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이족은 어디서 왔나?-셈이 아라랏산을 떠나다.

2015. 4. 4. 오후 7:48:28

글자

 

동이족은 어디서 왔나?-셈이 아라랏산을 떠나다.

 

몽골리안 -
Mongloid
......
인종분류에 의한 3대 인류의 일종. 동아시아대륙, 오세아니아나 남북아메리카대륙의 환태평양지역에 선주하였던 현생인류(Homo sapiens sapiens)집단의 총칭이다. 어느 쪽 집단이건 아시아대륙을 홈 랜드로한다. 최근의 유전학적 지견에서는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등일찍이 오스트랄로이드와 분류되어 있던 집단도 여기에 포함시키는 경우가 많다. 코카소이드 및 니그로이드와 함께, 현생인류의 3대 구분 또는 인종 군을 구성한다. 분포역은 최대로,16세기 이전 유럽인이 세계의 각지에 진출하기 전에는 지구표면적의 반 이상에 달하는 지방에 분포하고 있었다. 광범위한분포역 때문에 서식조건은 복잡다양하고 신체특징도 다르다.몸 표면의 멜라닌양은 대개 코카소이드와 니그로이드의 중간정도이고, 피부색은 담갈색에서 갈색으로 기운다. 일반적으로머리털은 짙고, 굵고 곧은 털이 많지만 멜라네시아나 오스트레일리아 등 저위도지방의 집단 중에는 진한 갈색의 짙은 피부색이나 심한 곱슬머리를 갖는 것이 많다. 유아의 엉덩이에는 몽고반점이 나타나는 경우가 많고, 삽 모양의 절치의 출현율이높다. 동북아시아의 황색인종은 흔히 전형적 황색인종이라 부르는데, 눈 사이가 좁고 내안각벽이 발달하여 광대뼈가 튀어나오지만 코가 낮아서 평면적인 얼굴형이고, 사지가 상대적으로짧은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형질의 조합은 극한의 기후조건에대한 적응이라고 보고 있다.


몽골리안- 바이칼호에 정착한 노아의 아들 <셈>
창세기편에서 노아의 아들 셈은 다섯명의 아들(엘람,아시리아,아르박삿,루드,아람)을 나은 후 행방이 묘연해진다.물론 함과 야펫도 그들이 어디서 어떻게 살다가 죽었는지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그러나 그들의 후손들이 퍼져 나간 내력이 소상하게 나온 관계로,우리는 분명하게 그들이 누구의 조상인지 추론 가능하며, 함이나 야펫이 몽골족-황인족 조상이 아니란 점만은 확실하다.

즉 창세기10장에 <함- 흑인조상-이집트,이디오피아,페니키아,히타이트><야펫-백인조상-그리스인,게르만인>의 족보가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으니 궁굼하시면 읽어보시라,특히 영어로 된 인터넷 구약성경읽기로 들어가면 야펫의 후손이 오늘날의 어느민족인지 아주 소상하게 나와 있다.이 모든게 예수님 탄생직후의 시대에 <요세프스>란 유태인 성경학자의 공로이다.나중에 그가 찾아낸 야펫의 후손들을 따로 포스팅할 예정이다.
어쨌든....동이족의 선조임에 분명한 이 <셈>이 다섯아들을 나은 후에,400년을 더 살면서 아들딸을 더 많이 나았다는 언급만하고 성경 속에선 그런 일이 어디에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전혀 언급이 없다.100년을 더 산 것도 아니다.무려 500년을 더 살았다.거기다가 아들과 딸을 많이 나아서 하느님의 축복을 듬뿍 받았다.자...이게 바로 그동안 내가 동이족 조상을 찾지 못한 함정이었다.나는 그동안 <셈>의 후손에게만 촛점을 맞추었지,셈에게는 촛점을 맞추어 본 적이 없다.
결국 <셈>은 메소포타미아를 떠나서,어디론가 멀리 이동을 해서 나라를 세우고,하느님 복을 듬뿍받고 살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추정할 수 있다.거기가 어디 이겠는가?바로 그게 출발점이었다.그래서 일단 셈이 메소포타미아지역에 있는 <아라랏산>주변에서 BC3000년을 기준으로 100년 단위로 동쪽으로 동쪽으로 이동을 해봤다.즉  BC3000년에 셈이 이동을 시작한 출발점은 터키이다.소아시아-중앙아시아-동아시아 ....이런 순서로 이동을 해보니 기원전 2600년경에는 충분히 한반도 인근까지 이동하여 터를 잡을 수 있는 시간이 나왔다.바로 단군왕검이 건국한 해와 일치했다.


<참고>......성경 속에서 연대기를 산출하는 방법은 노아시기까지는 현생인류의 연대기 적용이 불가능하다고 봄.창세기 12장까지는 태양계에서의 지구의 <공전.자전>으로 산출하는 시간이 아닌 것은 분명함......노아의 홍수시기를 BC일만년경으로 기준을 잡으면,성경과 과학자들이 발견한 과학적사실들이 대부분 일치하기 때문.어쨌든 이 포스팅에서는 일반적인 시간계산법을 적용시켜 봤음
단군의 아버지 환웅이 <셈>일 가능성이 나왔다.
그래서 이번엔 바이칼호 부근의 <몽골리안루트>를 추적해보기로 했다.
 
위키백과..............환웅은 일반적으로 우수한 기술과 무력을 가지고 외부로부터 이주하여 토착 부족을 복속시킨 부족을 의미한다.환웅(桓雄)은 배달국의 시조이다. 그는 비, 구름, 바람을 다스리는 신하를 거느리고 환국에서 내려와서 신시(神市)를 창건하니, 이가 환웅 천왕(桓雄天王)이다. 환국은 단군 왕검(檀君 王儉)의 아버지인 환웅의 아버지인 환인(桓因,仁)께서 세우신 나라다.환웅(桓雄)은 단군 왕검의 아버지로 전해지는 신화상의 인물로, 단웅(檀雄) 또는 신웅(神雄)이라고도 한다. 한민족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이 세워지기 전에 하늘에서 내려와 신시를 세우고 단군을 낳았다고 한다.
 

퉁구스계 민족....... 에벤크족(Evenk),옛 이름은 Tungus......시베리아 북부지역의 최대 종족...........영토는 오브 이르티슈 강 유역에서 동쪽으로 오호츠크 해 연안과 사할린까지, 또한 아무르 강 남쪽 유역에서 북쪽으로 븍극해까지의 타이가 지대 전체에 걸쳐 있다. 에벤크족은 지리·경제활동의 차이로 인해 2개의 큰 집단으로 나누어지는데, 사냥꾼과 순록 사육자들은 광대한 북부 침엽수림 지역에 흩어져 있고, 말이나 소를 기르는 사람들과 정착 농민들은 트란스바이칼리아, 중국, 몽골 동북부지역에 산다. 이들은 모두 만주퉁구스어족에 속하는 언어를 쓴다.에벤크족은 전통적으로 부계중심의 씨족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한 씨족의 구성원들은 공동으로 소유하는 불이 있었으며, 기도를 통해 그들의 조상신에게 빌었다. 족외혼을 행했다. 종교의식에서 노래를 하고, 미래를 예언하며 질병을 치료하는 씨족의 샤먼이 종교의 중심 인물이었다. 러시아 혁명 후 에벤크족은 집단농장에서 거주하게 되었고, 1930년에 에벤크 관구(지금의 자치구)가 만들어졌다. 유목민들은 정착하여 대부분 자급자족생활을 하지만 그중 일부는 모피용 동물을 사육하거나 농사를 짓고, 공장이나 관청에 취업하기도 한다.
<
황-몽골 인종-
Mongloid
>........
 
