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4주일]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마태11,25-30)

2023. 7. 9. 오전 7:5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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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09일 일요일


[연중 제14주일]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마태11,25-30)

 




1독서<보라, 너의 임금님이 겸손한 모습으로 너에게 오신다.>(즈카9,9-10)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9 “딸 시온아, 한껏 기뻐하여라. 딸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보라, 너의 임금님이 너에게 오신다. 그분은 의로우시며 승리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겸손하시어 나귀를,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10 그분은 에프라임에서 병거를, 예루살렘에서 군마를 없애시고 전쟁에서 쓰는 활을 꺾으시어 민족들에게 평화를 선포하시리라. 그분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강에서 땅끝까지 이르리라.”

 

화답송 시편145(144),1-2.8-9.10-11.13ㄷㄹ-14(1) 저의 임금이신 하느님, 영영 세세 당신 이름을 찬미하나이다.

저의 임금이신 하느님, 당신을 높이 기리나이다. 영영 세세 당신 이름을 찬미하나이다. 나날이 당신을 찬미하고, 영영 세세 당신 이름을 찬양하나이다.

주님은 너그럽고 자비하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넘치시네. 주님은 모두에게 좋으시며, 그 자비 모든 조물 위에 내리시네.

주님, 모든 조물이 당신을 찬송하고, 당신께 충실한 이들이 당신을 찬미하나이다. 당신 나라의 영광을 노래하고, 당신의 권능을 이야기하나이다.

주님은 말씀마다 참되시고, 하시는 일마다 진실하시네. 넘어지는 누구라도 주님은 붙드시고, 꺾인 이는 누구라도 일으켜 세우시네.

 

2독서<성령의 힘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입니다.>(로마8,9.11-13)

9 하느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사시기만 하면, 여러분은 육 안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게 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을 모시고 있지 않으면, 그는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11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분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사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사시는 당신의 영을 통하여 여러분의 죽을 몸도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

12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우리는 육에 따라 살도록 육에 빚을 진 사람이 아닙니다.

13 여러분이 육에 따라 살면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힘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입니다.

 

복음<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마태11,25-30)

25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26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27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28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30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202379일 연중 제14주일 제1독서 (즈카9,9-10)

 

'즈카르야''야훼(Ja/)께서 기억하시다(Zkar/즈카르)'라는 뜻을 가진 이름이다.

즈카리야서는, 하까이와 동시대의 인물로 기원전 6세기 말경에 활동한 즈카르야의 메시지와 기원전 4-3세기에 활동한 '익명의 예언자'의 메시지를 함께 수록한 것으로 보인다.

이 두 예언자와 그들의 메시지를 구분하기 위해, 1-8장을 '1 즈카르야서', 후대에 활동한 익명의 예언자의 메시지라고 보는 9-14장을 '2 즈카르야서'라 부른다.

그리고 '2즈카르야서'도 익명의 두 저자에 의해 기록된 두 개의 작품(91-1117/121-1421)을 어느 편집자가 합쳐 놓았다.

익명의 두 저자가 전한 주요한 메시지는 <종말론적인 구원과 메시아에 대한 희망>이다.

이는 기원 전 4세기 말경부터 시작 된 헬레니즘 문화와 유대교의 충돌, 이집트와 시리아의 지배속에서 실의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에게 희망을 주기 위한 것이라 추정된다.

그러니까 ' 2 즈카르야서'의 시대 배경은 기원 전 4세기 말에서 기원 전 2세기라 할 수 있다.

오늘 독서에서도 이스라엘(=시온=예루살렘)을 딸로 부르며, 구원자(메시아)로 오시는 주님은 어머니의 표상을 지닌다.

 

"겸손하시어 나귀를,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시는"(즈카9,9) 그분은 '평화의 왕(임금)' (즈카9,10참조)이시며, 하느님 왕국을 종말론적으로 완성할 메시아임을 예표한다.

특히 '2즈카르야'가 예고하는 메시아는 영광스럽고 힘있고 강한 통치자가 아니다.

가난한 이들의 임금이다. 그는 백성에게서 배척받고 죽임을 당하지만, 결국 그의 수난과 죽음이 백성을 정화시켜 죄에서 구원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런 메시아 사상은 복음사가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밑바탕이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2즈카르야'가 예고한대로 백성에게서 배척당하고 그들의 죄를 대신하여 자신을 대속 제물로 내어 주신 메시아 이시다.

