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08월 13일 일요일
[연중 제19주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태14,22-33)
제1독서<산 위, 주님 앞에 서라.>(열왕19,9ㄱ.11-13ㄱ)
엘리야가 하느님의 산 호렙에 9 있는 동굴에 이르러 그곳에서 밤을 지내는데, 주님의 말씀이 그에게 내렸다.
11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나와서 산 위, 주님 앞에 서라.” 바로 그때에 주님께서 지나가시는데,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할퀴고 주님 앞에 있는 바위를 부수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바람 가운데에 계시지 않았다. 바람이 지나간 뒤에 지진이 일어났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지진 가운데에도 계시지 않았다.
12 지진이 지나간 뒤에 불이 일어났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불 속에도 계시지 않았다. 불이 지나간 뒤에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13 엘리야는 그 소리를 듣고 겉옷 자락으로 얼굴을 가린 채, 동굴 어귀로 나와 섰다.
화답송 시편85(84),9ㄱㄴㄷ과 10.11-12.13-14(◎8) ◎ 주님, 저희에게 자비와 구원을 베풀어 주소서.
○ 하느님 말씀을 나는 듣고자 하노라. 당신 백성, 당신께 충실한 이에게, 주님은 진정 평화를 말씀하신다. 그분을 경외하는 이에게 구원이 가까우니, 영광은 우리 땅에 머물리라. ◎
○ 자애와 진실이 서로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리라. 진실이 땅에서 돋아나고, 정의가 하늘에서 굽어보리라. ◎
○ 주님이 복을 베푸시어, 우리 땅이 열매를 내리라. 정의가 그분 앞을 걸어가고, 그분은 그 길로 나아가시리라. ◎
제2독서<내 동포들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았으면 하는 심정입니다.>(로마9,1-5)
1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진실을 말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나의 양심도 성령 안에서 증언해 줍니다.
2 그것은 커다란 슬픔과 끊임없는 아픔이 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3 사실 육으로는 내 혈족인 동포들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가기라도 했으면 하는 심정입니다.
4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 영광, 여러 계약, 율법, 예배, 여러 약속이 그들에게 주어졌습니다.
5 그들은 저 조상들의 후손이며, 그리스도께서도 육으로는 바로 그들에게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계시는 하느님으로서 영원히 찬미받으실 분이십니다. 아멘.
복음<저더러 물 위로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마태14,22-33)
군중이 배불리 먹은 다음, 22 예수님께서는 곧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먼저 가게 하시고, 그동안에 당신께서는 군중을 돌려보내셨다.
23 군중을 돌려보내신 뒤, 예수님께서는 따로 기도하시려고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저녁때가 되었는데도 혼자 거기에 계셨다.
24 배는 이미 뭍에서 여러 스타디온 떨어져 있었는데, 마침 맞바람이 불어 파도에 시달리고 있었다.
25 예수님께서는 새벽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 쪽으로 가셨다.
26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려 “유령이다!” 하며 두려워 소리를 질러 댔다.
27 예수님께서는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28 그러자 베드로가 말하였다.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29 예수님께서 “오너라.” 하시자,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어 예수님께 갔다.
30 그러나 거센 바람을 보고서는 그만 두려워졌다. 그래서 물에 빠져 들기 시작하자,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하고 소리를 질렀다.
31 예수님께서 곧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고,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32 그러고 나서 그들이 배에 오르자 바람이 그쳤다.
33 그러자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그분께 엎드려 절하며,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연중 제19주일 제1독서(1열왕19,9ㄱ.11-13ㄱ)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나와서 산 위, 주님 앞에 서라." 바로 그때에 주님께서 지나가시는데,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할퀴고 주님 앞에 있는 바위를 부수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바람 가운데에 계시지 않았다. 바람이 지나간 뒤에 지진이 일어났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지진 가운데에도 계시지 않았다. 지진이 지나간 뒤에 불이 일어났다. 주님께서는 불 속에도 계시지 않았다. 불이 지나간 뒤에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11~12)
열왕기 상권 19장 9~10절은 아합의 처 이제벨의 위협을 피해 호렙산 동굴에 숨어 있던 엘리야에게 하느님께서 현현하신 사실을 기록했고, 이어지는 열왕기 상권 19장 11~14절은 하느님께서 엘리야를 향해 '조용하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씀하신 사실을 기록한다.