 
체적 형질의 특징으로 볼 때, 세계의 3대인종인 황색 몽골 인종(Mongloid), 백색 코카서스 인종(Coca-soid), 흑색 니그로 인종(Negroid) 중에서 한민족은 몽골 인종에 속한다. 한민족은 피부 색깔뿐만 아니라 곧은 머리카락과 짧은 얼굴에 광대뼈가 나오고 눈꺼풀이 겹쳐져 있으며, 둔부에 몽골 반점이 있는 등 몽골 인종의 공통된 신체적 형질을 대부분 가지고 있다. 몽골 인종은 그들의 집단이동과 지역분포에 따라 서로 다른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신체적 형질과 생활양식에 차이가 생겨서 고시베리아족(Paleo-Siberians)과 신시베리아족(Neo-Siberians)으로 구분된다. 
 
 
그중에서 한민족은 신시베리아족에 속하며, 언어의 특성에 따른 알타이어족(Altaic language family)과 우랄어족(Uralic language family) 중에서 한민족의 언어는 터키족·몽골족·퉁구스족의 언어와 더불어 알타이어족에 속한다. 알타이어족에 속하는 민족들은 제4빙하기의 후기구석기시대까지 시베리아의 예니세이(Yenisei) 강과 알타이 산 기슭에 살고 있었다. 그후 기온이 상승하여 빙하가 녹으면서 후기구석기시대 및 신석기시대 때 시베리아로부터 남쪽으로 이동했다. 
 

 
터키족은 중앙아시아와 중국의 북쪽까지, 몽골족은 지금의 외몽골을 거쳐 중국의 장성 및 만주 북쪽까지, 퉁구스족은 흑룡강 유역까지, 그리고 한민족은 중국 동북부인 만주 서남부의 랴오닝[遼寧] 지방을 거쳐 한반도 남부까지 이동하여 하나의 단일 민족으로서 초기 농경시대에 정착생활을 시작했다. 이와 같은 한민족의 형성 및 이동 과정에서 발전된 문화는 지금까지 남아 있어 후기구석기시대·신석기시대·청동기시대·철기시대의 고고학적 유물과 유적으로 발견되고 있다. 
 
역사상 고대의 중국문헌에 나타나는 숙신(肅愼)·조선(朝鮮)·한(韓)·예(濊)·맥(貊)·동이(東夷) 등의 여러 민족들은 그 전부 또는 일부가 우리 한민족을 가리키는 말이다. 특히 랴오닝 지방의 한민족은 북부의 초원지대에서 목축을 하는 한편 남부의 평야지대에서 농경을 주로 하면서 농경·목축 문화를 발전시켰고, 한반도 남부까지 내려온 한민족은 자연환경의 조건에 따라 목축을 버리고 농경에만 집중하면서 독특한 청동기문화를 발전시켰다. 

이처럼 오늘의 중국 랴오닝 지방과 한반도에서 농경과 청동기문화를 발전시킨 한민족이 하나의 단일 민족으로서 부족연맹체의 족장사회를 통합하여 고대국가를 성립시킨 것이 바로 고조선(古朝鮮)이다. 그 이후 국가가 나누어져서 몇 개의 새로운 독립국가로 분열되었다가 다시 통합되는 역사적 과정은 매우 복잡했지만 민족은 하나의 단일민족으로서 한민족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여진족 [女眞族]........동부 만주(滿洲)에 살던 퉁구스 계통의 민족.여직()이라고도 한다. 이 민족의 명칭은 시대에 따라 달라 춘추전국시대에는 숙신(), 한()나라 때는 읍루(挹), 남북조시대에는 물길(), 수()·당()나라 때는 말갈()로 불리었다. 10세기 초 송나라 때 처음으로 여진()이라 하여 명나라에서도 그대로 따랐으나, 청나라 때는 만주족(滿)이라고 불렀다. 
 

바이칼호(湖)가 한민족 출발점

 

현재 시베리아 및 중국 동북지구에 살고 있는 에벤키(Evenki)는 ‘오랑캐’의 어원이 된 종족이다. 바이칼 호수 인근에서 발원한 이들은 어원커(鄂溫克), 오로첸(鄂倫春) 등으로 불리기도 하는 퉁구스계 민족이다. 나나이(Nanai·중국어로는 赫哲, Herzhen)족은 오로첸과 마찬가지로 퉁구스계이며 러시아 아무르강 유역과 중국 헤이룽장성에 거주한다. 나나이족 자신들은 만주족의 근원인 주르첸(Jurchen·여진女眞)의 후손이라 주장한다. 이곳에 살던 조선(朝鮮) 또는 숙신(肅愼)과 발음이 유사하다. 이에 대해 저자는 “이들이 근본적으로 유전자가 거의 같은 사람들로 지역에 따라 시대에 따라 스스로를 부르는 호칭 또는 중국인들의 문자 사용 기록이 달랐을 뿐, 다 같은 민족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한국어의 뿌리는 요하문명인 것으로 저자는 본다. 단재 신채호 선생이 ‘조선상고문화사’에서 주장한 바대로다. 요하 지역의 신석기 문화는 소하서(小河西)문화, 흥륭와(興隆퉛)문화, 사해(査海)문화 등으로 기원전 7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황하문명보다 최소 1000년 앞선다. 뒤이어 이곳에 홍산(紅山)문화, 우하량(牛河梁)문화가 이어진다. 요하 유역은 바이칼 지역에서 남하한 북방계 몽골리안들이 남방계 사람들과 마주치며 처음 문명을 만든 곳이다. 알타이어의 고향이기도 하다.

 

저자는 동아시아 최초의 요하문명을 한국문화의 원형으로 추정한다. 이들 몽골리안 가운데 한반도로 남하한 이들이 한국인의 조상이고 바다를 건너 일본에 간 사람들은 일본 문화를 만들었다. 중국 남부로 내려간 몽골리안은 남방계 민족과 함께 중국 문명을 만드는 주류 세력이 되었다. 더 남쪽으로 내려간 사람들은 온화한 현지 기후와 현지인들에 동화하면서 몽골리안 유전자를 후손에게 많이 남기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몽골리안 아기들의 엉덩이에 난 푸른 반점인 몽고반점은 동아시아인뿐만 아니라 터키인, 동아프리카인, 폴리네시아인, 아메리카 원주민에게서도 흔히 나타난다. 몽골리안 유전자가 이 지역으로 흘러갔음을 알 수 있다.

