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10-30 ㅣ No.55
세례명에 대해 알고 싶은 몇 가지
우리는 세례성사를 받을 때 새 이름을 짓습니다.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했던 그 사실을 두고 한번쯤 '왜 그럴까?' 하고 궁금해 한 적은 없었나요? 세례명에 대해 알고 싶었던 몇 가지 궁금증들을 한번 풀어봅시다.
세례명을 짓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면 제일 먼저 이름을 지어줍니다. 이름을 골라 짓는 것은 그 이름에 걸맞은 훌륭한 사람으로 자라라는 바람이 들어있는 것이지요.
세례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세례 때 새로운 이름을 받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태어남을 의미하지요. 곧 그 이름에 걸맞게 변화하기를 기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훌륭하게 살다 가신 성인의 이름을 따서 일생 동안 그 성인을 자신의 수호성인으로 특별히 공경하고 보호받으며, 그 품행과 성덕을 본받으려 노력하게 됩니다.
세례명은 꼭 성인 이름을 따야 하나요?
르네상스 시대에 유럽에서는 이교도의 이름들이 세례명으로 쓰이기도 했답니다. 특히 동방교회에서 이런 현상이 많았는데 교회는 이것을 우려하여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년) 제25회기에서 그리스도교식의 이름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래서 공의회 이후 공포된 로마 교리서에서는 이교적이고 우상 숭배적인 이름을 지어주지 말 것과, 세례명을 반드시 성인의 이름으로 지어줄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러나 현 교회법에서는 "부모와 대부모 및 본당 사목구 주임은 그리스도교적 감정에 어울리지 아니하는 이름을 붙이지 아니하도록 보살펴야 한다."(855조)라고 규정하면서, 각 지역 문화권에 상응하는 이름과 그리스도교적 뜻을 붙일 수 있는 이름을 세례명으로 할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는 "신입 교인에게 새 이름을 처음부터 주는 풍습이 있는 비그리스도교 지역에서는 주교회의의 결정에 따라 예비 신자가 될 때에 즉시 새 이름을 줄 수 있다. 성인의 이름이나 지역 문화권에 상응하는 이름을 줄 수 있다."(어른 입교 예식서 88항) 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세례명을 짓는 전통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나요?
3세기 중엽 이후 성서에 나오는 인물의 이름이나 성인, 순교자 이름을 붙이는 것이 관례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4세기초부터 본래의 이름 외에 새 이름을 짓는 관례가 널리 퍼졌는데 요한 크리소스토모(347-407년)와 암브로시오(339-397년) 성인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자녀들의 이름을 아무렇게나 짓는 것을 꾸짖으면서, 그리스도교의 덕이 높고 하느님을 충실하게 신뢰하여 교회에서 공경하는 이들의 이름을 따서 짓거나, 보호와 중재를 받을 목적으로 순교자들이나 성인들의 이름을 따서 짓도록 권하였습니다. 빈 공의회(1311-1312년)에서 유아세례가 합법적인 것으로 선언된 이후부터는 세례성사 때 세례명을 받는 것이 공식적으로 정착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세례명은 바꿀 수 있나요?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남을 의미하는 세례명을 바꾼다는 것은 세례성사의 의미를 잘 모르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설정하신 세례성사를 통해 우리는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새사람이 되었다는 의미로 갖게 된 이름을 부정해서는 안되겠지요.
영명축일은 어떻게 지내는 것이 좋습니까?
생일은 거창하게 지내면서 가톨릭 신자로서 영명축일은 그냥 모르고 지나간다면 안되겠지요. 미사에 참석해 성체를 영하고, 자신의 세례명이 성인의 이름일 때는 그 성인의 일생을 묵상하면서 자신의 현재 신앙생활을 돌아보는 기회를 가지는 것이 좋겠지요. 그리고 가족이나 가까운 친구들과 간단하게 기도 모임을 겸한 축하연을 하는 것도 뜻깊은 일이 될 것입니다.
세례명은 누가 정해야 합니까?
꼭 신부님, 수녀님이 정해주어야 하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유아세례를 받은 경우에는 스스로 이름을 지을 수 없으니까 부모님이나 대부모 또는 신부님, 수녀님이 지어주셨겠지요. 하지만 의사를 결정할 수 있는 나이라면 원하는 세례명을 자신이 정해도 상관없습니다.
성직자, 수도자들은 세례명말고 수도명을 따로 정하기도 하는데 이유는 무엇입니까?
알려진 바로는 적어도 6세기경부터 수도생활을 시작하려는 지원자들이 입회하면서 새로운 이름을 지었다고 하며, 동방교회에서는 자신의 이름과 머리글자가 같은 성인의 이름을 수도명으로 갖는 관습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수도명을 갖는 것은 그리스도께 봉사하기 위해 새로운 한 인간을 온전히 봉헌한다는 의미 외에 세속적인 자신과 이전의 생활양식을 완전히 끊어버리려는 결심이 들어있습니다.
더 자세히 알고 싶으시면 다음 문헌을 참조하세요.
[교회법 해설-교회의 성사법, 정진석,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한국 천주교 사목 지침서 해설, 정진석,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어른 입교 예식서,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한국 가톨릭 대사전, 한국교회사연구소]
[그건 이렇습니다, 김영배, 성바오로]
[경향잡지, 1999년 10월호]
2004-11-24 ㅣ No.81
유아 세례를 언제 받아야 하나?
1. 왜 유아 세례가 줄고 있는가?
유아 세례가 줄고 있다. 통계에 의하면 전체 신자수대 유아 세례율은 1960년 3.9%(451,808명 신자 중 유아 세례 17,658명)에서 2002년 0.64%(4,347,605명 신자 중 유아 세례 28,075명)로, 전체 신자수는 9.6배가 증가한 반면 유아 세례율은 무려 6배나 감소하였다. 그러한 감소의 가장 큰 원인은 출산율이 계속 줄어들었기 때문이고, 또한 유아 세례의 중요성을 부모들이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녀들이 성장해서 자신의 종교를 선택하게 하겠다는 부모들도 적지 않다.
2. 유아 세례의 필요성은 무엇인가?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베풀 사명을 받은 교회는 일찍이 초세기부터 어른들뿐 아니라 어린이들에게까지 세례를 주어왔다. 이유는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한 3, 5) 하신 주님의 말씀을 어린이들에게도 적용된다고 알아들었기 때문이며, 어린이들도 원죄로 타락하고 더러워진 인간의 본성을 지니고 태어나므로 세례를 통하여 죄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야 하기 때문이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213항. 1250항 참조). 부모는 자녀들에게 생명을 주었으므로 그들을 교육할 지극히 중대한 의무와 권리가 있으며, 따라서 신자 부모는 우선적으로 교회의 전승된 가르침에 따른 자녀들의 신앙 교육에 힘써야 할 소임이 있다(교회법 제226조 2항 참조).
따라서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는 1995년에 교회법 규정에 따라 다음과 같이 유아 세례 규정을 공포하였다.
“부모는 아기의 출생 후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세례받게 하여야 하고 100일을 넘기지 말아야 한다”(한국 천주교 사목 지침서, 제47조).
“아기가 죽을 위험이 있으면 지체 없이 세례받게 하여야 한다. 아기는 그 부모가 비가톨릭 신자이거나 원치 않더라도 세례받게 할 수 있다”(한국 천주교 사목 지침서, 제48조).
“버려진 아기나 주운 아기는 세례받은 사실이 불확실하면 세례받게 하여야 한다”(한국 천주교 사목 지침서, 제49조).
“유산된 태아가 살아 있으면 기형이나 형태를 갖추지 못하였어도 세례받게 하여야 한다”(한국 천주교 사목 지침서, 제50조).
3. 부모의 동의가 필요한가?
“아기가 합당하게 세례받기 위하여는 부모 중 적어도 한 사람 또는 합법적으로 부모를 대신하는 이의 동의가 있어야 하며, 아기가 가톨릭 신앙으로 양육되리라는 희망이 있어야 한다”(한국 천주교 사목 지침서, 제51조 1항).
