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흥영성운동(뉴에이지)

2015. 6. 15. 오전 7:22:47

글자


 뉴에이지란 무엇인가?

 
서웅범
 
Q. 선정적이고 폭력성이 짙은 영상매체와 음악에는 반그리스도교적인 요소가 짙게 깔린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반그리스도적인 문화와 이른바 뉴에이지 운동에 대해 올바로 이해하고 이런 문화 속에서 우리의 아이들을 지혜롭게 바른길로 이끌 수 있도록 도움 말씀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A. 문화라는 것은, 인간이 자연상태에서 벗어나 일정한 목적이나 이상을 실현하려는 활동과정과 그 과정에서 이룩해 낸 물질적 정신적 소득을 말한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말 그대로 이 ‘문화’의 홍수 속에서 살아간다. 편리성, 능률, 쾌락 들을 숭배하며 정신없이 마구 달려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왜 사는지, 진정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생각할 겨를도 없이, 가속도 붙은 세상의 변화 바퀴에 자신을 무의식적으로 내던지고 사는 모습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쉽게 야기되는 것이 ‘자아상실’ ‘가치관상실’의 문제이고, 그리고 ‘세대차이’라는 현실이다. 자기의 신원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며 사는 우리들인지라, 기성세대가 젊은 청소년들의 문화, 특히 그들이 즐기는 대중문화를 잘 이해하지 못함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보고 들어서 별로 유익하지 못한 것들이 만연해 있는 이 세상을, 젊은 청소년들이 맑고 깨끗함을 유지하며 살아나가기란 결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젊은이들의 문화, 특히 그들의 대중문화에 대해 그 위험성과 폐해성을 아주 심각하게 보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데, 요즘 몇몇 개신교 신자들이 주축이 되어 전개하고 있는 ‘반뉴에이지(反 new age) 운동’이라는 것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물론 이들이 주장하는 반뉴에이지 운동을 액면 그대로 다 받아들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들의 주장에는, 문화에 대한 그릇된 편견 또는 편협된 교조주의의 요소들이 적지않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편적 정서에 어긋나지 않는 범위 안에서, 그들이 보는 대중문화의 위험성과 그 폐해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라 생각된다.
 
반뉴에이지 운동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우선 ‘뉴에이지 운동’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부터 알아볼 필요가 있다. 서양 점성술에 따르면, 태양과 여러 행성의 회전순환운동이 이루어지는 궤도는 물고기자리, 물병자리, 처녀자리, 쌍둥이자리, 전갈자리 등 열두 자리로 나뉘는데, 한 자리에서 다른 자리로 옮겨지는 데 약 2천 년의 시간이 걸리며, 이를 한 세대라 부른다고 한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지금은 물고기자리 시대인데, 이제 그 시대가 끝이 나고 새로운 시대, 즉 물병자리 시대가 도래한다는 것이다.(‘?χθυς’라는 그리스어는 물고기를 의미하며, 이는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 예수’라는 그리스어의 각 단어 첫 글자들로 이루어졌다.) 즉 그리스도께서 통치하는 시대가 끝나며 오는 세대가 바로 뉴에이지, 새 시대라는 것이다. 이 뉴에이지 운동의 출발점은 1960년대로 보는데, 당시 세계정황은 쿠바 위기, 새로운 핵전쟁의 가능성, 월남전, 미소(美蘇)냉전 등으로 몹시 불안한 상태였다. 미국, 영국, 일본 등지에서 학생들은 자유를 외치며 시위를 통해 정부와 권위에 대항하였고, 또 많은 젊은이들은 기성교회에 대해 실망을 느끼고 마약을 복용하였으며, 동양의 신비주의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동양의 심령기술로 명상, 요가, 신비요법, 최면술, 초능력 등이 싹터 유행하기 시작하였는데, 영적으로 세속적으로 혼란스런 이 시기에, 인간 스스로가 모든 것을 성취할 수 있음을 은연중 가르치는 위의 영적 기술들은, ‘사람은 신 앞에 죄 많고 무기력한 존재’라고 가르치는 그리스도교보다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하였다.
 
반뉴에이지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바로 이러한 반그리스도교적인 뉴에이지 정신이 대중문화인 책, 음악, 영화, 비디오 들을 통해 젊은이들한테 급속도로 전파되고 있다고 심한 우려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특히 이 뉴에이지 사상의 근저에는 사탄이 군림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죄와 악 가운데 악마가 존재함은 사실이다. 하느님과 예수님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부인하며, 사람들한테 하느님과 예수님을 거스르도록 종용하는 종교와 거짓 가르침들, 사람들을 윤리도덕적으로 타락하게 만드는 서적이나 음악, 영화 등등…. 이러한 것들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고 이를 피하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다. 이런 것들의 무분별한 수용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과 우리 영혼이 혼탁해지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래에 혹시라도 ‘술’ ‘담배’ ‘절[寺]’ 등이 언급되면 그것이 곧 ‘사탄의 음악’이라고 단죄하는 반뉴에이지 운동가들의 처사에는 식상해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 현실이다.)
 
이런 것을 염두에 두고, 대중문화의 총아인 영화, 비디오, 텔레비전 등의 영상물과 음악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영화, 비디오, 텔레비전 등의 영상물을 보면, 완전한 인간자유와 인본주의를 제시하며 불륜의 상황을 아름답게만 미화시키는 내용, 정의와 평화를 위한다며 무차별 폭력과 파괴를 정당화하는 내용, 유토피아를 그려주며 은연중 그것은 신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이루어낼 수 있는 것이라고 유혹하는 내용, 그 밖에 아름다운 인간의 성(性)을 말초적 차원의 것으로만 오도하며 유혹하는 내용들이 무척이나 많은 것이 사실이다.
 
