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06월 01일 월요일
[연중 제9주간 월요일] 포도밭 소작인 비유 (마르12,1-12)
제1독서<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이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하셨습니다.>(2베드1,2-7)
사랑하는 여러분, 2 하느님과 우리 주 예수님을 앎으로써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풍성히 내리기를 빕니다.
3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영광과 능력을 가지고 부르신 분을 알게 해 주심으로써, 당신이 지니신 하느님의 권능으로
우리에게 생명과 신심에 필요한 모든 것을 내려 주셨습니다.
4 그분께서는 그 영광과 능력으로 귀중하고 위대한 약속을 우리에게 내려 주시어, 여러분이 그 약속 덕분에, 욕망으로 이 세상에 빚어진 멸망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하셨습니다.
5 그러니 여러분은 열성을 다하여 믿음에 덕을 더하고 덕에 앎을 더하며,
6 앎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신심을, 7 신심에 형제애를, 형제애에 사랑을 더하십시오.
<화답송>시편91,1-2.14-15ㄱㄴ.15ㄷ-16(◎2ㄷ) ◎ 저의 하느님, 저는 당신께 의지하나이다.
○ 지극히 높으신 분의 보호 아래 사는 이, 전능하신 분의 그늘 안에 머무는 이, 주님께 아뢰어라. “나의 피신처, 나의 산성, 나의 하느님, 나 그분께 의지하네.” ◎
○ 그가 나를 따르기에 나 그를 구하여 주고, 내 이름 알기에 나 그를 들어 높이리라. 그가 나를 부르면 나 그에게 대답하고, 환난 가운데 내가 그와 함께 있으리라. ◎
○ 그를 해방시켜 영예롭게 하리라. 오래오래 살도록 그에게 복을 내리고, 내 구원을 그에게 보여 주리라. ◎
복음<소작인들은 주인의 아들을 죽이고 포도밭 밖으로 던져 버렸다.>(마르12,1-12)
예수님께서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에게 1 비유를 들어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어떤 사람이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그리고 소작인들에게 내주고 멀리 떠났다.
2 포도 철이 되자 그는 소작인들에게 종 하나를 보내어, 소작인들에게서 포도밭 소출의 얼마를 받아 오라고 하였다.
3 그런데 소작인들은 그를 붙잡아 매질하고서는 빈손으로 돌려보냈다.
4 주인이 그들에게 다시 다른 종을 보냈지만, 그들은 그 종의 머리를 쳐서 상처를 입히고 모욕하였다.
5 그리고 주인이 또 다른 종을 보냈더니 그 종을 죽여 버렸다. 그 뒤에 또 많은 종을 보냈지만 더러는 매질하고 더러는 죽여 버렸다.
6 이제 주인에게는 오직 하나, 사랑하는 아들만 남았다. 그는 마지막으로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
7 그러나 소작인들은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자. 그러면 이 상속 재산이 우리 차지가 될 것이다.’ 하고 저희끼리 말하면서,
8 그를 붙잡아 죽이고는 포도밭 밖으로 던져 버렸다.
9 그러니 포도밭 주인은 어떻게 하겠느냐? 그는 돌아와 그 소작인들을 없애 버리고 포도밭을 다른 이들에게 줄 것이다.
10 너희는 이 성경 말씀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11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12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을 두고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을 알아차리고 그분을 붙잡으려고 하였으나 군중이 두려워 그분을 그대로 두고 떠나갔다.
연중 제9주간 월요일 제1독서 (2베드1,2-7)
"그분께서는 그 영광과 능력으로 귀중하고 위대한 약속을 우리에게 내려 주시어, 여러분이 그 약속 덕분에, 욕망으로 이 세상에 빚어진 멸망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하셨습니다." (4)
그리스도께서는 현재의 영적 삶에 필요한 '생명과 신심에 필요한 모든 것'(3)을 주셨을 뿐 아니라 미래를 향한 '귀중하고 위대한 약속' 또한 주셨다.
