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08월 06일 일요일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예수님의 얼굴은 해처럼 빛났다. (마태17,1-9)

제1독서<그분의 옷은 눈처럼 희었다.>(다니7,9-10.13-14)
9 내가 보고 있는데 마침내 옥좌들이 놓이고 연로하신 분께서 자리에 앉으셨다. 그분의 옷은 눈처럼 희고 머리카락은 깨끗한 양털 같았다. 그분의 옥좌는 불꽃 같고 옥좌의 바퀴들은 타오르는 불 같았다.
10 불길이 강물처럼 뿜어 나왔다. 그분 앞에서 터져 나왔다. 그분을 시중드는 이가 백만이요 그분을 모시고 선 이가 억만이었다. 법정이 열리고 책들이 펴졌다.
13 내가 이렇게 밤의 환시 속에서 앞을 보고 있는데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늘의 구름을 타고 나타나 연로하신 분께 가자 그분 앞으로 인도되었다.
14 그에게 통치권과 영광과 나라가 주어져 모든 민족들과 나라들,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를 섬기게 되었다. 그의 통치는 영원한 통치로서 사라지지 않고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않는다.
화답송 시편97(96),1-2.5-6.9(◎1ㄱ과 9ㄱ) ◎ 주님은 임금이시다. 온 땅 위에 지극히 높으신 분이시다.
○ 주님은 임금이시다. 땅은 즐거워하고, 수많은 섬들도 기뻐하여라. 흰 구름 먹구름 그분을 둘러싸고, 정의와 공정은 그분 어좌의 바탕이라네. ◎
○ 주님 앞에서 산들이 밀초처럼 녹아내리네. 주님 앞에서 온 땅이 녹아내리네. 하늘은 그분 의로움을 널리 알리고, 만백성 그분 영광을 우러러보네. ◎
○ 주님, 당신은 온 땅 위에 지극히 높으신 분, 모든 신들 위에 아득히 높으시옵니다. ◎
제2독서<우리는 하늘에서 들려온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2베드1,16-19)
16 우리가 여러분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과 재림을 알려 줄 때, 교묘하게 꾸며 낸 신화를 따라 한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위대함을 목격한 자로서 그리한 것입니다.
17 그분은 정녕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영예와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존귀한 영광의 하느님에게서, “이는 내 아들,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하는 소리가 그분께 들려왔을 때의 일입니다.
18 우리도 그 거룩한 산에 그분과 함께 있으면서, 하늘에서 들려온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
19 이로써 우리에게는 예언자들의 말씀이 더욱 확실해졌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날이 밝아 오고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 어둠 속에서 비치는 불빛을 바라보듯이 그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습니다.
복음<예수님의 얼굴은 해처럼 빛났다.>(마태17,1-9)
1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2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는데,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
3 그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4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5 베드로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었다.
그리고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6 이 소리를 들은 제자들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 채 몹시 두려워하였다.
7 예수님께서 다가오시어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8 그들이 눈을 들어 보니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하고 명령하셨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제1독서 (다니7,9-10.13-14)
"내가 보고 있는데, 마침내 옥좌들이 놓이고, 연로하신 분께서 자리에 앉으셨다. 그분의 옷은 눈처럼 희고, 머리카락은 깨끗한 양털 같았다. 그분의 옥좌는 불꽃 같고, 옥좌의 바퀴들은 타오르는 불 같았다." (9)
'내가 보고 있는데, 마침내 옥좌들이 놓이고'
다니엘서 7장 9절부터 14절까지는 다니엘이 환시 가운데 본 광경가운데 두번째 장면으로서 다니엘서 7장 2~8절의 벨사차르 제일년(원년)에서 보았던, 바다에서 나온 각기 다른 형상을 지닌 큰 네 짐승의 환시에서 풍기는 분위기와는 사뭇 대조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네 마리의 각각 다른 짐승들이 온 세상을 점령하고 통치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이 세상은 하늘에서 그 옥좌를 두고 앉아계신 하느님에 의해 심판되며, 사람의 아들(인자)같은 분이 하느님으로부터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받아 모든 하느님의 백성들에게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나라를 부여하게 된다는 사실이 환시 가운데서 보여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결국 다니엘이 본장에서 본 환시는 하느님의 절대적인 주권 및 그분의 궁극적인 심판과 승리를 예언하는 다니엘서 2장의 네부카드네자르의 첫번째 꿈과 다니엘서 4장의 네부카드네자르의 두번째 꿈과 그 기조를 같이하는 환시라고 할 수 있다.