“미성년자가 세례받기를 원하는 경우에는 될 수 있는 대로 부모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한국 천주교 사목 지침서, 제51조 2항).
4. 어디서, 언제 유아세를 받는가?
“아기의 세례는 본당에서 지정된 날에 여럿이 함께 받을 수 있도록 미리 신청하여야 한다. 부모와 대부모는 이 성사의 의미와 이에 따른 의무를 합당하게 준비하여야 한다”(한국 천주교 사목 지침서, 제52조).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교회법위원회 제공 (02-460-7621)
2006-10-25 ㅣ No.103
세례성사
본당에 세례성사가 있는 날은 여전히 잔칫집 분위기가 난다. 꽃다발 하며 여러 가지 성물들 십자가, 묵주, 성상 그리고 교회 서적들이 새 영세자들에게 선물로 주어진다. 기념사진을 신부님들 수녀님들과 함께 폼나게 찍고 가족들과 대부모들이 함께 모여 맛있는 것을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물론 의미 있는 나눔들이며 그곳에 구원의 기쁨이 함께 있음을 고백하는 아름다운 모습임에는 틀림없다.
세례 성사에는 이와 같이 충만한 기쁨이 가득 넘친다. 그리고 그러한 기쁨은 죽음을 뛰어넘었다는 통과(Pascha)의 축제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죽음을 뛰어넘었다는 고백은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이 세상을 살면서 죽어야 할 운명임에도 세례성사를 통해서 그것을 뛰어 넘을 수 있다니 세례성사는 참으로 기쁘고 의미있는 사건인 것이다. 죽음을 뛰어넘는다는 이 대사건은 죽음의 체험에서 출발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죽음을 통해서 완성되듯이 세례성사도 죽음을 통해서 구원이 이르게 됨을 선포한다. 즉 죄에 대해서 죽고 생명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다. 초대교회의 세례예식은 침례로 거행되었다. 깊은 물속에서 온몸을 다 담근 채 성사를 주고 받았다는 것이다. 주례자는 영세 받는 이의 머리를 세 차례 물속에 밀어 넣으며 세례성사를 집전하였다. 물속에서는 사람이 살 수 없으므로 이 예식은 상징적으로 죽음을 의미했다. 죽었다가 다시 태어남에 대한 명확한 의미가 세례예절에 담겨져 있었던 것이다. 세례는 이렇게 죽는 성사라고 하겠다. 그렇다면 우리 신앙인들은 이미 죽은 목숨들이라고 하겠다. 죄에서 죽고, 생명으로 부활한 이들이라는 것이다.
요즘에는 세례성사가 더 이상 침례로 집전되지 않는다. 그 대신 상징적으로 이마에 물을 세 번 붓는 예식으로 집전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세례성사의 의미가 사라져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모든 신자들은 세례를 통하여 죽은 목숨들인데, 지금 저 마다 살았다고 소리치며 아우성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볼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세례성사에 대해서 공부해 보기로 하자.
(1) 초대교회의 세례성사
세례성사에 대한 가르침
세례성사에 대한 언급은 이미 신약성서 곳곳에서 발견된다. 공관복음에서 예수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명하고 있으며(마태28,19), 사도행전도 예수의 이름으로(사도 8,15-17) 세례를 베풀었다고 전한다. 사도 바오로는 파스카와 관련시켜 세례에 대해서 말한다(로마 6,3). 이렇게 성서에서 벌써 세례성사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초대 교회 문헌에도 세례성사는 자주 등장한다. 디다케(1세기말-2세기 초 시리아 기원의 문헌)는 세례성사의 예식에 대해서 아주 자세하게 언급하는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흐르는 물 안에서 세례를 주는데 흐르는 물이 없다면 그녕 물로 주며 물이 모자를 때는 머리에 3번 부으면 된다”고 디다케는 말하고 있다. 성 유스티노는 자신의 호교론에서 세례성사를 받기 전에는 집전자와 예비자 모두 단식해야한다고 가르친다. 이는 세례성사를 받기 전에 엄격한 준비 과정이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여러 교부 문서들을 분석해보면 초대교회에는 세례성사는 주로 사순시기가 끝나는 부활시기에 집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여신자들의 세례는 여자 집전자가 물 속에 함께 들어가 주어야 한다고 히뽈리또는 사도전승에서 가르치고 있다. 예비자와 신자를 차별하지 말라는 2세기의 떼르뚤리아노의 증언에서 볼수 있듯이 세례 준비기간은 초대교회부터 중요시 여겨졌다. 특히 당시가 혹독한 박해시대였으므로 예비자의 선발 및 교육과정은 매우 엄격했다. 치쁘리아노는 세례자들을 말씀의 청취자(audientes)라고 부르기도 했으며, 오리제네스는 세례 지원자들을 일정기간이 지난 후 세례후보자들로 선발하는 선발예식의 집전을 주장하기도 했다. 히뽈리또의 사도들의 전승에서도 첫 번째와 두 번째의 예비기간을 두었음을 알수 있다.
예비자 입교 허락식(히뽈리또, 떼르뚤리아노)
세례자가 많아지고 세례예식이 더욱 발전하여 4세기 경에는 교회의 교도권에 생명의 전수를 예비자가 청원하는 예식이 생겨나는 데 이를 입교 허락식이라고 불렀다. 이 때 예비자들은 세속적인 것을 끊을 것을 서원하였다. 아우구스띠노의 증언에 따르면 이 예식은 서방교회에 4세기에 들어온 것으로 추정되며 이 예식 중에 십자표시를 이마에 그어 주었다고 한다. 후에 소금을 뿌리는 예절, 안수등이 이 예비자 입교 허락식에 추가 되었고 7세기에는 숨을 불어넣는 예식으로 시작하여 강복으로 끝났음을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대부모의 역할
초대교회 때부터 대부모의 역할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대부모는 예비자에 대해 교회 앞에 완전히 책임을 져야하는 것이었다. 당시 상황이 박해상황이었고 많은 밀고자와 배교자가 있었기에 새 영세자들의 대부모의 역할은 더욱 강조되었다. 특히 떼르뚤리아노와 테오도로는 대부모를 보증인이라고 불렀고, 에제리아는 아버지 어머니라고 불렀으며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대부모를 영적 부모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예비자 교리
예비자 교리는 성직자, 평신도 모두 할 수 있었다. 아우구스띠노에 의하면 예비자 교리는 창세기 첫 구절(In principio fecit Deus caelum et terram)로 시작했다고 한다. 예비자들은 주일 집회에 의무적으로 참여해야 했으나 미사의 말씀의 전례 부분만 참석할 수 있었고 성찬의 전례(Eucharistia)가 시작될 때는 성당에서 퇴장하여 교리교육을 받았다. 예비자들을 위한 교육기간은 지역교회별로 차이가 있었는데, 떼르뚤리아노는 3년간 교리를 배워야 했지만 예비자가 열심하면 더 빨리도 세례를 받을 수 있다고 증언한다. 300년 경의 스페인의 Elvira 공의회에서는 2년을 표준으로 삼았고 병자는 빨리 받을 수 있었음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3세기 이후에는 대부분의 지역에서 세례 성사의 집전을 부활절(빠스카)에 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예비자 교리 교육기간에는 다양한 예절들이 행해졌다. 의미 있는 예절로는 자기 이름을 기록하는 예절이 있는데 이는 대부모와 함께 주교에게 나아가서 생명의 책에 자기 이름을 쓰는 예절이다. 이 때 새 이름을 쓰는데 이는 구원으로 선발되었음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 예식 후에는 예비자들을 “뽑힌 이(로마)”, “지원자(다른 서방지역들)”, “빛으로 나아가는 이들(동방지역들)”이라고 불렀다. 특히 세례성사를 받기 바로 직전의 사순절에는 3가지 준비를 통해 세례를 준비하여야 했다. 이 3가지 준비는 교리교육, 전례적 준비, 고행이었다. 이 기간에 이뤄지는 교리교육은 매우 특별한 것이었는데 예비자들은 거의 매일 성당에 모였고 이 때 주교는 집중적으로 성서에 대해서 설명을 해 주었다고 한다. 또한 예비자들에게 이 시기에 신경, 주의 기도 등의 내용에 대해 집중으로 가르치기도 하였다. 또 다른 준비로 전례적 준비가 있는데 이를 통상 구마예식이라고 불렀다. 이 기간에 신자로서 악의 세력과 대항하기 위한 전례적 준비로 구마예식을 거행하였던 것이다. 거의 모든 초대교회의 전례 자료들이 증언하고 있는 이 구마예식은 성사적인 차원에서 엄격하게 집전되었다. 마지막 준비로 세례예식 직전의 사순절에 거행하는 단식과 고행의 시기가 있다. 이때는 음주, 육식 등이 금지되었고, 목욕이나 호화생활 등은 자제 되었으며 밤샘기도, 금욕, 희사 등이 강조 되었다.