이처럼 3,4절에서는 동일하게 '주셨다'라는 의미의 단어가 사용된다. 이에 해당하는 동사의 원형 '도레오마이'(doreomai)는 명사형 '도레마'(dorema)가 '선물'이라는 의미라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선사하다'는 뜻을 지닌다. 그리스도께서 주고 싶은 마음이 흘러 넘쳐서 주신 것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영광과 능력으로'는 본문에 '디 혼'(di hon; 이로써)으로 나오며, '그것들을 가지고'라는 뜻으로 쓰여, 앞절의 '영광과 능력을 가지고' 라는 의미이다. '독세 카이 아레테'(doxe kai arete; 영광과 능력)는 당시 희랍 작가들에게는 익히 잘 알려진 관용화된 문구로서, 어떤 위대한 인물의 업적을 기릴 때 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본문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능력을 칭용하는 문맥에서 사용되고 있으며,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능력의 현시, 즉 그의 십자가 대속 사업과 부활에 기초한 은총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약속을'에 해당하는 '에팡겔마타'(epanggelmata)는 '에팡켈마'(epanggelma)의 복수형으로 '약속된 것들'(the thing promised)로, 미래에 대한 약속을 강조하는 본 서간의 전반적인 문맥으로 볼 때, 이 '약속'은 그리스도의 영광과 능력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으로, 그리스도인들이 미래의 일들인 그리스도의 재림과 새 하늘과 새 땅에 참여하게 되는 것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2베드3,4.9.12.13)
이 약속은 신도들에게 매우 큰 가치와 은혜가 되기 때문에, 베드로 사도는 이것을 강조하기 위해 '귀중하고' 뿐 아니라 '위대한'(메기스타; megista)이란 최상급의 표현을 쓰고 있다. 사실, 장차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것보다 더 귀중하고 큰 가치가 무엇이 있겠는가?
'여러분이 그 약속 덕분에 ~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새 하늘과 새 땅에 관한 약속을 주셨기 때문에, 그 약속에 힘입어 신도들이 하느님의 본성(성품)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으로도 볼 수 있으며, 또한 신도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그 약속을 주셨다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본문에서 '히나(hina)가정법 구문'이 사용되어, 영어의 'in order that' 의 번역처럼, 목적이나 결과의 의미를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욕망으로 이 세상에 빚어진 멸망에서 벗어나'
그리스도께서 주신 고귀한 약속을 가진 자는 당연히 옛 본성의 욕망(정욕)에서 나오는 세상의 썩어질 것을 피한다. 여기서 '욕망으로'에 해당하는 '에피티미아'(epithymia)는 '욕망', '탐심', '욕심', '정욕'으로 번역되는 '에피티미아'의 여격이다.
이 단어는 좋은 의미의 열망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는 '에피포테시스'(epipothesis)나 '에피포티아'(epipothia)와는 달리, 항상 인간을 지배하는 죄에 대한 하나의 표현으로 기술한다. '에피티미아'는 하느님을 떠난 인간 존재 속에 있는 열정적인 힘으로서, 육체의 욕심을 추구한다.
이것은 자기 생의 중심을 하느님이 아닌 자신 안에서 발견하고 자신을 신뢰하며, 다른 사람보다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려는 죄스런 인간 내면에 뿌리내린 성향을 나타낸다.
이러한 욕망은 모든 방면에서 나타나는데, 부정한 성적 욕망, 하느님보다 높아지고하 하는 교만, 물질적인 욕심, 타인의 재물을 탐내는 것들이다. 따라서 자기 자신을 욕망의 충동에 내어맡긴 사람은 이미 죄의 지배아래 있는 것이고, 이러한 사람은 궁극적으로 멸망에 이를 수 밖에 없다.
'빚어진 멸망' 에 해당하는 '프토라스'(phthoras)의 원형 '프토라'(phthora)는 '썩어짐', '썩은 것', '부패', '멸망' 등으로 번역되는 명사인데, 이 단어는 기본적으로 육체적 썩어짐 뿐만 아니라, 정신적, 도덕적 부패까지도 모두 포함한다. 신도는 마땅히 이러한 것들로부터 피해야 한다.
여기서 '벗어나'로 번역된 '아포퓌곤테스'(apophygontes)는 '~로부터 멀리 떨어져' 라는 의미의 전치사 '아포'(apo)와 그 자체로 이미 '피하다', '도망하다' 란 뜻이 있는 동사 '퓨고'(phygo)의 합성어로서, '~로부터 피하여 도망하다' 라는 매우 강조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특히 부정(不定)과거 분사 능동태로 쓰였으므로, 적극적인 의지를 가지고 피해야 함을 암시하고 있다.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약속을 지니고 있는 자는 세상의 썩어질 것을 피하는 한편, 중립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고 적극적으로 하느님의 본성(성품)에 참여한다. 만일 썩어질 것을 피한 후에, 즉각적으로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지 않고, 오랫동안 중립 상태로 남아 있게 되면, 거기에 잡초가 돋아나고 엉겅퀴가 우거져, 다시 옛 상태로 되돌아 갈 수 있다.
