ 하고 말하자 주인은 ‘너에게는 다섯 고을을 맡기겠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 다음에 온 종의 말은 이러하였다. ‘주인님, 주인님이 주신 금화가 여기 그대로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수건에 싸두었습니다. 주인님은 지독한 분이라 맡기지도 않은 것을 찾아가고 심지도 않은 데서 거두시기에 저는 무서워서 이렇게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주인은 ‘이 몹쓸 종아, 나는 바로 네 입에서 나온 말로 너를 벌주겠다. 내가 맡기지도 않은 것을 찾아가고 심지도 않은 것을 거두는 지독한 사람으로 알고 있었단 말이지? 그렇다면 너는 왜 내 돈을 돈 쓰는 사람에게 꾸어주지 않았느냐? 그랬으면 내가 돌아와서 이자까지 붙여서 원금을 돌려받을 수 있지 않았겠느냐?’ 하며 호통을 친 다음 그 자리에 서 있던 사람들에게 ‘저자에게서 금화를 빼앗아 금화 열 개를 가진 사람에게 주어라’ 하고 일렀다. 사람들이 ‘주인님, 그 사람은 금화를 열 개나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하고 말하자 주인은 ‘잘 들어라. 누구든지 있는 사람은 더 받겠고 없는 사람은 있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그리고 내가 왕이 되는 것을 반대하던 내 원수들은 여기 끌어내다가 내 앞에서 죽여라’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앞장서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길을 떠나셨다.
(루가 19,11-­28)
◆병원의 환자들을 방문하던 중이었다. 7년 동안 혼수상태에 빠져 의식조차 없는 할아버지를 간호하는 할머니가 계셨다. 처음에는 본당 신자들이 종종 찾아오기도 했지만 점점 관심은 줄어들고 결국 아무도 찾아오지 않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자식 없이 두 내외가 살던 집이 사기를 당해 남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고 할머니는 가재도구를 챙겨 할아버지 침상 옆에서 새우잠을 자며 병원을 살림집 삼아 지내야 했다. 홀로 할아버지의 병상을 지키며 귓가에서 성서를 읽어드리곤 한다는 할머니에게 그만큼 돌보아 드렸으면 이제 하느님 품으로 돌려드리고 할머니도 좀 편히 쉬시라고 함께 갔던 자매님들이 말을 건넸다. 할머니는 정색을 하며 부부란 서로 믿고 함께 인생의 길을 걷기로 약속한 사람들인데 한 사람이 걸음이 느려 제대로 쫓아오지 못한다고 어떻게 나 혼자 휘적휘적 가버릴 수 있느냐고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순간 둘러서 있던 이들은 모두 숙연해졌다. 병실을 나오며 몇몇 자매님은 “난 십년 가까이 저렇게는 못할 것 같아”라고 말하였다. 그것이 솔직한 마음이겠지만 부부간의 믿음·약속·신뢰뿐만 아니라 수도자로서, 사제로서 내가 드린 약속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할머니의 신뢰와 부부에 대한 믿음은 할아버지의 말없는 현존을 통해 더욱 깊어지는 듯했다.
믿음은 일방적일 수 없다. 너를 믿고 나를 내놓을 수 있기에 너의 믿음을 요구할 수 있는 것이다. 믿음은 나 자신을 온통 내놓는 것이며 내 존재 전체를 건 선택이다. 하느님도 당신의 모든 것을 걸고 우리를 믿으신다. 미사 중에 사제의 손에 당신을 내맡기시고 영성체를 통해 우리의 좁디좁은 가슴에 당신을 맡기신다. 마치 종에게 금화를 맡기고 먼길을 떠나는 주인처럼 말이다. 나를 믿고 내 손에 당신의 사랑과 용서와 자비를 온전히 맡기시는 하느님께 나는 오늘 몇 개의 금화를 바쳐드렸는가?

이정호 신부(구속주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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