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09월 24일 일요일
[연중 제25주일] 품삯, 한 데나리온 (마태20,1-16)
제1독서<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다.>(이사55,6-9)
6 만나 뵐 수 있을 때에 주님을 찾아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분을 불러라.
7 죄인은 제 길을, 불의한 사람은 제 생각을 버리고 주님께 돌아오너라. 그분께서 그를 가엾이 여기시리라. 우리 하느님께 돌아오너라. 그분께서는 너그러이 용서하신다.
8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고, 너희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 주님의 말씀이다.
9 하늘이 땅 위에 드높이 있듯이 내 길은 너희 길 위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 위에 드높이 있다.
화답송 시편145(144),2-3.8-9.17-18(◎18) ◎주님은 당신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 가까이 계시네.
○ 나날이 당신을 찬미하고, 영영 세세 당신 이름을 찬양하나이다. 주님은 위대하시고 드높이 찬양받으실 분, 그분의 위대하심 헤아릴 길 없어라. ◎
○ 주님은 너그럽고 자비하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넘치시네. 주님은 모두에게 좋으시며, 그 자비 모든 조물 위에 내리시네. ◎
○ 주님은 가시는 길마다 의로우시고, 하시는 일마다 진실하시네. 주님은 당신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 진실하게 부르는 모든 이에게 가까이 계시네. ◎
제2독서<나에게는 삶이 곧 그리스도입니다.>(필리1,20ㄷ-24.27ㄱ)
형제 여러분, 나는 20 살든지 죽든지 나의 이 몸으로 아주 담대히 그리스도를 찬양합니다.
21 사실 나에게는 삶이 곧 그리스도이며 죽는 것이 이득입니다.
22 그러나 내가 육신을 입고 살아야 한다면, 나에게는 그것도 보람된 일입니다. 그래서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23 나는 이 둘 사이에 끼여 있습니다. 나의 바람은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편이 훨씬 낫습니다.
24 그러나 내가 이 육신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이 여러분에게는 더 필요합니다.
27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십시오.
복음<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마태20,1-16)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1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밭 임자와 같다.
2 그는 일꾼들과 하루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고 그들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냈다.
3 그가 또 아홉 시쯤에 나가 보니 다른 이들이 하는 일 없이 장터에 서 있었다.
4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정당한 삯을 주겠소.’ 하고 말하자, 그들이 갔다.
5 그는 다시 열두 시와 오후 세 시쯤에도 나가서 그와 같이 하였다.
6 그리고 오후 다섯 시쯤에도 나가 보니 또 다른 이들이 서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은 왜 온종일 하는 일 없이 여기 서 있소?’ 하고 물으니,
7 그들이 ‘아무도 우리를 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는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하고 말하였다.
8 저녁때가 되자 포도밭 주인은 자기 관리인에게 말하였다. ‘일꾼들을 불러 맨 나중에 온 이들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이들에게까지 품삯을 내주시오.’
9 그리하여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한 이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 받았다.
10 그래서 맨 먼저 온 이들은 차례가 되자 자기들은 더 받으려니 생각하였는데,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만 받았다.
11 그것을 받아 들고 그들은 밭 임자에게 투덜거리면서,
12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하고 말하였다.
13 그러자 그는 그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말하였다.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14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15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16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
2023년 9월 24일 연중 제25주일 제1독서 (이사55,6-9)
"만나 뵐 수 있을 때에 주님을 찾아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분을 불러라." (6)
이사야서 55장 1~5절에서 주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풍성하고 값없는 은총으로 초청하시며 메시야를 통하여 구원의 계약을 체결할 것이라는 약속을 주셨음을 밝혔다.
이제 이사야서 55장 6절 이하 13절에서는 주님의 초청에 대한 예언자의 순종 촉구와 (6~7절) 주님께서 초청에 응할 자들을 위하여 축복된 약속을 온전히 실현하실 것을 재강조하는(8~13절) 내용이 소개된다.
먼저 55장 6절과 7절은 주님의 초청에 대한 예언자의 순종 촉구를 다룬다.
하느님을 찾고 회개하여 그에게로 돌아오라는 이러한 촉구에는 하느님의 다함없는 풍성한 은혜가 전제되어 있다.