따라서, 이 세상에 빚어진 멸망에서 벗어난 자는 밭을 일구고 잡초를 뽑아낸 후에, 곧바로 곡식의 씨를 뿌리고 유실수를 심는 것처럼, 즉각적으로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해야 한다.
본문에서 '본성에' 에 해당하는 '퓌세오스'(physeos)의 원형 '퓌시스'(physis)는 '본성', '본질', '성품'등을 뜻하는 말로서, '어떤 인격체를 다른 이로부터 구별해 주는 본유적(本有的) 특성과 속성의 총체'를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즉 이것은 하느님께서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특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고 '하느님의(신:神)의'에 해당하는 '테이오스'(theios)는 그리스 사상에 따른 이교적 표현이다. '신기한 능력'과 '신의 성품'이라는 그리스 표현은, 초기 그리스의 철학적, 종교적 관용어였다. 베드로 사도는 당시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이런 표현들을 의도적으로 사용하여 그의 서간을 전개시키고 있다.
이것은 이교도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인간의 내면에 본래부터 신과 같은 거룩한 성품이 있어서, 이것을 잘 개발하면 성인이 되고, 거스르게 되면 악인이 된다는 사실을 시사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라고 볼 수 있는 자율적 인 힘이 아니라, 베드로 사도는 그리스도와의 참된 일치를 통해서 성령의 친교로 하느님의 본성(성품)에 참여하게 됨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여러분은 열성을 다하여 믿음에 덕을 더하고 덕에 앎을 더하며, 앎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신심을, 신심에 형제애를, 형제애에 사랑을 더하십시오." (5-7)
5-7절은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할 신도들이 지녀야 할 구체적인 덕목들에 대한 권면이다. 이중에 가장 기초적인 덕목은 '믿음'이다.
믿음(pistis; 피스티스)은 전적인 하느님의 선물이며(에페2,8.9) 우리를 기꺼이 받아주시는 하느님의 은혜에 대한 응답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인은 믿음을 통해서 구원을 얻게되며, 세상과 썩어질 것을 피하고,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된다. 따라서 믿음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바탕이 된다.(로마1,15 ; 히브11,11)
베드로 사도는 이 '믿음'에 '덕'을 공급하라고 말한다. 여기서 '덕'에 해당하는 '아레텐'(areten)의 원형'아레테'(arete)는 3절에도 나오지만, '도덕적인 탁월성' 을 말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덕을 말하는 것으로서(3절),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닮음으로 도덕적 탁월성을 배울 수 있음을 시사한다.
그러니까, 비그리스도교 그리스문헌에 등장하는 인간 본연의 성품인 미덕과는 다른 것이다. 덕행실천에 있어서 인간의 자율성을 주장하는 그리스의 스토아 철학의 인간관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베드로 사도가 말하는 덕은 인간의 능력이 아니고, 인간이 성령의 능력으로 닦게 되는 성령의 열매이며(갈라5,22), 상호간의 사랑에 공헌하는 것이며,궁극적으로 하느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즉 신약에서의 덕은, 성령으로 거듭(새로; 다시)나, 하느님의 형상을 되찾은, 새로운 피조물의 행동들이며 특징들인 것이다.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도, 실제 생활에 있어서 실천적 덕이 부족함으로 인해, 타인에게 경멸의 대상이 될 수 있으므로, 베드로 사도는 그리스도인의 기본 덕목으로 믿음을 요구한 이후에, 이에 더하여 덕을 강조하는 것이다.
'덕에 앎을 더하여'
본절에서 말하는 '앎'(지식; 그노시스 ; gnosis)는 2절에 나오는 '지식' 곧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로서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뜻하는 '에피그노시스'(epignosis)와는 달리, '덕스러운 생활에 필요한 하느님의 뜻과 목적에 대한 식별력' 즉 구체적인 삶 속에서 하나하나 터득해 가는 '실제적인 지혜'를 가리키는 말이다.
하느님께서 요구하시는 수준 높은 성숙한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지식이 요구된다. 이 지식이 결여되면, 맹목적인 신앙인이 되기 쉽고, 사탄과의 영적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효과적인 대처를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게 된다.
