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교 Judaism (유대敎)

2013. 1. 8. 오후 8:2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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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교 Judaism (유대)

유대교는 유대 민족의 종교로서, 하느님의 임재를 인간행위와 역사에서 경험한다고 주장하는 유일신교이다. 유대교는 광의로는 아브라함?이사악?야곱 등 족장시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4,000여 년에 걸친 유대 민족의 종교현상 전부를 뜻하며, 협의로는 BC 5세기 유대 민족이 바빌론 유수에서 이스라엘로 돌아와 유대교를 재건한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2,400여 년 동안 믿어온 신앙체계를 가리킨다. 여기서는 협의의 유대교 통사만을 다룬다.


유대교 재건 시대(BC 538~333)

유다 왕국이 신바빌로니아 제국에게 패망하는 과정에서 엘리트 유대인들은 3차례에 걸쳐(BC 597, 587, 582) 신바빌로니아로 끌려가서 큰 고초를 겪었다. 그러다가 BC 539년 페르시아 제국의 고레스 황제가 신바빌로니아를 멸망시키고 이듬해 칙령을 내려, 신바빌로니아에 살던 유대인들에게 귀향을 허락하고 성전재건을 명했다(에즈 12~4, 63~5). 세스바쌀과 그의 조카 즈루빠벨이 유대 총독으로 임명되어, 동족들을 데리고 귀향해서 성전재건에 진력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사마리아인들과 귀향하지 않고 눌러 살던 유대인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은데다가, 귀향자들은 너무 곤궁해 생계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거의 한 세대가 지나 즈루빠벨은 다리우스 황제의 지원을 받아 BC 5153월 드디어 성전을 완공하고 다시 제사를 드릴 수 있었다. 그러나 제사장?레위인?평신도 가릴 것 없이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아 신앙생활이 위태롭게 되었다(이스라엘의 역사 A History of Israel). 페르시아 황제 아르닥사싸 1(BC 464~424 재위)의 술 시중을 들던 유대인 느헤미야가 BC 444년 유대 총독으로 임명되어 BC 43712월에 예루살렘 성벽 공사를 마쳤다(요세푸스의 유대교사). BC 433년 느헤미야는 총독 임기를 마치고 궁정으로 돌아갔다가 1~2년 후 다시 유대 총독으로 부임하여 유대인들이 율법을 준수하도록 여러 조치를 취했다. 십일조를 바치고 안식일을 지키도록 명하고 혼종혼(混宗婚)을 금했다(느헤 13).


BC 428년을 전후하여(이스라엘의 역사) 느헤미야에 이어 제사장이며 율법학자인 에즈라가 아르닥사싸 1세의 명으로 모세의 법전을 갖고 유대로 와서 초막절을 맞아 본격적으로 율법을 가르쳤다(느헤 8). 그는 이방인들과 맺은 혼종혼을 모두 파기하여 이방인 아내들과 그들에게서 태어난 자녀들을 모두 내보내도록 명했다(에즈 92, 102~43). 유대인들은 에즈라의 가르침에 따라 율법을 곧이곧대로 지키기로 다음과 같이 맹세했다. "이 땅에 사는 다른 민족 가운데서 사위를 맞이하거나 며느리를 보지 않을 것, 이 땅에 사는 다른 민족이 안식일에 곡식이나 그 무엇을 팔러 오더라도 사지 않을 것,……7년마다 땅의 소출을 거두어 들이지 않을 것, 남에게 빚준 것이 있으면 없애버릴 것, 우리 하느님의 성전행사를 위하여 해마다 1/3세겔씩 바칠 것,……우리 밭에서 나는 햇곡식과 처음 딴 과일은 해마다 야훼의 성전에 바칠 것, 법에 있는 대로 맏아들과 처음 난 가축, 곧 갓난 송아지나 새끼양을 우리 하느님의 성전에서 봉직하는 사제들에게 바칠 것"(느헤 1031~37) 등이며 또한 십일조를 바치기로 다짐했다(느헤 1038~39). 에즈라가 예루살렘에 갖고 온 모세의 법전이 정확히 어떤 책이었는지는 계속 논란이 되고 있으나 모세5경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당시 이스라엘은 독립국가는 아니었지만 모세의 법전을 생활신조로 삼은 율법공동체로 다시 태어났다. AD 70829일 예루살렘 성전이 불타버림으로써 성전제사가 아주 사라진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은 율법공동체로 존속할 수 있었다. 에즈라야말로 유대교를 재건한 장본인이므로 그를 제2의 모세로 일컫기도 한다. 유대교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신관

바빌론 유수 이전에는 하느님을 마치 다른 인간처럼 묘사하곤 했다. 그런데 바빌론 유수 이후에는 하느님의 초월성을 강조한 나머지 될 수 있는 대로 의인화 경향을 피했다. 예를 들면 히브리어 성서를 아람어로 번역한 타르굼에 따르면 에덴 동산을 거니신 분은 하느님이 아니고 그분의 말씀(멤라)이었다고 한다(창세 3:8). '하느님은 삼키는 불'이라는 표현을 '말씀은 삼키는 불'이라고 고쳤다(신명 4:24). 초월적인 하느님을 너무도 경외한 나머지 이스라엘의 신명(神名) '야훼'를 입에 담지 못하고 '야훼'가 나오면 '아도나이'(나의 주님)로 읽었다. 그밖에도 하느님 야훼를 가리키는 우회적 표현들이 발달했는데 '이름'(마태 69), '하늘'(마태 534), '전능'(마태 2664), '셰키나'(現存) 같은 것들이다.


선민사상

에즈라의 명에 따라 이스라엘 남자들이 이방인 아내들과 그들에게서 태어난 자녀들을 모조리 내쫓음으로써 이스라엘은 이방인들과는 다른 선민으로 자처했다. 선민 이스라엘이 보기에 이방인들은 죄인들이다(마태 546~47, 67, 1817, 사도 223). 이때부터 선민이 만민을 적대시하고, 따라서 만민이 선민을 적대시하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율법

에즈라는 이스라엘을 율법 중심의 공동체로 만들었다. 국가제도?성전제도 등 모든 제도가 없어져도 이스라엘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율법 중심의 공동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율법은 모세5경과 그 안에 들어 있는 규범들을 가리킨다. 이 규범들은 바빌론 유수 이전의 것들이 많았던 까닭에 바빌론 유수 이후 시대에 새롭게 적용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레위인들이 옛 규범들을 시대에 맞게 해석했다(느헤 9). 이렇게 해서 미드라시 문헌(성서 주석)이 생겨났다. 율법체제가 확립됨에 따라 예언자들이 차츰 사라진 것도 이 시대의 특징이다.