한편, 백화점의 음반 코너나 레코드 가게에 가보면, 대개 ‘뉴에이지 코너’라는 것이 따로 마련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그릇된 선입견 때문인지 몰라도 그 음반들은 표지부터가 사람의 마음을 섬뜩하게 만든다. 이상한 괴물이나 해괴망측하게 분장한 사람들 또는 음산한 분위기의 배경들 때문이다. 무언가 영적이고 정신적인 차원을 갈구하는 듯한데, 그 분위기에서는 별로 맑고 상쾌한 느낌을 받을 수가 없다. 표지뿐 아니라, 가수나 그룹의 이름에도 의외의 것들이 많다. ‘어두운 천사(Dark Angel)’ ‘쓰레기 천사(Angel Dust)’ ‘유다의 사제(Juda’s Priest)’ ‘KISS(Knight in Satan’s service ; 사탄에게 충성하는 기사<騎士>)’ '검은 안식일(Black Sabbath)’ 등. 거룩한 것을 불경스럽게 사용하거나, 아니면 노골적으로 반그리스도교적으로 이름을 만든 것들이다. 이런 그룹이나 가수들은 주로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록’이나 ‘헤비메탈’의 음악 장르를 즐겨한다. 그리고 우리의 젊은이들은 그들의 고민과 억압으로 인한 불안과 혈기를 이러한 음악을 통해 해소할 수 있다고 느끼고 있는 것 같다.
 
또한 감미롭고 조용한 분위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겨냥한 '재즈 피아노곡’이나 ‘세미클래식곡’ 등의 뉴에이지 음악들이 있다. ‘디셈버’라는 곡으로 유명한 죠지 윈스턴이라는 사람이 이런 음악의 효시를 이뤘다고 한다. 보통 ‘명상음악’ ‘뷰티풀 뮤직’ ‘easy listening music’들로 일컬어지는 이 음악들은, 한마디로 듣기에 부담이 없으며 분위기 있고 정서안정에 도움이 된다고들 이야기한다.
 
그런데 반뉴에이지 운동가들이 주장하는 ‘록’ ‘헤비메탈’ ‘재즈 피아노’ ‘세미클래식’ 곡 등 뉴에이지 음악의 폐해는 대개 이러한 것들이다. 첫째, 이 뉴에이지 음악을 만드는 사람들이 거의 알게 모르게 ‘뉴에이지 운동’ 에 참여하는 사람들이므로, 반그리스도적인 행위나 예식을 서슴지 않고 하는 이 음악인들이 성령 아닌 다른 영적 존재의 힘을 빌려 만든 노래를 무방비적으로 들을 때, 듣는 이의 영혼은 분명 그 사탄의 영향을 받게 된다는 주장이다. 둘째, 노래내용이 노골적으로 하느님이나 예수님을 거부하거나 모욕하는 것으로 되어있는 경우도 있고, ‘백워드 매스킹(backward masking) 수법(레코드를 정상으로 작동시키면 보통의 노래가 나오지만, 그것을 거꾸로 돌리면 하느님을 모욕하는 소리가 나오도록 하는 방법)을 통해 암암리에 하느님과 성령을 거스르는 행위를 하며, 그리고 ‘주님’ ‘신’ ‘사랑’ 등등의 그리스도교적인 용어가 가사 중에 많이 등장하나, 그것은 우리의 하느님이나 예수님을 칭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거의가 다른 신들을 부르며 칭송하는 것들이라는 주장이다. 셋째, 파괴나 폭력, 섹스와 관계되는 것을 여과장치 없이 마구 외쳐대고 있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반뉴에이지 운동가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다 받아들일 필요도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는 보지 말아야 할 것, 듣지 말아야 할 것들이, 정작 보고 들어야 할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세상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무조건 눈감고 귀막고 살 수만도 없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그래도 성실히 살려고 하는 그리스도인이기 위해서는, 교회나 사회 차원에서 이에 대한 적극적인 지도와 계몽도 필요하겠지만, 일단은 ‘나’ 스스로가 옳고 그른 것을 가려 선택하는 신앙의 지혜와 의지를 기를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같은 물을 마시고도 뱀은 그 물로 독을 만드는 데 반해, 젖소는 우유를 만들어내듯이….
 
텔레비전이나 비디오, 별로 유익하지 못한 책이나 잡지에 몰두하는 대신, 아직 많지는 않지만 교회 비디오 그리고 성경을 보고 읽는 시간을 많이 하면 좋을 것이다. 좋은 성가나 성음악곡들을 듣는 데에도 맛을 들일 수 있게 하면 좋겠다. 분명 이를 통해, 세상의 것들에서 느끼지 못하는 기쁨과 평화 그리고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힘’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를 위해 부모님들, 기성세대가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바로 그 일을 먼저 모범으로 보여야 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못해도 너희들은 꼭….”이라는 호소는 분명 설득력을 갖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특히 젊은 청소년 자녀들에게 무조건 “이것은 나쁜 것이니 보지 말아라, 듣지 말아라.” 하는 일방적 명령보다는, 먼저 그들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해 주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비록 그들이 헐렁한 바지를 입고 요즘 유행하는 춤을 추며 노래를 불러도, 사실 그들은 우리 기성세대가 생각하는 것보다 분명 훨씬 더 순수하고 또 좋은 생각들을 가지고 있겠기 때문이다.
 