세례 준비예절
세례를 박기 직전에 마지막 준비예절을 거행하였는데 사순시기 중에 세례를 준비하기 위한 마지막 예절로서 공적으로 악을 끊고 신앙을 고백하는 예식이 집전되었다. 또한 밀라노와 로마에서만 있었던 예절로 “열려라(에파타)”라는 예식이 있었는데 그 말이 뜻하는 데로 신앙을 위한 귀와 혀의 열림을 상징하는 의식이 거행되었다(마태 7,32-35). 이 마지막 준비예절은 사탄과 세속적 유혹을 끊고 그리스도와 일치를 고백하는 예절이 거행되었는데 지역마다 다양한 방법으로 이 끊음의 예식이 거행되었다. 참고로 안타오키아에서는 “나를 그리스도와 묶겠다“는 고백이 이 예식 중에 행해졌다고 한다.
마지막 준비예절 중에 중요한 것이 도유예절이다. 이 도유예절은 예비자성유의 도유예절(라틴교회와 희랍교회)과, 구마의 성유의 도유예절(예루살렘), 향유의 도유예절(안티오키아)등 이 지역별로 다양하게 거행되었으며 이에 따라 기름의 종류와 명칭 등도 매우 다양하였다. 기름을 바른 후에 몇몇 지역에서는 옷을 벗기는 예절을 거행하였다. 침례를 위하여 옷을 벗기는 것으로서 옷 벗김의 의미, 세례의 의미 등에 대한 설명 및 기도가 뒤따르는 예절이었다.
세례식
이러한 준비가 모두 끝나면 세례식이 거행되었는데 파스카 저녁(부활성야)에 장엄하게 집전되었다. 맨 먼저 세례수가 축복되었는데 전승에 따르면 빠스카 날 첫 닭이 울 때 물을 축복하였다고 전해진다. 이 물은 세례를 상징하는 것이며 이 축복 예식 안에서 구약의 여러 가지 상징적인 사건들이 설명되었다. 이 예식은 로마유형, 스페인 갈리아 유형, 동방 유형등으로 구분할수 있으며 물을 축복하는 예절과 세례대의 뚜껑을 여는 예절(스페인)로 나뉘어 있기도 하다. 이어서 신앙고백예절과 침례가 뒤따른다. 예비자가 물속에 들어가 서서 주교의 물음에 답하고 신앙을 고백하면 주교는 그 예비자에게 세례를 집전하였다. 침례를 위한 잠수 숫자는 지역 교회마다 차이가 있었다.
세례 후에는 몇가지 보충 예절이 뒤따랐다. 아프리카에서는 도유와 안수가 뒤따랐는데 이 보충예식으로 세례가 완성되었다. 떼르뚤리아노 교부가 남긴 세례 후의 낭송된 시는 세례의 의미를 아름답게 설명하고 있다.
“육신은 씻겼습니다. 영혼의 정화를 위하여
육신은 기름 발라졌습니다. 영혼의 성화를 위하여
육신에 십자표가 아로새겨졌습니다. 영혼의 견고함을 위하여
육신은 안수의 그늘아래 있습니다. 영혼이 성령으로 빛나기 위하여
육신은 주님의 몸과 피로 살찌워져있습니다. 영혼이 하느님으로 커 나가기 위하여...“
(떼르뚤리아노 죽은 이들의 부활에 관하여 8,3 CCL 2권)
밀라노지역에서는 세례 후에 도유와 세족례, 흰옷을 입힘, 십자를 긋는 예식 등이 뒤따랐으며 로마에서는 도유와 십자표시를 그음과 안수, 흰옷을 입히는 예식이, 갈리아와 스페인에서는 도유, 안수, 그리고 곳에 따라 흰 옷을 입히는 예식이나 혹은 세족례가 뒤따랐다. 세례 이후에 성령을 청원하는 예절이 거행되었는데 이는 견진성사의 초보 형태로 예절의 형태는 차이가 있었지만 동서방 교회 모두 보존하고 있었다. 서방교회에서는 이 예식이 후에 견진으로 발전하여 세례성사로부터 분리된다. 세례성사는 새 영세자들이 성찬에 참여하게 되는 영성체로 장엄하게 완성되었음을 역사는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초대교회 때 이미 오늘날 거행하고 있는 많은 예식들이 거행되었다. 세례를 통해 죽음을 이긴 우리는 이러한 세례 예식을 하나 하나 묵상함으로써 더욱 의미로운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2) 중세와 근대의 세례성사
카롤링 왕조(7-8세기)까지의 입교성사
교회가 자유를 얻음에 따라 입교자가 늘어나게 되었다. 따라서 지방마다 매우 다양하게 여러 단계별로 이뤄지던 세례성사 예절이 로마를 중심으로 단순화하여 7단계로 조정되었고 주의 기도 수여식 때 성서가 함께 수여되기도 하였다. 또한 세례성사를 집전하는 형식이 744년 교황 자카리아에 의해 “나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 )에게 세례를 줍니다”라는 현행의 형태로 확정되었다. 특히 갈리아와 스페인 지역에서는 이 때 집전시기에 대해 엄격하게 규제하여 예절들이 파스카 축제일에 거행되어야 함을 강조하였고 따라서 성지주일과 부활 사이에 많은 예절들이 거행되었다.
9-12 세기의 입교성사
이미 대다수의 성인들이 세례성사를 통해 신자가 되었으므로 성인입교 예절이 전례 안에서 서서히 사라지게 되었다. 그리고 어린이들이 세례성사의 주 대상이 되어 세례성사는 어린이를 위한 성사로 여겨지게 되었다. 이 때부터 사제들이 거행했던 유아 세례집전을 더욱 완전하게 하기 위하여 주교들의 보충예절이 생겨나게 되었고 이는 견진성사의 형태로 발전하게 된다. 후에 어른들이 입교할 때도 어린이 예식을 사용하게 되었으므로 단계별 세례예식은 사라지게 되고 어린이들에게 집전하듯이 한꺼번에 성사를 베푸는 <간략한 입교 예식>이 유행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예식서와 예식의 형태가 변경되면서 초대교회부터 사용되어오던 성유축성기도문, 물 축성기도문의 형식이 변화되어갔다. 또한 위에서 언급한대로 유아 영세자가 대부분이므로 첫 영성체를 언제 할 것인지에 관한 규정들이 생겨나게 된다.
12세기 이후의 세례성사
12세기 이후에는 원죄를 없애주는 세례성사의 성격이 강조되어 아기가 태어나면 생후 즉시 세례 받는 것을 강조하게 된다. 이는 유아 사망률이 높은 시기였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또한 이 시기에 이르러 몸 전체를 물 담그는 침례가 간결하게 물을 몸에 붓는 형식으로 예절의 형태가 바뀌게 된다. 또한 단계별 예식이 완전히 사라지고 한꺼번에 모든 예절이 집전된다. 따라서 초대교회의 관습이었던 신경과 주님의 기도를 수여하는 예절 등이 사라지게 된다.