그리스 시대(BC 332~63)

BC 332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팔레스타인을 점령하고 BC 323년 바빌론에서 열병으로 죽은 다음 팔레스타인은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통치를 받았고 BC 198년에는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3세에게 정복되었다. 두 왕조의 영향으로 헬레니즘 문화가 도시에 사는 부유한 유대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갔다. 대제사장 야손(BC 175~172 재임)과 메넬라우스(BC 162 죽음)가 헬레니즘 전파에 앞장섰다. 마침내 BC 167년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4세가 유대교를 금지하고 이 금령을 어기는 유대인들에게는 심하게 박해를 가했다. 이에 마카베오, 일명 하스모네 가문에 속하는 제사장 마따디아와 그의 5명의 아들이 봉기하여 16412월 성전을 정화하고 다시 제사를 드렸다(I마카 436~40). 이를 기념하여 유대교에서는 유대력으로 기슬레브 달 25일부터 8일 동안 성전봉헌 축제(하누카)를 지낸다. 하스모네 가문 중심의 독립전쟁이 차츰 승리하여 마침내 하스몬 왕조(BC 142~63)가 수립되었다. 


독립전쟁에 승리하는 것은 다행이었지만 하스모네 가문은 그만 과욕을 부려 정권과 대제사장직을 독식하는 잘못을 범했다. 마따디아의 넷째 아들 요나단(BC 160~143 통치)은 독립군 사령관직으로 만족하지 않고 대대로 대제사장을 배출한 사독 가문을 제치고 BC 152년 대제사장 직분까지 겸직했다. 일이 이렇게 되자 그때까지 독립군에 가담하던 경건자들(하시딤)이 양분되기에 이르렀다. 요나단을 지지하는 경건자들이 바리사이파를 만들고, 그를 반대하는 경건자들이 에세네파를 만들었다.


이당시 이스라엘 종파의 성격을 약술하면 다음과 같다. 바리사이파는 경건한 평신도들로서 구약성서못지않게 조상들이 구전으로 전해준 전통도 존중했다. 이들은 성서와 구전의 계율을 다 지켰다. 또한 이들은 섭리, 천사, 내세에서의 보상, 죽은 이들의 부활을 믿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헤로데 왕 치세 때 바리사이파는 6,000명이 넘었다고 한다. 2번째로 쿰란 종파가 있다. BC 152년 요나단이 대제사장직을 찬탈하자 제사장이던 '의로운 스승'은 저항하다가 모진 박해를 겪었다(하바꾹 주석 88~13). 요나단의 조카 요한네스 히르카누스가 통치할 무렵(BC 135~104) 의로운 스승 또는 그의 후계자가 추종자들을 데리고 사해 서북쪽에 있는 쿰란으로 가서 수도원을 세웠다. 이 수도원은 알렉산드로스 얀네우스 치세 때(BC 103~76) 매우 번창했으나, AD 686월 로마군에 의해 파괴되었다. 쿰란 수도자들은 사악한 제사장들이 봉직하는 예루살렘 성전이 더럽혀졌다고 보았다. 그들은 사막에 살면서, 곧 빛의 아들들과 어둠의 아들들 사이에 종말전쟁이 일어난다고 보았고, 결국 빛의 아들들이 승리하여 다윗 계통 임금 메시아와 사독 계통 제사장 메시아가 이스라엘의 12지파를 다스릴 것이라고 믿었다. 쿰란 수도자들은 본래 제사장들이 지키던 정결법을 철저히 준수했다. 성교와 사정에서 생기는 불결을 피하려고 수도자들은 독신생활을 했다. 3번째 종파는 상급제사장?대지주?귀족들이 속한 사두가이파이다. 이들은 헬레니즘을 숭상하고 하스모네 왕가 및 로마 식민정권과 결탁했다. AD 70년 예루살렘이 함락됨과 더불어 해체되었다. 이들은 예언서들의 영감을 거부하고 구전된 율법을 배척했으며 오직 모세5경만을 성서로 받들었다. 또한 이들은 천사들의 존재와 부활을 부정하고(사도 236~8) 영혼불멸과 섭리도 인정하지 않았다.


무식한 시골 사람들은 위에 소개한 어느 종파에도 속하지 않고 십일조법?정결법?기도법 등을 소홀히 했다. 지식인들은 이들을 '땅의 백성'(암 하레츠)이라 부르며 멸시했다. 이 시대에 팔레스타인에 살던 유대인들은 50~70만 명쯤 되고, 해외에 이민가서 살던 유대인들은 200~500만 명으로 추정된다. 해외 유대인들은 시리아?소아시아?메소포타미아?이집트에서 많이 살았다. 서기 원년 무렵에 지중해 주민 중 10가 유대인들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BC 5~4세기의 유대인 수에 비해서 엄청나게 증가한 것이다. 유대인들의 수가 급격히 불어난 까닭은 이방인들을 많이 입교시켰기 때문이다. 그 예로 BC 130년 요한네스 히르카누스와 BC 103년 아리스토불로스가 팔레스타인 남부지역 이두매아 사람들과 북부지역 이두레아 사람들을 강제로 대거 입교시켰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이민 가서 살던 유대인들이 BC 3~1세기에 구약성서를 그리스어로 번역했다. BC 1세기에 씌어진 아리스테아 편지 Letter of Aristeas에 따르면 역자 72명이 구약성서를 각자 처음부터 끝까지 번역했는데, 역문들을 비교해보니 한 자도 틀리지 않았다고 한다. 이 전설에 따라 이 역문을 70인역이라 한다. BC 1세기에 마카베오 2~4서도 이집트에서 씌어졌다. 알렉산드리아 유대 공동체에서 배출된 가장 뛰어난 학자는 필론(BC 20~AD 50)이다. 그는 그리스 철학, 특히 플라톤 철학과 유대교 신앙 간의 융화를 시도하여 많은 저술을 남겼다. 그는 우의적 방법으로 성서를 풀이했는데, 이 주석 방법은 알렉산드리아 교부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팔레스타인에서 씌어진 작품으로는 우선 쿰란 문헌을 꼽을 수 있다. 팔레스타인 작품들을 유형별로 분류하면 성서 전설 또는 성서 주석류로 욥 유언집〉?〈이사야 순교기〉?〈아담과 하와의 생애, 쿰란에서 발견된 창세기 외경〉?〈토비트〉?〈수산나〉?〈벨과 뱀등이 있고, 묵시문학으로는 다니엘〉?〈에녹〉?〈모세 승천기〉?〈시리아어 바룩〉?〈에스드라 4〉?〈아브라함 묵시록등이 있으며, 역사서로는 요세푸스(AD 38~ 100 이후)가 쓴 유대 전쟁 Bellum Judaicum〉?〈유대 고대사 Antiquitates Judaicae가 있다. 그밖에 요세푸스는 자서전 The Autobiography of Josephus〉?〈아피온 논박 Contra Apionem을 썼다. 지혜문학류로는 시라크의 아들 예수가 BC 180년경에 쓴 집회서〉?〈12족장의 유언등을 꼽을 수 있다.


