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04월 12일 일요일
[부활 제2주일]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요한20,19-31)
제1독서<신자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사도.2,42-47
형제들은 42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43 그리고 사도들을 통하여 많은 이적과 표징이 일어나므로 사람들은 저마다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44 신자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45 그리고 재산과 재물을 팔아 모든 사람에게 저마다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곤 하였다.
46 그들은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이 집 저 집에서 빵을 떼어 나누었으며, 즐겁고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고,
47 하느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었다. 주님께서는 날마다 그들의 모임에 구원받을 이들을 보태어 주셨다.
<화답송>시편118,2-4.13-15ㄱㄴ.22-24(◎1) ◎ 주님은 좋으신 분, 찬송하여라.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 이스라엘은 말하여라.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아론의 집안은 말하여라.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주님을 경외하는 이는 말하여라.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
○ 나를 밀치고 밀쳐 쓰러뜨리려 해도, 주님은 나를 도와주셨네. 주님은 나의 힘, 나의 노래. 나에게 구원이 되어 주셨네. 의인들의 천막에서 울려 퍼지는 기쁨과 구원의 환호 소리. ◎
○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주님이 이루신 일, 우리 눈에는 놀랍기만 하네. 이날은 주님이 마련하신 날, 이날을 기뻐하며 즐거워하세. ◎
제2독서<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우리에게 생생한 희망을 주셨습니다.>(1베드1,3-9)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 찬미받으시기를 빕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크신 자비로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시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4 우리에게 생생한 희망을 주셨고, 또한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시들지 않는 상속 재산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 상속 재산은 여러분을 위하여 하늘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5 여러분은 마지막 때에 나타날 준비가 되어 있는 구원을 얻도록, 여러분의 믿음을 통하여 하느님의 힘으로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6 그러니 즐거워하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얼마 동안은 갖가지 시련을 겪으며 슬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7 그러나 그것은 불로 단련을 받고도 결국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훨씬 값진 여러분의 믿음의 순수성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밝혀져, 여러분이 찬양과 영광과 영예를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8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지만 그분을 사랑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그분을 보지 못하면서도 그분을 믿기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 속에서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9 여러분의 믿음의 목적인 영혼의 구원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여드레 뒤에 예수님께서 오셨다.>(요한20,19-31)
19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20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21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22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24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25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26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28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29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30 예수님께서는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많은 표징도 제자들 앞에서 일으키셨다.
31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부활 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 제1독서(사도2,42-47)
"형제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사도2,42)
사도행전 2장 42절의 '전념하였다'에 해당하는 '프로스카르테룬테스' (proskarteruntes)의 원형 '프로스카르테레오'(proskartereo)는 '힘입게 집착하다'라는 의미이다.
여기서는 현재 분사형으로 사용되었으며, 미완료 과거 동사 '에산'(esan)과 서로 관련되어 쓰여서 계속하여 힘썼음이 강조되고 있다.
말하자면, '(그들은) 계속해서 전념하고 있었다(They were continually devoting themselves)'는 뜻이다.
원문에서 '에산 데 프로스카르테룬테스'(esan de proskarteruntes)가 사도행전 2장 42절의 제일 앞에 쓰여서,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기도하는 일' 네 가지 모두를 포함하는 것으로 나온다.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사도행전 2장 42절부터 47절 까지는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시작된 예루살렘 초대 교회의 특징적인 모습을 간략하게 전하고 있다.
그리고 이 공동체는 예수님을 따르는 강력한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었는데, 바로 사도들의 가르침이 중심이 된 공동체였다.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에 해당하는 '테 디다케 톤 아포스톨론' (te didache ton apostollon; to the teaching of the apostles)에서 '사도들'은 복수형이고,'가르침'(디다케)은 '단수형'이다.
이것은 베드로의 설교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믿게 된 수천 명의 제자들에게 열두 사도 모두가 가르쳤음을 보여 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사도들의 가르침은 한 가지였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왜냐하면, 사도들이 자신들의 생각이나 개인적인 철학을 가르친 것이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영적, 그분의 생애와 구원 사업, 즉 복음만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바로 사도들이 가르친 내용은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가르쳐 주셨던 내용(마태28,20)과 예수님의 생애를 기본으로 한다 (사도3,15; 4,10; 1코린15,1~4).