 

오늘 독서의 즈카르야서의 말씀은 마태오 214-5절에서 그대로 성취된다.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일이 일어난 것이다. 딸 시온에게 말하여라. 보라. 너의 임금님이 너에게 오신다. 그분은 겸손하시어 암나귀를, 짐바리 짐승의 새끼,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즈카 9,9/이사62,11)

어른이 나귀를, 그것도 어린 나귀를 타면 어떻게 되는가? 참 볼품이 없다. 손가락질이나 비아냥을 받을 수 있다.

그만큼 인류구원사업이라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십자가와 죽음이 놓여 있는 예루살렘으로 어린 나귀를 타고 들어가는 예수님의 모습은 십자가의 어리석은 바보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인류를 죄와 죽음과 사탄의 권세에서 해방시키시고 사흘만에 영생을 주시기 위해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와 함께 현존해 계신다. 그리고 교회를 통한 당신 구원 사업에 우리의 협력을 구하신다.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는 그분을 등에 태우고 모신 나귀들이다.

 

나귀는 주인이 이리 가라면 이리 가고, 저리 가라면 저리 가야 한다. 수많은 군중이 겉옷을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호할 때, 주님을 본 것이지 나귀를 보고 외친 게 아니다.

우리는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착각하고 주님께 돌아갈 영광을 가로챌 때, 주님은 나귀에서 떨어져 버리신다.

성녀 소화 데레사는 <나는 예수님이 가지고 노는 공>이라 했다. 오상의 성 비오신부님은 <나는 예수님이 사용하시는 빗자루>라 했다. 공이 든 빗자루든 필요할 때 사용하고는, 그 다음 한쪽에 쳐박아 둔다.

주님이 우리를 도구로 사용하든 안 하든 마음대로 쓰실 수 있도록 자신의 성소의 한계와 분수를 알아야 한다. 바로 이것이 쓰임받는 도구의 겸손이요 기본이다.

 

 

 


 


 

연중 제14주일 복음 (마태11,25-30)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한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마태25~26)

 

원문은 '아버지''하늘과 땅의 주님'이 따로 분리되어 있다. 여기서 '아버지'에 해당하는 '파테르'(pater)는 호격이다.

사실 예수님만이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었는데, 그 이유가 마태오 복음 1127절에 나타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아버지의 독특한 친밀성을 표현하기 위해서 '나의 아버지'라고 부르기도 하였다(마태26,39.42).

하지만 유다인들은 이것을 빌미로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예수님을 신성모독이라는 죄명으로 죽이고자 했다(요한5,18).

'아버지'라는 호칭은 그만큼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친밀성을 드러내는데 적합한 용어였지만, 무지한 유다인들의 눈에는 그것이 하느님을 망령되이 부르는 신성모독적 언행으로 비쳐진 것이다.

한편, '하늘과 땅의 주님'이라는 말은 사도 바오로에 의해서도 사용되었다(사도17,24).

그리고 창세기 1419절에도 '하늘과 땅을 지으신 분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이라는 표현이 발견되는데, 여기에는 '하늘과 땅의 창조주'(Maker of heaven and earth)라는 의미가 들어있다.

 

흥미롭게도 창세기 1419절에서 이 말을 했던 사람은 살렘 임금 멜키체덱이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멜키체덱의 반열을 따른 영원한 대사제였다(히브6,20).

멜키체덱보다 이천여 년 뒤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예표하는 구약의 인물인 멜키체덱과 같은 말로써 하느님을 호칭함으로써, 하느님 아버지께서 창조주되심을 다시 한번 확증하셨던 것이다.

창조주이시기에 당신이 가지는 창조물에 대한 주권(이사64,8)을 높여 표현한 '하늘과 땅의 주님'이라는 호칭은 피조물인 인간이 하느님께 바쳐야 할 또 하나의 신앙 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신' '이것'은 무엇인가?

 

 

원문은 단수가 아니고 복수('타우타'; tauta: '아우타'; auta; them)이다.