'앎에 절제를'
'절제' 곧 '엥크라테이아'(engkrateia)는 '~안에'를 뜻하는 전치사 '엔'(en)과 '힘', '능력'등의 의미를 지니는 명사 '크라토스'(kratos)의 합성어에서 유래하며, '내부적으로 향하는 힘', '즉 '자제력'을 의미한다. 이것은 그 성격상 하느님을 향한 것도, 타인을 향한 것도 아닌, 자기 자신을 향한 미덕이라 할 수 있다.
'절제'는 성령의 열매에 속하는 것으로(갈라 5,23), 그리스의 윤리학에 있어서도 등장하는데, 모든 문제에 있어 오감에 영향을 주는 자기 훈련을 의미한다. 또한 무절제한 육체적 방종을 삼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자유를 방종의 기회로 삼는 자들(갈라5,13)은 성령을 따라 절제의 열매를 거두어야 한다. 베드로 사도는 여기서 이 덕목을 택하여 주지시킴으로써, 교회내의 이단자들의 방종(2 베드 2,2; 3,3)에 대해 일격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지식을 가진 자 가운데 그 지식을 자기 방종의 기회로 삼는 자가 많다. 지식 그 자체에는 어긋나지 않으나, 믿음 약한 형제를 고려하지 않는 자유로운 행동이 타인의 신앙에 걸림돌이 되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지식(앎)이 있는 자에게는, 지식을 넘어서 스스로 절제함으로써 덕을 세울 수 있는 자세가 요구된다. 베드로 사도가 지식(앎)에 있어서, 절제의 미덕을 강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신심을'
'인내' 곧 '휘포모네'(hypomone)는 '아래에'(under)를 의미하는 전치사 '휘포'(hypo)와 '머물러 있다'(remain)라는 뜻의 동사 '메노'(meno)의 합성어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힘들고 어려운 상황 아래에서 피하지 않고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의 스토아 철학에서도 인내를 중요한 미덕으로 보나, 그들이 말하는 인내는 맹복적으로 운명을 감수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인내는 하느님의 약속에 대한 굳은 신앙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이것은 믿음을 지속하는 능력이며, 세상의 핍박과 시련에 저항하는 능력이다.
특히 본문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의 핍박과 시련에 당면하여 보여 주어야만 하는 미덕을 주지시킨다. 뿐만 아니라, 주님 재림에 대한 거짓 교사들의 교설에 의해(2 테살 2,3) 그 믿음이 흔들리며, 심지어 그리스도 신앙에서 떠나는 자들까지 있었으므로, 이것은 이들에게 더욱 역설되어야 할 덕목이었다.
특히 앞서 나온대로, 자기를 스스로 통제하는 절제력이 있다 하더라도, 이를 끝까지 유지시키는 인내가 없으면 결국 실망하고 절제력을 상실하기 쉬우므로, 베드로 사도는 절제에 뒤이어 인내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신심'(경건) 곧 '유세베이아'(yusebeia)는 이미 3절에서도 언급되어 있는데, 일반적으로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이신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으로, 그의 뜻 아래 겸손하게 복종하는 삶의 태도를 말한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우리 인간이 하느님께 대해 취해야 할 올바른 관계를 나타낸다.
인간은 하느님 대전에 자신을 낮추고, 오직 그의 뜻에 집중하여 그의 뜻을 실천하며 공경하고 살아야 한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자신이 하느님과 비기려고 하거나 하느님보다 높아지려 한다. 하느님과의 관계를 본래 궤도에서 철저히 이탈시켜 버리는 것이 경건치 않음의 증거인 것이다.
특히 참고 견디는 인내력이 강한 사람이 자신의 의지를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여, 하느님께 대하여 공경하는 자세를 취하지 않을 위험성이 있으므로, 베드로 사도는 인내에 뒤이어 신심(경건)을 강조하는 것이다.
'신심에 형제애를, 형제애에 사랑을'
'형제애' 에 해당하는 '필라델피안'(philadelphian)의 원형 '필라델피아'(philadelphia)는 '사랑'을 뜻하는 명사 '필리아'(philia)와 '형제'를 뜻하는 명사 '아델포스'(adelphos)가 합성된 단어로서, '형제에 대한 사랑'이란 의미이다.