교회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은 것은(1테살4,1.2) 하느님께로부터 온 권위에 입각한 것으로 이것은 교회를 교회이게 하고 교회답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원문은 '카이 테 코이노니아 테 클라세이 투 아르투' (kai te koinonia te kllasei tu artu)인데, 초대 교회의 두번째 특징적인 모습은 '사도들의 가르침'에 이어서 '성도들의 친교'(to the communal life)이다.
초대 교회에서 '성도들의 친교'는 정신적인 친교일 뿐 아니라 물질적인 친교이기도 하다.
'친교'에 해당하는 '코이노니아'(koinonia; fellowship)는 신약 성경에서 '사귀다'(2코린6,14)로 번역되거나 '헌금'의 의미로 '동정하다','자기의 것을 나누어 주다'(로마15,26)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교회를 구성한 공동체의 성도들은 같은 믿음 안에서 서로 영적인 친교를 나누었을 뿐만 아니라 물질적으로 서로 도왔던 것이다.
'빵을 떼어 나누고'
그 다음 초대 교회의 특징적인 모습은 '성찬'이다. 여기서 '빵을 떼어 나누고'에 해당하는 '테 클라세이 투 아르투' (fractio panis; to the breaking of bread)는 단순한 식사가 아니다.
초대 교회에서는 성도들이 모이면 아가페 형식의 기본적인 식사를 하고, 그 다음 주님의 가르침에 따라 성찬의 의식을 하였다.
먼저 아가페 형식의 식사를 한 것은 공동체의 형제들 가운데 가난해서 식사를 제대로 할 수 없는 지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빵을 떼어 나누었으며'라는 표현은 성찬의 전례의식, 곧 성체성사를 나타내는 용어이다(마태26,26; 마르코14,22; 루카22,19; 1코린11,23.24).
초대 교회 성도들은 모일 때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성찬의 전례 즉 성체성사를 거행하였던 것이다.
'기도하는 일에'
원문은 '카이 타이스 프로슈카이스'(kai tais proseuchais; and to the prayers)인데,초대 교회의 네번째 특징은 '기도'였다.
초대 교회가 역동성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기도가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기도의 권면에 따라(마태7,7; 26,41; 루카18,1; 요한16,24) 기도에 힘썼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사도행전에 기도에 대한 기록이 너무나 풍부하다는 데서 잘 보여준다(사도4,24; 12,5.12; 21,5).
[부활 제2주일](하느님의 자비 주일)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부활 제2주일의 복음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 여드레 뒤에 일어난 일을 전함으로써 팔일 축제의 끝을 알립니다.
매우 중요한 신학적 내용들이 함축되어 있기에, 짧게 요약하여 보겠습니다.
첫째는, ‘평화’입니다.
여전히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던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인사하십니다.
‘샬롬 알레이켐’은 유다인들의 일상적 인사이지만, 특별히 이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라는 표현과 함께 세 번(완전함을 상징) 되풀이됨으로써, 이 평화는 예수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실 때에만 주어짐을 강조합니다.
둘째는, ‘새 창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숨을 불어넣으며 …… ‘성령을 받아라.’”라고 하십니다.
평화(‘샬롬’)는 세상의 창조 때, 죄로 손상되기 이전 완전하고 충만하였던 상태를 말하며, ‘숨을 불어넣으시는 행위’는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를 ‘새로운 창조’로 이끈다는 것을 분명히 하여 줍니다.
셋째는, ‘상처’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보여 주신 것은 상처였습니다.
부활은 십자가와 필수적으로 연결된 현실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토마스가 예수님의 상처를 확인하기를 요구합니다.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
그러한 토마스를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다시 제자들을 찾아오시고 토마스에게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라고 하십니다.
넷째는, ‘1인칭적 고백’입니다.
예수님과 토마스의 대화에는 1인칭(나, 내)과 2인칭(너, 네) 대명사가 되풀이되는데, 부활은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한 토마스처럼 1인칭적 체험으로 고백되는 사건임을 드러냅니다.