그래서 이것은 단순히 한 가지 사실이나 가르침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복합적인 사건과 가르침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마태오 복음의 주된 관심사가 하느님 나라의 도래이며, 앞의 마태오 복음 1120~24절의 예수님의 책망과 심판 경고의 주된 이유도 하느님 나라의 복음 때문이었다는 것을 감안할 때, '이것'은 하느님 나라의 말씀에 대한 예수님의 활동과 가르침, 즉 복음을 의미한다.

 

한편, 본문에는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철부지'가 대조를 이루고 있다.

'슬기롭다는'에 해당하는 '쉬네톤'(syneton)'이해력을 가진', '신중한', '학식이 있는', '지성을 갖춘'이란 뜻이다.

보통 자칭 지혜롭다고 생각했던 바리새인이나 율법학자를 가리킨다고 말한다(마태23,24).

그러나 단지 그들만이 아니고, 마태오 복음 1116절에 나오는 '이 세대', 즉 예수님의 활동과 가르침을 받고도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모든 불신자들을 언급한다고 보아야 한다.

반면에 '철부지들'로 번역된 '네피오이스'(nepiois)'젖먹이', '경험없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어린 아이와 같이 단순하고 순수한 마음의 제자들' 혹은 '순박한 사람들'을 말한다.

 

본문은 많이 배워서 자기 스스로 사리분별에 신중하고 학식있는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의 지혜를 알지 못하고, 오히려 이제 젖먹이처럼 경험없고 순박한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의 지혜를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결국 하나의 아이러니같은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누구에게 당신의 진리를 나타내는가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고, 어떤 사람이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를 얻어 입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려는 데 있다.

 

끝으로,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한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에서 '아버지'로 직역된 '호 파테르'(ho pater)에서 정관사 ''(ho)가 사용된 것은 하느님과 예수님이 일반적인 부자(父子)관계가 아니라 유일하고 특이한 부자(父子) 관계임을 보여 주기 위해서이다(요한10,14.15).

더군다나 ''으로 번역된 '유도키아'(eudokia)'좋다', '잘되다'는 뜻의 부사 ''(eu)'생각'이라는 뜻을 지닌 것으로 추정되는 '도키아'(dokia)의 합성어로서 원래 '선의'(good will), '기쁘신 뜻'(good pleasure), '은혜로운 뜻'(gracious will)이라는 의미를 가졌다.

따라서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의 선하고 자비로운 뜻을 알고 있는 유일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감격적인 표현이 잘 담겨져 있다.

즉 하느님께서 누군가에게 당신의 뜻을 감추든지 감추지 않는지는 순전히 하느님의 기쁘신 뜻에 달려 있음에 대한 예수님의 전적인 동의가 나타나고 있다.

 

 



 

2023년 07월 09일 일요일

[연중 제14주일오늘의묵상 (허규 베네딕토 신부)

 

아버지하늘과 땅의 주님……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하느님을 어떻게 생각하여야 하는지 알려 줍니다.

감사드리다라는 표현은 본래 고백하다라는 의미에서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감사의 기도이면서 동시에 철부지 같은 사람들에게 드러내신

하느님의 신비를 아버지께 고백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감추고 드러내는 것은 하느님 신비의 계시를 의미합니다.

계시는 감추어진 것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계시를 통해서만 하느님의 신비를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예수님께서는 그분을 아버지라 부르시고 이제 유일한 관계 안에 제자들곧 모든 믿는 이도 함께하도록 초대하십니다.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하고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는 말씀은 이 유일한 관계를 잘 나타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그분께 기도드립니다.

단순한 호칭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아버지라는 말에는 많은 것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 이전 사람들은 하느님의 이름조차 부를 수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전지전능하시며 거룩하신 하느님의 이름을 사람의 입에 담는 것은 피하여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게 하십니다.

이렇게 그분께 다가가고그분과 친밀하게 관계를 맺으며그분을 알아 가게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더 이상 하늘 너머 높은 곳에 계시지 않고

예수님을 통하여 세상 안에서 함께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십니다.

이제 신앙인들도 하느님 아버지와 새로운 삶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안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연중 제14주일 복음] (마태11,25-30)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복음(마태11,25-30)

25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하늘과 땅의 주님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 하느님이 감추신 ‘이것’, 앞 23절 이하에서 카파르나움(나를 위한 고을, 성전), 곧 하느님의 뜻, 새 계약의 말씀인 그리스도의 대속(代贖), 그 하늘의 의(義)를 구원의 진리로 밎지 않고, 의지하지 않고 제사와 윤리, 그 인간들의 행위의 열심, 계명을 잘 지킨, 그 인간의 의(義)로 자신의 뜻을 이루며 또 하늘에 까지 이르려는 이들은 소돔, 고모라 처럼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라 하신 ‘이것’이다.

