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인이 본 예수님의 어머니 聖母 마리아](1)
한국 개신교는 “예수님(主)의 어머니”(눅 1:43) 마리아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개신교에는 가톨릭 교회처럼 마리아에 대한 교의(敎義)나 전례적 공경이나 신심 행위의 풍습이 없다. 가톨릭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4개 헌장 중 하나인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Lumen Gentium)에서 마리아를 ‘그리스도와 교회의 신비 안에서의 하나님의 어머니시요 복되신 동정’으로,... 예비자 교리서인 ‘초대받은 당신’에서는 마리아를 예수 그리스도의 모친으로서 하나님의 구원사업의 협력자이시며, 구원받은 인간의 모범으로서 모든 그리스도인의 희망으로 가르친다.
뿐만 아니라 가톨릭 교회는 마리아가 인류의 구세주이신 하나님의 어머니로서 공경을 받아 마땅하다고 보아 만물의 창조주이자 주님이신 하나님께 바치는 공경으로서 ‘흠숭지례’(欽崇之禮)보다는 물론 낮으나 일반 성인들에게 바치는 ‘공경지례’(恭敬之禮)보다 한층 높은 ‘상경지례’(上敬之禮)로써 각별히 공경한다. 이런 가톨릭의 사정에 따라 가톨릭 교의학은 마리아론을 신론이나 기독론을 다루듯 신앙의 구성적 내용으로 서술한다. 개신교 신학자가 보기에 이 어찌 이상하고 놀랍지 아니하겠는가!
반면 개신교는 신학, 교의, 세례 문답집, 그 어디에서도 마리아에 대한 장이나 항목을 찾아볼 수 없다. 예수님의 제자들의 이해를 위한 물음은 있어도 마리아에 대한 물음은 없는 형편이다. 따로 목사님이 마리아를 주제로 설교하거나 교육하는 일도 일 년 내내 거의 없다. 신학대학에서도 마리아론이 언급되지 않음은 물론이거니와 ‘아베 마리아’(Ave Maria)를 듣고 연주하기도 주저한다. 필자 역시 조직신학을 공부하면서도 이 글을 쓰기 전까지 마리아론을 체계적으로 공부한 경험이 없다.
[개신교인이 본 예수님의 어머니 聖母 마리아](2)
한국 개신교는 “예수님(主)의 어머니”(눅 1:43) 마리아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한마디로 별로 이해가 없다. 성경을 중시하는 개신교가 신약 성경 맨 앞에 등장하는 마리아에 대하여 별로 아는 것이 없다는 게 말이 되는가?
마리아(Maria)의 단어적 의미는 아람어로 “신이 사랑하는 여인‘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 이름의 어원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그 첫 번...째는 모세와 아론의 누이였던 미리암(Miriam)에서 유래했다는 설이다. 이 이름은 ’뮈르‘와 ’얌‘의 복합어로 뮈르는 이집트어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며 얌은 히브리어로 ’야훼‘의 축소형이다. 따라서 마리아는 ’야훼의 사랑하는 사람‘ 혹은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사람‘이란 뜻이고 ’존귀한 분‘, ’친숙하고 사랑스러운 부인‘ 등의 의미가 있다.
두 번째는 마리아의 또 다른 호칭인 ‘마돈나’(Madonna)가 어원이라는 설인데, 마돈나는 ‘우리들의 사랑하는 여인’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인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를 의미한다. ‘나의 귀부인’이라는 의미의 마돈나는 이탈리아어로 성모 마리아의 초상이나 성화를 지칭할 때 많이 사용되었다. 마돈나는 일반적으로 성모 마리아에 대한 교리상의 의미나 감상적 의미를 강조하여 재현한 작품만을 일컫는다.
교회사적으로 가톨릭이 마리아에 대한 교의를 지속적으로 새롭게 제정 선포하여 늘리고 마리아에 대한 신심 행위를 권장한 반면, 개신교는 종교개혁 시기까지 있었던 마리아 공경례도 계몽시대 이후에는 실행하지 않고 있는 경향이다. 다만 정기 예배 때 사도신경 중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부분을 고백하면서 ‘마리아’가 잠깐 뇌리에 스치거나, 여선교(여전도)회의 이름을 ‘마리아 선교회’로 이름 붙이는 정도에서 마리아를 기억할 뿐이다. 물론 이때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막달라 마리아, 나사로의 누이동생이면서 마르다의 자매인 마리아,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요 19:25), 요한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행 12:12), 바울이 문안한 여신도 마리아(롬 16:6) 중 어느 마리아와 자신을 일치시키는지는 분명치 않다. 예외적으로 1920년대에 미국에서 형성된 5개의 근본주의의 원칙 중 예수의 동정녀 마리아 탄생 교리가 있으나, 이 원칙은 어디까지나 마리아를 생각하기 위함이 아니라 예수의 신성을 입증하기 위함이었다.