하느님께서는 먼저 엘리야에게 밖으로 나가서 '주님 앞에 산위에 서라'고 명령하신다. 여기서 '서라'에 해당하는 '웨아마드타'(weamadtha)는 '서다'(신명4,10)라는 뜻을 지닌 동사 '아마드'(amad)의 기본형 완료 2인칭 남성 단수형에 접속사 '와우'(wau)가 결합된 형태로 '그리고 너는 서라'라는 뜻이다.
그리고 '앞에'에 해당하는 '리프네'(lipne)는 '얼굴'을 뜻하는 '파님'(panim)의 연계형에 전치사 '레'(le)가 결합된 형태로 '~면전에' 즉 '~앞에'라는 뜻을 가진다.
그런데 여기서 동사 '아마드'(amad)가 '주님 앞에 서다'라는 표현으로 사용될 때에는 신학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첫째로, 창세기 18장 22절과 신명기 4장 10절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우선 중재 기도의 자세를 나타낼 때 사용된다.
두번째로, 신명기 19장 17절의 '주님 앞에 서야 한다'는 표현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소송 당사자들이 주님 앞에 나아가 당시 사제들과 판관들 앞에 서는 것인데, 이것은 재판을 받기 위한 것이다.
세번째로, 사제들(에제44,15)이나 엘리야(1열왕18,15), 엘리사(2열왕3,14)와 같이 이스라엘의 몰락과 배교의 시기 동안 활동했던 주님의 종에 대해 이같은 표현이 사용될 때에는 충성과 복종과 헌신의 의미를 나타낸다.
오늘 독서의 본문은 이 중에 세번째의 의미가 강하게 드러난다. 엘리야는 이미 자신이 주님 앞에 서서 주님을 섬기는 종임을 천명했다(1열왕17,1).
그러나 이제 지칠대로 지쳐있는 엘리야에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종으로서 다시 일어나 당신을 향한 충성과 헌신의 자세를 보이게끔 하기 위해 다시 당신 앞에 세우시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주목할 것은 엘리야가 서 있을 곳을 분명히 제시했다는 점이다. '산 위'에 해당하는 '바하르'(bahar)는 '산'을 뜻하는 '하르'(har)에 전치사 '뻬(be)와 정관사 '하'(ha)가 결합된 형태로 '그 산에'라는 뜻이다.
'그 산'은 그 옛날 모세를 만나 그를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세우시고(탈출3장) 그에게 그 위엄을 보이셨던(탈출19,16-25) 바로 '그 산에' 하느님께서는 엘리야를 세우시는 것이다. '그 산'은 바로 하느님의 산 '호렙'을 가리킨다.
'주님께서 지나가시는데'
'지나가시는데'에 해당하는 '오베르'(ober)는 '지나가다'(창세15,17), '건너가다'(민수32,21) 라는 뜻을 지닌 '아바르'(abar)의 분사형이다.
여기서 분사형이 사용된 것은 주님께서 지나가시는 행위가 순간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시간이 소요되는 지속적인 행위였음을 나타낸다.
즉 '크고 강한 바람'과 '지진'과 '불'과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의 발생이 모두 주님께서 지나가시는 동안 발생했음을 말해 주고 있다.
탈출기 34장 19~23절에도 나오지만, 주 하느님의 얼굴을 뵙는 자는 그 누구라도 생명을 부지할 수 없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여기에서처럼 단지 그 지나가시는 흔적만을 보이실 뿐인 것이다.
또한, 탈출기 19장 16~20절에 나오는 데로, '크고 강한 바람'이나 '지진' 그리고 '불'은 주님께서 현현하실 때에 일반적으로 수반되는 현상들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외적 현상들 가운데 주님께서 계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현상들은 하느님의 현현을 알리는 표징들이지만, 동시에 인간 편에서 보면 인간들을 멸할수도 있는 두려운 현상들이다(탈출19,21.22).