 

 

“바이칼, 요하, 북방으로 가야 한다”

이 책을 보니 저자의 연구방식은 가히 다학제적(多學際的)이라 할 만하다. 옛 문헌을 뒤적이며 한국인의 기원을 찾는 역사학적 연구방식과는 사뭇 다르다. 각 민족의 유전자를 분석해 의미 있는 결과치를 찾아내는 데 컴퓨터 처리 기술과 통계학 방법론에 큰 도움을 받은 듯하다. 앞으로 인문학 분야에서도 석학 반열에 올라서려면 자연과학 연구방법론을 익혀야 유리하겠다. 막연한 주장보다는 근거 있는 분석 자료를 제시해야 할 것이다.

 

이 책을 꼼꼼히 읽으려면 독자 자신도 박식해야 한다. 그러나 전문 용어가 나오면 일일이 이해하려 매달리지 말고 죽죽 읽어가면서 큰 흐름을 살피면 되겠다. 여러장의 컬러 사진과 미려한 그래픽이 소개돼 읽는 재미와 함께 보는 즐거움도 얻는다. 바이칼 호 인근의 부리야트인의 사진을 보니 우리와 많이 닮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은 국수주의(國粹主義) 냄새를 풍기지 않는 장점을 가졌다. 이 분야의 다른 책들은 대체로 한민족의 우수성을 지나치게 강조하지 않은가. 한국인이 200여 국가에 퍼진 것과 함께 100만명 이상의 외국인이 한국에 들어와 살고 있다. 다문화 가정이 늘어나는 상황에서 한국인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앞으로 종전 관점이 달라질 것이다.

한국인의 기원에 관한 탐구는 관련 학문이 발전할수록 더욱 활발히 진행될 것이고 뿌리를 캘 가치가 있다 하겠다. 학자의 차가운 ‘머리’뿐만 아니라 민족혼을 찾으려는 뜨거운 ‘가슴’이 동원돼야 할 것이다. 저자는 책 말미에서 연구 동향과 함께 자신의 열정을 토로했다.

 

지금 이 시각에도 내몽골을 답사하며 요하문명의 흔적을 찾는 분들이 있다. 요하문명의 흔적은 고조선의 흔적, 고구려의 흔적, 그리고 동북아시아의 여러 선사시대, 역사시대의 흔적들과 어떤 형태로든 연결될 것이기 때문이다. 더 올라가서 시베리아 바이칼 호 주변에서 고고학 연구가 진행되고 있고, 시베리아의 이곳저곳에서 고고학 발굴과 고인골(古人骨)을 찾으려는 노력도 이루어지고 있다. 몇 년이 지나면 새로운 문명의 흔적을 발견했다는 놀라운 소식이 뉴스를 탈지도 모르겠다. (중략)

바이칼로 가야 한다. 요하로 가야 한다. 북방으로 가야 한다. 가서 우리의 흔적을 찾아야 한다.

 

 

몽골의 역사와 종교


1. 몽골의 역사

 

몽골은 중앙아시아에 위치한 국가로 면적은 156만4천 평방킬로미터이고 인구는 250만, 수도는 울란바토르, 1인당 국민총생산액은 400불이다다. 몽골은 13세기 이전까지 유목생활을 하면서 부족 형태로 존재해 왔다. 하지만 1271년 칭기즈칸이 몽골제국을 창건하면서 몽골은 남송을 멸망시켜 중국대륙과 동아시아 대부분 지역을 차지했고 러시아는 물론 멀리 서유럽까지 세력을 확장시켰다. 하지만 칭기즈칸이 죽은후 내부분열로 세력이 약화되면서 결국 1368년 명나라에 의해 멸망하게 되었다. 이후 몽골인들은 청나라 등 중국에 복속되었고,1911년이 되어서야 러시아의 지원으로 혁명을 일으키면서 독립국가를 건설하게 되었다. 이후 소련에 이어 두번째 공산국가가 되며, 1946년에 중국으로 부터 정식으로 독립을 선언하여 국제적으로도 독립국가로서의 지위를 인정받았다. 1987년 미국과 국교를 맺으면서 시장경제로 전환하기 시작하였다. (자세한 역사는 아래 칭기즈 칸의 역사 참조) 


2. 몽골의 인종과 종교 기원

후기 구석기와 신석기인들은 중앙아시아에서 기원한 몽골리안 계통이었으나 아파나시에보의 청동기인들은 유럽계통의 인종들이었다. 바이칼의 몽골리안들은 신석기시대를 축으로 북동부 아무르강지역과 동북아시아 내몽고, 만주지역 으로 이동을 하게 된다. 이들 몽골리안들의 이동은 사냥을 중심으로 한 수렵위주 의 경제형태에서 기후의 변화와 함께 사냥대상이 줄어드는데 따른 어로 중심과 원시농경을 시작하면서 적이한 기후와 강 및 토양을 찾아 남하하게 되는게 이유이다. 일부는 아무르강을 따라 북만주지역으로 들어오고 일부는 몽고초원을 경유하여 중국동북부 발해지역과 중국서북부 등으로 남하하게 된다. 바이칼호는 시베리아 대륙의 한복판에 있다. 러시아인들은 동부 시베리아에 속한다고 하지만 수천년 전부터 이곳에 살아온 몽골 사람들은 시베리아를 논할 때 바이칼 동쪽이냐, 서쪽이냐로 가름한다.

곧 이 광대한 유라시아 대륙의 중핵지대로서 시베리아를 상정하면서 바이칼 호수의 동서로 시베리아를 구분하는 잣대를 삼았던 것이다. 이는 그만큼 바이칼호가 이 지역에서 차지하는 역사적·지리적 중요성을 말해준다. 고대 유라시아 유목민들에게 바이칼은 삶의 형이상학적 의미와 형이하학적 조건들 모두를 통틀어 아주 밀접한 연관을 지니던 곳이었다. 이는 지금도 여러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우선 선사시대부터 역사시대의 중세까지 세계사의 전면에서 끊임없이 역동적인 변화와 이합집산을 통해 새로운 삶의 형태를 제시하고 문명의 교류를 실현시켜왔던 수많은 유목민족들의 정신적 지주가 바로 시베리아 샤머니즘이요, 이는 곧 바이칼호 지역을 모태로 하여 형성되었다. 지금 한반도에 사는 우리 또한 민족 문화의 뿌리를 북방 샤머니즘과 연관시켜 논의하려는 움직임이 이미 20세기 초부터 활발히 있어왔다.

물론 고고학이나 문헌사학, 언어학, 농학, 유전학, 의학, 지질학, 해양학, 기상학 등 제반 학문 분야의 민족 기원 문제에 대한 연구와 접근도 중요하고 실제 연구 결과도 적은 바 아니지만 민속학, 민족지학(ethnography) 등의 측면에서 고대 북방인들의 정신문화적 복합 상태를 연구하는 작업이야말로 그 어떤 연구보다도 학문적 비중이 낮지 않다고 본다. 특히 우리는 분단시대의 공백으로 1990년대에야 비로소 우리 민족의 기원지로 언급되는 북방지역, 즉 중국 동북 만주지방, 발해만 연안, 시베리아 바이칼호 주변, 알타이 산맥 지역, 예니세이강 투바지역, 아무르강, 송화강 유역 등을 답사하기 시작하고 있으므로 사실상 이 지역들에 대한 개론서 수준의 정보도 아직 갖춰져 있지 않은 형편이다. 민족지학 연구의 첫째 조건은 현장성이다. 바이칼호 지역을 고대 시베리아인들의 정신문화적 원류인 샤머니즘의 중심지로 볼 때, 이 지역 원주민 부리야트족의 전통과 문화에 대한 현장 연구가 가장 급선무이며 아울러 우리 전통문화 특히 한국 무(巫)와의 비교연구 또한 매우 중요하다 하겠다.