 
서웅범 베르나르도 신부는 성 베네딕도회 왜관 대수도원 소속으로 1988년도에 사제품을 받았다. 로마 안셀모 대학과 테레시아눔 대학에서 영성신학을 전공하였다. 수도원 수련장을 거쳐 지금은 대구 대명동본당 주임신부로 사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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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에이지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성찰(5) - 뉴에이지와 그리스도교 신앙 비교

최면술 등 신비 요법으로
인간이 구원자 역할 수행

뉴에이지의 종교성에서 개별적인 요소들을 전체적인 틀에서 분리해 평가할 수 없다. 그 영지주의적 요소로 인해 뉴에이지는 전체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일부 실용주의자들은 뉴에이지를 단지 마케팅 전략으로 간주하는데 이것은 혼란을 일으키는 것이며 따라서 뉴에이지 운동에서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요소들을 엄정하게 밝힐 필요가 있다. 다음은 뉴에이지와 그리스도교의 신앙 요소들을 비교한 것들이다.

인격적 존재로서의 하느님


뉴에이지의 하느님(God)은 애매한 반면 그리스도교에서는 매우 명확한 개념이다. 뉴에이지의 하느님은 비인격적인 에너지이며 하나의 인격체가 아니라 거대한 의식(Great Consciousness)이다. 하느님은 세상 밖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 안에 존재하며 만약 자기 자신 밖의 어떤 존재를 하느님이라고 지칭할 때 그것은 조작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은 이와는 완전히 다르다. 하늘과 땅의 창조주이며 모든 삶의 원천이다. 자신의 생명을 나눠주기 위해 세상을 창조한, 성부 성자 성령의 위격을 지닌 인격적 존재이다. 하느님은 우주의 에너지가 아니라 세상과는 절대적으로 다른 사랑으로 자신의 생명을 피조물과 나누기 위해 세상을 창조하고 인간을 구원으로 이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한분이다


뉴에이지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수많은 현자 중의 하나이다. 그들은 인격적이고 역사적인 예수는 영원하고 비인격적인 우주적 그리스도와 다른 사람이라며 예수는 유일한 그리스도로 간주하지 않는다. 예수의 십자가상 죽음을 부정하거나 그리스도로서 예수가 고통받을 수 있다는 것을 배제한다.
그리스도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성서가 말하는 나자렛 예수, 마리아의 아들이자 하느님의 성자, 참된 인간이며 참 하느님, 하느님 진리의 참된 계시, 세상의 유일한 구세주로 고백한다.

인간은 우주적 존재인가?


뉴에이지의 수련 방법들은 인간이 신비적 상태를 자유자재로 만들려는 것이다. 즉 환생, 영육 분리, 최면술, 주문, 단식, 가사상태, 초월적 명상 등은 이런 상태를 조절하고 체험하려는 시도들이다. 여기에서 문제는 전체 우주와의 거룩한 일치이다. 참된 위험은 뉴에이지의 전체론적인 패러다임이다. 뉴에이지는 전체주의적 일치에 바탕을 둔 사고를 갖고 있으며 여기에 진정한 위험이 있다.
그리스도교는 성서의 가르침에 따라 하느님의 모상에 따라 창조됐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그 신비가 계시되며 성령의 은총을 통해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음으로써 참된 인간 존재가 된다.

구원은 하느님 은총의 선물


뉴에이지는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원죄를 부정하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믿는 펠라기우스주의라고 할 수 있다. 뉴에이지에서 관건은 자기 완성, 자기 실현, 자기 구원이다. 자기 자신이 자기를 구원한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에서 구원은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부활에 참여함으로써, 그리고 어떤 수련 기법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인격적 관계에 의해 이뤄진다. 원죄와 개인적 죄에 의해 영향 받는 인간의 상황은 오직 하느님의 행위에 의해서만 고쳐질 수 있다.
구원의 길은 단순히 스스로의 변혁이 아니라 자신의 죄, 우리 주위의 사회 안의 죄와 싸움으로써 얻는 죄로부터의 자유에서 발견된다. 이는 필연적으로 우리 이웃에 대한 사랑의 연대로 이끈다.

진리는 우리가 포용하는 것


뉴에이지에서 진리는 좋은 떨림, 우주적 조화, 일치와 무아의 경지에 대한 것으로 대개 일반적으로 만족스러운 상태를 말한다. 이는 자기가 어떻게 느끼는가에 따라 자기의 진리를 발견한다는 것이다. 종교와 윤리적인 문제를 평가하는 것도 명백하게 각자의 느낌과 경험에 따라 상대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예수 그리스도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자기의 전체 삶을 그리스도에게 내어주고 그 가르침에 따르도록 요청받는다. 이는 모든 사람들이 알 수 있는 객관적이고 현실적인 요구이다. 



가톨릭 신문


다원주의 시대의 가톨릭 신앙 / 신흥영성운동(뉴에이지) 1

차동엽 신부(가톨릭대 교수/ 미래사목연구소 소장)

가톨릭 신자 피해사례 가장 많아

성직자도 실태 너무 몰라  “목마름에 지친 신자 방치”

십 여 차례에 걸쳐 지구화, 정보화, 라이프스타일의 변화, 다원문화 등 4대 메가트렌드의 관점을 주유하면서 「한국 가톨리시즘의 현재」를 조명해 봤다. 그 노정에서 다원문화의 지대에 이르러 지리(支離)하다 할 만큼 오래 체류하였다. 더 살펴봐야 할 영역들이 있지만 다른 주제들과의 형평성을 고려하여 이쯤에서 다음 행선지로 이동해야 할 듯 하다.

약속대로라면 이어지는 여정은 「한국 가톨리시즘의 부활을 위한 길」, 「한국천주교회 선조들의 위대한 신앙」, 「종교다원주의 시대의 가톨릭 신앙」, 「가톨릭교회의 세계관(신관, 우주관, 인간관)」 순(順)이어야 한다. 그런데 어쩌다보니 앞의 두 영역에 앞서 뒤의 두 영역 언저리를 먼저 배회한 꼴이 되었다. 하여 내친김에 일정을 수정하여 우선 나중의 두 가지를 「다원주의 시대의 가톨릭 신앙」으로 묶어 일별하고 나서, 예정된 나머지 차례를 따르고자 한다.

