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9주간 수요일] 산(生) 이들의 하느님 (마르12,18-27)

2026. 6. 3. 오전 8:2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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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603일 수요일

[연중 제9주간 수요일] () 이들의 하느님 (마르12,18-27)



1독서<내 안수로 그대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2티모1,1-3.6-12)

1 하느님의 뜻에 따라, 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에 따라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도가 된 바오로가,

2 사랑하는 아들 티모테오에게 인사합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은총과 자비와 평화가 내리기를 빕니다.

3 나는 밤낮으로 기도할 때마다 끊임없이 그대를 생각하면서, 내가 조상들과 마찬가지로 깨끗한 양심으로 섬기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6 그러한 까닭에 나는 그대에게 상기시킵니다. 내 안수로 그대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

7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8 그러므로 그대는 우리 주님을 위하여 증언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그분 때문에 수인이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

9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행실이 아니라 당신의 목적과 은총에 따라 우리를 구원하시고 거룩히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이 은총은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미 우리에게 주신 것인데,

10 이제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어 환히 드러났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폐지하시고, 복음으로 생명과 불멸을 환히 보여 주셨습니다.

11 나는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스승으로 임명을 받았습니다.

12 그러한 까닭에 나는 이 고난을 겪고 있지만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나는 내가 누구를 믿는지 잘 알고 있으며, 또 내가 맡은 것을 그분께서 그날까지 지켜 주실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화답송>시편123,1-2.2ㄴㄷㄹ(1) 주님, 저는 당신을 우러러보나이다.

하늘에 좌정하신 분이시여, 저는 당신을 우러러보나이다. 보소서, 종들이 제 주인의 손을 눈여겨보듯, 당신을 우러러보나이다.

몸종이 제 안주인의 손을 눈여겨보듯, 저희는 주 하느님을 우러러보며, 당신 자비만을 바라나이다.

 

복음<하느님께서는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마르12,18-27)

18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이 예수님께 와서 물었다.

19 “스승님, 모세는 어떤 사람의 형제가 자식 없이 아내만 두고 죽으면, 그 사람이 죽은 이의 아내를 맞아들여 형제의 후사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고 저희를 위하여 기록해 놓았습니다.

20 그런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가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21 그래서 둘째가 그 여자를 맞아들였지만 후사를 두지 못한 채 죽었고, 셋째도 그러하였습니다.

22 이렇게 일곱이 모두 후사를 남기지 못하였습니다. 맨 마지막으로 그 부인도 죽었습니다.

23 그러면 그들이 다시 살아나는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

2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

25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26 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에 관해서는, 모세의 책에 있는 떨기나무 대목에서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읽어 보지 않았느냐?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너희는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연중 제9주간 수요일 독서 (2티모1,1-3.6-12)

 

"내 안수로 그대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6-7)

 

사도 바오로는 티모테오의 은사를 다시 불타오르게 하기 위하여, 과거 자신이 안수했을 때 하느님께서 티모테오에게 주셨던 은사를 상기시키고 있다. 이 구절은 티모테오 전서 4장 14절 "그대가 지닌 은사, 곧 원로단의 안수와 예언을 통하여 그대가 받은 은사를 소홀히 여기지 마십시오" 라는 말씀과 상통한다. 몰론 표현의 차이는 다소 드러나지만, 이 둘은 거의 동일한 의미를 나타낸다.

 

그런데 티모테오 전서 4장 14절에서는 티모테오에 대한 안수가 원로단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언급된 반면, 여기서는 '내 안수로' 언급되어 있다.  이에 해당하는 '디아 테스 에피테세오스 톤 케이론 무'(dia tes epitheseos ton cheiron mu; through the laying on of my hands ; by the putting on of my hands)에서 전치사 '디아'(dia)는 '~에 의해서'( by), '~을 통하여'(through)라는 의미로서, 이것은 곧 '나의 안수를 통하여'가 된다.