한마디로 가톨릭과 개신교가 분리된 이후 양자는 서로간의 차이를 주장함으로써 각자의 정체성이 주장되고 확보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가톨릭은 마리아 교의와 공경을 양산했고, 반대로 개신교는 있었던 마리아 교의와 공경까지도 폐기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러니 개신교인들이 가톨릭의 마리아 공경을 고운 눈으로 보지 않을 뿐 아니라 심지어 마리아 숭배교라고까지 오해하고 있는 것도 어찌 보면 필연적인 결과인 것 같다.
나는 성모상을 여러 번 만들었습니다. 지금도 어떤 시골 성당에 놓일 성모상을 만들고 있습니다. 조각예술가로서의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고 싶습니다. 어떻게 해야 아름다운 조각이 될 것이며 성모님의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모두 어려운 문제입니다.”(최종태)
“옛날의 성상은 믿음의 생활에서 나왔는데 오늘날의 성상은 인공적일 뿐이다. 따뜻함이 없고 생명감이 없다. 반드시 사람의 내면에 신앙의 생활이 없기 때문이다. 종교적 주제를 빌리고 있을 뿐, 종교적 삶이 없는 것이다.”(프랑스의 한 조각가의 말)
[개신교인이 본 예수님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3)
한국 개신교는 “예수님(主)의 어머니”(눅 1:43) 마리아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나는 이 글을 쓰기 전, 몇몇 목사와 평신도들에게 가톨릭교회의 마리아 상과 공경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묻고 그룹토론 한 적이 있다. 개신교 전체 의견을 대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제한된 범위라는 것을 감안하면서 이것들이 개신교인이 이해하는 마리아의 현주소라고 생각되어 다음의 몇 가지로 나누어 정리해본다. 이 글쓰기는 나에게 그 신기함과 기쁨이 온 몸에 꽉 차서 터질 것 같은 감동을 선사한다.
첫째, 가톨릭교회는 마리아를 숭배하는 교회이다. 가톨릭교회회의 뜰 안으로 들어가 보면 예외 없이 교회의 중앙이나 혹은 계단 꺾어지는 부분에 마리아 상이 서 있기도 하고 예배당 안 앞쪽에 배치된 경우도 많다. 겉으로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상(像)이 개신교에서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아니라 마리아 상이기 때문에, 마리아가 그리스도보다 신격화되었다고 판단하며 따라서 개신교인들은 가톨릭교회를 마리아를 숭배하는 우리와 다른 이상한 기독교로 생각한다.
둘째, 가톨릭교회 신자들은 마리아 상 앞에서 합장하고 기도한다. 개신교인들은 가톨릭교회인의 이러한 신앙행위를 ‘우상 숭배’라고 안일하게 폄하하고 정죄하는 경향이 짙다. 이는 종교개혁 교회가 모든 성상이나 종교적 상징물들, 심지어 십자가까지 제거하였고, 한국 개신교에서는 선교 초기부터 한국 전통 종교의 상징물과 조각들을 우상이라고 평가한 데서 기인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일부 개신교인들은 바로 여기에서 개신교의 ‘참된’ 신앙을 가톨릭교회의 ‘그릇된’ 신앙으로부터 구분하는 결정적 준거를 찾는다. 그래서 심지어 가톨릭교회는 우상을 숭배하며 따라서 이단이라고 말하기를 서슴지 않는 개신교인들도 있다.
셋째, 가톨릭교회의 마리아에 대한 기도를 어느 정도 이해하는 개신교인들이라도 가톨릭교회의 소위 성인 공경과 전구(轉求, F?rbitte)를 문제시 한다. 개신교인들은 구원을 위한 은총의 절대성을 믿고, 기도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 기도하기 때문이다.
넷째, 마리아 상은 이방의 여신상이 기독교의 옷을 입고 환생한 것이 아니냐고 질문한다. 이는 가톨릭교회가 기독교와 전통 문화를 무분별하게 혼합시키고 있지 않느냐는 물음과 맥이 닿아 있다. 도상학적으로 성모(자)상은 “아들을 안고 있는 이시스”상이나 “메소포타미아 성모상”과 비교되기도 한다.