로마 시대(BC 63~AD 135)

여기서는 BC 63년 로마 장군 폼페이우스가 이스라엘을 점령한 때부터 AD 135년 제2차 유대 독립전쟁이 실패로 끝난 때까지를 로마 시대로 본다. 유대인들은 로마 제국을 상대로 줄기차게 독립운동을 일으켰다. 중요한 사건들을 약술하면 다음과 같다.


열심당 결성

AD 6년 로마 황제 옥타비아누스는 유대와 사마리아를 다스리던 아르켈라우스 왕을 폐위하고 코포니우스를 그 지역 총독으로 임명했다. 코포니우스 총독은 자기 관할지역에 주민세를 부과했다. 주민세는 12(또는 14)~65세의 주민은 누구나 1데나리온씩 바쳐야 하는 인두세였다. 이에 갈릴리 지역 가믈라 요새 출신 유다가 주민세 거부운동을 벌이고 동지들을 모아 열심당(젤롯당)을 조직했다. 그들이 내세운 기치는 하느님만이 이스라엘의 통치자이며 황제의 흉상과 황후의 좌상 따위가 양각된 은화 데나리온을 세금으로 바치는 것은 우상숭배라는 것이었다(마르 1213~17). 열심당원들 가운데서도 극력분자들을 일컬어 자객들(sicarii)이라고 한다.


1차 유대 독립전쟁

AD 66년 여름 플로루스 총독이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을 십자가에 처형하자 카이사리아와 팔레스타인 전역에서 유대인들이 로마 정권에 반대하여 봉기했다. 그리스도교도들은 유대인들로부터 독립운동에 가담하라는 요구를 받고 거부했기 때문에 박해를 받을까 두려워한 나머지 요르단 강을 건너 펠라로 피신했다(에우세비오스의 교회사, 에피파니우스의 반이단론). 로마군 사령관 베스파시아누스는 68621일 예리고를 탈환하고, 이어서 남쪽으로 13떨어진 쿰란 수도원을 파괴했다. 70년 유월절에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티투스가 4개 여단(24,000)을 이끌고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829일 성전구역을 점령하여 성전을 불지른 다음, 9월에는 예루살렘 서북부 고지대와 헤로데 왕궁까지 점령했다. 그렇지만 사해 서안에 있는 천연 요새 마사다에서는 자객들이 74년 유월절까지 저항하다가 실바 장군 휘하의 로마군 제10여단에게 점령될 지경에 이르자 자객 960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요세푸스의 유대 전쟁〉?〈이스라엘의 성지).


야브네에서 유대교 재건

1차 독립전쟁이 실패하자 독립전쟁을 주도한 열심당과 자객당, 상급제사장?대지주?귀족 중심의 사두가이파, 쿰란 수도원 중심의 에세네파가 모두 소멸하고 오직 바리사이파만이 건재하게 되었다. AD 70~80년 율법학자 요하난 벤 자카이는 바리사이파들을 이끌고 텔아비브 남동쪽 약 20지점에 위치한 야브네(그리스어로는 얌니아)로 가서, 성전이 파괴되었으므로 오로지 율법 중심의 유대교를 재건했다. 그는 율법학교(베트 미드라시)를 개설했고, 그의 후임자 가밀리엘 2세는 최고의회(베트딘)를 창설하여 유대교 최고의결기관으로 삼았다. 100년경에는 히브리어?아람어 구약성서의 범위를 확정했다. 그렇지만 아가〉?〈전도서〉?〈에즈라를 두고서는 경전이냐, 위경이냐의 논란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그런가 하면 85년경 야브네에서 작은 사무엘 랍비가, 유대인들이 회당 예배 때마다 바치는 18조 기도문(슈모네 에즈레, 아미다라고도 함) 가운데 이단자들을 단죄하는 제12조 기도문(비르카트 하 미님)에 나자렛 사람들(그리스도교도들)을 덧붙였다고 한다(바빌로니아 탈무드). 그결과 그리스도교도들은 회당예배에 참석할 수 없어 명실공히 독자적 종단으로 독립했다. 12조항을 의역하면 다음과 같다. "나자렛 사람들과 이단자들은 사라지게 하소서. 살아 있는 이들의 책에서 그들을 지워버리시어 의인들과 함께 씌어 있지 않게 하소서. 무엄한 자들을 굴복시키시는 하느님, 찬양받으소서."


2차 유대 독립전쟁

115~117년 트라야누스 황제 치세 때 리비아 키레네 출신 유대인 루쿠아스 안드레아스가 메시아로 자처하면서 이집트?키레네?키프로스?메소포타미아 유대인들을 사주하여 로마에 반기를 들었다. 132~135년에는 시므온 바르 코크바가 제2차 유대 독립전쟁을 일으켰다. 당대의 석학 율법학자 아키바는 그를 메시아로 추대하여, 민수기2417절에 나오는 '별의 아들'(바르 코크바)이라고 선언했다. 135년 바르 코크바는 베들레헴 근교의 바티르 마을 전투에서 전사하고, 아키바는 유대인들을 부추긴 죄로 로마군에게 처형되었다.1952~61년에 사해 서쪽 헤베르 계곡에서 바르 코크바의 서간집이 발굴되었다.


예수와 그리스도교

에즈라 이후 이스라엘에서 예언자들이 점차 사라졌다. 그런데 27년경 예수가 출현하여 임박한 종말을 선포하고 그에 대비하여 회개하라고 외쳤다. 그는 율법을 곧이곧대로 지키는 게 능사가 아니고, 하느님과 이웃을 등진 인간이 하느님과 이웃에게로 '돌아섬'을 강조했다. 이는 신선하고 충격적인 예언자적 외침이었다. 그는 기득권을 누리던 유대 지도자들과 로마 식민정권의 미움을 사서 3047일 금요일 오후 예루살렘 북부 성곽 바깥 골고다에서 약 33세의 나이로 처형되었다. 그러나 예수 사건은 십자가에서 막을 내리지 않았다. 인간들은 그를 처치했지만 하느님은 그를 정당화하여 그를 부활시켰다. 제자들은 수시로 부활한 예수를 목격했고, 마침내 30년 오순절 예루살렘에 순례온 제자들이 그리스도교를 창교했다. 예수는 이단자가 아니라 예언자요 메시아라고 확신했던 것이다. 유대인 동족 가운데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사람은 극히 적은 반면, 그리스도교 창교 10년도 지나지 않아서 이방인들이 대거 그리스도교로 몰렸다. 기성종교인 유대교와 신흥종교인 그리스도교 간의 결별과정은 다음과 같다. 1차 유대 독립전쟁(66 ~70) 때 유대계 그리스도교도들은 독립운동에 가담하지 않고 요르단 강 건너, 갈릴리 호수에서 남쪽으로 28떨어진 펠라로 피신했다. 85년경 유대인들은 야브네에서 18조 기도문 중 제12조 기도문에 그리스도교도들을 단죄하는 구절을 덧붙였다. 115~117년 키레네 출신 루쿠아스 안드레아스가 메시아로 자처하여 독립운동을 할 때와 제2차 유대 독립전쟁(132~135) , 바르 코크바가 메시아로 자처하여 독립운동을 할 때 그리스도교도들은 가담하지 않았다.