 

그렇다면, 티모테오는 바오로 사도의 개인 안수를 받은 것인가?  아니면 원로단의 안수를 받은 것인가?  당시 초대 교회의 관례를 보면, 티모테오는 원로단의 안수를 받았을 것으로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오로가 자신이 개인적으로 안수를 한 것처럼 언급하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티모테오가 '하느님의 뜻에 따라, 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에 따라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도가 된' 자신(2티모1,1)의 계승자요, 대리자요, 영적인 아들이라는 사실을 각인시켜 주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하느님의 은사' 번역된 '토 카리스마 투 테우' (to charisma tu theu;the gift of God)에서 '카리스마'(charisma)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카리스마'는 본래 '거저 주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카리죠마이'(charizomai)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코린토 전서 1장 7절, 코린토 후서 1장 11절, 로마서 1장 11절 등에서 나타나는 바오로 사도의 특유한 용어이다. 이것은 그 자체로 성령께서 자신의 의지대로 그리스도인 각자에게 교회의 건설과 선익을 위해 베푸시는 은혜와 능력(특은)을 말한다.

 

바오로는 티모테오가 성령으로부터 부여받은 은사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그것은 틀림없이 '교회를 세우고', '가르치며 교회를 다스리고', '참된 자들과 거짓된 자들을 식별해서 그들을 권면하고 가르치고 인도하는' 은사일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로 하여금 이러한 은사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라고 권면하는 것이다.

 

한편, '안수'로 번역된 '에피테세오스 톤 케이론'(epitheseos ton cheiron)에서, '에피테세오스'는 본래 '얹어 놓다'라는 뜻을 지닌 '에피티테미'(epitithemi)에서 파생된 표현으로 70인역(LXX)에서 자주 등장하는데,이것은 '손'(타스 케이라스 ;tas cheiras)라는 표현과 함께 사용되어(사도6,6 ;8,19 ;13,3 ;1티모5,22) 안수 행위의 특징적인 모습을 잘 드러낸다. 이 행위는 안수하는 자를 통하여 안수받는 자에게 하느님의 능력이나 축복, 그리고 권위등이 전달되는 것을 상징한다.

 

티모테오 역시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하느님의 은사를 부여 받았다. 그런데 티모테오 전서 4장 14절에서 바오로는 이 은사가 '예언을 통하여' 부과되었다고 첨언하고 있는데, '예언에 의해 부과된 것'이라기 보다는 '예언과 함께 동반된 것'임을 드러낸다. 아마 이 예언은 티모테오가 안수를 받을 때, 안수에 동참한 원로들이 하느님의 말씀에 의거하여 베푼 교훈을 가리킬 것이다. 결국 이 예언은 테모테오가 스스로 자신을 하느님께서 부르신 사람으로 확증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대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

여기서 티모테오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는 사목적 직책과 소임과 관련된 것이다. 그런데 바오로는 티모테오가 받은 은사가 외적이거나 가시적인 형태로 드러나는 어떤 것이 아니라 내적인 은혜라는 점을 '그대가 받은'(호 에스틴 엔 소이; ho estin en soi ; which is in you)이란 표현을 통해 드러낸다. 더 정확하게 번역하면, '네 속에 있는' 이다. 곧 티모테오는 하느님께로부터 사목적 소임을 감당하기에 필요한 은사를 이미 부여받았으므로, 그 받은 은사를 다시 불일듯 일으키면 되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불태우십시오'라고 번역된 '아나죠퓌레인'(anazopyrein)본래 '계속해서 새롭게 불타오르도록 하다', '계속해서 극렬하게 타오르도록 하다' 라는 뜻을 지닌 '아나죠퓌레오'(anazopyreo)의 현재 부정사로서,'티모테오 안에 있는 은사가 새롭게 불타오르도록' 이라는 의미이다(to kindle of fresh ; to fan into flame).