 

(예레23,14) 14 나는 예루살렘의 예언자들에게서도 *망측한 일을 보았다그들은 간음을 하고 거짓 속을 걷는다또 악을 저지르는 자(세상)들의 손을 거든다그리하여 *아무도 제 악에서 돌아서지 않는다그들은 모두 나에게 소돔처럼 되고 그 주민들은 고모라처럼 되어 버렸다.

= 하느님의 말씀을 인간들(세상)의 법(法), 계명(誡命)으로 가르치는 것이 하느님과 분리, 이혼시키는 간음(姦淫), 악(惡), 거짓, 곧 죽음의 길이다.

‘신학(神學)이 믿음의 신앙을 망쳤다’는 말이 있듯이 본문 25절은 하느님의 말씀은 학위(學位)받는 박사(博士)들 보다 철부지들이 더 잘 받아들인다는 말씀이신 것이다.

 

26 그렇습니다아버지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이사29,14) 14 나는 이 백성에게 놀라운 일을놀랍고 기이한 일을 계속 보이리라그리하여 지혜롭다는 자들의 지혜는 사라지고 슬기롭다는 자들의 슬기는 자취를 감추리라.”

 

(1코린3,19) 19 이 세상의 지혜가 하느님께는 어리석음이기 때문입니다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지혜롭다는 자들을 그들의 꾀로 붙잡으신다.”

 

27ㄱ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 하느님은 첫 사람 아담에게 세상의 권한을 넘겨주셨다.(창세1,28 2,15-19참조) 그러나 자신의 욕망 때문에 뱀(악)의 유혹에 넘어가 그 세상의 권한을 빼앗기고, 넘겨주고 말았다.(창세3,1-8 루가4,6참조) 그래서 모든 인간들(세상)은 악마(죄)의 지배(거짓 가르침)를 받다가 끝내는 영원한 죽음에 갇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아버지, 사랑의 하느님께서는 그냥 계실 수가 없으셨다.

그래서 당신의 백성, 자녀들을 구(求)하시기 위해그들의 모든 죄(罪)를 예수님께 넘겨주셨고, 그 넘겨받으신 우리 죄(罪)의 목숨 값으로 십자가(十字架)에서 대신(代身) 죽으심으로 믿는 우리가 새 생명, 구원을 넘겨받게 된 것이다.

 

(1코린15,22) 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날 것입니다.

 

(갈라3,22) 22 성경은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어 놓았습니다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믿는 이들이 약속을 받게 되었습니다.

 

27ㄴ 또 아들 외에는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 ‘말씀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다.’ 말씀을 통하지 않고서는 절대 하느님 아버지를 알 수가 없다.

 

(요한6,37) 37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올 것이고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 하느님께서 미리 선택(選擇), 정(定)하신 이들을 넘겨주심이다.

 

(에페1,11) 11 만물을 당신의 결정과 뜻대로 이루시는 분의 의향에 따라 *미리 정해진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한몫을 얻게 되었습니다.

= 한 몫, 믿음으로 얻는다.

 

(1베드1,2) 2 하느님 아버지께서 *미리 선택하신 여러분은 성령으로 거룩해져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하게 되었고또 그분의 피가 뿌려져 정결하게 되었습니다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풍성히 내리기를 빕니다.

= 성령(聖靈)의 이끄심으로, 그리스도의 피로 거룩, 깨끗해진다.

 

(로마8,29-30) 29 하느님께서는 *미리 뽑으신 이들을 당신의 아드님과 같은 모상이 되도록 미리 정하셨습니다그리하여 그 아드님께서 많은 형제 가운데 맏이가 되게 하셨습니다. 30 그렇게 *미리 정하신 이들을 또한 부르셨고부르신 이들을 또한 의롭게 하셨으며의롭게 하신 이들을 또한 영광스럽게 해 주셨습니다.

