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로아스터교

2016. 2. 15. 오전 6:38:00

글자


 



 

"기독교 조로아스터교"

 


BC 6 세기경에 번성하기 시작한 조로아스터교는 인류사에 있어서 엄청난 영향을 남긴 종교였다.

전승에 의하면 짜라투스트라(Zarathustra)가 계시를 받고 종교를 창시한 것은 기원전 7세기라고도

한다. 이 종교는 유대교에 강력하게 영향을 끼쳤으며, 기독교와 이슬람교를 탄생시키게 된 결정적인

원류가 되었다.

(조로아스터는 짜라투스트라의 그리스식 발음이다).

 

조로아스터교(Zoroastrianism)는 이원론을 기반으로 한 일신교(一神敎)로, 고대 아리아인

(인도-이란 또는 인도-게르만)의 종교적 공유재산에 근원을 둔 신들이나 제령(諸靈)을 최고신

아후라 마즈다 아래 통괄하고, 우주를 선과 악의 두 원리로 설명한다.

강력한 이원론을 갖고 있던 이 종교는 '선과 악', '빛과 어둠'을 분명히 대비시키는 것은 물론,

이 세상은 악(惡)이 지배하는 세상이기 때문에 필연코 종말을 맞게 될 것이라는 사상을 지녔다.

 

그들의 경전인 아베스타(Avesta)의 교리에 따르면, 전지전능의 창조주인 아후라 마즈다 (Ahura Mazda)는 부족신 차원에서 탈피한 유일신이자 보편적인 빛의 신이다.

반면에 어둠의 신이자 악신 앙그라 마인유(Angra Mainyu. 후에는 아리만으로 불림)는 인간을 타락으로 이끌려고 한다. 앙그라 마인유는 아후라 마즈다와 동등한 존재로 간주되었는데, 악마가 진정으로 악의 주관자라면 태초부터 신과 동등한 존재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신이 악을 창조했다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후라 마즈다와 앙그라 마인유는 무한신 시공(Zurvan)이라는 하나의 통합적 우주 원칙으로부터 쌍둥이로 태어났다고 한다.

이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그들 스스로 마즈다 예배교(Mazdayasna: 마즈다야스나)라고 불렀는데,

마즈다는 '현명함', '빛으로 가득 찬'이라는 의미이고, 아후라는 베다의 아슈라(Asura)와 같은 말로,

인도-유로피안어에서 데바나 신 가운데 특출한 존재에 부여되는 명칭이다.

사실상 불을 숭배한다는 뜻의 배화교(拜火敎)는 올바른 표현이 아니다.

그들은 빛을 아후라 마즈다의 상징으로 여겨 불을 자주 사용했던 것일 뿐, 불 자체를 숭배했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 조로아스터교에 있어서 불은 정화(淨化)를 簒′磯?

기독교인들은 지옥을 떠올릴 때 흔히 '불 지옥'을 연상할 것이다.

쓰레기를 불에 태워 소각(燒却)하듯이, 더럽고 추한 것을 불로써 정화(淨化) 시키는 것이다.

불은 파괴적인 힘을 가졌으며 동시에 더러운 것을 깨끗이 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우상숭배 배격, 유대교에 영향끼져- 

짜라투스트라는 데바(daeva:악령들, 원래는 유명한 고대 인도-이란의 신들)는 선한 정령의 탈을 쓴 악령이며, 기만의 명수라며 기성 종교를 비판하고,  아후라 마즈다(지혜의 주)를 제외한 다른 신에 대한 제의를 거부했다. 특히, 그는 당시 만연했던 짐승을 잡아 제사 지내는 종교행위를 비난했다.

(그러나 이런 풍습은 너무나 뿌리깊은 것이었기에 모든 동물 희생제의를 폐지하지는 못했다고 일부 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역사가 헤로도토스(Herodotus)의 첫 번째 저서의 131번째 문장에 따르면, 페르시아 인들은 그들이 믿는 신들에 대한 어떠한 상도 없었고 신상을 만들고 숭배하는 것은  어리석음의 상징이라고 간주했다고 한다.


 

그들의 교리에 따르면, 이 세상은 3000년이 4번 반복되는 12000년 동안 지속된다고 한다.

짜라투스트라의 출생은 12000년 중 마지막 3000년이 시작됨을 나타낸다.

아베스타(Avesta)에는 짜라투스트라가 사망한 후 그의 정액이 페르시아의 한 호수 속에 기적적으로 보존되었다가 천 년 간격으로 세 동정녀가 그곳에서 목욕하여 위대한 인물을 잉태하게 된다.

3명의 구세주가 천 년의 간격으로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난다고 기록하고 있다.

 

-동정녀 잉태와 구세주 메시아 사상,재림,심판,부활,찬양,귀신들림 개념, 기독교에 절대 영향 줘-

첫 번째 구세주는 아우쉐타르(Aushetar)고, 두 번째는 아우쉐타르마(Aushetarmah)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3천년 후에 사오샨트(Saoshant)가 최후의 구세주로 출현한 후 세계의 종말이 시작된다.

구세주는 구원의 방법을 알려주고, 이를 따르는 인간들이 원래의 세상으로 환원하려는 노력을 하는 직선적 역사가 있게 되고 어느 시점이 되면, 아후라 마즈다는 로써 세상을 심판하게 된다.

그리고 어둠의 세상은 사라지고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고, 구세주가 재림하며 죽은 자와 산 자가 모두 부활하여 최후의 심판을 받게 된다.

갈라짐의 다리인 신바드(Chinvat) 다리에서 선인은 노래의 집으로 건너가고 악인은 거짓말의 집에 떨어진다. 천국에 해당되는 곳이 노래의 집이라는 교리는 흥미를 끈다.

천국에서 영원토록 신을 찬양한다는 기독교인들의 생각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으리라 본다.

또 모든 사람은 선과 악 사이에 일어나는 초자연적인 투쟁의 참가자이며 그러한 투쟁이 벌어지는 장은 지상과 개개의 인간 육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관념은 귀신들림에 대한 믿음에도 강력하게 영향을 주었다.)





-조로아스터교를 접하면서 유대교,기독교의 샤머니즘 사라져-

BC 6세기의 바빌론으로 끌려간 유대인들은 실질적으로 당시의 바빌론의 국교였던 조로아스터교에 접하게 되면서 유대교에 심오한 변화를 가져왔다.

사후세계에 대해서도 여호와에게 선택된 선지자까지도 지하세계인 쉐올에 간다고 생각했던 유대인들의 관념체제는 바빌론 유수를 거쳐 서서히 변화하게 된다.

기본적으로 유대인들의 여호와 신앙은 동물희생제사라는 샤머니즘의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유대사회에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이 서서히 스며들어가는 것은 거역할 수 없는 역사의 수레바퀴였을지도 모른다.

 

-조로아스터교의 메시아가 다윗 메시아사상으로 전이돼-

결국, 예수시대 훨씬 이전부터 동물제사를 거부하는 유대인들이 늘어가기 시작했다. 유대교의 영지주의자들이었던 에세네파나사렛파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벌어지는 동물제사를  거부했다. 모세오경과 동물희생제사를 중요하게 여기던 보수적 성향의 사두개파는 유대인들 사이에서서히 퍼져나가던 이런 새로운 종교관을 거부했다.

마태복음 22장 23절의 일화를 예로 들 수 있듯이, 보수적인 사두개파는 영혼의 세계를 부인한 반면 바리새파는 그것을 인정했던 것처럼 신약의 시대까지 에도 그러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구약에서도 부활심판의 교리와 메시아사상을 유대인에 맞게 변형시켜서 도입했다.

다니엘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유대인들은 조로아스터적 메시아 개념을 외국의 압제로부터 유대를

구원할 다윗과 같은 왕에 대한 기대로 변형시켜서 도입했던 것이다.



-예수의 광야 시험,3일만의 부활 등.. 기독교 제작에 절대 영향 줘- 

전승에 의하면 짜라투스트라가 스스로 광야로 가서 기도할 때 앙그라 마인유가 나타나 아후라 마즈다를 숭배하지 않겠다고 한다면 세상을 다스릴 권세를 주겠다고 말하지만 짜라투스트라는 강력하게 거부한다. 이것은 예수가 사탄에게 시험 당하는 대목과 거의 완전히 똑 같다. 그가 30세 무렵에 신의 계시를 받아 새 종교를 전파했다는 부분도 예수와 유사점을 보인다.