트렌토 공의회 직후에 전례 개혁운동이 잠시 일어났고 이 때 Santori추기경이 초대교회 전승의 세례예절을 도입한 예식서를 간행했으나 결국 1614년 간행된 교회 공식 예식서인 바오로5세의 로마 예식서(Rituale Romanum)에서 채택되지 못함으로써 세례성사는 개정되지 못하였다. 1614년 개정 예식서는 아메리카, 아시아 등의 선교지역 교회를 위하여 예식서에 성인 영세예절을 어린이 영세예절로부터 독립하여 수록하고 있지만 이 성인입교 예식도 교회 전통의 단계적인 예식 집전이 아니라 한꺼번에 예식 전체를 거행하는 예식으로 꾸며지게 되었다. 단지 이 예식서는 옛 전승 예절 중에서 영세준비예절의 첫 구마기도 부분만을 부분적으로 채택하였을 뿐이다. 이 예식서에 특색이 있다면 예식 중 사제가 예비자 성유를 도유한 후에 자색 제의에서 흰색 제의로 갈아입는다는 것과 대세를 받은 사람들을 위한 보례예식을 부록으로 싣고 있다는 것이다. 이 시기에는 앞서 말한 대로 견진성사 예식은 세례성사와 완전히 분리되어 주교에게만 위임되었다.
12세기 이전에는 견진과 첫영성체는 조기 허용이 매우 강조되었는데 이는 당시의 높은 사망률로 인한 것이다. 그러나 첫영성체의 남용으로 인해 13세기초 파리 시노드에서는 어린 아기들에 대한 영성체는 금지시켰다. 이 규정이 1215년 라테란 공의회에서 확정됨으로써 첫 영성체시기는 7세에서 12-3세로 늦춰지게 되었다. 또한 견진성사는 처음에는 나이에 관계없이 주교님을 첫 번째로 만날 때 집전할 수 있었으나 1566년 이후에는 오성이 열리는 나이가 되어야 받을 수 있게 하였다. 18세기 이후에 와서 첫영성체 이후에 견진을 받는 오늘날의 전통이 불란서에서 시작되었고 어린이의 첫영성체 나이는 1910년 교령 에 의해 명오가 열리는 때인 만 7세 전후로 하는 것을 권고하였고 이는 1917년 교회법전에 명문화되었다.
(3)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의 세례
공의회의 전례헌장은 예식서의 폭넓은 개정을 제시하여 준다. 전례헌장은 두 가지 점을 강조하고 있는데, 첫째, 어린이 세례예식서는 “어린이들의 현실에 맞게 만들어야한다는 것이며, 둘째, 성인입교예식은 초대교회 때 행했던 것처럼 단계별, 시기별로 다양하게 거행되었던 세례 성사예절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 원칙에 입각하여 어린이 세례예식서가 1969년 5월 15일에 출간되었으며 또한 어른 입교 예식서도 1972년 1월 6일에 공의회의 요구대로 단계별 입교예식을 중심으로 출간되었다.
어린이 세례예식
새 예식은 공의회의 뜻에 따라 단순히 어른 예식의 수정판이 아니라 어린이의 현실에 맞게 개편되었다. 그 결과 어린이의 부모들의 역할과 이를 위한 사목적 배려가 강화되었으며, 영세 받는 어린이의 숫자에 따라 예식을 구분하였고, 또한 어린이 세례를 평신도(회장)도 집전할 수 있도록 배려했으며 대세를 받은 어린이의 보례예식도 어린이에 맞게 새로 꾸몄다.
어른 입교 예식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출간된 새 예식서에는 단계별 입교예식과 간략한 입교예식, 대세, 성인 첫영성체준비, 소년들을 위한 입교절차 그리고 부록으로 개신교 세례자에 대한 일치예식이 수록되어 있다.
새 예식서의 단계별 입교예식은 3개의 예절을 중심으로 꾸며져 있으며 이 3 예식을 분기점으로 하여 예비자 교육 기간을 4 시기로 구분하며 마지막 예절인 세례식은 파스카(부활)때 집전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4가지 단계는 다음과 같다.
1) 전예비기간
예비자가 첫 번째로 교회와 만나는 기간을 전예비기간이라고 하며 이 때는 특히 사목자의 세심한 배려가 요구되는 때이다. 따라서 예비자 모집기간 마지막 주일에 교우들과 함께 예비자를 환영하는 환영식을 거행하며 교리반 편성 등에 있어서 신상명세서 등을 참조하여 교육수준, 가정환경, 배우자의 신앙상태 등을 배려해야 한다.
2) 예비자로 받아들이는 예식과 예비기간
예비자로 받아들이는 예식을 통하여 예비기간이 시작된다. 이 예식은 공적으로 교회에 자신의 입교 의지를 드러내 보이는 예절이다. 단계별로 예식을 집전할 때는 이를 예식서 에 준하여 행하면 되는데 이때 세례명 짓기, 첫 신앙에의 동의를 표하는 예식, 숨을 불어넣어 주는 예식, 구마(잡신 끊기)기도, 이마에 십자표 긋기, 말씀의 전례, 복음서 수여 등이 뒤따른다.
예비자로 받아들이는 예식 이후 선발예식까지의 기간을 예비기간이라고 한다. 이때는 교리교육, 신자들과의 친교생활, 전례에의 참여, 생활 안에서의 신앙증거 등을 통해 그리스도교 초보적 삶을 익히는 기간이다. 이 기간에는 말씀의 전례. 첫 구마식, 예비자 강복식 등을 반복해서 거행할 수 있으며 첫 도유식과 몇 가지 수여식(신경, 주님의 기도 등)도 거행할 수 있다.
3) 선발예식과 정화와 조명의 기간
선발예식은 교회 전통상 사순 시기가 시작되는 때에 거행하는 것이 좋다. 선발예식은 영세 대상자의 선발과 선발된 이들을 위한 기도로 이뤄진다. 선발예식이 끝나면 정화와 조명의 기간이 시작된다. 이 기간은 집중적으로 그리스도 신자로서의 삶을 위한 정화를 청하는 시기이며 사순시기의 의미와도 잘 일치된다. 이 기간 중에 구마식을 곁들인 3 차례의 수련식과 신경 및 주의 기도 수여식을 거행할 수 있다.
4) 입교예식(세례식)과 신비교육기간
입교예식인 세례식을 거행하기 전에 최종준비예식을 행하는데 통상 이는 성토요일에 거행하는 것이 좋다. 신경수락식과 에페타 예식, 세례명 선택예식과 예비자 성유를 바르는 예식 등을 최종준비 예식에서 거행할 수 있다. 이어서 부활성야나 부활대축일에 입교 성사를 집전한다. 입교성사는 호칭기도, 영세수 축성, 구마, 예비자 성유의 도유, 신앙고백, 세례식, 크리스마성유의 도유, 흰옷을 입힘, 촛불을 켜줌 등의 예식으로 거행되며 부활을 통한 구원의 기쁨을 새 영세자들에게 전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세례식이 모두 끝나면 이때부터 신비교육기간에 들어간다. 이 때는 새 영세자들이 교회 생활에 완전히 적응하도록 도와주는 시기로써 새 영세자가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도록 주위의 모든 신자들과 사목자가 각별히 배려해야하는 시기라 하겠다. 영세자가 신앙생활과 교회 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을 때까지 이 배려는 계속되어야 한다.
새 예식서는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단계별 예식 외에도 간략한 입교예식을 수록하고 있다. 이 예식은 일반적으로 입교자의 수가 많은 특별한 경우 사용하는 예절로서 교회는 가능하다면 단계별 예식을 거행할 것을 강조하고 있으며 단계별 예식이 더 초대교회의 전례 전승에 가까운 것이라고 하겠다.
비록 중요한 이유가 있어서 간략한 예식을 집전할 때라도 단계별 예식들을 잘 이해하고 있어야 하며 예비자 교육기간에 각 단계의 의미를 예비자들이 되새길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 간략한 어른 입교식은 위에서 언급한 다양한 예식들을 한꺼번에 거행하는 예식으로서 환영식, 간구와 참회식, 구마기도와 예비자성유의 도유, 영세수 축성, 마귀와 죄를 끊어버림, 신앙고백, 세례식, 크리스마 도유, 흰옷을 입힘, 촛불을 켜줌 등을 한꺼번에 거행한다.
