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교 와 코란

2015. 10. 6. 오후 2:5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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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교 와 코란


-<>계 일신교 계통의 종교로 추종자인 모슬렘은 약 8억정도이며 발흥시기는 7세기 초이다. "이슬람"의 뜻은 "복종"이며 "모슬렘"의 뜻은 "복종하는 사람"이다.

경전은 "코란"이며 114, 6239절로 되어있다. 코란의 내용은 신관념(神觀念), 천지창조, 류의 역사와 이에 대한 신의 지배, 종말(終末), 부활과 심판, 천국과 지옥, 예배등 의례 적인 규범에서 부터 법적 규범까지 포함한다. 또 코란은 알라에 대한 신앙을 언제나 인간 의 구체적인 윤리적 행동을 통하여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윤리적인 면을 강조하는 경전 이라

할 수 있다 


1. 이슬람 이전의 아랍부족사회

이시기를 자할리야시대 또는 무명시데, 영웅시대라고하며 67세기초 까지를 지칭한다.

시기의 특징은 아랍 유목부족의 생존경쟁, 부족적 혈연집단의 연대의식으로 요약할수 있다.

이당시 아랍인은 까흐탄및 아드난이란 두 조상에 기원을 둔다고 여겼다. 까흐탄은 구약의

요그탄에, 아드난은 이스마엘의 자손으로 여겨지며 전자는 남아라비아의 예멘의 여러부족으

로 아라비아의 서남부, 후자는 북부 아라비아 출신이라 한다. 그러나 이런 인종상의 차이는

현실적으로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실제로 아라비아 반도의 주민은 크게 유목민과 정주민으로 나뉜다. 유목민(베드윈)은 방목생활과 수렵, 전투, 약탈등으로 생계를 꾸려갔고, 반면 정주민은 중부 아라비아의 오아시스나 해안가에 살며 농업과 상업으로 생계를 꾸렸다. 당시의 부족은 대개 경우 생각하는 그런 커다란 집합체가 아니라 일반적으로 비교적 작은 집단이었다. 집단의 기본은 혈연을 유대로

하며, 노예와 해방노예가 있었고 차별을 받고있는 비 자유민인 미왈리, 그리고 다른 부족 출

신의 자유민인 할리프가 있었다. 즉 혈연이 바탕이나 그 내부에는 동족이외의 자유민이 스스로의 의사로 공동체를 형성하기도 했다.


유목부족은 풀과 물을 찾아 이동하는데다 때때로 인근의 다른 부족과 싸우기도 했다. 그들

에겐 약탈을 받았다 생각되면 받은 만? 되갚는 동해복수(同害復讐)가 행해졌다. 족내에는 뚜?한 정치적제도나 조직이 없었고 정치적 권력을 가진자도 없었다. 물론 부족장이 있긴하나 그의 영향력은 그가 부족민에게서 어느정도의 존경을 받는가에 의존하, 자우민인 부족민은 부족내의 중요문제를 부족집회를 개최하여 결정했다.


그러나 같은 부족민은 같은 조상을 갖고있다는 강한 부족의식인 아사비야-집단 연대의식-

를 갖고있어 부족내에선 서로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혈연은 모든이가 복종해야

하는 유일절대의 권위로 여겼다. 이것이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것과 연계되어 부족정신을 이

뤘다. 이런 부족정신은 자신의 부족민이 살해당하면 가해자가 속한 부족에게 같은 수의 복 수를 행하는 것-피의 복수:이를 피하기 위해선 배상금으로 낙타 100마리-을 의무로 여기게

했다. 한편 그들에겐 지와르란 것이 있었는데 이것은 찾아온 손님을 환대하는 유목 베드윈의 관습으로, 보통의 경우 부족밖의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거나 약탈하는 것을 허용하

나 이 지와르관계에 있는 사람의 재산에 손을 대는 것은 수치스런 행위로 여김으로 그의 재

산을 보호하게 했다.