방황하는 양떼, 방관하는 목자


다원주의 시대에 최대 호황을 누리고 있는 벤쳐기업은 신흥영성운동(뉴에이지)이다. 나중에 별도로 용어풀이가 있을 터이지만 신흥영성운동(뉴에이지)은 일찍이 칼 막스가 『자본주의가 갈 데까지 가면, 팔아먹을 수 없는 것까지 팔아먹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예견했던 대로 자본주의 말기에 나타난 무차별 상업주의의 소산이라고도 볼 수 있다. 21세기 상업주의는 마침내 인간의 종교심을 수요로 삼아 새로운 구원재(救援財)를 개발·공급하면서 무한한 시장을 형성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른바, 「신흥영성 시장」에는 별별 상품들이 즐비하다. 평화, 행복, 성공, 건강, (인생)상담, 문화, 웰빙 등등 품목별로 오만가지 제품들이 출시되어 호객행위를 하고 있다.

문제는 점점 많은 기성종교의 신앙인들이 종교적인 욕구를 더 이상 자신이 속해 있는 종교에서 충족시키지 않고, 이들 「쉽고」 「재미있고」 「편리한」 종교적 대체물(religious alternative) 또는 보이지 않는 종교(invisible religion)들로 대리충족시킨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신흥영성운동(뉴에이지)의 최대 피해자는 가톨릭교회이다. 이 분야의 전문가인 노길명 교수는 가톨릭 언론매체를 통하여 신흥영성운동의 대표적 상품에 속하는 기 수련 참여 실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개진한다.

『이러한 기 수련에 몰입하는 사람들 중에는 개신교보다 가톨릭 신자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가톨릭이 체계화된 교리와 전례 중심의 종교이다 보니 영적인 욕구와 종교체험의 욕구를 충족시키기에는 사실 부족한 점이 많지요. 그래서 많은 신자들이 이를 기 수련을 통해 보상받으려고 하는 겁니다

이 사실은 필자도 다양한 사목현장의 교우들을 만나면서 거의 매일 확인하고 있는 내용이다. 대체로 개신교 신자들은 신앙정체성이 분명해서 덜 휘둘린다. 또 부흥회, 사경회, 수양회, 철야기도 등 영적 메뉴가 다양해서 그리 한 눈 팔 겨를도 없다.

대조적으로 가톨릭 신자들은 영적인 욕구와 신앙체험의 갈증을 해소할 영적 프로그램의 부족을 원망하며 교회 밖에서 해답을 찾으려고 방황하기 일쑤이다. 그 위험성과 해악에 대해 특별한 경각심이 없는 정도는 약과요 아예 심하게 매료되어 있는 경우를 자주 본다. 아래에 옮겨보는 근래에 가톨릭 언론매체에 실린 교우들의 인터뷰 내용은 이러한 현실인식이 필자만의 주관적인 착각이 아니라는 점을 드러내주고도 남는다.

-일산에 사는 김 소화데레사(59): 『미국에서 살 당시에 만났던 뉴 에이지 활동가들은 느낌이 굉장히 신선하고 좋았어요. 내가 갖지 못했던 용기를 갖고 있었던 것 같고, 특히 정형의 틀에 얽매이지 않고 교과서적인 사고방식을 답습하지 않는 새로운 목소리를 갖고 있었죠』

-서울대교구 ㅇ본당 신자 박 안나(27): 『뉴 에이지가 어때서요. 뭐가 잘못된 건가요? 뉴 에이지라는 조지 윈스턴의 「겨울(DECEMBER)」이나 영화 「사랑과 영혼」 등의 작품들은 좋기만 하던데요』

-서울대교구 ㅅ본당 신자 이 프란치스코(47): 『잘 사용하면 좋지 않아요? 요가나 명상법 같은 건강법은 굉장히 좋은 것 같아요』

이처럼 가톨릭 신자들은 식별력이 없다. 시쳇말로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정도의 좋은 마음들만 가지고 산다.

목자들은 어떠한가? 목자들이라고 사정이 나은 것은 아니다. 필자에게는 「신흥영성운동」과 관련하여 많은 이들이 상담을 요청해 온다. 미국의 교포 신자들에게서도 드물지 않게 온다. 그런데 그들은 대부분 일차적으로 「본당 신부님」에게 문의를 해보고 나서 여전히 답답한 것이 남아서 수소문 끝에 필자에게까지 오게 되었노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그들은 신부님들이 그 실태에 대하여 너무들 모른다고 하소연한다. 알아도 과소평가하며 천하태평이라고 불평한다. 또 모르면서도 전혀 알아보려 하지 않는다고 안타까워한다. 요컨대 직무유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양떼들은 방황하고 목자들이 방관하고 있다는 것이 가톨릭교회가 처한 평균적이며 비극적인 현실인 것이다.

피해사례

몰라서 그렇지 신흥영성운동(뉴에이지)은 심각한 영적 부작용을 초래한다. 필자가 직접 들은 사례의 종류들만 해도 다음과 같다.

-초월명상 등 뉴에이지 서적에 빠져있던 청년이 악성 정신질환자가 된 경우(다수).

-명문대학을 다니는 수재가 대순진리회에서 기를 받은 후 우울증에 걸려 자살한 경우.

-전통(무속관련) 민요를 직업으로 부르다가 단 1분도 기도에 집중할 수 없는 상태가 된 경우.

-수도자가 기와 명상에 빠져 환속하거나 정신질환에 시달리는 경우(다수).
-기수련(대표적으로 「단월드」)을 하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고 교회를 떠난 경우(다수).