다섯째, 마리아의 동정과 청순한 마리아 상이 강요하듯 보여주는 여성의 순결성은 이미 지나간 봉건 시대 이래의 가부장적 성윤리를 반영한 것이며, 따라서 여성 억압적 성차별을 온존하게 만드는 이미지가 아니냐고 반문한다.
여섯째, 개신교 신도들은 마리아에 관한 가톨릭의 세부적 교의 - 구원의 협조자, 하나님의 어머니, 평생 동정, 원죄 없으신 잉태(無染始胎), 성모 승천 - 에 대하여 그러한 가르침이 있는지조차 잘 알지 못한다.
일곱째, 그러나 개신교 신도들도 마리아가 동정녀이며 主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고백한다.
이상 서술한 바와 같이 마리아에 대한 교의와 신앙 실천은 가톨릭교회에서만 나타나고, 개신교에서는 이에 대한 반론을 제외하면 전혀 언급조차 없는, 가톨릭교회만의 전통과 교회적 관습으로 여기고 있다. 따라서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쟁론과 대화의 주제로 떠오를 수 있는 ‘성서와 전통’, ‘은총과 행업’, ‘성서와 성례전’, ‘교회의 직무’ 등과는 달리 여기서는 상호 이해의 노력과 의견 일치의 전망을 말할 여지가 그만큼 적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개신교도 마리아 이해에 대한 성서의 증언과 교회의 전통을 중시하는 만큼 가톨릭교회와 공유할 수 있는 마리아 이해로부터 출발하여 개신교의 마리아 이해를 증폭시켜 구원사에서 무시되었던 여성의 정체성을 부각해야 한다. “개신교 신학에서 마리아론이 탈락됨으로써 개신교는 교회의 여성됨의 근거를 상실해 버렸다”는 박순경 교수의 지적은 매우 옳다. 그러나 개신교가 가톨릭의 마리아 교의와 공경을 모두 받아들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먼저 가톨릭교회의 마리아 교의를 이해하고 교회의 일치를 바라보며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에 대화 가능한 방향을 제시하고 싶다. 우리 시대와 세계를 위하여, 그리고 무엇보다 그리스도적 삶을 위하여 전승된 가르침과 상징을 성찰하고 살아있는 의미를 찾아 부여하는 일은 신학도의 최대의 과제이며 즐거운 탄성일 것이다.
정경은 예수 탄생 이전의 마리아의 생애에 대해 언급이 없지만 외경에는 임신이 되지 않는 노부부, 요아킴과 안나가 40일간의 참회로 천사의 예고 직후 마리아를 임신한다는 이야기가 있다(세례 요한의 잉태 이야기와 유사하다). 이러한 이야기는 예술가의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그림 같은 생생한 묘사, 심리적인 묘사들로 가득하다.
요아킴과 안나는 20년 넘게 모범적인 결혼생활을 한 부부이다. 구약의 사라와 한나 그리고 신약의 엘리사벳에게서도 본 것이지만 선택된 백성이 자식을 낳을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의 벌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요아킴은 제사를 위해 예루살렘 성전에 가져간 제물을 봉헌할 수가 없었다. 굴욕감을 느낀 요아킴은 나사렛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고 40일 동안 단식과 참회를 하면서 양치기들과 사막에 머문다. 그러자 천사가 나타나 그의 제물은 하나님의 옥좌에 이르렀고, 그의 기도가 응답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천사는 남편 없이 지내는 안나를 위로하면서 예루살렘의 황금문으로 가서 남편을 만나라고 전한다. 그들의 감동적인 재회 후에 안나는 마리아를 잉태하게 된다.
개신교인이 본 예수님의 어머니 聖母 마리아](4)
한국 개신교는 “예수님(主)의 어머니”(눅 1:43) 마리아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최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에 관한 연구는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전개된다. 하나는 전통적 교회의 교리에 따르는 경향으로, 마리아를 교회의 전형(典型)으로 이해하며, 다른 하나는 역사비평적 방법론을 성서에 적용하여, 마리아를 나사렛 예수의 어머니 유다인 여자, 미리암(Miriam)으로 이해...한다. 이 두 방향의 연구는 콘스탄티노플의 비잔틴교회와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모 마리아가 예수의 어머니 유다인 미리암과 동일 인물인가 라는 물음을 제기한다.
1) 마가복음서
네 복음서 가운데 가장 오래된 복음서인 마가복음서는 마리아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예수의 탄생과 유아기에 관한 기록이 없다. 처음으로 예수의 어머니의 이름을 언급한다(막 3:31-35; 6:1-6). 마리아는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 가족들과 함께 그를 찾지만, 예수는 주위 사람들을 향하여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막 3:33.35) 하고 말씀하신다. 예수의 가족은 예수를 미쳤다고 생각하고 율법학자들은 그를 바알세불이 들렸다고 여기는 마가의 맥락에서 위 본문의 의미가 두드러져 보인다.