랍비 시대(1~18세기)

탄나임 시대

기원 전후에 활약한 힐렐과 샴마이 때부터 200년경 미슈나 편찬 때까지를 탄나임 시대라 한다. 70년 야브네에서 유대교가 재건되었으나 제2차 유대 독립전쟁 때야브네 주변이 몹시 위태로워진 까닭에 최고의회는 갈릴리 우샤, 베트 셰아림, 세포리스, 티베리아스로 전전했다. 성전과 제사 대신 성서와 기도 중심의 유대교가 야브네와 갈릴리에서 확립되었다. 갈릴리에서 초창기에 최고의회를 주재한 이들은 시메온 벤 가말리엘(135~175경 재직)과 그의 아들이며 후계자인 유다 하 나시(175~220 재직)였다. 유다는 그때까지 구전으로 전해오던 율법을 집대성하여 200년경 우샤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율법집을 펴냈으며 이것이 미슈나이다. 미슈나에는 잡다한 율법들이 663장으로 분류되었다. 이어서 미슈나에 빠진 전승들을 모아 율법집, 즉 토세프타를 펴냈다. 탄나임 시대에 모세5경 주석서들도 편찬되었는데, 출애굽기주석서 메킬타, 레위기주석서 시프라, 민수기〉?〈신명기주석서 시프레, 민수기소주석서 시프레 주타, 신명기주석서 미드라시 탄나임 등이 있다.


아모라임 시대

200년경 율법집 미슈나가 편찬됨과 아울러 그 율법집을 풀이하는 아모라임(해석자들) 시대가 시작된다. 아모라임의 율법해석을 집대성한 문헌이 탈무드인데, 2가지 종류로 대별된다. 첫번째는 팔레스타인 탈무드, 일명 예루살렘 탈무드인데, 이것은 팔레스타인에 있는 카이사리아 학파와 세포리스 학파의 해석을 모아 5세기초에 편찬한 것으로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씌어졌다. 2번째는 바빌로니아 탈무드인데 메소포타미아에 이민 가서 살던 유대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주로 네하르데아?품베디타?수라 학파의 해석을 모아 7세기초에 편찬되었다.


640~1038년 바빌로니아 학파가 지중해 이슬람 지배권 영역에서 득세하여 바빌로니아 탈무드가 통용되던 시대를 일컬어 게오님(geonim 尊者) 시대라 한다. 바빌로니아 학파 게오님의 영향으로 바빌로니아 탈무드는 모든 유대 공동체에 통용되는 보편적 율법집이 되었다. 그러나 이들에게 반기를 든 운동도 있었다. 8세기에 아난 벤 다비드가 일으킨 카라이트(히브리어로는 카라임) 운동이 대표적이다. 이 운동은 다음과 같은 3가지 기치를 내세웠다. 성서 중심주의에 의하면 랍비들의 율법은 인위적 계율이다. 메시아의 구원을 재촉하고자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자. 성서를 재검토하여 율법과 교리의 진수를 찾아내야 한다. 9세기에 이르러 카라이트 운동은 팔레스타인뿐 아니라 북아프리카와 스페인 유대 공동체에까지 전파되었다.


중세 유럽 유대교

950~1750년의 중세 유럽 유대교는 그리스도교 지배하의 프랑스?독일에 자리잡은 아슈케나짐과 이슬람교 지배하의 남부 스페인에 자리잡은 세파르딤으로 양분된다. 이슬람이 지배하는 스페인에 살던 유대인들, 곧 세파르딤은 이슬람의 정치?경제?문화?사회에 융화되어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매우 폭넓은 저술들을 남겼다. 가장 출중한 석학으로는 마이모니데스, 일명 모세스 벤 마이몬(1135~1204)을 꼽을 수 있다. 그는 남부 스페인 코르도바에서 태어나 한동안 카이로 이집트 궁정에서 활약하다가 이집트 혹은 이스라엘에서 죽어 티베리아스에 묻혔다. 그는 중세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따라 유대교를 이해했다. 율법에 관한 저술들로는 미슈나 주석서, 세페르 하 미츠보트 Sefer ha-mitzwot(613개조 명령과 금령), 미슈네 토라 Mishne Torah(율법 전집 14)가 있다. 1492년에는 스페인에서, 1497, 1506년 포르투갈에서 유대인들이 각각 추방됨으로써 이 지역의 유대교는 붕괴되었다.


그리스도교가 지배하던 프랑스와 독일에 살던 유대인들, 곧 아슈케나짐은 도시 중심부에 자기네끼리만 모여 살면서 상업에 종사했다. 상거래가 아니면 그리스도교도들과 상종하지 않고 게토 안에서 자기네 방식대로 살았다. 2차 십자군원정(1147~49) 이후에 독일 유대계에서는 신비주의자들(하시딤)이 많이 나타났는데, 이들은 고행?순교?속죄 행위 등을 강조했다. 아슈케나짐의 최대 석학은 독일 마인츠와 보름스에서 수학하고 프랑스 트루아에서 가르친 랍비 솔로몬 벤 이삭(약칭은 라슈)으로서 그의 성서 주석과 바빌로니아 탈무드주석은 너무도 뛰어나서 성서와 바빌로니아 탈무드모든 판본에 함께 수록되기에 이르렀다.


