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와 칼뱅-그들은 누구인가?

2015. 4. 4. 오후 7:2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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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와 칼뱅-그들은 누구인가?

-개신교도들의 이단처형과 마녀사냥의 참혹성에 관하여

세계-지구촌(Texas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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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란 직업(?....?.....사실 사제는 돈과 사회적신분을 획득하는 직업이 아니라,사회적인 부와 명예를 포기하는 곳에서 부터 정상적인 그리스도신앙을 양들에게 가르치고 이끌어주는 사제의 자질이 가능해진다. 그래서 사제를 절대로 직업이라고 칭할 수 없다.)에 부적절한 인간이지만,무엇을 해먹고 살아야 육신이 편한가에 관한 - 시대의 조류 파악에 특별하게 탁월했던 그의 부친 덕택에 <신분상승제도>로서의 사제직을 활용해서 권력과 부를 움켜 쥔 <가장 전형적인 인물>이 바로 칼뱅(루터)이다.

........................오늘날 개신교 목사들이 돈벌기에 가장 안전하면서,육신이 편안한 직업으로 선택한 신학교.....거기서 수업 받고 난 후,신자들 모집해 놓고 돈 긁어 모으는 모습의 본보기인 셈....이렇게 개신교목사들이,진정한 그리스도신앙을 모르는,세상사람들에게 <예수님과 카톨릭교회>까지 포함한 그리스도신앙을 추악한 몰골로 변질시키는 경우와 완전 일치..............이런 역사자료를 통해서,개신교목사들이 그렇게 타락할 수 밖에 없는,그 이유가 바로 루터와 칼뱅이 만든 집단이기 때문이다................

그의 아버지가 어떻게 카톨릭 신자가 됐으며,그가 자기 아들들을,특히 칼뱅(루터)을 어떻게 재정적인 지원을 해서 사제로 양성해 나가는지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이것이 그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제자리를 탐냈고,사제가 되어 극도의 부패사회를 만들어 낸,가장 기본적인 사례에 속하기 때문이다.,그럼 먼저 칼뱅(루터)의 아버지와 그의 형제자매들에 관한 내력부터 살펴보자.

<칼뱅의 아버지 제라르 꼬뱅(Gérard Cauvin)>    교회 서기였으며 어머니 쟌느 르프랑(Jeanne Lefranc)은 칼뱅이 어릴 때 사망했다. 칼뱅의 어머니는 깜브레(Cambrai)의 여인숙 주인의 딸인 쟌느 르 프랑끄(Jeanne Le Franc)이었다. 제라드는 노용에서 2 마일 쯤 떨어진 항구로서 외스(Oise)강을 가로지르는 퐁 레베크 (Pont l'Eveque)라는 작은 마을에서 사공(boatman)을 하거나 아니면 물통을 만들고 수리하는 일에 종사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일반적으로 칼빈은 아버지의 예리하고 조직적인 두뇌를 물려받았으며 특히,그의 용모는 아버지를 닮았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누와용 주교 비서 그리고 후에 대성당 참사회 소송 대리인과 그리고 주교의 재정 공중인이 되었다. 이렇게 교회와 관련된 제라드의 직업은 부르주아로 신분의 상승을 의미하였고 노용에 있는 귀족들과 좋은 관계를 갖게 했고 후에 칼빈으로 하여금 귀족들의 자녀들과 함께 교육을 받는 계기가 된다

제라르과 잔느 르프랑 사이에는 5명의 아들이 있었다. 첫째 샤를르(Charles)는 로마 가톨릭 사제가 되었지만 1537년 이단으로 고발되어 파문된 채 사망했다. 둘째가 칼뱅이었고, 셋째인 앙뚜완느(Antoine)는 제네바에서 칼뱅과 합류하여 칼뱅의 신실한 협력자로 일했다. 그리고 다른 두 명의 동생인 앙뚜완느와 프랑수와(François)는 어린 나이에 사망했다

<루터의 가족에 관한 자료>.......1483년 11월10일 독일 작센지방의 아이슬레벤에서 광부인 한스의 아들로  태어난 마르틴 루터 -원래는 아버지 한스는 농부의 집에서 태어나,가난을 면하려고 광부가 됐다.동물적인 사업감각을 이용해서 광산업계의 큰 손이된다. 부를 쌓았지만 여전히 자신의 신분은,존경의 대상이 아닌, 경멸의 대상인 노동자 신세다.그 당시 한스같은 하류의 노동자들에게 신분상승을 하는 방법은 법률가가 되거나 사제가 되는 길이 가장 지름길이었다.이런 까닭에 그가 카톨릭에 입문했고 아들들을 법률가나 사제로 만들기 위해 집념을 불사른다.
 
