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2주일] 제 십자가를 지고 (마태16,21-27)

2023. 9. 3. 오전 6:4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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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03일 일요일

[연중 제22주일] 제 십자가를 지고 (마태16,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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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독서<주님의 말씀이 저에게 치욕만 되었습니다.>(예레20,7-9)

7 주님, 당신께서 저를 꾀시어 저는 그 꾐에 넘어갔습니다. 당신께서 저를 압도하시고 저보다 우세하시니 제가 날마다 놀림감이 되어 모든 이에게 조롱만 받습니다.

8 말할 때마다 저는 소리를 지르며 폭력과 억압뿐이다!” 하고 외칩니다. 주님의 말씀이 저에게 날마다 치욕과 비웃음거리만 되었습니다.

9 ‘그분을 기억하지 않고 더 이상 그분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으리라.’ 작정하여도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 제가 그것을 간직하기에 지쳐 더 이상 견뎌 내지 못하겠습니다.

 

화답송 시편63(62),2.3-4.5-6.8-9(2) 주님, 저의 하느님, 제 영혼 당신을 목말라하나이다.

하느님, 당신은 저의 하느님. 저는 새벽부터 당신을 찾나이다. 제 영혼 당신을 목말라하나이다. 물기 없이 마르고 메마른 땅에서, 이 몸은 당신을 애타게 그리나이다.

당신의 권능과 영광을 보려고, 성소에서 당신을 바라보나이다. 당신 자애가 생명보다 낫기에, 제 입술이 당신을 찬미하나이다.

이렇듯 제 한평생 당신을 찬미하고, 당신 이름 부르며 두 손 높이 올리오리다. 제 영혼이 기름진 음식으로 배불러, 제 입술이 환호하며 당신을 찬양하나이다.

정녕 당신은 저를 도우셨으니, 당신 날개 그늘에서 환호하나이다. 제 영혼 당신께 매달리오면, 당신 오른손이 저를 붙드나이다.

 

2독서<여러분의 몸을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로마12,1-2)

1 형제 여러분, 내가 하느님의 자비에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

2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

 

복음<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려야 한다.>(마태16,21-27)

21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

22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23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24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25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26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27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

 



 

연중 제22주일 제1독서(예레20,7~9)


"'그분을 기억하지 않고 더 이상 그분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으리라.' 작정하여도,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 제가 그것을 간직하기에 지쳐 더 이상 견뎌 내지 못하겠습니다." (9) 


예레미야서 20장 9절에서 예레미야는 앞선 20장 8절의 이유 때문에 자신의 예언직 사명을 포기하겠다는 의중을 밝히고 있다. 


'내가 그분을 기억하지 않고' '더 이상 그분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으리라'라는 고백은 사명을 단념하고 싶은 그의 바람이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자신의 이러한 생각을 현실화시킬 수 없었다. 그 이유가 20장 9절 후반절에서 제시되고 있는데, 여기서 예레미야는 자신의 심장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불붙는 것 같다고 토로한다. 


여기서 '불'  '에쉬'(esh; fire) 불신앙과 우상숭배의 죄로 물든 남부 유다를 향한 '주님의 분노'를 상징하는 표현으로 종종 사용되었었다(예레4,4; 15,14; 17,4). 이것을 감안할 때 그 심장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불붙는 것 같다는 예레미먀의 토로는 이미 그 심장에 그 심판의 말씀의 불이 떨어지는 듯한 뉘앙스를 전달한다. 

즉 그는 그 심장으로 이미 백성들의 심판받는 장면을 생생하게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너무나도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것이 아닐 수 없었다. 


그가 자신의 치욕과 비웃음거리로 인하여 더 이상 이것을 전하지 않으려 해도 자신이 당하는 치욕보다 백성들이 당할 처절한 고난, 불같은 시련과 고통을 느끼고 있었기에 이것을 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견디다', '참다'라는 뜻으로 사용되는 '쿨'(kul)이라는 동사가 주님의 분노를 담아둘 수 없다고 진술하는 예레미야서 6장 11절의 표현을 보면 분명해진다. 


그리고 '심장' '뼛속'(골수)는 둘 다 에레미야의 내부를 가리킨다. 또한 '가두어 둔'으로 번역된 '아추르'(atsur; shut up) '닫다'(신명11,17), '가두다'(예레39,15)라는 뜻을 지닌 '아차르'(atsar) 수동 분사형으로서 불이 '뼛속'에 '갇혀 있다'는 의미이다. 