13세기에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지역에서 카발라(전통)라는 신비주의 운동이 일어났다. 카발라의 대표적 경전은 조하르 Zohar(광채)이다. 조하르가운데서 오래된 부분은 모세스 벤 ? 톱 디 레온(1305 죽음)이 쓴 것이다. 16세기에 이르러 카발라 신비주의자들은 티베리아스에서 북쪽으로 35떨어진 제파트로 몰려들어 제파트를 카발라 성지로 만들었다. 여기서 돋보이는 신비주의자로는 이사크 루리아(1531~1573)를 꼽을 수 있다. 그는 이스라엘이 겪는 여러 가지 환난은 신성(神性)의 생기가 억눌린 것을 반영한다고 보고, 신성의 생기를 해방하는 신비신학을 주창했다. 카발라 운동의 가장 극적인 사건은 샤베타이 체비(1626~76)의 출현이었다. 그는 투르크의 스미르나에서 태어나 하느님의 존함 '야훼'를 발성하는 등 괴상한 짓을 하더니, 16654~5월 이스라엘 가자에 가서 카발라 신비주의자 나단 벤 엘리샤를 만나고 메시아로 행세하기 시작했다. 신비주의자 나단에게 설득되어 1665531일 가자에서 자신이 메시아라고 선포하여 큰 소동을 일으켰다. 9월 초순 스미르나로 돌아와서는 몇 달 동안 비교적 조용히 지냈으나 1211일 자신이 메시아라고 재차 선포함과 아울러 166668일에 이스라엘을 구원하겠노라고 장담했다. 166626일 이스탄불로 가려고 마르마라 내해(內海)를 항해하던 중에 오스만 투르크 관헌에게 붙잡혔다. 그는 사형을 받든지 이슬람교로 개종하든지 양자 택일을 하라는 강요를 받고 915일 에디르네에서 이슬람교로 개종하여, 한동안 황실 은급을 받으며 비교적 자유롭게 살았다. 그러나 이중 신앙생활(카발라 메시아니즘과 이슬람교)을 한다는 죄목과 방종한 성생활을 한다는 죄목으로 16728월 이스탄불에서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이듬해 1월 알바니아 둘치뇨로 유배되어 1676917일 속죄일에 갑자기 죽었다. 그의 후견자 나단은 그가 체포된 것, 이슬람교로 개종한 것, 유배가서 죽은 것을 모두 신학적으로 설명한답시고 궤변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이것은 신비주의와 메시아니즘의 허구성이 생생히 드러나는 사건임에 틀림없다.


현대 유대교(1750~)

18세기에 이르러 독일에 살던 유대인들 중에서 은행가와 공장주 등으로 성공한 이들이 생기면서 자연스럽게 주변 사회와 접촉이 잦게 되었다. 그결과 멘델스존(1729~86) 같은 계몽철학자가 나타났다. 그는 조상 전래의 유대교 신앙과 서구 계몽사상의 융합을 시도했다. 18~19세기에 독일에서는 유대교를 당시 사회와 사조에 적응시키려는 개혁운동이 계속되었다. 1840년대에 이르러 독일 유대인들이 대거 미국으로 이주하여 기존 미국 유대교 개혁자들과 합세함으로써, 1880년 미국 유대교 200개 회당 거의 전부가 개혁 유대교로 기울어졌다.


그렇지만 서유럽의 유대인들 대다수는 조상 전래의 유대교를 돈독히 지키면서 아울러 문화적으로는 현대사회에 적응하는 신보수주의적 입장을 취했다. 동유럽에서는 18세기에 하시딤 운동이 일어났는데, 이것은 카발라 운동을 대중에게 확산시킨 것이다. 하시딤 운동은 철저히 카리스마적 지도자(rebbe)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는데, 지도자끼리 다투는 일이 잦았다. 처음에는 지도자가 민주적으로 선출되었으나 나중에는 세습되었다. 예루살렘의 하시딤은 메아셰아림 지구에 모여 산다. 19세기 말엽에는 시온주의 운동이 일어났다. 오스트리아 태생 유대인 작가 테오도어>헤르츨(1860~ 1964)이 팔레스타인에 유대인들의 국가를 세운다는 기치 아래 1897년 바젤에서 제1차 시온주의 세계대회를 열었다. 1917112일 영국 외무장관 A. J. 밸푸어는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 자신들의 국가를 건설하는 것에 찬동한다고 선언했다. 1918년 영국군은 독일과 동맹을 맺은 터키군을 팔레스타인에서 몰아냈다. 1930년대와 1940년대초에 서구의 유대인들이 히틀러의 박해를 피하여 팔레스타인으로 대거 이주함으로써 유대인들과 아랍 원주민들 간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19471129일 국제연합이 이스라엘 독립을 승인한 데 이어 1948514일 이스라엘은 독립을 선포했다. 그결과 이스라엘은 주변 아랍국들과 여러 차례 전쟁을 치렀다. 이스라엘 독립전쟁(1948~49), 시나이 전쟁(1956), 6일전쟁(1967), 속죄일 전쟁(1973), 이스라엘군의 레바논 침공(1982), 아랍인 봉기(인티파다, 1987~) 등 분쟁의 연속이었다.


마지막으로 유대교의 예수관을 약술하면 다음과 같다. 야브네 시대(70~135) 이래 유대인들은 예수를 민족 배반자, 종교 배신자로 배척했다. 그러다가 19세기 중엽 독일에서 유대교 개혁운동이 일어나면서 예수와 그리스도교도들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히브리대학교 교수이며 시온주의자였던 J. 클라우스너(1874~1958)는 예수를 위대한 윤리 스승이라고 했다. 영국에서 유대교 개혁운동을 일으키고, 시온주의와 밸푸어 선언을 반대한 C. J.G. 몬테피오레(1858~1938)는 예수를 새로운 모습의 예언자라 했다. 독일의 진보적 랍비 레오 베크(1873~1956)는 예수를 일컬어 유대교의 순수하고 선한 요소를 체현한 사람이라고 했다. 미국의 보수적 랍비 밀턴 스타인벡(1903~50)은 예수를 인간에 대한 사랑과 자비가 넘치는, 매우 아름답고 고귀한 정신이라고 했다. 비정치적이고 문화적인 시온주의를 제창한 마틴 부버(1878 ~1965)는 예수를 대형(大兄)이라고 했다. 한편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1965비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중 유대인들에 관한 항목에서 유대인들과 그리스도교도들 간의 친교를 권하고 성서와 신학 공동 연구를 격려했다. 이처럼 20세기에 이르러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관계가 조금 개선되었지만 아직은 시작에 불과하다.


[유대교] 종교 지도자 5 - 랍비

유대교 또는 유다교는 유대인들의 "종교와 철학이며 삶의 방식"이다.

