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필요합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말합니다. "거기 물 좀 갔다도고..." 모진 아내에게 걸리면 혼납니다. "니는 손이 없나, 발이 없나. 니가 떠다 무라."
남편은 겨우 물 한 잔을 거절당했을 뿐인데도, 묘하게 서럽습니다. "이제 저게 내가 늙었다고 괄시하나, 물 한 잔 갇다 주면 손이 닳나 발이 닳나?" 꽁 해집니다.
나이를 먹을 수록 여자는 드세어지고 남자는 잘 삐진다지요. 젊었을 때는 남자가 집에 있는 것이 좋습니다. 가정적이라고 하고 모범 가장이라고도 합니다. 하지만 나이를 먹으면 자꾸만 집에서 잔소리하고 삼시 밥 다 챙겨 달라 하면 '간 큰 남자'라 합니다. 그리고는 "니는 손이 없나, 발이 없나?" 소리가 튀어나옵니다.
남자는 반대입니다. 젊어서는 아내가 집에 없는 것이 '해방'입니다. 친구도 만나고 놀 것도 많습니다. 하지만 나이를 먹고서는 아내가 없으면 불편합니다. 마누라가 집에 있다고 짜다리 뭘 더 해주는 것도 없으면서도 내 눈 앞에 얼쩡거리기를 원합니다. 그러면서 툭 하면 괜히 "손이 닳나? 발이 닳나?" 작은 걸로 또 삐집니다.
겨우 물 한 잔입니다. 그런데도 그걸로 무지하게 토라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하고도 마찬가집니다. 하느님도 우리에게 큰 것을 요구하시지 않으십니다. 사랑하길 원하시고 용서하길 원하시고 봉사하길 원하십니다. 이것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느님께 이렇게 말하지요.
"당신은 손이 없습니까? 발이 없습니까? 왜 나에게 그걸 시키십니까?"하고 말입니다.
사랑은 합니다. 그러나 사랑 때문에 내가 불편해지는 것은 싫습니다.
용서는 합니다. 그러나 용서 때문에 내 자존심이 상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봉사는 합니다. 그러나 내가 순명할 수 있을 때까지만 합니다.
순명할 수 없는 봉사는 거절합니다.
그러니 봉사도 결국 내 뜻을 내 방식대로 이루는 일에 불과하고 맙니다.
진짜 어려운 것은, 순명할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진짜 어려운 것은,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하는 일이고,
진짜 어려운 것은,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일입니다.
이것만이 나를 성장시킵니다. 그것만이 나를 크게 만듭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닙니까? 하지만 그분은 언제나 내가 할 수 없다고, 나는 안된다고, 나는 못한다는 것을 요청하셨던 분입니다.
저만 봐도 그렇습니다. 저는 사제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말 안 통하는 곳에는 못 산다, 한국을 떠나 사목생활을 할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분이 요청하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아직 사제로, 그것도 독일에서 뻔뻔하게 살고 있습니다.
꾸르실료에서 받은 가르침이 무엇입니까? 이상을 가지고 사랑을 실천하며 순명하는 일 아니었습니까? 왜 이것들을 배웠습니까? 한 가지의 목적 뿐입니다.
"그리스도는 당신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지체로 살기 위해서였습니다.
아시다시피 그리스도는 손과 발이 없으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에게 손과 발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침묵하는 벙어리이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에게 온전히 당신의 말씀을 전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손이 될 때, 우리는 그분의 지체 곧, 그분과 하나됩니다.
우리가 그분의 발이 될 때, 우리는 그분의 지체 곧, 그분과 하나됩니다.
우리가 그분의 입이 될 때, 우리는 그분의 지체 곧, 그분과 하나됩니다.
우리가 그분과 하나 될 때, 비로소 우리는 그분을 우리의 변호인으로 만날 것입니다.
먼 세월을 돌아 나를 닮아 있는 사람들이라며, 그분이 우리를 먼저 찾아오실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일>을 하십시오. 그리고 '이상'과 '사랑'과 '순명'을 실천하십시오. 그렇게 그리스도의 지체 되는 일에 내가 망설이지 않는다면, 꾸르실료 영성을 통한 우리의 구원은 우리 모두에게 선물로 다가올 것입니다.
본당 신부가 본당의 이런저런 봉사직을 요청하지요? 그럼 "하느님은 손이 없습니까? 발이 없습니까?"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내가 그의 지체가 되는 것을 기뻐해주시기 바랍니다. 이 기쁨이 없다면, 우리가 배운 꾸르실료는 아직 우리에게 완성되지 못한 것입니다.
가슴 속에 하느님이라는 이상을 간직하기 위하여,
손과 발에 사랑이라는 실천을 살아가기 위하여,
허리 깊숙이 순명이라는 당신 뜻을 섬기기 위하여,
꾸르실료를 받은 것임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언제나 그리스도의 지체인 본당 공동체를 먼저 생각해주시는 루르 한인 성당 꾸르실리스타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