여기서 '형제'에 해당하는 '아델포스'는 원래 '하나', '동일함'을 뜻하는 접두사 '아'(a)와 '자궁'을 의미하는 '델퓌스'(delphis)의 합성어에서 유래하며, 문자적으로는 한 어머니의 뱃속에서 나온 혈육을 의미하나 여기서는 그리스도안에서 한 믿음을 가진 지체를 가리킨다.(에페4,3)
베드로 사도가 하느님을 향한 덕목이라고 할 수 있는 '신심'(경건)에 뒤이어 '형제애'를 말하는 것은 '신심'에 지나치에 치중하여, 형제 사랑의 덕목을 무시하는 자들이 초대교회 당시에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믿음'으로 시작된 그리스도인의 덕목은 '사랑'으로 완성된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 곧 '아가페'(agape)는 친구들간의 '우정'을 뜻하는 '필리아'(philia)나 남녀간의 애정을 뜻하는 '에로스'(eros)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아가페'는 근본적으로 하느님께 그 기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우리들에게 보여주신 태도를 반영한다.
즉 '아가페'는 우리들의 인격에 의하여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라(인간적인 사랑) 하느님의 위격에 의하여 우러나오는 것이다.(신적인 사랑) 이 사랑은 사랑의 본체이신 하느님께서 독생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세상에 보여주신 것으로서 전적인 희생을 내포하며, 또한 하느님께서 우리 속에 이루시고자 하는 것이다.(로마5,5)
베드로 사도는 이 신적 사랑을 나타내는 '아가페'란 단어로, 5절부터 시작된 하느님의 본성(성품)에 참여한 자들이 맺어야 할 미덕의 열매들의 목록을 마감함으로써, 신도들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바로 하느님의 사랑을 본받는 것임을 알게한다.
[연중 제9주간 월요일] 오늘의 묵상 (정천 사도 요한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이 비유는 바로 앞 단락에서(지난 토요일 복음 참조) 예수님의 권한에 이의를 제기한 유다 지도자들에게 당신께서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들을 하시는지를 암시적으로 드러내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여,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정체를 계시하시면서 그들이 문제 삼은 권한을 실제로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자 하십니다.
포도밭을 일군 주인은 그 밭을 소작인들에게 맡기고 멀리 떠납니다.
여기서 포도밭은 이스라엘을, 포도밭 주인은 하느님을, 그리고 포도밭의 관리를 맡은 소작인들은 종교 지도자들을 가리킵니다.
주인은 자기 포도밭의 소출을 받아 오라고 종들을 보내는데,
이들은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하느님에게서 끊임없이 파견된 예언자들을 가리킵니다.
이 종들은 소출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매질이나 모욕을 당하기도 하고, 머리에 상처를 입기도 합니다.
심지어 어떤 종들은 죽임을 당하기까지 합니다.
이는 이스라엘에 파견된 많은 예언자가 겪어야 하였던 수난의 역사를 떠오르게 합니다.
“이제 주인에게는 오직 하나, 사랑하는 아들만 남았다.
그는 마지막으로 ‘내 아들이야 존중하여 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
이 구절은 예수님께서 당신 이전에 파견된 예언자들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존재이심을 드러냅니다.
주인이 파견하는 마지막 인물은 ‘종’이 아니라 ‘아들’로 표현됩니다. 그것도 ‘오직 하나, 사랑하는 아들’입니다.
어느 누구도 가져 본 적이 없는 하나뿐이고 독점적인 지위를 가지고 계신 분,
하느님과 유일하고도 가장 친밀한 관계를 맺으시는 분, 바로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오늘 복음을 들으며 예수님께서 어떤 분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셨는지를 더 깊이 묵상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가장 아끼고 사랑하시는 아드님을 우리에게 보내 주셨다면,
우리 또한 그토록 귀하신 분을 온 마음으로 기쁘게 맞이하고 정성껏 모시며 사랑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내 아들이야 존중하여 주겠지.’ 하는 하느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소작인들이 됩시다.
(정천 사도 요한 신부)
연중 제9주간 월요일 복음 (마르12,1-12)
너희는 이 성경 말씀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10~11)
예수님께서는 마르코 복음 12장 10~11절에서 시편 118장 22~23절을 인용하셔서 그것을 당신 자신에게 적용시켜 예언하신다.