사실 하느님께서 은총을 베풀지 않으시고 구원의 문을 닫아버려셔도 그 누구도 항의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죄인을 불쌍히 여기셔서 구원의 문을 넓게 열어 놓으시고, 회개함으로써 그 가운데로 들어오라고 초청하시는 은총을 베푸시는 것이다.
본문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만나 뵐 수 있을 때에 주님을 찾아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분을 불러라'고 권면한다.
이것은 하느님의 구원의 초청도 정해진 때가 있으며, 한 번 지나가면 돌아오지 않을 때가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이러한 표현을 통해 하느님을 만날 기회가 영원 무궁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내며, 자신에게 기회가 주어질 바로 그 때에 회개하며 주님을 찾으라고 촉구하는 것이다.
이사야서 55장 6절은 복수 2인칭 명령형으로서 앞선 1~5절에서 초청 대상이 되었던 자들을 염두에 둔 명령이다.
여기서 '너희'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모든 이방인들을 다 포함한다. 하느님의 구원 초청은 어느 한 개인이나 민족에게 제한적으로 주어지는 좁은 범위의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신다(1티모2,4).
여기서 '찾아라'에 해당하는 '띠르슈'(dirsh)의 원형 '따라쉬'는 원래 발로 밟아 찾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동사이다.
이 단어가 제의적 맥락에서는 주님의 성전으로 찾아가서 제사를 드리는 의미(신명12,5) 와 더불어 하느님의 신탁을 구하는 의미(1사무9,9)를 내포하고 있지만, 보다 일반적으로는 하느님의 뜻을 구하고 자신을 겸손하게 하여 하느님의 은총을 갈망하는 것을 의미한다(신명4,29; 1역대15,13; 16,11).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를 통해, 그리고 나아가서는 메시야의 구속사업을 통해 당신을 만민에게 알리시고, 그들이 쉽게 만날 수 있도록 당신을 공개하셨다.
특히 구약 시대에는 하느님을 찾는 것이 사제를 통해 혹은 예언자를 통해 제한적으로 이루어졌지만, 신약 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업을 통해 만민들에게 널리 전파되었다(2코린6,2).
그야말로 귀를 열고 마음을 열고 손을 뻗기만 하면 누구든지 구원의 자리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가까이 계실 때에 그분을 불러라'
'가까이 계실 때에'에 해당하는 원문은 '삐헤요토 카로브'(biheyotho qarob)는 '그가
가까이 계실 때에'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공간적 측면에서 하느님께서 가까이 계신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메시야의 구속사업을 기반으로 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을 초청하시는 때, 또는 자비롭게 손을 벌리고 모든 이들이 그에게로 돌아오기를
열망하시는 은총의 때를 말한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이것은 그 은총이 중단되는 시점도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하느님께서 은총을 거두시는 그 때가 바로 종말의 때이고, 심판의 때인 것이다.
한편 반대로 하느님께서 가까이 계시는 은총의 문이 열려 있는 때에 모든 사람들은 그를 부르기만 하면 하느님의 자비롭고 은혜로운 구원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
'그분을 불러라'에 해당하는 '케라우후'(qerauhu)의 원형 '카라'(qara)는 55장 5절에서 메시야가 이방 민족을 부르신다는 것을 묘사하는 단어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뉘앙스에 있어서는 두 단어가 차이가 있다.
55장 5절의 '카라'(qara)는 복음의 말씀을 통해 구원으로 초청하신다는 의미이고, 55장 6절의 '카라'(qara)는 자신의 전적인 무능력을 인정하는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을 찾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성령 강림 예언과 관련해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요엘서 3장 5절ㄱ에 사용된 단어와 같다.
"그때에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으리라."
이것은 주님께서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는 자들은 곧 주님께서 그들에게 베푸신 놀라운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사도 베드로는 요엘서의 그 예언을 오순절 성령 강림 때에 인용하였고(사도2,21), 주님을 부르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는 것과 연결시켰다.
