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끔 루르본당의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신부님의 강론을 읽는다. 오늘 마침 함께 생각해보고 싶게하는 강론을 올리셨기에..
<연중 제15주간 화요일>
<값, 사랑>
덥습니다. 내일은 또 다시 더워진답니다. 마음은 여유롭게 가지시기 바랍니다. 적도로부터 북위 15도에 위치한 까닭에 연평균 기온이 거의 30도에 육박하는 남태평양의 작은 섬 싸이판에서 휴가차 오신 계만수 안토니오 신부님께서도 인정하실 만큼의, 독일의 치명적인 더위입니다.
에어콘 하나 없이 살아왔던 독일 사람들에게 유독 이번 여름의 더위가 잔인하게 느껴지는 것은 다름 아닙니다. 원래 독일의 여름은 한 몇일 반짝 덥다가 금방 선선해지는, 별로 덥지 않은 계절이라는 그간의 경험과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믿음은 120년 만에 찾아왔다던 계절의 배신 앞에 산산이 무너졌고 그 덕분에 사람들은 더 당황해하며 뒤늦게 Satun으로 몰려가 선풍기라도 하나 사보려 하지만 이미 Essen Satun에 선풍기는 매진된지 오래라고 하네요.
믿었기 때문에 배신이 더 아픈 것이고, 사랑했기 때문에 상처는 더 쓰라린 법이지요.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자식도 그렇습니다. 자식 열 놈이 있으면 맨날 사고나 치고 속 끓이던 녀석이 치명적인 상처를 주진 않습니다. 원래 그런 놈이니까, 하지만 어릴 때부터 말 잘 듣고 사랑을 독차지 하던 녀석이 어느 날 부모의 간을 휘떡 뒤집어 놓으면 부모는 정신을 못 차립니다.
얼마 전 한국에서는 그런 희안한 소송이 있었답니다. 부부가 자식을 금이야 옥이야 길렀습니다. 근 10년을 외국 유학까지 다 마치게해주고 장가든다 할 때도 집도 다 마련해주었습니다. 그렇게 자란 자식 놈은 외국계 회사의 간부로 승승장구를 하니 마치 그것이 부모의 보람이라도 된 듯 뿌듯했는데, 이 녀석이 언제부턴가 부모와 의절을 운운하고 안면 몰수를 하더라는 것이지요. 어미가 찾아가도 문전 박대하기를 예사로 삼던 자식이 제 어미 죽은 장례식장에서는 그간 마치 대단한 효자 노릇이라도 한듯 행세하는 위선에 치를 떤 아버지가 소송을 건 것입니다.
그간 부모로서 자식에게 해준 유학비용과 결혼 때 해준 주택 자금 일체, 6억인가? 7억인가? 반환하라고, 그리고 당신이 죽을 때 아들로서의 모든 상속권을 박탈시켜달라고 말이지요.
사랑했기 때문에, 그리고 그 사랑이 나의 자긍심이었기 때문에 배신은 더 아팠을 것이고 상처는 더 깊었을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자기를 사랑했는데...입니다. 이별할 때도 그것이 가장 서럽고 가장 아프게 합니다. 한 사람과 헤어진다는 것이 서러운 것이 아니라 어쩌면 내가 그 사랑에게 했던 모든 세월들이 나를 더 아프고 모질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 때문에, 더 이상 사랑이 통하지 않고 떠나가려할 때 더 독한 말, 모진 말들을 쏟아내게 만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코라진과 벳사이다, 그리고 가파르나움 세 마을을 향해 독설을 퍼부으십니다. 예수의 마을로도 불리는 이 세 동네는 어부 출신 제자들의 고향이기도 했고, 예수님께서 가장 많은 기적들을 베푸신 동네이기도 했습니다. 베드로의 집이 있던 가파르나움에서는 무수한 병자들 뿐 아니라 베드로의 장모를 치유하신 동네였고, 필립보의 고향 마을이었던 벳사이다에서는 못에서 38년이나 신음하던 병자를 고치시고 무엇보다도 5,000명을 먹이신 동네이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일방적인 사랑을 즐겼을런지는 몰라도 그 사랑 때문에 회개하지는 않았습니다. 이것이 죄이자, 이것이 예수님에게는 상처요 배신이었던 것입니다.
사랑을 받았으나 사랑받지 않은 자처럼 삽니다. 이것이 죄입니다. 사랑을 받았으나 제 잘남으로 삽니다. 이것이 죄입니다.
바룩서에 이런 뼈저린 고백이 나옵니다. “주님께서 우리 조상들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신 날부터 이날까지 우리는 주 우리 하느님을 거역하고, 그분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을 예사로 여겼습니다. 사실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신 예언자들의 온갖 말씀을 거슬러, 주 우리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다른 신들을 섬기고 주 우리 하느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지르며, 저마다 저 악한 마음에서 나오는 생각대로 살아왔습니다.”(바룩 1,19-22)
사랑에 대한 가장 아픈 통감은 바로 사랑의 깊이를 깨닫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에 맞갖는 보답과 보람을 회개로서 사는 일입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세상 다른 것에는 다 값을 매기고 다 보상을 치르려하면서도 유독 사랑만은 공짜인 줄 압니다.
아닙니다. 사랑에도 값이 있습니다. <사랑값>입니다. 세상 모든 값은 돈이면 다 그 가치를 매기고 치르고 갚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값>만은 돈으로 치를 수가 없습니다. <사랑값>은 오로지 사랑으로만 매기고 사랑으로만 치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값 계산의 첫 시작은 사랑을 깨닫는 일입니다. 그분이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은 지금 나에게 있습니다. 나는 다만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다시금 그분의 사랑으로 다른 이들에게 값을 치룰 뿐입니다. 그것이 회개고, 기도이고, 선행입니다.
무서워서 회개하고 의무니까 미사하고 신자니까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것을 해야 합니다. 그 때 비로소 우리는 사랑값을 제대로 치르는 사람이 됩니다. 기도는 많이 하고, 미사도 많이 하고, 활동도 많이 하는데 사랑을 하지 않습니다. 회개도 하지 않고 용서도 하지 않습니다. 값을 잘못 계산 한 것입니다. 받았기에 값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깃든 그분의 사랑을 깨달았기에 나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저는 부디 여러분들이 사랑 때문에 부디 사랑하시기를, 그리고 사랑 때문에 기도하시기를, 그리고 마지막 오로지 사랑 때문에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그 어떤 보답을 누린다한들 결코 만족할 줄 모르게 될 것입니다.
문득 아들에게 소송을 걸었다는 한국의 영감님이 생각이 납니다. 자식에게 승소를 해서 6,7억을 받았다 한들 과연 속이 후련해 질 수 있을까? 또 자식은 그 돈만큼 돌려드리면 이제 완전히 관계가 끝났다 속이 시원해질 수 있을까?
사랑으로 채워야 할 자리, 거기에 엉뚱한 것이 들어앉아 있을 때, 그 때부터 이 세상의 길이 탁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멘 |
루르본당 조영만신부님 강론 (사랑의 값)
2010. 7. 14. 오후 8:34:09
글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