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광재목사의 생명신학
<성전문화는 기독교가 아니다>
어떻게해서 교회가 신당인 성전문화로 변했는가? 주후 313년경 거대한 로마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을 때 모든 종족을 지배하기 위한 수단으로 신앙의 자유를 허용했는데 자기들의 방식대로 믿을 수 있게 했다. 로마에 예속된 종족 모두는 정치적으로 지배를 받으면서 콘스탄티누스황제에 의해 기독교를 공인함과 동시에 그 속에 황제가 믿는 신앙방법으로 마침내 로마의 국교로까지 발전했던 것이다.
이 순간이 주후 313년이었다. 로마인은 기독교라는 우산 속으로 몰려오게 되었다. 이때 이방종교 문화가 자연스럽게 교회의 의식이나 조직의 가치 개념들에게까지 유입되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가장 치명적인 것이 교회당 문화이며 절기문화 그리고 사제문화이다. 이 이방적 문화가 버젓이 주인노릇을 하게 되었다.
이방종교의 형태는 신당을 중심해서 이루어졌는데 히랍의 아폴로 신전, 불교의 사찰, 모스렘의 사원과 같이 신당문화는 불교의 것도 받아들여 가톨릭과 불교의 공통성을 갖게 되었다. 이 신당문화에 젖은 사람들이 기독교 안에 들어와서 중세교회가 교회당 문화의 꽃을 피운 시기가 되었다. 출애굽기 20장 23절에 “어떤 형상으로도 나를 만들지 말라”고 하신 말씀을 범하게 되었다. 이런 이유에서 기독교가 로마 가톨릭과 같을 수 없는 점이다.
교회당 문화에 매달리는 사람들은 기독교가 아니다. 구약교회의 실패작인 예루살렘성전이나 이방종교 문화가 유입된 천주교 문화는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를 완성한 십자가의 역사를 무효로 만든 것이다. 이 무효 속에 현대 기독교도 깊이 빠져나올 수 없는 상태임을 찾아볼 수 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신 그 분은 사람과 함께 거하시고 함께 동거하기 위해 십자가 사건을 치룬 것인데 이미 다 이루신(요 19:30)것을 하나님과 별거하게 만든 것이 교회당 문화인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온 이방종교로 둔갑되게 만들어 놓은 이유는 또 하나의 인간이 가로막고 있는 권위로 제사장 문화가 탄생된 것이다. 이 사실을 조직신학에서 인간의 구성요소에서 혼적인 인간의 이성을 강조하는 삼분설의 시작이었다.
삼분설은 주님이 친히 보이신 것은 죄인되었던 우리가 하나님과 한 몸을 이루고자 보이신 성찬에서 그리고 구속받은 백성과 함께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이 거하신 공동체가 교회임을 파괴시키는 것이었다. 교회당 문화가 교회의 안방을 차지하여 진정한 교회를 거리로 쫓겨내는 사실을 우리는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악마는 로마를 내어주고 교회를 통째로 삼켰다”고 탄식한 사학자의 안타까운 말이 지금도 현실이 되고 있다.
교회와 교회당은 엄격히 다르다. 그래서 사람들은 성전된 교회당을 짓는 것이 하나님께 가장 큰 것을 바치는 것처럼 생각하는 현대 교회 목회자의 꿈이 되었다. 이 착각은 구약시대의 예루살렘성전처럼 교회당을 생각하고 있다는 불행이다. 곧 성전으로써 하나님을 모신 전이라는 무서운 착각이다.
하나님의 집 혹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전이라는 사상을 신자들이 갖게 하는 것은 교리적으로 엄청난 죄악이다. 교회당강단을 신성시하여 거룩한 성전이라고 생각하고 그곳을 특별히 꾸미고 장식하고 엄격하게 구별하여 십자가를 걸고 촛대를 세워 촛불을 켜는 행위도 그리고 꽃으로 장식하는 일이나 휘장을 치고 교회당에 나가서 기도해야 하나님께서 들어주신다고 말하는 것은 진정한 교회를 망가뜨리는 행위가 된다.