이 예언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예언이라고 할 수 있으며, '부른다는 것'은 단순히 이름을 부르는 행위가 아니라 전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며 그를 전적으로 의지해야 함을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023년 9월 24일 연중 제25주일 복음 (마태20,1-16)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요?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15)
한글 새 성경은 '나에게 합당하지'에 해당하는 '엑세스틴 모이'(eksestin moi; It is lawful for me)의 번역을 생략했는데, 포도밭 임자의 행동의 합법성을 강조하는 뜻이 있으므로 번역하는 것이 좋다.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내게 합당하지 않느냐?"(Is it not lawful for me to do what I will~?) 라는 뜻이 된다.
원문대로 하면, 자신의 소유를 자신의 뜻대로 사용하는 것은 합당한 행위였다는 의미가 들어 있는 것이다.
만물을 창조하시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당신의 마음대로 하신다 하여도 그것은 절대 잘못된 것이 아니며, 더군다나 하느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은 절대 공의로우며 인간에게도 유익이 되는 선(善)한 것이기에, 인간이 왈가왈부할 성질이 못된다는 것이다.
'내가 후하다고 해서'에 해당하는 '호티 에고 아가토스 에이미' (hoti ego agathos eimi; because I am generous; because I am good)에서 '에고'(ego; I)라는 일인칭
대명사가 독립적으로 사용되었다.
'에이미'(eimi; am)란 동사에 주어가 포함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에고'(ego) 란 단어를 사용한 것은 후하고 관대하며 선한 자가 바로 포도밭 임자(주인)이란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아가토스'(agathos)는 '윤리적으로 선하다'는 뜻도 있지만, '상대방에 대하여 너그럽다'는 의미도 지닌다.
말하자면, 놀고 있는 자를 고용하여 넉넉한 품삯을 준 포도밭 임자 자신의 행동을 가리킨다.
한편, '후하다고'를 의미하는 '아가토스'(agathos)와 대응되는 단어로서 '시기하는'으로 번역된 '포네로스'(poneros; envious; evil)는 '비열한', '무가치한'이란 뜻도 가지고 있다.
즉 의인인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관대한 은혜를 베푼 것을 도덕적으로 비열하고 무가치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는 뜻이다.
비록 늦게 포도밭에 왔지만 동료가 후한 대접을 받은 것에 대하여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마땅한데, 이것을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는 것을 꾸짖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란 자신의 우월감을 타인과 비교하여 드러내기를 좋아할 뿐, 하느님의 입장에서 내려지는 크나큰 사랑을 볼 줄 모르는 경향이 많다.
이러한 아담과 하와의 본성적 요소가 만드는 세속적인 가치관과 기준은 항상 하느님의 뜻과는 상반되는 것이다.
하느님의 거룩한 안목으로 볼 때, 모든 인간들은 하느님의 자비심을 얻어 입어야 하는 죄인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하느님의 자비심을 무시한 채 모든 것을 세속적이고 본성적인 가치관으로 바라보며, 자기 우월감을 확인하는 데서 만족감을 얻는 어리석음에 빠진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본문은 바로 세속적이고 본성적인 가치관으로 감히 하느님의 주도권에 대해 판단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확실하게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2023년 09월 24일 일요일
[연중 제25주일] 오늘의 묵상 (정천 사도요한 신부)
오늘 복음은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입니다.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찾으러 이른 아침부터 집을 나선 주인은
일할 사람들을 발견하자 한 데나리온으로 품삯을 합의하고는 그들을 포도밭으로 보냅니다.
그런데 주인은 일꾼이 모자랐는지 계속해서 사람들을 찾으러 다닙니다.
아마도 수확철이었나 봅니다.
오전 아홉 시, 열두 시, 오후 세 시, 심지어 저녁때가 가까운 다섯 시에도,
주인은 만나는 사람마다 정당한 품삯을 약속하며 자기 포도밭으로 보냅니다.
이제 해가 지고 주인은 관리인을 시켜 일꾼들에게 품삯을 주려 합니다.
그런데 품삯을 주는 순서가 일꾼들을 불러 모은 순서와는 정반대로 진행됩니다.
오후 다섯 시부터 한 시간가량 일한 사람들이
한 데나리온을 받는 모습을 본 나머지 일꾼들은 그보다 더 받으려니 기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세 시간, 여섯 시간, 아홉 시간,
심지어 이른 아침부터 열두 시간을 꼬박 일한 사람에게도 똑같이 한 데나리온씩 주어집니다.