 

바오로가 보기에, 티모테오는 거룩한 하느님의 사목을 위임받던 당시의 은사들이 식지않고 계속 뜨겁게 타오를 필요가 있었다.

아마도 당시 나이가 어렸던 티모테오는 내적으로는 교회 내에서 활동하던 거짓 교사들로인해, 그리고 외적으로느 점차 가중되는 로마 제국의 그리스도교 탄압으로 인하여 크게 위축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로마 감옥에 있었던 바오로는 자신의 영적인 아들 티모테오에게 에페소 교회의 지도자로서의 사목을 잘 감당하게 하기 위하여, 안수받을 때의 일을 회상시키는 것이다. 무릇 모든 그리스도교 봉사자들은 그들 자신이 받은 일들이 아무리 보잘것 없고 작은 일일 지라도,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그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을 만한 특별한 은사를 주시어 그 일을 맡긴다는 사실을 지속적으로 확신해야 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원문에는, 원인이나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가르'(gar ; for)가 포함되어 있어서, 티모테오에게 그의 안수식을 상기시켜 그가 부여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워야 하는 이유를 밝히고 있다. 그 이유를 밝힘에 있어, 바오로는 영어의 'not ~ but' 용법처럼, 전자를 부정함으로 후자를 보다 강조하는 '우 ~ 알라'(u ~alla)란 표현을 사용한다.

 

바오로가 먼저 부정하는 것은 '비겁함의 영'이다. '비겁함의'로 번역된 '데일리아스'(deilias)는 본래 '의기소침함' 이나 '비겁함', '두려워함'을 뜻한다. 따라서 여기서 언급된 '비겁함의 영' 곧 '의기소침한 마음'이나 '비겁한 마음',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번역되고 이해됨이 타당하다. 바오로가 이 부분에서 이런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당시 티모테오로 하여금 자신을 되돌아보게 하고자 함이다.

 

그렇다면, 티모테오가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영(마음 혹은 정신 ;프뉴마 ;pneuma)은 무엇인가?

그것은 일차적으로 '힘의 영'이다. 여기서 '힘'(능력)으로 번역된 '뒤나메오스'(dynameos)는 바오로 특유의 표현으로, 로마서 1장 16절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먼저 유다인에게  그리고 그리스인에게까지 믿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라는 어구에서 강력하게 표명된 바로 그 힘(능력)이다.

 

나아가, 티모테오가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것은 '사랑의 영'이다. 여기서 '사랑'으로 번역된 '아가페스'(agapes)는 갈라디아서 5장 22절에서  표명된 대로, 성령의 열매 가운데 하나로서 두려움을 물리치는 힘이다(1요한4,18).

 

마지막으로, 하느님께서 부여하는 것은 '절제의 영'이다. 여기서 '절제의 영'으로 번역된 '소프로니무스'(sophronimus)의 원형 '소프로니스모스'(sophronismos)는 '보존하다'(루카17,33)라는 의미의 동사 '소죠'(sozo)와 '생각'이란 뜻의 명사 '프렌'(phren)의 합성어로서, '근신하다', '통제하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소프로니죠'(sophronizo)에서 파생한 명사이다. 이것은 단적으로 말해 '자기 통제'(self-control)을 말한다. 

 

 

 

 