타나크(히브리어 성경)에서 시작되었고 탈무드와 같은 이후의 성경의 텍스트로 탐구되어 온, 유대교는 유대인들에 의하여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자손들과 함께 개발하여 온 언약적 관계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전통적인 랍비 유대교에 의하면, 하나님은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그의 율법과 계명을 성문과 구술의 양 개 토라(Torah) 형식으로 시현하셨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카라이트(Karaites) 학파에 의하여 도전을 받았는데, 이 학파는 중세 시대에 번창하였고 오늘날 수천 명의 신도들을 거느리고 있으며 또 다만 성문의 토라 만이 밝혀졌다고 주장하는 하나의 운동이다. 오늘날 인본주의적 유대교와 같은 자유주의 운동은 무신론적일 수도 있다. 유대교는 3000년 이상 계속되는 역사를 갖는다고 주장한다. 유대교는 가장 오래된 유일신 종교 중의 하나이며, 오늘날까지 존속하는 가장 오래 된 종교이다. 히브리서/이스라엘 사람들은 에스더기(the Book of Esther)와 같은 타나크의 후기 책 속에서 유대인으로 이미 지칭되었으며, 유대인(Jews)이라는 용어는 "이스라엘의 자손"이라는 호칭을 대체하고 있었다.


 


유대교의 텍스트, 전통과 가치들은 기독교, 이슬람과 바하이교를 포함하는 후기 아브라함의 종교들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유대교의 많은 측면들이 또한 세속적인 서양 윤리와 민법에 직접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쳐왔다. 유대인들은 유대인으로 태어난 사람들과 유대교로의 개종자들을 포함하는 민족성의 종교 집단이다.


역사적으로, 특별 법정이 유대인의 율법을 시행하였으며, 오늘날은 이들 법정들이 아직도 존재하지만, 그러나 유대교의 실천은 대부분 자발적이다. 신학적이고 법률과 관련된 문제에 관한 권한은 임의의 한 사람 혹은 조직에 주어져 있지 않고, 성서와 많은 랍비와 이들 텍스트를 해석하는 학자들에게 귀속된다.


 


할라카 는 유대교의 종교적 율법의 총체를 가리키는 낱말이다. 할라카에는 모세 율법, 즉 히브리어 성경인 타나크에 들어 있는 율법들인 613 계명과 후대의 탈무드 율법과 랍비 율법 그리고 유대교의 관습(Jewish customs)과 전통(Jewish traditions)이 포함된다.


모세 율법 은 신이 모세와 맺은 계약에 따라 모세를 통해 고대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었던 율법으로 토라〉?모세오경 또는 펜타튜크라고도 한다?속에 따로 기록해 둔 것을 말한다.


탈무드 율법(Talmudic law)은 탈무드 시대(1-500 CE)의 현자들 또는 랍비들인 탄나임과 아모라임의 가르침에 근거하여 탈무드로부터 유도된 율법이다. 탈무드는 기원후 220년 경에 형성된 미슈나와 기원후 500년 경에 형성된 게마라로 구성되어 있다.


랍비 율법(Rabbinic law)은 랍비 계명이라고도 한다. 후대에 제정된 것으로 총 7 가지가 있다. 모세 율법 613 가지와 합하여 이루어진 총 620 가지의 율법은 유대교의 율법(계명, 미쯔바)을 완성시킨다고 말한다. 탈무드에 따르면 모든 도덕률은 신의 법칙 또는 신의 계명이거나 이들로부터 유도된 것이다.


 


유대교 관습(Jewish customs)은 민하그(히브리어: ????, 영어: Minhag, 복수형: 민하김, Minhagim)라고 한다.


토라의 문자 그대로의 뜻은 "가르침" 또는 "법칙·율법"이다. 토라는 히브리어 성경 또는 구약성경의 첫 다섯 편으로, 창세기·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신명기를 말한다. 모세오경(Five Books of Moses) 또는 펜타튜크(그리스어: Πεντ?τευχο?, 영어: Pentateuch)라고도 한다.


유대교의 전통에 따르면 토라는 모세가 신으로부터 직접 받았거나 또는 영감을 받아 기록한 것이라고 한다. 토라는 유대교에서 가장 중요한 성전이다. 모세가 신으로부터 받았다고 하는 십계명과 모세가 기록하였다고 하는 토라는 유대교의 종교적 토대를 이룬다. 또한 모세는 유대교에서 가장 중요한 예언자이다.[3][4] 모세오경은 단순히 토라라고도 불리며 또는 글로 쓰여진 토라라고도 불린다. 유대교 전통에 따르면, 글로 쓰여진 토라에 담지 못한 내용이 구전 율법 즉 구전 토라의 형태로 전승되어 내려왔다


세속주의 배격·性차별… 유대교의 '하레디'란?

▶유태교 ( 출처 : 가톨릭대사전)
한자 [猶太敎]    영어 [Judaism]   
 

 1. 예비 지식 : 유태교와 유다이즘은 그 특성, 발전역사, 사회적 배경 등을 고찰할 때 결코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유다이즘(ioudaismos)이라는 표현은 2마카 2:21, 8:1, 14:38, 갈라 1:13 이하에서 볼 수 있는데 실제로는 유태교를 의미한다.

   유태교의 기초를 다진 사람은 모세이지만, 성서에 의하면 그 기원은 아브라함에게 있고 이사악, 야곱, 요셉을 거쳐 내려 왔다. 하느님의 자비로 이집트의 노예생활에서 해방됨으로써 야훼의 백성이라는 신앙의 토대가 자리 잡혔고, 이 신앙을 근거로 그 전의 시대는 반성하고 그 후의 시대는 그 신앙의 현장으로 삼았다.
성조들에게 후손을 약속한 것도 이 기본신앙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창세 13:16, 15:5, 26:4 · 24, 28:14, 32:13). 또 그런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상호관계가 약속의 형태로 체험됐기 때문에 유태교는 이 세상에 하느님이 주신 계명, 가르침, 구원을 정치 · 사회 · 경제 ·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증거하려고 한다.
유태교가 하느님이 이 세상 모든 것의 종주(宗主)이고 왕이라는 것을 드러내려 하고 유다이즘이 종교, 학문, 정치, 사회, 문화, 경제 등 모든 분야를 망라하는 복합성을 지니고 있는 이상, 유태교와 유다이즘은 실제 내용상으로는 구분하기가 어렵다.

   유태교에서는 그 신앙의 기본 내용에 따라 이 세상이 하느님의 자비와 약속이 실제화 되고 경험되는 곳이라고 믿으나 이스라엘 땅은 하느님이 주신 약속의 땅으로서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유태교의 또 다른 특성은 현재를 과거에 대한 생각과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조명하며 사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역사 안에 체험된 해방의 약속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리고 이 약속은 미래의 모든 시간적 제약까지 뛰어넘어 유효한 것이므로 종말론적 특성을 갖고 있다. 따라서 유태교에는 현실적 민족적 요소뿐만 아니라 천상적 보편적 요소도 처음부터 있다고 말할 수 있다.