원래 시편 118장 22~23절은 곤경 속에 있었던 다윗이 자신의 운명에 대해 노래한 것으로 추정된다. 자신이 버려진 돌과 같이 사람들의 멸시를 받지만, 하느님의 자애로 다시금 돌아와 영광을 회복하게 될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신약에서 '모퉁이의 머릿돌'에 해당하는 '케팔레 고니아스'(kephale gonias; the head of the corner; the capstone)은 줄곧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히브리 어법으로 사용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악한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를 마치시며, 당신 자신을 새로운 성소의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버린 돌이라고 말씀하신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지상의 성전보다 더 크시고 높으시다(마태12,6).
사도행전 4장 10절과 11절의 '버림을 받음'과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심'이 나타내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예언도 역시 시편 118장 22절에서 찾는다.
그리고 베드로1서 2장 7~8절은 시편 118장 22절을 이사야서 8장 14~15절과 관련시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머릿돌'이 아니라 '차여 넘어지게 하는 돌과 걸려 비틀리게 하는 바위'가 됨을 상기시킨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지 않는 사람들은 집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이 돌에 걸려 넘어진다.
한편 '내버린'에 해당하는 '아페도키마산'(apedokimasan; rejected)의 원형 '아포도키마조'(apodokimazo)는 '~로부터'라는 뜻의 전치사 '아포'(apo)와 '시험하다', '분별하다', '증명하다'라는 뜻을 지닌 '도키마조'(dokimazo)의 헙성어로서, '완전히 시험한 후에 버리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집짓는 이들(건축자들; the builders)과 포도밭의 소작인들로 비유된 산헤드린의 종교 지도자들은 나름대로 '예수님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 숙고하고 철저히 검증하며 시험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결론은 예수님을 제거하는 것이었고, 그러면 포도밭이 자신들의 것이 되는 줄 알았다.
그러면, 더 이상 자신들의 밥그릇을 빼앗기지 않고 이권을 유지하며(마르11,15참조), 종교적 위선을 숨기고 무지한 백성들을 마음대로 요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결국 포도밭 주인의 아들, 곧 예수님을 죽여 버렸다.
[연중 제9주간 월요일] 오늘의 묵상 (최정훈 바오로 신부)
오늘 독서와 복음은 우리를 당신께 이끄시고자 베풀어 주시는 주님의 배려를 묵상하게 합니다.
제1독서는 하느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생명과 신심에 필요한 모든 것을 내려 주셨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이 세상의 욕망에서 벗어나 하느님 본성에 참여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알맞게 배치하셨습니다.
믿음이 나 혼자의 선택과 결정인 것 같지만, 사실 하느님의 이끄심과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내가 받아들이고 선택하여야 하는 부분이 있는 것도 분명하지만, 그 믿음을 허락하시고 이끄시는 주도권은 하느님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당신을 계시하셨고, 또 우리 안에 당신 없이는 채워지지 않을 갈망도 주셨습니다.
복음은 악한 소작인들을 몇 번이고 참아 주는 선한 포도밭 주인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포도밭 주인은 소작인들이 올바른 선택을 하도록 몇 번이고 기회를 줍니다.
자신의 종을 여러 차례 보냈고, 마지막에 사랑하는 아들까지 보내면서 그들의 회개를 기다립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느님께 등을 돌려도,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회개하도록 갖은 애를 다 쓰고 계십니다.
당신 사람을 통해서, 특별한 상황과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당신께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우리는 언제나 자신의 믿음과 사랑이 부족함을 느끼고 그러한 자신에게 실망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이미 당신을 믿고 사랑할 수 있게 하셨고, 부족한 우리를 위하여 끊임없이 이끌어 주시고 기다리시는 분임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그러한 주님의 배려가 우리의 위로와 희망의 샘이 됩니다.
(최정훈 바오로 신부)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 영진 모세 신부
오늘 복음 말씀은, 마르코복음 12장 1절-12절,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입니다.
비유에 등장하는 포도밭 주인은 하느님, 소작인들은 유대인들, 종들은 하느님의 예언자들, 주인의 아들은 예수님입니다. 소작료는 충실한 신앙생활을 뜻합니다.
소작인들이 종들을 매질하거나 죽였다는 내용은 유대인들이 예언자들을 박해한 구약시대 역사를 가리킵니다.
소작인들이 주인의 아들을 죽였다는 내용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주인이 소작인들을 없애 버리고 포도밭을 다른 이들에게 줄 것이라는 말은, 유대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특권과 은총을 잃게 될 것이고, 그리스도교인들이 그 특권과 은총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예언이긴 하지만, 모든 것이 그렇게 되도록 정해져 있다는 뜻은 아니고, ‘회개하지 않으면’ 그렇게 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유대인들을 포함해서 ‘모든 사람’은 전부 다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왜 ‘소작인들’로 표현하셨을까?