앞에서도 말했듯 유목부족은 방목과 약탈로 생계했으므로 재산에대한 소유권도 극히 유동적

이었고 (강한 부족은 언제든 약한 부족의 재산을 뺏을 수 있다.) 따라서 그들에겐 빈부격차

도 크지않아 부족내 개인은 평등하고 상당한 정도의 자유를 누렸다


2. 이슬람 발흥시기의 메카

그러다 이슬람이 발흥하기 직전, 6세기 후반 히자즈 지방의 메카에 경제적 변화가 생기고

있었다. 메카는 대상 교역의 교통 요로에 위치했고 또 성소 카바신전-오늘날 이슬람이 가장

신성한 신전. 코란에 의하면 카바의 건설자는 아브라함과 그 아들 이스마엘로 되어있다.

바란 입방체를 의미-이 있어 아라비아의 유목민은 매년 일정시기 이곳을 순례했으며 순례

기간인 신성월에는 성역으로서의 메카 및 그 주변에서 모든 전투행위가 금지되었다.

이시기(6세기 후반)아라비아 반도의 각 부족사회는 각기 숭배하는 우상신 갖고 있었는데 이

들은 메카이 카바신전에 두고 매년 특정달에 희생을 바치고, 또 매년 많은 사람들이 순례했

기 때문에 메카는 언제나 축제의 분위기였다. 이런 신앙은 (우상신) 메카의 중요 소득원이었

. , 땅이 척박해 농사를 할 수 없는 메카는 목축을 했는데 양, 산양, 낙타 등을 순례자에

게 팔고, 가축의 생산물, 양모, 가죽등 제사에 남은 것은 상품화하여 타지방의 특산물과 교

환하는 것이다.


메카는 교통요충지였기 때문에 상업의 중심뿐 아니라 금융의 중심으로 경제활동이 왕성해졌

, 이결과 유목내지 반유목경제에서 상업경제로 이행하게되며 급기야 6세기후반엔 아라비

아의 최대도시로 성장한다. 그러나 사회조직 및 그들의 의식면에서는 부족적 연대성이나 동

해복수와 같은 유목생활에 적합한 사회제도나 의식이 여전히 자리잡고 있었다.


메케의 대다수 주민은 쿠라이쉬라는 부족에 속해 있었다. 쿠라이쉬부족은 스스로 대상을 조

직하고 교역을 하면서 전에 가졌던 유목부족적인 부족연대의식은 희박해지고, 개인주의적

이기주의의 풍조에 물들어 부족내 유력자들은 약소자를 돕는 부족적 의무를 망각해갔다.

족적 집단 지향형에서 개인적 이익 지향형으로의 이런 변화는 유목적 의식구조와 새로운 상

업경제적 환경의 모순과 갈등을 가져와 이슬람이 발생하는 사회적 경제적 요인이 된다.


3. 모하멧드

모하멧드는 쿠라이쉬부족의 일원으로 570년경 메카에서 유복자로 태어났다. 어머니 역시 6

살 때 잃은 그는 할아버지의 보호하에 있다가 그의 숙부 아부 앗딸리브에게 위탁되어 성장

한다. 그의 청년 시절은 잘 알려져 있지않으나, 메카의 대상활동에 참가하여 성실한 사람으

로 인정을 받고 25세엔 약 15세 연상의 거부 미망인 카디자와 결혼한다. 그후 40세 정도되

었을 610년경 그는 처음 알라의 계시를 받아 최초의 3년간은 그에게 찾아오는 특정인을 상

대로 전도를, 614년에는 대중전도에 나서게된다. 그는 예언자로서의 스스로를 자각한 후 13 년간을 메카에서 10년을 메디나에서 지냈는데 코란의 2/3가 메카에서, 1/3메디나에서 받은 계시이다.


코란은 예언자 모하멧드에게 계시된 유일신 알라의 말씀을 기록한 것으로, 그가 처음 계시

받은 610년경에서 623년 타계할 때까지 약 23년에 걸쳐 간헐적으로 계시된 장구(章句)를 모은 것이다.

그가 처음 계시를 받은 것은 라마단(9)말 히라동산에서 명상을 하다 대천사 가브리엘로

부터라고 전승-모하메드의 언행록-은 전한다. 초기계시는 신의 은총과 권능. 부활과 최

후 심판. 절대자에 대한 감사와 예배. 베품과 너그러움으로 요약된다.