또, 영혼이 육체를 떠나기 전 무덤가에 3일 동안 머물러 있다고 하는 조로아스터교의 믿음은 미트라와 예수를 비롯한 수많은 구세주들이 3일만에 부활하는 신화에 영향을 끼쳤다. 아후라 마즈다(Ahura Mazda), 사오샨트(Saoshyant)와, 성령 천사장(Spenta Mainyu)의 삼위 일체와 구세주의 동정녀 탄생 역시 나중에 등장하는 메시아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예수 탄생 시 찾아왔다고 하는 세 사람의 동방 박사들도 바로 조로아스터교의 마기(제사장)로 추측된다. 기독교가 만들어질 당시 조로아스터교가 얼마나 당대의 최고 종교로서 절대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기독교 제작을 시작한 유대인들은 조로아스터교의 인증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것이 마기박사들의 예수 인정이라는 마태,누가 복음의 기독교 진화의 중간화석이다.




"조라다슈트(조로아스터)의 예언대로 지혜의 사람들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가지고 동쪽에서   예루살렘에 와서는 아기를 숭배하고 선물을 바쳤다."  [윌리스 반스토운/ 숨겨진 성서 2권 /이동진 역/ 문학수첩 P.66]

 

괄호 안의 조로아스터라는 글자는 필자가 덧붙인 것이 아니다. 어쨌든 예수가 공생애를 하기 전까지 어린 시절을 담은 이 외경은 당시 네스토리우스파를 비롯하여 많은 교단에서 다른 복음서와 함께 일반적으로 사용했을 정도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동방박사를 조로아스터교의 사제로 여기던 기독교의 전설은 이 외경에서 비롯된 걸로 보인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수세기전에 짜라투스트라가 말한 구세주 탄생의 예언이 예수를 통해 이뤄졌다고 생각한 것 같다.

 

한편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짜라투스트라가 주창한 원래의 유일신관이 흔들리면서, 조로아스터교의 이단이라고 부를 수 있는 종교들이 파생되기 시작한다. 옛 아리아인의 자연신들이 조로아스터교에 침투해 아후라 마즈다의 힘을 나누어 가지는 강력한 존재가 되기도 했다.  스펜타 마인유는 하위신격인 야자타(Yazata)천사보다 덜 중요하게 되었고, 야자타 중 하나였던 미트라는 대중의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심지어 아후라 마즈다, 미트라(Mithras), 아나히타(Anahita)여신을 삼위일체로 여기는 이단적인 믿음도 퍼져나갔다. (참고로 조로아스터교도들도 이쉬타르를 아나히타와 동일시 하기도 했다)

미트라 신은 조로아스터교가 등장하기 훨씬 전부터 있던 옛 아리아인의 신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미트라는 조로아스터교의 강력한 영향력 때문에 하위신격인 야자타 천사로 격하 되었다가, 결국 조로아스터교의 주요교리를 흡수하고 독자종교가 되기도 했다.

 

도덕적인 갱생의 추구를 중요시하게 여겼던 짜라투스트라의 사상은, 후기에 이르러서는 제의적인 청정(淸淨)의 추구가 중요하게 여겨지기 시작했다. 인간의 시신과 접촉하는 것이 가장 큰 오염이었는데, 그 경우 물이나 소의 소변으로 오염을 씻었다. 살아있는 몸에서 절단된 부분도 모두 부정한 것이고, 내쉬는 숨도 부정한 것이다.

한편 짜라투스트라가 거부했던 하오마즙으로 만든 술을 바쳐 악을 쫓기도 했고 과거의 주술도 다시 침투했다. 악령 퇴치를 위한 강력한 만트라(manthra. 베다와 힌두교의 mantra)를 사용했으며, 그 내용은 가타에서 뽑은 구절이었는데, "그 뜻을 이해하든 못하든 간에 정확하게 외우기만 하면 신통력이 발휘"한다고 믿어졌다.

강력한 유일신교가 서서히 이민족 종교와 결합되어가는 과정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사산왕조의 붕괴로 이슬람교의 영향권 아래에 놓이게 된 조로아스터교는 급속한 몰락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아랍 정복자들은 개종을 강요하지 않았지만, 엄청난 숫자의 신자들이 인도로 이주했고 이들은 파르시인(페르시아인)이라 불렸다. 현재 이란남부에는 소수의 조로아스터교인 들이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최고신 아후라 마즈다를 비롯하여, 악령으로부터 사람을 보호하고 성화를 지키는 미흐르(Mihr =미트라)와, 미흐르를 도와 인간을 악으로부터 보호하는 사로쉬(Sarosh)같은 수많은 하위신격들을 함께 믿는점으로 보아, 오늘날 이란의 남부지역에서 명맥을 잇고 있는 조로아스터교는 상당히 많은 변질을 겪은 후기종파에 해당되는 것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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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세폴리스(Persepolis)의 조로아스터교 유적 (이란)

페르세폴리스           

 

이란 남서부 팔스지방에 있는 아케메네스왕조의 수도였다. 그리스어로 '페르시아의 도시'를 의미한다. 페르시아인들은 '파르사(Parsa)'라고 부른다.

파르사는 파르스에서 유래했는데, 파르스 지방 또는 파르스 지방에 사는 사람들을 말한다. 페르시아 제국은 파르스에서 시작되어, 파르사는 제국의 이름이면서 동시에 수도로 사용되었다.

페르세폴리스는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 제국의 왕궁으로, 다리우스 1세가 기원전 518년에 건설을 시작하였다. 그 위업은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에 이어졌고, 손자인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 시대(기원전 460년경)에 거의 완성되었다.

인공의 테라스 위에 조영된 왕궁은 세 방향을 벽돌 성벽이 둘러싸고, 북쪽과 동쪽은 구릉을 등지고 있다. 테라스 전체는 약 460×280m이고 높이는 12m였다고 한다. 북서쪽의 거대한 테라스를 계단처럼 오르면 ‘크세르크세스의 문(만국의 문)’이 나온다. 이 문이 유일한 성문이며, 날개와 사람의 머리를 지닌 황소의 상이 입구의 양쪽을 지키고 있다. 문을 들어가 오른쪽으로 꺾어지면 장대한 ‘아파타나’에 압도되고, 조금 직진하면 미완성의 문을 지나 화려한 ‘백주의 방’으로 빨려 들게 된다.

아파타나의 안쪽에는 중앙 궁전을 비롯하여 역대의 왕들이 살던 궁전이나 하렘(왕의 거실)이 줄지어 서 있으며, 왕궁의 가장 안쪽에는 엄중하게 경호된 보물 창고가 놓여 있다. 페르세폴리스에서는 신년제 등의 의식이 거행되었다고 하며, 동시대의 행정 수도인 수사와는 다른 역할이 있었다

. 페르세폴리스에서는 인공의 테라스, 햇볕에 말린 벽돌을 쌓은 벽, 두 마리의 황소가 서로 등을 맞댄 기둥 머리 등 아시리아의 전통적인 궁전 건축 양식에, 포르티코와 플루트(세로 홈)가 나 있는 기둥 등 그리스의 새로운 건축 양식이 훌륭하게 융합하여 아케메네스 특유의 양식이 표현되어 있다. 아시리아는 기원전 8∼7세기 무렵(신아시리아 시대)에 고대 오리엔트를 지배하였던 제국이다.

 또한 그리스풍의 육감적인 부조가 호화로움을 강조하고 있다. 알렉산드로스대왕의 페르시아 정복 때 소실되었다(BC 330).  또한 기록보존소에서 출토한 점토판(粘土板) 문서 약 2만 장을 통하여 당시의 사회·경제가 밝혀졌다. 세계유산목록에 등록되어 있다. 

페르세 폴리스는 엄청난 규모와 함께 섬세함 면에서도 조각품들의 곱슬머리 머리털까지 표현할 정도로 섬세하다. 고대 페르시아(성경에는 바사제국)는 성경에 고레스 왕에서부터 등장을 하여 다리오, 아하수에로, 아닥사스다 왕까지의 역사를 소개하고 있다.