마지막으로, ‘자비’입니다.
1인칭적 고백은 주변에 ‘사랑’과 ‘자비’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나타나듯이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자비를 베푸는 모습을 통하여 증명됩니다.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부활 제2주일]
주님과 우리의 만남은 필연이었다.
(요한20,19-31)
19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 잠가 놓은 문, 곧 주님께서 선택하신 이들의 문(집, 마음)을 뚫고 들어오시는 주님이심을 보여주신다. 그리고 그들의 모든 죄가 십ㄷ자가에서 당신의 대속으로 다 씻겨 졌으니 평화를 누리라 하신다.
20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 대속으로 못 박히셨던 손과 창에 찔렸던 옆구리다. 십자가로 거저 얻는 의로움, 곧 구원의 새 계약의 피와 물이 흘러내린 그리스도의 옆구리다. 그러니 평화를 누리라 하신다.
21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 곧 끝나버릴 그것도 위장된 세상의 평화가 아닌 영원한 하늘의 평화를 전하라 하시는 것이다.
22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 성령을 받아야 우리(나)가 주님의 대속, 그 구원의 새 계약으로 거저 용서받았음을 믿을 수 있고, 다른 이들도 용서 받도록, 용서가 이루어지도록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성령의 힘, 지혜로 십자가의 복음을 진리로 전하라는 말씀이시다. 그것이 큰 계명의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함 이다.
(창세2,7) 7 그때에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 첫 창조는 숨으로, 흙이 생명이 될 수 있는 생명체가 된 것이다. 그 생명체인 사람을 그 또한 죄로 죽어야 했던 그 옛사람을 그리스도께서 다시 숨, 성령으로 재 창조, 새 창조로 새 사람, 곧 하늘의 생명이 되게 하신 것이다. 물론 그리스도의 대속, 그 새 계약이 있었기 때문이다.
24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25ㄱ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
= 토마스는 얼마나 부러웠을까?
25ㄴ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 토마스는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도 두려워서 문을 잠가놓고 떨고 있는 다른 제자들의 모습을 보며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주님을 뵙고도 여전히 떨고 있었으며 주님은 왜 그런 그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실까? 하는 의문이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을 더욱 뵙고 싶었던 것이다.
26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 예수님께서 계시지 않았을 때 했던 토마스의 말 그대로 예수님께서 똑 같이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늘 토마스 곁에 함께 하셨던 것이다. 곧 당신께서 선택한 이들을 구원에 이르기까지 끝까지 사람하심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
(요한13,1) 1 파스카 축제가 시작되기 전,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실 때가 온 것을 아셨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 예수님의 사랑으로 시작하셔서 그 예수님의 사랑으로 끝까지 사랑하시는 것이 구원의 완료, 종결이다.
(로마8,29-30) 29 하느님께서는 미리 뽑으신 이들을 당신의 아드님과 같은 모상이 되도록 미리 정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 아드님께서 많은 형제 가운데 맏이가 되게 하셨습니다. 30 그렇게 미리 정하신 이들을 또한 부르셨고, 부르신 이들을 또한 의롭게 하셨으며, 의롭게 하신 이들을 또한 영광스럽게 해 주셨습니다.
= 예수님의 십자가 그분의 대속으로 거저 의롭게, 영광스럽게 되는 것이다. 모든 인간들의 죄로 대신 못이 박힌 손, 그리고 창에 찔린 옆구리, 그 죽기까지 끝까지 하신 사랑하심이다. 그러니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하신다.
28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 예수님의 옆구리에 손가락을 넣어보지 않고, 믿음을 고백한 것이다. 곧 믿음이 들어와 버린 것이다. 믿음은 보고, 안보고에서 발생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주심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이라는 단어가 등장한 것이다.
믿음은 우리의 결핍을 찾아내서 채우는 방식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주인이신 예수님에 의해서 거저 한번에 주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니 주님과의 만남이 중요한 것이다. 만남은 그분 말씀을 기억(기도)하는 것이다.