그런데 주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기적적 현상을 통해 찾아오시지 않고,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가운데서 찾아오신다. 이것은 절망에 빠져 있는 엘리야 예언자로 하여금 자신의 과거를 조용히 돌아보게 만들어 주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무수히 많은 기적을 통해 하느님의 능력을 나타냈던 엘리야는 오히려 지금은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이제벨을 피해 피난 생활을 하고 있다.
이러한 엘리야에게 주님께서는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 가운데에 말씀하심으로써 외적인 기적을 넘어서는 '말씀'의 중요성을 계시하고 있는 것이다.
연중 제19주일 복음(마태14,22~33)
예수님께서는 새벽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 쯕으로 가셨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려 "유령이다!" 하며 두려워 소리를 질러댔다. 예수님께서는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러자 베드로가 말하였다.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오너라." 하시자,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어 예수님께 갔다. 그러나 거센 바람을 보고서는 그만 두려워졌다. 그래서 물에 빠져들기 시작하자,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하고 소리를 질렀다. 예수님께서 곧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고,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고 나서 그들이 배에 오르자 바람이 그쳤다. (25-32)
마태오 복음 14장 24절에는 배가 이미 뭍에서 여러 스타디온 떨어져 있었는데, 마침 맞바람이 불어 파도에 시달리고 있었다고 나온다.
한 '스타디온'(stadion)이란 측정 단위는 약 185m 정도의 거리인데, 본문에는 이것을 수식하는 '여러'(많은)이라는 뜻의 '폴루스'(pollus; many)가 있다.
이것의 병행구절인 요한 복음 6장 19절에는 당시 상황을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하여 '그들이 배를 스물다섯이나 서른 스타디온쯤 저어 갔을 때'라고 나온다. 그래서 이 거리는 4.6~5.6 km정도의 거리이며 '십여리쯤'되는 거리이다.
그리고 14장 24절의 '파도'에 해당하는 '퀴마톤'(kymaton; waves)는 '부풀다'를 뜻하는 '퀴오'(kyo)에서 유래한 '퀴마'(kyma)의 복수형인데, 이것은 쉴새없이 계속적으로 밀려오는 큰 물결들을 연상시킨다.
또한 '시달라고 있었다'에 해당하는 '바사니조메논'(basanizomenon; tossed)는 해산의 고통을 나타낼 때도 사용되는(묵시12,2) '바사니조' (basanizo)의 수동태 현재 분사형이다.
이것을 볼 때 제자들이 겪은 고난은 고통을 참지 못하고 소리지르는 산모의 고통에 비견될 만큼 극심한 고난이었다.
갈릴래아 호수는 급격한 기류 변화로 인해 돌풍이 불며, 이때 예상치 못한 큰 파도가 일어나는 경우가 있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바로 이러한 상황을 맞아 파도와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새벽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쪽으로 가셨다' (25)
여기서 '새벽'으로 번역된 '테타르테 데 퓔라케 테스 뉘크토스'(tetarte de phylake tes nyktos; during the fourth watch of the night)에서 '경'(更)으로 번역되는 '퓔라케'(phylake)는 '지키다', '파수하다'는 뜻이 있는 '퓔랏소'(phylasso)에서 유래하여, 본래는 '보초', '당직', '망보기'라는 뜻을 지닌다.
그런데 로마에서 야간에 4교대로 보초를 섰는데, 오후 6시부터 다음날 오전 6시까지 밤시간을 4부분으로 나누었고, 각각을 '퓔라케'(phylake)로 불렀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새벽'은 '밤 4경'으로서 새벽 3시부터 6시까지의 3시간을 말한다.