4. 박해

모하메드에 대한 메카 반대자들의 주된 이유는 이 종교와 교리를 수락함으로 발생되리라 예

상되는 정치 경제적 영향때문이었다.

코란은 내세에 궁극적 가치를 둠으로 현세적인 것을 상대화하면, 부의 적대적 가치를 부정

하고 신앙과 선행을 강조했다. 이 선행은 부적적 연대의식의 발로가 아닌 오히려 종교적 개

인주의의 가치기준에서 나온 것으로, 비록 메카가 변화과정에 있었다해도 부족조직은 여전

히강했던 당시로선 종족의 전통을 파괴한다고 여겨 반발이 더했다. 그러나 어떤의미에선

코란의 상부상조원리는 사라져가는 옛 부족적 윤리의 좋은점의 재생이라 할수 있다. 암튼

코란의 종교적 개인주의는 부족적 집단주의와 정면으로 대립하게 됐고, 코란의 내세주의는

아랍부족의 현세주의를 부정하며 지상의 모든 권위를 상대화하고 대상인(大商人)층을 정점

으로하는 메카 사회 체제의 기반을 허물어 뜨리는중대사였다. 모하메드와 대상인층은 사이

가 나빴지만 당시 그를 양육한 숙부의, 족장으로서의 비호로 신변에 위협을 느낄 정도는 아

니었다. 그러나 615년경 자신들이 제시하는 교리를 첨가하면 입교하겠다는 메카 대상인층의 제안을 거절함으로 둘 사이 대립은 더욱 격화되었다. 게다가 그를 비호하던 숙부 아부 앗딸 리브가 619년 별세하고, 잇달아 부인 카디자도 사망한데다, 또다른 숙부 아부 라하브가 씨족장으로서의 그의 보호를 취소하자 모하메드는 치명적인 타격을 받고 메카 동쪽 약 60어진 고원도시 띠아프로 가나, 거기서도 배척당한다 


5. 히즈라

620년경 야스리브-현재 메디나-에서 메카를 방문한 여러명의 순례자들이 모하메드의 설교

에 감명을 받고 다음해엔 다른 동료를 데려와 아까바에서 모하메드의 가르침에 따를 것을

맹세했다.-아까바의 맹세.

야스리브, 즉 메디나는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농업을 주요생업으로 삼은 도시이다. 경제적 실권은 유태족이 장악했고, 그외 두 아랍부족 아으스와 하즈라즈가 있었는데 둘의 계속적인

상쟁으로 메디나의 정국은 불안정했다. , 여기서도 새로운 정주사회에 적합치 못한 관습에 대치할 새로운 윤리의 필요성을 알면서도 이를 확립치 못하는 괴로움이 있었다. 모하메드는 그의 이상을 실현코자 알라를 궁극의 주권자로, 자신을 지상의 대리인으로 인정하는 공동체인 움마를 현실세계에 건설해야한다고 생각하여 메디나로 이주(이를 히즈라라고 함)한다.


한편 그를 초청하는 메디나 사람들은, 물론 그를 예언자로 인정하는 자들이지만 또한 모하


메드가 아랍부족간의 분쟁조정자 역할을 해주길 기대했다. 메디나출신은 공정한 입장을 취


하기 힘들며, 보통사람으로는 사람을 설득시키기 힘들것이나 모하메드는 메카의 망명자이고,


알라의 사도이므로 적격자란 생각에서였다.


이렇게 모하메드의 히즈라와 함께 메디나로 이주한 메카의 이슬람교도들은 무하지룬, 메디


나의 아랍인으로 이슬람교로 개종한 자를 안사르라 불렸으며 이들은 하나의 신앙 공동체 움


마를 형성했다. 또 메카에 삶의 기반을 다 두고 와야했던 무하지룬을 위해 모하메드는 안사


르의 자택에 무하지룬을 생활하도록 했다.




 


6. 바드르 전투와 우후드 전투


안사르의 도움으로 생활하던 무하지룬은 그들의 생활보장 방법으로 "대상 습격"을 택한다.


-당시 아랍 유목부족에게있어 대상 습격은 합법적이며 명예로운 생활수단이었다.