다니엘은 이와같은 꿈의 내용을 성경에 기록함으로써, 당시 바빌론 벨사차르 왕의 통치하에서 현재와 미래를 암울하게 바라보고 있던 하느님의 백성에게 희망을 부여하고자 했을 것이다.
이 땅에서는 그 짐승같은 인간 통치자들이 활개를 치고 있지만, 진정한 통치자는 하느님 이시라는 사실 및 하느님께서는 언젠가는 당신 백성들에게 영원히 흔들리지 않을 권세와 나라를 부여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에, 어두운 세상의 권력 하에 살고 있는 하느님의 백성은 힘과 용기를 내어서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지키고, 하루하루를 승리하면서 살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내가 보고 있는데, 마침내 옥좌들이 놓이고'는 '옥좌들이 배치될 때까지 나는 응시하고 있었다'(i kept looking until thrones were set up)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놓이고'로 번역된 '레미우'(remiu)의 원형 '레미'(remi)는 '던지다', '배치하다'라는 두 가지 의미를 다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의 문맥에서는 앞의 짐승들의 통치권을 상징하는 옥좌가 던짐을 당했다는 뉘앙스가 아니라, 심판을 베풀기 위한 하느님의 옥좌가 새롭게 배치된다는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
이제 짐승들의 때 특히 마지막으로 일어난 작은 뿔의 시대는 지나갔고, 온 우주를 심판하시는 하느님의 심판의 때가 도래하는 것이다.
하늘의 영들은 하느님께서 재판관으로서의 위엄을 갖추어 앉으시도록 하느님의 옥좌를 준비하고 있었으며, 다니엘은 바로 그러한 장면을 응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옥좌'에 해당하는 '코르싸완'(korsawan)은 원형 '카레쎄'(karese)의 복수형이다. 그러나 '옥좌'에 앉으시는 재판관 하느님은 한 분이시다. 따라서 수(number)가 호응을 이루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본문의 복수형은 문자 그대로 '옥좌'가 여러 개 있었다는 의미라기보다는, 하느님의 높고 영광스러운 재판관으로서의 위엄을 강조하기 위한 장엄 복수형으로 볼 수 있다.
본문의 복수형 '옥좌'에 대한 타당한 해석을 정리해 보면, 이처럼 하느님의 위엄있는 심판자의 자격을 강조하기 위한 존엄 복수형이거나, 삼위일체 하느님 위격 각자가 동등한 심판자의 자격으로 앉을 것을 암시하기 위한 복수형이거나, 하느님의 우편에 인자같은 이가 동등한 자격으로 앉는 것을 암시하기 위한 복수형이거나(마태26,64; 다니7,13), 하느님의 성도들이 심판자의 자격으로 하느님 곁의 어좌에 앉아 심판할 것을 암시하기 위한 복수형일 수 있다(묵시20,4).
그런데 이어지는 문맥만을 고려한다면, 하느님의 위엄있는 심판자의 자격을 강조하기 위한 존엄 복수형이 가장 타당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연로하신 분께서 자리에 앉으셨다'
본문은 문자적으로 '그리고 날들의 고대가 그의 자리를 차지하였다'(and the ancient of days took his seat)라는 의미로 거의 대부분 영역본들이 번역되었고, 어떤 것의 경우는 '가장 존경할 만한 한 분이 좌정하셨다'(one most venerable took his seat)로 의역하였다.
그렇다면 '날들의 고대'(the ancient of days)란 표현은 무엇을 나타내는가? 이것은 일차적으로 너무나 오래 되어서 측량하기 어려운 긴 시기를 나타내며, 이차적으로는 하느님의 영원성(eternity; 시작도 마침도 없으신 영원 존재성)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연로하신 분'(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은 세상의 창조와 역사의 주관자되시는 성부 하느님(god the father)만을 단독으로 지칭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분은 원래부터 하늘의 옥좌에 앉아 계시지만, 이제는 특별히 세상 왕국들 및 적그리스도를 심판하시기 위해서 특별히 마련된 심판의 옥좌에 좌정하신 것이다.
'그분의 옷은 눈처럼 희고, 마리카락은 깨끗한 양털 같았다.'