-기치료 받다가 우울증에 걸린 경우(다수).

-「마음수련」하다가 정신질환자가 되고 이혼까지 한 경우.

이들은 최소한의 실례들일 뿐이다. 신자들은 목말라 하고 있다. 신자들은 영적으로 불량 음식을 먹고 병들고 있다. 이는 정확한 현실이다. 결코 필자의 과민인식이 아니다. 목자라면 다음과 같은 주님의 통탄을 대수롭지 않게 흘려버려서는 안될 것이다.

『양들은 목자가 없어서 흩어져 온갖 야수에게 잡아먹히며 뿔뿔이 흩어졌구나. 내 양떼는 산과 높은 언덕들을 이리저리 헤매고 있다. 내 양떼가 온 세상에 흩어졌는데 찾아다니는 목자 하나 없다』(에제 34,5~6).


 

 

 

다원주의 시대의 가톨리시즘 / 신흥영성운동(뉴에이지) 2

 

 

교회 지도층도 빠져들기 일쑤

프로그램 시 음악 사용 흔해   정확한 정보 부족 탓 일수도

용어의 문제

먼저 「신흥영성운동(뉴에이지)」이라는 용어에 대해 설명할 필요를 느낀다. 이미 한국 가톨릭교회 내에서는 「신영성운동」이라는 용어가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중이다. 이는 일본의 종교사회학자 시마조노 스스무가 뉴에이지 운동 및 일본과 한국에서 생겨난 그와 유사성을 지니고 있는 영성운동들을 총칭하는 표현으로 도입한 용어이다. 한국에서는 노길명 교수가 처음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간 필자도 글과 강의를 통하여 이 용어를 사용해 왔다. 그런데 「신영성운동」이라는 이 용어를 처음 접하는 교우들과 사제들은 뭔가 혼돈스러워하는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처음에는 대부분 『무슨 좋은 영성프로그램이 나왔는가 보다』하며 기대감이나 호기심을 가졌는데 나중에 대강 실상을 파악하고 보니 「위험한」 사이비 영성이더라는 것이었다. 이런 이유로 「신영성운동」이라는 용어가 과연 적절한 것이냐 하는 반문을 해 오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이것이 용어문제에 대하여 재고하게 된 연유이다. 그 결과 「신영성」 대신에 「신흥영성」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더 적합하다는 견해를 갖게 되었다.

그 이유는 이렇다. 여러 종교 현상들을 제3자의 입장에서 관찰하는 종교사회학자의 관점에서 봤을 때, 이 용어는 별로 무리가 없을지도 모른다. 기성 종교의 범주 밖에서 새로운 형태로 확산되고 있는 이 시대 영성의 현상을 「신영성운동」이라고 이름붙이는 것은 당연했을 것으로 짐작이 간다.

그러나 기성 종교의 입장에서 봤을 때, 이런 새로운 형태의 영성 현상은 결코 「새로운 영성」 곧 신영성(新靈性)이 아니다. 그러니까 과거에 없었던 「새로운 영성」이 아니라 과거 여러 종교에서 이미 있어왔던 것을 혼합하여 새롭게 「붐」을 타고 있는 영성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신(新) 곧 「새로운」이라는 표현 대신에 신흥(新興) 곧 「새롭게 부흥하는」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더 합당하다고 본다. 그래서 「신흥영성운동」이라고 부를 것을 제안한다. 이는 「신흥종교」와 유사한 것이라는 의미에서도 궤를 맞춰줄 필요가 있다고 본다. 여기에 「(뉴에이지)」를 추가한 것은 뉴에이지가 신흥영성운동에 포함된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가톨릭교회 내의 다원적 반응

이제 본 주제로 돌아와 보자. 지난 번에 신흥영성운동(뉴에이지)에 대한 가톨릭 신자들의 반응과 폐해에 대하여 언급하던 참이었다. 마저 얘기해 보자.

언급하였듯이 신흥영성운동(뉴에이지)는 다원주의 시대에 흥성하고 있는 가장 대표적인 현상 가운데 하나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대목은 이에 대한 가톨릭 교회 내의 반응도 다원적이라는 사실이다.

우선 신자들의 태도가 다원적이다. 지난 호에서 우호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는 사람들의 예를 들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다수가 중심을 잘 잡고 있다. 그 가운데에는 교회와 신자들의 영적인 안녕을 위하여 노심초사하는 「남은 자」(1열왕 19,18)들이 있다. 그 단적인 실례로써 다음과 같은 이메일을 보내온 자매님의 열심을 소개한다.

『안녕하세요 노베르또신부님. 저는 미국 동부지역에 살고 있는 신자 김율리엣다입니다. 괴상한 「마음수련」이라는 것이 한인 신자들이 밀집하여 살고 있는 이곳 동부까지 왔습니다. 긴장하고 있는 가운데 신부님의 글을 성모기사지에서 발견하고 여러 장 복사하였습니다. 우선 레지오 단원들에게라도 교육을 시킬까 해서요. 괜찮겠지요?

제가 지금 글을 드리는 것은 000이라는 것 때문입니다. 제가 인터넷 상에서 약간 조사한 것에 의하면 아무리 보아도 뉴에이지와 비슷한 부류인데요. 어찌된 일인지 본당사목회 교육부 주관으로 이틀씩 두 번에 걸쳐서 000세미나를 한다고 합니다. 000연구소 수녀님께서 오셔서요. 마음이 답답하여 연락드립니다. 제가 너무 민감한 것인지 아니면 저의 염려가 사실인지요. 만일 사실이라면 문제점을 파악하고 최소한 알고는 있어야 할 것 같아서요. 물론 일개 신자로 본당에서 주관하는 행사를 어찌할 수 있는 힘은 없습니다. 하지만 알고 있으면 주변 분들에게라도 조용히 알려주고 현명한 대처를 하도록 설명은 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도움말씀 부탁드립니다』

인용 글 가운데 000로 처리한 것은 그 프로그램에 대하여 일괄적으로 판단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그 프로그램 및 관련자 전체를 총괄하여 옳으니 그르니를 평가한다는 것은 위험한 접근법이라는 견해를 말해줬다. 사용자의 의도와 영적 노선에 따라 다른 결론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었다. 여하튼 이메일 전문을 인용한 것은 글의 말미에 서려있는 건강한 사도적 열심을 독자들께 전하기 위함이다.