세례성사는 새로 태어나는 성사이다.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질곡의 노예살이에서 새로운 해방의 삶으로 옮겨갔듯이 우리도 자유와 해방에로 초대되어 새롭게 변화되었음을 선포하는 것이 세례성사의 참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와 죽음의 사슬에서 부활과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초대되었음을 기뻐하는 성사가 세례성사이다. 이스라엘이 해방을 맛보기 위해서 40년을 척박한 광야를 배회하였다. 예수께서도 부활로 나아가기 위하여 십자가라는 고통의 형극을 맛보고 죽으셔야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하느님 나라의 약속된 미래를 맛보고 있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광야를 가로질렀는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는가? 만약 너무 편하게 세례를 받았다면 이제부터라도 세례의 의미를 되새기고 우리가 걸어야할 광야를, 우리가 짊어져야 할 저 십자가를 바라보자. 세례는 영원히 살기 위해서 지금 죽는... 죽는 성사이기 때문이다.
[인천가톨릭대학교 홈페이지에서, 이완희 신부]
2009-07-02 ㅣ No.130
[전례와 상징] 세례성사의 상징
‘오늘’이란 말을 들으면 ‘내일’이나 ‘어제’를 연상할 수 있는 것이 사람이다. 이것을 심리학에서는 단어의 연상적 의미(聯想的 意味)라고 한다. 그런데 사람은 의사를 전달하는 매개물로서 단어(單語)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말이 없더라도 어떤 실물을 보고 상징적인 의미를 알 수 있다. 반지를 보면 약혼이나 결혼을 생각하고 태극기를 보면 한국을 연상하게 된다.
이렇게 어떤 의미를 깨달을 수 있는 사물이나 사람, 동작, 행위를 통하여 다른 보이지 않는 실재를 나타내 보이는 것을 상징이라고 한다. 이것을 우리 말로는 표상, 표지, 표징, 징표 등 여러 단어로 표시한다.
대림절에 본 대림환에서 네 개의 초는 대림 4주간을, 촛불은 세상의 빛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란 말씀을 명백히 드러내기 위하여 부활초를 사용하는가 하면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란 말을 돋보이게 하기 위하여 세례성사 때 촛불을 전달한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표지이고 성사의 원형이다. 이와 같이 주님의 몸은 모든 사람에게 제공된 구원의 교회요 성사이고 표지이다. 그러나 이런 상징을 잘 알기 위해서는 먼저 믿음이 있어야 한다. 믿음 없이 상징만을 보고 하느님의 일을 깨달을 수 없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볼 수 있게 하고 새로운 모습으로 성장해 나아가도록 교회는 여러 가지 예식을 통하여 사람들을 인도하고 있다. 이렇게 하느님의 거룩함에로 나아가는 일을 성사(聖事)라 하고 영원한 생명, 구원을 얻도록 세례를 받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수행하는 것이 세례성사이다. 즉 세례 자체도 사람을 하느님의 백성이 되도록 하는, 볼 수 있는 한 표징이다. 세례 예식의 여러 상징들 가운데 중요한 것만 살펴보자.
십자표
‘예비자들을 받아들이는 예식’에서 세례 집전자는 예비자들을 권고하고 이마에 십자표를 한다. “○ ○ ○, 이마에 십자표를 받으십시오. 그리스도께서 당신 사랑(승리)의 표지로써 당신을 지켜주실 것이니 이제부터 그분을 알아 따르기로 노력하십시오.” 이어서 다른 감각기관인 귀, 눈, 코, 가슴, 어깨에 십자표를 할 수 있다. 한마디로 몸 전체가 십자가로 밝혀진다.
십자가는 가로와 세로의 선이 교차한다. 즉 하늘과 땅이 이 표시 안에 하나로 연결된다. 즉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과 인간은 온전히 하나가 된다. 이 연결은 이제 끊을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에 구원과 생명과 희망을 거는 찬미를 드리는 것이다.
십자가 표시는 세례 예식에서 아주 오래 된 것으로, 5세기경에 이미 있었다. 이것이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로 전파되었다. 성 아우구스띠노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그리스도의 수난과 십자가 표시를 통하여 당신은 마치 집대문과 같은 당신 이마에 십자표를 할 것이며 모든 신자들도 그 표를 할 것이다.”
십자가 표는 ‘십자가에 못박힌 분께 예속됨’을 상징한다. 여기서 우리는 십자가가 단지 수난의 표시일 뿐 아니라 부활의 상징이란 사실도 아울러 생각해야 한다. 사제뿐 아니라 부모와 대부모 또는 동참자까지 십자표를 하는 것은 그리스도교 공동체 또는 본당 공동체가 예비자를 받아들이고 아울러 공동체가 성장함을 의미한다.
안수
세례, 견진, 혼인, 신품 등 성사 집행과정에는 안수 예절이 있다. 머리에 손을 얹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하느님께서 손으로 사람을 감싸주어 보호하고 돌본다는 뜻이다. 또한 축복을 내리고 성령의 은혜를 넘치도록 베푼다는 표시이기도 하다. 이 안수도 이미 4세기 초 동방과 서방 교회에서 예비자들에게 베풀어졌다. 교회사가 에우세비오(Eusebius)는 콘스탄틴 대제가 안수를 받고 예비자가 되었던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아마도 이 안수는 초기 예비자 교육 중 자주 반복된 것으로 보인다. 신앙인 교육은 축복과 성령의 힘과 하느님의 손을 필요로 한다.
성유
기름 바름을 도유(塗油)라 하고 세례식 전에 바르는 기름을 예비자 성유 또는 구마(驅魔) 성유라고 하며 세례식 후에 바르는 기름을 크리스마 성유라고 한다. 기름 바름은 원래 운동 선수들의 의식에서 유래한다. 그들은 경기나 특히 둘이 결투를 할 때 관절을 연하게 하기 위하여 기름을 발랐다. 그리고 경기가 끝난 다음에는 짙게 발랐던 기름을 목제기구로 벗겨냈다. 여기서 이런 도유의 상징적 의미가 생겼다. 즉 세례 받은 자는 악마와 대결하여 민첩하게 대처해야 한다. 즉 기름 바름은 이미 기름을 받은 왕과 대사제가 영신전쟁에서 승리하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도유식 때 “구세주 그리스도의 능력이 당신을 지켜 주시도록 기원하며…”라고 기도하는 내용을 보면 분명해질 것이다.
세례식 후 크리스마 성유를 바르는 예절은 근원적으로 견진성사 때였다. 4세기경에 사제가 세례식 후 크리스마 성유를 발랐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에 견진성사는 영세 직후 같은 시간에 베풀었다. 그러나 사제가 이마에 이 기름을 발라서는 안되었다. 견진은 주교들만이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콘스탄틴 대제 때부터 예비자들이 많아져서 세례식마다 주교들이 찾아갈 수 없었으리라고 본다. 그러나 도유는 빼지 않았다.
크리스마 도유는 영세자가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의미이다. 왕이 등극할 때 기름 바르듯이 기름 바르고 또한 사제 직분을 받는다. 한마디로 영세자는 왕이요 사제이다.
물
물이 없는 곳에서는 살 수 없다. 모든 생명이 물에서 비롯된다. 태초에 모든 생명이 바다에 있었고 인간의 태아도 바닷물같은 양수(羊水)에서 시작된다고 한다. 모든 요소의 모체인 물을 하느님은 영세자의 천상적 탄생의 유효한 표징으로 삼으셨다. 영세수 축성 기도문의 일부를 보면 그 뜻을 알 수 있다. “성사의 표시를 통하여 무형의 권능으로 기묘한 효과를 내는 천주여, 주께서는 물이 세례성사의 은총을 표시하도록 여러 가지 모양으로 준비하셨나이다. 세상 태초에 성신이 물 위를 거닐으실 때 이미 거룩하게 하는 힘을 물에 태워주시고 홍수의 심판을 내리실 때에도 물로 죄를 씻으시고 덕행의 기원을 삼으심으로써 신비로이 재생의 표본을 보여주셨나이다…”
예수님은 요르단 강물에서 요한의 세례를 받으셨고 십자가 위에서 피와 물을 함께 흘리셨다. 부활 후에는 사도들에게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고 하셨다. 교회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하나의 탄생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니고데모의 질문에 대하여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한 3,5)라고 말씀하셨다.