= 하느님께서 의롭게, 영광스럽게 만들어 가신다. 그때 필요한 것이 우리의 살이 되어버린 세상의 힘들을 떼어내는 자기 버림, 부인(否認)의 고통, 시련이 동반될 수밖에 없다. 구원(救援)의 말씀을 믿지 않고 자신의 뜻을 위한 행위의 길을 가는 자식 들에게 사랑(생명)의 매(枚)를 드시는 아버지시다.

 

(히브12,7) 7 여러분의 시련을 훈육으로 여겨 견디어 내십시오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자녀로 대하십니다아버지에게서 훈육을 받지 않는 아들이 어디 있습니까?

= 하느님은 포기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사탄(마귀)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을 간과(看過)해서는 않된다.(마태24,24) 그러나 하느님의 고집이 더 세시다.

그러니까 하늘의 의(義), 생명을 위한 믿음의 신앙이 아닌, 세상의 명예, 의(義), 재물(才物) 등을 내는 것으로 ‘쌓기 위한’ 결함있는 옛 계약(히브8,7) 그 율법(제사와 윤리)의 행위신앙(行爲信仰)을 고집하면 할수록 힘들다는 것이다.


28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 나를 부르신다, 예수님의 품에 안기는 시간으로~)

사람의 규정과 교리로 고생하는, 그래서 ‘신앙이 오히려 짐이 되어버린 이들아 오너라.’ 하신다. 그 절망과 고생길에서 돌아서서~~희망과 구원의 길인 하느님의 규정과 법규로 돌아오라 하시는 것이다.

 

(탈출15,23.25) 23 (이집트 탈출 후 과야길에~) 마침내 마라에 다다랐지만, 그곳 마라의 물이 써서 마실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다.

= 마라(아람어), 마리아(히브리어)- ‘쓴 물’

25 모세가 주님께 부르짖으니, 주님께서 *나무 하나를 보여 주셨다. 모세가 그것을 물에 던지자 그 물이 *단 물이 되었다. 그곳에서 주님께서는 백성을 위한 규정과 법규를 세우시고 그곳에서 주님께서는 백성을 시험하셨다.

= ‘쓴 물’에 ‘나무 하나’, 곧 십자나무(예수)가 들어가 썩어져서(죽어서) 쓴물이 단물이 되는, 곧 생명수가 되는 것이다. 다시~ 죄인이 예수님을 받아들이면 의인이 되는, 그것이 하느님의 구원의 규정과 법인 것이다.

십자나무의 희생, 그 의로움의 예수님이 구원(안식, 생명)의 길, 진리라는 것이다.

 

(2코린5,21) 21 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죄로 만드시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되게 하셨습니다.

 

(갈라2,21) 21 나는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게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율법(제사와 윤리)을 통하여 의로움이 온다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돌아가신 것입니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 온유(溫柔, 폴라우스-풀어주다) 겸손(謙遜, 타페이노스-하느님 앞에 낮은 자)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에 낮은 자세로 순종하셔서 우리를 묶고 있는 모든 죄의 법에서 풀어 해방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예수님 당신의 멍에 십자가로, 그러니 그 예수님의 십자가를 알아야(배워야)한다.

 

(갈라3,13) 13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스스로 저주받은 몸이 되시어,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 주셨습니다. 성경에 “나무에 매달린 사람은 모두 저주받은 자다.”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신명21,23) 23 그 주검을 밤새도록 나무에 매달아 두어서는 안 된다. 반드시 그날로 묻어야 한다. 나무에 매달린 사람은 하느님의 저주를 받은 자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상속 재산으로 주시는 땅을 부정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 내가 달려야할 십자가에 예수님께서 대신 달리셨으니, 그 예수님의 十字架가 내 십자가라는 것이다.

 

(1배드2,24) 24 그분께서는 우리의 죄를 당신의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 나무에 달리시어, 죄에서는 죽은 우리가 의로움을 위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분의 상처(십자가)로 여러분은 병이 나았습니다.

= 예수님의 멍에, 그분의 십자가로 얻는 의로움과 안식이다.

 

(마르8,34) 34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군중을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 사람의 계명, 도리, 그 의로움이 구원의 힘, 능력이 없음을 깨닫고 그동안 걸었던 길, 그 자신을 버리고(부인하고) 제 십자가, 곧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이 그분을 따르는 그분의 제자라는 것이다. 그러니 나의 죽음(부인)과 예수님의 죽음이 만나는 것이 구원이며 안식이라는 것이다.