모하메드는 메카의 쿠라이쉬 부족이 파견하는 대상을 습격할 계획을 세웠다. 이것은 메카측


과의 전면대결을 의미한다. 메카측에선 상업활동이 방해받는 것은 사활의 문제이고, 쿠라이


쉬 부족의 체면과 권위에 관한 일이기도 했다. 반면 메디나의 이슬람교도측에선 약탈은 경


제적 자립의 토대가 될 수있고, 또 그들을 박해했던 불신앙자들에 대한 성전(聖戰-지하드)


이라는 대의명분도있었다. 유목민이 아닌 모하메드가 약탈을 결의한 것에는 경제적 이익뿐


이 아니라 쿠라이쉬 부족의 세력을 약화하고자 하는 의도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초기의 습격은 무하지룬이 주를 이루나 곧 안사르의 참가도 늘어나 바드르 전투에선 무하지


86명 안사르 238명이 참여했다 한다. 이 전투는 두배에 달하는 쿠라이쉬 부족의 대군을


완전격파하여 이슬람 교도에겐 자심감을 심어주고, 모하메드는 예언자적 위치가 고양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실제로 "예언자"란 칭호는 바드르 숭리의 후로, 바드르 전투에 관한 코란 계시인 8장에


처 음 나온다. 그 이전까진 "알라의 사도"로 칭한다.)


코란 8장 전리품의 장에선 이날을 "구제의 날"로 부른다. 이 승리로 이슬람교도들은 알라가


모하메드와 이슬람교도의 편임을 확신하게 된다. 더구나 전리품의 1/5을 모하메드의 집안의


경비와 이슬람교도의 궁핍한 자의 구제비로 모하메드가 취할 수 있게한 것은 그가 일반 신


도와는 다른 특수한 지위에 있음을 스스로 인정한 것으로, 가장 원초적인 형태이긴 하나 교


단국가(교단國家)의 통치와 비슷한 정치가 시작됐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바르드 전투의 승리로 이슬람 세력은 메디나에서 자리를 굳히고 모하메드와 그의 공동체는


확고부동해지나, 메카는 전쟁에서 패배한 후 잃어버린 위신 회복에 전력을 기울여야 했다.


6253월 유목민을 포함하는 메카군 약 3천명이 메디나를 공격해왔다. 이에 대응하기위해


이슬람군은 메디나의 교외 우후드 언덕에 진을 치나 전투가 개시되기 얼마전 일부의 신자들


이 전열을 떠나고, 또 메카 기병대의 활약으로 이슬람군은 이 우후드전투에서 고전을 면치


못한다.


메카의 이전투의 중요목적은 모하메드가 메디나에 건설한 이슬람 공동체인 움마를 파괴하


, 바드르 전투에서의 손실의 몇곱을 갚아주는 것이었다. 이런 메카군은 우후드 언덕에서


돌연 전투를 중지하고 메디나로의진격 대신 메카로 회군한다. 이것은 메카의 사상자도 많았


거니와 메디나의 이슬람군 이탈자인 사이비 이슬람 신자의 세력증대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드르 전투의 승리로 알라의 도움을 확신하던 이슬람교도둘은 우후드 전투의 결과


를 자신들의 불신앙에 대한 알라의 처벌과, 신앙의 견고함을 확인하기위한 수단으로 내린


시련으로 받아들였다.




 


7. 유태교도와의 대립과 이슬람교의 확립


메카 후기 메디나 초기 이슬람 법은 유태교도나 기독교 및 다른 일신교도에 대해 종교상의


관용을 베풀었다. 모하메드는 자기에게 계시된 것이 자기 이전의 일신교 예언자들에게 내려


진 계시를 확인하는 것이라 믿어, 유태교도를 계시받은 경전의 백성으로 생각, 그 신앙을 유


지하게 한 것이다. 이것은 다른 일신교도들도 자신을 예언자로 인정해 줄 것으로 예상한 결


과이다. 메디나로 이주한 모하메드는 처음 유태교도와 맺은 협약인 <메디나 헌장>으로 유


태교와 이슬람공동체인 움마의 공존을 인정했다.