  연중 제9주간 수요일복음 (마르12,18-27)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에 관해서는, 모세의 책에 있는 떨기나무 대목에서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읽어 보지 않았느냐?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너희는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25-27)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에서 원문에 있는 '알르'(all')의 기본형 '알라'(alla; but)의 번역이 생략되어 있다. '알라'(alla)는 주로 절이나 문장들 사이에서 정도의 차이나 대조를 나타낼 때 '그러나'의 뜻으로 쓰이는 접속사인데, 여기서는 '오히려'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부활한 사람이 장가 시집을 가기는 커녕 '오히려' 하늘의 천사들과 같게 된다는 이 말씀은 모세오경만을 정경으로 인정하여 부활과 내세를 부인하는 사두가이들의 잘못된 견해를 완전히 뒤집는 말씀이며, 이런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알라'(alla) 라는 접속사를 사용하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혼인하고 자녀를 낳으며, 나중에는 결국 죽는 이 현세를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혼인하지도 않고 영원히 죽지 않는 하늘 나라도 창조하셨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신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부활한 사람이 천사와 같은 '지위'의 존재가 됨을 지적하시는 것이 아니라, 다만 부활 후 인간은 혼인의 문제에 있어서 성적(性的)이고 생식적인 문제에 있어서 이 땅의 현세적 존재와는 전혀 다른 존재, 즉 영원 불사 불멸의 존재가 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천사들과 같아진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천사'를 언급함으로써 천사의 존재를 부인하는 사두가이들의 잘못된 성경관을 지적하고 계신다. 그들은 모세오경을 중요하게 여기면서도, 현실적이고 세속적인 만족 때문에 성경을 왜곡하여 부활 뿐만 아니라 천사들의 존재를 분명히 가르치고 있는 말씀들(창세19,1.15; 28,12; 32,1)을 의도적으로 비켜갔다.

 

한편, 마르코 복음 1226절의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에서 '되살아난다'에 해당하는 '에게이론타이'(egeirontai; rise; rising)'일으키다', '다시 살리다'라는 뜻을 갖는 '에게이로'(egeiro)의 직설법 현재 수동태이다. 부활 논쟁에 있어서의 부활 시점은 미래인데, 여기서 '에게이로'(egeiro)는 현재 시제가 사용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진리'로서의 '부활' 교리 문제를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또한 이 동사가 수동태로 쓰였다고 하는 것은 부활이 죽은 이의 능력이나 자연 발생적 사건이 아니라 외부의 어떤 능력, 즉 하느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것을 암시한다.

 

모세오경만을 정경으로 인정하여 부활과 내세를 부인하는 사두가이들이 모세오경을 통해 문제를 제기했던 것(마르12,19)과 같이, 예수님께서도 모세오경 중에서 답변을 이끌어내셔서 그들을 반박하신다. 그것이 바로 탈출기 31~6절의 말씀인데, 떨기나무 대목에서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직접 당신 자신이 누구신지를 밝히신 말씀이다.

 

원문 성경은 동사를 생략하고 있지만, 병행 구절인 마태오 복음 2232절에는 '~이다'라는 뜻의 '에이미'(eimi) 동사 현재형이 사용된 것을 볼 때, 여기서도 그 뜻이 분명하다.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당신 자신을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의 하느님으로 계시하시면서 동사를 현재형으로 사용하신 것은 그들의 하느님 되심이 과거의 사실이 아니라 현재의 사실임을 말씀하신 것이다.

 

모세가 이 말씀을 들었을 떄는 이미 그 조상인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이 죽은 지 오랜 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현재형으로 말씀하신 것은 하느님께서 죽은 그들을 부활시켜 거느리고 계신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그들이 이미 부활하여 하느님과 함께 현존하고 있으며, 하느님의 영광에 동참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이나 이사악, 야곱이 육체적 죽음으로 그들의 모든 것이 끝났다면, 그들의 죽음과 더불어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도 끝난 것이다. 그러나 모세 당시에도 그리고 지금도 언제나 현재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으로 불리는 것은 아브라함과 아사악과 야곱이 살아 있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연중 제9주간 수요일] 오늘의 묵상 (최정훈 바오로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두가이들과 부활에 관한 논쟁을 벌이십니다.

사두가이들은 죽은 형제의 아내를 자신의 아내로 맞아들이는 사회적 관습을 근거로 부활을 부정합니다.

그러나 부활은 사회적 관습에 달려 있지 않고, 무한하신 하느님의 사랑에 바탕을 둡니다.

부활은 하느님의 끝없는 사랑에 대한 선언으로서, 부활 신앙은 죽음 뒤에도 하느님께서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돌보신다는 믿음입니다.