바로 이 왕들이 실제로 통치했던 흔적들이 바로 페르세폴리스이다. 고대 페르시아 제국에는 3개의 궁전이 있었다. 겨울에는 날씨가 따뜻한 아와즈(Ahwaz)에 있는 수산성에서 다스리고, 여름에는 지대가 놓아 여름에도 항상 날씨가 서늘한 하마단(Hamasan, 성경에는 에스라 6:2절에 악메다 궁으로 소개되고 있다.)에서 다스렸다.

그리고 페르세 폴리스는 때로는 여름을 지내는 궁으로 쓰기도 했지만 주로 신년 행사용 궁전으로 쓰였다고 한다. 해마다 신년이 시작되면 여기서 그 유명한 노루즈(Noruz) 축제가 벌어지는데 이 때 전 세계의 피정복 국가 사절단들이 선물을 운반해 와서 페르시아의 대왕께 바치는 것이다.

지금도 남아 있는 왕의 보좌가 있는 아파다나(APADANA)로 오르는 계단의 경사면에는 각국의사절단들의 모습이 부조로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그 사절단들의 복장과 특산물들이 그 당시 최고로 고급 돌이었던 흑석에 생생하게 표현되었는데 앞에 세워놓은 안내문에 보면 그들이 누구며 어디서 온 사절단들이며 무슨 예물을 가져왔는지가 새겨져 있다.

심지어 아프리카의 리비아와 에티오피아부터 메소포타미아를 걸쳐서 인도까지 정말 엄청난 넓은 지역의 수십개 국가를 다스렸었다는 것을 실제로 보여주는 역사적 증거이다.


안타깝게도 그리스의 알렉산더 대왕이 주전 330년경에 와서 이 세계적 건축물에 불을 질러 지금은 그 웅장했던 원형을 볼 수는 없지만 아직도 13개 정도의 기둘이 우뚝 솟아 있어서 당시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이 궁전은 다리오 왕이 건축을 시작해서 역대 페르시아의 왕들이 계속 지어 나갔으며 완공까지는 150년의 세월이 걸렸다고 한다. 이 왕궁을 보고야 이 엄청난 건축사업을 시작했던 고대 페르시아의 대왕 다리오의 위대성을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아케메네스(Achaemenians)의 수도 페르세폴리스(Persepolis)    


조로아스터교는 기원전 6세기중반경에서 7세기까지 이란 즉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B.C. 549?-331) 왕조, 파르티아 제국(B.C. 2C-A.D.224), 사산 왕조(224-642)의 국가종교였다. 약 100여년간 전성기에 있던 이란지역왕조의 국가종교였기 때문에, 당시 가장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세계종교 중 하나였다.

이란의 페르시아족은 인도인들과 같이 아리아인의 한 갈래로서, 매우 종교적인 민족인 것으로 유명하다. 이를 증명이나 하듯, 현재 이란은 신정일치의 정치체계를 가지고 있다. 한편 조로아스터교는 이란이 이슬람왕국에 의해 패망하자, 이슬람에 의해 박해받게 된다.

그러나 조로아스터신자들의 신앙은 매우 강한 것이었다. 그들은 지속적인 탄압가운데서도 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비록 소수신앙공동체를 통해서이긴 하지만 이후 팔라비 왕조가 박해를 완화시킬 때까지 약 1000여년간 그들의 신앙을 지켜나간다. 이란사람들은 이슬람에 대해 이교도라는 의미에서 조로아스터신자들을 '자르두슈티(Zardushti)' 또는 '가브르(gabr)'라고 불렀고, 신자들 자신은 스스로를 '마즈다의 숭배자들'이라고 부른다.

그들이 섬기는 주신인 아후라마즈다를 섬기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이다. 10세기경 이들 신자 중 일부는 완전한 종교의 자유를 찾아 고향을 떠나 인도북서부로 이동했다.  인도에 가면 '파르시'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 사람들이 바로 조로아스터신자들이다.

그들은 936년경에 인도에 정착, 인도현지의 힌두교인들과 평화롭게 공존했다. 1297년과 1465년 사이 이슬람의 침입으로 공포에 떨긴 했지만, 17세기 영국이 인도를 통치하게 되면서, 상업도시인 뭄바이로 이동해 19세기경에는 엄청난 부와 힘을 가진 세력으로 성장했다. 현재 인도의 파르시공동체는 약 10만명에 이르러, 세계 최대의 조로아스터교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또한 영국과 교역하게되면서 파르시들은 외국의 여러나라로 이주할 기회를 갖게 되어, 이들 지역에 조로아스터교공동체를 만들었다. 그래서 현재 마즈다의 숭배자들은 인도와 이란 뿐 아니라 파키스탄, 영국, 미국, 캐나다 등지에 퍼져있다. 다만 조로아스터교인들은 이교도와의 결혼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 수가 점점 줄어드는 추세라고 한다.

 

페르세폴리스(Persepolis)     

 

페르세폴리스(Persepolis)    

 

페르세폴리스 유적 입구에는 거대한 인면유익(人面有翊:사람의 얼굴에 날개를 가진) 황소상이 2쌍 조각되어 있는데, 하나는 동쪽을, 다른 하나는 서쪽을 향하고 있다. 이 문을 통하여 궁전으로 들어갔고, 세상의 많은 나라들이 이 문을 통하여 출입하였기에 열국의 문으로 이름지어졌다.

 


The western door of the Gateway of All Lands의 조각상   

 


이란 페르세폴리스 "아르타크세르크세스2세 무덤"        

 


아후라 마즈다

아후라는 ‘주(主)’를 의미하는 칭호이고 마즈다가 원래의 신 이름인데, 지혜의 신을 이야기하며, 조로아스트교의 주신이다. 세계의 창조자로서 빛과 어둠을 만들어 때를 정하고, 질서의 아버지로서 태양과 별의 길을 만들었으며, 선의의 창조자이기도 하다. 나중에 조로아스터의 신 개념이 무너지고, 아리만은 이에 대립하는 악의 세계의 창조자가 되는데, 이 신은 결국 아리만을 타파하고 전세계를 정화하여 새로운 세계를 확립한다고 역설하였다.

 


부조(reconstruction of the Treasury relief)

 

페르세폴리스에 가면 곳곳에 페르시아에 보물을 가져온 세계 각국의 사진들의 부조를 볼 수 있다. 왕은 세계 각국에서 가져온 보물을 보물의 방이라 불리는 곳에서 받았다. 각국에서 보물을 가져오는 나라들을 보면 엘람, 아르메니안, 이오니아, 리디아, 갑바도기아,메데,파르티아,사가르티안,바빌론인,시리아인,아라비안,테라키안,인디아.... 당시의 대 제국이었던 페르시아의 속국들임을 볼 수 있다. 각 나라들의 사신들의 복장을 보면 나라들을 파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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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헤란 박물관에 있는 채색된 부조

 

페르세 폴리스에 있는 부조

 

설형문자

이란 페르세폴리스 "유물관에 있는 설형문자"로 돌에 새겨져 있는 것이다. 한자(漢字)와 마찬가지로 회화문자(그림문자)에서 생긴 문자이다. 점토 위에 갈대나 금속으로 만든 펜으로 새겨 썼기 때문에 문자의 선이 쐐기 모양으로 되어 설형문자라고 하며 쐐기문자라고도 한다. 설형문자를 발명한 것은 수메르인(人)이며, 수메르에 있어서 가장 오래된 문자는 우루크의 에안나 신역(神域)의 제4층(우루크 후기)에서 발견된 회화문자였다.

발견된 문자의 수도 많은데, 현재 알려진 문자의 수는 약 1,000자에 달한다. 그 다음의 제므데드 나스르기(期)에서는 회화문자에서 설형문자로 발전하는 과도기의 형태를 보여 주며, 동시에 표음화의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 초기 왕조시대에 이르면 설형문자는 일반화되고, 표의 ·표음문자가 병용되었다.

바빌로니아 남부를 통일한 셈계의 아카드인들은 설형문자를 채용하여 아카드어(語)를 표기하였다. 그로부터 표음문자가 차지하는 비율은 점차 커지고, 표의문자의 수는 줄어들었다. 아카드어는 제국 멸망 후에도 국제어로서 오리엔트 세계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그 때문에 설형문자는 바빌로니아인이나 아시리아인 등 셈계의 여러 민족들뿐만 아니라, 비(非)셈계의 후르리인 ·히타이트인 ·페르시아인들도 사용하였다(마리문서 ·아마르나문서). 이들 중에서 페르시아의 설형문자는 자획(字畵)이 간략해지고, 자수도 37자로 정리되었다.