다니엘이 환시 가운데 본 하느님께서는 흰 옷을 입고 계셨고, 머리카락 역시 흰 색이었다. '그분의 옷'에 해당하는 '레부셰흐'(lebusheh)의 원형 '레부쉬'(lebush)는 어원적으로 예복이나 긴 겉옷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하느님의 옷이 마치 흰눈(white snow)처럼 희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첫째는 하느님의 절대적인 도덕적 순결성을 상징한다는 견해, 둘째는 하느님의 존엄성과 순결성을 상징한다는 견해, 셋째는 하느님의 풍성한 앎을 상징한다는 견해가 있다.
요한 묵시록에서 큰 환난을 겪어 내어 하늘에 올라간 사람들 역시 흰 옷을 입은 모습으로 제시되는데, 이들은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하였다(묵시7,13~14).
만약 이들의 흰 옷이 그들의 영적 도덕적 순결성을 강조한다면, 여기서 하느님의 눈처럼 흰 옷 역시 그분의 거룩하심, 순결하심, 순수하심, 온전하심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한편 하느님께서는 흰 머리카락을 가지고 계신 것으로 묘사된다. 양털처럼 흰(깨끗한) 하느님의 머리카락은 사람들의 이해와 결부해 볼 때 하느님의 나이가 매우 많다는 것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잠언서에 백발은 노인의 영광의 상징으로 나오며(잠언16,31; 20,29), 요한 묵시록에서 사도 요한이 본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털도 희기는 눈과 같고 양털 같다고 기록되어 있다(묵시1,14).
이상의 의미를 종합하면, 본문은 하느님께서 존재론적으로 영원무궁하시고, 도덕적으로는 지극히 거룩하시고 순결하시고 온전하시어 죄에서 완전히 떠나 계신 분이심을 나타낸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분의 옥좌는 불꽃 같고, 옥좌의 바퀴들은 타오르는 불 같았다.'다니엘의 환시 가운데서 보여지는 하느님의 옥좌는 화염으로 휩싸여 있거나 화염 그 자체였다.
그 옥좌에는 여러개의 바퀴들이 있는데, 그 바퀴들 역시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불이거나 또는 그러한 불로 휩싸여 있었다. 이와같은 영상은 의인들을 심판하시는 하느님의 엄위함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와 관련해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이 어느 누구도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휩싸여 계신다고 말한다(1티모6,16; '다가갈 수 없는 빛 속에 사시는 분').
다니엘이 본 그 불꽃 혹은 이글거리는 화염은 물리적으로 무언가를 태우는 불이라기 보다는, 악인들을 심판하는 심판의 두려움을 자아내고, 하느님의 모습을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도록 차단하는 기능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시나이산에서 하느님께서 임재하셨을 때, 동반된 여러 현상 가운데 한 가지가 바로 이러한 화염이었다(탈출19,18).
또한 에제키엘이 환시가운데 본 하느님의 임재 및 그분의 옥좌 역시 불꽃으로 휩싸여 있었고, 또 그 옥좌에 여러 개의 바퀴들이 달려 있었다(에제1장).
하느님께서 엘리야 예언자를 하늘로 끌어 올리실 때에도 불 병거와 불 말들을 사용하셨다(2열왕2,11).
다니엘이 후에 티그리스 강가에서 본 환시 속의 한 분은 그 분이 횃불처럼 생겼고, 그 팔과 다리는 광을 낸 청동 같았으며(다니10,6), 사도 요한이 파트모스 섬에서 본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 역시 그의 눈이 불꽃같고 발은 용광로에서 정련된 놋쇠같이 생겼다(묵시1,14.15).
다니엘서 10장과 요한 묵시록 1장의 주체는 성자 하느님을 묘사한 것이지만, 그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것은 성자와 성부와 동일한 본체이시며 동일한 영광과 위엄을 지니신 분이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하느님을 철저히 불꽃에 둘러싸인 분으로 묘사하는 본문은 하느님의 위엄이 얼마나 어마어마하고 장엄한 것인지, 죄스런 인간이 가까이할 수 없는 그의 거룩한 영광을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하느님의 면모 앞에 사람은 굴복하지 않을 수 없으며, 두려움과 떨림 외에 어떤 태도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불길이 강물처럼 뿜어 나왔다. 그분 앞에서 터져 나왔다. 그분을 시중드는 이가 백만이요, 그분을 모시고 선 이가 억만이었다. 법정이 열리고, 책들이 펴졌다.' (10)
다니엘이 환시 가운데 본 하느님의 옥좌에서는 이글거리는 불이 마치 강물처럼 뿜어 나왔다. 본문에서 '뿜어 나왔다', '퍼져 나왔다'에 해당하는 '나게드 웨나페크'(naged enaphek)는 두 단어 모두 능동태 분사형으로서 불이 하느님의 옥좌로부터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모습을 강조한다. 이것은 하느님의 심판이 계속해서 진행된다는 지속성을 임시한다.