예수님께서 이때에 제자들에게 오셨다는 것은 그들이 예수님과 헤어져 육지에서 4.6~5.6km떨어진 그 시간부터 그때까지 계속 파도와 힘겹게 싸우고 있었음을 드러낸다.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어'에 해당하는 '페리파톤'(peripaton; walking)이란 현재분사형을 사용하여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오신 방법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호수 위를 육지처럼 걷는 이러한 모습을 통해 자연의 법칙을 초월하시는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유령이다'
'유령'에 해당하는 '판타스마'(phantasma; a ghost; a spirit)는 '보이다'는 뜻의 동사 '판타조'(phantazo)에서 유래하여 '눈에 보이지만 실체가 없는 것', 즉 '허깨비'를 의미한다.
제자들은 사람의 형체를 한 존재가 풍랑이 이는 호수 위를 걸어오는 기상천외한 사건을 목격하고, 몹시 큰 두려움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그러나 그 존재는 보이기만 하고 실체가 없는 유령이 아니고, 바로 제2위 하느님이신 예수님이셨다. 영적 분별력이 부족했던 제자들은 미신적 사고에 빠져 신적(神的) 능력을 행하시는 예수님을 유령으로 알고 두려워했던 것이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용기를 내어라'에 해당하는 '타르세이테'(tharseite; take courage)는 '기쁘다', '즐겁다'는 뜻을 가진 '헤데오스'(hedeos)에서 유래하여 '용기를 갖다', '담대하다', '위로하다'는 뜻을 가진 '타르세오'(tharseo)의 복수 2인칭 현재 명령형이다.
희랍어에서 현재 명령형은 계속 반복되는 동작을 명령하는 경우에 사용된다. 그러니까 너희들은 지금부터 계속하여 용기를 갖고 즐거워하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처럼 환난 가운데서도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그때부터는 계속적으로 영육간에 즐거움을 누리고 담대함을 가지게 된다. 또한 '나다'에 해당하는 '에고 에이미'(ego eimi; It's me)는 '나는 나이다'이다.
이것은 제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유령이 아니라 바로 그들의 스승 예수님임을 명백하게 밝히고, 동시에 제자들이 두려워하지 말고 오히려 안심해야 할 근거이기도 하다. 이것은 과거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자신을 소개한 '나는 있는 나다'라는 말씀과 의미가 통한다(탈출3,14).
당신 자신을 소개하심으로서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힘과 용기를 주신 것과 같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동일한 말로 당신 자신을 소개하심으로써 고난 가운데서 어쩔줄 몰라하는 제자들에게 힘을 주신 것이다.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에 해당하는 '메 포베이스테'(me phobeisthe; Don't be afraid)에 있어서 '두려워'에 해당하는 '포베이스테'는 복수 2인칭 현재 명령형이다.
희랍어에서 금지 명령을 표현할 때 부정어 '메'(me)가 사용되는데, 여기서 '메'(me)와 현재 명령형이 함께 사용된 때는 '지금 바로 그 행위를 금하라'는 의미이다.
즉 현재 비록 풍랑이 일고 있지만 두려워하는 것을 즉각 멈추라는 뜻이다. 이 말의 이면에는 모든 문제의 해결자되시며 보호자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촉구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당신의 뒤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풍랑이 이는 바다와 같은 세상을 바라볼 때는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는 그 두려움에서 즉각 벗어날 수 있음을 확신시켜 주고 계시는 것이다.
'주님, 주님이시거든'
여기에 해당하는 '퀴리에 에이 쉬 에이'(kyrie, ei sy ei; Lord, if it's you)에서 '만일'에 해당하는 '에이'(ei)는 조건을 나타내는 불변사이다. 그러나 여기서 이 단어는 호수 위로 걸어오는 존재가 예수님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에서 사용된 단어는 아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먼저 상대를 '주님'(kyrie)이라고 부르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 즉 베드로는 이미 상대가 예수님임을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건 불변사 '에이'(ei)를 사용한 것은 예상치도 못했던 너무나 놀라운 일을 목격한 감격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으며, 이 감격은 예수님께서 명령하시면 자신도 물 위를 걸을 수 있다는 확신으로까지 발전한다.