시리아의 라스 샤므라에서 발견된 우가리트 왕국의 설형문자는 자수도 30자에 불과하고, 완전히 알파벳화하였다. 설형문자는 BC 1세기경까지 사용되었으나 그리스문자나 아람문자의 보급으로 점차 잊혀지게 되었다.

근대에 이르러 중근동 지방을 여행하는 사람들이 고대 유적에 남아 있는 설형문자의 각명(刻銘)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다가 9세기 전반, 독일의 그로테펜트와 베히스툰의 3국어 병용비문(倂用碑文)을 단서로 한 영국 롤린슨의 연구로 먼저 페르시아어가 해독되고, 계속하여 엘람어 ·바빌로니아어 ·수메르어의 해독에도 성공하였다.

설형문자의 연구는 유적의 고고학적 조사와 병행되어 진행되었다. 각지의 박물관이나 대학이 소장하고 있는 점토판 문서들이 정리 ·해독(解讀) ·출판되고 있다.

문서 내용은 경제관계를 중심으로 정치 ·종교 ·문학 ·외교 ·천문학 ·수학 ·연대기 등 각 방면에 미치고 있다. 또한 함무라비법전을 비롯한 설형문자법의 연구도 추진되고 있다. (내용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페르세폴리스에 있는 왕의 궁전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벽명에 세겨진 "황소를 잡은 사자의 부조"

 


다리우스 1세 궁전 (기원전 6∼5세기)        (출처- http://blog.daum.net/wonsunbe)


대기단의 높이를 맞추어서 다리우스 1세 궁전은 지상에서 18m인 곳에 있어서 밑의 마르브· 다슈 평야(사진의 왼쪽)를 한눈에 볼 수 있다.

궁전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측벽에는 왕의 향연에 바치는 동물, 술이 담긴 가죽부대, 식기와 잔을 가지고 가는 사람들이 부조되어 있다. 소를 덮치는 사자의 주제는 계단측벽의 삼각형에 사용되었다. 그 우측이 크세르크세스 1세의 비문이다

 


궁전 복원 추정도

 


 다리우스왕 개인궁전

 


다리우스왕 개인궁전

 

다리우스왕 개인궁전

 


왕궁 비      (출처- http://blog.naver.com/unesco114) 

 



왕궁 비

 


다리우스왕이시여,,왕중의 왕이며  온세상의 왕이시며  이 왕궁을 지으신 히스타스페스의 아들 아카에메니드(고대페르샤왕조) 대왕이시여!!

 



왕궁 비

 



다리우스왕 개인궁전

 


아파타나(Apatana)궁전          


아파다나 궁전은 다리우스 1세 때 짓기 시작해 아들 대에 완공했다. 외국 사절을 접견하는 알현장이나 노루즈(신년) 때 제사장으로 쓰였다.

레바논 삼나무로 지은 천장을 받치던 높이 20m의 72개 기둥 가운데 남은 13개만 봐도 웅장했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넓은 공간을 석조 기둥으로 떠받치는 공법은 고대 이집트에서 유래한다. 그래서인지 기둥 초석에 수련(睡蓮)으로 보이는 이집트 연꽃무늬가 오롯이 새겨져 있다.

출입문은 동서남북에 하나씩 있는데, 북쪽과 동쪽에 독특한 미술사적 가치를 지닌 조공자 행렬도와 사자가 목우를 습격하는 동물투쟁도가 생생하게 돋을새김되어 있다. 23개국 조공자(사신)들의 옷차림이나 헌상물은 각양각색이다.

아르메니아는 말, 레바논은 금가락지, 바빌로니아는 소, 인도는 향수병, 에티오피아는 상아를 헌상했다. 이렇듯 각국 문명은 앞다투어 여기로 모여들고 있다.

 

아파다나 궁전으로 오르는 111개의 돌계단

 

입구 계단으로 오르는 벽엔 돋을새김으로 그려진 전세계국가들의 조공행렬이 새겨져있다. 그 어제와의 만남은 입구 왼쪽에서 111개 돌계단을 밟고 올라가는 데서 시작한다. 통상 돌 한 덩어리로 한 계단씩 만드는 방식이 아니라, 한 덩어리를 쪼아 다섯 계단으로 만든 것이다. 계단 높이는 말을 타고도 불편함 없이 오르도록 10㎝ 정도로 했다.

 계단에 올라서면 4대 크세르크세스 1세가 세운 ‘만국의 문’ (다르바제 멜라)이 나타난다. 지금은 높이 10m 가량의 원주 몇 대만 덩그러니 남았다. 아파다나입구로 오르는 두개의 계단중 동쪽계단인데 계단으로 오르는 벽에는 전세계에서 조공을 받치러 온 사람들의 조각이 새겨져있다

 

111개의 돌계단 부조

 


111개의 돌계단 부조           (출처- http://blog.daum.net/wonsunbe)

 

111개의 돌계단 부조 

 


111개의 돌계단 부조 

 


111개의 돌계단 부조 

 

아파다나. 알현실 부조  

 


111개의 돌계단 조공행렬 부조

 

북쪽 계단에 새겨진 부조들. 세계 각국에서 온 외교사절들이 왕을 알현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고.. 그리고 계속되는 공물의 행렬.. 세계 최초 통일대제국 페르시아의 위용을 보여준다 

 

111개의 돌계단 조공행렬 부조

 


부조, 조공 사신들




부조, 조공 사신들




부조, 조공 사신들

 




다리우스왕에게 신년 인사온 사신들         (출처-http://tong.nate.com/travel )

 




왕실 근위병들


















서쪽에 있는, 왕이 단검으로 짐승을 찌르는 ‘악마와 왕의 투쟁상’은 왕이 악을 제압한다는 것을 뜻한다. 남쪽 ‘옥좌의 왕상’은 28개 속주 신민들이 옥좌를 받든 모습인데, 왕 머리 위에 조로아스터교의 최고신 아후라 마즈다를 상징하는 ‘날개 달린 태양’이 그려져 신과 왕, 신민 간의 상하관계를 여실히 보여준다. 또 별전으로는 ‘겨울궁전’이란 뜻을 지닌 다리우스 1세의 대리석 궁전 타차라(일명 ‘거울의 집’)와 ‘거주를 위한 궁전’이란 뜻으로 합성궁(合成宮)이라고도 하는 크세르크세스 1세의 궁전 하디쉬가 있다. 그 남쪽에는하렘(왕비의 거실)이 있다.

 


사자와 목우 투쟁도

 


다리우스 1세가 지은 아파다나 궁전 출입문에 새겨져 있다. 동서미술에  흔하게 등장하는 도상으로 고구려 벽화의 사신도 도상과 연관 관계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보물궁         (출처- http://blog.naver.com/unesco114

 

페르세폴리스의 별전으로는 ‘겨울궁전’이란 뜻을 지닌 다리우스 1세의 대리석 궁전 타차라(일명 ‘거울의 집’)와 ‘거주를 위한 궁전’이란 뜻으로 합성궁(合成宮)이라고도 하는 크세르크세스 1세의 궁전 하디쉬가 있다. 그 남쪽에는 하렘(왕비의 거실)이 있다. 놀라운 것은 동남쪽 보물창고다. 알렉산더가 당나귀 1만 마리와 낙타 5천 마리를 끌어 창고 보물들을 엑바타나(오늘날 함단)로 실어갔다고 하니, 그 규모를 상상할 수 있다. 그밖에도 부속 박물관에는 당대 문명들의 교류상을 보여주는 각종 도자기와 장식품, 항아리, 동전, 타다 남은 천조각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보물궁

 

백주의 방        (출처- http://blog.naver.com/unesco114

 

 페르세폴리스의 주두 부분


이란 테헤란 국립 고고학 박물관에 있는 페르세폴리스 기둥. 페르세폴리스는 페르시아어로 '타흐트 잠쉬드'로서 '타흐트'는 '왕좌'라는 뜻이고, '잠쉬드'는 페르시아의 한 전설적 영웅의 이름이다. 이 고도는 아케메네스조 다리우스 대왕이 기원전 520년경에 건설하였다. 그리하여 알렉산드로스 동정군에게 소진될 때까지 약 200년간 아케메네스조의 수도였다가 그후 약 2천여 년간 폐허로 방치되었다. - '씰크로드학' 中에서 , 기원전 520~500년경. 페르시아 건축은 기원전 6세기 중반에 있었던 이오니아 문명전파 때 그리스 건축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기원전 542년부터 이오니아의 왕들은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 왕실에 공물을 바쳤다. 이때 페르시아 왕실의 요청으로 각 분야별 전문가들이 함께 파견되어 터키 지방의 발달한 문명을 전파했다. 건축은 이 가운데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페르시아를 대표하는 아케메네스 궁(페르세폴리스)은 이런 내용을 잘 보여주는 예이다. 당시 근동지역의 강자였던 페르시아의 왕실은 이 궁궐을 짓기 위해 인근 여러 나라에서 최고의 것들을 모았다. 목재는 레바논에서 바빌론과 이오니아 지방을 거쳐 이곳까지 운반되었다. 석재는 페르시아 북쪽의 엘람지역에 있는 아피타루스에서 조달되었다. 건축 설계와 시공 및 장식을 이오니아인들이 맡았다.