즉 본문은 주님을 선포하지 않고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으면 마치 타는 불이 뼛속에 갇혀 있는 것처럼,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 갇혀서 불처럼 타오른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심판의 말씀, 피멸의 말씀을 전함으로 말미암아 온갖 시련을 당하며 치욕과 조롱을 감당하다가 이를 주체할 수 없어서, 그야말로 감당조차 할 수 없어서 예레미야는 주님께서 자신을 속이셨다고, 더 이상 이 일을 하지 않겠다고 되뇌였지만, 그 내면 깊숙한 데에서는 주님을 향한 열정과 동족의 암담한 미래의 참상으로 인한 염려와 고통이 불처럼 타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제가 그것을 간직하기에 지쳐 더 이상 견뎌 내지 못하겠습니다.'


여기에 해당하는 원문은 '웨닐르에티 칼레켈 웰로 우콜'(wenillethi kallekel wello ukal)이다. 다시 번역하면, '그리고 저는 간직하기에 지쳤습니다. 그리고 저는 더 이상 극복할 수 없습니다' (And I have been weary of containing, and indeed I am not albe)라고 할 수 있다.

먼저 '더 이상 견뎌 내지'에 해당하는 '웨닐르에티 칼레켈'(wenillethi kallekel)에서 '웨닐르에티'는 접속사 '와우'(wau) '피곤하다','지치다','기진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라아'(laah)의 수동형이 결합한 형태이다. 그리고 '칼레켈' '(그릇에) 담다'라는 의미를 지닌 '쿨'(kul)을 원형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이것은 어떤 것을 더 이상 담아둘 수 없도록 기진하여 지치게 되었음을 나타내는 표현이며, 자신이 제어할 수 없는 내적인 원동력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음을 나타내는 신앙고백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 끓어오르는 열정을 결코 제어할 수 없었다는 역설적인 표현으로 알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고백은 비슷한 의미의 '웰로 우칼'(wello ukal; '나는 결코 극복할 수 없습니다')라는 고백으로 다시 한번 강조가 되고 있다. 


주 하느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예언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것을 명령하시면서 또한 하느님 자신의 마음을 예레미야에게 심으셨다. 때문에 주님의 분노는 곧 예언자의 심장에 불을 붙였고, 그 분노의 불은 그의 내면 가장 깊숙한 곳이라고 할 수 있는 뼛속에 담겨지게 된 것이다.  

예언자가 더 이상 주님을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을 말하지 않기로 결심하는 순간, 그 불은 그 속에서 활활 타오른다. 결국 그는 그 타는 불을 그 속에만 담아두고 밖으로 발산하지 않으려고 애쓰지만, 기직맥진하여 지치고 만다. 그리고는 '주님이시여, 당신이 이기셨나이다'라고 선언한다. 


이처럼 하느님의 일을 감당하는 것이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중단할 수 없다고, 끝내 감당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할 수 밖에 없는 것, 그리하여 소명을 마칠 수 있는 것은, 말씀의 봉사자들 자신의 의와 신실함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봉사자들을 향한 하느님의 열정과 설복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말씀의 예언직과 사도직은 신약의 사도 바오로 서간에도 찾아볼 수 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2티모4,7) 


"사실은 내가 복음을 선포한다고 해서 그것이 나에게 자랑거리가 되지는 않습니다.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 내가 내 자유 의사로 이 일을 한다면 나는 삯을 요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는 수 없이 한다면 나에게 직무가 맡겨진 것입니다."(1코린9,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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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중 제22주일 복음(마태16,21~27)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23)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예수님께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시요, 그리스도이시라고 신앙고백을 한 사도 베드로가 예수님의 칭찬을 받고, 교회의 반석이 된다는 말씀을 듣고 천국의 열쇠까지 받는다. 

예수님께서는 사도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있은 후에 처음으로 내놓고, 당신이 어떻게 인류구원사업이라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게 되는지 수난에 대한 첫번째 예고를 하신다.  


사도 베드로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현세적이고 정치적인 메시아관이 무너지게 되는 수난과 죽음의 말씀을 예수님께서 하시니까, 부활하신다는 말씀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래서는 안된다고 예수님을 붙들어 자기 옆에 데리고 와서는, 자신의 말을 제발 들으라고 잡고 흔들면서 설득을 한다. 
사도 베드로가 얼마나 심하게 예수님께서 가셔야 할 길을 붙들고 막았으면, 예수님께서 돌아서서 그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23)하고 꾸짖으신다.    