사실 생명이 끝나는 것으로 보이는 죽음은, 소중한 사람의 죽음을 경험하는 남겨진 이들에게도 매우 고통스럽습니다.

다시는 회복될 수 없어 보이는 영원한 상실은 유족과 가까운 친구들에게 크나큰 슬픔과 고통을 안겨 줍니다.

그런데 이 슬픔과 고통이 부활 신앙안에서 극적으로 변화됩니다.

한 사람의 온 생애를 돌보셨던 주님께서 그 사람이 죽은 뒤에도 계속해서 돌보아 주신다는 믿음, 그래서 지금 그의 영혼이 주님 품에서 아무 고통 없이 평화를 누리고 있다는 믿음, 그리고 머지않은 미래에 다시 만날 수 있다는 믿음은 남은 이들의 슬픔과 고통을 기쁨과 희망으로 바꿉니다.

복음에서 이야기하듯,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십니다.

주님을 믿고 살아간 이들은 모두 주님 안에서 기쁨과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믿고 살아간다면, 먼저 죽음의 강을 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이들과 다시 만나고, 함께 웃으며 함께하였던 오늘을 추억할 것입니다.

영원히 우리를 지켜 주시고 돌보아 주시는 하느님께서 그 시간을 준비하셨을 것입니다.

 

(최정훈 바오로 신부)

 

 

 

 

 


 [연중 제9주간 수요일]

주님에 의해 죽는 것이 승리(勝利).

 (마르12,18-27)

18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이 예수님께 와서 물었다. 19 “스승님, 모세는 어떤 사람의 형제가 자식 없이 아내만 두고 죽으면, 그 사람이 죽은 이의 아내를 맞아들여 형제의 *후사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고 저희를 위하여 기록해 놓았습니다.

= 복음은 왜, 사람이 반드시 후손을 낳아야 한다고 할까? 원시 복음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창세3,15) 15 나(하느님)는 너(뱀)와 그 여자 사이에, 네 후손과 그 *여자의 후손 사이에 적개심을 일으키리니 여자의 후손은 너의 머리에 상처를 입히고 너는 그의 발꿈치에 상처를 입히리라.”

= 여자(교회-성도)는 반드시 하느님의 말씀을 선악의 말로 먹게한 뱀, 그 뱀의 선악의 심판으로 자신에게 죄를 짓게(죽게) 한 그의 머리(생각)를 밟아, 그 뱀의 생각인 거짓말(선악)을 없애줄 후손(구원자,예수)을 반드시 낳아야(깨달아야)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다시 살 수 있다.

곧 부활 후 구원 받을 수 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도 마리아처럼 반드시 우리의 죄를 대속 할 예수 그리스도를 낳아야(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그 원시복음의 후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다.(루가24,27.46 사도28,23 참조) 그래서 본문이 후사를 낳아야 한다는 표현보다 *후사를 일으켜야 한다는 표현을 하신 것이다.

 

20 그런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가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21 그래서 둘째가 그 여자를 맞아들였지만 후사를 두지 못한 채 죽었고, 셋째도 그러하였습니다. 22 이렇게 일곱이 모두 후사를 남기지 못하였습니다. 맨 마지막으로 그 부인도 죽었습니다. 23 그러면 그들이 다시 살아나는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 2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

= 성경을 하느님의 뜻으로 올바로 깨닫지 못하고 인간의 뜻으로 잘못 받았기 때문이라는 말씀이다.

 

25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 우리가 생각하는 성 가정이 하늘에는 없다. 모두 그리스도의 지체로, 같은 형제자매가 된다. 그렇게 새 성 가정이 된다.