 

페르세폴리스 만국의 문과 라마수


페르세폴리스궁전을 들어가기 위해 처음 거쳐야 하는 문이다. 크세르크세스 1세가 세운 ‘만국의 문’은 페르세폴리스를 대표하는 유적 가운데 하나다. 사람 얼굴과 짐승의 몸을 한 인면수신상이 문 양쪽을 지키고 서 있다. 알렉산더왕에 의해 파괴되었다.

 

만국의 문 라마수

 


만국의 문

 

라마수                          (출처- 블로그 > 너에게로 가는 길)

 

이란 테헤란에 있는 국립고고학 박물관에서 찍은 라마수, 라마수는 얼굴은 사람. 새의 날개. 소의 다리를 가지고 있는 인두유익우체상이다. 석회석. 고대에 이 왕궁을 찾아온 사람들은 라마수(Lamasu)를 보면, 그것이 처음엔 서 있다가 다음에는 마치 걸어가는 듯한 인상을 받았을 것이다. 라마수는 왕을 지키는 호위병처럼 눈을 부릅뜨고는 방문객을 지켜보다가 뒤를 쫓아다닐 듯한 모양새를 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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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어머니-조로아스터교의 부활심판사상!

질문:기독교가 로마 황제의 통치 편의상 국교로 반포되기 전 조로아스터교가 페르시아 일대와  소아시아, 유럽 전역에 엄청난 영향력권을 형성하고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동정녀 잉태, 천사,부활,심판,십자가,재림..등 모든 교리가 거의 기독교와 동일 합니다. 도대체 서로 무슨 관계인가요?


answer:
우리가 잘 아는 불교의 근본사상을 이룩한 인도의 인더스 강을 주변으로 하는 바라문교(Brahmanas) 또는 힌두교의 성전 베다(Vedas)의 마지막 장인 우파니샤드(Upanishad)가 씌어질 무렵, 즉 기원전 약 600∼700년경에 페르시아(지금의 이란)에 조로아스터(Zoroaster, ca 628∼551 B.C.) 라는 현인이 있어 현재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서양문명의 한 근원을 이루는 중요한 신앙적 사상을 전파하고 있었습니다. 


조로아스터와 불(심판)의 숭배

그는 두 가지의 신이 존재한다고 가르쳤습니다.
하나는 아후라 마즈다(Ahura Mazda) 라는 신이다.
아후라는 신령이란 뜻이고, 마즈다는 빛의 신령의 이름으로, 이는 모든 광명(光明),
모든 자비慈悲, 모든 힘을 가진 전지전능(全知全能)한 창조주이며, 선(善)의 신입니다.

그리고 아후라 마즈다 신에 반대되는 또 하나의 신은 앙그라 마인유 (Angra Mainyu)
라고 부르는 어둡고 컴컴하며 위선적(僞善的)이고 항상 속임수를 쓰는 악(惡)의 신입니다. 

Angra Mainyu or Ahriman
(앙그라 마인유 혹은 아리만이라 부름)
 
그의 목적은 적대관계에 있는 상대방 선의 신을 정복하는 일입니다. 선의 신은 선한 세상을 창조하였고, 이 세상에는 선만 있으며 광명만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아후라 마즈다 신이 완벽한 세상을 만든 데 대하여 시기를 느낀 앙그라 마인유라는
신은 광명의 세상에 어둠을 드리워 그림자가 있게 만들었고, 인간을 유혹하여 악하고 사악한 일을 하도록 만드는 일이 업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로 인하여 우주는 선과 악이 서로 상반관계를 유지하면서 조화를 이루어 결합하는
세상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어려운 세상을 돕기 위하여 사오샨트(Saoshyant) 라는 구세주가 동정녀의 몸에 잉태되어 세상에 태어나 인류에게 선의 길이 무엇인가를 가르치고 깨닫게 만들며 선을 실행하도록 인도하고 구원을 얻는 방법을 알려 줍니다.
(여기서 부터 예수와 동일합니다.)
 
그러한 결과로 구세주로 인해 깨달은 인간들이 노력을 함으로써 아후라 마즈다 가 애초 만든 원래의 세상으로 환원하려는 노력이 생기게 되며, 따라서 광명뿐인 세상으로 향한 직선적인 노력이 있게 됩니다.
이렇게 하여 구원이 이루어질 수 있는 어느 시점에 도달하면 아후라 마즈다 는
앙그라 마인유 신을 쳐부수는 일로 불(火)로써 말세(末世)를 고하며, 모든 인간을 심판하게 됩니다.
이 부분도 기독교가 그대로 가져간 것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드디어 어둠은 사라지고 광명뿐인 세상의 성취가 이루어지며, 그 때에 구세주의 재림이 있게 되고, 속세에서 구세주의 가르침대로 선한 생활을 한 사람들은 주검에서 부활하여 영생을 얻게 되며, 드디어 어둠의 세상은 악의 신 앙그라 마인유 와 함께 완전히 제거되고, 광명뿐인 세상을 이룩하여 구원을 받은 자들은 고통 없는 극락의 생활을 영위하게 된다는 교리를 갖고 있습니다.

위 부분은 기독교와 비슷한 게 아니라 그 교리가 100% 동일합니다. 당연히 기독교가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을 100% 받았다고 보고 있습니다.

여기서 아후라 마즈다 를 유대교의 야훼에 비유하고,  앙그라 마인유를 사탄에 비유하며,
구세주 사오샨트 를 예수에 비유하고, 여기에도 천사, 동정녀, 동방박사, 
제사장,부활........등등을 이름만 바꾸면 이 두 종교는 100% 일치합니다.

요즘 말하는 표절의 개념으로서 이름만 바꾸면 서로 100% 같은 작품이 될 것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조로아스터교 신앙체계가 예수가 나타났다고 하는 시대의 6∼7세기 전에 완성되어 중동,소아시아,유럽에 매우 널리 퍼졌고,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페르시아가 망한 이후에도 오랫동안 페르시아 사람들이 신봉하던 신앙했습니다. 오늘날도 이란과 인도에 조금 남아있고 여전히 불을 모시고 심판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친어머니가 여전히 배척받으면서 숨어 살고 있다고 봐야할 것입니다. 

 

그럼 왜 이 기독교의 모태역할을 한 종교는 오늘날 거의 사장되다싶이 되었을까요?
그것은 우리 한국 가요계의 한 현상에 비유하고자 합니다.

서태지가 나오기 전에 랩의 원형을 조잡스럽게 만들어 부르던 가수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그러나 서태지는 미국에서 현재 유행하는 이런 흑인 음악을 사운드와 춤까지 모두 그대로
들여오고 랩도 한국어로 부르고 멜로디도 한국적인 요소를 가미해 단숨에 이들을 다 몰아내 버렸습니다.

조로아스터교는 기독교와 같은 교리를 갖고 있었지만 교리 외의 요소가 서태지엔 미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원조라 할지라도 조악한 원조는 역사의 뒤로 퇴장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한국의 영화 "왕의 남자" 공길이가 한양의 어줍잖은 비슷한 줄타기의 광대를 누르고 광대계를 평정해 버렸듯이...
  

당시 로마제국은 세계를 통일한 막강한 나라였고, 로마 황제의 결정이 전세계에 영향은 절대적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황제는 정치적 통일성을 위해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하고 오직 기독교만이
허용되는 시대가 되었을 때
그 교세(敎勢)가 파죽지세로 세계에 번지게 되었고, 다른 종교는
엄청난 박해는 물론 발본색원된 것입니다 .
 
