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뱅(예수님이 뽑아서 버린 가라지)과- 예정론을 까발려보자
<칼빈주의Calvinism>....네이버 백과사전.....칼뱅은 신앙에 의한 의인(義認), 신앙의 유일한 규준(規準)으로서의 《성서》 등, 루터의 사상을 계승하고 동시에 독자적인 사상을 발전시켰다. 신의 절대적 주권을 강조하는 신관(神觀), 구원을 받는 자와 멸망에 이르는 자는 영원한 옛날부터 신에 의해 결정되어 있다고 하는 예정설(豫定說), 성찬(聖餐)에서는 루터의 말처럼 빵과 포도주 속에 그리스도가 현존하는 것이 아니며, 츠빙글리가 말하듯 그것들이 그리스도의 혈육을 상징하는 것도 아니고, 오직 성령(聖靈)의 힘으로써 영적으로 관여한다고 하는 성찬론 등이 칼뱅 신학의 특징을 이룬다. 신앙생활에 있어서는 자기를 신의 용기(容器)로 보는 루터의 수동적인 경건에 대해, 자기를 신의 영광을 위한 도구로 보는 활동주의적 경향을 가졌으며, 사회생활에서의 적극적인 태도를 창출하였다. 또한 루터가 국가권력을 영광화(榮光化)하는 경향을 띤 데 반해, 칼뱅은 저항권을 인정하고 국가에 대한 교회의 자유를 확보하였다. 예배에 관해서도 가톨릭 교회의 미사를 폐지하고 예배를 설교 중심으로 만들었으며, 교회제도에 관해서는 목사 ·교사 ·장로 ·집사 등 4개의 직무를 정하고, 목사와 장로로 이루어진 콘시스토리움에 따라 교회가 운영되도록 하였다.
칼뱅의 사상은 스위스뿐만 아니라 유럽 각지에 파급되어 독일 ·네덜란드 및 기타 국가의 개혁파, 프랑스의 위그노파, 스코틀랜드의 장로파, 잉글랜드의 퓨리턴 제파(장로파 ·독립파 ·뱁티스트파 등)를 탄생시켰다. 또 이러한 칼뱅주의의 전개 속에서 신학적인 발전과 변모를 볼 수 있는데, 그 주요한 것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즉, 신의 예정을 인류의 조상인 아담의 타락 이전으로 보는 것과 그 이후로 보는 것과의 대립, 그리스도의 죽음을 구원받기로 정해진 자만을 위한 것으로 보는 것과 만인을 위한 것으로 보는 것(아르미니위스주의)과의 대립, 천지창조로부터 완성까지를 신과 인간과의 계약의 실현과정으로 보는 계약신학의 성립 등이다. 이와 같은 발전과정에서 칼뱅주의는 근대 서유럽 문화 형성에 커다란 역할을 했으며, 근대 민주주의 형성과 근대주의 ‘정신’에 대해, 트뢸치나 M.베버가 지적한 바와 같이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아버지는 누와용 주교 비서 그리고 후에 대성당 참사회 소송 대리인과 그리고 주교의 재정 공중인이 되었다. 이렇게 교회와 관련된 제라드의 직업은 부르주아로 신분의 상승을 의미하였고 노용에 있는 귀족들과 좋은 관계를 갖게 했고 후에 칼빈으로 하여금 귀족들의 자녀들과 함께 교육을 받는 계기가 된다.제라르과 잔느 르프랑 사이에는 5명의 아들이 있었다. 첫째 샤를르(Charles)는 로마 가톨릭의 사제가 되었지만 1537년이단으로 고발되어 파문된 채 사망했다. 둘째가 칼뱅이었고, 셋째인 앙뚜완느(Antoine)는 제네바에서 칼뱅과 합류하여 칼뱅의 신실한 협력자로 일했다. 그리고 다른 두 명의 동생인 앙뚜완느와 프랑수와(François)는 어린 나이에 사망했다.