흰옷
세례복은 영세자가 하느님 앞에 나아가기 위하여 입는 축제의복이다. 즉 그리스도의 희생과 결혼축연에 참여하는 신부를 연상시킨다. 종말의 구원을 뜻하는 천상 영광의 잔치에 초대된 모습이다(묵시 7,9-14 참조). 이렇게 영세자는 새로이 창조되어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었다(갈라 3,27 참조).
촛불
4세기의 암브로시오 성인은 “새 영세자들이 손에 불타는 초를 들고 부활 성찬에 참여하기 위하여 공동체의 모임 속으로 들어갔다”고 하였다. 주님인 빛을 받고 빛의 자녀답게 살아야 한다(에페 5,8)는 정신으로 영세자의 과거와 미래를 비추는 빛의 상징이 이 촛불이다.
[경향잡지, 1988년 1월호, 안문기 프란치스꼬(대전 선화동본당 신부)]
2010-10-06 ㅣ No.164
[알기 쉬운 교리상식] 너는 나의 것! - 세례성사
신학생 시절 강의 시간에 신부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하셨다. “신자들이 받지 못하는 성사가 있는데 그게 뭘까요?” 모두들 어리둥절해 있는데 신부님께서 웃으시면서 답도 가르쳐 주셨다. “그야 당연히 세례성사지. 그것도 몰랐나?” 신자 아닌 사람을 신자로 만드는 성사가 세례성사다. 그래서 교회는 전통적으로 세례성사를 7성사 중에서 가장 앞자리에 놓는다.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신앙공동체인 교회의 구성원이 되며 다른 성사를 받을 자격을 갖추게 된다.
세례(洗禮)는 말 그대로 물로 씻는(洗) 예식(禮)이다. 물은 그 자체로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우선 모든 생명체는 물 없이는 살 수가 없다. 동물이든 식물이든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는 그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물을 필요로 한다. 이와 반대로, 물은 생명체를 죽음으로 몰고 가기도 한다. 구약성경의 노아의 홍수를 예로 들지 않더라도 우리는 물로 인한 재해를 직·간접적으로 경험하고 있다. 또한 물은 정화의 능력도 가지고 있다. 물로 몸을 씻고, 먹거리를 씻고, 그릇을 씻고 청소를 한다. 세례성사는 물의 특성들, 즉 생명과 죽음과 정화라는 이 세 가지 상징성을 이용한다. 「가톨릭교회교리서」의 표현을 보자.
“세례성사는 그리스도교 생활 전체의 기초이며, 성령 안에 사는 삶으로 들어가는 문이며, 다른 성사들로 가는 길을 여는 문이다.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죄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며,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어 교회 안에서 한 몸을 이루어 그 사명에 참여하게 된다. ‘세례는 물로써 그리고 말씀으로 다시 태어나는 성사다.’”(교리서 1213)
세례를 받는 사람은 첫째, 모든 죄의 용서를 받는다. 물로 씻는 예식이 세례성사의 정점이다. 세례 받는 이는 죄로부터 죽고 정화되어 깨끗하게 새로 태어난다.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게 되는 것이다.
둘째,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우리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세상에 속하지 않고 하느님께 속하게 된다. 하느님께 속한 사람은 그 자체로 거룩한 사람(聖人)이다.(본지 4월호 참조) 영세자에게는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셋째, 교회의 구성원이 된다.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들의 모임이자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이다. 세례 받은 사람들이 모여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이룬다. 세례성사는 교회로 들어가는 문이며 다른 모든 성사의 바탕이 된다.
넷째, 성령의 궁전이 된다. 예수님께서는 구원을 위해서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라고 하셨다.(요한 3,5) 세례성사를 통하여 성령께서는 우리의 보호자가 되시고, 우리가 신앙생활을 바르게 하도록 우리를 부추기시며 또 그 힘을 주신다.
우리가 세례를 받음으로써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성부와의 관계) 교회의 구성원이 되고(성자와의 관계) 성령의 궁전이 된다면(성령과의 관계), 세례성사는 결국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일치의 관계를 맺는 성사이다.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너는 나의 것!”이라고 점찍는 성사이다. 얼마나 든든한 일인가!
“내가 너를 구원하였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나의 것이다. 네가 물 한가운데를 지난다 해도 나 너와 함께 있고 강을 지난다 해도 너를 덮치지 않게 하리라. 네가 불 한가운데를 걷는다 해도 너는 타지 않고 불꽃이 너를 태우지 못하리라.”(이사 43,1-2)
[월간빛, 2010년 7월호, 하창호 가브리엘 신부(5대리구 사목국장 겸 해평성당 주임)]
2014-09-24 ㅣ No.184
[성사, 은총의 표징] 세례성사 (1)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죄의 사함을 받고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서 교회 공동체에 속하게 됩니다. 이 성사를 받음으로써 다른 성사를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집니다. 그래서 세례성사는 일곱 성사들 중에서 제일 앞자리를 차지합니다. 입교 성사인 세례성사를 받기 위해서는 일정한 기간 동안 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고대 교회에서는 세례를 받기 전에 3년을 준비했지만, 현재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세례 전에 대략 6개월 정도 교리교육을 받습니다.
세례성사는 통상적으로 성직자, 곧 부제, 신부(사제), 주교가 집전합니다. 그러나 비상시에는, 이를테면 전쟁이나 박해로 인해 성직자가 없는 경우라든가, 성직자를 불러올 동안에 세례 받을 사람이 죽을 위험이 있을 경우에는 평신도도 세례를 줄 수 있습니다. 이를 대세(代洗), 정확하게 표현하면, 비상 세례라고 합니다. 본명을 정해 부르면서 이마에 물을 세 번 부으며 ‘나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줍니다.’라고 말하면 됩니다.
세례성사를 받으면 은혜(효과)를 입게 되는데 이에 대해서는 사도행전 2장 38절에 잘 요약되어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다른 제자들과 함께 성령을 받고 나서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구세주라는 것을 설교하자, 청중은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하고 묻습니다.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바로 이 대답에 세례성사의 은혜가 잘 요약되어 있습니다.
세례성사를 받으면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합니다. 이는 세례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과 하나가 되면 그분처럼 우리도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마 8,15)로 부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세례성사로써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러면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무한한 사랑을 받게 되는데, 이 사랑은 우리의 영혼, 육신을 지탱해주고 성장케 합니다.
저는 몇 년 전에 수도권의 어느 보육원에서 안식년을 지낸 적이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젖먹이부터 유치원생까지 100명 내외의 아이들이 있었는데, 수녀님들과 봉사자들의 따뜻한 보살핌을 받으면서 잘 자라고 있었습니다. 음식과 옷도 제가 예상했던 것보다 좋았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이상할 정도로 자주 병치레를 해서 궁금하게 여겼습니다. 원장 수녀님의 설명을 듣고서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어린 아이들에게는 부모 사랑이 무엇보다도 중요한데, 그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해서 자주 아파요. 그게 안쓰러워서 더 잘 먹이고 잘 입히려고 노력합니다만, 그런다고 부족한 사랑이 다 채워지겠어요?” 인간은 다른 사람의 사랑과 관심을 받아야 몸과 마음 모두 건강하게 살 수 있습니다. 보통 그런 사랑을 부모나 가족으로부터 받습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인간의 사랑은 조건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말 잘 들으면 사랑해 주지만, 안 그러면 어림도 없다’는 식입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느님의 사랑은 인간의 사랑과는 사뭇 다릅니다. 그분은 죄 많은 인간들을 위해 당신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심지어는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고 성부께 기도하셨습니다(루카 23,34).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은 당신을 세 번이나 배반했던 베드로를 다시 불러 목자의 직무를 맡기셨습니다(요한 21,15-19). 이렇게 예수님이 주시는 사랑은 헌신적이고 무조건적이며 변하지 않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느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이라면, 자신이 비록 많이 부족하고 허물이 크더라도 하느님은 결코 사랑의 눈길을 거두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항상 마음에 간직하고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살면 건강한 자존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건강한 자존감이 형성되면 자신이 못났다고 자책하거나 낙담에 빠지지 않습니다. 또 남들이 나를 못생겼다, 능력 없다, 돈이 없다, 자식이 없다, 이혼했다, 직업이 없다, 병들었다, 늙었다고 흉보더라고 자책하거나 절망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부족하고 허물이 크더라도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세례를 통해서 모든 죄를 용서 받습니다
성령 강림 직후에 베드로 사도는 자신의 설교를 들은 청중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를 용서받으라고 권유합니다. 여기서 세례를 통해 죄의 사함이 이루어진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이런 점은 바오로의 회심을 전하는 기사에서도 분명히 나타납니다. 사도행전 22장 16절에서 하나니아스는 바오로에게 세례를 권유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일어나 그분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며 세례를 받고 죄를 용서 받으십시오.”