교회당과 교회를 혼돈하여 하나님의 전이라는 생각은 매우 위험한 것이다. 교회를 우상의 신당으로 신이 있는 집으로 신전으로 만드는 것은 분명히 기독교가 아니다. 사도행전 17장 24절~25절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임마누엘의 하나님은 농부일 때는 농장에서도, 장사하는 사람들에게는 시장에서, 기술자일 때는 공장에서, 교사일 때는 학교에서, 예술가일 때는 예술작품 안에서 우리가 있는 어느 곳에서도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떨어져 계신 분이 아니라 내가 주안에, 주님이 내 안에 계신 한 몸 관계로 각각 개인 안에 찾아오셔서 함께 계신 분이다.
목사는 제사장인가?
신당에서는 필연적으로 제사장이 요구된다. 제사장이 없이 신당만 존재 할 수 없다. 이단 종파임을 증명하는 것은 교주가 필연적이다. 불교에서도 지주라는 말을 자주들을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신당문화란 제사장이 만든 것이다.
예수님 시대에도 그와 동일한 사건에서 보면 신비적인 체험에서 오는 인간의 본능적 심리가 베드로가 변화산상의 고백일 수 있다. 장막 셋을 지어 모셔두고 싶은 심정이 하나님을 한 곳에 가두어 관리하려는 인간의 본성이다.
로마 가톨릭이나 동방교가 우상을 섬기는 불교와 통하는 점도 바로 그런 맥락에서이다. 사람들이 기독교성지순례란 여행에서도 신을 섬기는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기념관이나 흔적을 남기려는 이들의 신당을 관람하는 것일 뿐, 예수님의 흔적을 보려는 생각이 잘못된 것이지만, 그런 여행을 성지순례라고 하는 것이다.
신당을 중심한 모든 종교는 제사장이 있어 신을 대리해서 백성에게 말해주어야 했다. 중보적 역할이 곧 제사장이었다. 신당은 위엄이 있고, 웅장하고 신비롭게 단장되어 신도 높아지고 제사장의 권위를 높아지게 하는 것이다.
이런 잘못된 생각에서 제사장된 사람은 신당을 꾸미는 일이 제1차적인 노력을 기울이게 되는 것이다. 신당의 규모와 꾸며지는 정도에 따라서 신의 권위도 제사장의 권위도 함께 높여 간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한국 교회가 바로 이 공해에 빠져있다는 사실은 부인 할 수 없으며, 탈 교회로써 진정한 교회가 개척도 불가능하고 엄두도 못 내게 하여 유럽이 관광지로써 파괴되어지고 신당문화에 가장 근사치 된 무슬림으로 모두 둔갑되고 있다.
그리고 학자라는 사람들이 입만 살아서 계속 논설만 만들어내고 있는 무서운 생활이 없는 비판만 일삼은 역사는 분명히 잘못 가고 있다. 사람들은 소속된 곳을 위해 제물도 아낌없이 바치고 신당 건축으로 영향력 있는 방법으로 부흥시키려는 또 하나의 욕구를 이루려는 열정에 가득 차 있다.
단 회개보다는 나 자신을 복 빌어주는 위임된 제사장에 의지할 수밖에 없어 시간이 갈수록 우상화 하는 가장 하나님의 축복된 교회로 착각하게 되었다. 구약의 신당에서 도입된 제사장은 전적으로 인간의 범죄의 중보자로써의 역할을 서슴없이 행하고 있음은 중보자로 오셔서 완성하신 사실을 무용하게 하는 주역들로써 목사라는 점이다.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구약교회의 제사상제도는 폐지되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은 누구나 다 같은 제사장의 신분으로 담대하게 나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일을 위해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셨고 성전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갈라져 버렸고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중보역할 자는 영원히 필요 없게 된 것이다.
중세교회에서 교회당 문화의 필수적인 제사장(대리인)제도를 다시 도입하여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교황이나 신부의 사제제도가 도입되어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하나님은 교회당속에서만 갇혀있을 수 없기에 루터를 비롯하여 개혁자들을 통해 교회당 벽을 헐어버리게 하신 것이다. 예루살렘교회의 훼파와 유럽전통교회의 폐허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주 쉽고 명쾌한 답을 숨기고 있는 현대 기독교는 분명히 기업성공의 원리에 깊이 빠져 있다.
가려진 중간상태가 있는 한, 그리스도의 생명은 절대 소통될 수 없다. 개혁주의 생명신학의 원리는 방법이 아니라 성경적 교회로 돌아오는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