1527년 칼뱅의 아버지는 누와용의 교회 참사회와 직무상의 일로 인해 마찰을 빚게 되었다. 그는 교회와의 마찰로 장학금이 취소될 지 모른다는 우려와 아들의 출세를 바라는 마음 때문에 칼뱅에게 신학보다는 법학을 공부하라고 권유했다.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칼뱅은 1528년 초 무렵 유명한 법학자 피에르 드 레스뚜왈이 강의하는 오를레앙 대학교로 옮겼다. 레스뚜왈의 유식함은 칼뱅에게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오를레앙에서 칼뱅은 멜키오르 볼마르로부터 그리스어를 배웠다. 이 기간에 사귄 다른 친구들로는 프랑수와 다니엘, 프랑수와 드 꼬낭, 니꼴라 뒤쉐맹등이 있다. 1529년 여름에 칼뱅은 친구 프랑수와 다니엘, 니꼴라 뒤쉐맹과 함께 부르쥬 대학교로 옮겨 갔다. 그곳에서는 역사학파의 설립자이며 법학자이자이자 인문주의자인 이탈리아 사람 안드레아 알키아티의 강의를 들었다.
칼뱅은 1531년 3월 니꼴라 뒤쉐맹의 <반박문>을 가지고 파리로 돌아갔다. 그는 1531년 3월 6일에 이 책의 서문을 썼다. 이것이 칼뱅의 첫 출판물이 되었다. 칼뱅은 파리에 머무는 동안 아버지가 매우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곧장 누와용으로 달려갔다. 그의 아버지는 1531년 5월 26일 사망했다. 그의 아버지는 사망하기 2년 전 로마 가톨릭 교회로부터 파문되었기 때문에 칼빈의 형 샤를르는 아버지를 교회 묘지에 매장하기 위해 교회의 참사회와 협상하여야 했다. 1530년 파리로 돌아간 칼뱅은포르떼 대학에 정착하여 히브리어를 공부하였다. 1532년 4월 4일 칼뱅은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의 <관용에 관하여>를 주석하여 출판했다. 1532년 그는 다시 오를레앙으로 돌아와 법률 공부를 마쳤다.
만성절(모든 성인의 날)인 1533년 11월 1일, 새 학기를 시작하는 공식 석상에서 니꼴라 콥은 교수들과 고위 성직자들 앞에 두고 기독교적 철학, 그리고 법과 복음의 관계 등에 관해 비판적인 연설을 하게 되었다. 파리 국회는 연설내용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으며, 해명을 위해 소환 당하기 전에 니꼴라 콥은 도시를 빠져나갔다. 국왕 프랑수와 1세는 “저주받은 루터 이단”을 박해하기로 결심했다. 칼뱅도 자신의 도서들과 편지들을 남겨 둔 채 당국에 체포되기 전에 도시를 몰래 빠져나갔다. 그는 파리 근교에 머물다가 다시 도시로 돌아왔다. 그리고 1533년 말 혹은 1534년 초 즈음에 파리 남부의 생통쥬지방으로 갔다. 칼뱅은 샤를르 데스뻬비여(Charles d'Espeville)라는 가명을 사용하면서 상당 기간 클레교구 목사이자 앙굴렘에 있는 개신교 교회의 참사회원이었던 루이 뒤 띠예(Louis du Tillet)의 집에 머물렀다. 이곳에서 칼뱅은 《기독교 강요》 초판을 구상하였다.
1534년 4월 칼뱅은 80세가 된 르페브르(Jacuques Lefèvre d’Etaples, 1536년 사망)를 방문하기 위해 네락(Nérac)으로 갔다. 르페브르는 마지막 시간을 네락에 있는 앙굴렘의 마르거리뜨 소유의 성에서 보내고 있었다. 칼뱅은 또한 클레락(Clairac)의 수도원에 살고 있었던 궁정 설교자 제라르 루셀도 방문하였다. 1534년에 칼뱅은 여러 가지 성직록에서 비롯된 수입을 포기했다. 그 당시에는 25세가 되어 공식적으로 교회 봉사에 입문하지 않으면 성직록을 포기하는 것이 관례였다.