또한 '그분 앞에서'라는 표현은 불꽃이 하느님의 몸 속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좌정해 계시는 그 옥좌로부터 나온다는 표현으로 볼 수 있다.
그 흘러나오는 불의 양이 얼마나 많았는지 다니엘은 마치 강물처럼 흘러나오고 있었다고 묘사한다. 이렇게 흘러나오는 심판으로서의 불은 세상 나라들 특히 작은 뿔이 상징하는 적 그리스도를 심판하는 불이다.
이 불은 적 그리스도를 포함한 모든 악한 세력들에 대한 심판이 끝날 때까지 하느님의 옥좌에서 계속해서 흘러나올 것이다.
한편 '백만'과 '억만'에 해당하는 '엘레프 알르파임'(elep allpaim)과 '립보 랍베완'(ribbo rabbewan)은 고대 세계에서 형언할 수 조차 없는 많은 숫자를 나타낼 때 사용하는 표현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천사를 나타내는 데 이처럼 헤아릴수 조차 없을 만큼 많은 수를 들고 있다.
천사들은 하느님의 명령을 받아 그 명령을 수행하는 소임을 맡은 존재들이다. 이 문맥에서는 특히 심판과 관련된 일을 수행하기 위해서 대기하는 모습을 보인다.
본문에서 '그분을 시중드는 이'에 해당하는 단어 '예샴메슌네흐'(yeshameshunneh)는 문자적으로 '그들이(백만) 그분을 시중들고 있다'라는 의미이다.
이 단어는 구약성경에서 이곳밖에 사용되지 않지만, 문맥상 수많은 천사들이 하느님을 시중들고 있는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 확실하다. 또한 본문에서 '모시고 선'에 해당하는 '예쿠문'(yequmun)은 문자적으로 '그들이(억만) 모시고 서 있다'라는 의미이다.
천사들은 하느님과 나란히 옥좌에 앉아 있을 수 있는 지위를 가진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하느님 옥좌 곁에 서 있으면서 하느님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동시에 그 명령을 수행하는 존재들이다.
그들의 숫자가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다는 사실은 하느님의 위엄을 드높여 줌과 아울러 하느님의 권세와 능력, 그리고 그분의 역사하심이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크고 광대무변함을 암시한다.
한편 하느님의 심판이 시작되면서 책들이 펼쳐진다. '책들'에 해당하는 '씨프린'(siprin)은 어원상 '기록하다', '계산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동사 '싸파르'(sapar)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여러 권의 책들을 의미한다.
하느님의 심판대에 펼쳐져 놓인 이 책들은 일반적으로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인간의 모든 행위와 말들이 다 기록되어 있는 책이며, 다른 하나는 하느님의 구원받은 백성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생명책이다.
모세는 이 생명책이 있음을 알고 있었고(탈출32,32), 사도 요한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자들은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고 말하였다(묵시21,27). 또한 사도 요한은 죽은 자들을 심판하는 기준으로 사용되는 책으로서 그들의 행위가 기록된 책을 언급한다(묵시20,12).
본 문맥에서는 이 두가지의 책 가운데서 행위를 기록한 책을 지칭하는 것이 분명하다. 본문은 하느님께서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는 자들을 구원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악한 자들을 심판하시는 상황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심판이 행위를 기록한 책에 근거한다는 것은 그분의 심판이 절대로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매우 공정하게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복음(마태17,1~9)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는데,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해졌다." (2)
"he was transfigured before them, his face shone like the sun and his clothes became white as light."
