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부활에 대한 묵상 ---이제민 신부

2010. 4. 9. 오후 6:38:11

글자

   
 
 

부활은 시공의 현세 생명으로 되돌아오는 것이 아니다.

죽음은 취소되지 않고 극복될 뿐이다.

전혀 다른 영원 불멸의 ‘천상’ 생명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부활은 시공이 존재하는 현세 생명의 연장도 아니다.

오히려 시공의 차원을 해체하는 새로운 생명, 볼 수 없고 파악할 수 없는

하느님 영역 안의 새로운 생명을 뜻한다.

예수의 부활이 적극적으로 의미하는 것은 그분이 허무 속으로 죽어간 것이 아니라,

죽음 안에서 그리고 죽음을 통해 우리가 하느님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을 감싸안는 처음이자 마지막인 저 포착할 수 없는 실재 안으로 죽어갔으며, 또한 가장 실제적인 실재에 의해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다.

 

인간이 자기 결정적 종말에 이르렀을 때 거기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허무가 아니라 저 모든 것, 바로 하느님이다. 예수 부활 이래 죽음은 하느님께 이르는 통로이며, 온갖 표상을 초월하여 일찍이 아무도 보지 못했으며 우리의 욕구·이해력·성찰·공상을 멀리 벗어나는 하느님의 신비 안으로 찾아듦이다.(큉)

이 찾아듦은 하느님의 영역 안에서 실제로 일어났다. 부활이 의미하는 것은 새로운 생명은 오직 하느님의 일, 더 정확히 말해 하느님의 선물, 곧 은총이라는 것이다.

예수의 부활은 그분을 죽게 한 십자가를 떠나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최종적으로 일깨워 주고 이를 통해 인생에 신뢰와 사랑을 일깨워 준 십자가가 부활이다. 부활은 십자가의 승리를 선포한 사건이다. 십자가의 그 처절한 모습은 그냥 처절한 모습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사랑 자체를 체험하게 하는 거룩한 얼굴이다. 그 모습은 겉보기와는 달리 완전히 다른 존재 양식이다. 이는 마치 애벌레에서 벗어난 나비와 같은 존재 양상의 삶이다. “동일한 생명체가 낡은 존재양식(애벌레)을 벗어버리고 생각조가 할 수 없었던 새로운 존재양식, 완전히 해방된 공기처럼 가벼운 존재양식(나비)을 취하듯, 하느님에 따른 우리 존재의 변화 과정도 그런 식으로 표상할 수 있을 것이다.”(큉)

우리는 예수께서 우리를 죽음의 권세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하느님 아버지를 신뢰하며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이신 그 복음을 믿는다. 예수께서 죽음의 나라로 내려가신 것은 우리 인간이 두려움과 무의미라는 나락에 함몰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살아 있는 자비다. 그분은 우리 인간의 죽음을 부활의 희망으로 바꾸어 주신다. 바오로는 이를 체험하였다. “마지막으로 물리치실 원수는 죽음입니다.… 나는 날마다 죽음의 위험을 당하고 있습니다.… 죽음아, 네 승리는 어디 갔느냐? 죽음아, 네 독침은 어디 있느냐?”(1코린 15, 26.3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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