또 유태교의 제도를 채택하여 메디나 초기시대엔 이슬람 교도가 예루살렘을 향해 예배토록


하고, 유태교의 110(속죄일) 단식일의 종교행사도 받아들인다. 또 예배일이 금요일인


것도 유태교의 안식일(토요일) 준비와 상통된다. 이런식의 친유태교 정책은 모슬렘의 계전


백성의 여자와의 결혼을 허용하고 (여자의 경우 비이슬람교와의 결혼은 금지됨) 그들이 먹


는 음식도 먹을 수 있게 허용한다.


이런식으로 모하메드는 유태교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했으나, 유태교는 정치적으로는 이


에 동의한 흔적이 있으나 종교적 문제에선 거부했다. 유태교의 반대는 모하메드의 유일신


사상 때문이 아니라, 그가 참으로 신의 계시를 받은 존재인가, 예언자인가 하는 부분에서 그


들의 성서해석 결과 그를 인정치 않으려 한데 있다.


결국 메디나 이주후 2년째인 624년 유태인이 모하메드를 그들의 구약성서에 나오는 예언자


계통의 한 예언자로 인정치 않자, 모하메드는 그때까지 예루살렘을 향하던 예배방향을 메카


의 카바로 향하게 하고, 바드르 전투 후엔 110일 행하던 단식을 대신해 라마단(9)달에 1


개월간 단식을 실시케 한다. -라마단 단식은 아바다드(종교적 의무 행위)의 하나로 그달에


는 일출에서 일몰까지 모든 음식의 섭취를 금한다.


이렇게 유태교로부터 거부를 받?되자 모하메드는 유태교에 반격을 가한 것이다.


브라함이 세운 카바신전으로 예배방향을 바꾼 것은 이슬람교를 아랍의 전통위에 확립시켜


세계적 종교를 이룩하려는 것이고, 유태교와의 결부를 부정하는 것이다. -카바를 향함은 아


랍 다신교의 신전으로서가 아닌, 알라의 집으로서의 카바의 의미를 강조한 것이다.


바드르 전투 후 카바신전의 건설자로서의 예언자 아브라함의 의의가 코란에 강조되어 계시


되는데 내용은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스마엘과 함께 카바신전을 건설하고 이를 알라께 봉납


했고 그자손(아랍인) 가운데 한사도가 나오길 간청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모하메드가 일어난


것이 아브라함과 이스마엘의 소원이 이루어진 것으로 볼수 있게 만든다.


아브라함은 유태교도 기독교도 아닌 하니프-순수한 종교의 신도, 순수한 일신교도-이며 그


의 신앙은 이슬람이었고 모하메드의 가르침도 아브라함이 믿는 일신교의 부활이라 여기며,


코란은 그 계시가 모세나 예수의 가르침과 동일하다고 주장한다. -이슬람의 뜻은 신에대한


절대복종이란 아랍어에서 나왔는데 이 어휘가 코란에 처음 나타난 것은 바드르 전투 이후의


일로, 유태교와의 대립이 시작되면서이다.


순수한 아브라함의 종교복원으로서의 이슬람이란 성격은 모하메드의 구약성서에 관한 역사


적 객관적 지식에서 도출되었다고는 볼수없다. 대신 코란은 유태교와 기독교가 본래 옳은


성전을 잘못해석하고, 그 일부를 조작하거나, 감추었다고 비난함으로써 유태교의 성서의 전


통적 해석에 의거한 비난을 다른차원에서 되받아쳤다.


카바신전을 알라의 집으로 간주하고 아브라함을 그 건설자로 여기는 것은 당시 메카와 그


주변 주민의 일반적 통념이었다. 모하메드는 이런 통념을 이용하여 이슬람교를 아랍의 민족


감정과 민족적 전통위에 정착시키는데 성공하여 이슬람에 의한 아랍 민족의 통합과 모하메


드 자신에대한 쿠라이쉬 부족의 적의를 약화시키는데 기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이


슬람에 애니미즘의 요소를 남겼다는 오해와, 8세기 중엽까지 이슬람을 아랍 민족종교로 곡


해하게한 중요원인이 되었다.