칼빈은 파리 근교에 머무르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에띠엔느 들 라 포르쥬 그룹을 방문했다. 그곳에서 아마도 플람스의 설교자이자 유명한 재세례파교회의 지도자인깡뗑 티프리를 만났을 것이다. 파리에서 약학을 공부하고 있었던 미카엘 세르베투스는 칼뱅을 만나고 싶어 했지만 그가 칼뱅과 만나기로 한 약속은 성사되지 못했다. 세르베투스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칼뱅은 뒤 띠예와 함께 끌레를 경유하여 푸와티에르(Poitiers)에 있는 지지자들에게 갔다. 그리고 칼뱅은 그 곳 도시 외곽 생-브누와(Saint-Benoît)에서 설교를 하기도 했다. 칼뱅은 푸와티에르를 떠나 뒤 띠예와 함께 오를레앙으로 여행 했으며 <영혼불멸>을 집필했다.
1534년 10월 17일-18일 밤 성만찬때 면병과 포도주가 예수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화체설 교리에 반대하는 과격한 벽보가 파리 전체(심지어는 왕의 침실 문에도)와 전국 각지에 나붙었는데, 이것이 저 유명한 플래카드 사건 즉 벽보 사건이다. 이 문서의 기안자는 앙뚜완느 마르꾸르였다. 그는 리용에서 추방된 후 뇌샤뗄의 주교가 되었다.
프랑스 왕 프랑수와 1세는 인문주의자 기욤 뷔데의 권고 등으로 인해 일단의 조치를 취했으며 파리에서의 상황은 점점 더 험악해져 갔다. 11월에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체포되었고, 몇 달 동안에 많은 사람들이 처형되었는데 그 가운데는 칼뱅의 후원자요 절친한 친구인 에띠엔느 들 라 포르쥬도 포함되어 있었다. 칼뱅과 뒤 띠예는 개신교에 대한 탄압을 피해, 스트라스부르를 거쳐 바젤로 갔다.
칼뱅은 바젤에서 마르티아누스 루카누스(Martianus Lucanus)라는 가명으로 지냈다. 당시 그의 동료로는 바젤의 개혁가 요하네스 외콜람파디우스의 후계자 오스발트 미코니우스(Oswald Myconius)와 스트라스부르크의 목사인 볼프강 카피토 등이 있다. 칼뱅은 이 외에도 학자 세바스티안 뮌스터, 변호사 보니파키우스 아메르바흐, 미래의 제네바 동지인 피에르 비레 등과 친분을 쌓았다. 1536년 2월에는 하인리히 불링거와도 사귀게 되었다. 1535년 6월 바젤에 정착하여 1536년에 7월 12일에 사망한 에라스무스를 칼뱅이 만났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535년 6월 4일에는 올리베땅에 의해 불어 성서 번역본이 출판되었다. 라틴어로 된 추천 서문은 칼뱅이 직접 작성한 것이었으며 신약성경 앞에 나오는 두 번째 추천 서문은 익명이지만 1545년 이후부터는 칼뱅의 것으로 간주된다. 칼뱅은 이 번역본의 개정 작업에도 참여했다. 이 기간에 칼뱅은 고대 교회의 교부중 한 명인 크리소스톰 주교의 설교집에 추천 서문을 썼으며 《기독교 강요》의 초판 작업도 계속해 나갔다. 《기독교 강요》는 1535년에 완성되었다. 칼뱅은 이 책을 프랑스의 국왕 프랑수아 1세에게 헌정하였다. 《기독교 강요》의 라틴어 초판은 1536년 3월 바젤에서 출판되었으며 빠른 속도로 전파되었다. 이 작품으로 칼뱅은 종교개혁의 주도적인 신학자가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