여기서 '모습이 변하셨는데'로 번역된 '메타모르포오'(metamorphoo)는 '~속에','~와 더불어'라는 뜻을 가진 전치사 '메타'(meta)와 '형성하다', '모습을 만들다'라는 뜻을 가진 '모르포오'(morphoo)가 결합된 합성어로 '모습이 바뀌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모르포오'의 명사형이며 '모습'(마르16,12; form)으로 번역되는 '모르페'(morphe)는 단순히 외형적인 '모습'(필리2,7)을 가리키는 '스케마'(schema)와는 구별되는 단어로서 내면으로부터 진행되는 영적인 변화(2코린3,18; 로마12,2)뿐 아니라 외적으로 나타나도록 내적 성질이 변화되는 것까지 나타내는 단어이다(탈출34,29).
이런 것을 종합할 때, 비록 외형적으로는 불완전한 육신을 입으셨으나 내면적으로는 전혀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는 이때 그 죄없는 내면의 거룩한 본질적 영광이 외부로까지 드러났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예수님이야말로 전혀 죄의 오염됨이 없는 거룩한 신적(神的) 본질을 지니신 분이시며, 모든 이들이 기다리던 바로 그 메시야 되심을 보여 주는 것이다. 또한 '그들 앞에서'변하셨다는 것은 이 사건이 제자들을 위한 예수님의 배려였음을 알게 한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가 메시아이심을 확신하도록, 또한 확신가운데 제자의 길을 걷도록 도움을 주고자 한 것이다. 이들은 후에 자신이 이때 보았던 예수님의 영광이 강생(육화; incarnatio)이전에 그가 가지셨던 신적 영광임을 알게 되었다(요한 1,14; 17,5; 필리2,6~7).
그 다음 예수님께로부터 나온 영광의 광채를 생생히 느낄 수 있게 묘사하였다. 즉 '태양'(hellios; 헬리오스)과도 같은 강렬한 빛이 얼굴에서 빛나며, 몸 전체에서 나옴으로 그 옷을 투과하여 감히 근접할 수 없는 거룩한 신성(神性)을 나타내셨던 것이다.
만일 '해'(헬리오스)와 '빛'(포스; phos)보다 더 밝은 대상이 있었다면, 복음서 저자들은 그 표현을 사용했을 것이다.
루카는 그 의복이 희어져 광채가 난 것으로(루카 9,29), 마르코는 그 옷이 광채가 나와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더 이상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그토록 새하얗게 빛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마르9,3).
예수님의 광채는 모세의 얼굴에서 빛났던 광채와 비교할 때 그 정도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탈출34,29~35).
모세는 얼굴에서 광채가 났었으나 이것은 하느님의 영광을 가까이 뵘으로써 얼굴에 투영된 것에 불과한 것으로서 얼굴을 수건으로 덮었을 때 그 빛은 가리워졌다.
그러나 에수님의 광채는 예수님의 몸 자체에서 빛났던 영광의 광채로서 두터운 겉옷을 투과할 뿐 아니라 투과한 그 빛이 겉옷을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더 새하얗게 보이게 할 정도로 강렬하였다.
그런데, 루카 복음의 병행 구절은 예수님의 모습이 변형된 시기가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였던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루카9,29).
루카가 특별히 이러한 사실을 기록한 것은 마태오나 마르코가 타볼산에서 신적(神的)인 모습을 나타내신 구체적인 이유에 촛점을 맞춘 것에 비해, 루카는 예수님께서 완전한 신(神)이시자 사람으로서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 되심을 강조하기 위함으로 추정된다.
루카는 다른 공관 복음에 비해 기도의 신학을 전개한다. 예수님께서 타볼산에 오르신 것도 기도하시는 데 목적이 있고 (went up the mountain to pray), 거룩한 변모도 기도하시는 중에
(while he was praying his face changed in appearance and his clothing became dazzling white)이루어짐을 계시한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성부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이심을 드러내시는 동시에, 우리 자신도 거룩하게 되기를 원하고, 거룩하신 하느님의 신적 본성에 참여하길 원한다면, 기도하라는 강력한 메세지를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거룩하신 하느님과 일치하고 친교를 나누며 초자연적 사랑과 은총과 빛을 받아 하느님처럼 거룩하게 되는 길이 기도 뿐이며, 우리도 예수님처럼 죄없는 상태에서 기도할 때,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시요 전구자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의 기도가 성부 하느님께 전달되고, 동시에 성부 하느님으로부터 기도의 응답이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내려진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는 것이다.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 존재와 생명의 근원이시고 목적이신 하느님을 공경하고 섬기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땅에서 성부 하느님을 공경하고 섬기는 방법이 무엇인가? 기도 밖에 더 있는가! 요한 복음 4장 24절에는 영이신 하느님을 영과 진리안에서 예배를 드려야 된다고 계시되어 있다.