혈통에 따른 ‘자연적 가정’이 예수와 함께 집 안에 있는 ‘종말론적 가정’으로 대치된다. 여기서 집은 교회를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른 본문(막 6:1-4)에서 예수는 고향 나사렛에서 기적을 행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예언자는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밖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는 법이 없기”(6:4)때문이다. 마리아가 예수를 믿고 예수를 따르는 제자라고 인증할만한 직접적 증거를 찾기 어렵고 마리아론적 요소도 등장하지 않지만 마리아가 혈연관계로 인해 예수의 어머니가 되었다는 단수한 역사적 사실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임으로써 예수의 어머니가 되었고 예수와 가족관계를 이루었다는 메시지는 마가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마리아에 관한 가장 가치 있는 증언이라고 하겠다.
2) 마태복음서
마태복음서에는 소위 “예수의 어린 시절”이 이야기되는 가운데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의 동정녀 수태가 고지된다. 동정녀 수태는 예언(사 7:14)의 성취(마 1:18-25)로 해설된다. 그러나 마리아가 중심인물은 아니다.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고, 예수의 계보는 요셉의 혈통을 따라 수록된다. 이 이야기의 주연은 요셉이다. 마리아는 마태 복음서에서 줄곧 수동적이다. 그녀는 약혼하고 잉태한 사실이 드러나고 요셉에게 맞아 들여지고 박사들에게 발견된다. 헤롯을 피하여 이집트로 피신할 때와 다시 나사렛으로 돌아올 때 요셉이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간다. 마리아를 언급하지만 능동적인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항상 다른 사람이 그녀에 대하여 행동하고 그녀는 수동적이고 순종적이며 유순하다.
그러나 계보의 서술에서 주목할 점은 문체상으로 볼 때 “갑은 을을 낳았다” 또는 “갑은 병에게서 을을 낳았다”라는 표현이 마리아와 예수에 와서는 “병에게서 을이 태어낳다”라고 갑자기 바뀌게 된다. 즉,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하는 예수가 태어나셨다”라고 표현함으로써 예수와 마리아의 관계를 강조하면서 성령잉태(마 1:18)를 암시한다. 마태복음은 우리에게 고유한 마리아상을 제시하지 않지만 마리아의 역할과 사명에 대해서 알 수 있다.
외경에 나타난 마리아의 생애에 관하여, 마리아는 태어난 후 세 살 때부터 열네 살까지 성전에서 살았다고 전해지는데(유년 시절 예수의 모습), 미술에서 그녀가 성전에 들어가는 장면, 즉 성전 봉헌과 성 요셉과의 결혼 후 마지막으로 성전을 떠나는 모습이 주로 그려진다. 성전의 기숙사 학교로 가기 위해 부모를 떠나는 묘사는 매우 자세하다. 마리아는 성전의 계단을 의연하게 올라간다. 이 모습에 대사제는 깊이 감탄하고 마리아는 요셉과 올라가기 전까지 성전에 머무른다[도판 ⑴]. 개신교와는 다른 방법으로 강조되는 가톨릭교회의 교회 중심적 신앙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마리아의 약혼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성경에 없고 다만 요셉과 약혼한 처녀로만 언급된다.(마 1:18; 눅 1:27, 2:5) 라파엘로는 마리아의 결혼을 그렸다[도판 ⑵]. 마리아가 열네 살이 되었을 때, 그녀는 또래의 친구들처럼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 부모의 집으로 돌아가 남편을 선택해야 했다.
3) 누가복음서
누가는 마리아에 관한 앞은 두 복음서보다 많은 것을 알려주고 있다. 마리아에 관련된 신약성경의 약 152개의 구절들 가운데 90개 가령이 루가복음서에 나타난다. 뿐만 아니라 누가 복음서에서 마리아는 처음으로 능동적이고 주도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그러나 복음사가의 관건은 마리아의 생애를 기술하려는 것이 아니라 구원사적 위치를 증언하는 것이다. 누가는 예수의 탄생과 유년 설화, 예수의 공생활과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 생생한 마리아의 모습을 제시하고 있다. 사도행전은 마리아가 초대교회 공동체의 일원이었음을 증언한다(행 1:14).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자 천사와 대화를 통해 천사의 요구에 응한다. 결정에 이르기 전에 요셉이나 그녀의 어머니 혹은 성전의 대제사장과 상담했다는 이야기는 찾아볼 수 없다. 누가에서 마리아는 구원사에서 하나님의 부름에 자유롭게 응답하는 독립적인 인격이다. 마리아의 찬가(눅 1:46-55)에는 하나님의 부름에 자유롭게 응하는 하나님의 여종으로서 신앙의 전범인 마리아의 모습이 탁월하게 표현되어 있다.