3. 바이칼 신화와 샤머니즘

부리야트족 샤머니즘의 구비 서사시 ‘게세르’에서도 이 우주의 구조를 아버지격인 하늘과 어머니 땅, 그 사이에 인간을 놓고 인간이 악마에게 빠져 세상을 어지럽힐 때면 주기적으로 아버지인 하늘의 신 텡그리(Tengri)가 자신의 아들을 지상에 보내 악을 물리치고 땅 위의 평화를 이룩하곤 한다. 이때의 서사 영웅이 우리의 단군에 해당하는 게세르칸(Geser-Khan)이다. 그는 인간을 구하기 위해 70살 할아버지와 60살 할머니가 사는 오두막집에 하늘로부터 내려온다. 이는 또한 단군신화를 비롯한 한반도의 각종 부족 신화(동명왕 설화 등)의 하늘 사상이나 천손(天孫) 강지(降地: 땅으로 내려옴) 사상과 똑같은 구조와 동기를 보이고 있다. 부리야트인들의 전설은 바이칼호 형성에 관해 “…옛날 옛적에는 바이칼 바다가 없었고 오로지 땅뿐이었다. 어느날 불을 토하며 산이 무너지더니 물로 변하여 커다란 바다가 만들어졌다”라고 말한다. 즉 바이칼 호수는 지금도 ‘서있는 불(standing fire)’ 이라는 뜻으로 땅속의 불이 식지 않고 있다고 믿고 있다. 

한편으로는 샤먼의 바다라고도 불리는데 태초에 불을 토하며 형성된 원시의 바다가 주변 바이칼 사람들의 삶과 죽음에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한없는 동경과 함께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곧 바이칼 자신이 샤먼의 존재와 동격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이때 ‘바이’는 샤먼을 뜻하고 ‘칼’은 계곡·호수를 지칭하는 것으로 전해왔다. 또 하나 중요한 바이칼 구비전승으로 ‘알탄샤가이(황금복사뼈)’ 신화가 있다. 이는 부리야트 전통 신화 중 대표격인 ‘울리게르 서사시’ 계열의 영웅서사시로 ‘게세르’ 신화와 함께 모두 샤먼문학으로서 수천년 아니 수만년 간 샤먼들에 의해 전승되어 왔다. 샤먼은 종교적 사제이자 제사장이며 질병을 치료하는 의사이자 종족의 역사와 우주의 기원을 설파하는 역사가이자 과학자이다.

또한 사회 윤리를 제시하는 도덕적 리더로서 행동하는 등 다양한 임무를 수행해온 특이한 존재였다. 이러한 샤먼이 전해준 ‘알탄샤가이’ 신화에도 여러가지 우리네 풍속과의 연관성이 드러난다. 손님에게 곰방대로 담배를 권한다거나, 상대방과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씨름으로 결판을 낸다든가, 지상의 혼란을 하늘에 거주하는 신의 아들이 인간의 육신으로 화하여 제거하고 다시 하늘로 돌아간다는 천신주재 사상 등을 역시 공통적으로 엿볼 수 있다. 바이칼의 구비문학은 이처럼 내용상 현재로부터 수만년 전의 지구 빙하기에 대한 인류의 기억까지 희미하나마 담고 있으며 바이칼 주변 알타이어계 여러 종족들의 역사가 고스란히 녹아있는 문화적 보고이다. 그리하여 시베리아 바이칼 지역과 한반도의 민족지학적 상관성을 밝히는 작업의 중요성이 더욱 절실해지고 있으며 앞으로의 연구과제가 산더미 같고 바다와 같음을 느끼게 된다.
 

바이칼 샤먼 세계 신들의 수직적 위계질서 (장생신?)
 

1)후헤 문헤 텡그리 (영원한 푸른하늘)

2)에세게 말라안 텡그리 (현명한 아버지 하늘신)

3)하늘 거주 텡그리들

4)텡그리의 자손인 칸, 한(혹은 하트)들

5)노욘,자얀, 위대한 남-녀 샤먼들의 영, 종족의 시조가 되는 영웅들의 정령들

6)산,강,호수 등 거대 자연물의 정령들, 질병의 원인이 되는 정령들, 할매와 할배, 영험한 처녀의 정령들

7)종족사이에서 특별한 업적을 세우지 못한 일반인들이 사후에 변신하게 되는 영혼, 집안을 보호하는 조방신,아다,아나하이,무우 슈부운, 이승에서 모욕당했던 가난한 백성들의 영혼, 병사한 사람들의영혼,위의 1~3은 하늘에 거주하는 신이고, 3번 하늘 신의 자녀들이 지상에서 육신을 얻으면 인간계(중계)의 지배자인 한(혹은 칸,카안)이 되고 죽으면 다시 4번 위치에 편입. 징기스칸도 죽어서 4번 자리에 갔을 것임. 신들은 '에세게 말라안 텡그리'를 통해서만 '영원한 푸른 하늘'과 교통이 가능했고 '에세게 말라안 텡그리'는 다양한 신들 사이의 유기적 질서를 부여하는 역할 수행...
  

(용어 참고)
 

- 후헤 : 영원한

- 문헤 : 푸른 ,초록

- 텡그리 : 바이칼 인근과 극동 아시아지역,몽골 등지에서 주로 사용되는 하늘 신의 호칭.원래의 의미'하늘' 혹은 '하늘거주자'였으나 의미가 전용되어 하늘 신의 통칭(알타이 지역 - 텐게리 , 중아아시아 지역 - 텡기르)

 

- 에세게 : 아버지,할아버지

- 말라안 : 현명한

한(칸) : 1)텡그리 바로 아래 단계에 해당하는 신과 정령 2)한이 지상으로 강림하거나 육신을 빌어 지도자로 나서는 경우 부여 받는 호칭 (한 혹은 칸)  예) 칭기즈칸

- 하트(혹은 하탄) : 한의 여성형 명사. 여신

- 노욘 : 주인, 지배자의 의미. 영어의 Mr와도 유사성 보임.

- 자얀 : 창조자,조물주의 뜻이나 '창조적 속성','조물주적 속성'.특정 샤먼 명칭에사용.