종전에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신앙고백을 했던 그에게 사탄이라고 하신다. 얼마나 예수님께서 몸서리치시도록 당신의 일을 방해했으면, 이런 말씀, 구마(驅魔)를 하셨을까?  


원문은 "휘파게 오피소 무 사타나"(hypage opiso mu, Satana; Get behind me, Satan)이다. '사타나'(Satana) '대적자'(1사무 29,4; my adversary)를 의미하는 '사타나스'(Satanas)의 호격이다.
신약에는 36회가 쓰였는데, 34회가 모두 그리스도와 하느님 자체, 또는 그분의 일을 방해하고 대적하는 영적 세력인 '사탄'을 일컫는 말로 쓰였다. 그리고 두 번만 마르코복음 8장 33절과 마태오복음 16장 23절에서 사도 베드로에 대해서 쓰였다.
사도 베드로 역시 사탄의 세력에 사로 잡혀서 주님의 사명을 방해하는 자로 쓰임을 받았기 때문에, 그 순간에는 주님의 대적자였다고 할 수 있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전무후무한 가장 위대한 신앙고백을 했던 자가 너무도 쉽게 주님의 대적자로 전락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 전서 10장 12절에는 "그러므로 서 있다고 생각하는 이는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라고 말한다. 


주님께서는 그를 붙들고 당신이 이 세상에 오신 최종 목적이요 궁극 목적인 아버지의 인류 구원 사업을 위하여 반드시 걸어가야 하는 고난의 십자가의 길을 가지 못하도록, 거칠게 대드는 사탄의 조정을 받는 사도 베드로의 기(氣)에 조금도 눌리지 않으시고, 무서우리만치 단호하게 그를 뿌리쳐 버리신다.  


마태오 복음 16장 23절에서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자다)라고 말씀하신다.
'걸림돌', '넘어지게 하는 자' 해당하는 희랍어 '스칸달론'(skandalon) '올무'(탈출23,33), '함정'(탈출10,7)이란 뜻를 가진 히브리어 '모케쉬'(moqesh) '걸리다'(1사무 25,31), '걸치다'(이사57,14), '장애물'(레위19,14)이란 뜻을 가진 '미크숄'(mikshol)에 대한 70인역(LXX)의 역어이다. 다시 말해서 '스칸달론' '길에 놓아 걸려 넘어지게 하는 어떤 장애물(걸림돌)' 혹은 '다른 이를 범죄하도록 유도하는 일을 행함'이란 뜻을 가진다. 


본문에서 사도 베드로의 행위는 인류를 죄와 죽음과 사탄의 권세에서 해방시키는 영신적 메시아가 되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걸어가셔야 할 십자가의 구원의 길을 방해하는 걸림돌로서, 극단적으로는 하느님의 뜻을 어기도록 유도하는 범죄의 행위가 됨을 뜻한다. 


우리는 일상 생활속에서 언제 주님의 일을 방해하는 걸림돌이 되는가? 나의 현세적 욕심과 이기와 만족를 위해 주님이 나를 따라주기를 바라지 않는가?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우리 자신에게도 단호하게 사도 베드로처럼 사탄이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20230903일 일요일

[연중 제22주일] 오늘의 묵상 (정천 사도요한 신부)

 

지난 주일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당신을 메시아로 고백한 베드로 사도를 두고 다음과 같이 칭찬하셨습니다.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16,17-18).

그런데 곧바로 이어지는 단락인 오늘 복음에서는 베드로를 심하게 나무라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두 단락의 연속성을 고려할 때, 베드로에게 내려진 두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린다는 점이 눈에 띕니다.

저승의 세력도 이겨 낼 교회의 반석으로 뽑힌 베드로였지만, 곧바로 사탄이요 예수님의 걸림돌이라는 비난을 받게 됩니다.

또 하느님의 계시로 예수님의 본모습을 알아보게 된 베드로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하느님의 일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자로 취급을 받습니다.

도대체 그 짧은 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요?

문제의 발단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당신 수난을 예고하시는 장면에 있습니다.