비유에 등장하는 포도밭 주인은 하느님이십니다.
포도밭 주인이 이른 아침부터 오후 늦게까지 쉬지 않고 일꾼들을 찾아 헤매듯,
하느님께서도 당신 나라의 구원을 선사할 사람들을 끊임없이 모으러 다니십니다.
그러한 부르심에 어떤 방식으로든 응답하고 모인 사람들의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 공동체를 이루는 구성원 모두는 하느님 나라의 구원을 약속받았습니다.
이 구원은 어떤 차등을 두지 않으며 모든 이에게 똑같습니다.
문제는 하느님의 구원 방식이 사람의 상식을 뛰어넘는데도,
우리가 우리의 상식 수준에만 머무르려 한다는 것입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고, 너희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제1독서).
노동 시간에 맞게 보수를 지급하지 않는다며 항의하는 일꾼들처럼,
오랜 기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 자신이
이제 갓 신앙생활을 시작한 사람과 똑같은 취급을 받는 것을 혹시 불편해하십니까?
그렇다면 하느님을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우리는 모두 ‘한 데나리온’이라는 구원을 약속받았고,
그것이 신앙생활의 기간에 따라 두 데나리온이나 이분의 일 데나리온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한 데나리온의 구원으로 충분합니다.
하느님의 자비에 시기하기보다는, 우리가 모두 구원받게 되었다는 사실에 오히려 감사합시다.
(정천 사도 요한 신부)
[연중 제25주일]
손해(損害)보는 합당한 계산(計算)
복음(마태20,1-16)
1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밭 임자와 같다.
= 하느님 나라 백성은 하느님께서 직접 찾아 나서신다. 인간이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위로와 안심을 주시는 말씀이다.)
2 그는 일꾼들과 하루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고 그들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냈다.
=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삯이 한 데나리온, 곧 하나라는 것인데, 십계명을 열 개로 지킨 인간 스스로의 수고와 의로움이 아니라 그 계명을 어긴 모든 죄를 대속한 의로움, 곧 하느님 사랑이신 십자가의 그리스도 한 분이면 된다는 것이다. 외아들(모노게네스 - 하나로 갖은 자) 구원의 삯은 한 데나리온 예수다. 십계명의 모든 계명은 하늘의 대속, 그 사랑을 담고 있는 하나의 계명이라 했다. 오늘 그 하나를 위한 비유 말씀이다.
3 그가 또 *아홉 시쯤에 나가 보니 다른 이들이 하는 일 없이 장터에 서 있었다. 4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정당한 삯을 주겠소.’ 하고 말하자, 5 그들이 갔다. 그는 다시 *열두 시와 오후 *세 시쯤에도 나가서 그와 같이 하였다. 6 그리고 오후 *다섯 시쯤에도 나가 보니 또 다른 이들이 서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은 왜 온종일 하는 일 없이 여기 서 있소?’ 하고 물으니, 7 그들이 ‘아무도 우리를 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는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하고 말하였다.
= 얼마나 볼품, 힘, 능력이 없어 보였으면 저녁때까지 뽑히지; 않았을까? 그런 못난이를 하느님은 당신의 사랑, 자비의 눈으로 뽑으신 것이다.
8 저녁때가 되자 포도밭 주인은 자기 관리인에게 말하였다. ‘일꾼들을 불러 맨 나중에 온 이들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이들에게까지 품삯을 내주시오.’ 9 그리하여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한 이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 받았다. 10 그래서 맨 먼저 온 이들은 차례가 되자 자기들은 더 받으려니 생각하였는데,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만 받았다. 11 그것을 받아 들고 그들은 밭 임자에게 투덜거리면서, 12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하고 말하였다. 13 그러자 그는 그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말하였다.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 투덜대는 일꾼을 친구로 부르신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는 합당한 한 데나리온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진리로 믿기로 하느님과 합의한, 세례 받은 그리스도인이다.