   2. 역사
① 시대 구분 : 유태교는 역사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역사적 변천 과정을 살펴야 한다.
하느님이 이스라엘에 대한 약속의 관계는 구약으로부터, 즉 아브라함, 이사악, 요셉, 출애급과 모세, 판관시대, 왕정 시대, 바빌론 귀양을 망라하는 시기를 전제로 유태교의 근간을 이루며 이어져 왔으나 기원전 587년부터 기원후 70년까지 유태교는 전승된 기본 신앙의 여러 발전 형태를 체험하게 되므로 이때를 엄밀한 의미에서 초기 유태교(Early Judaism)가 뿌리내린 시기로 본다.
초기 유태교 시대를 사람에 따라서는 에즈라와 느헤미야가 활동할 때부터(약 기원전 450년) 탈무드(Talmud)가 완성될 때까지(약 기원후 500년), 혹은 예루살렘 성전이 재건되어 있었던 시대, 즉 약 기원전 500년부터 기원후 70년, 혹은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 때부터(약 기원전 330년) 성전이 붕괴될 때까지(기원후 70년), 혹은 다니엘서가 쓰인 때부터(약 기원전 160년) 하드리안 황제 치하에서의 유태인들의 전쟁 종식까지로 본다. 초기 유다이즘 내지 유태교는 미시나(Mishnah)와 탈무드 시대로 이어지는데 이것은 기원후 70년부터 탈무드가 완성된 6∼7세기까지를 말한다. 중세 유다이즘(Medieval Judaism) 시대는 6~7세기부터 18∼19세기까지의 유태인들의 계몽시대를 말하고 그 이후를 근대 내지 현대 유다이즘시대라고 한다.

 ② 시대 특성 :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스라엘 귀양에 이르는 구약 시대의 유태교 특성으로는 모세와 출애급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이 야훼를 알고 그 자비를 체험하고 미래를 향한 약속의 계약 관계를 들 수 있다.
유태교의 근간을 이루는 야훼 신앙은 야훼를 아직 모르고 있던 아브라함을 비롯한 성조들에게 있어서도 예비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지만 야훼의 계시를 역사 순서로 정리한다면 출애급과 시나이 산에서의 하느님과의 만남이 그 시효가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로써 야훼의 이스라엘에 대한 해방신으로서의 관계가 정립되고 과거 현재 미래를 선택과 약속의 관점에서 정리할 수 있었다. 이 선택과 약속의 길이 십계명이었고, 따라서 이 십계명은 야훼가 해방신으로서의 자신의 모습과 힘을 드러내는 길이고 인간에게는 해방을 체험하게 하고 하느님을 알게 하는 길이었다. 야훼가 이스라엘의 하느님이고 이스라엘이 야훼의 백성이라는 기본사상은 구체적으로 해방이라는 결과를 가져왔고 또 해방을 경험하게 될 때 구체성을 띤다. 이 기본사상이 구약시대의 신관 및 인간관의 요체라 할 수 있고 지금의 유다이즘에 이르기까지 일관되어 왔다고 말할 수 있다.
십계명이 그러하듯 또 다른 종교의 기본 요소인 구약의 여러 제사, 즉 번제, 희생제, 평화제 등과 중요한 축일 즉 빠스카, 안식일, 장막절 등은 추상적 하느님이 아니라 역사 안에서 선택과 해방과 약속을 드러내는 하느님과 관계가 있다. 종교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거룩함의 개념도 위와 같은 견지에서, 하느님의 해방이 기억되고 체험되고 공동체를 형성하게 하는 축일 및 제사와 관련하여 발전되었고, 윤리에 있어서는 정의 실천을 통해 나타났다.

 기원전 587~기원후 70년까지의 초기 유태교의 특징으로 사제 정치를 통한 복구경향, 종말론적 움직임, 그리고 성서공부를 들 수 있다. 복구 경향으로 말미암아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정치 및 예절의 생활 조건을 다시 일으키려 했다.
종말론적 희망은 기원전 3세기 말부터 두드러지게 나타나서 결정적이고 보편적인 구원의 때가 임박했다고 믿게 되었다. 하씨디(열심한 사람들이라는 뜻) 또는 에세니 등은 종말적 구원에 집착해도 마카베오나 하스모네아 그룹보다 민족적 정치적 요소를 덜 강조했다.
성경과 법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과거를 복구하기는 불가능하고 미래를 파악하기도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고유 전통을 고수할 것과 성서를 깊이 연구할 것을 주창하였다. 이 연구 경향이 이스라엘의 개인 생활이나 사회 생활에 깊이 스며들었다. 이런 배경하에서 사제 · 성전 · 종말론에 열광하는 사람들과 연관을 맺고 있던 사두가이파에 반대되는 바리사이파가 생겨났다.
이들은 기도 및 공부에 있어 이스라엘을 교육하는 위치에 있었고 성경 특히 법 공부를 중요시하고 평화를 지향하는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신약성경에 나오는 부정적 표현만을 근거로 이들을 판단하면 안 된다.

   미시나와 탈무드 시대의 유태교는 66∼73년과 132∼135년에 있었던 두 차례의 로마집정에 대한 저항으로 말미암아 박해에 시달려야만 하였다. 성전도 없었다. 초기 유태교 시대부터 있던 시나고가와 공부하는 집이 삶의 중심이 되었다.
랍비들이 민중의 지도자였고 바리사이파 영향을 받은 원칙과 규정이 유태교 전반에 나타나게 되었다. 90년 얌니아에서 열린 유태인들의 공의회(synodus)가 그들의 생활 기본을 정하게 되었다.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산물은 미시나와 탈무드였다.

유태교의 중세기는 6∼7세기부터 8∼10세기까지로 보나 혹자에 따라서는 1492년에 스페인에서 유태인들이 쫓겨난 시대까지로 보는 사람도 있다. 이 시대는 탈무드 영향이 눈에 띄고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와의 논쟁이 불가피하여 고유의 종교철학이 대두되는 때다. 불행히도 중세 그리스도교의 편향성 때문에 유태교는 차별대우를 당하였다.

근대 유태교는 네 가지 경향을 띄운 유다이즘의 영향을 받고 있다. ㉮ 성서와 탈무드적 전승을 고수하려는 정통경향 ㉯ 계몽과 계방을 주장하는 경향 ㉰ 시오니즘과 이스라엘의 옛땅을 발판으로 삼으려는 경향 등이다.