아마도 유대인들의 신앙생활이 소작인들과 같았기 때문에 그것을 꾸짖고 비판하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소작인으로 삼으신 것은 아닙니다. 그들 자신들이 자녀로서 살지 않고 스스로 소작인으로서 살았습니다. 불충실한 소작인들로...)
소작인이라는 말에서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큰아들이 연상됩니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루카 15,29).”
아버지가 큰아들을 종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종이 되었습니다.
‘종처럼’이라는 말은 그가 사랑이 아니라 ‘억지로’ 일했음을 나타냅니다.
겉으로는 성실하게 일하는 것으로 보였겠지만, 마음속에 불평과 불만이 가득했으니 그것은 성실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의 우리도 그런 식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세례를 받을 때에는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났다고 기뻐하지만, 그 기쁨이 오래 지속되지 않고, 여러 가지 계명들과 규칙들을 부담스러워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사랑과 기쁨이 아니라 의무감과 부담감으로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하느님께 사랑을 드리는 자녀가 아니라 소작료를 바치는 소작인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그런 경우에 겉으로는 아무리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여도 그것은 성실한 것이 아닌 것이 되어버립니다.
사랑 없는 신앙생활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1코린 13장).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에 나오는 소작인들도 불성실한 자들입니다.
그들이 소작료를 받으러 온 주인의 종들을 매질하거나 죽인 것은 소작료를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즉 제대로 일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실하게 일해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주인에게 바칠 생각이 없다면, 그것은 ‘성실’이 아닙니다. 나쁜 ‘탐욕’입니다.)
(구약시대 사람들이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인 것은 죄 속에서 살고 있는 자신들의 ‘삶’을 바꾸기 싫었기 때문이고, 회개하라는 말이 듣기 싫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을 충실하게 하는 사람들은, 회개하라는 말을 들으면 더욱더 회개하려고 노력하는데,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회개하라는 말을 듣기 싫어합니다.)
포도밭 주인이 아들을 보낸 것은 소작인들을 처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설득하고 타이르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요한 3,17).
비유에서는 소작인들이 주인의 아들을 알아본 것으로 되어 있는데,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어떻든 그들이 하느님의 아드님을 죽인 것은 사실입니다.
또 비유에서는 소작인들이 포도밭을 차지하려고 주인의 아들을 죽인 것으로 되어 있는데,
유대인들은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충성한다는 생각으로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그래도 결과적으로는 하느님께 반역을 한 것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만일에 이 비유가 ‘유대인들에게만’ 말씀하신 비유라면, 오늘날의 우리가 심각하게 읽고 묵상할 필요가 없습니다. (처음부터 복음서에 기록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이 비유는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지금 자녀로서 기쁨으로, 또 사랑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
아니면 소작인으로서 억지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
또는 하느님께 뭔가를 바칠 때 참으로 기뻐하면서 바치는가? 아니면 아까워하면서 바치는가?
사실 우리가 하느님께 바치는 모든 것은 원래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 가운데 일부를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만일에 ‘나의 것’을 바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크게 착각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잘났든지 못났든지 간에, 우리가 일을 잘하든지 못하든지 간에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여인이 자기의 젖먹이를 어찌 잊으랴! 자기가 낳은 아이를 어찌 가엾게 여기지 않으랴!
어미는 혹시 잊을지 몰라도 나는 결코 너를 잊지 아니하리라(이사 49,15.공동번역).”
따라서 우리가 자녀로서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는가?
아니면 소작인으로 전락해서 그 나라에 못 들어가는가? 는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2026년 06월 01일 월요일
[연중 제9주간 월요일]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기 시작하십니다.
그 대상은 군중이 아니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입니다.
한 사람이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두르고 즙 짜는 틀과 망대까지 마련합니다.
이 포도밭은 이사야 예언자가 노래한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이사 5,2 참조).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포도밭을 소작인들에게 맡기시고 떠나신다는 설정은, 인간에게 주어진 책임의 시간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침묵은 인간이 자유롭게 충실하거나 자유롭게 배반할 수 있는 시간을 열어 놓습니다.
때가 되자 주인은 종을 보내 열매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소작인들은 종을 때리고 모욕하며, 죽이기까지 합니다.