(히브12,2) 2 그러면서 우리 믿음의 영도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그분께서는 당신 앞에 놓인 기쁨을 내다보시면서, 부끄러움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견디어 내시어, 하느님의 어좌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 예수님의 십자가를 구원의 진리로 바라보는 것이 믿음이다. 토마스는 보고서 믿겠다고 부활의 주님을 기다렸다. 그런데 그 보는 행위에 앞서 *만남이라는 것이 이루어지자 *믿음이 토마스에게 들어와 버린 것이다. 믿음이 들어와 토마스가 믿는 자가 된 것이다. 하늘의 믿음으로 믿음이 되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라는 것이다.
29ㄱ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 ‘나를 보고 믿겠다고? 그것은 아니지’ 하시는, 되물음이신 것이다.
29ㄴ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바라크-福)하다.”
= 보이지 않고 믿는 것이 福(바라크)이다. 하신다. 곧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 복음, 그 구원의 말씀 선포를 듣고 믿는 사람이 福이다. 그리고 그 말씀을 ‘보호자 성령의 이끄심으로 온전히 깨달아 올바로 믿는 이가 복이다.’ 하시는 것이다. 보이는 것이 아닌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 올바른 믿음이다.
(1코린2,9-10) 9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되었습니다. “어떠한 눈도 본 적이 없고 어떠한 귀도 들은 적이 없으며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른 적이 없는 것들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마련해 두셨다.” 10 하느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그것들을 바로 우리에게 계시해 주셨습니다. 성령께서는 모든 것을, 그리고 하느님의 깊은 비밀까지도 통찰하십니다.
= 성령의 인도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감추어진 뜻을 깨닫는 것이 복인 것이다. 하느님의 구원의 계획, 그 진리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고, 성령께서 그 십자가를 진리로 우리에게 적용하시어 영원한 생명, 곧 구원을 완성하신 것이다.(로마8,1~ 히브10,15~ 참조)
그래서 요한은 이 책의 목적이 예수님으로 얻는 영원한 생명임을 밝힌다.
30 예수님께서는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많은 표징도 제자들 앞에서 일으키셨다. 31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아멘>
☨천주의 성령님! 저희를 충만하게 하시어 복받은 자임을 기억하며 살게 하소서 ~아멘!!!
부활 제2주일 복음(요한20,19-31)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는냐?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28-29)
'토마스'에 해당하는 '디뒤모스'(Didymos; Thomas)는 아람어(Aramic)적인 표현으로 '쌍둥이'라는 뜻도 있지만, '이중성'이라는 뜻도 갖는다.
여기서 요한 복음사가가 이것을 밝힌 것은 육적인 열정에 비해 영적인 믿음이 뒷받침되지 못한 그의 신앙 상태를 그대로 잘 드러내 주기 때문이다.
이런 토마스가 7일간 계속되던 유월절 축제 기간이 완전히 끝나고, 동시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처음 나타나신 주일로부터 7일이 지나 다시 주일이 된 '여드레 뒤에' 부활하신 주님의 발현을 체험하고 신앙 고백을 한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에 해당하는 '호 퀴리오스 무 카이 호 테오스 무'(ho kyrios mou kai ho theos mou; My Lord and my God)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실 뿐만 아니라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써 모든 믿는 이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분이심을 드러낸다.
여기서 '저의'에 해당하는 '무'(mou; my)라는 1인칭 단수 소유 대명사가 두 번이나 사용되었다.
이것은 이전에는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해서 지식적으로만 알고 있었지만, 이제는 그분께서 하느님의 진정한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개인적으로 그리고 실제적으로 체험하여 깨달았음을 보여 준다.
특히 원문에서는 '~이시며'와 '~이십니다'에 해당하는 영어의 Be동사에 해당하는 희랍어 '에이미'(eimi) 동사가 생략되었고, 각 단어들 앞에 각각 '호'(ho)라는 관사가 각각 사용되어서 예수님의 유일성과 신성(神性)이 더욱 강조된다.
토마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 뵙게 되자 직접 못 자국과 창 자국을 먼저 볼 필요도 없이 그의 의심들이 눈 녹듯이 모두 사라졌고, 이 고백의 말을 외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이것은 잘 정리된 신앙 고백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놀라움에 가득찬 탄성과 같은 것이다.