14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15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16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
= 인간의 계산법으로 절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그래서 세상 힘의 원리, 말을 간직하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면 절대 살 수가 없다. 천국이 지옥이 된다. 세상의 진리(1+1=2)로는 절대 하늘의 진리(1+1=1, 한 데나리온)를 알 수가 없다.
세상, 인간의 지혜로는 알 수가 없다.
다시, 하느님의 계산법은 손해 보며 퍼주시는 무한한 용서다. 하느님의 힘은 사랑이다. 외아들을 죄인들의 속죄 제물로 내주신 사랑이다. 그래서 하느님의 진리, 지혜는 십자가다.
아침 일찍부터 일(신앙)한 사람이나 저녁 늦게 잠시 이(신앙)한 사람이나 똑같이 십자가의 대속, 그 사랑, 그 하나(한 데나리온= 예수)로 구원하신다. 그러니 세상의 원리로 하느님을 보면 하느님의 손해 보심, 후하심이 부당한 것이다. 그래서 세상의 똑똑하다는 사람은 믿을 수가 없다.
그래서 첫째로 일한 사람은 하느님의 사랑, 일하심이 못 마땅하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에서 꼴찌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꼴찌가 염치 없이 한 데나리온을 받는, 곧 염치 없이 많은 빚(죄)을 용서 받으면 그저 하느님이 감사할 뿐이다. 그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의지할 수밖에 없다.
(루가7,41-43) 41 “어떤 채권자에게 채무자가 둘 있었다. 한 사람은 오백 데나리온을 빚지고 다른 사람은 오십 데나리온을 빚졌다. 42 둘 다 갚을 길이 없으므로 채권자는 그들에게 빚을 탕감해 주었다. 그러면 그들 가운데 누가 그 채권자를 더 사랑하겠느냐?” 43 시몬이 “더 많이 탕감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옳게 판단하였다.” 하고 말씀하셨다.
=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은 모두 죄뿐임을 깨닫고 인정하는 그 자기부인(自己否認)이 된 자가 그 죄를 대속하신 십자가의 예수님으로 하느님나라에서 첫째가 되는 것이다.
(예레17.9) 9 사람의 마음은 만물보다 더 교활하여 치유될 가망이 없으니 누가 그 마음을 알리오?
= 예수님께서 오실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가르치시고 달래시어 야단쳐서 될 일이었다면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이땅에 내려오셔서 죽으실 필요가 없으셨다. 가망 없는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곧 더러운 죄를 깨끗하게 씻어 거룩하게 하시기 위해 옛 계약, 계명을 대속하시고 흘리신 그 구원의 새 계약의 피를 십자가에서 흘리실 수밖에 없으셨다는 것이다.
(로마8,3) 3 율법이 육으로 말미암아 나약해져 이룰 수 없던 것을 하느님께서 이루셨습니다. 곧 당신의 친아드님을 죄 많은 육의 모습을 지닌 속죄 제물로 보내시어 그 육 안에서 죄를 처단하셨습니다.
(히브10,9-10.14) 9 그다음에는 “보십시오,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두 번째 것을 세우시려고 그리스도께서 첫 번째 것을 치우신 것입니다. 10 이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바쳐짐으로써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14 한 번의 예물로, 거룩해지는 이들을 영구히 완전하게 해 주신 것입니다.
= 단 한 번의 죽음, 전지전능하신 피다. (주 예수님! 더러운 저, 당신피로 씻어 주소서 그 한방울만 이라도 온 세상을 모두 죄악에서 구해 내시리이다. - 성토마스)
*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면 몸은 비록 죄 때문에 죽은 것이 되지만, 의로움 때문에 성령께서 여러분의 생명이 되어 주십니다. 그리고 이 성령께서 몸소,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우리의 영에게 증언해 주십니다. (로마8,10.16)
☨은총이신 천주의 성령님!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말씀(계명)을 지키지 못해 지옥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던 죄인 이었습니다. 그러나 손해 보시는 하느님의 계산(새 계약)으로 당신 아드님 예수를 우리의 속죄 제물로 내주신 그 십자가의 죽음, 그 구원의 삯인 한 데나리온으로 하늘의 영원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과 합의한 손해 보는 계산, 그 새 계약을 정당한 법으로 이웃과 함께 살 수(선택) 있는 힘을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