베드로는 메시아께서 많은 고난을 받으시고 죽임을 당하셔야 한다는 운명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사도가 기대하였던 메시아는 임금으로 위풍당당하게 오시며 큰 권능과 강한 힘으로 원수들을 제압하시는 그런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의 예고처럼 아무런 힘도 써 보지 못하고 무력하게 쓰러져야만 하는 메시아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런 나약한 분이 어떻게 당신 백성을 구하실 수 있겠는가?’

예수님의 메시아 상이 자신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자, 당황한 베드로는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것이 하느님에게서 비롯된 구원 계획이라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가 메시아의 수난을 거부한다면 결국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거부하는 것이며, 이는 하느님의 가장 큰 적대자 사탄의 역할을 대신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메시아는 사람들의 기대와 다르게 정복당하심으로써, 그리고 그 십자가 운명에 순종하심으로써 당신 백성을 구하는 방법을 선택하셨습니다.

명예와 권력, 영광과 승리를 쫓는데 익숙한 세상에서 우리는 이 역설적인 구원의 신비를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보여 주듯이 사탄의 하수인이 되는 것은 그야말로 한순간입니다.

 

(정천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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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중 제22주일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마태16,21-27)

21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인 죄인들의 구원을 위한 십자가의 대속그 반드시 죽어야 할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마르10,45) 45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1요한2,2) 2 그분은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십니다우리 죄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십니다.

그 하느님의 뜻과 그분의 뜻을 이루시는 그 예수님을 모르고우리의 소원을 들어 주시는 예수님으로그 주님으로 섬기고 비는 신앙을 산다면 오늘의 베드로 처럼 되는 것입니다.


22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맙소사주님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일그분의 뜻을 반박한다(반박-꾸짖고 야단치다아직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했으니까...


23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내게서 물러가라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느님의 일그분의 계명 곧 십자가의 대속 그 하늘의 의로움이 아닌 인간들의 계명으로 열심히 지킨 자기 명예의로움을 위한 신앙을 살도록 하는 것그것이 사탄의 일인 것이다.

예수님의 대속 그분의 죽음의로움을 헛되게 하는 그 사람의 의로움을 위한 신앙이 불의(不義)인 것이다.

 

오늘2독서에서~

(로마12,1) 1 형제 여러분내가 하느님의 자비에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

하셨는데 인간의 의로움이 아닌(인간의 의로움은 개짐(똥걸레쓰레기)일 뿐십자가의 의로움 곧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더러운 양심까지 깨끗이 씻겨 거룩해진 산 제물로 바치는그 합당한 예배를 드리라는 말씀이다.


24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지금까지 간직하고 의지하며 살았던 세상의 말을 버리는곧 세상의 돈과 명예 영광 의로움 그 모든 것이 구원의 가치 능력 없음을 인정하는 自己否認그 버림으로 구원의 의로움십자가의 예수님을 진리로 따르라 하시는 것이다.


25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26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세상의 의로움자기 영광 그 을 위해 사는 이는 하늘의 생명을 잃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27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

세상인간의 계명(율법)을 따라 살았다면 그 법의 심판을 받을 것이고하느님의 계명 곧 나무 하나의 희생십자가의 대속 그 하늘의 진리를 따랐다면 그 십자가가 거저 주는 하늘의 용서와 의로움의 판결을 받을 것이다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위해 오셨고죽으셨다그 구원의 진리이신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우리는 신앙을 시작했다그러나 지금은 그 의 구원이 아닌 을 위한 신앙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니지~~

그 의 구원곧 하늘의 생명을 위해 세례로 진리의 성령을 선물로 받아 놓고(사도2,38참조그 하늘의 생명에는 관심도 없이 땅에 목숨곧 의 명예의로움을 위한 신앙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갈라3,1-3) 1 어리석은 갈라티아 사람들이여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모습으로 여러분 눈앞에 생생히 새겨져 있는데누가 여러분을 호렸단 말입니까? 2 나는 여러분에게서 이 한 가지만은 알고 싶습니다여러분은 율법에 따른 행위로 성령을 받았습니까아니면복음을 듣고 믿어서 성령을 받았습니까? 3 여러분은 그렇게도 어리석습니까성령으로 시작하고서는 육으로 마칠 셈입니까?

 

*주님

 예레미야처럼뼈 속에 가두어둔 주님의 말씀이 구원의 진리로 저희들의 마음심장 속에서 불타오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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