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31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기랴? 그들은 무엇과 같은가?
32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33 사실 세례자 요한이 와서 빵을 먹지도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34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35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을 지혜의 모든 자녀가 드러냈다.”
+ 루카 7,31-35
고집불통
반영억신부
대통령과 여야 영수회담이 있었습니다. 대통령과 야당대표는 서로에게 ‘국민적 저항’을 경고하며 맞부닥치고 있습니다. 대통령은 “야당에서 장외투쟁을 고집하면서 민생을 외면한다면 국민적 저항에 부딪칠 것이며, 그 책임 또한 야당이 져야 할 것”이라고 했고, 민주당 대표는 “대통령의 불통정치가 계속되고 민주주의 회복을 거부한다면 심각한 국민적 저항에 부딪칠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응수하며 “지금의 지지율에 도취해서 오만과 독선을 고집한다면 그 지지율은 순간적으로 물거품처럼 꺼지고 말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서로 국민을 볼모삼아 자기주장에 매어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진정으로 국민을 위하는 정치가 이루어지길 희망합니다.
“제 눈에 안경이라” 는 옛말이 있습니다. 남은 우습게 보는 것도 마음에 들면 좋게 여겨진다는 뜻입니다. 물론 자기는 좋게 생각하는데 남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서로 다른 모습을 인정하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중심으로 사는 고집이 살아 움직일 때가 있어 걱정입니다.
고집 센 어린이들의 비유를 들으면서 남 이야기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루카7,32).는 얘기는 고집을 피우면서 상대편을 그냥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피리를 부니까 장례식 놀이를 하고, 장례식 놀이를 하려고 하니까 결혼식 놀이를 하며 피리를 부는 고집불통의 어린이들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남이 잘되면 축하해 주고 어려움에 처하면 같이 아파하고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남이 잘되면 배가 아프고 시기질투의 마음이 생깁니다. 그리고 잘못되면 고소해 하고 그 기회를 이용하여 나의 잇속을 챙깁니다. 그리고는 사람들로부터 현명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습니다. 세상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다고 합리화해 버립니다. 실은 내가 그렇기 때문에 세상이 그렇게 되어가고 있는데 세상을 탓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결국 자기중심적인 삶은 우리를 구원으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을 너무 금욕적이라고 하여 미쳤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거룩하지도 않고 세리들이나 죄인들과 어울리는 세속적인 사람이라고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각자의 잣대를 가지고 판단하고 비판하며 자기 구미에 맞는 메시아, 구세주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정작 그분께서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요한1,11). 그러나 구원의 길은 자기 자신을 버리고 하느님께로 마음을 돌리는데 있습니다. 완고한 마음을 버리지 않는 한 구원의 길은 멀고도 멉니다.
아무리 은총이 크다 하더라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사람은 담지 못하고 준비된 사람에게서는 하느님의 지혜가 빛나게 됩니다. 지혜서를 보면 “지혜를 찾으러 일찍 일어나는 이는 수고할 필요도 없이 자기 집 문간에 앉아 있는 지혜를 발견하게 된다. 지혜를 깊이 생각하는 것 자체가 완전한 예지다.”(지혜6,14-15)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득 차 있는 그릇에는 아무 것도 담지 못하는 법입니다. 그릇을 비울 수 있는 지혜를 얻어 하느님의 풍성한 은총을 기꺼이 누리시기 바랍니다. “지혜로운 사람의 눈은 머리이신 그리스도님께 고정되어 있습니다. 빛 속에 거니는 사람이 어둠을 전혀 볼 수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님께 시선을 고정시킨 사람은 시선을 헛된 것에 둘 수 없습니다”(니사의 성 그레고리오). 사랑합니다.
지혜의 자녀
조재형신부
추석연휴가 시작되었습니다. 넉넉한 마음으로 가족들을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오랜만에 정을 나누고 즐거운 시간을 함께 했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오늘은 어머님이 계신 의정부로 갑니다. 교구청은 오늘, 내일 주방 자매님들이 추석을 지내기 위해서 휴무를 합니다. 덕분에 저는 어머님께 효도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난 월요일에 ‘청양 다락골 줄 무덤 성지’ 엘 다녀왔습니다. 성지를 보존하고, 아름답게 꾸민 신부님은 동창신부였습니다. 17년 동안 청양에 있으면서 성당을 예쁘게 지었고,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던 ‘줄 무덤’을 많은 사람들이 순례할 수 있는 성지로 변화시켰습니다. 17년 전에 동창신부에게 갔을 때가 생각납니다. 친구는 평상에 앉아서 저와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앞으로 이곳에 성당을 세울 것이고, 줄 무덤은 순례성지가 될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작은 평상에서 친구는 ‘꿈’을 이야기 하였고, 그것이 현실이 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가꾸어 놓은 동창신부는 후임 신부님에게 성지 담당을 넘겨드리고, 다른 곳으로 가셨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불가능 할 것 같았던 놀라운 일들을 동창신부는 하였습니다. 하고자 하는 열정이 가능하게 했습니다.
예전에 읽었던 글이 생각납니다. ‘술 취한 코끼리 길들이기’입니다. 그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인도의 어느 시골 마을은 앞에는 급하게 흐르는 강이 있고, 뒤에는 험한 산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아프면 급류 때문에, 험한 산 때문에 치료를 받으러 갈 수 없었습니다. 모두들 자신들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체념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할아버지 한 분이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삽으로 산의 흙을 퍼 날랐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무엇을 하는지 물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이렇게 대답을 하였습니다. 저 산에 터널을 만들 것입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아프면 치료 받으러 가도록 만들겠습니다. 사람들은 웃었습니다. 산은 저렇게 높은데, 할아버지는 이렇게 나이가 많은데 가능하겠습니까? 할아버지는 웃으며 말하였습니다. 저 산은 하나이지만 나에게는 아들이 있습니다. 그 아들은 또 자식을 낳을 것입니다. 언젠가 저 산에는 터널이 생길 것입니다. 할아버지의 말씀대로 지금 그 마을에는 터널이 생겼다고 합니다. 마을 사람들은 터널을 지나면서 아픈 사람을 치료하게 하였고, 도시의 물건들을 쉽게 가져 올 수 있었습니다. 불가능할 것 같은 일이지만 할아버지의 열정과 의지는 가능한 일로 만들었습니다.”
성지에서 수녀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무명 순교자들이 묻힌 줄 무덤은 우리가 늘 관리를 해 줍니다. 벌초도 하고, 비석도 손질합니다. 그런데 줄 무덤 옆에 있는 다른 무덤은 잡초가 우거지고, 무덤인지 모를 정도로 초라합니다. 영혼의 후손들은 순교자들의 무덤을 이렇게 잘 가꾸어 드리는데, 일반 후손들은 그렇게 못하는 것을 봅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돈, 명예, 권력, 출세, 성공’입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진정으로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것들은 더욱 큰 갈증으로 다가옵니다. 하지만 주님을 따르는 삶은 참된 기쁨과 행복에로 우리를 이끌어 줄 것입니다.
17년간 한 곳에서 ‘꿈’을 이룬 동창신부가 자랑스럽습니다. ‘꿈’을 이룬 다음에는 또 다른 곳으로 미련 없이 떠난 친구를 존경합니다. ‘꿈’은 장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꿈’은 바로 열정과 의지가 있는 ‘마음’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바로 동창신부에게 하신 말씀 같습니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을 지혜의 자녀가 드러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