미국으로부터 이 자매님 보다 먼저 국제전화를 통하여 비슷한 염려를 전해온 자매님도 있었다. 지난 3월 말쯤이었을 것이다. 자매님은 자신이 다니는 한인공동체 신자 30여명이 「마음수련」이라는 데에 빠져서 거의 신앙을 잃을 지경이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오면서 안타까움에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러니칼하게도 이에 대한 교회 책임 기관의 태도 역시 다원적이다. 그동안 한국 천주교회 주교회의에서는 「건전한 신앙을 해치는 운동과 흐름」이라는 문헌을 비롯한 여러 자료를 통하여 그 해악을 알려왔다.

필자가 파악하기로는 사목자들 가운데에는 이 문헌을 열심히 교육한 이들도 있고, 자신만 읽고 신자들에게는 교육을 안 한 이들도 있고, 자신도 안 읽고 신자들에게 교육도 안 시킨 이들도 있다.

나아가 주교회의에서 「신흥영성운동(뉴에이지)」이라고 규정한 바로 그 문제의 것들이 오히려 교회 지도층인 사제와 수녀들 그리고 교회 기관에 의해 신자들에게 교육되는 일이 빈번하였다. 건강증진이라는 명목으로 기수련이 여기저기서 버젓이 본당 프로그램으로 도입되고 있다. 한국에 뉴에이지 붐을 일으킨 일등공신인 「류시화」의 시가 교회 주보와 방송매체를 통하여 홍보되고 있다고 필자에게 제보를 해온 신자들도 꽤 있었다. 명백한 뉴에이지 음악이 여전히 피정과 전례에 사용되는 일도 많다.

물론, 정확한 정보가 부족해서 일 것이다. 그러기에 필자는 이 귀한 지면을 통하여 그 실상을 알리고자 하는 것이다.



 

 

 

 

다원주의 시대의 가톨리시즘/신흥영성운동(뉴에이지) 4 :

 

영적 식별을 위하여 (上)


기체험후 우울증 걸려 자살 시도
정신질환에 이혼까지…환속하는 수도자도 많아


여섯 차례에 걸쳐 신흥영성운동에 대한 글을 썼다. 계획대로라면 다음의 주제가 기다리고 있기에 이쯤에서 정리를 해야 할 순서다. 그런데 이 글과 관련하여 독자들로부터 많은 문의와 상담요청이 답지하였다. 가족 가운데 단월드, 요가, 마음수련 등에 빠져 영적으로 피폐해진 피해자를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는 안타까운 사연들이 있었다. 그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필자는 신흥영성운동의 희생자가 꽤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여 그들에게 그리고 아직도 신흥영성운동에 대하여 호감을 가지고 있는 가톨릭신자들에게 무엇보다도 시급히 필요한 것이 「영적식별력」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에제키엘이 전하는 말씀이 영락없이 오늘의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애절한 통탄으로만 들리는 것은 필자가 과민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내 양떼는 산과 높은 언덕들을 이리저리 헤매고 있다. 내 양떼가 온 세상에 흩어졌는데 찾아다니는 목자 하나 없다』(에제 34, 6)

필자는 상처입고 신음하는 양들의 소리도, 안타까워하시는 주님의 음성도 외면할 수가 없다. 그래서 앞으로 몇 차례 더 영적 식별을 위한 최소한의 정보를 제공하고자 한다. 그러면 먼저 신자들이 제일 혼돈스러워하는 「기체험」이라는 것에 대하여 알아보자.

소위 기체험이라는 것

실제에 있어서, 한의학, 동양철학, 전통무술(태극권, 택견 등), 침술, 풍수지리 등에서 말하는 기에 대한 개념들, 그리고 그와 관련된 수련문화는 우리 한국인의 삶에 깊숙이 스며 있다. 하지만 그동안 기(氣)에 대한 신학적 해명이 거의 전무하였다. 이제 그리스도인은 이 「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과연 성령과 관계지어 생각할 수 있는지, 교회에서 우려하는 점은 무엇인지 하나하나 짚어 보기로 하자.

한국인의 언어문화 속에서 기(氣)라는 단어는 일상의 삶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우리는 매일 매일의 삶에서 「공기」를 마시고 「기분」이 좋다 나쁘다, 「기색」이 나쁘다, 「기」가 빠졌다, 「기」가 막히다,

「기」가 차다 등 「기」라는 단어가 들어간 문장을 빈번하게 사용하고 있다. 사전적 의미로 기란 1)활동하는 힘 2)숨쉴 때 나오는 기운이다(표준국어대사전 참조). 곧 존재하는 모든 곳에 있는 생명의 기본 요소가 바로 기이다.