 


7.한다꾸(참호) 전투와 모하메드의 말년


6273월 쿠라이쉬 부족은 우후드전투에서 일단 바드르 전투의 복수를 했지만 모하메드와


그 움마를 지상에서 말살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다시 약 75백명의 부족연합군으로 메디나


대 포위작전을 행한다. 이에 대응하여 모하메드는 약 3천명 정도의 군사를 모집 메디나의


적의 공격에 노출되는 모든 곳에 참호를 팠다.- 한다꾸 전투


연합군은 2주나 포위를 했으나 참호를 못넘고 메카로 돌아간다. 쿠라이쉬 부족은 모든 재력


을 원정에 소비하였으나 포위작전의 실패로 그 위신을 상실하고, 메카와 메디나의 균형은


메디나로 기울게된다.


모하메드는 연합군이 철수하자 곧 유태교도인 꾸라이자 부족을 처형하고 628년엔 14백명


의 이슬람교도를 이끌고 카바신전 순례에 나섰다. 쿠라이쉬 부족은 2백명의 기병대로 이를


저지하려했다. 결국 후다이비야에서 향후 10년간의 휴전과 다음해의 메카순례를 약속함으로


둘은 타협을 한다.-후다이비야 조약


모하메드는 주위 여러부족을 제압하거나 우호관계를 수립하는 한편 유태교도를 메디나로부


터 완전 추방한다. 그후 6301월 일만 대군을 이끌고 메카에 진격하여 전의를 잃은 쿠라


이쉬 부족으로부터 항복을 얻는다. 무혈입성한 이슬람군은 카바신전의 우상과 메카시내의


모든 우상을 파괴하여 이교(異敎)의 시대를 종식시킨다.


아랍의 유력한 쿠라이쉬 부족을 정복한 소문이 퍼지자 많은 부족이 메디나에 사절을 보내


맹약을 맺고 이슬람교를 수용한다.


630년 모하메드는 3만 대군을 인솔하여 타부끄 원정을 감행하기도 했는데 이는 이슬람의 북


방정책의 일환으로서, 이슬람교의 위용과시가 목적이었다고 추정된다. 그후 632년 모하메드


는 순례를 마치고 수개월후 세상을 뜬다.- 이별의 순례라 한다.-코란에 순례에 대한 규정은


자세히 나오지 않으나 이때의 선례로서 순례양식이 답습되고 있다.


참고자료 : 코란의 이해 - 김용선



<<이슬람교와 기독교의 공통점>>


1. 종교유형의 공통점 : 종교학적으로 말해서 ?예루살렘형 종교?에 해당한다. 인격신 신앙을 가지며 제정이 엄격히 분리되지 않는 경향을 갖고 현세참여적 성격이 강하다.


2. 유일신 신앙 : 신이해가 다신교적이지 않다. 그래서 신 사이의 갈등은 없다. 알라는 신이라는 일반명사로 기독교의 ??과 같은 어원의 단어이다(영어의 God과 독일어의 Gott의 관계와 유사).


3. 아담으로부터 시작해서 아브라함, 모세, 그 후 예언자들로 이어지는 계보를 공유한다. 이슬람교에서는 예수도 마호멧 이전의 가장 위대한 예언자로 인정한다


 


<<이슬람교와 기독교의 차이점>>


 


1. 이슬람교는 기독교가 예수를 참 신이며 참 인간이라고 하는 것을 부정한다. 이슬람교는 절대적 유일신 신앙에 입각해서 신격에 해당하는 어떤 것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예수를 예언자 중 한 명으로 본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에 대해서도 이견이 있다. 이슬람교는 알라가 예수를 십자가 처형을 받기 전 하늘로 데려갔다고 믿는다.


2. 기독교는 마호멧에 대한 계시를 인정하지 않는다. 기독교는 예수를 통해서 최종적인 계시가 이루어졌다고 믿고, 이슬람교는 마호멧에게 최종적인 계시가 임했다고 믿는다.


3. 기독교는 성부, 성자, 성령이 한 신이라는 삼위일체를 주요 교리로 채택하지만, 이슬람교에서는 성령이라도 신은 아니라고 본다.


4. 종말신앙도 기독교는 예수가 재림을 하고 최후의 심판관이 되지만, 이슬람교에서는 알라가 최후의 심판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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