마르틴 루터의 전기에 나온 약력과 간단한 가족사항  - (Martin Luther, 1483~1546). 그의 부모는 그가 태어나기 전,그 마을로 이주, 원래 살던 곳은 튀링겐 지역의 아이제나흐 근교였다. 그의 부모는 무척 가난했고 사회적 신분상승을 위해 노력하는 야심찬  사람들로서 루터를 포함해 7명의 자녀를 키웠다.(아들4명, 딸3명)..루터는 주의 기도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문장에 부담을 느낄만큼 엄격한 아버지의 그늘에서 자랐다고 전해진다. 루터의 아버지는 아들을 법률가가 되어 사회적 성공을 하게 하려고, 에르푸르트 대학교에 입학시켰다....터의 부모는 자녀들에 대해서 커다란 야심이 있었다. 저들은 가문의 미래를 위해서 아이들이 잘되기만 한다면 무엇이든지 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아버지 한스가 아들 마르틴을 재정적으로 후원하는 오직 한 가지 이유는 가문의 영광과 신분상승이었다.그런  까닭에 노랭이 기질의 독일인 한스는 아들에게 상당한 액수의 돈을 투자할 수 있었다.이러한 전격적인 부친의 재정적인 후원으로 루터와 그의 동생은 대학에 들어가서 공부하게된다.  아버지가 꿈꾸는 신분 상승용도로 시작된 철학과 종교계의입문.성령의 힘으로 연구하는 말씀이 아니라 자기 취향에 맞는,교회의 권위를 무시하고 성사를 부정하며, 오직 성경으로라는 - 성경해석(교회 없는 성경이 어디 가능한가? 성경말씀은 인정해도 교회권위는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은,성경이 어느날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는 논리가 된다.)을 하게 된다.<영지주의>적인 성경 해석은 성령에 의한 <말씀해석>이 아니라서 결국 악마의 속삭임으로 넘어가게 된다.

이러한 현상이 바로 암흑시기로 규정되는 중세 유럽사회의 지식인들이 걷고 있던 방식이었다. 이렇게 유럽에서 시작된 신분상승용으로 공부하는 <성경>은 오늘날 개신교까지 이어진다. 하느님의 <인류사랑-이웃사랑과 관용>의 말씀이 독선으로 가득찬 폭력이 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이렇게 자비심이라곤 전혀 없었던 돈벌레들이었던 루터의 부모가 얼마나 싸이코기질을 갖고 사는 사람인지에 관한 자료는 한국자료에서는 거의 찾기가 힘들었다.그래서 일단 부모들의 싸이코기질에 관한 영문자료들을 퍼다가 나중에 한가하게 번역할 예정이다.루터가 어린시절에 받은 학대와 폭력은 결국 마녀사냥에서 저토록 잔인할 수 있는 일종의 <정신적인 상처-트라우마>의 발현이다.
그리고 이건 루터에게 국한된 사항이 아니라 바로 네델란드인들,영국과 독일인들의 그 당시 가풍이었다.특히 독일지역의 카톨릭신앙은 광신적인 문화로서 나중에 <아돌프 히틀러>가 나오는 배경이 된다.히틀러를 지지한 사람들이 이렇게 루터처럼 트라우마를 간직한 살인마들-개신교신자였다.히틀러처럼 카톨릭교도였던 부모(?사생아라서 이리부르는것도 의미가 없다)들을 극도로 혐오한 독일인 2세들-그들로 구성된 <개신교인들>의 정신착란증상이였다.
유태인을 죽일 권리가 부여된 냥 쾌락을 만끽하며 유태인학살에 앞장서던 개신교도들,그들이 받은 정신적인 상처는 결코 하루이틀만에 치유될 그런 성질은 아니다.카톨릭사제직을 탐하던 조상들에 의해 구성된 사회와 그 속에서 만들어진 문화.....그것들의 발현이 바로 저 광란의 1800년도 유럽사회 모습이다.
 