특히 여기서 강조되어야 하는 것은 토마스가 이전에 자신이 함께했던 역사의 예수님과 부활하신 주님을 동일시했다는 점이다.
이처럼 예수님의 부활은 의심많은 토마스와 같은 사람에게도 능력을 발휘하는 영혼의 부활이요, 육체의 부활이며, 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부활이었다.
토마스가 체험한 이 부활의 능력은 그를 의심많은 제자에서 참된 신앙을 고백하며 결단하는 제자로 바꾸어 버렸다.
한편, 요한 복음 20장 27절에서는 '믿음없는 자'에 해당하는 '아피스토스'(apistos; faithless)와 '믿는 자'에 해당하는 '피스토스'(pistos; believing)가 서로 대조 되었고, 요한 복음 20장 29절에서는 토마스로 대표되는 '보고 믿는 자들'에 해당하는 '헤오라카스~페피스튜카스'(heorakas~pepiteukas)와 '보지 않고 믿는 자들'에 해당하는 '호이 메 이돈테스 카이 피스튜산테스'(hoi me idontes kai pisteusantes; these who have not seen and you have believed)가 서로 대조되었다.
첫번째의 대조는 불신앙을 버리고 신앙을 촉구하는 요한 복음서의 기록 목적 (요한20,31)을 반영한다.
신앙과 불신앙 사이의 선택은 당시의 등장 인물들에게 부과된 선택이었을 뿐만 아니라 요한 복음에서 독자들인 초대 교회 성도들과 오늘날 이 말씀을 듣는 우리들에게 계속해서 던져지는 핵심적인 질문이다.
그러나 두번째 대조는 성경의 어떤 인물들도 당시까지는 다다르지 못한 높은 신앙에 대한 촉구이다.
즉 토마스 뿐만 아니라 다른 제자들조차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그들의 눈으로 보기 전에는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지 못했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승천 이후의 시대에 태어나 예수님을 받아들인 자들은 모두 보지 않고서도 믿는, 참으로 더 복된 자들이라는 말이다.
2026년 04월 12일 일요일
[부활 제2주일(하느님자비주일)] (김도형 스테파노 신부)
오늘 복음에 나오는 토마스 사도의 모습은 사실 우리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의심과 확신 사이를 오가며 흔들리는 모습입니다.
토마스 사도의 말은 단순한 불신의 표현이라기보다 정말로 부활을 믿고 싶다는 간절한 절규이며 하느님의 현존을 직접 체험하고 싶다는 갈망의 표현일지도 모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두려움에 떨며 숨어 있던 제자들 한가운데로 오십니다.
그리고 부활의 증거로 당신의 상처를 보여 주십니다. 제자들은 그 상처 안에서, 인간의 미움과 폭력까지 떠안으신 하느님, 우리를 위하여 희생하신 하느님의 사랑을 봅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라고 하신 말씀처럼 죽음까지 이겨 낸 사랑의 증거로서 상처를 본 것입니다. 이 상처를 통하여 부활을 만난 제자들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믿음이 그들을 고립과 두려움에서 끌어내어 새로운 삶으로 이끈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사랑은 지금도 교회 안에, 우리 공동체 안에 살아 있습니다.
상처 없고 문제없는 공동체가 아니라 서로의 상처와 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함께 아파하는 공동체, 그리고 그 자리에서 우리와 함께 아파하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알아볼 때, 우리는 부활의 힘을 체험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자비 주일인 오늘, 사랑의 하느님, 그 사랑 때문에 마음 아파하시는 하느님을 깊이 묵상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번 한 주간, 말과 행동으로 기쁘게 부활을 고백하며, 사도들의 이 신앙 고백이 우리 삶으로 울려 퍼지기를 희망합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20,28)
(김도형 스테파노 신부)
[부활 제2주일(하느님자비주일)]
평화는 사람의 열심히 아닌 하늘의 열심히 이루어지는 것이다
(요한20,19-23)
19ㄱ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 예전에 코로나-19로 인하여 미사를 못 드린다고, 성체를 못 모신다고 불안해 하는 이들의 모습과 비슷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오신 예수님, 그 말씀이 내 안에 계시고 부활하신 그분의 영이 내 안에 사시는데 왜? 내 종교 행위에 의존하려 하는지~ 그 모든 행위의 실체가 말씀입니다.