- 아다 :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부정적인 영혼의 일종

- 아나하이 :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부정적인 영혼의 일종

- 무우 슈부운 : 여인의 형상을 한 사악한 영혼
 

# 부리야트 마을의 ‘천마도’

아직도 바이칼엔 곳곳에 샤머니즘의 실상들이 넘쳐난다. 나그네 발길이 닿는 언덕과 언덕, 고개와 고개마다 솟대와 신목(神木), 당목(堂木), 당집이 있으며 소원을 비는 돌무더기와 오색 댕기들이 만발하여 있다. 질병을 고치는 약수라는 뜻의 ‘아르샨’ 지방에 가면 산중의 약수와 약초로 병자를 치료하는 샤먼을 지금도 만날 수 있고 어느 부리야트족 마을에는 비료자(자작나무의 러시아말)를 신성시하며 하늘로 솟구치는 천마(天馬)를 그려 놓았다. 마을마다 하늘 제사터가 있고 그 주변은 사람들이 출입 않는 소도이며 이곳을 하늘과 땅의 소통이 가장 잘 되는 곳으로 여기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우리네 사촌 부리야트 사람들이다. 이르쿠츠크에서 한두 시간 거리의 부리야트족 마을 우스체르다 부근 제사터 안내문엔 다음과 같이 쓰여있다. ‘이곳은 우스체르다 자치구 가운데 가장 지력(地力)이 센 곳입니다. 이곳은 전통적으로 하늘의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왔습니다.

# 몽골의 탱그리와 단군

삼국유사의 단군신화에 나오듯 샤먼킹(shaman king) 단군이다. 단군은 하느님의 자손이며 지상의 평화를 건설하기 위해 하늘로부터 파견된 존재이다.  단군의 어원은 알타이어족에 속하는 우리민족은 몽골어중 '텡그리'라는 하늘을 의미하는 단어가 -->탕구르-->당군-->단군 으로 변천된 것이며, 이는 고조선이 제정일치의 사회에서 제사장과 정치적 지도자가 하나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또한 한자어로 쓴 것은 그후의 일이며, 박달나무는 제단의 재료로 제사장을 의미하며, 임금은 말그대로 정치적 통치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단군은 단군왕검의 줄임말이 아니라, 제정일치의 지도자를 가리키는 말인 것이고, 여러 명이 존재했으며 그중 1대 단군이 왕검이라고 불리웠다.

 

4. 몽골신화 ( 몽골 제족(諸族)사이에 전승(傳承)되고 있는 신화)

뭉고, 돌궐(터키), 달단(타타르), 퉁구스, 흉노(훈)의 여러 부족들은 만리장성 이북의 초원지대에서 유목 생활을 해왔다. 이들 부족들의 종교는 강력한 힘을 가진 샤먼(shaman)에 대한 믿음이다. 샤먼의 주술은 너무나 강하여 죽은 자의 영혼을 지상으로 데리고 올 뿐만 아니라 어떤 때에는 창조주와 겨룰 정도였다. 징기즈칸의 군대가 중국을 정복하면서 몽고와 시베리아에 티벳 불교가 도입되었다. 그 이후 샤먼의 권위가 추락했다. 대부분의 몽골 제족의 경우, 그들의 신화는 영웅서사시나 전설 속에 단편적으로밖에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부리앗(Buriat) 몽골족의 전승은 예외(例外)여서 잘 정리된 형태로 전승되고 있다.

그들의 신화에 따르면 천계(天界)는 동(東)과 서(西)로 나뉘고, 동에는 44명의 사신(邪神)이 있고, 서에는 55명의 선신(善神)이 있어 서로 대립하고 있다. 애니미즘적(的) 관념을 나타내는 이들 신격(神格)은 텡그리라고 한다.  동과 서를 합쳐 99명인 텡그리 외에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중간부에 또 텡그리가 있는데, 이들의 쟁탈을 둘러싸고 동과 서의 싸움이 벌어진다. 패배하여 지상에 떨어진 동천(東天) 수장(首長)의 시체 각 부분에서 쏟아져 나온 온갖 마물(魔物)들이 인간에게 질병과 죽음 및 재앙을 가져다 준다. 한편 서천(西天)의 수장은 아들을 내려보내 그 마물들과 싸우게 한다. 마물의 대부분은 머리가 여러 개인 괴수(怪獸)인데, 천신(天神)의 아들이 지상(地上)으로 내려오는 동기, 그리고 그때에 천신에게서 받는 여러 가지 신기(神器) 등에 특색이 있다. 동과 서, 또는 선과 악의 2원론적 구성이나 신격의 이름 등을 보아 이란으로부터의 짙은 문화적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곳에서 몽고신화로 분류한 것은 우리나라와 일본을 제외한 알타이어족의 대부분을 포함한다. 제목처럼 몽고인들을 포함할 뿐만 아니라 타타르, 거란, 여진 등을 포함한다.

 

 

5. 징기스칸 시대의 샤머니즘과 현재 몽골의 샤머니즘

 

하이지히(Walther Heissig)는 체계적으로 몽골의 종교를 설명하면서 그것이 지금은 '사라져버린(disappeared)'것이라고 단서를 달았다. 하이지히의 연구는 종교를 억압하던 사회주의 시기에 이루어진 것이었음을 고려해야 하겠지만, 이 '사라짐'의 전제에서 출발할 때 몽골 샤머니즘의 현재적 사실에 더 근접할 수 있을 것이다. 몽골이 시장경제로 전환한 후 새롭게 복원되기 시작한 현대 몽골의 샤머니즘은 현재적 현상이면서도 과거 전통의 의미체계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몽골 샤머니즘에 대한 기술은 역사속의 문화적 특성과 동시대적 관찰을 효과적으로 병행할 때 사실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과거 몽골의 유목문화 샤머니즘은 위계적 세계관을 종교적으로 형성했다. 보통 샤머니즘에는 지고신이 있다해도 대부분 '숨은 신'이나 '사라진 신'으로만 존재하는 반면 몽골 샤머니즘에서는 최고신 텡그리가 신적 위계의 정점에 강력하게 위치한다. '영원한 푸른 하늘' , 즉 멍케 코케 텡그리(M nke K ke Tengri)가 현실적 의례의 중심에 있는 것이다. 이런 신관의 위계성은 절대자에 대한 종교적 헌신의 결과때문이 아니라 정치적 함의를 가진다. 즉 농경 중심의 정주사회와는 달리 유목민들의 이동적 삶은 안정된 정치체제를 구성하기 곤란했고, 따라서 이동성의 취약점을 극복할 수 있는 상징적 위계 구조를 필요로 했던 것이다. 샤머니즘 신앙을 가진 유목민들에게 수직적 초월의 관념이 발달한 것은 그 때문이다.