당시 로마의 카이사르가 선택한 종교인 로마 가톨릭 교회와 조금이라도 다르게 믿는 종교라면, 비록 그 종교가 근원이 같은 그리스도교라 할지라도 이단(異端)이라는 낙인이 찍히게 되고  결국 장작더미 위에서 타 죽든가 갈기갈기 찢어지는 죽음을 당하는 판에, 조로아스터 같은 종교는  기독교이 모태이기 때문에 더 더욱 알려지면 매우 곤란한 종교였습니다.
때문에 로마에 점령당한 페르시아인들이 그 종교를 전파하기는 커녕 존속시키는 것도
어렵웠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 종교가 없어진다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한반도에 불교가 들어오기 전의 민속신앙은 불교에 흡수되고 그 흔적이 절간의 삼신각에나
조금 남아있듯이 우리 민족은 불교가 들어오기 전에 산신령이나 자연신같은 토테미즘 신앙이 발달 해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는 이런 토종 종교를 몰살시키지 않고 모두 그대로 포용한 것입니다.
기독교의 성질과는 전혀 상반된 것이지요. 이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아메리카를 정복한 스페인이나 영국 백인들은 인디언의 종교와 문화를 모두 훼손하고 없애고 불태우고 파괴하고 죽여버렸습니다.
기독교의 근본적인 습성이 타민족의 문화를 증오하고 말살하려는 성질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 유대교와 기독교 경전 관련 구절을 살펴 보죠!
열왕기상 15:13
또 그 모친 마아가가 아세라의 가증한 우상을 만들었으므로 태후의 위를 폐하고 우상을 찍어서 기드론 시냇가에서 불살랐으나
 
열왕기하 23:13
또 그는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 시돈 사람들의 우상인 아스다롯과 모압 사람들의 우상
그모스와 암몬 사람들의 혐오스러운 밀곰을 섬기려고, 예루살렘 정면 '멸망의 산' 오른쪽에
지었던 산당들도 모두 허물었다.
 
열왕기하 10:27
바알의 우상들을 깨뜨렸을 뿐만 아니라, 바알의 신전을 헐어서 변소로 만들기까지 하였는데, 이것이 오늘까지도 그대로 있다. 
 
역대하 34:4
무리가 왕의 앞에서 바알들의 단을 훼파하였으며 왕이 또 그 단 위에 높이 달린 태양상들을 고 또 아세라 목상들과 아로새긴 우상들과 부어 만든 우상들을 빻아 가루를 만들어 거기 제사하던 자들의 무덤에 뿌리고
 
역대하 15:16
아사왕의 모친 마아가가 아세라의 가증한 목상을 만들었으므로 아사가 그 태후의 위를 폐하고 우상가루로 빻아 기드론 시냇가에서 불살랐으니 
................................................

기독교의 경전은 항상 저런 극도의 유치한 수준입니다. 내 문화와 종교와 다른 것을 인정하지를 않습니다.
내 종교만 참 종교이고 타 종교 우상이므로 도끼로 찍고 가루로 빻고 불사르고, 변소로 만듭니다.
유대인들이 강대국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저렇게 엄한 종교 계율을 서기관들이 만든것입니다.

저 의도가 모든 민족 어디서나 그대로 적용되어야겠습니까?
대답해 보세요!

야훼라는 신이 머리속에 있어 그 노예가 되는 것은 장인의 손으로 만들었다가 때가 되면 뽑아 불에 태워 밥을 해먹는 장승만도 못한 위선의 우상이라는
사실을 안 것은 요즘의 일이지요.

신약은 어떨까요?

우리 한국의 미풍양속인 어른에게 절하기
연을 만들어 날리기
장승을 만들어 마을 입구에 세우기
석굴암같은 세계 최고의 위대한 걸작을 만들기...........등 모두가 저들에게는 찍고 빻고 무너뜨리고 불사르고 변소로 만들 것들입니다.

그 얼마나 유치합니까?
그 얼마나..........참으로 가증스럽습니다.

남의 종교와 남의 문화를 모두 파괴하고 죽이는 것이 저들의 종교적 계율이라니...

그 위대한 잉카와 마야문명, 인디언들, 그들의 종교, 풍습 문화....모두 일거에 없애고 인디언을 짐승 사냥하듯 하여 씨를 말려버렸지요.
우리 한국에서 기독교도 저렇게 행사하고 있다고 봐야합니다.
유교의 합리주의와 종교간 조화를 이뤄 저들의 발목을 잡고 있으니 다행입니다.
이런 연유로 조로아스터교와 그 당시의 수많은 종교와 문화와 걸작과 저작이 모두 없어졌습니다.
역사는 말합니다.

폭군이 백성을 모두 압살하듯이 한 폭군적 종교가 지배하면 그 사회는 모두 압살됩니다.

기독교는 사랑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사랑을 실천한 예는 극히 제한적입니다. 
전쟁, 폭력, 문화파괴, 인종박멸, 마녀사냥, 종교재판, 과학탄압, 침략...을 
일삼아인류에게 커다란 상처만 남기고 지금도 그 작태를 계속하는 면이 훨씬 큰 역할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조로아스터교가 살아남았다면 기독교가 설 땅이 없었으리라는 짐작은 매우 명쾌한 결론일것입니다.





서양인의 기본 철학, 기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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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소개] 안계환 한국창의경영센터 대표
경 력 저 서
ㆍ서울대 졸업
ㆍ전(前) 삼성SDS 근무
ㆍ전(前) 벤처기업 창업 및 운영
ㆍ현(現) 한국창의경영센터, 독서경영포럼 대표
ㆍ성공하는 사람들의 독서 습관
ㆍ마흔에 배우는 독서 지략
ㆍ변화 혁신 역사에서 길을 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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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에 대한 지식이 인문학적으로 의미 있는 이유는 미국을 포함한 유럽인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지난 2,000년 동안 기독교와 유럽인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어왔고 수많은 교회와 유물, 정신문화를 창조해냈다. 영국을 비롯한 유럽나라 국기의 상당수가 십자가 모양을 따서 만들고 있다. 그들에게 기독교는 신앙을 떠나 모든 것에 관여된 생활의 일부라는 이야기다. 따라서 유럽인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첩경으로서 기독교에 대한 상식은 반드시 갖추어야 할 필수 요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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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신 사상의 탄생
티그리스ㆍ유프라테스 강과 나일 강을 잇는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서 인류 문명이 탄생한 이후 지중해 세계는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다신교가 주류였다. 그런데 고대 페르시아 지역에서 섬기던 조로아스터교에 의해 유일신 사상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당시처럼 여러 신을 섬기는 세상에서 ‘아후라 마즈다(Ahura Mazda ; 지혜의 주님)’를 유일신으로 주장한 것은 실로 놀라운 사건이었다. 이후 유일신 개념은 이 지역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퍼져갔고, 팔레스타인과 그 이웃 메카의 척박한 땅에서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가 탄생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나일강과 메소포타미아를 잇는 문명의 통로인 팔레스타인 지역에 살던 유대인들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다윗부터 솔로몬까지 통일 왕조 국가 체제를 실현했다. 하지만 솔로몬의 자식대에 이르러 남유대와 북이스라엘로 분열되었다. 얼마 못 가 북이스라엘은 아시리아의 공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패망했고 많은 사람들이 포로가 되어 바빌론으로 끌려갔다. 기원전 601년이 되면서 신바빌로니아왕 네부카드네자르(느브갓네살) 2세가 침입했고, 유대 고대 도시 대부분이 파괴되었으며 대부분의 주민이 바빌론으로 끌려갔다. 이를 바빌론 유수(幽囚)라 부른다.
바빌론에서 노예 생활을 하게 된 유대인들은 대부분 지구라트 건설에 동원되었다. 나라를 잃고 타향에서 노예가 되어 살게 된 유대인들에게는 종교적 구심점이 필요했다. 그래서 지도자들은 모세에서 그들 시대까지 역사서인 <신명기>에서 <열왕기>까지를 편찬했다. 여기에 바빌론 지역의 유일신 사상을 흡수했고 인류 창조나 홍수 설화를 더해 모세 5경을 완성했다. 기원전 5세기 후반에 이르러 유대인은 팔레스타인 땅에 돌아올 수 있었는데 느헤미야, 에즈라 등 지도자들에 의해 민족이 재건되었고 유대교가 성립되었다. 유대인들이 바빌론에 끌려갔던 이 사건은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큰 시련이었으나 약 반세기 동안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 풍요로운 바빌론 문화를 접할 수 있었다. 그를 통해 유대인들은 구약성서를 이루는 여러 문서를 만들어낼 수 있었고, 이는 팔레스타인에 돌아온 후 민족 공동체를 이룰 수 있는 뼈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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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어 해설]
지구라트(Ziggurat) : 고대 메소포타미아 각지에서 건설되었던 거대한 계단형 탑을 말하며 일종의 신전이었다.
모세 5경(Pentateuch) : 구약성서가 시작되는 창세기ㆍ출애굽기ㆍ레위기ㆍ민수기ㆍ신명기를 말하며, 또한 그러한 것들에 포함되어 있는 이스라엘의 종교와 도덕 그리고 사회생활을 규정한 소위 모세의 율법을 가리킨다. 유대교의 기본경전이며 ‘토라(Torah)’라고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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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로 유일신을 섬긴 페르시아의 종교 조로아스터교(Zoroastrianism)의 주신 아후라 마즈다(Ahura Maz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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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탄생과 기독교
예수가 태어날 즈음인 기원전 4년, 팔레스타인 땅은 로마제국의 속국으로 로마인의 가혹한 수탈로 신음하고 있었다. 여기에는 허울뿐인 왕이었던 헤롯의 폭력적 통치도 한몫을 차지했다. 그래서 민중들은 이 땅을 구할 메시아 탄생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이 기대하는 메시아는 천 년 전 다윗왕의 모습과 같았다. 다윗은 젊은 시절 골리앗을 물리쳤으며 유대 민족을 통일해 최초로 왕국을 건설한 주인공이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태어나 팔레스타인 땅을 폭력적으로 점유하고 있는 로마제국을 물리치고 그들의 나라를 건설하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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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예수가 로마에 체포되기 전 열두 제자와의 만찬 장면