 

26 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에 관해서는, 모세의 책에 있는 떨기나무 대목에서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읽어 보지 않았느냐?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 먼저 아브라함의 하느님을 보자- 다른 신의 상(우상)을 만들어 부자로 살았던 그 불가능의 아브​람을 찾아가시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으로 만들어(구해)내신 그 아브라함의 하느님이시다.(여호24,2 사도7,2 참조)

하느님께서 후손이 없던 아브람에게 후손을 주겠다고 약속을 하셨으나 그 약속은 듣지 않고 아브람은 계속 자신의 뜻, 힘, 방법으로 자식을 낳으려 애쓴다.

그래서 하느님은 그의 고집, 힘이 다 빠질 때까지 기다리신다. 그리고 그의 나이 100세에서 야 후손 이사악을 주신다. 그때서 야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심을 깨닫고 하느님 만을 의지하는 믿음의 소유자가 된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어린 양 일곱 마리와 브엘느세바(일곱샘), 곧 안식(7)의 어린 양으로 오셔서 죄인들을 구해내실, 하느님의 일곱, 그 구원의 약속을 깨닫게 된다.(창세21,30-34참조) 그 아브라함(믿음)의 하느님이시다. 믿음을 만들어 내신 하느님 이시다.

*그리고 그 아브라함을 통해 태어난 이사악은, 자신을 제물로 바치려(죽이려)했던 그 아버지의 뜻에 끝까지 순명 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그 이사악의 하느님이시다.

 

(창세22,2-3) 2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사악을 데리고 모리야(골고타의 줄기) 땅으로 가거라. 그곳, 내가 너에게 일러 주는 산에서 그를 나에게 번제물로 바쳐라.” 3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얹고 두 하인과 아들 이사악을 데리고서는, 번제물을 사를 장작을 팬 뒤 하느님께서 자기에게 말씀하신 곳으로 길을 떠났다.

= 외아들(獨生子) 예수님도 나귀를 타고 죽음을 향해 가셨다.

 

(창세22,6) 6 그러고 나서 아브라함은 번제물을 사를 *장작을 가져다 아들 이사악에게 지우고, 자기는 손에 불과 칼을 들었다. 그렇게 둘은 함께 걸어갔다.

= 대속의 제물(번제물)로 태워질, 죽어질 그 십자 나무(장작)를 예수님도 친히 지고 가셨다.

 

(창세22,9-10) 9 그들이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곳에 다다르자, 아브라함은 그곳에 제단을 쌓고 장작을 얹어 놓았다. 그러고 나서 아들 이사악을 묶어 제단 장작 위에 올려놓았다. 10 아브라함이 손을 뻗쳐 칼을 잡고 자기 아들을 죽이려 하였다.

= 힘이 있던 젊은 청년 이사악이다. 자신을 죽이려는 늙은 아버지를 밀쳐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사악은 순명했다. 죽기까지 순명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다. 그 이사악(예수)의 하느님이시다. 그리고 이사악을 살리신다.

예비 하셨던 숫양을 대신 번제물로 바치게 하시고 *그리고 이사악의 아들 야곱이다.

아버지와 형을 속여 맏아들의 권리를 차지하고, 도망갔던 야곱이다. 그의 이름 그대로 ‘그는 걸려 넘어지게 하는 자’, 속이는 자였다. 그래서 도망가 살았던 외삼촌에게 속고, 속이는 삶을 살았다. 그 후 야곱은 외삼촌에게서 다시 도망 나와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자신에게 속아, 맏아들의 권리인 하늘의 복을 빼앗긴 형이 두려웠다.

 

그래서 가족들을 앞서 보내고 기도를 하게 되는데~

(창세32,24-29) 24 야곱은 이렇게 그들을 이끌어 내를 건네 보낸 다음, 자기에게 딸린 모든 것도 건네 보냈다. 25 그러나 야곱은 혼자 남아 있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하느님) 나타나 동이 틀 때까지 야곱과 씨름을 하였다. 26 그는 야곱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야곱의 *엉덩이뼈를 쳤다. 그래서 야곱은 그와 씨름을 하다 *엉덩이뼈를 다치게 되었다. 27 그가 “동이 트려고 하니 나를 놓아 다오.” 하고 말하였지만, 야곱은 “저에게 축복해 주시지 않으면 놓아 드리지 않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8 그가 야곱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묻자, “야곱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9 그러자 그가 말하였다. “네가 하느님과 겨루고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으니, 너의 이름은 이제 더 이상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 불릴 것이다.”