물론 내 삶에서 일어나는 어려운 상황, 여건들, 그리고 힘들게 하는 가족과 이웃들을 내 십자가로 지고 가야 한다. 그럴 때 예수님을 모른다면, 절망과 미움과 악의, 그 죄를 어떻게 할 것인가~ 그때 그 죄를 대속하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라는 것이다.

엊그제 봤던 그 중풍병자에게 주님께서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신 그 말씀을 기억하자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모르는 내 현실의 십자가는 희망이 없는 죽음으로 끝날 뿐이다.

 

30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아멘.

 

*함께 묵상을 나눈 교우님의 신앙체험을 소개합니다.

저는 세례받고 얼마 되지 않은 때에 구역의 한 자매님으로부터 무서운 큰 충격적인 말을 신앙의 조언으로 듣고, 불안과 공포증에 시달리기 시작했고, 본당 신부님의 말씀대로 매일미사를 열심히 다니면서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으나, 마음 한가운데에는 늘 큰 무거운 근심 덩어리가 있었습니다.

그 후 모 수도원에서 마음을 정화하는, 전 삶을 되돌아보는 프로그램에 참석해서 열심히 했었는데 오히려 그것이 화근이 되어 급기야는 정신과 약을 꽤 오랫동안 먹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더 본당의 모든 전례와 행사에 빠지지 않고 지구봉사와 철야기도, 그리고 온갖 피정을 찾아 다녀 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 어떤 피정, 어떤 가르침을 들어도, 신부님의 강론 말씀도 도덕과 윤리의 말씀이셨기에 안식(쉼)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신앙이 오히려 무거운 짐이였습니다. 급기야 점점 더 심해져서 하던 모든 활동을 전부 중단했습니다. 그리고 집에서 성경을 붙들고 씨름하기 시작했습니다. 할 것이 그것밖에 없었습니다.

그동안 여러 본당, 활동, 종교행위, 행사에 더 열심했고 묵주기도도 남들보다 더 열심히 했습니다. 본당에서 시키는 일은 다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제대로 본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일 성경을 봤습니다. 처음엔 말씀을 보는 것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무서웠습니다. 사랑의 하느님이 느껴지지가 않았습니다. 도덕과 윤리로 봤으니까요. 그래도 성경을 보고 또 보았습니다.

다른 것은 다 해봤고, 모든 것이 소용없음을 너무 잘 알았기에 해보지 않았던 성경말씀에 희망을 걸어 보기로 작정하고 매달렸던 것입니다. 성경을 붙들고 온 방을 헤매며 울며 매달렸습니다. 어느 순간 조금씩 마음의 안정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말씀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말씀이 내 안에서 활동하신다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어는 사제에게도 배우지 못하고 들어보지도 못한 성경 말씀이 깨달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성령께서 가르치신다는 말씀이 실감 났습니다. 그렇게 말씀 안에서 말슴이 주시는 쉼, 안식의 삶을 요즈음은 살고 있습니다. 인간의 머리로는 알 수 없다는 그 무한한 하느님의 사랑속에 살고 있습니다.

말씀을 깨닫기 시작하면서 화가 나기도 했습니다. 왜? 하느님의 말씀을 못 받고 사람의 말을 받아 너무나 힘든 시간, 헛된 시간을 살았나~ 왜 사람의 법규와 규정과 교리에 묶여 무거운 짐 같은 신앙을 살았나~ 억울한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시간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음에 감사할 뿐입니다.

요즘, 코로나로 미사 드리지 못하고 성체도 못 모셔, 많은 이들이 힘들어 하지만 저는 그 미사와 성체의 실체이신 말씀이신 주님과 함께 생활하니 든든합니다. 성경을 하느님의 뜻으로 먹고 자고 하는 이 시간이 행복합니다.

오늘도 ‘오라’하시는 그 말씀 안에서 살렵니다. 하느님의 지혜를 보고 들을 수 있도록 눈과 귀를 열어주신 삼위일체 하느님, 찬미와 감사와 영광 드립니다. 

 

 거룩하신 천주의 성령님!

저희 모두의 마음을 충만하게 하소서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아버지의 나라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에서도 이루어지소서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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