예수를 가운데 두고 제자들은 3명씩 모여서 4그룹으로 나뉘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제자들의 순서는 왼쪽부터 바돌로메, 작은 야고보(알패오의 아들), 안드레, 가룟 유다, 베드로, 요한, 도마(토마스), 큰 대야고보(세배대의 아들), 빌립보, 마태, 유다 다대오, 시몬이다. 재밌는 것은 예수를 배신한 가룟 유다와 예수의 모델이 된 사람이 동일한 인물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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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며 등장한 나사렛 사람 예수는 유대인들이 원하는 메시아가 아니었다. 예수는 로마제국을 타도할 대상이라고 주장하지도 않았고, 무기도 없고 세력도 갖고 있지 않았다. 다만 설교를 통해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고 주장할 뿐이었다. 더구나 율법을 중요시했던 바리새파 사람들을 비판하기 일쑤였다. 따라서 바리새파 사람들 입장에서 볼 때 예수는 메시아도 아니었고 기존 체계를 무너뜨리는 이단아일 뿐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의 제자 가룟 유다의 도움을 받아 예수를 체포하고 로마 통치자인 빌라도에게 넘겼다. 결국 예수는 당시 죄수에게 가해지는 최고형이었던 십자가형으로 처벌을 받고 죽을 수밖에 없었다. 예수가 죽은 후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져 예수가 남긴 사상들을 세상 사람들에게 전파했다. 베드로는 로마로 가서 전도 활동을 하다가 그곳에서 순교했고, 그의 동생 안드레는 동방 지역에서 주로 활동해서 최초의 동방정교회 총 주교로 인정받는다. 야고보는 시리아 지역에서 지역에서 활동하다가 에스파냐 지역을 포교지로 선택하기도 했다. 특히 마가ㆍ마태ㆍ누가ㆍ요한 네 사람은 4대 복음서라고 부르는 기록들을 남기게 되는데, 이것이 지중해 세계에 전파되는 기독교 탄생의 계기였다.
기독교가 정통 종교로서 로마제국에 뿌리내리도록 만든 가장 중요한 인물은 파울로스이다. 한국의 개신교에서 사용하는 성서에서는 ‘바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그는 서기 5년 터키 킬리기아 지방 중심도시 타르소스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났다. 로마시민이었다고 알려진 그는 그리스 고전 교육 및 유대교 율법 교육을 받았다. 유대교 율법을 추종하였던 젊은 시절 기독교 교인들을 핍박하는 데 앞장섰다. 그런데 대제사장의 권한을 받아 다마스쿠스에 가던 중 예수의 나타남을 보고 그의 음성을 듣게 되었고, 세례를 받아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 후 그의 전도는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의미 있는 활동이 되었다. 그는 아프리카를 제외한 로마제국 전역에 걸쳐 무려 20,000km에 이르는 거리를 돌아다녔다. 또 신약성서 27편 중 13편에 달하는 그의 이름으로 된 서신을 남겼다. 그는 유대인에게 다섯 번 매를 맞고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배가 난파되었다고 한다. 그만큼 고난을 받으면서도 대단한 선교 활동을 한 셈이다. 그가 기독교의 교리와 역사에 미친 영향이 얼마나 컸던지 ‘예수가 없었다면 바울도 없었겠지만 바울이 없었다면 기독교도 없었을 것이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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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어 해설]
나사렛(Nazareth) : 팔레스타인의 갈릴리 중남부에 있는 작은 도시이며, 예수가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까지 약 30년 동안 이곳에서 살았다. 예수는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후 공생애(공적 사역)를 시작했다.
바울(Paul) : 기독교 최초로 유태인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한 전도자이며, "사도(使徒) 바울"이라고도 부른다. 한때 열렬한 유대교도로서 기독교도를 박해하러 가다가 다메섹에서 예수의 음성을 듣고 믿음을 바꾸어 전 생애를 전도에 힘쓰고 각지에 교회를 세웠다. 로마에서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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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박해와 성장
로마제국은 전통적으로 다신교 국가였다. 로마인들은 기원전 146년 그리스를 점령하자 그때까지 가지고 있던 자연숭배 신앙을 버리고 그리스 신들을 품었다. 제우스가 유피테르가 되었고 헤라여신은 유노가 되었다. 아프로디테는 비너스가 되었고 아테나 여신은 미네르바로 변했다. 아우구스투스가 황제정을 수립한 후에는 카이사르가 신격으로 변했다. 따라서 로마제국 내 모든 사람은 다신교 사상에 따라야 했다. 그런데 기독교인은 그렇지 못했다. ‘나 이외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라는 첫 번째 교리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한 박해는 기독교 탄생 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인정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서기 313년 세력을 잡은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동방황제 리키니우스 황제와 공동으로 기독교를 박해하거나 처벌하지 않겠다고 공표했다. 또 서기 325년이 되면 터키 휴양 도시 니케아에서 삼위일체의 교리를 확립하고 국교로 정했다. 성부와 성자, 성령이 하나라는 이 교리는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교리가 되었다. 예수는 하나님이며 그 자체로 이 땅에 왔다는 생각이다. 그때까지 기독교는 황제들의 박해 속에서도 지속적으로 성장했다. 카타콤(Catacomb)이라고 불리던 지하묘지를 교회로 사용할 정도로 열악했던 환경 속에서도 끈질기게 신앙을 지켜왔던 것이다. 결국 로마제국의 국교로 지정된 기독교는 로마주교 중심의 서방교회와 콘스탄티노플 주교이자 황제 중심의 동방교회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476년 서로마가 게르만족에 의해 멸망한 후 기독교는 게르만 인을 포함한 전 유럽으로 확산되었다. 비잔틴 제국으로 이름이 바뀐 동로마 지역의 교세도 확장되었다. 유럽 중세 사회는 종교를 중심으로 조직되었고 종교가 모든 생활을 지배했다. 본래 로마 주교였던 교황은 프랑크 왕국의 카알 대제에게 교황령을 받고 세속 권한도 확대했다. 이후 교황의 세속적 권한은 증가했는데 이탈리아 반도를 지배하던 비잔틴 제국의 쇠퇴와 함께 국가의 간섭에서 교회를 독립시키려는 교황의 노력도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교황의 권력을 상징하는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십자군 운동이다. 황제 하인리히 4세와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 사이의 갈등으로 인한 주도권 다툼은 교황의 승리로 끝났다. 교황의 서거 후 뒤를 이은 우르바노 2세는 이슬람 침략에 대응해서 예루살렘을 수복하자고 전 유럽에 호소했다. 이에 주로 프랑스 지역 제후들이 참여로 시작된 십자군 운동은 1차에서는 팔레스타인 지역을 점령하고 예루살렘 왕국을 건설하기도 했다. 하지만 뒤이어 7차까지 진행된 이 운동은 더 이상의 성과는 없었다. 이후 전개된 역사의 흐름은 프랑스 지역 왕권의 강화와 교황권의 약화라는 결과로 이어졌다. 결국 점차 강화되는 국가권력의 힘과 교황권의 충돌이 이어지면서 교황의 힘은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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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어 해설]
카타콤(Catacomb) : 초기 기독교 시대의 비밀 지하 묘지. 로마 황제의 박해를 피하여 죽은 사람을 그곳에 매장하고 예배를 보기도 하였는데, 소아시아ㆍ북아프리카ㆍ남부 이탈리아 등지에 널리 있지만 로마 교외의 것이 가장 대표적이다.