예를 들면 {몽골비사}의 첫부분에는 징기스칸이 '천상에서 운명을 점지 받고 태어난' 이라고 기술되어 있는데, 이 역시 징기스칸의 개인적 배경을 텡그리의 의지와 일치시킴으로써 그의 통치권을 주장하는 이데올로기의 종교적 표현이었고, 이를 통해 근본적으로 연대성이 약한 씨족들의 결속을 이루어낼 수 있었다.
 몽골인들에게는 정치적 행동과 종교적 의례가 불가분하게 얽혀 있으며, 텡그리에게 드리는 희생제의는 하늘의 의지와 군사적 승리, 통치권의 주장, 성공의 증거로 간주되었다. 훗날 텝 텡그리(Teb-Tenggeri)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몽골의 대샤먼 커커츄(Kokochu)는 아직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위치에 있었던 테무진에게 "하늘은 테무진에게 이 대지를 통치케 할 것이다"라는 신탁을 내려준다. 그에게 '징기스칸'이라는 칭호를 준 이도 커커츄였다. 이런 종교적 권위 부여는 테무진의 통치권을 정당화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수행했다. 뿐만 아니라 파라만장했던 씨족간 전쟁과 통합을 통해 몽골고원을 통일한 징기스칸의 궁정에는 베키(Beki)들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베키라는 칭호에는 샤먼적 성격이 깃들어 있으며 샤먼적 인물 중에서도 최고의 지위와 권위를 가진 인물에게만 부여된 것이다. {몽골비사} 216절은 "베키로 추대되면 흰옷을 입고 백색 거세마를 타며 상석에 앉는다. 또 년월의 길일을 택하는 일을 주관한다"고 기술하고 있음을 볼 때, 족장급 샤먼들이 제국의 궁정에서 통치에 관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샤먼의 정치적 진출이 강력하다보니 당연히 징기스칸의 통치권과 마찰이 생겨났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제국 성립기에 징기스칸을 도왔던 커커츄는 정치적 갈등속에서 징기스칸의 동생이 권력을 얻을 것이라는 신탁을 내렸다. 이에 징기스칸은 神·政 두 가지를 모두 장악하려는 정치적 야욕으로 커커츄를 살해한다. 그리고 스스로 신의 대리자로 자처하는 신격화를 추진했다. 훗날 멍케칸(1251-1259)은 "하늘에는 멍케-텡그리가 있듯이 대지에는 하늘의 아들인 징기스칸만이 유일한 군주이다.  멍케-텡그리의 명령은 징기스칸으로부터 출발한다."라고 선언했다.

이러한 정치적 갈등과 종교적 합리화는 샤머니즘을 이용해 절대권력을 장악하려는 초기 몽골 칸들의 의도를 극명히 보여준다. 하지만 현재의 몽골 샤머니즘은 야쿠트족 중심의 사카(Sakha)공화국에서처럼 과거의 정치적 힘을 회복하고 있지 못하다. 그 이유는 시장경제로의 변화 이후 티벳불교가 과거의 사회주의적 이념을 대체하면서 급격히 복원되었기 때문이다. 티벳불교는 승단 제도를 통해 복구의 체계적 진행이 용이했지만 샤머니즘은 늙은 샤먼들의 '재개'와 새로운 샤먼의 '출현'이 갖는 비체계성으로 인해 과거의 정치적 차원을 회복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이다. 사회주의를 포기한 몽골 정부가 전통문화의 복원을 통해 새로운 민족정체성을 추구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샤머니즘을 통한 재건은 아니다.
 

현재의 몽골 정부 역시 민족정체성 확립을 중심과제로 삼고 있다. 오랫동안 강제로 잊혀졌던 징기스칸의 역사적 복원과 신격화가 한참 진행중이고, 姓 되찾기 운동을 벌이고 있으며, 키릴문자 대신 전통 몽골 문자를 사용하자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이는 총체적인 전통의 복원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몽골 전통의 중심축이었던 종교 역시 빠른 속도록 복원되고 있는 것이다. 현재 몽골은 티벳불교가 지배적 위치로 올라섰고, 도처의 사원이 복원되면서 활성화되고 있다. 라마승들의 사회참여의 폭도 넓어지고 있다. 벡커는 민주화시위에서 라마승들이 종교활동의 자유를 주장하며 뛰어들었고, 사회주의를 대체할 마땅한 도덕적 기준이 없었던 개혁세력에게 자연스럽게 티벳불교가 사회적 도덕률이자 기준점이 되었다고 분석한다. 현지에서 직접 볼 수 있었던, 라마승들에 대한 몽골인들의 존경심은 그것이 현실로 자리잡아가고 있음을 나타낸다.

이러한 변화속에 샤머니즘의 위치는 어떤 것일까? 현재 몽골의 샤머니즘은 전통문화의 차원에서 긍정적으로 재검토되고 있다. 특히 전세계 환경운동가들이 관심갖는 몽골의 생태계 보존의 차원에서 샤머니즘은 효과적 신념 체계로 인정받고 있다. 하지만 현대 몽골 사회에서도 샤먼은 여전히 소수이며, 라마승들의 종교활동과 중첩되는 폭이 넓다보니 샤먼만의 독특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지도 못하다. 뿐만 아니라 벌써부터 샤먼을 트릭스터로 몰아대는 사회적 비판 여론이 일어나고 있어서, 자칫 근대화의 희생양이 될 가능성도 있는 듯하다. 현재의 몽골 샤머니즘은 '자유롭지만 불안한' 상태에 놓여있다. 그러나 이는 어느 시대에나 마찬가지였다. 샤머니즘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늘 변화해 왔다. 그 변화의 현실이 '사실'에 가깝다. 몽골 샤머니즘을 깊이 이해하려면 고대 유목민들의 과거적 샤머니즘이 아니라 새롭게 고안되고 창조된 산물로서의 현재적 샤머니즘 현상을 연구해야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6. 몽골의 종교

 

1) 샤머니즘

현재 몽골 인구의 50% 정도가 샤머니즘 신자이다. 몽골은 샤머니즘이 번성한 지역 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중앙 아시아의 혹독한 생활 환경은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생활 가운데 샤머니즘에 젖게 만들었으며, 다양한 종교적 심성도 샤머니즘에 녹아들었다. 샤머니즘은 몽골 역사 초기부터 13세기 혹은 16세기까지 몽골의 가장 중요한 대표적 종교로서 여러 가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오늘날까지도 샤머니즘은 몽골인의 심성 깊숙이 자리잡고 있고 생활 곳곳에서 그 영향이 나타나고 있다. 샤머니즘은 징기스칸 시절 즉 초기 몽골 제국 시절에는 국가 무당이 전쟁에 관하여 충고함으로써 막강한 세력을 발휘하였고 국가 종교로 인정되었다.
 

칭기즈칸의 어머니가 부리야트 사람이고 그의 무덤도 바이칼 알혼섬에 있다는 전설로 미루어 칭기스칸이나 그 부족들도 위와 같은 바이칼 신들의 위계질서 개념을 가지고 있었을것이다. 장생신은 가장 상위의 신인 '영원한 푸른 하늘'의 중국식 표기로 추정된다.
 

# 바이칼호 주변 부리야트족-  시베리아에는 여러 아시아 소수민족이 있다. 인구 40만의 부리야트족은 이 중 최대의 소수 민족으로, 바이칼호 주변에서 자치공화국을 이뤄 살고 있다. 특히 부리야트족이 간직한 샤머니즘의 원형은 우리 민속과 비슷한 점이 많아 관심거리이다. 원래 바이칼의 주인인 이들은 17세기에 시베리아를 정복한 러시아에 동화돼 부리야트족이란 이름을 갖게 됐다. 하지만 남쪽 국경 너머 몽골과 중국 북부의 몽골인과 뿌리가 같고 언어도 비슷하다. 유목민인 이들은 모두 자신을 징기즈칸의 후예로 믿고 있다. 부리야트족은 우리의 선녀와 나무꾼과 똑같은 민족 설화를 갖고 있다. 한 노총각이 바이칼호에 내려온 선녀에 반해 옷을 숨겼다.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해 하는 선녀를 집으로 데려와 아들 열 하나를 낳았다. 하지만 방심하는 틈에 선녀는 숨겨놓은 옷을 입고 하늘로 올라간다는 얘기이다.