그래서 오상의 성(聖) 비오 사제는 억지로라도, 마지못해서라도, 의지적으로 기도하라고 말한 것이다.
우리가 영혼의 호흡인 기도를 해야하는 이유는 그것이 이 땅에서 하느님을 섬기는 유일한 방법이며, 스스로의 힘으로 자력 구원이 불가능한 인간이 대죄가 없는 은총 지위에서 기도를 통해 하느님의 초자연적 사랑(은총)을 받지 못하면, 인간 본성(本性)을 초월하는 초성(超性)생활이 불가능하고 구원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현대의 많은 크리스챤들은 기도도 하지 않고 성경도 보지 않으며, 겨우 주일 미사만 간신히 형식적으로 지킨다.
이 시대는 너무나 초자연(超自然)과 영적(靈的)인 세계와 차원을 고의적으로 부인하고, 심판과 영원한 생명(복락)과 지옥벌을 믿지 않으며, 언젠가 없어질 현세와 육(肉)의 사정에만 매몰되어 사는 이들이 너무나 많기에 하느님께서는 기도를 질적(質的)으로 뿐만 아니라 양적(量的)으로도 많이 바치시길 원하신다.
구원받고 싶다면, 첫째로 죄를 짓지 말아야 하고, 둘째로 반드시 기도해야만 한다.
2023년 08월 06일 일요일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오늘의묵상 (정용진 요셉 신부)
오늘 복음의 배경은 산입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산에 오르시는 예수님을 되풀이하여 소개합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겪으신 유혹의 마지막 장소는 산이었습니다(4,8 참조).
예수님께서 참 행복의 말씀을 들려주신 곳도 산이었고(5,1 참조), 굶주린 백성을 위하여 빵을 많게 하신 곳도 산이었습니다(15,29 참조).
복음서 끝에는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산에서 만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28,16 참조).
오늘 복음에 나오는 구약의 두 인물도 산에서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모세는 시나이산에서 하느님을 만나 그분의 계시를 받고 산에서 내려와 그것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합니다.
엘리야는 호렙산에서 하느님을 만났고 그 산을 내려와 예언자의 길을 당당히 걸어갑니다.
이렇게 산은 인간이 하느님을 내면 깊이 만나는 장소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물리적인 의미가 아니라 인간이 하느님의 뜻과 일치하여 생각하고 그분의 뜻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시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이 축일을 지내며 우리도 우리 자신의 ‘변모’를 희망하며 산에 올라야 하는 이유입니다.
산에 올라간다는 것은 세상의 방식으로 살기를 단념하고 하느님의 생각을 받아들일 결심을 하는 일입니다.
이러한 결심이 없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이 세상에서 주님의 복을 받아 세속적 의미에서 더 잘 되기를 바라는 데에만 매여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만나려고, 주님과 함께 머무르려고 이 ‘산’에 오르지 않으면 참된 주님의 모습과 그 영광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산에서 그분을 뵈었으니 이제 다시 산을 내려와야 합니다.
베드로는 초막을 지어 산에 머물고 싶어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산을 내려오시어 하느님 아버지께 받은 사명을 수행하러 길을 떠나십니다.
성당에서 또 고요한 기도 속에서 우리도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뜻을 생각하는 산을 경험합니다. 지금 우리도 이 산을 다시 내려가야 합니다.
주님이신 스승께서 당신의 생명을 쏟으시고자 예루살렘을 향하여 나아가셨듯이, 우리도 그분을 따라 산에서 들은 말씀과 산에서 본 그분의 참모습을 마음에 품고 형제들을 섬기고자 세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정용진 요셉 신부)

2023년 08월 06일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더러, 안에 들게 하소서.
(마태17,1-9)
1 엿새 뒤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 성경(聖經)은 왜 바로 ‘일곱째 날에’ 라고 하지 않고 ‘엿새 뒤에’라고,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弟子)들 중 셋만 데리고 가셨을까? 성경은 숫자로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숫자6은 사람의 몸(肉身)을 뜻하며, 숫자3은 하늘(三位)을 뜻한다.