펌질-개신교도 마녀 사냥에 관여한 증거 
이 자료와 기타 자료들을 활용해서,나중에 다른 포스팅에 내 의견으로 종합편집해서 따로,더 글을 올릴 예정임.일단 참조용.....
..........물론 마녀 사냥은 카톨릭에 반기를 든 개신교에서도 그 명맥이 유지된다. 미국의 역사을 뒤집어 보면 이러한 마녀 사냥들이 연결이 되고 있으며 개신교의 아버지 루터에 있어서도 마녀 사냥은 발견된다.
.....
물의 요정이라 불리는 악마들이 얼마나 자주 성숙한 여인들과 소녀들을 물속으로 유인해서 그들과 공포스러운 결말로 끝나는 관계를 맺었는가......이건 개천에서 목욕하다 들킨 여자들을 정결치 못하다 하여 마녀로 몰아 화형식을 준비하면서 루터가 그 여자들을 향한 말이다.
 
한편 폴터스베르에 일어난 농민 반란과 농민들의 불만이 하늘을 찌르자 루터는 이러한 농민들을 향해 "신이 예정하신바 평등을 논하는 것은 악마들의 짓" 으로 일축하며 이들을 진압한다. 그러나 아직 남아있는 불씨을 꺼트리기 위해 정치적 수단으로 마녀사냥으로 폴터스베르에서 마녀사냥을 잘 이용한 역사는 기록되어 있다.루터와 마녀사냥을 이야기하자면 신교국의 마녀재판관 베네딕트 칼푸초프 종교개혁 거점의 하나인 독일은 가장 가혹하고 격렬한 마녀재판의 본고장이었으며 그 독일에서 마녀사냥이 가혹하고 격렬해진 것은 종교개혁으로부터이자 신교도의 손에 의해서였다.
마녀재판은 중세 전기의 암흑시대가 아닌 중세 말기 르네상스의 움직임과 함께 시작하여, 1600년을 중심으로 하는 1세기간은 마녀사냥의 절정기인 동시에 또한 르네상스 운동의 절정기이기도 했다. 그리고 르네상스가 그 위대한 사업을 완전히 끝낼 무렵에는 마녀재판도 어느새 그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그 무렵은 근대사의 제 1장을 장식하는 실증주의와 휴머니즘의 전사들이 기라성처럼 늘어서 있었다. 때문에 이 암흑재판의 종멸을 이들 전사들의 통렬한 항의에 의한 것일 것이라고 기대해도 부자연스럽지는 않다. 그러나 이 기대는 완전히 배반당한다. 그 전사들 중 어떤 자는 암흑재판의 열렬한 지지자이고, 또 어떤 전사들은 소극적인 지지자였다. 그외의 전사들은 침묵하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는 이것도 소극적 지지자 안에 넣어도 좋을 것이다.) 만약 종교개혁을 종교에 있어서의 르네상스라고 한다면, 종교적 르네상스인은 모두 열광적인 마녀 재판관이었다. 루터도 칼빈도 메란히튼도... 렛기(전술)에 의하면 에라스무스조차 "악마의 실재를 굳게 믿고 있었다"는 것이다.
 
휴머니즘과 실증주의의 르네상스시대는 한편으로는 잔학한 미신의 시대였다. 이 역설은 르네상스인 자신이 중세와 근대를 그 정신 안에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는 것에 기인한 필연적인 귀결이었다. 르네상스인은 예외없이 신비주의자였다.
스코틀랜드의 경우, 종교개혁 이전에는 단 한 건의 마녀 화형이 일어나지 않았으나 신교도인 제임스 6세의 명령으로 마녀들에 대한 처형이 시작된다.잉글랜드에서도 엘리자베스 1세가 1563년 마녀사냥 강화령을 반포하면서 본격적으로 마녀재판이 열리기 시작하고, 제임스 1세(바로 스코틀랜드의 왕인 제임스 6세)가 1604년 강화령을 발표함으로써 더욱 격렬해집니다. 이후 청교도 지배 시대에는 절정에 달하게 된다.
아일랜드에서는 구교 세력이 압도적으로 강하여 1314년 최초의 재판에서부터 1711년 최후의 재판까지 단 5건이 있었으나, 이 가운데 최초의 재판을 제외한 나머지 네 건은 모두 신교도들이 주도합니다.독일의 경우, 마녀사냥이 심해진 곳은 대부분 종교개혁의 물결이 휩쓸고 지나간 곳입니다. 즉 신교를 받아들인 지역에서는 구교도를 모두 마녀로 몰아 태우는 형국입니다. 독일에서는 서로(신교는 구교를, 구교는 신교를)를 이단자로 몰아 열심히 태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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