3. 종교적 특성 :
① 유태교는 거의 유태인들의 전유물 같이 되어서, 한 민족에 국한되지 않고 보편성을 띤 종교라고 고집해도 세계종교라 하기에는 사실상의 무리가 따른다. 그것은 모세교도 아니고 법의 종교도 아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당신 백성을 위해 역사 안에 계심을 가르치고, 법뿐만 아니라 메시아에 대한 희망, 신비주의도 내포하고 있는 종교이며, ‘이성의 종교’(Herman Cohen, Moses Mendelssohn)라고 할 수 있다.
법이 강조되기 때문에 법치종교라고 한다면 이스라엘에 있어서 법은 하느님을 알게 하고, 그 자비와 선택, 그리고 해방과 약속을 경험케 하는, 인간 전체에 관한 계시의 가르침이기 때문에 결국 신정(神政)종교라고 할 수 있다. 이 종교는 유태인들의 역사와 연관된 일신론적 종교라고도 할 수 있다.

② 전거 : 유태교의 근본은 ‘토라’(Torah, 法)에 있다. 이 ‘토라’는 단순히 법이 아니고 인간의 삶의 모든 것을 망라하는 가르침이다. ‘토라’가 그들에게는 24권으로 되어 잇는 구약이다. 구전의 ‘토라’도 서전(書傳)과 똑같이 하느님으로부터 왔다.
이것은 특히 약 220년에 Jehuda Hanasi가 집성한 미시나(Mishnah)와 6∼7세기에 완성한 바빌론 탈무드에서 볼 수 있다. ‘미시나’의 자의는 ‘전통’, ‘반복’이라 할 수 있는데 구약과 다른 전통에 대한 공식 주해서이다.
그 내용에 694조의 명령과 금기가 있는데 미시나 자체가 또 주해될 필요가 있었다. 예루살렘 또는 팔레스타인에서 한 주해를 팔레스타인 탈무드(또는 예루살렘 탈무드라고도 함, 대개 400년에 완성됨)라 하고 바빌론에서 주해된 것을 바빌론 탈무드(약500∼550년 바빌론에서 됨)라고 한다. 이 주해를 한 사람들을 amoraim(말하는 사람들, 강연자)이라 일컫는 유태인의 지혜로운 학자들이다.
이들이 예루살렘이나 바빌론에서 한 주해들은 각각 다른 명칭으로 불리고 다른 시대에 완성됐지만 그것을 gemara(완성)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것을 미시나와 합하여 탈무드의 결정적 집성을 하였다. 탈무드는 결국 2개가 있는 셈이고 미시나와 게마라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의 중요한 문전으로 미드라심(midrashim, 찾아냄)과 시나고가에서 하던 기도문이 있다. 미드라심은 설교적인 것(haggada)과 법률적인 것(halakha)으로 구분된다. 이 중에서 법률적인 것이 더 중요하다, 둘 다 성경 본문에 대한 반성을 다루고 있다.
실천을 위해서는 각 시대에 따라 해당되는 성경 본문의 숨겨진 의미를 알아야 하기 때문에 이런 문전이 생겼다. 기도서로는 1세기 말경에 집성된 ‘18 기도’가 유명하다. 하느님께 대한 찬미와 고통받는 유태인 공동체의 희망과 기도가 그 내용을 이루고 있다. 열심한 유태인은 하루 세 번씩 에루살렘을 향하여 이 기도를 받친다.
쓰여진 그리고 입으로 전해진 두 ‘토라’야말로 유태교의 특징이다.

③ 교리와 실천 : 그리스도교에서 교조(Dogma)라고 일컫는 것과 같은 교리는 유태교에 없다고 볼 수 있다. 오히려 유태인들의 실제 생활에 영향을 끼치는 기준, 또는 행동을 조직화 하였다고 볼 수 있다. 믿을 교리를 조항으로 만들기보다는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데 주안점을 둔다. 원죄 개념도 없다. 
그 대신 선에 대한 개념과 악의 경향에 대한 가르침이 있다. 내세에 대한 교리도 그리스도교에서 만큼 강조되지는 않는다. 유태교를 열심히 신봉하는 자는 하느님의 요구와 약속에 자신을 밭기는 자이고 따라서 이스라엘의 특권과 희망에 연대감을 갖고 있는 자이다. 하느님과 전통과 공동체에 충실한 것을 알게 하는 의적 표지는 할손례라고 할 수 있다(창세 17장, 신명 10:16, 30:6, 예레 4:4, 에제 44:7-9 참고).
그외 안식일과 여러 축일의 준수, 기도 생활, 종말 구원에 대한 희망 등은 하느님과의 이스라엘간의 계약에 충실한 태도이기도 하다.

그들이 지키는 축일로는 안식일(토요일) 외에 오순절, 빠스카, 장막절, 신년 속죄일, 에스텔 왕후 덕분으로 페르시아로부터 구원받은 것을 기념하는 Purim이라는 축일, 기원전 165전에 유다스 마카메우스가 재건된 성전을 다시 축성한 것을 기념하는 성전 봉헌 축일(Hanukha) 등이다. 속죄일에는 재를 지켜가며 기도를 드린다. 빠스카는 이집트에서 해방된 것을 기억하고 장막절에는 40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하던 것을 기념하고 오순절을 빠스카 후 50일후에 오는 추수감사의 의미이다.

유대교의 윤리는 십계명이 그 근간을 이루고 있고(출애 20장, 신명 5장 참고) 신명기 5-26장도 그들의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고 특히 신명기 6:5에 나오는 하느님을 극진히 섬겨야 한다는 계명은 가장 중요한 것이다. 이 계명 때문에 다른 사람도 지극히 사랑해야 하고 특히 고아 · 과부 · 외국인에게 친절을 베풀어야 한다는 윤리를 세우게 되었다.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이스라엘을 구하셨으며 인간을 당신 모상으로 만드시고 역사의 주인이라는 가르침과 그 외의 전통적 가르침을 유명한 유태인 신학자 마이모니데스(M. Maimonides, 1135~1204)는 13개 조항으로 정리하였다.
㉮ 하느님은 천지를 조성하고 세상의 섭리주다.
㉯ 그는 유일하다.
㉰ 그는 영적존재로 어떤 모양으로도 표현될 수 없다.
㉱ 그는 영원하다.
㉲ 그에게만 우리는 기도를 드려야 한다.
㉳ 이스라엘 예언자의 모든 말은 진리다.
㉴ 모세는 모든 예언자 중 제일 위대하다.
㉵ 유태인이 갖고 있는 법은 하느님이 모세에게 주신 것이다.
㉶ 아무도 이 법을 대차하거나 수정할 수 없다.
㉷ 하느님은 인간의 모든 행동과 생각을 아신다.
㉸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상을 주시고 범하는 자는 벌하신다.
㉹ 예언자가 말한 메시아를 보내신다.
㉺ 죽은 자에게 영생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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