그러니까 육신(6)을 입고 죄(罪)와 고난(苦難)의 삶을 사는 이들에게, 엿새 뒤, 곧 칠(7, 안식)을 주시기 위한 셋(3), 하느님 나라의 일을 보여 주시겠다는 것이다. 즉 하느님께서 온갖 죄와 고난의 인간들에게 자유, 쉼, 안식을 주시기 위해 오셨고, 하실 것을 보여 주시려는 것이다.
앞장에서 예고(豫告) 하셨던 당신의 구원의 모습을 보여 주시려는 것이다. 복습해보자.
앞 16장16절 이하에서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라고 고백했고, 예수님은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을 주셨다.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야 한다.”(21절)
그런데 베드로가 그 말씀에 반박했다. 왜? 자신의 뜻, 소원을 아직 이루지 못했는데, 기적과 능력의 스승 예수님께서 죽으신다니 아직 때가 아니라고 반박한 것이다. 그래서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23절)하며 예수님께서 꾸짖으셨다.
그리고 그 사람의 일, 욕망(慾望)의 자신(自身)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라는 말씀을 하셨고,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하시며 그 땅의 것을 버리고(부인하고) 일어나 “여기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하느님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 (28절)
= 하늘을 향해(香海), 곧 하느님의 뜻을 향해 서 있는 사람은 성경(聖經) 말씀을 통(通)해, 하느님의 구원(救援)의 뜻을 깨달아 죽기 전부터 하늘나라를 살 수 있다는 말씀이다. 오늘 그 하늘나라를 보여주려 하심이다.
2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는데,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
= 이 세상이 낼 수도 없는, 이 세상의 빛이 아니라는 것이다. 곧 예수님께서 하늘의 빛이시라는 것이다.
(묵시21,22-24) 22 나는 그곳(하늘)에서 성전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과 어린양이 도성의 성전이시기 때문입니다. 23 그 도성은 해도 달도 비출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그곳에 빛이 되어 주시고 어린양이 그곳의 등불이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24 민족들이 그 도성의 빛을 받아 걸어 다니고, 땅의 임금들이 자기들의 보화를 그 도성으로 가져갈 것입니다.
3 그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 엘리야는 우상(偶像)을 섬기며 양다리 신앙(信仰)으로 무너졌던 12지파(교회)를 다시 세웠고, 모세는 강대국 이집트에서 노예(奴隸)살이 했던 이스라엘을 탈출(脫出)시켰다. 모두 예수님의 구원사업을 모형(模型)한 인물이다.
그러니까 하느님 나라를 원(願)하며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들이 세상의 명예(名譽), 재물(財物)로 만족, 안식하기 위해 세상의 논리(말)에 노예가 되어, 양다리 신앙으로 죄와 고난의 삶을 사는 오늘 날 우리들을 그 죄와 고난의 삶에서 탈출시키기 위해, 참 자유, 참 만족, 안식을 주시기 위한 하느님나라 완성에 관한 논의(論議)를 하신 것이다.
아직 성령(聖靈)을 받지(믿지) 못한 베드로는 알 수가 없다.~
4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하늘 성전(聖殿), 생명의 빛이신 그 셋의 죽음과 부활의 주님을 깨닫지 못하니 땅의 셋으로 준비(準備)하는 엉뚱한 소리를 한다. 우리(나) 삶의 모습을 보라 하신다.
<사제께서> 베드로는 수난(受難)을 뛰어넘어 부활의 영광(榮光)에로 바로 직행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베드로의 모습을 보면서 ‘참 내 자신의 모습이구나.’ 하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당신의 세 제자들에게 이러한 모습을 보여주시는 이면(裡面)에는 이 행복한 순간에 머물러 있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 행복(幸福)의 순간을 기억(記憶)하면서 앞으로 닥칠 ‘수난(受難)과 죽음 앞에서 힘을 내라’고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앞으로 닥칠 엄청난 고난(苦難)을 이겨 나갈 수 있도록 천상의 모습을 잠시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닥치는 고난, 사건들은 육신의 욕망(慾望), 그 자아(自我)를 부수셔서 구원으로 다시 세우시기 위한 하느님의 훈육(訓育)이다. (히브123,7-11)
5 베드로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었다. 그리고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6 이 소리를 들은 제자들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 채 몹시 두려워하였다.