주도권 다툼 : ‘카노사(Canossa)의 굴욕’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주교 임명권 다툼으로 시작되었다. 신성로마제국 하인리히 4세가 속옷 차림으로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를 알현하기 위해 사흘 동안 성문 밖에 서 있어야 했다. 결국 교황이 승리하였지만 이후의 일들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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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과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르네상스는 유럽인의 지적인 생활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고대 문화가 다시금 복원되고 신 중심에서 사람 중심의 문화가 싹텄다. 라틴어로 번역된 고대 문서들은 새로운 학문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켰고 성서 원어인 히브리어와 헬라어 연구에도 불을 지폈다. 또한 탐험가들로부터 시작된 지리상의 발견은 동서 문화 교류가 시작되었고 다른 세상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졌다. 여기에 십자군 이후 봉건 사회가 점차 무너지고 상업이 발달해 농업 경제가 상업 경제로 점차 옮겨갔다.
종교개혁에 결정적인 요인이 된 것은 교회가 더 이상 신령한 존재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르네상스 시절 각종 예술의 부흥이 전 유럽에서 성행하자 교회는 예술적 감각을 도입하려고 애썼다. 역대 교황들은 취임과 더불어 자신의 임기 동안 거대한 성당과 궁전을 건립하고 예술 작품으로 치장하는 것을 인생의 보람으로 여겼다. 우리가 이탈리아 관광에서 만나는 수많은 예술 작품들은 이러한 교황들의 노력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성직자들은 교회로 몰리는 재산을 교회를 확장하거나 자신들의 사치를 위해 썼고, 또 성직을 매매하기도 했다. 여기에 사치스럽고 문란한 생활이 드러나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문제는 이러한 자금들이 민중들의 피땀을 흘려 번 돈의 일부였다는 사실이다. 종교개혁자들의 눈에 비친 교회는 신의 이름으로 헐벗은 민중들의 호주머니를 털어가는 권력자에 불과했다. 당시 사람들은 자신들이 번 수입의 십분의 일을 교황청에 바쳐야 했는데 여기에다 조달비, 기부금, 십자군 자금 등 수없이 많은 세금들이 있었다. 교회의 권위 추락에 결정적인 사건은 교황 레오 10세가 당시 건설 중이던 바티칸 성당의 건축 자금 조달을 위해 면죄부를 판매한 일이었다. 피렌체 메디치가(家)에서 태어나 사치스런 생활에 익숙했던 그는 교황청 자금을 모두 탕진하였고 바티칸 성당 건축의 부족한 자금을 메우려 이런 일을 벌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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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어 해설]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 16세기 종교개혁의 결과로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떨어져 나와 성립된 종교 단체 또는 그 분파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Protestant"라는 말은 "Protest"에서 기원했는데, 이 말은 1529년 2월 21일에 열린 독일 슈파이어 국회에서 루터계 제후와 도시들이 황제 카를 5세 등 로마 가톨릭 세력의 억압에 항거한 데서 유래하였다. 이들의 종교개혁은 단순히 가톨릭의 타락에서 연유한 것이 아니고 근본적으로 신학적 대립에서 유래된 것이다. 오직 신앙에 의해서 구제되고, 성서에 의해서만 권위가 인정되며, 신의 말씀만이 권위이고 교직자는 단지 신의 말씀을 전할 뿐이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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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종교개혁의 기폭제 역할을 했던 마르틴 루터의 삶을 표현한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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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17년 독일 성직자였던 마르틴 루터는 비텐베르크 대학교 교회당 정문에 면죄부 판매의 부당함을 알리는 95개조에 달하는 문서를 게재하였다. 루터의 반박문은 곧바로 독일어로 번역되었고 마침 발명된 인쇄술 덕분에 유럽 전역으로 퍼졌다. 교황은 그를 즉시 파문했으나 교황의 권위는 이미 떨어져 있었고 루터를 지지하는 제후들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루터가 했던 가장 중요한 일은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일이었다. 당시까지 성경은 모두 라틴어였고 설교도 반드시 라틴어로만 시행해야 했다. 루터는 찬송가를 독일어로 만들어 보급에 나섰고 수도원 사제와 수녀들에게 결혼을 장려하기도 했다.
미국과 한국에 많이 퍼져 있는 장로교회를 세운 프랑스인 칼뱅은 루터의 사상을 계승하고 동시에 독자적인 사상을 발전시켰다. 그는 구원을 받는 자와 멸망에 이르는 자는 옛날부터 신에 의해 결정되어 있다는 예정설을 주창했다. 또 신앙인이라면 술, 도박, 사치 등에 대해 엄격해야 한다는 생활윤리를 강조했다. 가톨릭교회의 미사를 폐지하고 예배를 설교 중심으로 개혁했고 목사, 교사, 장로, 집사 등의 직무로 교회가 구성되도록 정했다.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목사와 장로 중심의 교회가 이때 탄생했던 것이다.
종교개혁은 단순한 신앙적 개혁에 그치지 않았고 중세 유럽을 근대 세계로 바꾼 분기점이 되었다. 유럽의 각 나라들은 로마 교황청의 통제에서 벗어나 독립을 얻었고 예술 부문에서도 인문주의 바람을 타고 보다 인간적인 주제로 옮아갔다. 교회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합리적 과학 연구에도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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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예수 또는 나사렛의 예수는 유대교와 기독교, 이슬람교 등 여러 종교에서 중요하게 신봉하는 인물이다. 대부분의 기독교에서는 삼위일체 곧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한 몸인 하나님이라는 신앙 고백에 따라 예수를 동정 마리아에게 잉태되어 강생한 하나님(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 완전한 사람, 완전한 하나님이라 여긴다. 흔히 메시아라는 뜻의 존칭인 그리스도를 붙여 예수 그리스도라 부른다. 칼케돈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그의 어머니인 마리아도 테오토코스(하나님의 어머니)로 공경하기도 한다. 그러나 유대교에서는 신은 야훼뿐이라는 유일신 교리에 따라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또는 하나님으로 보지 않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러 온 예언자라고 본다.
예수의 이름
예수는 성경에 따르면 "자기 백성을 구원할 자"라는 뜻으로, 히브리어 여호수아, 혹은 예수아를 코이네 그리스어로 옮긴 말이다. 여호수아(Jehoshua)의 어원은 접두사 "여(Je-, 야훼)"와 "호세아(구원)"를 덧붙여 이루어진 이름이다. 역사적 실존 인물로 예수를 가리킬 때에는 흔히 예수가 자란 고장의 이름을 덧붙여서 "나사렛(Nazareth) 예수"라 부른다. 신약성서에서는 예수의 부모의 이름을 앞에 붙여 부르기도 한다. 이를테면 "요셉의 아들 예수"(누가복음 2 : 21), 나사렛 요셉의 예수(요한복음 1 : 45) 또는 마리아의 아들 예수(마가복음서 6 : 3, 마태복음 13 : 55).라고 부른다.
예수의 부할과 승천
성경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지고 십자가에서 죽은 뒤 3일 후 부활함으로써 인류의 구원을 완성했고, 부활 후 제40일에 열두 제자를 축복하고 수많은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하늘로 올라갔다.
<출처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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