'물위를 걸어오라고' (29)
예수님께 대해서는 '호수 위를'('에피 테스 탈랏세스'; epi tes thalasses; on the lake) 걸은 것으로 묘사하고 있지만(25절), 베드로에 대해서는 '물위로'('에피 타 휘다타'; epi ta hydata; on the water) 걸은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호수나 물은 모두 같은 대상을 가리킨다. 29절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라는 표현에는 당신 자신 스스로의 능력으로 물위를 걸으신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신적능력과 예수님께 대한 요청에 의해 일시적으로 물위를 걸은 베드로의 기적 체험 현상을 차별화시키려는 마태오 복음사가의 의도가 포함되어 있다.
'바람을 보고서는 그만 두려워졌다' (30)
베드로가 바람을 보자마자 두려움에 사로잡혔다는 사실은 '보고서는'에 해당하는 '블레폰'(blepon; when he saw)이 현재 분사로서 주동사 '두려워했다'에 해당하는 '에포베테'(epobethe; he was afraid)와 동일 시점에 일어난 일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물에 빠져들기 '시작하자'에 해당하는 '아륵사메노스'(arksamenos; beginning)은 부정 과거 분사형으로서 주동사 '소리를 질렀다'에 해당하는 '에크락센'(ekraksen)보다 앞선 동작임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거센 바람쪽으로 시선을 돌린 베드로는 그와 동시에 두려운 마음에 사로 잡혔고, 그 순간 물속으로 빠져들어 주님께 절박한 목소리로 구조 요청을 했던 것이다.
이러한 베드로의 체험을 통해서 우리는 아무리 위험한 상황이라 할지라도 주님만을 바라보며 나아갈 때는 안전하지만, 반대로 주님이 아닌 세상을 바라볼 때는 두려운 마음과 함께 위험과 혼란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 곧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고' (31)
호수 위를 걸으시며 베드로로 하여금 물 위를 걷게 하셨던 예수님께서는 말씀 한마디만 하시면 베드로를 물에서 건져내실 수 있었다.
그러나 굳이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는' 행동을 하신 것은 믿음이 약해 세파에 휩쓸려 고난받는 자에게 다가오셔서 친히 손을 내밀어 붙들어 주시는 예수님의 관심과 깊은 사랑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 이 믿음이 약한 자야'에 해당하는 '올리고피스테'(oligopiste; O You of little faith)의 원형 '올리고피스토스'(oligopistos)는 '(크기가)작다', '(양이)적다' 등의 의미가 있는 '올리고스'(oligos)와 '믿음'이란 뜻이 있는 '피스티스'(pistis)의 합성어로서 양과 질에 있어서 보잘것 없는 믿음을 의미한다.
이 말은 모든 성경에서 제자들에 대해서 사용되었는데, 큰 믿음을 가져야 할 자들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믿음을 가진데 대한 책망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또한 '의심하였느냐?'에 해당하는 '에디스타사스'(edistasas; did you doubt)의 원형 '디스타조'(distazo)는 '두 번'이란 뜻이 있는 '디스'(dis)에서 유래하여 마음을 한결같이 가지지 못한 상태를 가리킨다.
즉 이것은 처음 생각이나 각오를 버리고 중간에 방향을 선회한 경우를 말한다. 예수님을 향한 시선을 거센 바람에 빼앗긴 상태를 부각시키기 위해 이 단어가 사용되었다.
2023년 08월 13일 일요일
[연중 제19주일] 오늘의묵상 (정용진 요셉 신부)
군중을 배불리 먹이신 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 곁에 머물며 기도하시려고 산에 오르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작은 배에 몸을 싣고 맞바람을 맞으며 호수를 건너갑니다.
복음사가는 그 시대의 교회 모습을 이 이야기에 담고 있는 것 같습니다.