세례를 통해서 원죄와 본죄 모두 사함을 받습니다. 원죄란 인류의 원조인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과 같아진다는 뱀의 감언이설에 속아서 지은 죄인데(창세 3장), 그 죄는 후손들에게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자신을 하느님으로, 절대기준으로 삼으려는 경향이 우리 인간에게 뿌리 깊게 박히고 세상에 넓고 깊게 퍼진 것입니다. 이런 잘못된 경향에 동의해서 하느님을 거스르게 되면 죄를 짓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본죄, 내 자신의 죄입니다.
그런데 원죄이든 본죄든 죄의 본질은 하느님을 떠나 자신에게 집착하는 이기주의입니다. 세례를 통해서 모든 죄의 사함을 받는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인간이 자신만을 바라보는 이기적인 삶을 살아온 것을 불문에 부치시고 새 출발의 기회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세례성사를 받고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됨으로써 죄에 물든 묵은인간을 버리고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새로운 삶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사도 바오로는 세례를 통해 새로운 삶으로 태어나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곧 “우리의 옛 인간이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죄의 지배를 받는 몸이 소멸하여, 우리가 더 이상 죄의 종노릇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로마 6,6)
세례를 받아 예수님과 함께 죽어 그분과 하나가 된 사람은 그분과 같이 다시 살아나서 새로운 삶을 살아갑니다. 새로운 삶은 세례성사의 선물인 동시에 우리의 과제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의 자체를 불의의 도구로 죄에 넘기지 마십시오, 오히려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살아난 사람으로서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고, 자기 지체를 의로움의 도구로 하느님께 바치십시오.”(로마 6,13)
이렇게 세례를 통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운명에 참여하여 죄에 죽고 새로운 삶에로 태어납니다. 이 새로운 삶은 예수님이 가르쳐주시고 모범을 보여주신 것처럼 하느님 아버지와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 혼자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도움으로 가능하게 됩니다.
세례는 성령을 선물로 줍니다
베드로 사도가 설교한 대로 우리는 세례를 통해서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됩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 머무르시면서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진정 여러분이 자녀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영을 우리 마음 안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 영께서 ‘아빠, 아버지’하고 외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대는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그리고 자녀라면 하느님께서 세워주신 상속자이기도 합니다.”(갈라 4,6-7)
아울러 성령은 예수님의 말씀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이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에서 잘 드러납니다.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요한 16,12-13) 성령의 도우심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진리로 깨닫고 받아들이게 된다는 뜻입니다. 또한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담대하게 증언하게 하도록 도와주십니다. 본래 예수님의 제자들은 두려움과 겁이 많았지만, 성령을 받은 다음에는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용감하게 예수님을 구세주로 선포합니다(사도 2,32). 한마디로 세례성사를 통해 우리에게 오신 성령은 우리를 내적으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곧 성령은 하느님이 무섭고 두려운 분이 아니라 자비로운 아버지이시며, 우리는 그분의 자녀라는 것, 그리스도의 말씀이 참된 진리라는 것을 깨닫고 그것을 용감하게 세상에 증거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십니다.
성령은 세례 받은 이들 안에 머무르시면서 당신의 목소리를 듣고 따르는 이들이 좋은 열매를 맺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입니다.”(갈라 5,22) 성령의 활동은 성령이 맺어주시는 열매를 통해 분명하게 드러나고, 이 열매를 통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4년 2월호, 손희송 베네딕토(신부, 서울대교구 사목국장, 서울 Se. 담당사제)]
[성사, 은총의 표징] 세례성사 (2)
세례성사로써 교회, 곧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됩니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성령강림 직후에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서 3천 명이 세례를 받고 새로운 신도가 됩니다. 이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사도 2,42)고 합니다. 세례를 받고서 교회공동체에 귀속되어 본격적으로 신앙생활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례를 통해 교회의 일원이 되면 “빵을 나누고”, 즉 성찬례(미사)에 참여하고, 다른 신자들과 함께 기도하면서 서로 친교를 나누게 됩니다.
세례성사를 받게 되면 신앙의 가족인 교회 공동체에 속하게 됩니다. 한 가정에서 자녀는 부모님의 가르침과 그분들이 마련해주시는 음식 그리고 화목한 가정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듯이 교회에 속한 신자들도 그러합니다. 교회 안에서 선포되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교회의 가르침을 따르면서, 또한 성체성사와 다른 성사들이 전해주는 은총을 받으면서 그리고 신자들 서로 간에 친교를 나눔으로써 영적으로 양육되어 신앙이 자라나고 튼튼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을 통해 교회 안에 머무르시면서 교회가 당신 구원을 전하는 도구가 될 수 있도록 이끌어주십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시고, 교회는 그분의 몸입니다. 따라서 세례를 받아 교회 공동체에 속하게 되면, 그리스도 몸의 지체가 되는 것입니다(1코린 12,12-31).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인 우리들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그분의 축복과 구원을 세상에 전해야 합니다.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1582)는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우리에게 이렇게 촉구합니다. “그리스도는 몸이 없지만 당신은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는 손이 없지만 당신은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는 발이 없지만 당신은 가지고 있다. 당신의 눈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자비로운 눈이 세상을 바라본다. 당신의 발로 그리스도는 좋은 일을 하러 나간다. 당신의 손으로 그리스도는 축복을 준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아시면서도 우리를 통해 당신의 구원 사업을 계속하십니다. 약하고 허물 많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손발이 된다는 것은 큰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례를 통해서 영혼의 지워지지 않는 인호를 받습니다
세례성사를 받아 그리스도의 지체가 된 이들은 영혼에 지워지지 않는 인호(印號)가 새겨집니다. 지워지지 않는 인호란 취소되지 않는 하느님의 선택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은 세례성사를 통해서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선택하셨는데, 이 선택은 결코 취소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은사와 소명은 철회될 수 없는 것”입니다(로마 11,29).
성경에 따르면 하느님은 당신이 선택하신 이스라엘 백성이 잘못을 거듭해도 그들을 완전히 버리지는 않으십니다. 또한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이 선택하신 제자들이 수난의 시간에 당신을 저버렸음에도 불구하고 내치지 않으시고 부활 후에 다시 그들을 부르십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은 세례를 통해서 당신 자녀로 선택하신 사람들을 끝까지 돌보십니다. 비록 인간이 잘못 판단하여 당신께 등을 돌리더라도 하느님은 인간에 대한 사랑의 눈길을 거두지 않는 분입니다. 인호는 바로 이런 사실을 전해주는 영적 표시입니다. 즉 지워지지 않는 인호란 세례를 통한 하느님의 선택은 결코 취소되지 않고 영원히 지속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호가 각인되는 세 가지 성사, 곧 세례, 견진, 성품 성사는 반복해서 받을 수 없습니다.