(요한1,1.14) 1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14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 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 말씀 안에 하느님과 예수님의 이타의 사랑, 그 사랑의 빛, 그 영광을 모르기에 그렇습니다.
내 죄를 대속하신 사랑, 그 십자가의 예수님을 구원의 진리로~ 그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하느님 약속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성경 속 그 구원의 실체이신 예수님은 모른체 기념일, 축일 등 각종 행사로, 그 섬김의 행위로 바쁘기만 했기에~ 그 행위를 못하니 불안한 겁니다.
나의 의로움을 위한 신앙생활은 하면서 구원을 주시는 십자가의 대속, 그 예수님의 의로움은 모르기 때문입니다.
(마태6,33)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로마3,24)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됩니다.
= 그 모든 약속이 말씀 안에 있습니다.
(요한8,31-32) 31 예수님께서 당신을 믿는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32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 그 약속의 말씀은 모르고 두려워하는 우리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19ㄴ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하시고 주시는~ 용서, 자유, 그 쉼, 그 안식의 평화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하늘의 평화를 주시기 위해 십자가의 수난과 고통을 당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지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하느님의 사랑이 하신 일입니다.
20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 두 손과 옆구리의 피로 받은 용서입니다. 우리의 더러움을 씻겨주신 피 입니다.
(히브9,22) 율법에 따르면 거의 모든 것이 피로 깨끗해지고, 피를 쏟지 않고서는 죄의 용서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 예수님의 피가 내 죄를 대속하신 죽음이라는 것을 믿었을 때 깨끗한 사람이 됩니다.
(묵시7,14) “원로님, 원로님께서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하고 내가 대답하였더니, 그가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저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이다. 저들은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하였다.
21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하늘의 평화를 주셨습니다. 그 십자가의 복음으로 하늘의 평화를 전하는 것,(주는 것)~ 예수님처럼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 복음을 전할 때 예수님처럼 핍박이 따를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22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 성령의 도우심이 있어야 합니다. 실상은 많은 성도들이 십자가를 진리로 의지하지 않고 도덕과 윤리의 신앙을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죄의 용서, 그 쉼,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마음속 두려움을 감추기에 급급합니다.
믿는 것이 아닌 믿는 척하는 신앙을 사는 겁니다.(내가 그랬습니다.)
(1코린1,21-23) 21 사실 세상은 하느님의 지혜를 보면서도 자기의 지혜로는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복음 선포의 어리석음을 통하여 믿는 이들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힘으로 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22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23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 성령의 이끄심으로요~~ 내가 먼저 십자가의 대속, 그 의로움으로 용서받았음을 믿었을 때,~ 다른 이들의 죄를 용서하게 됩니다. 물론 십자가의 복음을 통해서요~~~
십자가의 대속, 그 용서를 전하지 않으면 다른 이의 죄가 그대로 남게 됩니다.
(로마8,1-3)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이들은 단죄를 받을 일이 없습니다. 2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법이 그대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었기 때문입니다. 3 율법이 육으로 말미암아 나약해져 이룰 수 없던 것을 하느님께서 이루셨습니다. 곧 당신의 친 아드님을 죄 많은 육의 모습을 지닌 속죄 제물로 보내시어 그 육 안에서 죄를 처단하셨습니다.
= 성령의 법, 그 십자가의 복음을 의지하여 하늘의 안식, 그 평화를 사는 것입니다.
(이사54,10) 산들이 밀려나고 언덕들이 흔들린다 하여도 나의 자애는 너에게서 밀려나지 않고 내 평화의 계약은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너를 가엾이 여기시는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로마14,17)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
= 섬김의 종교 행위로는 찾을 수 없는 평화입니다. 성경 말씀 안에 구원의 약속을 찾았을 때 누리는 평화입니다.
아멘.-^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