파도와 바람에 흔들리는 제자들의 배는 안팎으로 난관 속에 있는 교회의 모습이고, 무엇보다도 ‘도대체 주님은 어디에 계신가?’ 하는 의문이 신자들의 마음속에 꿈틀대는 그때 상황을 빗대는 듯합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 교회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교회의 많은 이가 세상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으며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을 돌보면서 때때로 주님께서 그들에게서 멀리 계신 듯 느껴지는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난관과 주님 부재의 체험. 이에 대한 복음서의 답은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 곁에 계신 것은 맞지만 오히려 그런 이유로 그분께서는 멀리 계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바라보시며 우리 곁에 계시다는 것입니다(베네딕토 16세, 『복음서 주해』(Commenti ai Vangeli), 바티칸출판사, 279면).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보고 계시기에 가장 적절한 순간에 우리 곁으로 오십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나러 믿음의 항해를 하다가 물속에 빠졌을 때 그분께서 다가오시어 베드로의 손을 잡아 구하여 주셨습니다(31절 참조).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한 결 같이 손을 내미십니다.
우리가 주일마다 참례하는 미사에서, 우리가 촛불을 켜고 마음 모아 기도할 때, 우리가 하느님 말씀 안에서 그분을 만나는 바로 그때, 그리고 살면서 겪는 많은 일 안에서 예수님께서는 손을 잡아 우리를 일으켜 주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손을 잡고 그분의 이끄심에 우리의 인생을 내맡기는 순간순간 우리의 삶은 주님의 은총으로 채워지고, 우리는 믿음으로 살 것입니다(히브 10,38 참조).
(정용진 요셉 신부)
2023년 08월 13일[연중 제19주일]
하느님의 창조, 구원의 일을 완성하실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
복음(마태14,22-36)
군중이 배불리 먹은 다음, 22 예수님께서는 곧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먼저 가게 하시고, 그동안에 당신께서는 군중을 돌려보내셨다. 23 군중을 돌려보내신 뒤, 예수님께서는 따로 기도하시려고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저녁때가 되었는데도 혼자 거기에 계셨다.
= '건너가다- 파스카'. 어둠속 풍랑에 시달릴 제자들에게 가지 않으시고 저녁때까지 왜 기도만 하신 것일까? 기도(祈禱)는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청(請)하셨다.
24 배는 이미 뭍에서 여러 스타디온 떨어져 있었는데, 마침 맞바람이 불어 파도에 시달리고 있었다. 25 예수님께서는 *새벽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 쪽으로 가셨다.
= 새벽, 곧 어둠을 물리칠 빛으로 오심이다.
(호세6,3) 3 주님(야훼)을 알자. 주님을 알도록 힘쓰자. 그분의 오심은 새벽처럼 *어김없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비처럼, 땅을 적시는 봄비처럼 오시리라.
= 어김없이- 땅(흙)의 그 없음들인 우리의 생명의 빛, 물(생명수, 말씀)로 오심이다. 곧 ‘오병이어’ 그 육의 약식을 영의 양식인 생명의 말씀으로 주시어 죽음에서 생명으로 ‘파스카’ 시키신, 곧 남자만도 오천명이나 살리셨던 , 그 구원의 주님께서 풍랑, 저주의 물을 밟으시는 구원자로 오심이다.
그러나 그 주님을 깨닫지 못했기에, 믿지 못했기에~
26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려 “유령이다!” 하며 두려워 소리를 질러 댔다. 27 예수님께서는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 ‘나다’ 하느님의 이름이다.(탈출3,14) 곧 당신이 창조의 하느님(남성)이심을 알리심이다.(히브1,2참조)
28 그러자 베드로가 말하였다.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 감히 피조물이 창조주 하느님의 능력을 흉내 내겠다는 것이다. 배(교회의 주인 그리스도) 안에서가 아닌 풍랑의 물을 직접 밟을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이다. 이 얼마나 무지(無知)한 교만(驕慢)인가? 그런데 그 베드로의 열성만은 본받자는 이들이 있다.
교만(驕慢)을 본받자는 것이다.
29 예수님께서 “오너라.” 하시자,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어 예수님께 갔다.
= 배에서 내리면 죽음이다.