유아도 세례성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신약성서에서 언급되는 세례는 전부 성인(成人)세례입니다. 하지만 “온 집안사람들”(사도 16,15), “온 가족”(사도 16,33), “집안사람들”(1코린 1,16)이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에서 어린 아이에게도 세례를 주었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습니다. 온 가족에는 어린아이도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2세기경의 문헌들에는 유아에게 세례를 주었다는 기록이 분명하게 나옵니다. 우리나라와 같은 전교 지역은 성인세례가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유럽은 그리스도교가 널리 전파된 천 년 대 이후로는 대부분 유아세례이고, 성인 세례는 예외에 속합니다.
성인세례나 유아세례의 은혜는 같습니다. 하지만 신앙의 수용과 고백에 있어서는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유아세례에서는 어린이 자신이 직접적으로 신앙을 고백하지 못합니다. 그 대신 부모나 대부모가 어린이들 대신해서 신앙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이 고백은 아이가 신앙을 키워가도록 돕겠다는 약속이기도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유아세례는 아이에게 신앙을 심어주고 키워가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아세례 받은 아이가 자라서 자신 스스로 신앙을 고백하게 되는 기회를 갖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견진성사입니다. 어른은 먼저 신앙고백을 하고 세례를 받지만, 아이는 부모와 대부모의 신앙고백으로 세례를 받고 나중에 스스로 신앙고백을 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유아에게 세례를 줄 것이 아니라 그 아이가 어느 정도 자란 다음에 스스로 판단해서 세례를 받게 하면 어떨까 하는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실상 우리 주위에서는 유아세례가 당사자의 신앙의 자유를 제한, 속박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이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들은 신앙은 어린 아이가 성년이 된 후 - 부모의 강요 없이 -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합니다. 얼핏 보면 어린이의 자유를 존중해주는, 매우 합리적인 주장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유아세례가 신앙의 자유를 빼앗는다거나 부당한 조작이라는 주장에도 사실상 부모의 가치관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신앙 교육 없이 아이를 키우는 것을 ‘자유로운’ 교육이라고 얘기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신앙은 중요하지 않다’라는 부모의 확신이 반영된 것입니다. 부모는 학교 교육이 아이에게 꼭 필요하다고 믿기 때문에 아이들의 의사를 묻지 않고 학교 교육을 시키는데, 이를 강제적이라거나 자유를 박탈한다고 비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인생에 관한 올바른 가치관을 제시하고 영원한 삶에로 인도하는 신앙의 문을 열어주는 유아세례를 강제적이라거나 부당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문제의 핵심은 부모 자신이 그리스도교 신앙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이 소중한 진리라고 확신하느냐는 데에 있습니다. 부모 스스로 신앙을 정말 귀중하고 소중하다고 여긴다면 사랑하는 자식에게 가능한 일찍 그것을 전해주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외국의 한 어머니의 고백이 이런 점을 확인해줍니다. “우리는 아이들을 부모된 입장에서 양육하며, 아이에게 (지금) 먹기를 원하는지 묻지 않는다. 학교교육, 세상에 진출하는 문제에 있어 그들에게 최상의 것을 주고자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아이들에게 무관심한 사람들일 것이다. 만일 내가 세례를 거부하거나 미룰 수 있다고 생각할 때, 내 마음 속에서 고통을 느낀다. 내 아이에게 제일 좋은 것을 거부한다는 것은 정말 무서운 일일 것이다(어느 그리스도인 엄마가, 1970년 4월)”(레이-메르메, 『성사 안에 드러난 신앙』, 김인영 옮김, 분도출판사, 1994, 95쪽)
사람은 태어나면서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다른 사람의 영향 속에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하느님과 이웃을 향하기보다는 거스르게 하는 경향, 다시 말해서 인간을 죄로 유혹하는 악의 세력이 강하게 작용합니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는 부모라면 자녀들이 죄의 세력에 저항하여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 수 있는 힘을 기르도록 가능한 일찍부터 도와주지 않을까요? 신앙의 소중함을 깨닫고 체험한 부모는 분명히 자녀들이 가능한 일찍 세례성사를 받아 신앙의 길을 걷도록 인도할 것입니다.
세례의 은혜는 풍요로운 것입니다
세례 받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고, 원죄와 모든 본죄가 사해지며, 성령의 성전이 되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일원이 됩니다. 또한 하느님의 자녀로 선택된 것이 결코 취소되지 않기에 세례 인호를 받습니다. 세례성사의 풍요로운 은혜를 자주 되새기면서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옛 사람들은 배 밑바닥에 ‘밑짐’이라고 부르는 일정 무게의 짐을 항상 실어두었다고 합니다. 밑짐이 든든한 배는 풍랑에 불더라도 바로 무게 중심을 잡아서 큰 흔들림 없이 앞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세례성사의 은총은 ‘밑짐’과 같습니다. 하느님이 나를 사랑의 눈길로 바라보고 계신다는 사실, 비록 내가 부족하고 허물이 크더라도 그 눈길을 결코 거두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산다면, 인생여정에서 거센 세파를 잘 극복하면서 하느님의 나라를 향해 꿋꿋하게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세례성사는 참으로 소중한 영적 보물입니다. 그 보물을 마음속에 소중하게 간직하고 산다면 어떤 시련과 어려움 앞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입니다. 밑짐을 갖춘 배가 풍파에 흔들리다가도 다시 무게중심을 잡고 앞으로 나아가듯이 말입니다. 세례성사의 은혜를 자신의 삶에서 느끼고 체험하면서 거기서 영적인 힘을 길어내는 신자들이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4년 3월호, 손희송 베네딕토(신부, 서울대교구 사목국장, 서울 Se. 담당사제)]
2017-04-04 ㅣ No.205
세례성사
세례성사는 “그리스도교 생활 전체의 기초이며, 성령 안에 사는 삶으로 들어가는 문이며, 다른 성사들로 가는 길을 여는 문”(≪가톨릭 교회 교리서≫ 1213항)입니다. 이 세례성사와, 새 삶을 견고하게 하는 견진성사와, 제자들이 당신 모습으로 변화되도록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살과 피로 길러 주시는 성체성사는 ‘그리스도교 입문 성사’입니다.
세례성사를 받으면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 죄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며, 다른 성사를 받을 수 있는 자격을 받고, 불멸의 인호로 그리스도와 결합되어 교회와 하나가 됩니다. 세례를 받을 때 우리는 마귀와 마귀의 모든 행실과 유혹을 ‘끊어 버린다.’는 다짐과 성부·성자·성령의 삼위일체 하느님을 교회 공동체 안에서 굳게 ‘믿는다.’는 신앙을 고백합니다. 이는 우리가 어디에서 왔고, 어디를 향하고 있으며,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 고백하는 것입니다.
세례 예식은 집전자(주교, 사제, 부제 등)가 세례자의 이마에 세 번 물을 붓거나 그를 물에 세 번 담그면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무)에게 세례를 줍니다.”라고 말함으로써 이루어집니다. 이를 통해 세례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여 새 사람인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게 됩니다. 세례 때 받는 새로운 이름(세례명)은 그가 새 사람으로 태어남을 드러내며, 온전히 그리스도께 속하고, 가톨릭 교회에 속한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주님께서는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9-20)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아직 세례 받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세례를 받을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특히 구원의 은총이 무상으로 주어진다는 것을 잘 드러내는 어린이 세례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믿음을 자신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으로 여기는 부모는 자기 자녀에게 가장 좋은 선물인 신앙을 물려줄 것입니다. 신앙은 전해주고, 전해 받으며 그렇게 이어가는 것입니다.
새 신자들은 세례로 원죄와 본죄, 그리고 모든 죄벌까지도 용서받습니다. 다만 죄로 기우는 경향은 그대로 남아 있으므로, 새 신자들이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교회 공동체와 하나 되어 하느님 자녀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교회 공동체뿐 아니라, 특히 그 부모와 대부·대모가 자신의 역할에 충실해야 합니다. 자녀에게는 부모와 대부·대모의 보살핌이 필요하며, 또한 그 삶의 모습에서 자녀가 신앙생활을 배우기 때문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세례 때의 결심을 되새기며 완전하고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서로서로 힘이 되어 주어야겠습니다.
[길잡이, 2017년 1월호, 조성풍 신부(사목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