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3주간 토요일 (2004-11-20)

2004. 11. 13. 오후 11:5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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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2004-11-20)
독서 : 묵시 11,4-12 복음 : 루가 20,27-40

비유의 인생

그때에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파 사람들 몇이 예수께 와서 물었다. “선생님, 모세가 우리에게 정해준 법에는 형이 결혼했다가 자녀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여 자식을 낳아 형의 대를 이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칠 형제가 살고 있었습니다. 첫째가 아내를 얻어 살다가 자식 없이 죽어서 둘째가 형수와 살고 다음에 셋째가 또 형수와 살고 이렇게 하여 일곱 형제가 다 형수를 데리고 살았는데 모두 자식 없이 죽었습니다. 나중에 그 여자도 죽었습니다. 이렇게 칠 형제가 다 그 여자를 아내로 삼았었으니 부활 때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가지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 저 세상에서 살 자격을 얻은 사람들은 장가드는 일도 없고 시집가는 일도 없다. 그들은 천사들과 같아서 죽는 일도 없다. 또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모세도 가시덤불 이야기에서 주님을 가리켜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고 불렀다. 이것으로 모세는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죽은 자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의 하느님이시라는 뜻이다. 하느님 앞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살아 있는 것이다.” 이 말씀을 듣고 있던 율법학자 몇 사람은 “선생님, 옳은 말씀입니다” 하였고 감히 그 이상 더 묻는 사람이 없었다.
(루가 20,27-­40)
◆요즘 귀가 잘 안 들린다. 병원에 가 봤지만 특별한 이유없이 청력이 떨어지고 있단다. 그래서 가끔 사람들의 오해를 사기도 하고 우스운 일들이 벌어지기도 한다. 말소리는 어느 정도 들리기 때문에 내가 생각하는 대로 이것이겠거니 하고 알아듣는다. 그야말로 불 가져오라면 물 가져가는 식이다. 우리는 무엇인가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체험과 기억을 총동원해서 이리저리 조합해 보기도 하고, 어떤 이미지를 기억 속에서 끄집어내기도 한다. 결국 내가 가진 것을 통해서 모르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아는 것을 통해서만 알게 된다. 그만큼 한계와 오류의 위험을 안고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와 부활을 결혼이라는 일상생활의 체험을 통해 이해하려고 한다. 우리의 일상을 통해 예견되는 결과를 보고 하느님의 놀라운 신비를 단정지으려고 한다. 조금이나마 하느님의 신비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 기억과 체험이 도움이 되긴 하겠지만 결코 그것이 하느님을 모두 설명해 주지는 못한다. 우리가 알고 만나는 하느님은 늘 한편에 여백을 가지고 계신다. 그러나 현실 안에 ‘깃들어 있고’, ‘배어 있는’ 하느님의 신비 가운데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에 대한 사랑이다. 현실에서나 죽음 이후에도 변함없고 끊임없는 하느님의 사랑을 분명하게 확신시켜 주는 것이 바로 우리가 믿는 부활이요, 부활을 통해 살아 있는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다. 우리의 인생은 하느님 사랑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살아가는 비유다. 탄생에서부터 죽음에까지, 아니 그후에도 우리가 겪는 기쁨과 슬픔, 즐거움과 환희, 고통과 괴로움의 경험을 통해 하느님은 당신 사랑을 비춰 보이신다. 죽음을 넘어서는 영원한 사랑을 조금이나마 배우기 위해 오늘도 비유의 삶을 산다.

이정호 신부(구속주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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