하지만 「기」를 이렇게 정의내리는 것은 성급한 처사이다. 동서양을 가로질러 「기」와 관련된 용어와 개념이 매우 다양하게 제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동양철학에서 기는 불변하는 이(理)에 대응되는 것으로서 가변적인 물질현상, 만물 생성의 근원이 되는 힘을 의미한다. 요가가 발달한 인도 쪽에서는 프라나(Prana) 곧 우주에너지라고 부르는가 하면 초심리학에서는 「사이」(PSI)라고 부른다. 최근 미국의 뉴에이지 계열에서는 기를 설명하기 위하여 영성(Spirituality)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영성이 「생명의 핵이며 무한 에너지」라고 정의하기도 한다. 한편 일본의 사사키 시게미 박사는 기를 다중, 다층 구조로 형성된 「우주 에너지」로 정의한다. 그는 높은 층의 에너지는 작용력이 신비로워 신(神)에 가깝고 낮은 수준에서는 악마처럼 해를 끼치기도 한다고 말한다.

이처럼 기는 물질, 에너지, 정보, 파동, 영혼 등과 관련되는 천차만별의 의미로 쓰이고 있다.

기에 대한 설명이 이토록 다양한 만큼이나 기체험을 매개하는 방법 또한 여러 가지이다. 우리는 이들을 다음의 두 가지로 묶어서 소개할 수 있다.

1)기수련: 기수련은 크게 「몸수련」과 「마음수련」으로 분류할 수 있다.

몸수련은 「기」를 건강을 위한 수련법으로 삼는 운동을 말한다. 여기에는 근래 들어 유행하고 있는 기공, 단전호흡, 국선도 수련 등이 속한다. 이들 주장에 의하면 기수련을 통해서 우리는 몸 안에서 기의 흐름을 막힘이 없이 원활하게 함으로써 건강을 증진시킬 수 있다고 한다. 또 기의 축적과 활용 또한 원하는 대로 이룰 수 있다고 한다. 굳이 배속시킨다면 요가도 여기에 속하는 것이다.

마음수련은 몸수련의 연장에서 또는 독립적으로 행해진다. 대부분 건강증진이나 평화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써 행해지는 몸수련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자아완성 내지 종교적인 구도행위를 지향하는 기수련으로 이어진다.
한편, 이와는 별개의 것으로 처음부터 마음수련에 입문하는 경우도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서 불교의 선(禪), 명상, 그리고 말 그대로 「마음수련」이라는 이름의 수련을 들 수 있다.

-기치료: 기치료는 기의 운용(運用)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는 기치료사가 환자의 아픈 부위에 막혀있는 기를 소통시켜주는 요법이다. 한국에서는 민간요법을 전수받아 근래에 확산되고 있고, 서구에서는 1975년 미국의 크리거(Dolores Krieger) 교수에 의하여 창안된 「치료적 접촉」(therapeutic touch)이라는 이름으로 유행하고 있다.

기체험의 피해사례

기체험이 다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무분별하게 「기체험」의 세계에 발을 디뎠다가 엄청난 부작용에 시달리는 경우가 빈번하다는 사실이다. 필자가 직접 들은 사례의 종류만 해도 다음과 같다.

- 명문대학을 다니는 수재가 대순진리회에서 기를 받은 후 우울증에 걸려 자살한 경우.

- 초월명상 등 뉴에이지 서적에 빠져있던 청년이 악성 정신질환자가 된 경우(다수).

- 전통(무속관련) 민요를 직업으로 부르다가 단 1분도 기도에 집중할 수 없는 상태가 된 경우.

- 수도자가 기와 명상에 빠져 환속하거나 정신질환에 시달리는 경우(다수).

- 기수련(대표적으로 「단월드」)을 하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고 교회를 떠난 경우(다수).

- 기치료 받다가 우울증에 걸린 경우(다수).

- 「마음수련」하다가 정신질환자가 되고 이혼까지 한 경우.

- 미국의 교포 신자들이 「마음수련」에 빠져 집단으로 신앙정체성을 상실해 가고 있는 경우.

- 요가에 빠져서 신앙을 잃은 경우.

- 가톨릭 신자였다가 요가 강사가 되어 신자들을 교회로부터 빼 내가는 경우.

이를 종합할 때, 독일인 목사 바실레아 슐링크(Basilea Schlink)의 초월명상에 대한 다음과 같은 진술은 그대로 「기체험」에도 적용된다고 말할 수 있다.

『밀교의 가르침의 영향으로 감정적으로 안정을 찾지 못하는 청년들의 수가 증가하고 있는데 특별히 초월명상과 같은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사람들은 완전히 개인적으로 명상에 빠져들고 구루(guru: 힌두교의 지도자)들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게 되어서 감정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도착상태가 되어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하다. 또한 부부가 모두 명상을 하게 될 경우 이혼율은 특별히 높다. 명상을 할 때의 그 무아지경과 현실로 돌아왔을 때 일상의 스트레스나 욕구불만 사이의 괴리감은 너무 큰 것이어서 조화로운 삶을 영위하기가 불가능하다』(차한, 성경으로 세상보기, 292~293쪽 참조).

 

 

 

 

 

다원주의 시대의 가톨리시즘/신흥영성운동(뉴에이지) 4 :

 

 영적 식별을 위하여 (下)

 

“기수련, 가톨릭 영성에 도움 안돼”

하나같이 돈벌이에만 관심
신앙적 정서적 부작용 불러

지난 호에서 이른바 「기체험」이라는 것과 그 피해사례에 대하여 알아봤다. 이를 토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조심스럽게 내릴 수 있다.