시베리아 최고의 성지인 바이칼호의 올혼섬에는 오색 천조각을 두른 나무말뚝이 수없이 많다. 샤머니즘의 상징인 이 말뚝은 오리를 조각해 나무 꼭대기에 꽂아놓은 우리의 솟대나 서낭당 과 상징적 의미와 형상이 거의 똑같은 것이다. 이는 한국의 토속신앙과 샤머니즘이 시베리아에서 기원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부리야트족은 우리나라 처럼 천한 이름을 지어줘야 오래 산다고 믿어 ‘개’란 뜻의 ‘사바까’란 이름이 흔하다.

또한 아기를 낳으면 탯줄을 문지방 아래 묻는 전통도 우리와 비슷하다. 부리야트족의 샤먼은
 '샤먼의 호수' 라고 불리는 바이칼 호숫가 신목(神木) 아래서 바이칼의 신 불한(칸)을 부르는 굿판을 벌인다. 예전의 샤먼이 썼던 모자는 사슴뿔 모양으로, 신라의 왕관과 모습이 닮아 시베리아의 샤먼 전통이 한반도로 전해진 것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스탈린 시대 때 많은 브리야트족 샤먼이 처형당했다. 이로 인해 샤먼적인 요소가 배척의 대상이 되었고, 샤머니즘 자체가 쇠퇴하면서 일반인의 기억에서 무속적인 특징이 사라져 갔다. 그러나 소련 붕괴 이후 바이칼호에는 다시 샤머니즘 바람이 불고 있다. 

 
바이칼에 대한 숭배나 제사, 혹은 제물 공여 의식은 바이칼 주위에 산재한 우상을 모신 신당들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바이칼 주변과 알혼섬 일대에서는 희생을 바치는 장소의 규모에 따라 만칸, 자니그칸 등으로 불린 제사터가 널려 있으며, 이들보다 그 규모가 더 크고 조직적인 특성을 보이는 부리야트인의 타일라간의 흔적도 찾아볼 수 있다. 타일라간은 서부 부리야트인뿐만 아니라 바이칼을 지나 몽골 고원에 이어지는 부리야트이에 이르기까지 넓은 지역에서 나타나며, 그 대상에 따라 농경, 목축, 어로 등의 특징을 갖는 제사 형태를 보인다. 부리야트인 타일라간 가운데 발치르족의 타일라간에서는 바이칼에 대한 제사의식의 원형이 비교적 완전한 형태로 보존되어 있다. 부리야트의 무속 신앙에 따르면 세계는 악과 선의 수많은 영으로 가득하다.

서부의 55선신과 동부의 44악신 혹은 악령이 합하여 부리야트인의 세계는 99의 신들이 주재하고 있다. 산, 숲, 강, 호수, 별, 해, 달 등에 에젠으로 불리는 영이 있는 것으로 믿었고, 자연물 가운데 인간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바이칼호의 경우에는 켕그리 수준의 영들 외에도 여신 바이켈 하탄이 모든 자연 현상을 다스리고 있는 것으로 믿었다.  초여름이 되면 부리야트인들은 알혼섬 혹은 현재의 이르쿠츠크 인근의 바이칼 주변에서 성대하게 타일라간 의식을 집전했고, 제물을 바쳤다. 영들 가운데 가장 영험이 있고 세력이 강대한 것으로 알려진 바이칼의 여신 바이겔 하탄에게 제물이 바쳐진다. 초여름에 바이칼 지역의 농토에서 씨앗을 파종하는 시기와 맞물리면서 땅의 왕인 다일란 노욘에 대한 경배가 함께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으나, 이는 바이켈 하탄 경배 의식보다 뒤에 행하는 것으로 보인다.
 

2)라마교(티벳불교)

지금 몽골의 전체 인구의 26% 정도가 라마교를 믿고 있으며 계속 부흥하고 있다.  국가 종교로서 불교에 대한 관심은 징기스칸 시대부터 비롯되었다. 징기스칸은 불교를 믿는 위구르인을 선생이나 공직자로 채용했다. 위구르인은 일반인으로부터 크게 존경받았고 몽골에 지대한 문화적 영향을 끼쳤다. 왕위에 있으면서 징기스칸은 또한 주요 불교 지도자들과 회의를 하였다. 그의 뜻에 따라, 후계자인 오게데이칸(Ogedei Khan)은 티벳의 라마승을 초대해 하라호룸(Kharakhorum)에서 불교의식을 배웠다. 그리고 여기서 샤머니즘이 결합되어 이러한 다신교적인 샤머니즘이 몽골의 전통적인 신앙이 되었다.

불교가 몽골의 정식 종교로 채택된 것은 쿠빌라 칸(Kubila Khan) 때의 일이다. 쿠빌라 칸은 불교를 원나라의 공식 종교로 발표했다. 그리고 그는 라마승 로디자틀산(Lodijaltsan)을 몽골 불교의 공식 지도자로 임명하였다. 라마승은 군대의 의무를 공식적으로 면제받았으며 세금도 면제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쿠빌라 칸의 노력에도 불교는 몽골에서 널리 받아들여지는 종교가 되지는 못했다. 불교는 상류층들의 종교였으며 티벳제국이 몰락함에 따라 불교도 그 지지기반을 잃고. 대신 샤머니즘이 16세기 중반부터 왕성하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또한 이시기 황모파 불교(Yellow Hat sect Buddhism) 또는 라마교가 몽골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라마교는 정치적 사회적 이유에서 몽골에 도입된 것이었다. 정치적으로 라마교는 몽골의 지배계층이 그들의 입지를 종교적 인물을 통해 강화하기 위해서 이용되었고, 둘째로, 티벳의 황모파 지지자들이 적모파에 대항해 몽골 지배층과 연합을 꾀했기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라마교가 몽골에 도입된 세번째 이유는 중국의 명나라에서 호전적인 몽골을 잠잠하게 만들 수단으로 라마교를 삼았기 때문이었다. 1577년, 알탄 칸(Altan Khan)은 티벳의 수장을 몽골로 초대했다. 알탄 칸은 몽골을 라마교로 하나로 통일하고자 했던 것이다. 알탄 칸은 불교신앙을 법률에 통합하여 샤머니즘의 관행을 제거하는 법적인 근거로 삼았다.