= 구름은 하느님의 현존(顯存)을 뜻한다. 하느님께서 세상의 힘, 논리는 구원의 진리가 아니니 부인(否認)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구원의 진리로 ‘들어라(믿어라), 따라라’ 하신 것이다.
‘사람의 말은 실수(失手)로 독(毒)이 가득하다 그러니 온 몸을 더럽혀 행로(行路)를 바꿔 하늘이 아닌 땅(지옥)으로 이끄는 화(禍), 불이 되지 않도록 자신의 말(입)에 재갈을 물리라.’ (야고3,1-10)는 말씀이다.
사람의 말로 하느님 나라를 전(傳)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구원의 길, 진리로 전(傳)하라는 것이다.
*소리, 히브리어 ‘콜’이다. 콜을 파자하면 ‘코프’와 ‘라메드’다. *코프- 파괴하고 다시 세우다. *라메드- 교훈하다. 가르치다.
그러니까 새롭고 살아있는 길, 곧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代贖), 새 계약의 말씀으로, 제사(祭祀)와 윤리(倫理), 옛 계약의 사람을 부셔 버리고 부인(否認)하도록 가르쳐서, 다시 하늘을 향해, 곧 ‘하느님의 뜻을 향해 똑바로 서라’는 말씀을 *다시 하신 것이다.
(2코린5,17) 17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히브10,19-20) 19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의 피(새 계약) 덕분에 성소(하늘)에 들어간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20 그분께서는 그 휘장을 관통하는 새롭고도 살아 있는 길을 우리에게 열어 주셨습니다. 곧 당신의 몸을 통하여 그리해 주셨습니다.
(갈라6,14-15) 14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십자가에 못 박혔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15 사실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새 창조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 (~아멘)
7 예수님께서 다가오시어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8 그들이 눈을 들어 보니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하고 명령하셨다.
= 우리는 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질병)로 죽으셨고,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다시 되살아 나셨다는 것을....
그러니까 보이는 기적(奇蹟)과 능력(能力)의 예수도 아니고, 우리의 죄(罪)로 죽으신 예수도 아니고, “죽으셨다 부활(復活)하신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를 말하라”는 것이다. 죽었다 살아남. 그 모든 것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신 그 창조주(創造主)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구원의 일’이라는 것을 전(傳)하라는 말씀이다. (1코린15,35-38참조, 꼭 보시기를)
* 요즘 매미들이 한창 소리를 질러댄다. 7년을 땅속에서 살다. 땅 위로 나와 10일을 살며 내는 소리다. 곧 땅(세상)의 것을 추구하며 그 결함(缺陷)이 있는 쉼, 안식(7), 충만(10)을 위해 사는 이들아 너희들의 그 불안의 옛 사람을 부수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참 쉼, 안식(7), 충만(10)을 누리는 새 사람으로 다시 서라’는 하느님의 소리로 들린다.
(갈라6,7-8) 7 착각하지 마십시오. 하느님은 우롱당하실 분이 아니십니다. 사람은 자기가 뿌린 것을 거두는 법입니다. 8 자기의 육에 뿌리는 사람은 육에서 멸망을 거두고, 성령에게 뿌리는 사람은 성령에게서 영원한 생명을 거둘 것입니다.
= 말씀을 육(肉)의 뜻, 의(義)를 위한 소리로 들으면 멸망(滅亡)이며, 하느님의 뜻을 깨닫고 믿게 해 주실 성령(聖靈)을 의탁(依託)하면 생명(生命)이다.
(로마8,1-2.10)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이들은 단죄를 받을 일이 없습니다. 2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법(새 계약)이 그대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었기 때문입니다. 10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 몸은 비록 죄 때문에 죽은 것이 되지만, 의로움(믿음) 때문에 성령께서 여러분의 생명이 되어 주십니다.
= 우리 인생(삶)은 우리의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숨, 성령(聖靈)으로 살아지는 것임을 놓치면 안 된다.
(요한1,4) 4 그분(말씀-예수)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은총이신 천주의 성령님!
실수로 독을 주는 선악의 말, 그 사람의 말이 아닌, 악을 선이 대속하고 용서, 생명을 주는 예수님의 말씀만을 듣고 말하게 하소서. 그래서 “죽기 전에 하느님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오는 것을 더러는 볼 사람이 있다.” 하신 그 ‘더러’ 안에 들게 하소서, 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