마태와 누가는 마가에 나타난 마리아의 태도를 유화적으로 표현하고 마리아가 초대교회에서 예수의 제자임을 명백히 밝힌다(행 1:14). 누가 1:42-45에 근거하여 참된 마리아 공경의 기초를 몇 가지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①마리아는 主예수의 어머니이다. ② 마리아는 무엇보다 그의 신앙과 순종으로 찬양받는다. ③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대화는 성령의 충만함 속에서 진행된다.
누가복음서는 마리아의 인격을 인상깊이 묘사하고 있다. 마리아는 복되면서 고통스럽다. 마리아는 예수의 참된 제자상으로, 모든 신앙인의 모범으로 제시되고 있다. 유명한 ‘마리아찬가’(Magnificat)는 단지 경건한 기도문이 아니라 혁명적인 ‘자유’와 ‘해방’의 노래이다. 이 노래는 이스라엘의 ‘자유’와 ‘해방’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마리아 찬가는 하나님의 역사적 해방 행위를 찬송하는 전통적인 시편과 공명한다. 구원은 개인적이고 영적인 것만이 아니라 삶(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제반 영역과 관계된 과제임을 말해준다. 인간의 지극한 행복은 자유와 해방의 밑그림 위에 풍성하고 충만한 생명이 세워질 때 가능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마리아는 이렇게 노래를 불렀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내 구세주 하느님을 생각하는 기쁨에 이 마음 설렙니다.
주께서 여종의 비천한 신세를 돌보셨습니다.
이제부터는 온 백성이 나를 복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해주신 덕분입니다.
주님은 거룩하신 분,
주님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는 대대로 자비를 베푸십니다.
주님은 전능하신 팔을 펼치시어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권세 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보잘것없는 이들을 높이셨으며
배고픈 사람은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요한 사람은 빈손으로 돌려보내셨습니다.
주님은 약속하신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의 종 이스라엘을 도우셨습니다.
우리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그 자비를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토록 베푸실 것입니다."(누가 1: 46-55. 공동번역)
4) 요한복음서와 바울서신
요한복음에는 공관복음서와 전혀 다른 맥락에서 마리아에 관해 언급되고 있다. 요한복음은 예수의 어머니 이름을 따로 언급되지 않고 가나의 혼인 잔치(요 2:1-12)와 예수의 십자가 처형(19:25-27)에서 두 번 등장...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도 예수의 탄생 이야기에서처럼 독립된 마리아론보다 기독론과 더 상관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예수가 마리아를 어머니라 부르지 않고 여인이라고 부른 것은 마가에서처럼 혈통에 따른 가족관계보다 종말론적 가족관계, 곧 교회를 강조하기 때문이다. 예수는 십자가에서 마리아와 제자들의 공동체인 어머니 교회를 연결한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누가의 전통에서처럼 신앙의 전형이다. 그러므로 마리아의 위상과 역할은 아들인 예수와의 결속관계에서보다는 하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 공동체, 곧 하나님 백성 전체와 연계되어 이해된다.
신약성서에서 가장 오래된 문서인 바울의 서신들에서 마리아는 따로 이름이 지칭되지 않고 예수의 탄생과 관련되어 간접적으로 언급되고 있다(롬 1:3-4; 갈 4: 4-5). 이는 바울이 부활절 이전 예수의 지상적 삶과 인간 실존에 관심이 없고 하나님의 아들의 선재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가 잉태되는 방법이나 마리아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신약성서가 말해주는 마리아 상은 놀랍게도 다양하다. 그러나 이 모두는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마리아 상이지만 마리아 교리를 형성하는 데 기여한 것은 아니다. 마리아에 대한 모든 신약성서 주석은 ‘마리아가 예수를 낳았다.’라는 진술에 모아진다. 이 진술의 의미는 하나님의 구원 사건인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에 있다. 마리아론을 교의적으로 논해야 한다면 그 기점을 하나님 아들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서 드러나는 구원사적 기능에서 찾아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는 여기에 있다. 즉 교의(Dogma)로서의 마리아론은 에베소 공의회(431년)에서 결정된 ‘하나님의 어머니’(Θεοτοκο?)가 기본원리이다. 그러나 바울은 구원 사건을 마리아에 대한 언급 없이 선포한다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