이는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예언자들이 겪었던 고통을 고스란히 보여 줍니다. 마침내 주인은 “사랑하는 아들”(마르 12,6)을 보냅니다.
이 아들은 단순한 사자가 아니라 주인의 마음이며, 하느님의 ‘사랑하는 아들’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언자들이 걸었던 고통의 길 한가운데에서 함께하십니다.
그러나 소작인들은 그를 상속자로 여겨 말합니다.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자”(12,7).
그들의 말은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을 죽이려 하였던 요셉의 형제들이 한 말과 비슷합니다(37,20 참조).
질투는 같은 말을 되풀이하게 합니다. 소작인들은 결국 ‘사랑하는 아들’마저 죽이고는 포도밭 밖으로 던져 버립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성 밖에서 십자가에 달리실 사건을 미리 보여 줍니다.
결국 주인은 그들을 심판하고 포도밭을 다른 이들에게 맡길 것입니다. 포도밭은 파괴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사라지지 않고, 그곳을 맡은 이들이 바뀔 뿐입니다.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마르 12,10).
인간의 교만과 욕심으로 내치고 버린 존재가 하느님의 구원 계획안에서 중심이 됩니다.
십자가는 버림받음이지만, 그 버림받은 자리에서 부활이 이루어집니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12,11).
그 놀라움은 눈부신 승리라기보다, 상처 난 자리에서 조용히 피어나는 생명처럼 우리 안에 흔적으로 남습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사람 나고 돈 났다고?
살아가면서 많은 재물은 아니라 하더라도 재물은 꼭 필요합니다. 재물이 없으면 위축되고 또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할뿐더러 해야 할 것도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실 재물이 없어서 사람구실을 제대로 못한다고 하는 분도 계십니다.
반면에 ‘돈만 있으면 처녀 불알도 산다’고 합니다. 돈만 있으면 못할 일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기본적인 생계를 유지하고 품위를 지킬 수 있는 재물은 소유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재물보다 사람이 먼저 입니다. 그것을 알면서도 재물에 눈이 어두워서 그리고 재물을 담보 삼아 사람을 무시하는 경우가 너무도 많습니다.
“어진 사람은 재물로 몸을 일으키고 어질지 못한 사람은 몸으로 재물을 일으킨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사실 사람을 위해 재물을 사용하던 사람들이 재물을 위해 사람을 죽이게 되면 그 세상은 끝장난 세상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벌어졌고 또 지금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요즘 한 재벌가족들이 줄줄이 검찰 조사를 받고 있는 것을 보면 안타까움이 큽니다.
어떤 포도밭 주인이 밭을 일구어 소작인에게 주고 멀리 떠났다가 포도 철이 되자 종을 보내어 포도밭 소출의 얼마를 받아 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소작인들은 주인이 보낸 종을 매질하고, 어떤 종은 죽이고 결국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보낸 주인의 아들까지 죽였습니다.
그리고는 상속자가 죽었으니 그 포도밭이 자기들 것이 되려니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니 포도밭 주인이 돌아오면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분명 그 주인은 상응하는 배상을 요구하고 포도밭을 다른 이에게 넘겨줄 것입니다.
여기서 주인은 하느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자비와 은총의 신이고 사랑과 진실이 넘치는 신, 분노에 더디시고 항구하게 사랑하시며 신의를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자비하신 하느님의 뜻을 잘 헤아리고 현명하게 대처해야 합니다. 만약 종을 몇 차례 보내고 아들까지 보내며 기다려 주는데도 불구하고 구태의연하게 행동하면 결국은 파국을 맞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끝없이 인내하시며 변덕스러운 우리들을 참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반대하는 이들조차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포기하는 이는 우리 자신입니다.
받은 은총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면 잃어버립니다. 하느님께서 거두어 가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잃는 것입니다. 잃어 놓고는 하느님을 야속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소작인이라면 포도밭을 맡겨 준 주인에게 감사하고 최선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야말로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 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루카17,10).하고 말해야 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받은 은혜가 얼마나 많습니까? 또 지금도 여전히 베풀어 주시고 계신데 전혀 아닌 것처럼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베풀어 주신 은혜에 걸 맞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먼저 해야 할 일은 감사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을 감사하면 감사하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사람 나고 돈 났다.’ 고 말하면서도 ‘돈 나고 사람 난’ 것처럼 살아가는 것이 현실입니다. 하느님을 내 삶의 첫 자리에 모셔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우리 삶의 구심점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반영억라파엘신부