그의 이 같은 시도는 아브타이 사인 칸(Avtai Sain Khan) 에 의해 지속되었다. 아브타이 사인 칸은 1586년 제3 대 달라이 라마를 만났다. 이 만남에서 몽골 라마교의 중심으로 하라호름(Kharakhorum)에 주(Zuu)사원을 설립하는 것이 결정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몽골 라마교의 수장인 자나바자르(Zanabazar)의 지도아래 라마교 절과 학교가 생겨났다. 자나바자르는 상류 계급이나 일반인을 가리지 않고 몽골인들에게 라마교를 전하는 데 열심히 노력했다. 이후 200년간 몽골 인민 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라마교는 점점 몽골 전역으로 확산되어 나갔다. 또한 이 기간동안 승려들을 사원 밖으로 내보내 일하게 함으로써 몽골의 노동인구를 늘리기 위한 일환으로 소위 "좌익편향(Left Deviation)" (1929-1932)이라는 이름으로 대략 300개의 사원을 폐쇄했다. 일부 승려들은 처벌이 두려워 떠났다가 1932년 "새전환운동(New Turn movement)"의 시작으로 다시 사원으로 돌아왔다. 이 운동은 신앙, 교육, 선전을 지향한 운동이었다. 1936년 사원 수는 1929년에서 1932년 사이에 폐쇄당한 300개 이상의 사원을 포함해 모두 767개에 이르렀다. 그리고 "좌익 편향(Left Deviation)" 직후의 기간동안 늘어난 승려의 수는 10,000명 이상으로 전체 모두 100,000명 이상의 승려가 생겨났다.

당시 성인 라마승은 전체 남성 인구의 40%이상을 차지했다. 이것은 사회주의 국가인 몽골의 큰 문제가 되었다. 1930년대 중반, 몽골 공산당은 "사원의 기관화"를 실시했다. 이 같은 정책을 실시한 까닭은 몽골 공산 정부에 반대하는 정치 세력이 사원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설 때문이기도 했다. 당시 승려들은 사원을 떠나 세속의 생활로 돌아갈 것을 매우 강력히 권고 받았다. 1938년 약 20,000명의 승려들이 유목민이 되었으며 5,000명은 정부 지원 인원으로, 나머지 청년은 군대로, 어린이는 가족 품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나머지 승려들은 1930년대 중반 사원 방화와 파괴의 희생자가 되고 말았다. 1937년은 몽골 역사상 최악의 한해로 기록된다.

수백개의 사원이 파괴되고 수천개의 불교서적이 불에 태워졌으며 100,000명 이상의 라마승들은 세속 생활로 돌아가거나 죽임을 당했다. 이후 40년 이상, 몽골인들은 공포 속의 종교 생활을 했다. 나이든 신자들은 100여명의 승려가 남은 중심 사원 간단 사원에 나갔으며 혹은 고비 사원으로 갔다. 고비사원에는 약 40명의 승려들이 있었다. 젊은 사람들은 집에서만 종교생활을 했고 단체로 예배를 드리는 일은 중지되었다. 현재 독립국가인 몽골의 불교는 부흥을 맞이하고 있다. 젊은이들은 사원에서 운영하는 학교에 가기도 하고 1930년대 억지로 세상으로 쫓겨 났던 많은 승려들이 다시 사원으로 돌아와 원래 살고자 했던 삶을 살고 있다. 1990년, 약 20여명의 여성 신자들이 세운 여성들을 위한 사원이 울란바트르에 세워졌다. 그러나 종교 분쟁이 잠잠해진 것은 아니다. 현재 많은 외국 선교사들이 들어와 전도활동에 나섰으며 몽골인을 서구 종교로 개종시키고자 노력하고 있다.
 

3) 몽골 라마교와 샤머니즘의 혼합

 

티벳불교의 몽골내 확산은 샤머니즘의 입지를 협소하게 만들었지만, 민간신앙의 차원에서 보면 몽골의 샤머니즘과 티벳불교의 차이는 모호하다. 이는 종교적 지평융합이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우선 샤먼과 라마승의 직능의 차이가 거의 없었다. 라마승들도 점을 치고, 예언을 하고, 치유의례와 자연숭배를 했고, 심지어 엑스타시와 주술적 행위의 연행에서는 라마승들이 샤먼보다 훨씬 더 뛰어나기도 했다. 몽골의 라마승은 전형적으로 샤먼이 행하는 종교적 직능을 담당하고 있다. 마을 잔치가 벌어진 초원의 개울가에서 가정의 우환과 그것의 치유를 위한 작은 의례를 행했는데, 그 처방이라는 것이 입김을 불어넣은 사탕이라든지, 신령한 힘을 주입한 투그릭 지폐같은 것이었다. 또한 차강노르솜의 늙은 라마승은 티벳불교의 신격뿐 아니라 자연신령 로스-사브다크와 교류하고 있었고 그는 자연신령들이 무척 강력하며, 자신에게 커다란 힘을 부여한다고 이야기했다. 이런 현상은 외형적으로는 샤머니즘이 티벳불교에 제압되었지만, 내면적으로 보면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며 종교적인 지평융합을 이루었음을 나타낸다.

이런 융합이 가능하게 되었던 이유에 대해서는 쥬코프스카야(Zhukovskaya)의 분석에 주목할 수 있다. 쥬코프스카야는 17세기 몽골에 재차 들어온 티벳불교는 이미 샤머니즘과 유사한 티벳의 토착종교인 본-포(Bon-po)와 여러 세기에 걸쳐 경쟁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점차 혼합된 형태였다고 분석한다. 이처럼 티벳불교와 샤머니즘의 융합은 한 쪽의 해체가 아니라 각각의 종교성을 풍부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특히 몽골 샤머니즘은 티벳불교의 판테온을 수용하면서 신관을 발전시켰고, 우주관을 정교화시켰으며, 화려하고 현란한 의례도 도입했고, 샤먼들은 티벳불교의 신격도 섬기게 되었다.  이것은 샤머니즘이 티벳불교에 일방적으로 흡수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박원길은 "어느 면에서는 몽골의 샤머니즘은 라마교(티벳불교)의 외형을 빌려 그대로 존속되어 갔다."고 분석한다. 즉 심층적으로는 샤머니즘적 인식체계가 그대로 지속되었다는 것이다.
 

 

4) 회교

몽골 내 회교 인구는 약 4% 정도이다. 회교는 카자흐족이 주로 믿는데 주로 몽골의 서부 지역에 분포하며 수니파 회교도이다. 울란바타르 시에도 7,000명 가량의 몽골 국적의 카자흐인들이 살고 있으며, 수도에서 30km 떨어진 날라이흐 시에도 회교도들이 4-5,000명 있으며, 회교 집회소가 있다. 카자흐인들은 생활속에서 체득된 습관적, 명목적 회교인이 대부분이고, 영적인 저항이나 신앙적 의식은 희박한 편이다. 최근 터기 모슬렘 협회에서 몽골 회교 선교를 위해 몽골에 모두 4개의 학교를 세우거나 합작 형태로 참여하고 있다. 울란바타르에 1993년 몽골-터키 합작 중학교를 설립하였고, 1995년 가을에 기존의 몽골 건축 기술학교(제 4호 건축기술학교)를 합작하였으며, 북쪽 다르항 시와 서쪽 바양울기 아아막에서 학교를 인수하여 모슬렘 선교의 기반을 닦아가고 있다. 울란바타르에는 "몽골 모슬렘 협회"(Mongolian Moslem Society)가 결성되어 있으며, 회교도들과 카자흐 인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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