우리는 기(氣)라는 것 자체를 부인할 수 없다. 「기」라는 것 자체는 아무 문제가 없는 자연적인 물리현상일 수 있다. 곧 기는 순수한 자연적 에너지 또는 물리적 에너지로 간주할 수 있다. 그러므로 문제될 것이 없다.
하지만 지난번에 확인한 바와 같이 소위 「기수련」에 빠진 신자들에게서 심각한 부작용 내지 피해가 나타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를 우리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우리는 이를 「플러스 알파」 부작용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플러스 알파’ 부작용

「플러스 알파」란 바로 기치료 또는 기수련의 과정에 개입되는 「제3의 현상」을 말한다. 곧 기를 부리거나 기를 타거나 또는 기를 가장하여 기행세를 하는 제3의 에너지를 말한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 제3의 에너지는 성서적인 용어로 「악령」이라고 불리는 것과 관련이 깊은 듯하다. 성서에는 예수님이 악령들린 자와 대적하여 몰아냈던 사례가 숱하게 많이 나온다. 악령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실재하는 존재로서, 사람 안에서 사람을 황폐화하고(마태 12, 43~45) 발작을 일으키고(루가 8, 29), 거짓된 기적과 표징과 놀라운 일들을 행할 수 있다(2데살 2, 9)고 기록되어 있다. 여하튼 우리가 말하는 「플러스 알파」의 계보에는 이 악령이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플러스 알파」의 개입 가능성은 기치료나 기수련을 매개해주는 사람에 크게 좌우되는 듯이 보인다. 대체적으로 한국에 유포되고 있는 것들은 하나같이 돈벌이 목적으로 상품화 된 것이기에 위험한 것으로 간주해도 된다. 「영험한 능력」이 상품경쟁력인 이 사람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신통력을 끌어들이려 한다. 그 과정에서 「플러스 알파」가 개입될 개연성은 매우 높아지는 것이다.

성서에 의하면 이 「플러스 알파」가 초래하는 결과는 신앙적인 부작용으로도 나타나고 정서적인 부작용으로도 나타날 수 있다. 우선, 사도 바울로는 신앙적인 부작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훗날에 사람들이 거짓된 영들의 말을 듣고 악마의 교설에 미혹되어 믿음을 버릴 때가 올 것이라고 성령께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1디모 4, 1).

뿐만 아니라 성서는 악령이 사람을 「비참하게」(마태 12, 45)하고 「광야」를 헤매게 하면서(루가 8, 29) 사람을 정서적으로 피폐화 시키는 「거짓말의 아비」요 「살인자」(요한 8, 44)라고 폭로한다.

지면관계로 생략할 수 밖에 없지만 신흥영성(뉴에이지)의 실태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방금의 진술은 대부분 사실로 드러난다. 특히 신흥영성에서 가장 비싼 고급상품(500만원 이상)에 속하는 「채널링」이라는 것은 그들의 주장을 빌어 표현하면 「영계의 어떤 영적존재와의 만남」을 가능하게 해준다고 하는데 이것이야 말로 「거짓된 영들」의 장난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종합적 식별

필자는 이론과 체험 양면으로 「기수련」 및 「기치료」를 대부분 접해봤다. 개인적인 관심에서도 그랬고 연구의 사명감 때문에도 그랬다. 거두절미하고 결론을 말한다면, 필자는 자연적인 현상으로서의 기(氣)를 인정한다. 자연과학에서 말하는 에너지로서의 기, 한의학에서 말하는 기, 그리고 자연철학(동양철학)의 기이론 등은 실제 사실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우리가 반드시 알아두어야 할 것은 이처럼 과학적으로 인정되는 자연적인 기에도 종류(種類)와 질(質)의 차이가 있다는 사실이다. 한의학에서 말하는 기의 종류 만해도 기본적으로 음양(陰陽)과 오행(五行)에 따라서 열두 가지나 된다. 거기다가 생명의 기운인 생기(生氣)가 있는가 하면 질병의 기운인 사기(邪氣)도 있는 등, 구분하기 나름으로 천차만별인 것이 바로 기이다.

그러므로 「기체험」이라는 것을 하나로 싸잡아서 옳음과 그름, 선함과 악함을 가려낼 수가 없다. 하지만 분명히 부작용이라는 것이 있다. 그 부작용의 양상은 기를 매개하거나 기수련을 전수하는 주체의 성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따라서 답답한 노릇이지만 사례에 따라 또는 상황에 따라 판별하는 수밖에 없다.

종합적으로 정리해 보자.

기(氣)는 기다. 부인할 수 없는 자연 현상이다.

기체험은 기체험이다. 그냥 기체험이다. 기의 종류가 셀 수 없이 많듯이 이 기체험도 셀 수 없이 많다. 그런 가운데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많은 부작용이 발생하고 있다. 좋지 않은 기를 체험했기 때문이다. 좋지 않은 기란 자연과학적인 사기(邪氣)일 수도 있고, 「거짓된 영」의 교묘한 개입일 수도 있다.

성령은 성령이다. 성령은 삼위일체적이기 때문에, 성령을 체험하면 반드시 성부와 성자에 대한 믿음이 생기게 되어있다. 성부를 부인하고, 성자를 배척하는 성령은 이 세상에 없다. 하느님을 부정하고, 신자들을 냉담에 빠트리고, 정신질환자가 되게 하고, 가정을 파괴하는 「성령」은 없다.
『하느님의 성령을 알아보는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으로 오셨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은 모두 하느님께로부터 성령을 받은 사람이고 예수께서 그런 분이시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모두 하느님께로부터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그리스도의 적대자로부터 악령을 받은 것입니다』(1요한 4, 2~3).

성서의 입장은 명료하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루가 20, 25 참조). 바꾸어 말해서 기는 기고 성령은 성령이라는 것이다. 결코 기수련이 가톨릭 영성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종교다원주의의 시대에 이 무슨 고리타분한 이원론(二元論)이냐며 반론을 제기할 「가톨릭신자」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필자는 이런 사람에게 반문하고 싶다. 그렇다면 애제자 베드로에게 난데 없이 『사탄아, 물러가라』(마태 16, 23)하셨던 예수님은 이원론적 근본주의자였던가? 대화와 일치운동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성서의 「영의 식별」 요구를 폐기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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