= 속이고 걸려 넘어지게 하는 자가, 승리의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물론 야곱(이스라엘)이 이긴 것은 아니다. 하느님께서 이긴 것으로 간주해 주신 것이다.

 

(창세32,31-32) 31 야곱은 “내가 서로 얼굴을 맞대고 하느님을 뵈었는데도 내 목숨을 건졌구나.” 하면서, 그곳의 이름을 프니엘이라 하였다. 32 야곱이 프니엘을 지날 때 해가 그의 위로 떠올랐다. 그는 *엉덩이뼈 때문에 *절뚝거렸다.

= 야곱은 절뚝거리는 자가 되었다. 그것이 그의 승리이다. 하느님의 지팡이, 곧 그분의 말씀을 의지하는 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뜻, 말씀이 야곱(죄)에서 이스라엘(하늘)로 재 창조로 구(求)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야곱으로 살다가 늙어서 야 하느님의 뜻을 찾는 이스라엘로 산다. (창세46,1) 하느님께서 계속 쫓아 다니시면서 이끄신 것이다. 그 야곱의 하느님이시다.

 

결론- 27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너희는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그들은 모두 육적으로는 죽었으나 하느님 안에서 영으로 살아있는 ‘산 사람들’이다. 우리 또한 아브라함 처럼, 이사악 처럼, 야곱 처럼, 하느님의 지팡이 곧 구원, 그 약속의 말씀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깨달아야 (의지해야) 하는 것이다.

내 뜻, 고집, 자아를 부인하고, 죽이고,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산(生) 이요, 승리(勝利)인 것이다. 그것이 하느님의 사람이 되는 길이다.

 ​

(1코린15,57) 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립시다.

 

☨은총이신 천주의 성령님! 저희가 그리스도의 지체로, 산 이로, 하느님의 사람이 되었음을 깨닫고, 믿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20260603일 수요일

[연중 제9주간 수요일]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오늘 복음에서 사두가이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그들은 대체로 부유한 귀족 계층이었고, 성전과 대사제직의 권력 가까이에 있는 이들이었습니다.

로마의 지배 권력과 협력하며 특권을 지키는 데 익숙하였기에, 신앙의 열정보다 체제를 유지하는 데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고, 오직 모세오경, 곧 토라만을 하느님의 계시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질문은 진리를 찾기 위해서라기보다, 부활이라는 빛을 꺼뜨리려는 시험처럼 보입니다.

그들은 신명기의 결혼 규정을 꺼내 듭니다(25,5-6 참조). 죽은 뒤에도 이 세상의 질서가 그대로 이어질 것이라는 가정 위에서, 부활을 모순으로 몰아가려 합니다.

질문은 논리의 옷을 입고 있지만, 그 속에는 믿음을 조롱하려는 차가운 의도가 숨어 있습니다.

이러한 물음에 예수님께서는 단호히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마르 12,24)

부활은 그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새롭게 보여 주시는 존재의 방식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이 땅의 삶을 되풀이하며 연장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친교 안에서 새롭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두가이들이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토라에서 증거를 찾으십니다.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탈출 3,6.1516; 4,5)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 오래전에 죽은 이들의 이름을 당신의 이름 안에 품고 계신다면, 그들은 사라진 존재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십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위로가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하신 이들의 이름을 잊지 않으시고, 죽음조차도 우리를 향한 그분의 기억과 사랑을 끊어 내지 못합니다.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손을 끝까지 붙들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 그 손을 놓지 않았으면 합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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