30 그러나 거센 바람을 보고서는 그만 두려워졌다. 그래서 물에 빠져들기 시작하자, “주님, 저를 구해주십시오.” 하고 소리를 질렀다. 31 예수님께서 곧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고,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 믿음이 없어서, 의심해서 물에 빠졌다는 말씀이 아니다. 하늘의 양식으로 당신의 생명을 내주신, 그리고 풍랑의 물을 밟으신, 또 새벽 빛으로 오신, 그 하느님의 창조, 구원의 일을 완성하실 구원자 주님을 믿고 의탁하지 못하고 왜 나서느냐? 하신 것이다. 그런데 왜 ‘오너라’ 하셨을까? 자신의 피조물 됨, 그 없음의 존재임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이다.
32 그러고 나서 그들이 배에 오르자 바람이 그쳤다. 33 그러자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그분께 엎드려 절하며,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 아직, 새벽 빛이신 성자 하느님을 깨닫지 못했다. 아직 저녁, 어둠, 곧 영이 병든 상태다.
34 그들은 호수를 건너 겐네사렛 땅에 이르렀다. 35 그러자 그곳 사람들이 그분을 알아보고 그 주변 모든 지방으로 사람들을 보내어, 병든 이들을 모두 그분께 데려왔다. 36 그리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 병자가 구원을 받는 옷자락 술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옷자락 술’이라 하지 않고 ‘그 옷자락 술’이다. 곧 하느님께서 구약에서 말씀하신 ‘그 옷자락의 술’이다.
(민수15,37-40) 37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38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일러라. 그들에게 말하여, 대대로 옷자락에 술을 만들고 그 옷자락 술에 자주색 끈을 달게 하여라.
= 자주색- 죽은피의 색이다. 끈- 연결, 묶음을 뜻한다. 곧 하늘의 대속, 그 피의 새 계약이 들어있음이다.
39 그리하여 너희가 그것을 볼 때마다, 주님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실천하고, 너희 마음이나 눈이 쏠리는 것, 곧 너희를 배신으로 이끄는 것에 끌리지 않도록 하는 술이 되게 하여라.
= 하느님의 계명(뜻)을 거슬러 자신들의 뜻(소원)을 위해 지키는, 곧 사람의 마음, 눈의 욕망(慾望)에 묶이지 않도록 자유하게 하는 술이 되라는 말씀인데~
40 그래서 너희는 나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고 실천하여, 너희 하느님에게 거룩한 사람들이 되어라.
= 하느님의 모든 계명(誡命)을 다 지켜내야 거룩하게 된다. 그러나 그 하느님의 모든 계명을 온전히 다 지켜낼 수 있는, 인간은 하나도 없다. 곧 모든 인간은 하느님 앞에 죄인(罪人), 범법자(犯法者)일 수밖에 없다.(야고2,10-11) 그래서 성자(聖子)하느님, 그리스도께서 그 계명의 죗값으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의 새 계약으로 모든 죄가 씻겨 깨끗하게, 거룩하게 된 것이다.(히브10,14)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모든 계명이 다 지킨 것이 된다.(로마6,6~참조) 그래서 새 계약의 피, 그 ‘자주색 끈이 달린 옷자락 술’에 손을 대면(묶여 하나가 되면) 자유, 구원이다. 구원의 하느님의 옷자락이다.
(에제16,8) 8 그때에 내가 다시 네 곁을 지나가다가 보니, 너는 사랑의 때에 이르러 있었다. 그래서 내가 옷자락을 펼쳐 네 알몸을 덮어 주었다. 나는 너에게 맹세하고 너와 계약을 맺었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그리하여 너는 나의 사람이 되었다. (~아멘)
☨은총이신 천주의 성령님!
저희가 지금 시련, 풍랑에 시달리고 있다면 구원의 섭리 안에 들어있는 최고의 상태임을 깨달아(야고1,12) ‘그 옷자락의 술’을 붙잡고 그리스도(피의 새 계약) 안에서 자유하게 하소서. 하느님의 사람임을 놓치지 않게 하소서. 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 내버려두지 마소서. 아버지의 나라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 나)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